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강화군 천주교 순교성지 순례
주위를 돌아보면 먼 이국땅을 찾지 않아도 우리의 가까운 곳에서도 자신이 의탁하여
지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모순을 극복하고 참다운 삶의 방편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졌던 믿음에 대한 답을 찾고 마음의 안식을 얻을수 있는 곳들이 꽤 있어요.
특히,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그곳을 실제 찾지 않아도
마치 내가 다녀온 듯한 정성어린 생생한 사진과 글들이 수도 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발품을 팔고 시간을 들여서 구지비 그곳을 찾는것은
사진이나 글로써 다 접할수 없는 마음의 빈칸을 채우려는 다른 뜻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집에서 한시간 거리박에 되지 않는 강화도의 카톨릭 성지 몇군데를 드라이브 삼아서
둘러보고 왔습니다.
모든이 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의 시간속에서 내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을 만들고 내어
이렇게 잠시 잠깐 그곳을 둘러보는것이지만 어느 한순간만은 간절한 바람이 들어 있을수밖에 없고
어느 한순간은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니 이보단 더 귀한 시간이 어디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일 먼저 찾은곳은 갑곶순교 성지라 불리는 곳입니다.
주소명은 도로명강화군 강화읍 해안동로1366번길 35지번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00 으로 나옵니다.
이곳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라 일컬어지는 과거로의 여행을 잠시 떠나 보아야 합니다.
조선말 나라는 병들어 가고 있고 서구 열강은 병들어 버린 이 작은 조선에서의 기득권 확보를 위해서
하나 둘씩 문호를 개방하고 자신들의 사상과 문화를 받아 들이기를 강요합니다.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문호를 개방하여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일으켜 보자는자는 개혁파와
기득권 세력의 대표로 회자되는 대원군을 비롯한 쇄국파가 첨예하게 대립을 하는 상황에서
그 당시 조선의 기득권 세력이였던 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확실하게 시행하기 위해서는 이전부터
알게 모르게 조선에 들어와 있던 천주교를 탄압하는 것으로 쇄국 정책의 본보기를 삼고자
탄압을 시작합니다.
결국 이른바 병인 사옥이라 일컬어지는 사옥을 일으켜 그 당신 조선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의 신부와
조선의 천주교도 수천명을 참혹하게 죽이는 일을 지시합니다.
이후에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댓가로 프랑스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올것이라는 풍문이 확산되고
있던 차에 미국의 중무장 상선인 제너럴셔먼호란 배가 불어난 강물을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조선과의 통상과 교역을 종용하게 됩니다.
이후에 대동강의 강물이 줄어들어 배의 통행이 어렵게 되고 셔먼호의 승무원들은 조선의 관리를 납치하는등
도가 넘는 행동을 하기 시작하고 결국 조선의 군민과의 충돌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충돌 과정에서 미국의 상선인 제녀럴셔먼호가 불타고 그 배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은 전원 사망하게
됩니다.
이후에 미국은 이 사건을 빌미로 하여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오늘 찾은 강화도를 쳐들어 오는
신미양요를 일으키게 됩니다.
강화도의 여행 정보를 찾아 보가나 그곳을 찾아 길을 가다보면 아주 많이 거론되는 지명들이
있습니다.
"초지진,덕진진,광성보" 등 말입니다
다들 우리의 아픈 과거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곳입니다.
그럼 이러한 지명들에서 무슨일이 벌어 졌는지 아래를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내용은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상륙 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 등이 동원되었다.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
미군은 6월 11일에는 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거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성보(廣城堡)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쇄국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였던 대원군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들은
점점 서구 문명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라 불릴수 있는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심해지고 다시 또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가중 됩니다.
이땅에서 벌어진 이러한 과거의 슬픈 카톨릭의 역사속에서 그 당시 미국 함정에 왕래 하였던 천주교도중
박상곤,우윤집,최순복이 잡혀 들어가게 되나 자신들의 믿음을 버리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하게 됩니다.
인천 카톨릭 교구는 이러한 슬픈 우리의 카톨릭의 역사를 잊지 않고 그 순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이곳을 구입하여 거룩한 순교성지로 조성한곳이 바로 강화도 갑곶성지라 불리는 곳입니다.
제6회 인천교구 순교자현양대회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있는 갑곶순교성지에서
제6회 인천교구 순교자현양대회가 열렸습니다.
묵주기도(고통의 신비)와 103위 성인호칭기도를 봉헌하였습니다.
주교님을 비롯하여 사제단이 입장하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꽃가마 유해가 입장할 때는
모든 신도들이 머리 숙여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맞이하였습니다.
천주교 인천교구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님의 집전으로
미사가 봉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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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초기부터 천주교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철종의 할머니 송씨와 며느리 신씨에게 각각 마리아로 세례를 준 것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왕족이었던 이들이 18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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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기해박해 때는 육로를 통한 천주교 신앙유입이 여의치 않차
한강과 맞닿아 있는 강화도 연안 뱃길을 이용하게 됩니다.
특히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를 입국시키기 위해 해로를 개척하려고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갑곶 앞바다까지 오게 됩니다
이처럼 강화 갑곶해안은 선교사들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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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때는 강화도가 혼란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대원군은 천주교 금지령을 내려 몇 개월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인 수 천 명을 학살하는 사건을 일으키는데,
이로 인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하게 됩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순교하였는데,
이 곳 강화도에서도 1868년에 진무영(현재 강화성당 부근)에서
최인서, 장치선, 박서방(박순집의 형), 조서방 등이 순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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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871년에 이곳 갑곶에서 순교사건이 일어납니다 .
강화도에 미국함대 4척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대원군이 이를 거절하게 되면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신미양요)
이 사건으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였습니다.
갑곶에서 순교하신 분은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세 분이십니다.
이 분들은 미국 군함에 몰래 찾아간 일로 효수형에 처하게 됩니다.
<천주교 갑곶순교성지 팜프렛> 중에서
오늘은 이 땅에서 순교하신 분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날입니다.
형제 여러분,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신 하느님께,
우리도 제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청합시다.
인천교구에서 오신 많은 신자들로 가득 찬 갑곶성지 모습입니다.
멀리 옛 강화다리가 보입니다.
갑곶성지로 내려 가는 나무계단이 참 아름답습니다.
사제단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강화성당 홍승모 미카엘 주임신부님이십니다.
인천교구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님
성지를 가득 메운 신자들, 멀리 강화대교가 보입니다.
성인유해 행렬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유해가 꽃가마 타고 들어 오십니다.
주교님의 주례로 미사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성가대가 특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성찬 전례'에 참여하고있습니다
두번째로 찾은곳은 성공회 강화 성당 입니다.
주소지는 도로명강화군 강화읍 관청길27번길 10지번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22로 나옵니다
이곳은 국내에서 최초로 건립된 한식 목조 구조물의 성당으로 알려져 있네요
오늘 제가 찾은 시간에도 그 성당안에서는 그곳의 역사를 이해하고 참다운 신앙의 길을
걷고 계시는 많은 분들이 신부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뜻 깊은 시간을 보내고 계시는걸
볼수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다른곳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는데요.
성당이 있는곳의 위치가 다른곳보다 높은곳에 있더군요, 아마도 처음 성당을 지을적에
다른 뜻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곳 주위에는 우리의 역사를 살펴 볼수 있는 고려궁지등 많은 유적지가 있으니
한번 가신다면 다른곳도 살펴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사랑의 송가
세고천 작사
전오승 작곡
한명숙 노래
바람 결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지금은 그대의 마음 변했나
영원토록 변치말자던 님의 말이
지금은 이슬같이 사라졌네
차라리 몰랐던들 몰랐던들
이마음 그대 생각 않을것을
이마음 그대 사랑 않을것을
<간주>
차라리 몰랐던들 몰랐던들
이마음 그대 생각 않을것을
이마음 그대 사랑 않을것을
2017-07-14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