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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아노>에 나타난 삶의 메타포(metaphor)에 대한 이해
제출자: 박동근(푸름이) 20068149
A. 영화 <피아노>에 대한 시놉시스
1. 피아노의 영화사적 의의 이한상, 『영화, 헤쳐모여』(서울 푸른나무: 1996. 1.), 301-04.
1933년, 세계 최고의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칸영화제에서 뉴질랜드의 신예 여성 감독, 제인 캠피온(Jane Campion)은 그녀의 장편<피아노>가 영예의 대상을 차지함으로서 칸느가 인정한 최초의 여성 영화작가가 되었다. 그녀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일관되게 흐르는 하나의 물줄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극복해 나가는 의지의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주제의식 때문에 칸느는 그녀에게 황금종려상으로 보답했고, 시네아티스트라는 명예를 준 것이다.
이 영화의 주요 캐스트는 아다(Ada McGrath)역을 맡은 홀리 헌터(Holly Hunter), 베인스(George Baines)역을 맡은 하비 케이틀 (Harvey Keitel), 아다의 남편 스튜어트(Alisdair Stewart)역을 맡은 샘 닐(Sam Neill), 아다의 딸 플로라(Flora McGrath)역을 맡은 안나 파킨(Anna Paquin)이며, 이 영화는 1993년(호주/ 뉴질랜드)에서 제작된 로맨스 드라마 장르에 속한다.
제인 캠피온은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여성의 자아정체성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며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인류학 전공자답게 그런 문제를 <피아노>에서 보듯 인류학적 시각으로 그 뿌리를 살펴보고 있기도 하다. 또한 미술을 전공하여 화면 또한 아름답게 구성해내는 솜씨를 보여준다.
여성(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얽어매는 사회적(가정적) 요소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것은 이 영화의 배경인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존재해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것이 사회적 통념이나 관습이든,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개인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이든, 그러한 굴레로부터 벗어나려는 여성(인간)의 의지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 대한 의지는 새로운 변화와 희망을 준다. 개인을 억압하는 권위적인 구조나 체제에 대하여 대항하고 부단히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으려는 노력이 여성감독의 영화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특징이다.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한층 포괄적인 내용과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가 바로 <피아노>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영화 <피아노>는 평범한 일상적 이야기를 상징과 메타포의 사용으로 평범하지 않게 보여주는,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정 처리와 제인 캠피온의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최초의 원시림을 간직한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그 위에 펼쳐지는 마이클 니만의 서정적인 피아노 멜로디는 금상첨화이다. 그리고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홀리 헌터의 절제된 연기와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듯하면서도 물 흐르듯이 잔잔히 움직이는 카메라 등은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2. 영화<피아노>의 줄거리
19세기 말, 원시림이 무성한 미개척의 땅 뉴질랜드,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광활한 해변 가에 피아노 한대와 두 모녀가 내려진다. 20대의 미혼모 주인공 아다(Ada McGrath)는 자신의 아홉 살 난 딸 플로라(Flora McGrath)를 데리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낯선 땅에 도착한 것이다.
아다는 여섯 살 때부터 알지 못하는 이유로 침묵을 선택한 채 말을 잃어버린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피아노와 딸 뿐이다. 바닷바람과 파도 치는 해변에서 하룻밤을 보낸 두 모녀 앞에 남편이 될 스튜어트가 나타난다. 그는 너무 무겁다는 이유로 피아노를 해변 가에 버려두고 앞장을 선다. 스튜어트를 원망어린 눈으로 보는 아다, 그녀는 처음부터 그에게서 벽을 느낀다.
스튜어트의 관심은 자신의 땅을 넓히고 경계의 말뚝을 박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스튜어트가 일에만 매달려 있는 동안 아다는 나무식탁 위에 피아노 건반을 만들고 딸과 함께 마음속의 연주를 한다. 이를 본 스튜어트는 아다가 벙어리일 뿐만 아니라 정신병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까지 한다. 스튜어트는 강제로 나무 건반마저 치지 못하게 하고 아다는 괴로움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다는 이웃에 사는 남편의 친구인 베인스을 찾아가 해변가의 피아노를 옮겨 줄 것을 부탁한다. 글조차 모르고 원주민 마오리 족과 일체가 되어 살아가는 베인스는 얼굴에 모코(마오리 족 사회에서 그 사람의 지위와 영적인 힘을 상징하는 문신)까지 새긴 유럽 이주민이다. 피아노를 옮기기 위해 아다와 함께 해변 가에 간 베인스는 그녀의 열정적인 연주 속에서 그녀가 간직한 고독과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베인스는 스튜어트에게 자신의 땅과 피아노를 바꾸자고 제안하고 스튜어트는 흔쾌히 승낙한다. 그리고 베인스는 자신이 피아노를 배울 수 있을 동안만이라도 아다로부터 레슨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간청한다. 피아노를 치지 못함으로써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는 아다를 위해서도 좋겠다고 생각한 스튜어트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아다는 가다렸다는 듯이 레슨 날만 되면 베인스의 집으로 달려가 분출하지 못한 침묵의 언어와 심연 속에 갇힌 영혼을 피아노 건반 위에 토해낸다. 베인스는 아다에게 점점 빠져들고 그녀를 곁에 두기 위해 협상을 한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어떠한 행동이든 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면 피아노를 주겠다고. 아다는 피아노를 다시 갖겠다는 일념으로 협상을 받아들인다. 베인스는 아다의 연주를 감상하면서 그녀의 영혼과 육체 모두를 사랑하게 되고 아다는 자신의 연주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베인스에게서 진실된 사랑을 발견한다. 베인스는 자신의 전부를 대하듯 옷을 벗어 피아노 위의 먼지를 닦아내고 이 모습을 본 아다는 자신의 내부 깊숙이 묻어 두었던 생애 처음인 사랑의 열정을 조심스레 꺼내 보인다.
아다의 불륜과 배신을 참지 못한 스튜어트는 아다의 손가락을 도끼로 자르고, 아다는 사랑하는 딸과 베인스와 함께 미지의 땅을 떠난다. 아다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구속해 온 굴레이자, 자신의 분신인 피아노를 바다 속에 던져 버린다. 이와 동시에 피아노에 묶인 밧줄에 발목이 감기어 그녀도 피아노와 함께 바다 속으로 빠진다. 고요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던 아다가 죽음을 앞에 둔 순간 삶에 대한 애착이 솟구쳐 오르면서 겨우 밧줄을 풀고서 정신없이 침묵의 바다를 헤치며 수면으로 올라온다.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피아노로부터 새롭게 잉태하는 순간이다. 수중을 뚫고 나오려는 그녀의 안간힘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B. 영화<피아노>를 다양한 시각으로 읽기
1. 프로이드적 읽기 [김상준. 『프로이트와 영화를 본다면』(서울: 북앤드, 2000. 1.), 22-36.]
이 영화의 각 배역을 자아, 초자아, 이드의 역할과 대비하여 구조모델에 적용하여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그 성질이 매우 역동적이고 폭발적인 잠재력을 갖고 있는 ‘이드’는 영화 속에서 무생물인 피아노로 이해할 수 있다.
피아노는 아다의 억압되었던 본능이 살아나는 정도를 연주되는 건반의 숫자가 증가되는 것으로써 표현하고 있으며, 그녀의 본능이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된 베인스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초자아’는 아다와 베인스가 만나는 것을 감시하며,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딸 플로라와 불륜의 아내를 처벌하는 스튜어트가 역할을 분담하여 맡고 있다.
자아는 이드와 초자아 간의 갈등을 적극적으로 중재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그들의 싸움을 숨죽이며 지켜보는 아다 자신으로 표현된다.
피아노는 나무궤짝 속에 넣어져 아다와 함께 해변 가에 도착한다. 피아노를 단단하게 둘러싸고 있는 나무궤짝은 이드가 매우 억압되어 있으며 자유롭지 못한 상태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변 가에서 나무 조각이 떨어져 나간 궤짝 틈으로 아다가 손을 집어넣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이드가 세상을 향해 이 작은 구멍으로 가쁜 숨이나마 쉬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니, 적극적인 의미로는 이드가 스스로 억압을 풀고 자신이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드가 초자아의 위세에 눌려 궤짝에 담겨져 있듯이 자아도 힘을 잃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자아인 아다는 검은 색 옷을 입고 등장한다.
검은 색은 우울과 절망, 어둠을 상징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아는 활력이나 밝음이 없이 침체되어 있으며, 몸이 거의 노출되지 않는 아다의 검은 색 옷은 초자아가 자아마저도 두텁게 둘러싸서 자아에게 무성(無性)적인 이미지를 강요한다고 볼 수도 있다.
성 불구자에 가까운 스튜어트는 초자아의 일부로서 아다가 가져 온 피아노를 집안으로 들여놓지 않고 해변 가에 방치한다. 즉 초자아는 위험한 이드를 자신의 집안으로 끌어들이기를 원치 않으며 그걸 해변 가에 버려둔 것에 대해 안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아노는 베인스의 집으로 옮겨진다. 앞에서 자아는 초자아와 이드뿐 아니라 개인에게 닥친 현실(reality)과도 타협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베인스라는 원시적이며 성적인 자극은 이드의 잠을 깨우고 피아노를 둘러싼 초자아의 벽을 조금씩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마침내 나무궤짝은 벗겨지고 밖으로 나온 피아노는 조금씩 음정을 조절하며 자신의 음계를 잡아 나간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분출하는 이드의 잠재력은 아다를 뒤흔들고, 베인스의 자극도 점차 잦아진다. 아다는 마침내 우스꽝스럽게 생긴 자신의 속옷(치마를 부풀려 보이기 위한)과 겹겹이 그녀를 옥죄어 온 초자아의 질곡을 한꺼풀 한꺼풀 벗어 버리고 베인스와 알몸이 되어 눕는다.
여기서 초자아의 역할을 하는 플로라와 스튜어트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서로 역할을 분담한다. 플로라는 초자아의 기능 중 자아의 행동에 대한 신임이나 불신임, 비판적인 자기관찰, 자아가 참회 또는 회개하도록 요구하거 잘못된 행동에 대한 수정을 요구하는 역할을 하며, 스튜어트는 처벌의 기능을 맡는다.
플로라는 마을의 촌극 발표회에서 천사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데, 촌극이 끝난 후에도 천사의 날개를 겨드랑이에 붙인 채 아이들과 어울리는 장면이 계속 나온다.
천사는 원래 신의 사자로서, 사랑을 실천하고 악을 징벌하는 역할을 하는 지고지순한 초자아의 상징물로서 플로라가 이러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플로라는 감시자로서 초자아의 역할을 하는데, 베인스와 아다의 이상스런 피아노 교습 장면을 목격하며, 어머니가 베인스의 집으로 가는 것을 보고 경고를 보낸다.
“엄마는 나빠. 가다가 넘어져서 미친 개한테 물려라.”
또한 예의 그 천사 복장을 한 채
“엄마는 다시는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나는 그게 싫어요.”
라고 말하며 베인스와의 밀회를 꾸짖는다.
그러나 억압을 벗어버린 이드는 이미 엄청나게 속도가 붙어 버린 자신의 행위를 제어하지 못하며, 아다는 이드의 한 부분인 피아노의 건반에 사랑의 전갈을 적어 보낸다. 감시자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초자아는 이제 마지막으로 처벌역이 초자아에게 이드의 운명을 넘겨 버린다. 플로라는 베인스에게 갖다 주라는 아다의 말을 무시하고 스튜어트에게 피아노 건반을 넘겨준다.
처벌자의 역할을 맡은 스튜어트는 감시자의 경고를 무시한 이드를 단 번에 베어 버린다. 아다의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 버린 것이다. 왜 하필 스튜어트는 손가락을 잘라 버렸을 까? 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 간의 육체관계를 상징한다. 서양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문틈으로 손을 내미는 행위는 성적 흥분 상태를 나타내며, 손목을 잡는다는 것은 남 녀간의 육체적 관계를 뜻한다. 그리고 아다의 손가락은 피아노를 조종하는 역할을 한다. 그녀의 손가락은 피아노라는 이드의 건반을 두드려 높은 음계까지 내게 하며 이드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한다.
이드의 한 부분이면서 이드의 조종자 역할을 하던 손가락이 절단된 후 소리를 못 내는 피아노는 한낱 나무상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래도 언젠가 문제를 일으킬지 모를 화근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 동안 이드와 초자아의 충돌에 휘말려 어느 쪽 편도 들지 못했던 자아는 초자아의 승리로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아채고는 피아노를 물속으로 던져 버린다. 자아는 초자아와 이드의 충돌로 인한 갈등과 번잡스러움에 넌더리가 났는지도 모른다.
자아는 승자인 초자아의 손을 들어 주고 한시 빨리 난장판을 정리하여 평화롭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아노는 물속에 가라앉으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자아인 아다를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지만 힘을 잃은 이드는 아다를 놓치고 홀로 깊은 바다 속으로 잠겨 들어가고 만다.
아다가 떠나는 배 위에서 피아노를 물속으로 밀어 넣는 이 장면에 대해선 조금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이드가 가고 있는 길은 깊은 물속이다. 깊은 물속이란 죽음이나 파괴, 또는 미지의 두려움을 상징한다. 그런데 피아노는 혼자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자아마저 자신에게 감겨 있던 밧줄로 발을 걸어서는 함께 심연을 빠져든다. 그러나 자아는 이드와의 동행을 거부하고 밧줄을 풀고 물 밖으로 나온다.
초자아가 이드를 패퇴시키는 것으로 영화는 더 이상 전개할 내용이 없어졌다고 볼 수 있지만, 여기서 연출자는 지금까지 늘어놓은 이야기를 요약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드란 이처럼 두려움과 무모함, 그리고 이드와의 동행은 결국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과 그런 위험을 딛고 재생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아다가 예전 모습 그대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잘려 나간 그녀의 손가락에는 금속제의 대용물이 끼워져 있다.
금속물로 상징되는 차갑고 이성적인 면이 잘라진 이드를 대신하고 있듯이 이제 이드는 완전히 힘을 잃고 말았다. 보조물이란 아무리 기능이 뛰어나도 원래 타고난 자신의 기능을 대신할 수는 없듯이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의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다. 금속과 건반이 부딪치는 소리는 이드로 하여금 이드의 활성화에는 죽음이나 강한 처벌이 따른다는 것을 알도록 초자아가 이드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베인스의 곁에서 연주하는 아다의 마지막 모습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금속제 손가락이 상징하는 초자아의 잔인한 처벌이 연상되어서인지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에서 연출자는 본능에 대한 자아와 초자아의 갈등, 충돌하는 것을 해소의 의미로 주인공 아다가 피아노를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리게 하는데, 이것은 곧 이드의 거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드의 거세는 충돌을 없애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는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원천인 이드의 제거는 많은 문제를 낳는다. 이드는 인간에게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고, 정열을 솟아나게 하며, 삶의 생기를 주고 예술적 창조성을 부여한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의 행복은 조화로운 ‘초자아-이드-자아’의 균형에서 온다고 하였다.
비대해진 초자아가 불필요하게 가혹한 처벌을 내릴 경우로서, 초자아가 이토록 우세하게 된 이유로는 어린 시절에 받은 훈련이나 교육이 엄격해서 어린이에게 지나친 부끄러움이나 죄의식과 열등감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이기에 이 시기에는 강한 정치적, 종교적 감시와 통제가 심했기에, 인간의 본능에 대한, 특히 성적인 본능에 대한 죄악시하고 억압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종교사적, 가족사적 억압적 담론에 힘입은 초자아는 인간의 본능에 대하여 가혹한 감시와 통제를 가하여 본능이 느끼는 것에 대하여 죄책감과 수치심을 강화하게 하였던 것이다.
2. 라깡의 주체와 욕망의 관점에서 영화<피아노>에 대한 분석
라깡은 분석의 최종적 목표가 언어의 장벽을 넘어 주체와 주체의 진정한 만남을 겨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이 상상계를 배제한 순수 상징계의 만남이 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라캉은 자아 없는 주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언급하면서 진정한 분석이란 상징계를 겨냥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라깡은 주체를 단순한 심리적 차원이 아니라 반응적 행동 구조와 역사 속에서 이해하면서 실존적 본질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 이해의 지평이 정신병리학에만 국한 되지 않고 철학과 인문학 및 정신분석과 같은 더 넓은 영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는 언어학을 통하여 인간을 그 자체의 고유성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베르트랑 오질비.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 김 석 역(서울: 동문선 현대신서, 2003. 11), 162.
그는 인간의 근본적인 구조를 결핍의 문제로 접근하면서 자아형성과 주체의 개념을 말한다. 즉 인간은 외재적인 환경이나 사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 부정성에서 자신의 본질을 필연적으로 형성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져 있는 존재로 이해한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완전성의 환영으로 다가오는 이미지에 현옥되게 하며, 일련의 포기과정의 연속인 상징화를 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구조적 결핍은 채워질 수 없는 것이며, 단지 끊임없는 욕망의 추동으로 잃어버린 대상을 향하여 달려가는 영원한 추구만이 있게 된다. 이것이 인간에 내재한 죽음 본능의 라캉적 의미이며, 언어적 차원이 비로소 주체 이해의 새로운 장으로 다가오게 된다.의미(주체)의 내용이 차차로 풍성해지는 것이다. 베르트랑 오질비.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 김 석 역(서울: 동문선 현대신서, 2003. 11), 165.
인간의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되는 것이 거울 단계, 즉 상상계의 영역이다. 이것은 인격의 핵심적 내용으로 거울이야말로 인간 욕망의 타자적 기원과 주체형성의 소외 구조를 잘 드러내는 것이다. 라깡의 인식의 내용적 측면은 상상계와 연관되지만, 상상계는 상징계에 의해 규정되면서 함께 작용한다. 예를 들어, 시니피앙이 상징계적 작용이라면, 의미화와 연관되는 시니피에는 상상계적 작용에 결부된다. 주체는 상징계에 진입하여 시니피앙에 의해 대리되는 효과로 나타나고, 이것이 주체 소외의 근원적 구조가 된다. 주체의 욕망이 언어적으로 표현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실재에 도달할 수 없는데서 무의식적인 구조가 발원한다. 베르트랑 오질비.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 김 석 역(서울: 동문선 현대신서, 2003. 11), 162-66.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게 하고 좌절속에서도 버티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사막을 걷는 나그네는 오아시를 보고 지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그가 찾아온 오아시스는 저만큼 물러나 다시 그를 손짓한다. 인간의 꿈도 신기루처럼 허망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허망할지라도 오아시스를 보지 않으면 인간은 사막을 걷지 못한다. 꿈이 없으면, 목적이 없으면, 얻으려는 대상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그것만 얻으면 아무런 욕망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을 쥐는 순간 욕망의 대상은 저만큼 물러난다. 대상이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조금씩 상승되는 것, 대상이 실재처럼 보였지만 베일을 걷었을 때는 그렇지 못한 것, 그러나 대상이 실상이 아니기에 욕망은 남고 또 다른 욕망의 대상을 추구하며 인간은 살아간다. 권택영. 『자크라깡의 욕망이론』(서울: 문예출판사, 2000.5.), 11.
과연 욕망의 실재는 있는 것인가? 대상화된 존재 속에서 욕망의 실재는 발견되어질 수 있는가? 이러한 존재론적 질문들이 인간의 욕망을 향한 상승운동을 지속적으로 하게하며, 그 어떤 대상도 욕망의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생을 통하여 발견해 가는 과정이 인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화 <피아노>의 주인공인 아다는 이러한 자신의 무의식적 존재론적 사회학적 욕망의 대상을 향한 여행을 하는 가운데 자기의 주체의 끊임없는 재발견을 추구하는 인물이라 할 있다. 마치 거울 속에 비쳐지는 환영과도 같은 것에 사로 잡혀 어린 아이가 거울 속의 일시적인 영상도 그것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잡으려고 하는 하듯이 아다의 피아노에 대한 자기의식이 내적인 환영적 도구(피아노)에 사로잡혀서 피아노가 자기 내적 실현과 정체성 실현의 실재인 것으로 확인하려고 한다. 김형효.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서울: 인간사랑, 1996. 7), 228.
라캉은 에고의 상상적 구축 및 동일시라는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데이비드 메시, 『라캉의 이론의 신화와 진실』허 경엮(서울: 민음사, 2001. 12.), 319.
자아나 의식은 거울 속에 비친 평면 이미지에 스스로를 투영하고 동일시함으로써 생성된 주체의 거짓 외관에 불과하다. 진정한 본질이 아닌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는 주체의 구조를 타자의 욕망에 예속시키는데 이것은 주체가 겪을 수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김 석, 『에크리: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서울:살림출판사, 2007. 11). 94-95.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반드시 타자와의 관계를 매개로 예측된 확실성의 단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라캉은 강조한다. 그리고 확실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보다 먼저 ‘이해의 순간’과 ‘결론의 순간’을 거쳐야 한다. 물리적 시간으로 보면 ‘응시의 순간’-> ‘이해의 순간’->결론의 순간‘순으로 진행되지만, 사건의 의미는 ‘결론의 순간’->‘이해의 순간’->‘응시의 순간’으로 거꾸로 부여된다. 뒤의 사건이 앞의 사건의 확실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위의 책, 97쪽
. 에이다는 후자의 과정(손가락을 잃음→피아노를 버림)을 거쳐 전자의 상황(새 땅을 향함→새 삶을 찾음)을 획득해 간다. 영화의 끝 부분에서 아다의 죽음본능에 대한 응시, 곧 바다 속에 있는 가라앉아 있는 피아노에 대한 회상을 통해서 지금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의미와 살아 있음에 대한 확인을 하고 있다.
라캉은 거울단계에서 동일화가 일어나는 영역을 ‘상상계(the imaginary)’라고 불렀는데, 시각적인 영역과 거울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말은 아이들이 이미지 속에 사로잡힌 다는 것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다리안 리더. 『라깡(Lacan)』, 이수명 역(서울:김영사, 2002. 7.), 24.
아다의 자아는 이러한 내적 동일시를 통하여 자기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피아노라는 대상이 상징화된다는 것은 피아노가 무엇인가를 의미 한다는 것, 피아노가 의미작용을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다 자신은 피아노와 내적인 심적 동일시를 통하여 피아노가 바로 자신이고 피아노와 대화하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심적 의존 대상으로서 내적 동일시를 하고 있다. 즉, 피아노라는 이미지와의 동일화를 넘어선 기표 요소와의 상징적 동일화다리안 리더. 『라깡(Lacan)』, 이수명 역(서울:김영사, 2002. 7.), 46.
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이미지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형성된 자아는 결코 통일되고 안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의 소외와 분열을 가져온다. 주체는 근본적으로 분열된 존재이다.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법칙에 의해 분열되어 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분열되어 있다. 아다는 남편이 번개 맞아 죽는 충격적 외상 경험 속에서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억압하고 혼자 내적인 세계로의 도피하는 가운데, 자신의 자아는 통일되지 않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자기 소외와 분열의 자리 속에서 피아노에 고착과 몰입되어 있다.
아다에게 있어서 피아노라는 이미지는 비주체적이고 의존적인 허구이기에 주체성을 형성하는 진정한 물질적 토대가 될 수 없다. 말하지 못하지만 타인에 의해 터치될 때 소리를 내게 되는 비주체적 수동성을 가진 피아노는 마치 말은 못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피아노의 소리를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피아노 소리 속에 비친 자신의 형상에 도취되어 나르시시즘 적인 순간을 즐기면서 피아노가 곧 자신을 대변해 주는 분신으로서, 아다는 피아노를 내적 동일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시는 결국 주체를 소외시키면서 자아는 주체를 대신하여 주인 행세를 하는데, 이 자아는 본질적으로 주체에 대해 타자이다. 이러한 자아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거울(피아노)이라는 외부 매체에 투영된 이미지를 자기 것으로 취하면서 사후에 발생한 것으로 주체의 신체적인 감각에서 기원하는 근원적인 불안감을 완전하게 해소시켜주지 못한다. 김 석, 『에크리: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서울:살림출판사, 2007. 11). 148-149.
아다는 피아노에 의존하고 있지만, 그 피아노에 의존되어 있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내적인 적대감과 불안이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다. 그러므로 피아노는 아다의 거울이자 그림자이지만 동시에 파괴하고 싶은 대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울단계로서의 자아, 즉 피아노에 비추어진 자아가 형성되는 자리는 주체가 소외되는 장소이지만 그럼에도 주체는 그러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상상계가 동일시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소외와 기만을 가져오지만 극복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듯이, 피아노를 통한 아다의 자리는 진정한 자신에 대한 소외와 기만을 가져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폐기되거나 극복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언어의 한 축인 상상계적 차원은 동시에 언어의 장벽으로 작용하여 인간 상호 간의 진정한 의사소통을 방해하기도 하는데, 피아노는 아다의 내면의 소리를 대변해 주기도 하지만 피아노로 인해서 아다는 외부세계와의 단절과 진정한 의사소통으로부터 분리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L도식을 통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김 석, 『에크리: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서울:살림출판사, 2007. 11). 151-152.
L 도식
주체(아다) ●-----------▶-------------● a' 타자(베인스)
(Es)S (autre)
계
관
적
상
상
무의식
자아a● ● A 대타자(피아노/바다속 심연)
(moi) Autre
도식의 출처: Jacques Lacan, Ecrits, Seuil, Paris, 1966.(도표는 한글파일로 받아서 보세요..여기서는 깨어지네요)
주체는 거울단계를 거치면서 나와 너라는 상호주체성의 구조에서 가시화되는 주체성을 획득한다. 이 가시화된 주체성을 자아 혹은 에고라 부를 수 있다. 자아는 본질상 상상계에 속하는 것으로 진정한 주체에 대해 타자적인성격을 가진다. 라깡은 이렇듯 주체가 본질상 타자인 자아를 매개로 구성됨을 ‘타자를 위해’ ‘타자처럼’ ‘타자를 통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주체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형상과 그 옆에 자리 잡고 있는 타자의 모습을 확인한다. 김 석, 『에크리: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서울:살림출판사, 2007. 11), 152.
주체가 타자의 몸짓 혹은 표정을 통해 타자가 상대하는 이미지(베인스)가 바로 자신임을 발견하는 순간이 가시적 공간에서 주체성이 실현되는 최초의 순간이다. 그 이전까지 원초적인 신체감각에만 사로잡혀 있는 주체는 비로소 자신을 외화된 이미지(베인스) 속에서 알아보며 이것에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이며, 자아가 형성되면 자아에 의해 외부 세계와의 대상적 관계가 본격적으로 가능해진다(김석, 2007, 153).
충격적 사건으로 인한 자신의 내적 고착과 억압된 세계에 사는 아다는 피아노와의 만남과 분리의 과정에서 본능을 스스로 표현하고 선택할 수 있는 베인스의 이미지가 바로 자신임을 발견하고, 스스로 본능과 성을 선택하여, 사랑하는 베인스를 위해, 베인스처럼, 베인스를 통해서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표현하는 가운데 외부 세계와의 대상적 관계가 본격적으로 가능해졌다.
여주인공 아다는 피아노를 결핍된 자기와 동일시하는 가운데 피아노가 자신의 존재의 의미이자 자신을 지탱하는 대상으로 여겼고 거기에서 자신의 욕망의 실재로서 피아노를 바라 보았지만, 막상 그 피아노에 담겨있는 너무나도 다양한 존재의 추가 담겨져 있었기에 그 피아노를 따라 흐르는 인생의 욕망의 흐름의 추구는 다시 상대화되고 하나의 지나가는 의미로 보내어지는 가운데 욕망의 대상이 피아노에서 또 다른 실재라고 보여 지는 그 무엇으로 움직여 가고 있는 아다를 본다. 그것은 그녀에게 욕망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의 존재의 욕망의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 바다로 던져질 때, 피아노는 더 이상 처음 그녀에게 의미했던 그 존재가 아니라 또 다른 의미를 향해가는 길이라는 기의에 기여하는 하나의 그것, 기표에 불과하기에 이제 더 이상 처음 피아노라는 시그니피앙 시니피앙(signifiant)을 보통 ‘능기’ 혹은 ‘기표’ ‘기호 표현’라는 말로 번역하지만, 라캉과 관련해서는 시니피앙이라는 원어를 사용하는 게 더 좋다고 본다. 라캉은 시니피앙을 고정적인 의미화에 매이지 않는 순수 물질적 질료라고 정의한다. 시니피앙과 짝을 이루는 시니피에(signifie)는 ‘기의’,‘기호의미’로 기호에 대한 대응적인 지시적인 의미를 말한다(김 석, 2007, 288). 시니피앙은 다양한 의미적 상징성을 포함하고 있는 기호로서 임의성에 의해서 고정적이고 지시적이고 약속되어진 의미의 이름이 붙여지기 이전의 선험적이고 본질적인 물자체적 존재이다.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어떤 의미로 의식화 되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이기도 한다.
은 사라지고 이제는 the 피아노/피아노는 개인적인 기표일 뿐이다.
어쩌면 인간은 거울 속에 있는 자기를 욕망의 대상으로 동일시하는 가운데 자기 정체성과 존재 의미를 확인하려는 가운데 끊임없는 상상계속에서 상징계로 자기 의미화 하는 가운데 실재계로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끊임없는 욕망의 나래를 펼치는 가운데,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주체는 분리라는 능동적 고정을 통해 자신을 욕망하는 존재로 확립한다. 욕망의 능동성은 주체가 결여에 대응하는 양식인 환상 대상 a를 통해보다 자세히 탐구된다(김석, 2007, 111). 비주체로서 외상 후 장애와 내면에 몰입해서 폐쇄적이면서 수동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내적 고착과 애착에 되어 자기 존재의 의미와 자기정체성을 피아노를 통하여 확인 하려는 아다는 자신의 내적 결여에 대응하는 양식으로 환상 대상인 피아노 통해서 자신의 욕망의 능동성을 자세히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비주체성을 더 깊이 알아간다. 이러한 주체로서의 아다와 피아노의 의미 관계를 라깡의 욕망의 공식 권택영 엮음. 『자크라깡의 욕망이론』(문예출판사: 2000.5.), 19.
라깡의 욕망의 공식은 S ◇ a이다. S는 주체이고, a(오브제 아, 프티 아)는 주체로 하여금 욕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허구적 대상이다. 마름모 꼴 ◇은 대상이 결코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핍이다.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킬 것처럼 보이는 대상, 즉 대체가 가능하리라고 믿는 단계, 이것이 압축이요, 은유이다. 그러나 충족되지 못하고 다시 또 그 다음 대상으로 자리를 바꾸는 전치, 이것이 환유이다. 그러므로 욕망 역시 언어처럼, 무의식처럼,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 욕망은 환유이기 때문에 대상은 신기루처럼 잡는 순간 저만큼 물러난다. 대상은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에 인간은 대상을 향해 가고 또 간다. 죽음만이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이다. 욕망은 기표이다.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가지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텅빈 연쇄고리이다. 주체는 대상에게 욕망을 느낀다. 그것이 자신이 결핍을 완전히 채워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것만 얻으면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 대상을 얻어도 여전히 남는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렇다면 대상은 실재처럼 보였지만 허구가 아닌가. 대상을 실재라고 믿고 다가서는 과정이 상상계요, 그 대상을 얻는 순간이 상징계요, 여전히 욕망이 남이 그 다음 대상을 찾아 나서는 실재계이다. 그리고 이때 실재라고 믿었던 대상이 대타자이고 허구화된 대상이 소타자이다.
에 의하여 표현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다(S:주체) ◇ 피아노[a(오브제 아, 혹은 프티 아)]
자기탐색의 과정에서 ‘피아노’라는 상징계는 주체(아다)를 도래하게 만들고 지배하지만 주체의 욕망에 완전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이 지속되는 진정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징계의 또 하나의 얼굴인 죽음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죽음은 무의식 속에서 작용하는 상실의 기억을 통해 주체에게 체험된다.(김석,2007. 100)
상징계로서 피아노는 아다의 욕망의 대상이었지만, 그 욕망의 대상이 다른 그 무엇으로 흘러가려고 할 때, 그 이유를 깨닫기 위해서 아다는 피아노를 바다에 버려야만 했고, 상징계의 또 하나의 얼굴인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다 속에서 하게 된다. 즉, 피아노가 아다를 지배하
고 있었지만 주체의 욕망의 본질인 죽음을 향한 경험이 피아노와 함께 바다로 빨려들어 갈 때, 그녀는 피아노를 묶고 있는 줄이 자신에게 묶여져 있는 바다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피아노와 함께 물속에 가라앉는 에이다의 모습에서 엄마의 자궁 속에서 탯줄로 된 아기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데, 이 이미지는 아다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엄마와 같은 존재인 피아노와 자신을 연결하고 있는 줄을 끊어야 한다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죽지 않으려면 아다는 피아노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떨어져 나와야 한다. 자신과 피아노가 연결되어 있는 밧줄은 마치 아이에게 연결되어져 있는 탯줄과도 같아 그 줄을 끊어야 죽음의 순간에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이렇듯 죽음은 바다라는 심연의 무의식 속에서 작용하는 상징계인 피아노와의 분리를 경험하는 가운데 그것의 상실의 기억을 통해 주체에게 체험될 수 있다. 이러한 상실의 기억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완벽한 소통이 유예된 침묵 속에서 에이다가 상상하는 바다 밑 피아노에 밧줄로 묶인 채 애드벌룬처럼 떠 있는 그녀의 영상 속에서 상실의 기억의 묘한 잔상을 남겨진다. ‘무덤’을 추억하는 마지막 보이스 오버는 이미 ‘무덤’ 밖에 존재하므로. “소리가 존재한 적 없는 그런 고요가 있다. 소리가 존재할 수 없는 그런 고요가 있다. 바다 깊은 곳 차가운 무덤 속….”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긍극적 한계로서 죽음충동의 잔상을 실재계” 손 호머. 『라깡읽기』 김서영 역(서울:은행나무, 2006. 11.), 178.
속에서 느끼는 것일 것이다.
바다 속에 잠겨진 the 피아노로 부터의 분리는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향한 여행이다. 다시 새로운 실재라고 여기는 궁극적으로는 그림자에 불과한 또 다른 기표에로의 여행을 의미한다. 또 다른 그것으로부터 주체가 또 다른 욕망의 대상인 기표를 발견할 때 까지 말이다.
3.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성의 관점에서 분석- 피아노를 통한 옷 벗기기 게임
아다는 남편과 함께 연주 중에 남편이 번개로 맞아 죽은 충격적 외상 후 장애를 겪은 후 언어적 고착과 혼자 살아있는 죄책감은 자기 통제와 자기 억압을 통해 다른 외부와 폐쇄적인 구도로 형성하는 가운데 자기 내면적 세계에 고착되어 있으며, 남편의 흔적으로 상징되고 그 흔적을 기억하기 위한 대상으로 그리고 혼자 살아남은 죄책감으로 자기의 본능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서 피아노에 자기 존재적 고착을 갖고 있다.
베인스는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하여 피아노에 존재적 집착을 가지고 있는 아다의 성적 수치심의 방어를 무력화시키는 교묘한 방식으로 건반을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려는 과정을 통하여 베인스는 피아노에 의존된 무력한 한 여인을 자신의 성적 취향을 따라 서서히 공격하여 정복해 가는 가운데 자신의 욕망을 교묘하게 채운다. 그는 아다의 피아노를 통하여 그가 처음 얻은 치마를 온 몸으로 느끼며 만지는 것이 그가 욕망하는 대상이 정말 아다 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벗겨진 치마를 얼굴에 대고 부비고 문지르는 행위는 마치 복장 도착과 같이 그가 느끼는 바라는 욕망은 사랑인지 아니면 피아노 건반을 통하여 서서히 존재론적 고착에 놓여 있는 아다를 서서히 벗기면서 자신이 욕망을 쟁취하려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적어도 이 순간에 아다의 의사는 주체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이고 피아노를 통한 공격적 베인스에게 무력하게 포로가 되어가고 그러는 가운데 서서히 길들여져 가는 사육과도 같은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순간의 아다는 피아노에 존재론적으로 고착되고 의존되어 있는 자신이 벗겨지는 과정에 저항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보여 진다.
피아노를 소유하기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육체를 덮고 있는 옷을 하나씩 허용하는 아다가 선택적 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순간만은 철저히 베인스가 피아노를 통하여 교묘하게 육체적 욕망을 채우려는 가운데, 정신적 언어적 장애와 피아노에 의존적 애착을 보이는 그래서 무기력한 아다를 이용한 것이다.
어떤 비평에서는 본능을 알아가고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건반은 하나의 대화의 도구로 보는 관점도 있을 수 있지만 필자는 그러한 과정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 억압적 구도라고 본다. 왜냐면 베인스와 아다는 주체 대 주체로, 언어 대 언어로, 사랑대 사랑으로, 수평적으로 이루어지는 존재론적인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피아노라는 욕망에 고착된 아다, 육체적 본능에 고착된 베인스, 본능의 해방의 메시지에 고착된 연출자, 억압에서 해방으로 가는 욕망에 고착된 관객들, 이 모든 주체들이 일치 될 수는 없지만, 각자 다른 무의식적 욕망을 향해 살아가는 이상 정말 사랑이라는 상상계속에서 상징계의 기표 속에 쓰여진 사랑이라는 단어가 실재계에 그 무엇, 대상을 가리키는 실재가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 아닌가? 환상과 현실 속에서 인간의 욕망은 뫼비우스 띠처럼 실제인양 끊임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서로의 다른 욕망의 띠가 춤을 추는 것이 개인적, 역사적 인생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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