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 05 / by. 얼음 빙수/
도경수가 국어에 매달리는 이유는 명확했다.
문학에는 정답이 없다.
서술형 1. 다음 시에서 호명(명명)의 의미에 대해 서술하시오. (5.0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화자는 ‘호명(명명)’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름 불리지 않은 존재는 부정당해 마땅한가요. 누가 불러주는 그깟 이름이 대체 뭐라고!
실존의 가치는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는 하나의 몸짓처럼 이름만으로 정의할 수 없고, 상식선에서 규정짓지도 못하는 날 것 그대로의 상태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웠을지 모릅니다.
불러 달라고 한 적도 없건만 임의대로 부르고 인식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꽃으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는 독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시에서 호명의 의미는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도경수의 기말고사 국어 서술형 답안지가 찬란했다.
“경수야 네 답은 항상 백 점이야.”
문학 선생님이 말했다.
도경수의 국어점수는 41.2점 이었다.
/식물인간/ 05/ by. 얼음빙수/
도경수는 오늘도 어김없이 1등으로 교실에 들어섰다.
도경수는 제 자리에 앉아 A4 용지를 만지작댔다.
흰 종이 위에 향기 나는 미피펜으로 쓴 벚꽃색 글씨가 정갈했다.
벚꽃에게
실은 열아홉이 되지 못한 민윤기에게 쓰는 편지였다.
교복만 봐도 떠오르는 이름
민윤기
수학여행
열여덟
고마워
도경수와 민윤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도경수와 민윤기는 수학여행 가는 날 처음으로 대화를 해봤다.
“도경수.”
“왜”
“교복 입은 김에 같이 다닐래?”
“.......”
“싫음 말고.”
“저기 쟤는? 쟤도 교복 입었잖아.”
“그럼 우지호도 같이.”
/식물인간/ 05 / by. 얼음빙수/
사복을 입은 학생들 사이에서 교복을 입은
도경수, 민윤기, 우지호는 특별해 보였다.
특별한 셋은 수학여행 일정 내내 단짝처럼 붙어 다녔다.
“분명히 후회한다니까. 두고 봐.
일 년만 지나도 지 사진 제대로 못 볼 새끼 여럿 있어. 지금.”
“나는 수학여행 때 입으려고 아껴놓은 게 있었는데 수학여행이 오늘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 빤스 한 장도 없는데 어떡함? 일단 니 거라도 내놔.”
“그럼 네 가방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데?”
“있어, 존나 소중한 거. 민윤기 넌 알지?”
“집에서 키우는 햄스터라도 데려왔니?”
“너 내가 햄스터 키우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 이 햄토리 새끼야.”
우지호의 가방 속에는 공책 한 권과 몽당연필과 햄버거 껍질이 들어있었다.
“많이 썼냐?”
“어. 요즘 새벽에 깨있어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거든.
내가 써놓고도 이~걸? 내~가? 했다!”
우지호가 신이 났다.
“ㅋㅋㅋㅋㅋㅋ 미친놈아. 도경수 궁금해하잖아.
빨리 얘한테도 말해줘.”
“안 궁금해.”
“참나 자존심 부리네. 야 햄톨아 봐봐. 내 보물 2호야. 가사노트. 내가 그, 랩을 하거든? 시작한 진 얼마 안 됐어. 1년 좀 안 됐나 아무튼. 이게 요즘 날 숨 쉬게 하고 눈 뜨게 하는 원동력이야. 아무리 졸려도 가사 쓰고 싶어서 저절로 눈이 떠진다니까? 신기하지!”
“그렇게 좋아하는 건데 왜 보물 2호야?”
“더 좋아하는 게 나타날까 봐. 그런데 지금은 이게 최고야!”
좋아죽는 우지호를 보니 도경수도 덩달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럴 거면 그냥 최고라고 하지 마.”
도경수는 마음이 너무 벅찬 나머지 아무 말이나 내뱉고 말았다.
“뭐야, 갑자기. 니가 뭔데!”
“경수.”
“아냐, 너 햄토리야. 햄토리 닮았으니까.”
“아니야.”
“맞아, 너 내가 우리 집에 데리고 갈 거야.”
“아니야!”
우지호는 기껏 비밀같이 감추던 가사노트를 보여줬더니 시비나 거는 도경수를 무자비하게 놀렸다.
“야야. 여기서 사진이나 한 방 찍자. 팔 제일 긴 새끼가 찍어.
도경수는 탈락.”
“딱 붙어. 이 쥐새끼 같은 놈들아!”
우지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일회용 카메라를 들었다.
카메라 앵글 속 세 명의 인물이 눈부시게 웃었다.
그날에 찍은 사진을 오늘의 도경수가 들여다본다.
그깟 수학여행이 뭐라고
고작 수학여행 때문에
도경수에게 제주도는 한라봉도 돌하르방도 아닌
우지호 민윤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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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기와야?”
‘왜, 인마.’
“뭐지?”
‘뭐긴 뭐야. 네 반려기와지.’
“아니... 아니야!”
도경수는 자신이 드디어 미쳐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기와가 말을 하다니
그럴 리가 없지.
도경수가 드디어
드디어 미쳤구나.
‘왜 이래?’
기와가 도경수를 비웃었다.
“기와야, 내가 미쳤나 보다. 진짜로.”
‘나 그냥 기와 아니야.’
“기와가......”
‘민윤기야.’
도경수는 기와를 격파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와, 도경수....... 그동안 내가 네 얘기 다 들어줬는데
섭섭하게 이러기냐.’
“어떻게....... 네가 어떻게.......”
‘경수야, 벚꽃 같은 글은 썼어?’
그놈의 벚꽃
도경수는 진짜로 벚꽃 같은 글을 썼다.
벚꽃처럼 꿈꾼 것처럼 불꽃처럼 찰나를 살다 간
민윤기에게 바치는 추모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