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 동지여! 우리를 용서하시오.
벌써 25년인가. 세월이 불화살처럼 흘러 어느덧 사반세기가 되어 버렸다. 해마다 오월이 오면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과 다짐을 한결같이 해오건만, 올해도 우리는 열사들 앞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해놓은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기를 쓰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사회발전을 위해 달려왔지만, 막상 오월에 우리의 모습과 성과물을 돌아보면 마냥 초라하고 별 볼일 없어서 저절로 저승에서 지켜보고 있는 동지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윤상원 동지! 우리를 용서하시오.
윤상원 동지는 오월의 많은 열사들을 조직하고, 앞장서 투쟁을 전개하며 마침내 ‘해방의 10일’을 창조해 그 공간을 껴안고 죽었다.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1980년대의 역사를 밀어올린 원동력이 되었고, 한국 사회운동의 질을 한 단계 높였다. 동료와 후배들에게 “나가서 해야 할 일들을 해야 한다”며 ‘살 곳’으로 내보내면서 윤상원 동지는 스스로 ‘죽을 곳’에 남아 서른 살의 삶을 장렬하게 마감했다. 동지들을 떠나보내고 계엄군이 시시각각 도청으로 진입해 들어오던 그 시각에 윤상원 동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알세례로 벌집이 되고 화염방사기에 온몸이 불타던 순간에 꿈꿨던 간절한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윤상원 동지가 우리에게 던진 첫 번째 메시지는 ‘나는 동지들을 믿고 죽으니 살아서 열심히 싸워 달라’는 것이다. 민주화를 위해 철저하게 싸우고, 그것이 달성되면 사회발전을 위해 싸우라는 당부다. 이를 위해 자신은 죽어서 역사의 증언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두 번째 메시지는 운동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던지는 실천을 통해서 비로소 시작된다는 기본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편안한 직장인 주택은행을 때려치우고 노동자들 곁으로 달려간 것이나 소그룹주의를 버리고 전국적인 운동에 참여한 것, 살 길을 찾는 대신 죽는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일관된 윤상원 동지의 실천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세 번째 메시지는 민주화와 사회발전, 조국통일은 목숨을 버리는 각오를 해야만 비로소 조그만 열매도 맺을 수 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일하라는 것이다.
1980년 5월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오월정신을 얘기하고 관련법까지 만들어 망월동 묘역은 국립묘지로 공식적인 복권이 이뤄졌지만, 항쟁을 이끈 윤상원 동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 박제화 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뜻을 이루었다고 말할까? 민주화가 진전되고 문민, 국민, 참여정부가 들어섰으니 죽은 보람이 있다고 생각할까? 아니다! 2005년 5월은 죽은 윤상원만 남아있지 그가 꿈꿨던 세계는 아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압박이 계속되고 한쪽 겨레들은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신음하고 있으며, 이 땅에는 실업자가 넘쳐나고 어렵고 힘든 이들이 갈수록 팍팍해지는 현실에 어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역사의 현장에서 도망치거나 골방에 숨어서 눈치를 보았던 자들, 군화발의 총칼에 굴복해 백기항복을 했던 자들이 투사를 자처하고 오월을 코에 걸고 다니는 현실은 말할 수 없이 참담할 것이다.
현실의 역사는 비록 살아남은 자들의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오늘의 오월이 이렇게 오염된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무능 탓이라고 질책하는 것 같다. 그렇다! 80년 오월이 불과 사반세기만에 이렇게 박제화 되고 열사들을 편히 잠들지 못하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 탓이 아니라 바로 ‘내탓’이다.
살아남은 우리가 좀더 윤상원 동지의 뜻을 높이 세우고 더 철저하게 살았다면 오늘의 현실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윤상원 동지와 함께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을 조직했던 필자는 전두환 정권 타도투쟁으로 ‘까막소’ 생활을 했다는 핑계로 오월의 깃발을 높이 들지 못했다. 노동일보에 윤상원관(觀)을 만들어 실천하고자 했으나 그들 역시 열사의 뜻보다 자신을 챙기기에 더 급급했고 오월운동의 깃발은 끝내 올라가지 못했다. 윤상원 동지를 뵐 면목이 없는 것이다.
지금도 필자의 귓전에는 윤상원 동지의 목소리가 쟁쟁하다. “형님, 서울은 어쩌요? 조직방침은 정하셨소? 여긴 살벌하요. 대검으로 마구 찌르고 개 패듯 패서 끌고 가는디 죽은 애기들도 있는갑소.” 19일경의 통화는 비분감이 잔뜩 배었다. “그냥 못 있겠소. 화염병도 만들고 무장도 해야겄소. 전국에 연행된 동지들이 없다면 다행이오만 우리는 갈 데까지 가야겄소.” 마지막 통화는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를 시민군이 장악하면서 시외전화가 끊어지기 바로 직전인 21일경이었다. “형님!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 투쟁을 조직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몰살당하요.”
80년 봄에 넘쳐났던 운동역량들은 검거선풍에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나 미약했다. 대부분 골방에 숨어버렸다.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윤상원 동지는 싸우다 장렬히 몸을 던졌다. 필자는 끝내 광주에 들어가지 못했고, 평생 한(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