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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다음카페 <함안조가 하림유사(遺事)>입니다. 이 글을 주변의 관계자분들께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랑스런 함안조가입니다. 카페지기 관정 조성래 올림
방어산 찬가
노래및 영상 제작 - 하림 조광제 함안조가 감찰공파 부산모임의 초대 총무를 맡았던 조광제(趙光濟, 1959년생)님이 다음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이 노래는 원래 부산모임에서 수십년 동안(1980년대초부터) 모임 때마다 불러왔던 것을 조광제님이 이번에 자신의 노래를 녹음하면서 하림 마을의 사진을 편집해 넣었습니다. 조광제님은 하림에서 출생하여, 부산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해운대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했습니다.
작사 - 남촌 조선제 가사는 조직래(1947년생, 조현오의 父)님의 부친이신 남촌(南村, 조선제) 아제가 오래 전에 작사한 것입니다. 남촌 조선제(趙善濟, 1923- 1998, 75세亡)님은 하림리에서 출생,성장하여, 30대에 진해, 부산 등으로 이사가서 살다가 부산에서 돌아가셨다. 남촌 아제는 시(詩), 서예, 음주, 노래 등을 잘 했고, 특히 정의로운 발언을 잘 했다. 성격이 화끈했고, 명랑 쾌활했으며, 낭만적이었고, 인정이 흘러 넘쳤으며, 언변과 유머가 좋았다.
기타를 치고, 국전 출품 서예작품 앞에 서 있는 남촌 아제. 진짜 좋은 아제의 서예작품은 하림리 조장래님의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어계선조의 구월등고시(九月登高詩)를 쓴 작품이다. 그 글씨는 이 사진의 글씨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쓴 명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트머아제 조용석의 아들이자 유촌할매 손자인 조광제님의 노래를 들어보자.
댓글 많이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방어산 찬가
남촌 조선제(1923생)
방어산아 방어산아 내 고향 방어산아
녹샘골도 그리워라 정도샘도 그리워라
내어린 그 시절 같이 놀던 내 동무들
어디매로 가버리고 불러봐도 대답없네
방어산아 방어산아 그~리운 방~어산 아 ~ 내고향 방어산아
고바위야 고바위야 내고향 고바위야
할아버지 지친 유서 백세청풍 새겨졌네
서산사 종소리 촛불 밝혀 기도함은
천년만년 대대손손 길이길이 빛나리라
고바위야 고바위야 그~리운 고~바위 아 ~ 내고향 고바위야
백이산아 백이산아 내 고향 백이산아
백이숙제 곧은 절개 서산정에 꽃이 피네
채미정 누각에는 충절사직 꽃이 피네
방어산에 활을 걸고 정암에서 말달리던
그 역사를 알겠느냐 그~리운 백~이산 아 ~ 내고향 백이산아
방어산(防禦山)은 하림 마을을 바쳐주는 가장 큰 산으로서 해발 530미터이다. 방어산은 함안과 진주를 가르는 산이다. 방어산 너머는 진주다. 방어산은 이름 그대로 병란(兵亂)과 왜구를 무찌르고 방어했다는 산이다. 산의 형태는 기암괴석으로 병풍처럼 둘러 싸여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철쭉 ,진달래, 자생란, 참나무, 단풍나무 등의 식물군과 노루, 멧돼지, 다람쥐, 산토끼 등 야생동물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방어산 정상에는 옛 성의 자취가 있고, 서쪽에는 장군당, 그 아래는 마제현(馬蹄峴 말발굽 고개), 북쪽에는 장군철상(將軍鐵像), 동쪽에는 옛 절터가 있다. 절의 이름은 망일암(望日庵)이었다고 한다. 장군의 이름은 묵신우(默神佑)로서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서 깎아지른 듯 한 아스라한 골짜기를 날아다니면서 3백근 짜리 활을 잡아 벌리는 힘을 지녔었다고 한다. 아마 '묵신우'라는 장군은 청동기 시대의 인물이 아닌가 한다. 청동기 시대에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험준한 고산(高山) 정상에 성을 쌓은 것이 많이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경남 함양군 황석산성이다.
하림 숲
하림 숲에는 약600년 수령의 엄청나게 큰 느티나무가 있고, 그 주변에 약 20여 개의 그 새끼나무들이 있다. 600년 수령의 이 나무는 함안조씨가 시작될 때, 즉 고려가 망하고, 이씨조선이 시작될 때, 고려의 마지막 국토개발부 장관[공조전서]이었던 전서공(典書公) 조열(趙悅) 선조님과 그 자손이 원북, 하림 등지에 자리를 잡을 때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기 위해 심었던 나무이다. 방어산 밑에 하림 마을이 있고, 하림 마을에는 "숲"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 곳에는 약 600년 수령(樹齡)의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많은 나무가 있어서 이 곳은 마을 사람들의 쉼터다. 수백년 된 하림 마을 숲의 수목들은 신성시되었다. 이 숲의 나무에는 많은 목신(木神), 정령(精靈)이 살고 있다. 목신은 나무를 자신의 집으로 삼아서 나무가지 사이에 떼를 지어 사는 귀신들이다. 옛날부터 수령이 백 년 이상 된 느티나무 종류에는 귀신들이 많이 살았다. 마을 사람들의 곁에 사는 귀신들은 때로는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하고, 때로는 우환을 가져다주거나 병에 걸리게 하는 등 해꼬지를 함으로써 푸닥거리를 하게 한 뒤 자신의 존재를 인지시키고, 마른 명태와 물밥을 얻어 먹었다. 하림에서 '숲나무'라고 하는 것을 다른 곳에서는 '당산(堂山)나무', '신당수(神堂樹)', '신수(神樹)' 등이라고 한다. 여기서 "당산(堂山)"은 '신당산(神堂山)', '환웅신당산(桓雄神堂山)' 등의 준말이다. 당산은 마을이나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마을 근처의 당산나무이다. 당산의 유래는 BC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환단고기,단군세기>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BC 1,891년에 11세 단군 도해(道奚)께서 오가(五加)에게 지시하여, 12명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택해서 그곳에 국선소도(國仙蘇塗)를 설치하게 했다. 그 둘레에 신단수(神檀樹, 神壇樹)를 많이 심고, 그 중에서 가장 큰 나무를 택해서 그 둘레에 제단을 쌓아서 그 나무를 환웅상(桓雄像)으로 삼고, 거기에 제사를 지냈다. 이것을 '웅상(雄常)'이라고 했다.(帝命五加하사 擇十二名山之最勝處하사 設國仙蘇塗하실새多環植檀樹하시고 擇最大樹하여 封爲桓雄像而祭之하시니 名雄常)" 이러한 기록을 보면 하림 숲은 소도( 蘇塗 =신당)와도 같은 곳이었고, 가장 큰 나무는 환웅상, 즉 나라와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겼던 것이다.
하림 숲의 나무를 함부로 베거나 잘못 건드리면 반드시 그 집안 또는 마을에 탈이 났다. 필자가 5~6살 때 장난을 친다고 누나 고무신을 숲의 당산나무 구멍 속에 숨겨두었다가 꺼낸 적이 있는데, 그 이후 며칠간 죽을 정도로 앓아 누워 있어야만 했다. 하림 숲 나무는 신목(神木)이다. 그래서 하림 숲의 느티나무에는 금기(禁忌)줄이 처져 있었고, 이 곳에서 매년 정초에 보름간 동신제(洞神祭)를 지냈다. 마을을 대표해서 동신제를 모시는 사람은 동신제를 모시는 기간에는 화장실에 갔다온 뒤 반드시 목욕을 해야 했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그리고 궂은 데를 가지 않아야 했고, 가능한 한 외부 사람을 만나지 않아야 했다. 또 궂은 소리를 하거나 듣지 않아야 했다. 보름간 정갈한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해 동신제를 모셔야 마을 사람들이 한 해 동안 큰 탈 없이 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전염병과 가뭄, 태풍, 홍수, 전쟁 등이 가장 무서웠다. 하림 숲의 나무에 사는 동신(洞神), 목신들에게 온 마을 사람의 한 해동안의 안녕을 빌었다. 하림 마을에는 별도로 당산(堂山, 성황당)이 없었고, 하림 숲이 그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하림 숲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그런 장소는 아니었다. 하림 숲은 마을 사람들의 휴식공간이기도 했고,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고, 문화, 교육의 장소이기도 했다. 하림 마을에는 1973년에 전기가 들어왔다. 그래서 내가 어린 시절에는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던 시절에 여름철에 점심을 먹고나면, 너무 더워서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온 마을 사람들이 숲으로 와서 숲의 그늘 밑에서 낮잠을 자기도 하고, 바둑, 장기를 두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아이들은 집에서 몰고온 소를 숲의 나무에 묶어 두고, 놀았다. 그들은 잠자리를 잡기도 하고, 공개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두어시나 되면, 줄을 지어서 방어산으로 소를 몰고 올라갔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하림의 숲에서 야학을 운영했다. 마을 청년들이 정규 학교교육을 받지 못 한 마을 사람들을 하림의 숲에 모아 놓고, 한글도 가르치고, 산수와 자연, 사회과목도 가르쳤다. 일제시대에는 군북초등학교 밖에 없었다. 하림초등학교는 1940년에 신산할매의 장남인 시옷할배(조용식趙鏞式,1,901-1,961. 조증래, 조일래, 조병래, 조경래, 조욱래, 조상래, 조중래, 조재만, 조상준, 조남준, 조동준 등의 조부)와 차남인 내인할배(조용권趙鏞權,1,909-?)가 학교부지와 설립자금을 희사하여, 설립했다. 하림초등학교는 1980년대말에 취학아동 수가 몇 명되지 않아서 폐교되었다. 일제시대에는 여자의 경우 소수의 사람만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1938년생인 덕암 아지매(전춘자)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시절에는 남자는 특별히 어려운 형편이 아니면 거의 다 초등학교는 졸업시켰지만, 여자는 15%만이 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형편의 사람은 좀 특별한 사람에 속했다. 일제에서 해방되는 1945년경에는 하림 마을 사람 중에서 정규학교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이 남녀 합해서 3/4쯤 되었다. 그 사람들을 숲에 모아 놓고, 가르쳤다.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추석날 하림 숲에서 연극을 했다. 하림의 연극은 그 지역에서 유명했다. 연극을 할 때면 군북면 내의 다른 마을의 사람들이 장구, 꽹과리 등을 치며, 떼를 지어서 구경왔다. 연극의 막은 감찰공파 종손집인 실안아지매 집의 이불, 담요 등을 말도 하지 않고 마구 가져와서 썼다고 한다. 연극의 막간에는 남촌 아제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조성제(1938년생) 아제가 짧게 웅변을 하기도 했다.
1944년 추석, 하림 연극의 기념사진. 맨 뒷 줄의 맨 오른쪽 분이 상정아제 조찬제(조태래의 부친)이고, 그 앞에 모자를 써고 서 있는 분이 나(조성래)의 부친 조임제이다.
1950년 추석 하림 연극 기념사진. 맨 뒷 줄의 오른쪽에서 두번째 학생 모자를 쓴 분이 나(조성래)의 부친 조임제(1932년생)이다. 맨 뒷줄의 왼쪽에서 두 번째 분이 수반아제 조범제(조호래, 1958년생의 부친)이다.
정두샘이
2021. 8. 6일 조호래(1958년생)님이 정두샘이에 피서 갔다가 물을 받고 있다.
여름철 오후 2시쯤 되면 어린 애들은 소를 몰고 방어산 쪽으로 올라간다. 숲에서 걸어서 홍골 골짜기로 약 30분쯤 올라가면 밀림사가 있다. 이 절은 내가 어린 시절에는 없었다. 1970년대 후반에 생긴 절이다. 밀림사 옆에 정두(井頭)샘이 있다. 이 샘은 석간수(石間水), 즉 바위 밑쪽에서 새어 나오는 물이다. 이 샘의 바로 아래쪽에 있는 암반에는 성인 머리만한 움푹 파인 바위구덩이가 있다. 어린 시절 소 먹이러 정두샘이까지 가서 소를 방목한 뒤 우리는 주로 정두샘이에서 놀았다. 정두샘이 물은 아주 특별했다. 한 여름에도 물이 얼음물 같이 차가웠다. 외가에 온 외손들이 정두샘이에서 덩물을 치면 온 몸의 땀띠가 거짓말 같이 싹 나았다. 당시에는 몸에 부스럼(피부병)이 많이 나고, 여름철에는 땀띠가 많이 났다. 우리는 누가 더 오래 정두샘이 물에 손을 담그고 버틸 수 있는지 내기를 하곤 했다. 모두 1분을 못 견디고 손을 빼내야만 했다. 왜냐하면 물이 얼음물 처럼 차가워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림 마을의 상수도 물은 다 이 정두샘이 물이다.
마당바위 방어산 꼭대기에 약 300평정도 되는 편편한 마당바위가 있다. 하림 본동 마을에서 올라가기에는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어렵다. 등산객들은 주로 나골(낙동마을, 마애사 쪽)로 올라간다. 방어산은 등산객들에게는 유명한 산이다. 마당바위 사진은 노래영상의 표지에 있다.
고바우(고바위)
조선 세조 때, 어계(漁溪) 조여(趙旅) 선생이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하림리 고바우
하림리 고바우에는 판서공 조신도(趙信道, 1554 -1595, 42세亡)와 감찰공 조민도(趙敏道, 1556-1592, 37세亡), 이 두 형제 할아버지의 정려비각((旌閭碑閣)이 있다. 판서공 할아버지의 정려는 임진왜란 직후인 1601년에 선조대왕의 지시에 의해 세워졌고, 감찰공 할아버지의 정려는 1816년에 순조왕의 지시에 의해 세워졌다.
고바우(고바위)는 하림 새터에 있는 명소다. 이 곳은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분인 어계(漁溪) 조여(趙旅, 1420-1489, 70세亡) 선생이 낙향하여, 낚시를 하며, 지내던 곳이다. 깍아지른 듯이 수직으로 서 있는 큰 바위들이 벼랑에 쭉 있고, 암벽에 멀리서도 잘 보이는 "百世淸風(백세청풍)"이라는 대명필이 쓴 큰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밑에는 조선시대 한시(漢詩)가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1900년대 초반에 새겨진 것이다. 百世淸風(백세청풍)은 백세(百世), 즉 자자손손(子子孫孫)이 청정한 가풍(家風)이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 밑에 새겨진 한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漁祖登臨日(어조등임일, 오늘은 중양절(重陽節)이다.(어계선조께서 구월등고시(九月登高詩)를 지은 날이다.) 溪山淸復淸(계산청부청, 음력 9월 9일이 되니, 개울물과 산이 더욱 청정하도다.) 後生誰不仰(후생수불앙, 후대 사람 중에서 어느 누가 어계 선생을 우러러 받들지 않으리요?) 百世樹風聲(백세수풍성, 어계 선생은 자자손손 길이 전할 가풍(家風)의 명성(名聲)을 세웠도다. *樹 세울 수) 後孫趙三奎稿(후손조삼규고, 후손 조삼규가 시를 짓다.)
이 고바우 암벽의 글씨는 글씨를 좀 잘 쓰는 지방선비가 쓴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글씨의 격과 에너지와 그 기상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예의 개념을 가진 사람 중에서 당시 조선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명필이 쓴 글씨로 보인다. 보통 조선의 정자나 재실, 향교, 서원 등에 걸려 있는 글씨는 이 정도의 격을 갖추지 못 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百世淸風(백세청풍)"이라는 이 글씨는 원북리에 있는 채미정(采薇亭)의 건물에 매우 큰 글씨로 붙어 있는 것을 하림 마을의 조삼규(1890-1950)님이 탁본해서 이 암벽에 새긴 것이다. 새긴 연대는 일제시대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 함안조가들이 이 글씨를 어느 정도로 대우했는지 알 수 있다. 이 글씨를 쓴 인물이 누구인지 자못 궁금하다.(2022. 8. 19일에 필자 관정 조성래가 이 백세청풍의 글씨는 중국 주자학을 창시한 주자(1,130-1,200)의 글씨임을 알아냈다. 상세한 것은 이 카페의 2022. 10. 5일자와 2021. 1. 6일자의 글을 보기 바람) 당시에 이런 대단한 글씨를 쓸 수 있는 명필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선조들이 실력과 안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생육신 어계 조여 선생의 부친 등 여러 묘를 모신 하림 부상토 산소의 규모와 그 석물(石物)들의 격(하림 부상토 산소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서 함안군청에서 벌초 등을 관리하고 있다)과 이 고바우 암벽의 글씨는 우리 하림마을의 자랑거리이자 함안조가 전체의 자랑거리이다. 5~6년 전에 서울의 한 유명한 미술경매에 "백세청풍"이라는 글씨의 탁본이 나왔다. 그것은 하림 고바우 암벽의 글씨를 탁본한 것이었다. 아마 일제시대에 탁본한 것이 아닌가 했다. 탁본의 상태도 좋지 않았고, 시작가도 물건에 비해 높아서(아마 60만원?) 나는 응찰하지 않았다. 고바우 암벽의 한시의 내용이 늘 궁금했는데, 조광제(1959년생)님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카톡으로 보내준 이 암벽의 글씨를 크게 확대해서 볼 수 있었기에 오늘 이 한시를 판독하고, 번역할 수 있었다. 대단히 기쁘다. 몇 년 전에 내가 이 한시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고 해도 저 멀리에 있는 암벽에 새겨진 글씨를 육안으로는 판독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함안군에서 다시 글씨에 칠을 해서 잘 보인다.
고바우는 채미정과 함께 조선의 선비들이 모여서 한시를 짓고,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이곳에 판서공할아버지와 감찰공할아버지의 애국충절심을 높이 사서 조정에서 이 두 형제 할아버지에게 내려준 정려비각(旌閭碑閣)이 2개 있다. 정려는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 충신, 열녀 등이 나온 마을의 입구나 그 집의 대문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서 표창하던 풍습이다. 고바위에서 약 5분정도 안쪽으로 들어가면, 서산사(西山寺)라는 절이 있다. 이것을 하림 사람들은 "고바우절"이라고 불렀다. 내가 어린 시절에 하림 사람들은 서산사나 이반성면에 있는 성전암(聖殿庵)에 많이 다녔다. 차가 없던 시절에 성전암에 갈 때는 공양미를 머리에 이고 산을 몇 개 넘어서 1시간가량 걸어서 갔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바쁜 농사철에도 하림의 아낙네들은 일손을 놓고, 절에 가서 공양미를 올리고, 불공을 드렸다. 하림 사람들의 불심(佛心)은 특별했다. 하림 사람들은 거의 다 매일 새벽에 집에서 염불을 하고, 가족들을 위하여, 특히 자손들이 탈없이 잘 자라도록 기도를 드렸다.
백이 숙제와 관련이 있는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채미정
채미정 모습
채미정(采薇亭菜캘채 薇고사리미 亭정자정)은 조선 생육신의 한 사람인 어계(漁溪) 조려(趙旅) 선생이 단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를 차지한 세조의 처신에 격분하여, 조정을 등지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여생을 보냈던 것을 기념하여 후대에 만든 정자다. 하림리 바로 옆 마을인 원북리에 있다.
서산서원
다시 조광제님의 노래를 들어보자.
댓글을 많이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조광제님이 이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고향 하림을 여러 차례 갔다고 합니다. 노래도 일품으로 잘 하고, 영상 촬영과 편집도 좋습니다. 정말 수고하셨고, 고맙습니다. 이 목소리와 노래, 또 영상도 1,000년은 족히 남을 겁니다. 30년 뒤, 50년 뒤, 백 년 뒤에 후손들이 이 노래를 통해 작사를 한 조선제님과 노래를 하고 영상을 만든 조광제님과 고향 하림의 모습과 풍속을 기록한 조성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남촌 조선제는 趙先濟가 아닌 趙善濟로 바로잡습니다. 용두산 엘레지 곡에 붙인 <방어산 찬가>는 하림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우리들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詩이자 가사입니다. 작사자이신 故 조선제 님께 무한한 영광의 인사를 올립니다.
몸소 체험으로 동영상을 제작하고 훌륭한 목청으로 노래를 불러준 하림 조광제 선생님께도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우리들의 역사에 길이 길이 남을 위대한 작품입니다.
하림 방어산과 하림숲, 고바위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주신 관정 조성래 님께도 역시 감사의 인사를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방어산 찬가>가 우리 후대들에게 보이고 들려주어 훌륭한 교욱자료가 되게 합시다.
교장 선생님 말씀이었습니다. 조우제 교장 선생님을 비롯하여, 모든 함안조가 여러분이 별 탈 없이 자신의 건강을 잘 지켜나가고, 함안조가 자손들을 잘 키워내는 것이 최고로 값진 일입니다. 폭염 속에서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관정 올림
좋은 노래, 좋은 영상 입니다~~~!
우제아재 광제아재 관정아우님의 좋은말씀
길이 남을 것입니다.방어산 찬가는 저에게
특별합니다.아버지께서 작사를 하시고 부자지간에 소주한잔 나눠마시면 집이떠나라 합창했습니다.이 노래만 들으면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菜薇亭(채미정) 小考에서 薇(미)는 고비미자입니다.고비는 고빗과의 다년생 양치식물 입니다.어린잎과 줄기는 먹고 뿌리는 한약재로 씁니다.고비를 데쳐서 갖은양념음하여 볶은 나물이
薇菜(미채)입니다.고사리 나물은 蕨菜라고합니다.고사리蕨字입니다.채미정은 우리조상들이 고비나물에 막걸리 한잔하시고 淸談을
나누셨던 정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