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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때로는 크리스마스에도 악마 같은 아이가 태어난다
2. 바로 그 라임오렌지나무
우리 집에서 각기 나이 많은 형이 어린 동생들을 돌봐 주었다. 잔디라 누나는 글로리아 누나와 또 북부에 양녀로 준 또 다른 누이를 돌봐 주었다. 안또니오(또또까의 정식 이름)형은 잔디라 누나의 애호물이었다.
랄라 누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돌봐 주었다. 누나는 날 사랑하기까지 했었지만 점차 내게 시들해졌는지, 아니면 통 넓은 바지에 짤막한 웃옷을 입은, 마치 극장 좌석 뒤에 받치는 방석같이 짜리몽땅한 애인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인지 내게 소홀히 대했다.
우리가 일요일마다 역 광장으로 푸팅(footing, 랄라 누나의 애인은 산책이라는 말을 꼭 이렇게 영어로 한다)하러 갈 때면 그는 내게 굉장히 맛있는 사탕과자를 사 주곤 했었다. 그것은 내 입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 내가 에드문드 아저씨께 미주알고주알 캐묻지 않는 한 결코 들통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 두 동생은 아주 어렸을 때 죽었다. 그래서 난 애기로만 들었을 뿐이다. 두 동생은 모두 피나제 족 인디언이었다고 한다. 둘 다 반짝이는 까만 생머리를 갖고 있었다. 여자애는 아라끼, 사내애는 주란디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다음에 낳은 것이 내 동생 루이스였다.
루이스를 가장 많이 돌봐 준 사람은 글로리아 누나였고, 그 후엔 내가 돌봐 주게 되었다. 사실 아무도 루이스를 보살펴 줄 필요는 없었다. 왜나하면 그 애는 너무 예쁘고 착해서,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매우 조용한 꼬마 녀석이었으니까…
그 애는 말할 때도 언제나 귀여운 말만 골라 했는데 난 어떻게 하면 녀석을 떼어 놓고 나갈까 하는 궁리만 했다.
"제제 형, 동물원 놀이 해, 응? 오늘은 비가 올 것 같지 않았어, 응?"
이 애가 이제 익살을 제법 떠는데, 요 녀석도 곧 어른이 되겠어. 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난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때때로 거짓말을 할 기분이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쳤니, 루이스? 저기 폭풍이 다가오는 것 좀 봐!"
말은 그랬지만 동생의 손을 잡고 뒤뜰로 갔다. 뒤뜰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동물원 그리고 줄리뉴 씨 집 울타리 바로 옆이 유럽이었다. 왜 유럽이라고? 글쎄 내 맘속의 작은 새도 그것은 모른다.
거기에서 우리는 빵 데 아쑤까르의 케이블카 놀이를 하며 논다. 끈에 단추들을 끼워 가지고 노는 것이었다. 에드문드 아저씨는 끈을 줄이라고 말씀하셨다. 난 줄이라는 게 말인 줄 알았다.
아무튼 우리는 끈의 한 끝을 울타리에 매고 다른 한 끝은 루이스의 손에 동여매 거기에 단추들을 꿰어선 하나씩 천천히 내려 보내는 것이다. 케이블카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을 잔뜩 태우고 내려왔다.
우리는 내 깜둥이 친구 미리끼뉴의 케이블카도 갖고 있었다. 이럴 때 다른 집 뒷마당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제제, 우리 집 울타릴 망가뜨리고 있는 거 아니냐?"
"아네요, 디메린다 아줌마, 와 보세요."
"전 동생과 노는 중이에요. 얌전히 놀고 있어요."
그러나 마음속에선 내 대부인 악마가 장난을 치는 것보다 이 세상에서 더 좋은 없다고 소곤거리고 있었다.
"아줌마, 작년처럼 크리스마스 날에 달력을 주실래요?"
"달력으로 무얼 하게?"
"보려고요. 빵바구니 위에 걸어 둘래요."
아줌마는 빙그레 웃으며 약속했다. 그녀의 남편은 쉬코 프랑꼬 식료품 가게를 하고 있었다. 또 하나의 장난감은 루씨아노였다. 처음에 루이스는 개를 굉장히 무서워했다. 내 바지를 잡아당기며 돌아가자고 조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루씨아노는 내 친구였다. 내가 쳐다볼 때면 굉장히 큰 소리로 꽥꽥거렸다. 글로리아 누나는 갤 좋아하지 않는지 박쥐는 흡혈귀라 애들의 피를 빨아먹는다고 말하곤 했다.
"아니야, 고도이아. 루씨아노는 안 그래. 내 친구야. 날 알아본단 말야."
"넌 벌레나 물건 같은 것들하고 얘기하는 나쁜 버릇이 있더라."
루씨아노가 벌레가 아니라는 걸 납득시키기는 어려웠다. 루씨아노는 알폰소스 들판을 날아다니는 비행기였다.
"저것 봐! 루이스!"
루씨아노는 우리가 말하는 걸 알아듣는 듯 즐겁게 우리 주위를 뺑뺑 돌았다. 물론 개는 알아듣는 것이다.
"쟨 비행기란 말야, 또 쟨 뭘 하고 있는데 …"
나는 머뭇거렸다. 아저씨가 여러 번 가르쳐 주셨는데 까먹은 것이었다.
극예라고 했든가 곡예라고 했든가 아니면 곡례하고 하셨든가… 아무튼 그것들 중의 하난데, 에드문드 아저씨께 여쭤 봐야지. 동생한테 틀리게 가르쳐 줄 수는 없어. 다행히 루이스는 동물원 놀이를 하고 싶어 했다. 우린 닭장 앞으로 갔다.
닭장 속에는 땅을 후비고 있는 흰 암탉 두 마리와 또 너무 순해서 우리가 볏을 긁어 주기도 한 검은 색 암탉 한 마리가 있었다.
"우선 입장권을 사야지. 사람들이 많으니까 잃어버리지 않게 내 손 꼭 잡아. 일요일엔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아니?"
동생은 눈을 들어 사방을 훑어보더니 내 손을 더 꽉 잡았다. 매표소에
서 난 배를 앞으로 불쑥 내밀며 기침 소리로 인기척을 냈다. 그리곤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판매원에게 물었다.
"몇 살까지 돈을 안 내도 됩니까?"
"다섯 살까진데요."
"그럼 어른 표 하나 주시오."
난 오렌지나무 잎 두 장을 입장권으로 따 가지고 들어갔다.
"우선 얘야, 예쁜 새들을 보여 주마. 앵무새 좀 봐라. 저기 알록달록한 꼬마 새도 있구나. 저기 여러 가지 색 깃털이 달린 건 무지개빛 앵무새란다."
그러나 루이스는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떠 보였다. 우리는 이것 저것 천천히 구경을 했다. 너무 속속들이 봤는지 글로리아 누나와 랄라 누나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오렌지를 까고 있는 것까지 보고 말았다.
누나들이 만약 우리 말소리를 들었다면 이 동물원 놀이도 어떤 녀석의 엉덩이에 몽둥이찜질을 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겠군. 하기야 그 어떤 녀석이란 늘 나지만 말씀이야.
"제제 형, 이젠 뭘 보러 갈 거야?"
나는 목소리와 몸짓을 바꿨다.
"자, 원숭이 울 앞으로 가자. 에드문드 아저씬 늘 고릴라라고 하시더라만."
우리는 바나나 몇 개를 사서 원숭이에게 던져 주었다. 이런 짓이 금지된 일이란 걸 알고 있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경비원들이 눈치 챌 수 있을라고.
"너무 가까이 가지 마. 그 녀석들이 너한테 바나나 껍질을 던진단 말야, 이 꼬맹아."
"난 사자가 보고 싶어."
"그럼 저리로 가 보자."
난 오렌지를 까고 있는 진짜 두 마라 원숭이들을 쳐다보았다. 누나들의 이야기 소리가 사자 울에까지 들렸다.
"다 왔어."
나는 아프리카산 순종인 노란 암사자 두 마리를 가리켰다. 동생은 검은 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하였다.
"무슨 짓이야? 이 꼬맹아. 그 검은 표범은 이 동물원에서 제일 사나운 놈이란 말야. 그 녀석은 조련사의 팔을 열여덟 개나 뜯어먹어서 이리로 보내진 거야."
루이스는 깜짝 놀라며 팔을 뒤로 뺐다.
"저게 서커스단에서 왔어?"
"그래."
"무슨 서커스단인데, 제제 형? 전엔 나한테 그런 말 안 했잖아."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아는 서커스단이 뭐 있더라?
"아! 로젬베르크 서커스단이야."
"그건 빵집 이름 같은데?"
요 녀석이 제법 영리해져서 속여먹기가 점점 힘들단 말씀이야.
"딴 이름이야. 이젠 좀 앉아서 간식을 먹는 게 좋겠다. 우린 너무 많이 걸었어."
우리는 앉아서 먹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누이들이 얘기하는 데 가 있었다.
"우린 그 앨 이해해 주어야만 해, 랄라. 저렇게 참을성 있게 동생과 놀아 주는 것 좀 봐."
"그렇긴 해. 하지만 그 애처럼 장난이 심한 애도 처음이야. 장난이 아니라 그 이상이란 말야."
"그 애 피 속엔 악마가 들어 있는 게 분명해. 근데 참 희한해. 그렇게 망나닌데도 동네에선 그 앨 욕하는 사람이 없거든."
"집에선 늘 슬리퍼로 매만 맞고. 언젠가 철이 들겠지."
난 글로리아 누나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누나는 항상 날 구해 주었었다. 그리고 그럴 적마다 난 누나에게 더 이상 장난치지 않겠다고 맹세하곤 했었다.
"조금 있다 얘기하자. 지금은 안 되겠어. 쟤들이 너무 조용하잖니?"
누나는 벌써 눈치를 챈 것 같았다. 내가 돌담을 넘어 셀리나 아주머니 댁 뒤뜰에 들어간 것까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팔과 다리가 빨랫줄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내겐 아주 신기했다. 그러자 악마가 그걸 한꺼번에 떨어뜨려 보라고 부추겼다. 내 생각에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난 흙담에서 아주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집어 재빨리 오렌지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곤 살짝 빨랫줄을 끊어 버렸다. 하마터면 나도 함께 떨어질 뻔했다. 그때, 고함 소리가 들려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도와주세요. 빨랫줄이 끊어졌어요."
그러자, 어디선지 누가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빠울로 씨의 아들, 그 악질놈이 틀림없어요. 그 녀석이 유리 조각을 들고 오렌지나무 위로 올라가는 걸 제가 봤어요."
"제제 형?"
"응, 뭐라고 루이스?"
"형은 어떻게 동물원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아?"
"많이 가 봤으니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에드문드 아저씨께 들은 이야기였다. 아저씨는 내게 동물원에 데리고 가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었다. 하지만 정작 가게 된다 해도 아저씨의 걸음이 그렇게 느리니, 도착하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게 뻔한 노릇이었다. 또또까 형은 아버지와 한 번 동물원에 간 적이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아자벨 시의 바랑 남작 거리에 있는 동물원이야. 바랑 남작 거리 넌 모르지? 모르는데 당연해. 그런 곳을 알기엔 넌 너무 어리니까. 바랑 남작 같은 사람은 분명히 하느님의 친한 친구였을 거야. 하느님이 동물의 짝을 지어 주실 때 그분이 도와드렸을 거야. 그러니까 동물원도 만들었게 씨. 네가 조금 더 크면…"
누나들은 아직도 그곳에서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내가 더 크면 어떻다고?"
"고거 참, 귀찮게도 묻네. 네가 동물원에 가게 되면 내가 짐승들을 세는 법도 가르쳐 주겠다는 말이었어. 스물까지만. 스물에서 스물다섯까진 암소, 황소, 곰, 사슴, 호랑이라는 것만 알아 둬. 그것들이 있는 델 정확히 몰라서 그래. 너한테 틀리게 가르쳐 주고 싶진 않아."
동생은 동물원 놀이에 싫증이 난 것 같았다.
"제제 형! '작은 오두막집' 좀 불러 줘."
"여기 이 동물원에서?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싫어. 벌써 다 가 버렸잖아?"
"그 노랜 가사가 너무 긴데. 네가 좋아하는 곳만 부를게. 응? 그게 매미가 나오는 부분이었지, 아마?"
그리곤 나는 가슴을 쭉 폈다.
당신은 내가 어디서 오는지 아시겠지요. 그곳은 작은 오두막집이랍니다. 곁에는 과수원이 있는 아주 작은 오두막집이랍니다. 높은 산 언덕에 있어 멀리 바다가 보인답니다…
난 여러 구절을 뛰어넘었다. 가느다란 야자나무 사이에서 매미들은 노래한답니다. 황금빛 해가 서산에 질 때면 처마 끝으로 지평선이 보인답니다. 정원에는 분수가 노래하고 분수가에 검은 새 한 마리 노래합니다…
노래를 끝냈을 때도 누나들은 계속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 문득 좋은 생각
이 떠올랐다. 그건 노랠 부르면서 시간을 끌자는 생각이었다. 혹시 그때 가서 누나들 맘이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어떤 걸 부를까. 난 '작은 오두막집'을 전부 다 불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부르고 나서 '그대의 사랑스런 여행자들이여'와 '라모나'까지 불렀다. 그리고 '라모나'의 두 줄에 다른 가사를 지어 부르고 나니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결국 오늘도 매를 맞고야 말 것 같았다. 그래서 난 하는 수 없이 누나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미 각오했어, 랄라 누나. 자 때려."
그리고 누나에게 등을 돌렸다. 그래도 난 누나가 슬리퍼로 너무 세게 때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꽉 물었다.
제안을 낸 사람은 엄마였다.
"오늘은 모두 새집을 보러 가자."
또또까 형은 날 한쪽으로 불러내 소곤거렸다.
"새집에 갔었다고 하면 가만 안 둘 테야. 반쯤 죽여 놓겠어."
그러나 그런 생각을 난 꿈에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새집을 향해 우리는 걸어갔다. 글로리아 누나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단 일 분이라도 떨어져선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난 다른 손으로 루이스의 손을 잡고 걸어갔다.
"엄마, 언제 이사를 가야 해요?"
엄마는 어쩐지 슬픈 얼굴을 하며 말씀하셨다.
'크리스마스 이틀 후에. 물건들을 정리해야 할 거다."
엄마는 피로에 지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엄마가 몹시 불쌍해 보였다. 엄마는 태어나면서부터 일만 하셨다. 공장이 세워지던 여섯 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을 하셨단다. 사람들이 엄마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엄만 너무 어려서 혼자 내려올 수 없었기 때문에 책상 위를 걸레로 닦으셨단다. 그래서 학교에도 가보지 못하셨고 읽기를 배운 적도 없으셨단다.
이 얘길 들었을 때 난 너무 마음이 아팠었다. 그래서 내가 커서, 시인이 되고 척척박사가 되면 내 시를 꼭 읽어 드리겠다고 맹세했었다. 상점들의 진열장과 잡화상들은 크리스마스 기분을 한층 돋우어 주고 있었다. 유리 진열장이 있는 상점들은 모두 산타클로스를 그려 놓은 것 같았다. 게다가 크리스마스 날에는 복잡하리라는 생각에서인지 미리 카드를 사러 온 사람들로 상점마다 붐볐다. 난 이번 크리스마스엔 꼭 하느님의 착한 아이가 되게 해 주세요. 하는 아련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철이 들면 나아질 것 같기도 했다.
"다 왔다."
모두들 의아했다.
지금 사는 집보다 약간 작은 집이었다. 또또까 형이 대문에 매인 철삿줄을 푸시는 어머니를 도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글로리아 누나는 내 손을 뿌리치고, 벌써 처녀가 다 됐다는 사실도 있은 채 몸을 흔들며 달려갔다. 그리곤 망고나무를 껴안았다.
"이 망고나무는 내 거야. 내가 제일 먼저 잡았으니까."
안또니오 형도 따마린두 나무 한 그루를 잡고 누나와 똑같은 짓을 했다. 날 위해 남은 건 하나도 없었다. 난 울상을 지으며 글로리아 누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내 건, 고도이아?
" "저기 뒤쪽으로 가 봐. 나무가 더 있을 거야, 바보야."
달려가 보았지만 거기엔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풀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시가 잔뜩 난 늙은 오렌지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흙담 곁으로 조그마한 라임오렌지 한 그루가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시무룩해서 돌아와 보니, 모두들 침실을 둘러보며 각자 자기방을 정하고 있었다. 난 글로리아 누나의 치마를 잡아당겼다.
"아무것도 없어."
"네가 잘 찾아 보지 않아서 그래. 내가 찾아 줄 테니 잠깐 기다려."
잠시 후 누나는 나와 함께 오렌지나무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넌 저 나무가 싫으니? 얼마나 멋진 오렌지나무니?"
멋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전혀 맘에 들지 않았다. 그 어느것도… 나무란 나무는 모두 가시만 잔뜩 돋아 있었다.
"저런 흉한 것들을 갖느니 꼬마 라임오렌지나무를 갖겠어."
"어디 있는데?"
우리는 라임오렌지나무 있는 곳으로 갔다.
"어머나, 참 예쁜 라임오렌지나무로구나. 멀리서 봐도 라임오렌지나무란 걸 금방 알겠다. 내가 너만한 애라면 딴 나무는 바라지도 않겠다, 애."
"그래도 난 아주 커다란 나무가 좋단 말야."
"잘 생각해 봐, 제제. 나무는 아직 어리잖니? 이제 곧 커다란 나무가 될 거야. 너랑 같이 크는 거야. 그럼 너희들은 형제처럼 사이가 좋을 거 아냐? 저 가지들 좀 봐. 그래, 이 나무밖에 없는 건 사실이야. 그래도 네가 탈 수 있도록 만든 망아지 같지 않니?"
나는 일생 최대의 불행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자 천사들이 그려져 있는 스코틀랜드 술병 생각이 났다. 그때도 랄라 누나는 "이게 나야"하고 말했지. 그랬더니 글로리아 누나도, 또또까 형도 자기 걸 골랐어. 그런데 난 뭐람? 왜 내가 늘 꼴찌이어야만 하지? 날개도 없이 머리만 있는 네번째 천사가 내 것이람? 커서 어디 두고 보라지. 아마조나스 정글과 하늘을 꿰뚫을 둣한 나무는 모두 내가 살 테야. 그러면 모두 내 것이 되겠지. 천사가 잔뜩 그려져 있는 술병으로 꽉 찬가게를 사선 날개 한 조각도 안 주겠어.
나는 골이 잔뜩 나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서 오렌지나무에 기대어 마음을 가라앉혔다. 글로리아 누나는 웃으며 가 버렸다.
"그런 것 때문에 난 화는 오래가지 않아, 제제. 넌 내 말이 옳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나뭇가지로 땅을 파고 있자니 울음도 차츰 잦아들었다. 그때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너의 누나가 전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해."
"누구나 자기가 옳다고 하지. 옳지 못한 건 늘 나뿐이야."
"그렇지 않아. 네가 날 자세히 보면 달라질 거야."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 어린 나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내가 모든 사물들과 얘기할 수 있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그건 아마 내가 말을 할 수 있게 미리 생각해 주는 내 맘속의 작은 새 덕분일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바로 네가 말을 하는 거니?"
"듣고 있는 것도 나야."
"나무는 몸 전체로 얘기해. 잎으로도 하고, 가지랑 뿌리로도 한단다. 보고 싶니? 그럼 귀를 내 몸에 대 봐. 그러면 내 가슴이 뛰는 소릴 들을 수 있단 말야."
난 약간 망설였지만, 나무가 나랑 비슷하게 작다고 생각하니 무서움이 사라졌다. 귀를 대 보니 무언가 멀리서 '탁탁'하는 소리를 냈다.
"들리지?"
"딱 하나만 말해 줄래? 누구든 너하고 얘기할 수 있니?"
"아니, 오직 너하고만."
"정말?"
"맹세할 수 있어. 어떤 요정이 말해 줬는데 너같이 자그마한 아이랑 친구가 되면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아주 행복해질 거랬어." "그럼 너 기다려 줄 수 있니?"
"뭘?"
"내가 이사 올 때까지 말야. 아직도 일주일은 더 있어야 해. 그때 가서 네가 말하는 걸 잊어버리면 어떡하니?"
"절대로 안 잊을 거야. 다시 말하지만 너를 위해서만 그래. 내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시험해 볼래?"
"어떻게?"
"내 가지에 올라타 봐."
나는 그 애가 시키는 대로 했다.
"자, 이젠 약간 흔들어. 그리고 눈을 살짝 감아 봐.
"역시 나무가 시키는 대로 나는 했다.
"어때? 네가 태어나서 나보다 더 좋은 망아질 가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니?"
"없어. 너무 재밌어. 내 달빛 망아질 동생에게 줘 버릴 테야. 너도 그 애를 좋아하게 될 거야, 알겠니?"
뿌듯한 기분으로 나는 라임오렌지나무에서 내려왔다.
"얘, 내가 약속할게. 이사 오기 전이라도 가능하면 자주 올게. 이젠 그만 가야 해. 모두들 저기 나오고 있잖아."
"그래도 친구야, 이렇게 헤어지긴 싫어."
"쉬! 저기 누나가 와."
내가 나무를 껴안고 있는 바로 그때 글로리아 누나가 다가왔다.
"잘 있어, 친구야! 넌 세상에서 제일 멋져."
"내가 그랬잖니?"
"그래, 누나 말이 맞아. 이젠 누나나 형이 망고나무나 따마린두 나무랑 바꾸자고 빌어도 안 바꾸겠어."
누나는 상냥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요 조그만 머리, 귀여운 머리!…"
우리는 손을 잡고 걸어 나왔다.
"고도이아, 누나는 누나 망고나무가 얼간이라고 생각지 않아?"
"아직은 잘 모르겠어. 좀 그런 것 같기도 해."
"또또까 형 건?"
"얘기해도 좋을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언젠가 누나한테만은 이 기적을 얘기해 줄게, 고도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