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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 01. 09(토)
■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와 성정각(誠正閣)
창덕궁에서 낙선재는 자유관람이 안되고, 인터넷예약후 특별관람만 할수있다.
운좋게도 평일이어서인지 자리가남아 예약안하고 들어갈수있었다.
창덕궁은 자유관람,일반관람,특별관람으로 나눌수가있는데, 각자 볼수있는 구역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 보려면 선택을 각각 해야하는 불편함이있다. 목요일의 자유관람때는 낙선재, 성정각을 제외한곳은 다 볼수가 있다. 창덕궁에 있는 낙선재의 위치다. 성정각은 바로 왼쪽이고...
▲창덕궁 성정각(昌德宮 誠正閣)
성정각(誠正閣)은 그나마 사방으로 문을 꼭 걸어닫아 행랑채 너머로 담장 너머로 발돋움을 해야 겨우 중허리까지만 볼 수 있다.
성정각은 본채에 덧붙여 누가 번듯하게 솟아 있다. 남쪽 편에 붙은 편액의 누 이름이 “희우루”인데 동쪽에는 또 “보춘”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가뭄에 단비를 맞기도 하고 또 동쪽에서부터 전해오는 봄기운을 맞기도 하려는 염원인가 헤아려진다. 성정각에 기대어 보면 남쪽에 길게 뻗은 행랑채에 “조화어약”, “보호성궁”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왕의 약을 지어 임금님의 몸을 보호한다는 뜻 일텐데, 원래는 내의원에 붙어 있던 것을 일제시기에 이곳이 내의원으로 쓰이면서 옮겨와 단 것으로 보인다. 마당에는 약재를 빻던 돌절구도 놓여 있다.
▲영현문(迎賢門)으로 들어간다.
성정각 남행각(南行閣)에는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데 이는 왕의 약을 지어 왕의 몸을
보호한다는 뜻으로, 이곳이 내의원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사실 내의원으로 이용된 것은 국권 강탈 이후일 뿐이며, 조선시대 그 어느 기록을 찾아봐도 내의원으로 활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내의원이라기 보다는 동궁 건물이나 임금의 별전구실을 담당했던 건물들로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것이다.
▲관물헌(觀物軒)이 뒤에있다.
▲보춘정((報春亭)의 현판이고...
● 관물헌(觀物軒)
성정각 뒷편으로도 꽤 큰 건물이 한 채 있다. 성정각의 북쪽에 있는 관물헌은 동궐도에서는 “유여청헌”이라 하였으며, 정조대에 창덕궁을 수리할 때에 관물헌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최소한 183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고종 21년(1884)에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편액은 달랑 '집희'두글지만 써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편액 글씨치고는 서툰 글씨이다. 갑자년에 쓴 어필로 표기되어 있다.
갑자년이라면 1864년 고종원년이고 그해 고종은 열세 살이었다. 열세 살짜리 소년왕이 무언가 기념해서 편액을 쓴 듯하다.
"집희"란 "빛남 밝음 인격이 계속하여 오래 빛남이라”는 뜻과 "계승하여 넓힘"이라는 뜻이 있다.
건물 이름 끝자로는 대개 "전, 당, 합, 각, 재, 헌, 루, 정" 가운데 하나가 붙게 마련인데 단지 '집희'라고만 했으니, 집희전은 아닐테고 집희당이라는 것인지 집희각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혹은 건물 이름이 아니라 “이 건물에 사는 사람의 인격이 오래 빛나기를” 바란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새로 왕이 되었으니 왕위를 계승하여 밝히겠다는 의지의 표명인지 모르겠다.
이 건물의 본 이름은 '관물헌'이다. 왕이 이런저런 형식으로 신하들을 만나고 또는 경연을 열고하는데 어느 한 건물에서 그런 일을 모두 처리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건물들을 옮겨 다녔다. 그렇게 왕이 주로 활동하는 공간이 내전의 주요 부분을 형성하는 것이 창덕궁의 건물로는 희정당, 성정각, 관물헌이 그에 포함된다.
▲밖으로 나오니 서적을 보관했던 칠분서와 삼삼와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승화루다.
▲창덕궁 관물헌(昌德宮觀物軒)
▲관물헌[昌德宮] 뒤의 굴뚝.
▲창덕궁 희우루 현판(昌德宮 喜雨樓 懸板)
▲대각선에서 바라본 창덕궁 희우루(昌德宮 喜雨樓).
▲승화루 정면모습. 이곳은 통제구역이라 들어갈수가 없었다.
▲낙선재 (樂善齋)
서울 창덕궁(昌德宮) 동남쪽에 자리잡은 조선 후기 건물. 1847년(헌종 13)에 건립되었는데, 몸채인 보소당(寶蘇堂)과 석복헌(錫福軒)·수강재(壽康齋)·한정당(閒靜堂)·상량정(上凉亭)들이 승화루(承華樓)와 연결되어 있다. 장락문(長樂門)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낙선재 몸채가 있고, 그 서쪽면에 새로 지은 신낙선재가 있다.
보소당은 정면 6칸·측면 2칸에 누마루가 튀어나온 단층 팔작집으로, 장대석(長臺石)으로 층쌓기를 한 기단 위에 방주를 세워 익공(翼工)식으로 꾸몄다. 특히 이 낙선재의 뒤뜰은 석단(石段)으로 화계(花階)를 조성하고 석함(石函)·석련지(石蓮池)·굴뚝을 조화있게 늘어놓았으며,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된 담장으로 둘러 막아 한국 전통적 정원의 대표적인 실례를 보여 준다. 또 아름다운 창살·난간·굴뚝·담장들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다.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창덕궁에서 들어가도록 되어있는 건물로 창덕궁의 동남쪽에 창경궁과 이웃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승정원 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에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된 건물로서 국상을 당한 왕 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를 뒷 받침하는 예로 낙선재 바깥 뜰에 사각정이 있다. 4면에 亞자분합문 과 고창을 둔 것으로서 관을 발인할 때 까지 두던 빈전이다. 일반의정자와는 그 용도가 크게 다른 건물이라 하겠다.
1926년에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계후인 윤비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고 이방자여사도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에 타계한 뒤로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1820년대 제작된 동궐도에서는 낙선재의 모습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서쪽에 낙선재가 있고 행각으로 둘러싸니 동쪽에 “석복헌”이 있고 다시 그 동쪽으로 “수강재”가 있는데 이 건물들을 통틀어 낙선재라 한다. 원래는 석복헌과 수강재 남행각 밖으로 중행각이 둘러 있고 다시 그 바깥쪽으로 외행각이 길게 늘어서 있었으나 중행각 외행각은 철거되었다.
순조 28년(1828)에 건립한 연경당보다 20년 뒤에 세워진 낙선재는 궁궐에 조영되는 주거 건축술로서 그 구성의 법식과 보존 상태가 훌륭하며 특히 연경당보다는 낙선재가 지형과 환경에 따라 자유분방하며, 다양한 건축물을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12칸의 낙선재 남행각에 있는 “장락문”이 정문이 되며, 장락문의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글씨이다.
▲장수를 기원하여 거북이 등모양의 문양이다.
▲불의 기운을 누른다는 의미로, 얼음깨지는 문양.
▲들어걸개문. / 겨울에 이문을 닫으면 추위를 막을수있고, 여름에는 이처럼 올리면 된다.
▲석복헌으로 가는도중의 골목.
▲왼쪽건물이 석복헌이고 앞의 문을 들어가면 수강재다.
▲창덕궁 석복헌(昌德宮 錫福軒)으로 들어가는 문.
▲소박한 건물의 창덕궁 석복헌(昌德宮 錫福軒)
헌종 14년에 경빈 김씨를 위해 지었다. 경빈김씨는 왕의 부인역할과 대왕대비의 손부역할을 하기위하여 낙선재와 수강재사이에 거처
해야한다는 이유에서다.
▲부엌인줄 알았으나 아궁이만있는 부엌이다.
▲수강재((壽康齋)
▲수강재((壽康齋)는 정조 9년에 지어졌으며, 동궁의 영역으로 익종이 동궁으로 사용하였고, 후에 헌종 14년에 대왕대비의 거처로
중수되었다.
▲수강재를 나와 뒤쪽으로 이동.
▲뒤에있는 아기자기한 문을 지나간다.
▲낙선재의 뒤쪽문양이 다채롭다.
▲뒤쪽에서 재미있는 굴뚝모양들. 하나짜리. 두개짜리, 세개짜리...
▲다양한 모양의 추녀 기와문양.......거미문양, 박쥐문양, 청룡, 봉황문양 등.
▲낙선재 뒤의 괴석전시장.
▲저 문을 지나 상량정(上凉亭)으로 향한다.
▲낙선재의 후원모습.
▲벽돌 쌓은모습이 아주 정교하다.
▲창경궁 상량정(昌德宮上凉亭)
낙선재 화계 뒤쪽의 후원인 높직한 터 위에 자리한 육각정의 누각 건물이다. “궁궐지” 나 “동궐도형”에서는 육우정, 곧 “평원루”라 기록 하고 있다.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안쪽으로 다시 한 단을 돌려 쌓고 그 위에 육각형의 돌기둥으로 하층을 세운 뒤 그 위에 계자 난간의 툇마루를 구성하였고 난간의 궁판에는 투각하여 치장하고 난간 하부로도 낙양을 두어 장식하였다.
위층의 벽에는 육각형의 기둥사이로 사분합문의 창살 구성이 독특하고 공포는 일출목의 다포형식이며, 겹처마의 육각지붕 정상에는 절병통을 설치하였다. 내부의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되었으나 중도리 안쪽 육각형의 부분은 마름모꼴의 소란반자로 구성하고 봉황과 용과 박쥐문양으로 화려한 단청을 베풀었다. 궁궐에 있는 소규모의 정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치장된 건물이다.
▲만월문(滿月門)
상량정(上凉亭)의 서쪽 담장에 있는 문으로서 전돌로 만월형의 출입구를 내고 좌우로 밀어 열게 된 넌출문이 달렸다. 바깥쪽 문
좌우 담벽에는 수복등의 길상무늬와 꽃무늬로 가득하게 채웠다. 궁궐의 협문으로는 유일하게 원형으로 만든 아름다운 문이다.
▲만월문 밖에 승화루(承華樓)다. 우측은 삼삼와로 연결된다.
▲승화루(承華樓)
상량정(上凉亭) 서쪽에 있는 승화루(承華樓)를 “창경궁 궁궐지”에서는 창덕궁 후원 이 주합루(宙合樓)에 비견하여 소주합루라 하고, 아래층을 “의신각(儀宸閣)”이라 하였다. 연경당의 정문과 낙선재의 정문이 다 같이 장락문인 점과 주변의 누각을 주합루와 소주합루라 한 것에서 창덕궁의 주합루와 창경궁의 낙선재와 승화루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주합이란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합루의 아래층인 규장각은 서고로 사용되고 위층은 어진 어제 어필 보책들을 보관하기도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선왕의 작품과 동서고금의 책들을 수장하여 시공이 합치되는 건물이라는 이름이 이해가 되나 소주합루가 같은 용도로쓰였는지는확실하지 않다.
다만 아래층의 이름이 의신각으로 제도의 궁궐이라는 뜻이므로 각종 의궤와 법규책을 보관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볼 따름이다.
순조대에도 “소주합루”라 불리던 건물이 승화루로 바뀐 시점 분명하지 않지만 헌종대에 낙선재를 건립한 뒤로 짐작된다.
건물의 아래층은 현재 전부 개방되어 있으나 동궐도에서는 여기에 방을 꾸민 것으로 표현되어 있고 현재의 돌기둥 아랫부분에 인방이 끼이는 홈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철거된 것으로 판단된다.
▲문양이 참 아름답다.
▲왼쪽문으로 나가면 한정당이다.
한정당(閒靜堂)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에 각기둥과 굴도리를 사용한 건물이며, “동궐도형”과 “조선고적도보”의 배치도에서는 이 자리가 빈터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서는 1917년 이후에 옮겨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가운데에 2칸만 앞퇴를 두고 동쪽 칸은 누 마루로 구성하였고 전면을 제외한 3면에는 쪽마루를 두고 그 위로 亞자 난간을 둘렀다.
기단은 정면의 2칸 부분만 두벌대의 장대석으 로 두르고 앞마당에는 석분과 괴석의 운치를 더하였다. 툇마루의 서쪽벽에도 창문을 설치하여 필요에 따라 여닫도록 된 것과 변형된 亞자분합문이 한가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유리로 마감되어있는것이 기이하고 특이이다.
▲창덕궁 석복헌(昌德宮 錫福軒)
▲취운정(翠雲亭)으로 가는길이다, 취운정은 이 부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취운정(翠雲亭)
수강재(壽康齋)의 뒤뜰 화계 위에 자리잡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평면에 굴도리를 사용한 팔작지붕의 건물로서 서까래가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각재인 점이 특징이다. 이 건물은 숙종 12년(1686)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동궐도에도 표현되어 있는 건물이다.
평면상으로 4면의 바깥기둥 사이에는 亞자 난간을 두르고 안쪽 기둥에만 문짝을 달아 4면의 툇칸이 개방되어 있어 좁은 대지를 여유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서쪽의 담장에 일각문이 있어 석복헌 뒤쪽의 한정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취운정(翠雲亭) 처마 기와의 문양이다.
▲취운정(翠雲亭) 앞의 문을통하여보니, 바로 아래에는 창경궁의 함인정(涵仁亭)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문을 닫아놓아, 이번기회에 귀한사진을 찍을수 있었다.
▲창경궁의 동궐도(宮闕圖)
왼쪽에 취운정(翠雲亭), 오른쪽에 명정전(明政殿), 빈양문(賓陽門)이다.
▲수강재(壽康齋)로 내려선다.
▲박쥐문양의 처마 기와.
▲낙선재(樂善齋)밖의 전경.
낙선재는 인터넷 예약 해야만 관람 가능하지만, 운좋게 인원이 남아서 바로 표를 구매한후 입장할수 있었다.
낙선재와 성정각은 목요일 자유관람할때도 들어갈수 없으므로, 부득이 낙선재관람만 따로 해야만 한다. 하루
두번 오전10시20분과 오후 2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