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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6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요한복음 1: 1-18
살러 오신 하나님
투명인간
엊그제 뉴스 중에 캐나다에 소재한 “하이퍼스텔스 생명공학”이라는 회사가 투명망토를 개발했다고 한다. 투명망토는 영국작가 조앤 롤링이 쓴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에 나오는 망토인데, 사람이 이를 쓰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망토이다. 개발한 망토를 실제로 잔디밭 위에 사람이 이 망토를 덮고 숨었는데, 잘 구분이 안 된다. 빛의 굴절각도를 바꾸는 기술을 섬유에 적용해서 군수용으로 만든 것인데, 자기들 말로는 발에 걸려 넘어지기 전에는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망토를 써서 자기를 감추는 것 대신에 영화에서는 약물이나 방사능 실험으로 아예 몸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등장사키고 그를 <투명인간>이라고 부른다. 얼마 전에 나온 영화 <할로우맨>에서 할로우는 속이 비었다는 의미인데, 투명인간이란 껍데기로 걸친 옷만 보이고 그 속은 완전히 공허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걸친 옷을 벗어버리면 아무도 그를 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소설이나, 영화는 대개 인간의 끔과 욕망을 현실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사람은 스스로 가끔 내가 안 보이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는 말이다. 몸이 사라지는 상상이다. “나를 감추겠다”는 상상, 보이지 않는 몸에 대한 상상력이 영화로 펼쳐지는 것을 보면, 대개 현실도피적이거나 폭력적이다. 다시 말하면 그다지 선한 의도로 사용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몰래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엿보는 스파이들이 갖고 싶은 능력이고,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에서 나온 것이다. 어렸을 때 학교 파하고 친구들과 놀다보니 집에 들어갈 시간이 한 참 지났다. “나를 찾고 난리 났을텐데, 이대로 들어가면 무척 혼이 날 것 같아서, 몰래 눈에 안 띄게 들어가서 아까부터 집에 있었던 척하면 안 혼날 터인데,” 상상해 보는 물건이 투명망토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투명인간 영화의 결말은 언제나 똑같다. 자기 몸이 보이지 않는 것을 처음에는 즐기다가 나중에는 심하게 후회한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몸이라는 것은 때로 거추장스러운 것일지 몰라도,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내 영혼이 나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여도, 언제나 내 몸과 협력관계 속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몸이 부자유스러워 보면 이것을 금방 알게 된다. 그만큼 몸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몸이 중요한 분이 또 한 분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육신
요한복음 1장14절에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말이 나온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지금 여러분 귀에 생소하게 들리면, 초신자이고, 익숙하게 들리면 <교리교육>이 끝난 교인이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성육신신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을 한 단어로는 “육화” 또는 “화육” incarnation 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하면 이 말은 “본래는 몸이 없었는데, 나중에 몸을 덧입었다.”는 말이다. 누가 그런 분인가 하면 바로 “주님”이 그런 분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매우 혼란을 초래한다. 예수는 분명히 마리아의 몸에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몸을 입고 출생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지내고 있는 대림절이 바로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이고, 성탄절에 주님이 태어난다고 알고 있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복잡한 표현이 왜 필요한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한마디로 마태와 누가복음이 말하는 예수 탄생과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탄생을 설명하는 방식이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의 실제적인 출생을 설명하는데 주력한 것이고, 요한은 이 탄생의 신학적인 의미를 밝히는 데 주력하였다.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이신데 그분에게 <몸>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요한복음은 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데, 인간과 동일한 몸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일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왜 구원자 메시야가 인간과 똑같은 몸을 갖고 세상에 왔을까? 인간들도 가끔은 벗어버리고 싶은 육신인데, 도대체 <육신>이 기독교 신앙에서 하는 역할이 무엇이란 말인가?
다른 종교 둘러보기
이 문제에 관련하여 잠깐 다른 종교를 둘러보자. 먼저 유대교와 이슬람교이다. 유대교라고 부르는 종교의 실체는 바벨론 포로귀환이후이지만, 그 뿌리는 구약전체 역사 속에 있다. 구약성서 때문에 이 두 종교는 기독교와 함께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예수>를 한 인간 예언자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몸을 가진 존재는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신이 아니다. 신의 현현을 다른 상징을 통해 느낄 수는 있어도, 신은 보이지 않는 종교가 유대교와 이슬람교이다.
그런데 기독교 경전이 신약성경 마태와 누가는 성령-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의하여 마리아가 잉태하여 출생한 아이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라고 한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한다. 동시에 신약성경에 출연하는 유대인들은 두 부류로 갈라진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는 그룹과, 하나님께서 아들을 두었다는 주장은 그 자체가 신성모독이라고 여겨서 예수를 박해하고 죽이려는 그룹이다. 즉 유대인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둘 수 없다는 말이다.
인간이 논쟁할 때에는 인간적인 언어의 영역에서 말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에게서 온 자를 표현하는데 가장 쉽고 적절하고 함축적인 용어는 <아들>이라는 말이다. 마태와 누가가 인간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면, 요한은 이 언어의 차원을 철학적인 차원으로 높인 것이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 갑자기 철학자가 끼어들어서 자기 철학을 말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할까?
사람들이 모여서 양배추가 맛이 좋을지 어떨지를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철학자 한 분이 나타나서, “이 양배추에는 제1 실체(primary substances)와 제 2 실체(secondary substances)가 있는데, 제 1실체는 양배추의 유개념(종들사이의 유사성 판명)이고 제2실체는 종개념이며, 종의 개념을 통해 유사성을 찾아 유개념을 상정하면 이것이 ‘양배추’라는 물건이 됩니다.”라고 말하면 반응이 어떨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던 시대에는 그리스 철학이 모든 판권을 쥐고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사상과 종교는 설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 출발한 기독교는 “하나님이 아들을 두었으며, 그 아들이 인간의 구원의 관건을 쥐고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머리 복잡한 철학자들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야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등장한 성경이 요한복음이다.
성육신의 의미
나는 성육신이 매우 중요한 신학이라고 확신한다. 과거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성육신의 신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인하는 용도로 쓰기 위하여 주장하였지만,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의미가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첫째는 상징적 의미, 둘째는 신학적 의미 그리고 셋째는 실제적 의미라고 생각한다.
첫째, 성육신의 상징적 의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간과 매우 밀접한 관계로 소개한다는 것이며, 이는 기독교 신앙의 매우 독특한 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느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띄고 있다. 하나님 당신이 세상에 오신다면 이런 일들을 하실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성육신이다.
둘째.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의 방식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천상 위에서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인간 세상에 직접 오시는 방식을 취하는데, 그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낮아짐의 실천이다. 기독교는 높아지는 신앙이 아니라, 낮아지는 신앙이다. 고대 그리스 사상 체계는 전지전능한 신에게 집중되어 있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당신을 낮추시는 하나님이다. 거기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셋째, 성육신의 실제적 의미는 오늘 요한복음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인데, 요약하면 몸, 삶, 세상, 이런 개념들이 실제로 중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몸을 떠난 정신, 삶을 떠난 사상, 세상을 떠난 천상이란 신기루일 뿐이라는 것을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성육신이다.
말씀과 육신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말로 시작한다. 말씀은 그리스어로 “로고스”라고 한다. 로고스라는 개념은 그리스 철학에 본래 있던 개념이다. 당시에 로고스는 신이 세상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써 신이 인간세상과 온 우주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원칙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것을 넘어서서 하나님 자신이 로고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 발상은 창세기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창세기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은 처음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말한 후에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표현한다.
1-2절을 읽어보면 로고스와 테오스(하나님)는 구별되기도 하지만, 동일한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다가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육신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살”이다. 사릌스라는 살의 단어적 의미는 세상적인 것, 이 땅의 것, 정리하면 천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신 로고스가 천한 세상 것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지금 요한의 성육신은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신학이 들어있다는 말이다. 더 중요한 말은 그 다음에 나오는데, “우리 가운데서 사셨다.”는 표현이다. 개역성경에는 스케노라는 이 단어를 “거한다”라고 번역하였다. 살거(居)자를 쓰니 마찬가지 의미이다. 그래도 “살다”라는 말이 더 살갑다. 지금 말씀이신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살고 계시다.
요한복음이 전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철학자들이 신이 어떻게 인간이 되었느냐고 물을 때에, 요한의 대답은 인간 사이에 함께 살려고 오신 분이라는 대답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나와 함께 살러 오신 하나님
문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살러 오셨는데 인간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배고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참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보여주시는데, 인간들은 이미 마음속에 자기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그분을 알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요한은 18절에서 이렇게 단언한다.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의 외아들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었다고 말이다. 이 아들을 맞아들이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았다고 12절에서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자녀는 천지차이이다. 백성은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지만, 자녀는 양육을 받는 존재이다. 테크논이라는 원어의 뜻을 보면, 자녀, 아들, 영적 자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것을 한 편으로는 하나님이 가장 아끼는 존재라는 의미도 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는 명제가 바로 여기에서부터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사건은 일종의 거룩한 신비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생각도 하지 않는 기독교 신학의 백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몸이 되신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산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이 직접 낮은 곳에 함께 하신다는 가르침이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도 그대로 실천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 분명하다.
대림절 3주를 맞이하는 우리 평화목교회는 예수의 탄생을 기다라면서 몸으로 오신 하나님을 묵상하고, 세상 속에 동거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드러내는 선한 도구요 선한 청지기의 직분을 잘 감당하시기 기도한다.
사랑의 하나님
2000년 전 이 땅에 오실 때에 인간의 몸으로 오심을 기억합니다.
신은 거룩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함을 비천한 세상에 가지고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찬양하게 하시옵소서.
정의의 하나님
낮고 천한 세상에 오시어 당신의 정의를 선포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인간은 놀라서 당신의 의로우심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도 선포하신 공의대로 살게 인도 하시옵소서.
평화의 하나님
우리와 살러 오신 하나님을 반갑게 맞이하려합니다.
지난 일 년 간 내가 주님과 함께 살아왔음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과 동거함에 부족한 삶의 모습을 용서하여주옵소서.
이제는 늘 주님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게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