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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소개할 <<반역의 책, 옹정제와 사상통제>> 역시 다른 저작과 마찬가지로 저자의 학술적 엄격함, 문장의 유려함, 그리고 절제된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재미있는 책이다. 이 책은 중국사에서 대표적인 번영기인 청 중기 옹정시대(1723-1735)에 반역을 도모했던 쩡징(曾靜)에 대한 옹정제의 처리 과정과, 결국에는 두 사람이 공동 집필한 셈이 되어버린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을 가는 붓(細筆)으로 찬찬히 재구성한 소설 같은 책이다. 간단히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플롤로그 편지
1. 총독
2. 황제
3. 편지 심부름꾼의 자취
4. 후난 성에서
5. 봉황의 노래
6. 반박
7. 여름의 교훈
8, 용서
9. 고독한 종(鐘)
10. 공동 저자
11. 소문의 출처
12. 불협화흠
13. 상유(上諭)를 전파하라
14. 교화(敎化)
15. 응보(應報)
목차가 마치 소설 제목 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지은이의 주’가 319쪽~357쪽이나 되는 학술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처럼 구성되고 서술되어 역사와 문학을 결합시킨 것이다. 번역자 이준갑 교수는 대학원 후배이기 때문에 나와 개인적 인연이 있으며, 이 책을 번역하는 중에 <<淸代文字獄檔>>이란 책을 빌려주기도 하였다. 이교수의 번역은 매우 꼼꼼하고 정확하기로 정평이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의 말미에 있는‘옮긴이의 말’에 이 책의 특징과 내용을 잘 정리해 놓았으므로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이를 함께 수록하니 참고하길 바란다. 아무래도 번역자의 소개가 나보다는 정확할 것이니 말이다. 또 주요 신문에서 이미 지난 7월에 이 책을 소개한 바 있으므로 함께 참고하길 바란다.(元)
1. 옮긴이의 말
2001년 8월 중순 상해박물관에서 세 개의 자기 접시를 보았을 때 밀려들던 감동은 지금도 옮긴이의 마음속에 가득 남아있다. 이 접시들은 청조의 전성기인 강희, 옹정, 건륭 시대에 각각 만들어진 것으로 한 자 남짓한 크기였다. 청조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할아버지 강희제 시대에 만든 접시에는 아람드리 나무, 바위, 싱그러운 풀로 가득한 벌판과 여유롭게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이 어우러진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청조를 절정기로 이끈 손자 건륭제 시대의 접시에는 주황, 파랑, 노랑 등 온갖 색깔의 현란한 무늬들이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강희, 건륭시대의 인상을 어쩌면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속으로 탄성을 지르는데 푸른색 무늬 위에 힘차게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다섯 마리 용이 그려진 접시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것은 아들 옹정제 시대에 만들어진 접시였다. 흰색 바탕에 파랑색과 주황색만을 사용한 극도의 절제와 간결함, 황제의 상징인 다섯 발톱의 용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절제, 본질을 꿰뚫는 간결함, 힘. 이보다 더 멋지게 옹정제와 그 시대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달리 없을 것이다. 각처에 산재한 소수민족의 반독립적 지배자인 토사(土司)를 청조의 관료체계에 포섭한 개토귀류(改土歸流), 낮은 봉록에 시달리는 관료들에게 일종의 판공비를 지급함으로써 부정부패의 근원을 차단하려한 양렴은(養廉恩), 복잡하게 얽힌 세금의 부과와 징수체계를 일원화한 지정은(地丁銀). 이와 관련되었던 문제들은 청조의 과제였을 뿐만 아니라 역대 왕조들의 해묵은 숙제이기도 했다. 이것들이 절제와 간결, 힘을 겸비한 옹정제의 손을 빌어서 비로소 완전히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옹정제에게는 또 하나의 정치적 개성이 있는데 신묘막측함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법가적인 개념으로 풀이하자면 술(術)이다. 술이란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한비가『한비자』에서 역설한 바, 군주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용이 자유자재로 바람과 구름, 비를 일으키고 그 속에 몸을 숨기듯이, 신하들을 은밀히 제어하는 것이다. 옹정제는 밀정이나 주접을 통해 입수한 정보들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신묘막측(술)함을 극대화하고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켜나갔다. 이런 의미에서 옹정제야말로 법가의 술을 정치현장에서 적절하게 구사한 대표적인 군주일 것이다.
사실 본서의 주제인 쩡징 역모사건을 다루는 옹정제의 자세는 신묘막측을 추구하는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옹정제가 고굉지신 오르타이에게 밝힌 쩡징 역모사건의 처리방향은 ‘한번 기묘하게 요리해보겠노라’(一番奇料理)는 것이었다. 본서를 차분히 읽어보면 독자들은 신민들은 물론이고 황제들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쩡징 역모사건을 기묘하게 요리하는 옹정제와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민족 치하를 살던 한족들은 언제나 화이론(華夷論)을 들먹이며 그들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아니 생리적으로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런 반발에 대한 이민족 지배자들의 반응은 거의 언제나 관련자를 색출하여 혹독하게 처벌하는, 사상탄압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강희제나 건륭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옹정제는 달랐다. 물론 그도 여느 이민족 지배자 못지않게 철저한 사상탄압에 나선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에 멈추지 않고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한족들의 화이론을 변형시키고자 하였다. 옮긴이는 이를 사상탄압보다 차원이 훨씬 높은 사상통제로 이해한다. 원서에는 없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붙여본 부제가 ‘옹정제와 사상탄압’이 아니라 ‘옹정제와 사상통제’인 까닭도 이 때문이다. 물론 보다 정확하게는 ‘옹정제와 『대의각미록』’이라고 해야겠지만 『대의각미록』을 낯설어 하는 독자들이 더러 있을 듯하여 이렇게 붙였다.
이 책의 소재인 쩡징 역모사건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후난 성 융싱 현의 산골마을 출신 하급 지식인 쩡징은 이미 고인이 된 저명한 사상가 뤼류량의 반청사상에 공감하고 백성들이 겪는 고초에 분개하여 촨산총독(川陝總督) 웨중치에게 모반을 권하는 편지를 띄웠다. 웨중치는 남송의 민족적 영웅 웨페이(岳飛)의 후손으로 당시 청조를 뒤엎고 한족왕실을 재건하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웨중치는 쩡징의 편지를 가져온 장시를 투옥하고 고문하며 모반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해버렸다. 동생의 제위(帝位)를 훔친 자, 술주정뱅이, 음란한 자, 살인을 즐기는 자라는 따위의 노골적인 비난과 이적(夷狄)은 중화를 다스릴 수 없다는 화이론으로 가득 찬 편지내용을 보고받은 옹정제는 이런 생각이 쩡징 뿐만 아니라 한인들 대다수에게 공유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그는 역모관련자들을 색출하여 혹독하게 처벌하였지만 주모자인 쩡징에 대해서는 사면하는, 선뜻 납득하기 힘든 ‘관용’을 베풀었다. 나아가 옹정제는 쏟아지는 비난을 해명하고 화이론을 극복해야할 필요성을 절감하고『대의각미록』을 간행하여 쩡징과 비슷한 생각을 품은 다수의 한인들을 설복하고 교화하려 했다.
이 이야기의 최대의 미스테리는 옹정제가 억울하게 역모자의 누명이 씌워진 자들은 가차없이 처벌하면서도 정작 주모자인 쩡징에 대해서는 왜 신하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관용을 베풀어 사면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옮긴이는 앞에서 언급한 황제의 술(術)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보도록 독자들에게 권유하고 싶다.
스펜스의 탁월한 이야기 솜씨는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그가 썼던 대부분의 다른 역사연구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전문역사서의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서도 소설적 구성을 통해 재미있게 읽히도록 씌어졌다. 멋대로 신하들을 주무르는 능수능란한 옹정제, 무모한 허풍장이이자 나약한 지식인 쩡징, 우직하지만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 대사를 그르친 어리석은 장시, 옹정제의 눈치를 살피며 보신(保身)에 급급하지만 끝내는 총애를 잃고 몰락하는, 영웅 웨페이의 후손 총독 웨중치, 옹정제의 의중을 옹정제 자신보다 더 정확하게 읽어내는 관심법의 달인인 심복 오르타이, 쩡징을 극형에 처하라며 누차 상주문을 올려 충성심을 과시하는 조정대신들, 억울한 희생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뤼류량의 후손, 희대의 사기꾼 왕수, 무소불위의 권력에 저항하며 만용을 부리는 막빈(幕賓) 탕순까오. 이처럼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본서를 읽는 독자들은 시종일관 역사책이 아니라 흥미진진한 소설책을 읽고 있다는 ‘착각’에 푹 빠져들 것이다. 이처럼 역사를 문학화하여 생동감 넘치게 서술하는 방식은 『사기』에서 구현된 문사일체(文史一體)의 중국 역사서술 방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물론 이 책이 사람들의 이야기만 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옹정제가 다스리던 18세기 초반의 중국사회의 모습도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야기의 주무대인 후난 성 일대의 지리, 장돌뱅이들의 이동로, 농촌마을의 풍경, 지식인들의 교류관행, 주접제도의 운용방식, 상서로운 징조를 조작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전통, 공식문건의 인쇄와 유포과정 등등. 세세하고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거대한 정치구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구석구석에 자연스레 스며 들어있는 것이다.
이처럼 독자들에게 소설적인 재미를 듬뿍 안겨주는 책이지만 저자는 역사란 권력자의 의도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교훈도 넌지시 책 속에 담고 있다. 옹정제는 『대의각미록』을 간행함으로써 자신에 관한 나쁜 소문을 일소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지만 후세인들은 오히려 나쁜 소문은 오래 기억하고 책속에 담긴 해명은 망각해 버렸다. 그의 아들 건륭제는 아버지의 혼백이 안식을 얻도록『대의각미록』을 없애버렸지만, 백성들은 이 책이 적나라한 진실을 담고 있었으므로 금서(禁書)가 되었다고 믿었다. 민초들에게도 역사의 행간을 예리하게 읽어내는 힘이 살아있다는 말이다. 정치가들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교육 등 사회의 각 방면에서 지도자라며 목청껏 자신의 말만 쏟아놓는 자들이 이 사실을 명심한다면 국민을 위한다는 허울 아래 그들이 저지르는 철없는 불장난은 조금이나마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우리말로 씌어진 쩡징 모반사건에 대한 뛰어난 연구논문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고 민두기 교수의 「청초의 황제통치와 사상통제의 실제 - 증정모역사건(曾靜謀逆事件)과『대의각미록』을 중심으로-」(『진단학보』25․26합집, 1964. 후에 그의『중국근대사연구』, 일조각, 1973에 재수록)가 바로 그것이다. 박진감 넘치는 문체로 씌어진 이 글을 읽어보면 사십년 전에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미국의 중국사학계를 대표하는 스펜스가 쓴 이 책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치중한 스펜스의 책은 쩡징사건이 불거진 근본원인인 화이론을 포함한 반청사상의 논리구조를 해부하는데 다소 소홀한 점이 있지만 이 논문에는 그 부분도 명쾌하게 분석되어 있다.
좋은 책을 만드느라 힘껏 애써준 이산출판사의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볼펜으로 흘려 써서 알아보기 힘든 원고를 깔끔하게 타이핑해준 아내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2004년 6월 28일
이준갑
2. 책소개
역사는 권력자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18세기 초반의 청나라 옹정제 시대. 후난 성 융싱 현의 산골마을 출신 하급 지식인 쩡징은 촨산총독 웨중치에게 모반을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웨중치는 옹정제를 술고래, 색광, 살인마에 비유한 노골적인 비난과 "이적(夷狄)은 중화를 다스릴 수 없다"라는 주장을 담은 이 편지을 그대로 황제에게 보고한다.
실패한 모반, 쩡징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러나 옹정제는 쩡징을 죽이지 않는다. 옹정제는 역모 관련자를 색출하여 가차없이 처벌 했지만 주모자인 쩡징만은 사면했다. 이 납득하기 어려운 '관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에 얽힌 정치적 의도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이 사건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옹정제의 계산이 있었다.
옹정제는 역모자인 쩡징이 황제의 훈육에 감복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충성을 맹세하자, 옹정제가 이를 너그럽게 받아줬다는 내용을 담은 <대의각미록>을 쩡징과 공동으로 간행한다. 그리고 이 책을 청의 관료와 행정조직을 총동원하여 전국에 배포한다.
이를 통해서 세간에 퍼져있는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과 한족 사이에 퍼저있는 반청사상을 불식시키려고 했던 것. 이전의 청의 황제들이 사상탄압을 통해 한족을 누르고자 했다면, 옹정제는 자신의 의도에 맞춰 사상을 통제함으로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옹정제와 사상통제'인 이유도 여기 있다.
그러나 옹정제의 뜻은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대의각미록>은 황제의 절대권력을 총동원한 사상통제 사업이었지만 그 결과로 남은 것은 쩡징을 흉내 내는 범죄나 옹정제에 관련한 소문, 가시적인 비판의 증대뿐이었다. 결국 이 책은 건륭제시기에 금서가 된다.
이 책은 '반역의 책', <대의각미록>을 통해 18세기 후반의 중국 사회의 모습을 그린다. 권력에 의한 사상통제와 진실의 날조에 대항하는 역사의 힘을 확인할 수 있을뿐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 미국의 중국사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강희제> 등을 통해 역사와 문학이 어우러진 서술방법으로 대중적 주목을 받은 바 있는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2001년 작.
3. 미디어 리뷰
1) 경향신문 :
중국 청나라 5대 군주인 옹정(雍正) 황제. 일반인들에게 옹정제는 인상 깊은 황제가 못된다. 아버지 강희(康熙)제와 아들 건륭(乾隆)제는 각각 60여년씩 중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옹정의 재위기간은 12년에 불과하다.
아버지는 오삼계(吳三桂·우산구이) 반란을 진압해 만주족의 중국 지배를 완료했다. 아들은 러시아와 한판 붙는 등 전쟁을 주저하지 않아 중국의 땅덩어리를 사상 최대로 만들어 놓았다. 이와 달리 옹정은 후세에 내세울 변변한 승전보 하나 남기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반인에게 옹정제는 강희와 건륭을 이어주는 가교로 인식될 뿐이다. 그러나 전문가, 그 중에서도 초고수급에 이를수록 옹정에 대한 평가와 관심은 달라진다. 우선 일본. 동양사 대가인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라는 평전을 썼다. 그는 옹정제를 중국, 나아가 세계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독재군주로 평가했다.
다음은 한국. 고 민두기 교수는 40년전 '청초의 황제통치와 사상통제의 실제-증정(曾靜)역모사건'이라는 선구적인 논문을 써서 1백만이 채 안되는 인구로 그 1백배가 넘는 한족을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훌륭하게 통치했던 만주족 황제들의 비법을 탐구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스펜스 교수의 책은 미야자키와 민교수의 업적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다. 미야자키처럼 그도 옹정제의 군주로서의 성실함에 주목했다. 옹정은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밤 늦게까지 쉴 새 없이 일을 한 군주였다. 또 스펜스는 민교수와 같이 '증정', 중국어 표현으로는 '쩡징'이 벌인 역모사건을 통해 옹정이라는 만주인 군주의 열정과 독특한 통치방식에 주목했다.
한족인 쩡징은 그 무리들과 함께 옹정을 격렬히 비난하며 모반을 꾀하다 발각된다. 보통의 군주라면 처리방식은 간단하다. 삼족을 멸하는 것. 그러나 옹정은 달랐다. 어설픈 관련자들까지 엄히 처벌하면서 정작 주모자인 쩡징은 살려줬다. 한술 더 떠 옹정은 쩡징과 묻고 답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황제와 실패한 반역자와의 대화는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옹정은 이 책을 전국에 널리 배포했다. 몽골족이 군사력만으로 한족을 눌렀던 데 비해 옹정은 문화적 소양으로도, 백성에 대한 성실함으로도 우리 만주족은 역대 어느 한족 황제보다 우월하다는 자신감을 만천하에 표명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예상을 종종 뛰어넘는 법. 백성들은 옹정의 뜻과 달리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옹정의 해명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대의각미록'에 나온 쩡징의 유언비어만 기억해 버렸다. 그래서 대의각미록은 아들 건륭제 때 금서가 되고, 쩡징은 뒤늦게 처형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준갑 옮김. - 김용석 기자 ( 2004-07-24 )
2) 동아일보 :
청(淸) 제국의 중국 지배가 확고해져가던 1728년. 쓰촨·산시성 총독 웨중치의 가마 앞에 편지를 쥔 사내가 들이닥쳤다. 웨중치는 사내를 가둔 뒤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제위를 찬탈한 이적(夷狄·오랑캐)들은 짐승과 같은 종족입니다.…지금 황제는 부모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형제들을 죽인 자로, 아첨에 귀를 기울이며 살인을 즐깁니다.…송과 명나라의 원수를 갚으소서." 그것은 바로 역모의 제안이었다.
이 책은 역사상 실존했던 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책의 이름은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 옹정제(雍正帝·1678∼1735) 통치하의 청 제국 전역에서 관리와 학생 누구나 암송해야 했던 이 책은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저자는 이 수수께끼의 책을 만든 주역들과, 책이 만들어지고 전파되다 소멸되기까지의 전말을 살펴보면서 언어와 금기와 권력, 민심과 통치, 대의와 현실세계 사이의 모순을 해부했다.
웨중치는 반역에 동조하는 것처럼 위장해 며칠 만에 사내의 배후를 캐낼 수 있었다. 주모자는 후난성에 사는 쩡징이라는 선비였다.
쩡징은 결국 체포돼 죽음을 기다렸다. 그런데 얼마 뒤 놀랍게도 그에게 황제의 편지가 도착했다.
"너는 화(華)와 이(夷) 사이에 군신(君臣)의 의가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동서남북 어디에나 동일한 이(理)와 기(氣)가 있는데, 중화에만 하나의 천지가 있다고 하겠느냐?"
황제는 아버지 강희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형제들이 얼마나 사악하게 행동했는지를 편지와 기록으로 밝혔다. 살인을 즐기기는커녕 정황을 가려 중죄인을 사면했던 사실들도 기록을 들어 설명했다.
쩡징은 충실히 답변을 써 보냈다. 자신의 몽매함에 대한 통탄과 헛된 소문을 전한 자들에 대한 원망이었다. 편지 교환은 열흘 넘게 계속됐다.
"쩡징을 풀어주어라."
황명(皇命)에 대한 대신들의 저항은 극렬했다. 그러나 옹정제 역시 완강했다.
"쩡징은 떠도는 소문만 듣고 짐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진정 요망한 자는 선조를 조롱하고 흉중에서 요망스러운 말을 만들어낸 자다."
'흉중에서 요망스러운 말을 만들어낸 자'란 한 세대 전의 문인 뤼루량(呂留良)을 일컫는 말이었다. 황제는 수사를 통해 역모사건의 가담자가 모두 뤼루량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뤼루량의 글은 이미 서부 일대에 퍼져 있었다.
'뤼루량의 글을 모조리 없애야 한다'는 간언에 대해서도 황제는 반대했다. "완벽하게 없앨 수 없을뿐더러, 만일 완벽하게 없앤다면 이번 사건의 근원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황제의 결정은 대담했다. 쩡징과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판단하도록 맡긴 것이었다. '대의각미록'은 곧 전국 방방곡곡에 배포됐다.
쩡징 사건이 일어난 지 7년 뒤 옹정제는 세상을 떠났다. 제위에 오른 건륭제는 '역도(逆徒)' 쩡징을 다시 잡아들여 처형했다. 신하들은 '대의각미록'에 군주를 비방하는 표현이 가득해 입에 올릴 수도 없다고 말했다. 예부(禮部)에서는 책을 거둬들여 없애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의각미록'은 민중으로부터 격리됐다.
그러나 7년 동안 책을 암송했던 지식계급이 그 내용을 잊을 리 없었다.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본래 텍스트를 잃어버린 '사라진 책'은 엉뚱하게 각색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뤼루량의 손녀가 '오랑캐' 황제를 유혹해 동침한 뒤 칼로 목을 베었다는 전설까지 나돌았다.
과연 현명한 이는 누구였을까. 지배자에 대한 비판을 민심의 발로로 여기고 적극적인 자기해명에 몰두한 옹정제였을까, 아니면 비판 자체를 철저히 금압(禁壓)한 건륭제였을까.
역사에 가정은 필요치 않다. 그러나 건륭제와 이후의 지배자들은 한족(漢族)의 반청(反淸)감정을 꺾지 못했고, 한 세기 뒤 외세의 침략 앞에서 중국은 분열된 채 기우뚱거리기 시작했다. 원제 'Treason by the Book'(2001년). - 유윤종 기자 ( 2004-07-24 )
3) 문화일보 :
중국의 역대 왕조 가운데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최고통치자인 황제들의 역량이란 측면에선 가장 우수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 무제나 당 태종과 같이 왕조마다 특출난 임금은 있었지만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세 황제의 133년동안의 재위기간(1662~1795)만큼 번영과 국운상승이 장기간 유지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세 황제 가운데서도 각각 60년간 황제의 자리를 지켰던 강희제(재위 1662~1722)와 그의 손자인 건륭제(재위 1735~1795)에 비하면 중간에 위치한 옹정제(재위 1722~1735)는 재위기간도 13년밖에 안되는데다 두 황제의 화려한 업적에 가려 제대로 평가를 못받곤 했다. 그러나 옹정제의 전기를 쓴 전후 일본 동양사학계의 대표적인 석학인 미야자키 이치사다에 따르면 옹정제야말로 세계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독재군주로 강희제 말년의 방만함을 수습하고 건륭제의 치세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황제 중의 황제였다.
책은 바로 옹정제 때 일어났던 쩡징(曾靜) 역모사건을 다룬 것이다. 이 사건은 중국 후난(湖南)성 융싱(永興)현 산골마을 출신 하급 지식인이었던 쩡징이 저명한 사상가 뤼류양(呂留良)의 반청사상에 공감하고 백성이 겪는 고통에 분개해 쓰촨(四川)성과 산시(陝西)성을 다스리는 촨산(川陝)총독 웨중치(岳鐘璂)에게 제자를 통해 모반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비롯됐다.
한족의 민족영웅인 남송 웨페이(岳飛) 장군의 피를 물려받은 웨중치가 언젠가는 복수를 단행해 중국의 옛 영광을 부활시킬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한 행동이었으나 정작 웨중치는 쩡징의 편지를 가져온 제자를 투옥해 심문하고 이 사건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제위 찬탈자와 형제들을 죽인 살인마, 황음을 일삼는 색광, 술고래 등의 노골적인 비난과, 오랑캐는 중국을 다스릴 수 없다는 화이론(華夷論)으로 가득찬 편지내용을 보고받은 옹정제는 이것이 쩡징뿐 아니라 한인들 대다수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특단의 대책을 강구했다. 역모 관련자들을 색출해 가차없이 처벌하면서도 주모자인 쩡징에 대해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면해준 뒤 중국의 잘못된 화이관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자신과 쩡징의 서면질의응답으로 구성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란 책을 저술해 전국에 배포한 것이다.
밀정과 관료들이 황제에게 직접 보고하는 주접(奏摺)제도 등을 통해 중국 전역을 손바닥보듯 감시하고 있었던 옹정제가 신묘막측함(술)이란 법가의 술(術)을 최대한 구사해 쩡징을 집요하게 설득,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백성으로 변화시킨 과정을 책으로 엮은 것이 바로 '대의각미록'이다. 예일대 교수로 미국의 중국사학계를 대표하는 학자인 저자는 옹정제가 쩡징 역모사건을 계기로 '대의각미록'을 통해 사상통제를 시도한 역사적 사건을 추리소설처럼 재구성했다. 대가의 작품답게 한 사건에 대한 분석에만 그치지 않고 옹정제가 다스린 18세기 초반 중국사회의 전체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책의 미덕이다. - 최영창 기자 ( 2004-07-23 )
4) 조선일보 :
중국 청조의 황제 옹정제가 시도한 사상통제의 전말을 기록한 이 책은 과거의 사건이되 오늘의 이야기로 읽히는 매력이 있다. 역사와 문학을 결합한 글쓰기로 유명한 저자의 역량이 빛난다.
중국 후난성에 사는 쩡징은 저명한 사상가 뤼류량의 저서를 보고 그의 반청사상에 공감, 총독 웨중치에게 모반을 권하는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웨는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한다. 보고서는 옹정제를 제위찬탈자이자 형제를 죽인 살인마이고, 황음을 일삼는 색광이자 술고래로 거짓 묘사하며, 중화사상의 관점에서 이민족 군주의 탄핵을 주창한다.
황제는 모반 가담자를 모조리 처벌하면서도 정작 쩡징은 살려준다. 쩡징을 죽이는 것보다는 그의 잘못을 바로잡아 나머지 한족의 마음을 얻는 것이 한족과의 사상전쟁에서 이기는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모반 수괴와의 대화 내용을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에 담아 중국 전역에 배포한다. '황제와 모반자의 공저'라는 묘한 책은 그렇게 탄생한다.
그러나 한족의 사상을 통제하려던 황제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책을 읽은 자들이 오히려 모방범죄에 나서고, 일부는 황제의 '속보이는 쩡징 사면'을 비판한다.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건륭제는 선왕이 용서한 쩡징을 대역죄인으로 다스리고 책을 금서로 지정한다. 그러나 이 정책 또한 수많은 악성 루머를 양산함으로써 결국 실패한다. - 김태훈 기자 ( 2004-07-24 )
5) 중앙일보 :
섹스광에 술고래, 형제를 죽인 살인마, 게다가 상종 못할 야만인…. 누가 당신을 이처럼 턱없이 음해했다 치자. 벌컥 핏대 내거나 제소할 수도 있겠지만, 책 속에 언급된 상황은 간단치 않다.
음해 받은 이는 18세기 초 중국의 지존(至尊) 황제 옹정제. 그의 첫 반응은 이런 것이었다. "개 짖는 소리에 왜 신경 써?" 처음엔 심드렁했지만 아연 긴장한다. 음해는 청 왕조에 대한 조직적 대역(大逆) 모의의 일부라는 게 점차 확인됐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반역의 책> 도입부다. 다음 상황은 대강 가늠하시겠다고? 범인을 색출하고 그를 대역죄인으로 몰아 극형에 처하고…. 미국 내 중국사 연구의 한 봉우리인 예일대 교수 스펜스의 이 저술(2001년)은 그런 '공식'과 따로 논다. 그것도 정반대다.
옹정제는 대역죄 주모자 쩡징을 "한번 멋지게 요리해보자"고 작심한다. 여차여차한 과정을 거쳐 황제와 대역죄인은 화이관(華夷觀)을 둘러싼 토론집의 공동 저자로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란 책까지 펴낸다.
그 스토리의 자초지종이 <반역의 책>이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뒷전에서 중화족들은 "만주족은 우리와 종(種)이 다른 짐승"이라며 정통성에 승복하려 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터져나온 고약한 사건과 민심 이반의 흐름에 옹정제는 여유자적하게 대응한 것이다. 때문에 <반역의 책>은 위정자가 자신을 거스르는 민심을 어떻게 대처하고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한 풍부한 암시를 준다.
책을 옮긴 이준갑 인하대 교수도 그런 교훈적 요소를 굳이 숨기려들지 않는데, 엄격한 사학자의 말치고는 이례적이다. "정치가뿐만아니라 사회 각 방면의 지도자라며 목청껏 자신의 말만 쏟아놓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명심한다면, 국민을 위한다는 허울 아래 저지르는 섣부른 불장난이 조금은 줄어들지도 모르겠다."(367쪽)
소재 자체가 중국사에서 꽤나 유명한 사건이고, 드라마적 요소가 풍부하지만, 책의 서술과 구성도 소설을 닮은 이 책은 요즘의 '부드러운 역사서'의 한 전형이다. 한 수상한 사람이 행차 중인 총독 웨중치에게 문제의 괴편지, 즉 반역 선동 문서를 전달하는 첫 대목은 이렇다.
"(수상한)사내는 일행이 맞은편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허공에 편지를 흔들며 달려왔다. 가마에 앉은 웨중치는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문을 전달하는 하급 관원과는 좀 달랐다. 그가 편지를 가져오라고 시종들에게 소리쳤다…."
캐릭터 묘사도 그렇다. 이를테면 옹정제는 내공 높은 정치지도자로 묘사된다. 즉 "군주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노는 용처럼 신하들을 은밀히 제어하는"사람이다. 반역의 주모자인 지식인 쩡징은 "무모한 허풍쟁이에 나약한 사람"(366쪽)이다.
공동 저자로 기용된 데서 보듯 '사상전향'과 함께 황제에게 충성 맹세를 하기 때문이다. 조연들도 생생하다. 몸 보신에 급급하다가 끝내 몰락하는 변방의 총독 웨중치, 옹정제의 의중을 읽어내는 관심법(觀心法)의 달인인 심복 오르타이….
이런 묘사는 철두철미 사실에 토대를 뒀다. 스펜스는 당시 황제와 신하 사이에 오고간 문서들의 어휘나 필체 하나하나에 주목하며 당시의 상황과 심리까지 파고들어가는 노회한 솜씨를 보인다. 너무나 세밀한 묘사와 사실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지루한 감도 없지는 않지만, 18세기 초반 중국의 상황은 매우 리얼하게 전달되는 것도 사실이다.
한여름 소설 읽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는 책, 그러면서도 수준 높은 전문 역사서에서 오는 지적 만족감까지 확인할 수 있다. - 조우석 기자 ( 2004-07-24 )
6) 한겨레신문 :
18세기 초,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기틀은 아직도 세워지는 중이었다. 강희제에 이어 제위에 오른 옹정제는 이민족 왕조인 청조가 진정으로 한족을 지배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 데 모든 열과 성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는 목표를 위해서는 꺼릴 것과 거칠 것이 없는 냉혈한이었다. 황권 안정을 위해 친형제들도 가차없이 죽음으로 내모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철저하게 신하를 감시해 충성심이 흔들리면 망설임 없이 죽여버리는 황제였다.
이 옹정제가 권좌에 오른 지 6년째이던 1728년, 촨산지방 총독이던 웨종치에게 뜻밖의 편지 하나가 배달되었다. 편지는 후난성의 한 시골 마을에 사는 벼슬도 없는 하급 지식인 쩡징(증정)이란 자가 보낸 것이었다.
쩡징은 웨종치가 송대 한족의 민족영웅 웨페이(악비)의 후손이란 이유로 한족을 규합해 혁명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우연하게도 황제와 동갑이던 쉰살의 시골서생인 쩡징은 옹정제가 동생의 제위를 훔치 찬탈자이며 술고래에 색마, 살인마라는 비난도 함께 퍼부어댔다.
편지를 읽은 웨종치는, 그러나 쩡징의 희망과는 달리 편지를 배달한 쩡징의 제자를 체포하고 황제에게 보고했다. 옹정제는 즉각 모반을 부추긴 쩡징 일당을 체포하라는 비밀지시를 내렸고, 쩡징과 주변 사람들은 순식간에 단 한명도 남김없이 붙잡혔다. 능지처참이 내려지는 최악의 범죄인 대역죄인이 된 쩡징은 감옥에서 황제의 처형 명령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제국을 뒤흔들었던 이른바 '증정 사건'은 이렇게 편지 한 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컸다. 옹정제는 물론 그의 뒤를 이은 건륭제까지 이 사건으로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책은 거대제국 청나라 초기 최대의 정치적 사건 가운데 하나였던 이 쩡징 사건의 이야기다. 역사 속 사건을 통해 역사를 소설처럼 서술하는 독특한 글쓰기로 유명한 스펜스는 이 책에서도 특유의 연출력으로 마치 추리소설처럼 예상밖으로 전개되는 이 사건의 진행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쩡징이 이처럼 대담한 짓을 저지른 것은 반청사상을 부르짖은 유학자 뤼류량의 글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변방의 '오랑캐'인 만주족이 세상의 중심인 한족을 지배할 수 없다는 화이론적 관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황제가 다스리던 전제국가 중국에서 쩡징의 이런 행위는 목이 열개라도 모자랄 짓이었다. 더군다나 옹정제에게 그가 제위를 음모로 가로챘다는 주장은 사실도 아닌데다 황제의 정통성을 흔드는 음해라는 점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피도 눈물도 없던' 옹정제는 쩡징을 살려주기로 결심했다. 오히려 신하들이 당연히 대역죄인을 처형해야 한다고 상소했지만 옹정제는 끝까지 버티며 쩡징을 설득하고 용서했다. 그를 풀어주면서 1000냥의 은전까지 하사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옹정제의 용서는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옹정제의 결정 밑바탕에는 결코 단순할 수 없는 통치자로서의 고민과 치밀한 정치적 노림수가 깔려 있었다. 옹정제는 쩡징의 편지 내용이 결코 그 개인만의 생각이 아니라 만주족의 지배를 받는 한족들의 공통된 생각이란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는 쩡징처럼 생각하는 대다수 한인들을 설복하기 위해 거꾸로 쩡징을 이용하기로 했다.
대역죄인 쩡징이 미처 몰랐던 황제의 은혜와 청조 지배의 정당성을 깨닫게 만들기 위해 황제는 직접 문서를 내려 쩡징의 주장에 반박하며 타이르고 가르쳤다. 1년여에 걸친 교화 끝에 쩡징은 마침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뉘우쳤다. 황제는 그가 어떻게 황제에게 교화되었는지를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쩡징의 편지와 이후 쩡징의 반성 과정을 담아 <대의각미록>이란 책을 펴내라고 지시한 뒤 전국 각지에 이 책 수십만권을 배포했다.
하지만 감추기보단 드러냄으로써 시중에 소문을 잠재우려 했던 옹정제의 계획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황실에 대한 험담과 비방으로 가득 찬 <대의각미록> 때문에 백성들은 오히려 소문을 기억하고 황제의 해명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가 이런 역효과를 알아채고 뒤늦게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지만 이 역시 실수였다. 백성들은 책이 진실이기 때문에 금서가 되었다고 더 굳게 믿어버린 것이다. 결국 사상 탄압 대신 사상 통제로 권위를 세우려던 옹정제의 의도는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지은이 스펜스의 말처럼 이 기이한 이야기는 역사는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사건들이 실제로는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동시에 아무리 절대적인 힘을 지닌 이라도 세상 모든 것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다는 교훈을 함께 가르쳐준다. - 구본준 기자 ( 2004-07-24 )
7) 한국일보 :
1730년대초 중국 청(淸)에서 널리 읽힌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은 기묘한 책이다. 반역을 도모한 지식인 쩡징(曾靜)과 그가 권좌에서 몰아 내려한 황제 옹정제의 공동저서다. 스펜스 예일대 교수는'대의각미록' 을 화두로 18세기 중국에서 한인들의 투쟁사와 중국 사회상을 세밀하게 서술했다. 쩡징 역모사건의 미스터리는 옹정제가 왜 주모자 쩡징에게 관용을 베풀어 사면했는가이다.
옹정제의 의도는 반역자를 충성스런 백성으로 변화시켜 화이론을 내세운 한족의 반청사상을 약화하려는데 있었으나, 사회적 동요를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현대 중국을 찾아서' '천안문' 등에서 문학적 문장과 역사를 접목시킨 솜씨를 선보인 저자답게 이 책에서도 추리소설이라도 읽는 듯한 재미를 더해준다. ( 2004-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