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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항해(1)
- 특별한 휴가
김동규
특별한 휴가였다. 낯선 세계를 여행한 듯한 색다른 체험이었다. 오체투지에 버금가는 오묘한 경험이었다. 나는 지난 5월 중 3주간 일정으로 20여 년 근속한 직장을 떠나 도시를 벗어나 심신 요양을 다녀왔다. 휴가지는 거제시 하청면 유계리에 소재한 샬롬수양원.
내가 때 이른 휴가를 수양원으로 선택한 것은 부득이한 이유가 있다. 5년 전 초여름에 직장암 수술 이후 그간 투병생활과 직장 일을 병행해 왔는데, 1년 전부터 몸에 이상이 다시 발견됨에 따라 뭔가 새로운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서부터다. 수술 이후 4년여 이상 소견이 없다가 꼭 1년 전에 폐에 전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병원의 처방대로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말로만 듣던 항암주사는 참으로 괴로웠다. 2리터에 상당하는 주사액을 무려 5~6시간에 걸쳐 논스톱으로 맞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주사 뒤에 항암약을 보름동안이나 복용해야 하는 일이 정말 고역이었다. 음식냄새만 맡아도 구토가 나고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실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4주 간격으로 세 차례에 걸친 항암주사 치료를 이겨냈다. 중병의 치료는 의사와 환자가 소위 손발이 맞아야 효과가 높다는 평범한 논리를 수용하고 싶었다. 병원이 아니고는 아무데도 기댈 데가 없는 나는 그것이 ‘진리’이기를 바랐다.
3개월에 걸친 일차 주사 치료 이후 촬영한 CT 결과는 다소 위안이 되었다. 암세포가 거의 변화 없이 정체해 있었다. 주치의와 의료진은 항암치료를 했기 때문에 그나마 세포의 성장이 멈추고 숨을 죽이고 있다면서 계속 치료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손발 저림 등 항암주사에 대한 부작용과 수술 이후 누적된 치료에 대한 반감으로 병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병원이 무서워졌다. 특별한 대체 수단을 확보하지도 않으면서도 병원의 처방에 반신반의 했다. 그러면서 6개월이 지났다. 폐에 전이 소견이 초인된 이후 1년이 지났다.
지난 1년 새 내 몸의 변화를 확인하고 싶었다. 대학병원에서 씨티를 예약하고 촬영 날짜에 검사대에 올랐다. 마치 항해사 면허시험 합격자 발표를 보는 마음이기도 하고, 몇 초 뒤에 의식만 살아있는, 전신마취 수술대에 누웠을 때의 기분이었다. 씨티 검사대에 누울 때마다 방사능에 이렇게 자주 노출돼도 괜찮은가, 의문이 들었다. 연중 서너 차례, 그것도 한 번 찍을 때마다 복부, 골반, 가슴 때론 전신촬영(PET-CT)까지 해댔으니 나는 아마 정상인보다 체내에 흡수된 방사능 수치가 수십 배는 더 될지도 모른다. 비유하자면, 부산 사람이 후쿠시마 원전 참사 후유증을 앓는 경우와 다름없다 할 것이다.
씨티 결과는 참담했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좁쌀만한 암세포들은 미세하게나마 성장해 있었다. 내 몸은 내가 살아가는 환경보다 암세포가 적응하는 환경이 더 좋았던가 보다. 나의 투병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생활습관 때문인가, 식습관이 이유인가. 아니면 나의 사고와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가. 병원은 또다시 항암치료를 권유했다. 암세포의 성장을 막고 억제하려면 곧바로 치료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냉철하게 고민하고 연구했다. 일단 병원의 처방을 수용하기로 했다. 나는 그 새 1차 항암치료의 고통을 잊고 있었다. 마치 히말라야의 설산에 사는 한고조(寒苦鳥)가 밤새 살을 에는 추위에 떨면서도 날이 새는 내일은 둥지를 꼭 지어야지, 다짐해놓고서는 정작 찬란한 해가 떠올라서 따스한 햇살이 설원을 덥힐 때면 집은 지어서 무엇 하리, 했다는 우화같은 전설처럼.
2차 항암주사는 1년 전의 1차보다 단위가 높은 치료였다. 보험료 때문이지만, 주사의 성분도 달랐다. 주사가 나에게 맞는지 아닌지 환자가 검증할 수 없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병원의 처방을 별수 없이 맹신해야만 하는 풍토에도 문제가 없는지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사를 맞을 때는 1차와 별반 차이를 못 느꼈는데, 문제는 귀가한 뒤부터 시작됐다. 체중은 발병 전보다 10kg이 빠져 있는데다 며칠 새 4~5kg이나 더 빠져 체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연 사흘을 기진맥진 상태로 누워 지냈다. 그 뒤로 꼬박 일주일을 음식 한 번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기아 직전의 상태로 나는 나락으로 내려앉았다.
일주일 만에 구미에 당기는 음식을 먹었으나 설사를 하고 말았다. 체력저하로 소화력이 거의 상실한 상태였으리라.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그저 죽은 듯 있어야만 했다. 식사 때가 가까워지면 평소 즐기던 보양식인 남원추어탕이 생각나거나, 영양돌솥밥이 미각을 자극하고 때론 용호동 음식기업과 같은 대형 맛집에서 맛깔스럽게 차려 내던 비빔냉면도 간절했다. 미식가인 양 식도락를 즐기며 맛난 음식, 좋은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은 것이 병을 불러들인 건 아닌지 자문해 보곤 한다.
거듭된 항암치료에 나는 반항했다. 힘겨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나와도 업무에 집중할 수도 없고, 앉아 있는 것마저 불안했다. 천직 같던 일도 싫어지고, 사람 만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이제 전향적인 자세가 절실했다. 항암치료는 도저히 내가 살기 위한 치료가 못 된다는 생각에 미치자 다른 선택의 길이 새로 열렸다. 순간 나를 무의식적으로 호출한 사람이 친구, 정성열이었다. 거제 장목면 출신의 성열이는 대학 동기 동창으로 일찍이 1급 선장 면허를 취득하고 누구보다 먼저 대형유조선 선장이 된 탁월한 해기사(海技士)였다.
항해 중에는 갖은 고초를 극복해 냈다. 포성과 자욱한 포염이 끊이지 않는 중동해역에서도 그는 예언 같은 선견지명의 기지를 발휘하여 살아서 돌아왔다. 삼십 대 초반의 전도유망한 그는 부인과 가족의 반대로 짧은 해상생활을 마치고 배를 내렸다. 그러나 뭍의 생활은 그의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육상의 해운회사에도 근무했고 선박윤활유 사업도 해보았으나 번번이 중도 하차하거나 실패하고 말아 친구의 갈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긴 방황, 큰 절망의 연속이었다. 기어이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 즈음 그를 붙잡아 세운 것이 ‘믿음’이었다.
친구에게 믿음은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탈출구이자 터닝 포인트였다. 기독교와의 진정한 만남은 그를 새로운 삶으로 안내했다. 그 이후 그와 나는 오랫동안 일 년에 한번 만날동말동 소원해 있었다. 십여 년이 흘렀다. 풍문으로 이혼사실도 확인하고,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한국 미국 중국으로 왕래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6년 전에는 희귀 암으로 곤경에 빠져 있었는데, 구세주 같은 새 부인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큰 변화를 갖게 되었다. 새 부인은 친구가 칠년간을 기도 끝에 만난 숙명 같은 만남이요 결합이었다. 만나기 6개월 전에 남편과 사별한 부인은 미국에서 20여 년을 살면서 독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여 이른바 ‘거듭나는’ 수준에까지 오른 참 신앙인이었다.
드라마 보다 더 극적으로 만난 부부는 성령(聖靈)으로 하나가 되었다. 친구는 부인의 내조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갔다. 부인을 만나기 전의 믿음은 그저 무늬만 신앙인일 뿐이었다. 부인을 통해서 미국의 인터넷방송 선교사업체 ‘생애의 빛’과 강병국 대표 목사를 만나게 되면서 친구의 신앙생활이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부부의 삶은 기도에서 시작되고 기도로부터 나왔다.
친구는 성경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우선 공부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이 급선무인데, 그것도 기도로 연이 닿았다. 두 사람이 부산에서의 짧은 신혼생활 이후 생활무대는 강원도 평창의 오지로 옮기게 된다. 물론 지인의 도움으로 인도된 아늑한 집이었다. 해발 칠백 미터 고지엔 민가도 없고 인적도 드문 산골에서 꼬박 4년을 성경공부에 매진했다. 무일푼 맨손으로 들어간 산골에서의 일상은 모두가 기도의 연속이었고, 생활과 편의도 모두 기도로 해결하고 조달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창부수’라는 말이 이 부부의 사례 같기도 하고, 그 성어(成語)가 왜 생겨났는지 알만도 했다.
친구 부부는 평창에서의 오랜 기도 생활에서 많은 깨달음을 경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체험했다. 간증 사례만 해도 노트 1권 분량으로 빼곡이 기록돼 있다. 친구의 간증을 들을 땐 신기했다. 양식이 떨어져 기도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식량이 조달됐고, 생활비가 바닥나 정성을 모아 기도하니 어디선가 때맞춰 계좌번호를 불러달라는 전화가 왔다. 부부의 삶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셨고, 그들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무신론자였던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은둔생활(?)과 간증 사례를 의심하거나 부정할 수 없었다. 간증 사례 하나만 더 들어보자.
어느 날 평창의 산동네로 친구의 장모가 찾아왔다. 맏딸이 남편과 사별한지 반 년 만에 재혼하여 산다는 곳에 첫걸음을 하셨다. 딸의 살림살이가 하도 초라해서, "기도하면 모든 것 다 들어준다면서 사는 게 이게 뭐니?" 라며 딸을 나무라며 몰아붙였다. 독실한 불자인 친정어머니는 딸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어머니는 가재 하나 제대로 갖춰 놓지 못한 딸이 못내 안타까워 제안한다.
"내가 너한테 냉장고, 세탁기, 가스레인지 만큼은 꼭 해 주고 싶은데, 당장 돈이 없구나, 어떡하면 좋니?"
"그럼, 엄마가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은 엄마의 기도도 들어주실 거예요"
"아니, 그러면 네가 내 대신에 기도 좀 해 보렴! 오백 만원만 조달하면 나중에 내가 갚을게."
친정어머니의 부탁에 친구 부인은 간절히 기도했다. 그간 기도하는 딸을 반신반의하던 어머니에게 진정 기도의 힘을, 하나님의 힘과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산골에서 갑자기 돈이 어디서 나오나, 막막하기는 했다.
이틀 후 친구가 고향 후배의 부름을 받고 외출했을 때 실로 놀라운 경험을 했다. 친구를 평소 은인으로 생각해온 고향 후배는 그의 사정을 알고 있는지라, "형님, 생활에 보태 쓰세요"라며 봉투 하나를 내밀어 펼쳐보니, 5백만 원짜리 수표가 딱 한 장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1백만 원도 2백만 원도 아닌 꼭 5백만 원이었다는 데 대해 친구도 부인도 장모도 모두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친구 부부가 거제도에 내려온 것은 6개월 전이었다. 마침 고향, 거제도에 좋은 거처가 있다는 대학 후배의 요청으로, 마침내 평창 4년의 기도 생활을 정리하고 하산했다. 거제의 집은 대학 후배가 별장으로 지어 쓰다가 직장이 옮겨지면서 비게 되자 친구에게 무료 임대한 것이다. 해기사 출신의 대학동문이자 고향 후배는 카페리 여객선 사업으로 돈을 벌자 고향인 거제에 별장을 지어 살다가 모교인 목포해양대학교 교수로 발탁, 채용됨에 따라 빈 집을 멀리 평창 오지에서 살고 있는 친구 부부에게 내놓게 된 것이다. 거제 앵산 자락에 배산임수의 지기를 받고 있는 별장은 당초 후배의 개인 연구소로 지었는데, 마치 사설미술관 같은 독특한 설계와 구조미학을 갖춘, 시가 20억 상당의 3층 현대식 고급 건축물이다. 후배가 집을 지어 놓고 나에게 일차 놀러오라는 말을 들었던 그 집이다.
거제시 하청면 유계리 449-1번지. 친구 부부는 이런 집을 만난 것도, 평창에서 고향으로 귀향한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강원도 평창이 부인의 고향(동해시)과 가깝다면, 거제는 바로 친구의 고향이 아닌가. 부부는 이곳 유계리에서 선교봉사 사업을 펼치기로 다짐했다. 그것은 부부의 소망이자 숙원이었다. 병약자들에게는 휴식과 치유의 공간이 되고, 부부에게는 하나님의 사업에 동역자가 되는 길이다. 힐링 센터가 된 새 공간을 놓고 붙인 이름이 거제 '샬롬수양원'이다.
내가 친구에게 노크했을 때 그는 이미 수양원을 운영한 지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부부(원장 정성열 선교사, 김연희 집사)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그간 20여 명이 3주간의 수양원 프로그램을 이수하여 지병이 낳거나 새로운 삶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친구가 거제에 내려와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그에게 나의 투병생활과 최근의 사정을 고백했다.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평범한 어조로 나에게 위로의 말을 들려주었다. "친구야, 전혀 걱정하지 마라, 병원 치료로는 안 된다. 네가 갈 길이 있으니까, 기다려라. 내가 너의 집으로 데리러 갈게" 부산에서 거제까진 거가대교가 뚫려 한 시간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라, 나 혼자서 찾아가 볼 테니 올 거 없다고 해도 그는 막무가내 환자가 어딜 차를 몰고 다니느냐고 나무란다.
약속한 일요일 정오, 나는 친구 부부와 나의 집에서 첫 상면을 했다. 나는 그간의 투병과정을 이야기했고, 친구 부부는 수양원의 성격과 운영에 대해 소개해 주고 3일 후에 데리러 오겠다며 되돌아갔다. 친구는 나에게 우선 하는 일을 중단하고, 자연치유에 전념하자며 수양원으로 가자고 권유했다. 나는 그간 직장 일을 정리하기로 했다. 수양원 프로그램 일정에 맞춰 직장 일을 조정하고 기다렸다.
5월 OO일(일) 친구가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그로부터 이미 수양원의 일상과 성격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뭔가 내 스스로 다짐을 하고 싶었다. 친구가 차 시동을 걸었다. 출발을 잠깐 저지했다.
“친구, 내가 집을 떠나기 전에 나에게 할 말이 없는가? 건강을 회복하고 씩씩하게 돌아오기 위해서 내가 가져야 할 각오나 나에게 다짐을 받을게 없는가?”
“그래, 고맙네. 이미 이야기 했듯이 자네한테는 병원치료 보다는 자연치료가 더 적절하겠네. 수양원에서 일정 기간 금식을 하고 난 뒤에 자연식단으로 보식과 식습관을 유지해 가고, 동시에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면서, 믿음의 생활과 건강 원칙을 지켜 가면 서서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네. 먹고사는 것, 가정, 자녀 문제, 미래 등 일체 걱정 말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보세. 우리 부부가 자네의 건강 회복을 위해 기도할게”
친구는 나의 질문에 다소 의아한 듯, 소상하게 설명을 하고 안심을 시켜 줬다. 그리고 거제를 향하여 부산을 출발했다.
내가 믿음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그동안 믿음에 대한 숱한 질문과 조언을 들어왔다. 유혹이나 회유에 가까울 정도로 수많은 도전과 저항을 받아왔다. 뭇 사람들은 왜 그리도 나에게 믿음을 강조하고 권유했을까,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때로는 유혹의 집착이 하도 강해 의식적으로 피한 경우도 없지 않다. 개중에는 나에게 참으로 우호적이고, 진솔하게 권유해 온 경우도 더러 있었다. 대학의 선후배와 친구, 해양사회 오피니언 그룹의 인사들, 친지 이웃들까지……. 모두 다 고맙고 소중한 지인들이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유혹과 인연들을 뿌리치고 나자, 내가 필요에 의해 손을 벌려 잡은 손이 바로 친구 성열이다.
거제 샬롬수양원에 안착했다. 사진으로 보고 말로 듣던 대로 아름다운 고급 별장이다. 친구 부부와 마주 앉아 수양원 생활에 대해 안내를 받고, 방을 배정받아 짐을 풀었다. 수양원 프로그램의 핵심은 3주간의 일정으로, 성경공부와 금식 및 식단 개선 등으로 자연치유를 골간으로 하는 ‘건강 및 의식 혁신’ 프로그램이다. 강사는 친구, 정성열 선교사이고, 식단 및 금식 담당은 부인 김연희 집사이다. 김 집사는 지난 20여 년간 미국에서 살며 성경을 기초로 한 요양식 개발과 연구로 요양 환자들을 오랫동안 돌봐 왔으며, 개개인에게 맞는 맞춤형 음식 개발과 배식으로 '음식 디자이너' 수준에 이른 베테랑이다. 프로그램은 하루 네 차례 기도와 성경공부 등으로 짜여져 있는데 시간별로 보면, △아침 7시-아침기도와 성경공부, △오전 11시-이상구 박사/뉴 스타트 영상 강의, △오후 4시- 성경공부, △오후 7시- 저녁기도 및 성경공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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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처녀항해(1) - 특별한 휴가 /김동규 (샬롬 수양원) |작성자 항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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