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 찬탈을 위한 이자겸의 난 12세기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이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반란이다. 이 반란의 군사력은 척준경(拓俊京)과 관련이 있기에 ‘이·척의 난'으로도 부른다.
당시 인주이씨(仁州李氏 또는 경원이씨(慶源李氏))의 세력은 문종 이후, 80여 년 동안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었고, 이자겸 당대에는 절정기였다. 그는 어린 외손자인 인종을 옹립하였고, 자신의 셋째와 넷째 딸을 인종의 왕비로 삼게 했다. 권력이 커진 이자겸은 중국 송나라에 대해 스스로를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일컬었다. 위기감을 느낀 인종은 김찬(金粲) 등의 관료들과 이자겸을 제거하려 했으나 이자겸과 척준경이 인종에 앞서 군대를 동원했다.
인종은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겨주려 했으나, 관료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이자겸은 자기 집에 국왕을 연금했다. 그 후 인종은 최사전(崔思全)과 의논하여, 척준경을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
척준경은 이자겸을 체포하였고, 이자겸은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를 갔다. 이후 척준경 역시 탄핵으로 암타도에 유배됨으로써 이자겸의 반란은 끝났다. 80여 년 간 외척가문으로 성장한 이자겸의 가문 1126년(인종 4) 2월 당시 최고 권력가인 이자겸 등이 왕위를 찬탈하려고 일으킨 반란이다. 이 반란에 뒷받침된 군사력은 척준경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이·척의 난'으로도 불린다.
이 반란에는 인주이씨 가문의 권력과 세력의 비대함이 깔려 있다. 인주이씨는 이자겸 당대에 고려의 최고 외척가문이었다. 이미 이 집안은 11세기 전반기인 문종대부터 외척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이자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李子淵)이 세 딸을 문종의 왕비로 들인 이후 80여 년 동안 왕실과 중복되는 혼인관계를 맺어 왕비의 지위를 거의 독점하였다.
인종의 할아버지인 숙종만이 인주이씨가 아닌 유씨를 왕후로 삼았을 뿐이고, 숙종의 아들 예종은 다시 이자겸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문제는 예종 사망 직후에 발생했는데, 당시 태자는 14세였고, 그의 삼촌들이 왕위 계승에 개입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자겸이 인종을 왕위에 올리고, 그 공로로 이자겸은 협모안사공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協謀安社功臣 守太師 中書令 邵城侯)의 자리에 올라 관료로서 최고위직에 올랐다. 무소불위의 권력자 이자겸 이자겸은 곧이어 반대파 제거에 나서, 왕의 작은 아버지인 대방공(帶方公) 보와 한안인(韓安仁), 문공인(文公仁) 등을 역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숙청하였다. 이로 인해 이자겸은 최고의 권력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고, 그의 권력은 국왕권을 능가할 정도였다.
정부의 요직은 그의 일족과 추종자로 채워졌다. 여기에 더해 그는 자신의 셋째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여보냈고, 이듬해에는 다시 넷째 딸을 왕비로 들여보냈다. 여러 아들들은 경쟁하듯이 저택을 지었으며, 인사권 등을 장악하여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갔다. 당시 사방에서 들어오는 선물이 계속 줄을 이었으며, 심지어 썩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에 이를 정도였다. 또한 이자겸의 아들들은 다른 사람의 땅을 강제로 빼앗고, 노복을 풀어 수레와 말을 약탈하여 물건을 실어 나르기도 하였다. 당시 백성들은 이를 피하기 위해 수레를 부수고 소·말을 팔아 버렸다고 『고려사』에는 말하고 있다.
이자겸은 국공(國公)이 되었다. 그 결과 그는 개인적인 행정을 담당하는 숭덕부(崇德府)를 열었고, 자신의 저택을 의친궁(懿親宮)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고 하여, 국왕의 위세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였다. 고려사: 1449년(세종 31)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2년 후인 1451(문종 1)에 완성된 총 139권의 고려시대 역사서. 1451 왕권을 무시한 이자겸을 제거하고자 한 왕 문제는 중국 송나라에 대해 스스로를 왕과 다름없는 직함인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표시하여 외교문서를 올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이자겸의 행동은 인종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으로 여기게 했다. 때문에 인종은 자신의 세력인 내시 김찬(金粲), 안보린(安甫鱗)과 동지추밀 지녹연(智祿延)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지녹연 등은 상장군 최탁(崔卓), 오탁(吳卓)과 대장군 권수(權秀) 등과 의논해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오게 하였다. 이들은 먼저 척준경의 아우인 병부상서 척준신과 아들 척순(拓純) 등을 살해했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계기는 여기에 있다. 척준경과 이자겸의 연합 이 사건이 이자겸에게 알려지자, 그는 재상과 관료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척준경은 앉아서 당할 수 없다고 하여 시랑 최식(崔湜) 등과 함께 군졸을 모아 궁궐의 승평문을 포위하였다. 이자겸의 아들인 승려 의장(義莊)은 현화사 승려 3백여 명을 이끌고 궁성 앞에 도달했다. 인종이 신봉문에 나가자 척준경의 군졸들은 절을 하고 만세를 불렀다. 인종은 척준경과 군졸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자겸 등은 궁궐 안에 있던 김찬ㆍ안보린ㆍ지녹연ㆍ최탁 등을 자신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 대한 답을 듣기도 전에 척준경은 동화문 행랑에 나무를 쌓아 불을 질렀고, 불은 점차 궁궐 안쪽으로 번져갔다.
척준경은 날이 저물어가자 군사 100여 명을 데리고 궁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전 금위별장 이작과 장군 송행충이 이들을 쫓아냈다. 그날 밤 인종은 불을 피해 산호정이란 정자로 피신했는데 따라오는 시종들은 겨우 10여 명 정도뿐이었다. 인종은 두려워서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겨준다는 글을 지었다. 이자겸이 재상들의 논의를 두려워해 말을 꺼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수(李壽)가 반대하고 나서자 결국 왕위를 선위하는 것은 실패하였다.
척준경은 새벽에 국왕이 연덕궁으로 자리를 옮기자 국왕을 따르던 관료들을 대거 살해하였고, 지녹연ㆍ김찬 등의 많은 관료들을 유배시켰다. 궁궐은 모두 불타버리고 오직 정자 3곳과 내제석원의 낭무 10칸만이 남았다. 이자겸, 왕을 연금하고 권력을 잡아 횡포를 휘두르다 3월 1일 이자겸은 왕에게 강요하여 자신의 집인 중흥택(重興宅)의 서원(西院)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했다. 이후 국왕은 이자겸의 관료들에게 둘러쌓이게 되어 거의 연금상태가 되었다. 이자겸은 정변 초기에 죽은 척준신ㆍ김정분ㆍ척순 등을 높은 벼슬로 추증하고, 후하게 부의를 주도록 요구했다. 이후로 이자겸 집안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인종은 비밀리에 내의군기소감 최사전(崔思全)을 불러 논의하였다. 최사전은 이자겸의 발호가 척준경의 병권 때문이라면서, 척준경의 매수를 주장했다. 인종은 척준경이 이자겸의 심복이며 혼인관계라는 점, 그리고 척준신과 아들 척순의 살해로 그를 매수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점을 쳐본 결과 길하다는 예시를 얻어 최사전은 척준경의 집에 가서 국왕에 대한 충의를 명분으로 해서 공을 세우도록 그를 회유했다.
척준경을 회유해 이자겸을 몰아내고 반란을 끝내는 인종 5월 1일 인종이 연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자겸은 그 남쪽에 거처하면서 북쪽 담을 뚫어 궁 안에 통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군기고의 갑옷과 무기를 가져다 자신의 집안에 보관하였고, 얼마 후에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說)의 비결대로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 도참이란 고려시대 동안 계속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한 일종의 신비한 예언이었다. 십팔자도참설은 왕씨가 아닌 이씨(李氏)가 새로 왕에 오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를 믿은 이자겸이 떡에 독약을 넣어 인종에게 주었으나 그의 넷째 딸인 왕비가 몰래 이를 알려 주어 독살을 면했던 사건이 있었다.
인종은 몰래 쪽지를 척준경에게 보냈고, 척준경은 궁궐에 가서 국왕을 호위하였다. 이자겸의 무리가 활로 척준경을 쏘았지만, 척준경은 호통으로 제압했다. 이자겸과 그의 사람들은 체포되었고, 이자겸은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를 가서 같은 해 12월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간관들의 탄핵으로 왕비인 이자겸의 두 딸은 모두 쫓겨났고, 척준경은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척준경 역시 다음해 암타도에 유배됨으로써 이자겸의 반란은 끝났다. 출저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7469&mode=title&query=%C0%CC%C0%DA%B0%E2&dircode=0
전민변정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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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민우군 과제 수행을 다시 하기 바랍니다. 출처도 빠져 있고, 편집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붙여 넣기를 하였으며, 소감도 적지 않았습니다. 수정을 하지 않으면 과제 수행을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민우군 다른학생들과 겹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