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반도체, 산업재해 은폐하려 했나?’ 보도 그 후
-정웅재 기자
월간 『말』은 2007년 4월호에서 초일류 기업 삼성반도체의 산재은폐 의혹(기사제목, 세계 일류 삼성반도체, 산업재해 은폐하려 했나?)를 보도했다.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97년 이후 6명이 백혈병에 걸렸고 이중 5명이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3라인에서 일하던 두 명의 젊은 여성이 잇달아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해 산업재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기사의 요지였다.
이 기사는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2007년 3월 6일 사망한 황유미(당시 23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의 제보로 작성할 수 있었다. 황상기 씨는 딸이 백혈병에 걸리고, 같은 라인에서 일하던 여성이 백혈병에 걸려 숨지자 산업재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월간 『말』에 사실을 제보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회사측은 보도를 통해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애썼다. 『말』이 취재를 시작하자, 삼성반도체 홍보팀 관계자들이 『말』사무실 앞까지 찾아왔다가 되돌아가기도 했다. 회사는 황 씨에게는 보상을 해주겠다면서 시끄럽게 만들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말』 4월호가 발행되자 보상 얘기는 쏙 들어갔고 회사는 더 이상 황상기 씨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어린 딸의 장례식을 치르고 황상기 씨는 어찌할지 몰라 막막해 했다. 속초에서 개인택시를 하며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던 그는 유미 씨 치료비를 감당하느라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아내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니고, 그의 어머니도 유미 씨가 병에 걸린 후, 돌아가시고 말았다. 산업재해라는 그의 주장에 회사는 업무와 관련없는 개인질병이라며 해 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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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의 백혈병 환자가 발생한 기흥 소재 삼성반도체 공장 |
ⓒ 월간 말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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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8개월 여. 황상기 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유미 장례식 치르고 남은 돈과 골수이식수술 받으려고 골수 기증자한테 줬던 700만원 찾고, 유미가 국민연금 냈던 것 찾아서 빚은 다 갚았습니다.” 12월 중순 기자와 통화한 황상기 씨는 “그럭저럭 살아간다”라며 위와같이 말했다.
그러나 황상기 씨에게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하나 남아있다. 바로 유미 씨의 발병이 산업재해라는 것을 인정받는 것. 황상기 씨는 노동자 건강권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단체인 ‘건강한 노동세상’ 등의 도움을 받아 작년 6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보상신청을 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산재여부 판단을 위해 산업안전공단에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역학조사를 의뢰했다. 산업안전공단은 9월 화학물질노출평가 등 기흥공장 환경평가를 실시했다.
작업환경과 백혈병 발병의 연관성을 파악하기 위한 역학조사 결과는 산재여부를 판단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역학조사 후 3개월이나 지났지만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와관련 김은아 산업안전공단 연구원은 “12월 28일 역학조사평가위원회가 열릴 것”이라고 말해, 역학조사결과는 곧 나올 것으로 보인다. 황상기 씨는 “역학조사 결과가 안 좋게 나와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재심사청구, 행정소송 등을 통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2명 추가 발병 확인, 모두 8명으로 늘어
한편, 삼성반도체에서 백혈병 환자가 추가로 발생해 산업재해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2004년 12월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 입사한 박 아무개(21) 씨는 2007년 7월부터 얼굴에 멍이 들고 어지러운 증상이 있어 병원에 갔다가, 9월 12일 대전성모병원에서 급성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박 씨는 2차 항암치료를 마치고 경과를 지켜보고 있다. 그는 온양공장 근무당시 검수부에서 일했으며 화학약품도 취급했다. 박 씨의 주치의는 박 씨를 처음보곤 ‘(평소) 화공약품을 만졌냐?’는 질문을 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주 아무개(48) 씨도 추가로 파악된 백혈병 환자다. 주 씨는 83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그는 2006년 1월 퇴사해 삼성전기로 직장을 옮겼고, 3월 백혈병이 발병했다. 8월 골수이식수술을 받고 낫는 듯 했으나, 면역계 이상으로 폐렴에 걸려 투병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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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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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발병 사실은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 및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에 가족들이 제보를 하며 알려졌다. 대책위에는 건강한노동세상, 삼성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민주노총 경기법률원, 다산인권센터 등 10여 개 단체가 참가하고 있다. 대책위는 다음에 카페(http://cafe.daum.net/samsunglabor)를 개설해 제보를 받는 한편, 백혈병 발병자들의 산재보상 신청을 돕고 있다. 최근 박 아무개 씨도 산재보상을 신청하겠다는 의사를 대책위에 밝혔다.
기자가 2007년 3월 황유미 씨 건을 취재할 당시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홍보그룹 관계자는 97년 이후 모두 6명이 백혈병에 걸렸고, 이중 5명이 숨지고 한 명이 완치돼 근무하고 있다고 밝혔었다. 이 관계자에게 확인한 결과, 2006년 3월 발병한 주 아무개 씨는 6명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즉, 주 씨와 박 아무개 씨의 발병(2007년 9월) 사실 추가 확인으로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는 모두 8명으로 늘어났다.
반도체 생산공정 노동자들의 건강권
회사는 안전한 작업환경을 위해 1천억 원을 투자하고 있어 업무상 재해가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쓰이는 수 십 가지의 유해화학물질과의 연관성이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다.
3라인에서 같은 일을 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황유미 씨와 이숙영 씨의 주치의였던 아주대학교병원 박준성 교수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의 원인에는 다양한 항암제, 방사능 조사 및 벤젠이나 유기용매에의 노출이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본 환자들에서도 수년간 다양한 화학물질 또는 유해물질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로인한 백혈병 발병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라고 밝힌 바 있다.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박 아무개 씨는 “클린룸에서 입는 방진복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이물질로부터 반도체 칩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말했다.
2006년 초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을 방문한 바 있는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공장을 자세하게 살펴보지 않아 조심스럽다면서도 “장치산업이라 문제가 전혀 없을 수는 없다. 특히, 시험가동 단계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조그만 사고들을 겪으면서 보완해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 “삼성에서도 가스 유출 사고는 있었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라고 덧붙였다.
반도체산업은 먼지가 없는 클린룸에서 하얀색 방진복으로 온 몸을 감싼 노동자들이 일하는 이미지로 깨끗한 산업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반도체 제조시설은 백 가지 이상의 화학물질과 수십 종의 유독물질이 사용되는 위험사업장이다. 2004년 환경부가 실시한 유해화학물질 배출량 조사에 따르면, 반도체 제조업이 포함된 ‘전자부품, 영상, 음향 및 통신장비제조업’은 모두 58종의 화학물질을 배출해,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의 적용을 받는 36개 업종 가운데 유해화학물질 배출이 네 번째로 많았다.
삼성반도체 제조 공정의 생산직 노동자들은 적게는 8시간에서 많게는 12시간까지 일한다. 4조3교대로 주야가 뒤바뀌는 생활은 노동자들의 면역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유해화학물질 노출의 위험성도 안고 있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 발병이 업무상 재해의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보는 이유다. 때문에 대책위는 이번 기회에 반도체 생산공정 노동자들의 건강권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점검하는 계기로 삼고자 노력하고 있다.
월간 『말』은 2007년 4월 이후 약 8개월 여 만에 삼성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발병 사건을 다시 지면에 옮기게 됐다. 그새 두 명의 추가 발병자가 새로 확인됐고, 황상기 씨에 이어 박 아무개 씨가 산재보상신청을 할 뜻을 밝혔다. 『말』은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이들의 죽음이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때문에 앞으로도 대책위의 활동에 주목할 계획이다.
기사입력 : 2007-12-24 17:36:16
최종편집 : 2007-12-27 09:39:32
ⓒ월간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