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거창하지만 내용은 간단한 정리 수준을 못벗어나고 있습니다. 본래는 이런 글을 올리고 쉽지 않았는데 심심할 때 한 번 읽어나 보시길... 백남운에 대한 내용인데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보이네여.
<<맑스주의 역사이론과 한국사인식>>
1. 역사이론과 한국사인식 비판
1) 사적유물론 인식의 특질
1920년대 후반 『조선경제사』의 초고를 완성한 백남운은 여러 강의와 평론을 통해 사적유물론을 주창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이 책을 완성하면서 맑스주의 역사이론과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것은 크게 세가지 문제를 제사하고 있는데, 하나는 '조선사'를 계급투쟁사로 체계화한다는 사적유물론의 전면적 전개, 다른 하나는 일제 관학 및 조선인 특수문화사관의 한국사인식 비판, 마지막 하나는 계급투쟁사의 첫째 작업으로 원시사회로부터 고대국가 성립에 이르기까지 '조선사'의 기점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그가 가장 고민한 점은 기존의 각종 한국사인식을 비판하고 이에 대응한 '신흥사학'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기존 '조선사'가 역사학의 실천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조선학계의 비판과 반성에 기인하였다.
백남운에게 역사학의 실천성이란 식민지라는 "현실의 위압적 특수성에 대하여 절망을 모르는 적극적 해결책"과 제국주의적 구속으로부터 해탈하는 갱생의 길"을 발견하여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을 달성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가 '신흥사학'의 유일한 과학적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은 맑스의 <경제학비판>서문에 정식화된 사적유물론의 방법론, 즉 사회구성체론이다. 그는 사적유물론의 본질을 특히 "일원론적 역사법칙"과 "내면적 법칙화" 두 가지로 요약하고 또 그는 일원론적 역사법칙의 세계사적 관철이란 추상화된 일반성으로부터 '신흥사학'의 출발점을 찾았고 후자는 사회구성에 대한 기본 인식방법을 말한 것으로 사회구성의 기본골격을 이루는 경제적 구성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해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내용은 노동과 생산수단과의 내면적 구성관계-소유 및 계급관계,잉여가치의 수탈양식 -의 역사적 발전과 그 질적 전환을 본질적으로 파악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조선사'의 발전과정이 세계사적 보편성으로의 계급투쟁사임을 밝힌다는 것이었다. 맑스주의 역사학 수립에 당면하여 그가 표방한 과학적 역사관과 방법론의 골격은 대강 이러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사적유물론의 몇 가지 관점을 특별히 강조하여 그것을 부각시키거나 나름대로 논리화하였다.
첫째는 보편성과 특수성 문제이다. 그는 이에 대한 인식방법의 차이가 민족이나 문화의 특수성을 주장하는 부르주아 역사학과 맑스주의 역사학의 차이를 반영한다고 보았으며 그가 강조한 보편성과 특수성 양자의 통일적 이해는 사회구성의 일원론적 발전과정과 각 사회구성 단계의 특수성과의 통일적 이해를 말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철저하게 '보편성을 일탈하는 특수성'을 본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데 일원론적 역사법칙의 본질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둘째로 그는 보편성론과 표리관계에 있는 역사의 내재적 발전과 그 발전의 필연성 문제였다. 즉 내적 모순의 변증법적 발전과 그 발전의 불가피성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는 관점만이 역사과학의 일반적 방법임을 반복해서 강조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내면적 전환의 필연성에 대한 강조는 단순히 연구방법론상의 문제를 논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의 실천적 사회관 국가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법칙의 불퇴성"으로 표현한 역사발전의 내적 필연성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그의 한국사인식의 바탕이었고 "사회평원에의 진로"를 전망하는 인식기반이었다. 그가 식민지 현실에 대해 비타협적 자세를 견지하는 동력은 여기에 있다.
셋째는 사회구성 인식에서의 상호 반작용의 문제였다. 우선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에서 그는 사적유물론의 추상화된 이론을 각 민족의 역사에 그대로 대입하는 '공식주의'를 반대하였고 보편성과의 관련 속에서만 특수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내면화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끝으로 그는 역사인식 저변에는 끊임없이 실천적 한국사인식을 추동한 민족주체적인 관점이 흐르고 있었다. 그의 철저한 반제 민족주의인식과 주체적 민족관에 대해서는 이미 검토한 바와 같지만, 그가 사적유물론 인식에서 내재적 발전의 법칙성을 강조하고 특수성을 보편성과의 관련 속에서만 의미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내면에는 이러한 민족주체적 관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상의 네 가지 관점은 백남운이 1930년대 전반 『조선사회경제사』출간은 전체적으로 볼 때 이론수준은 맑스주의 창시자들이 확립한 사적유물론과 사회구성체론을 원론적인 차원에서 정리한 것 이상은 아니지만 맑스주의 역사학을 하나의 '학'으로 성립시키고자 하는 그에게 있어 이러한 원칙적 관점을 명확히 한다는 것은 극히 중요한 과제였다.
2)식민주의 역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 비판
백남운은 당시 사상계,과학계의 대립이 특히 '조선사연구'를 중심으로 노골화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고 이 대립구도를 정면으로 부각시키고 역사관이란 측면뿐만 아니라 방법론의 측면에 이르기까지 대립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가 당시의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기존 '조선사'는 각종의 부르주아 역사학을 망라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또한 부르주아 역사학의 일반적 성격을 역사의 보편적 발전을 승인하지 않는 특수사관으로 인식하였는데 이에 따라 민족적,문화적,경제적 특수성이 한국사의 본질로 강조되어 한국사의 보편적 발전의 결여라는 인식이 상식화되고 나악 그것은 일제 식민관,식민지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남운이 전형적인 특수사관으로 지목한 것은 일제 관학의 주류와 문화사학의 변종인 일부 조선인의 '특수문화사학'이었다. 백남운의 특수사관 비판의 일차적 대상은 일제 관학이었지만 그는 이에 한정하지 않고 당시조선인에 의한 문화사학 역시 특수사관으로 배척하였는데 그가 비판대상으로 삼은 조선인 문화사학은 주지하듯이 그가 "환상적 단군론자"로 규정한 신채호와 최남선의 역사학 즉 '단군조선론'을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는 기존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단군인식으로는 계급 및 민족형성 문제 , 국가의 본질 등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식민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떠한 이론적 전망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백남운의 한국사인식 비판은 기존 특수사관의 정치적 성격과 방법론적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일본인의 그것은 식민지 지배이데올로기의 일환에 지나지 않았고 조선인의 그것 역시 민족해방을 실천적으로 전망할 수 없는 특수사관으로 규정되었다. 그는 이를 방법론의 형식을 빌어 논하였지만 비판의 본질은 역사관,사상의 문제였다.
2. 한국사 발전단계론의 구성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서문에서 한국의 경제적 사회구성의 발전과정을 크게 네 단계로 설정하였다. 원시씨족공산제사회, 노예제사회(삼국정립기), 아시아적 봉건제사회(삼국시기 말부터 최근세), 외래자본주의사회(일제하 현재)가 그것이었다. 이 가운데 분석대상으로서는 아시아적 봉건제사회의 외래자본주의 사이에 아시아적 봉건제의 붕괴과정과 자본주의 맹아의 형성문제를 별도로 설정하였고, 또한 이데올로기 발전의 총과정이라고 하는 '조선사상사'의 체계화를 구상하였다. 그의 작업은 아시아적 봉건제사회를 해명하는 선에서 끝났지만 이는 사회구성체론에 입각한 최초의 한국사 시대구분이었다.
1) 원시공산체론
백남운은 과학적인 한국사인식의 수립에서 원시공산제사회 문제를 가장 핵심적이고도 어려운 난관 중의 하나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사적유물론의 출발점을 이룬다는 상징적인 의미보다 실제적으로 이 사회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해 낼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적인 문제다. 무엇보다도 이 작업을 위해서는 민족시조 단군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근본적으로 타파해야 한다는 데 있다. 또한 "환상적 단군론"비판은 단군에 대한 역사적 해석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부르조아 역사관의 정신적 지주,가치관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사상투쟁의 의미를 내포하였다. 이 과제를 해명하기 위해 그가 설정한 작업대상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단군관념의 역사적 성격을 분명히 하는 문제였다. 신화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생산관계적 행동의 반영으로 계급분열기의 지배복종의 관념행태이다. 따라서 신화의 계급적 본질은 계급사회의 발전과정에서도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제국주의 단계에서는 국가의식 국민사상의 함양을 추구하는 국가권력의 계획적 문화정책에 의해 윤색되고 합리화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그는 단군신화의 결정적 특징은 "天孫降臨의 假象化'君主로서의 "王檢의 神性化"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단군신화를 농업공산사회 붕괴기라는 질적 전환기, 즉 계급사회 돌입기의 남계추장제 추장세습제의 출현이라는 원시사회 발전사의 중요한 역사적 지표로 규정하였다. 둘째는 원시공산제사회의 주체인 씨족제의 실체를 밝히는 문제였다. 백남운은 씨족제와 가족의 기원 문제에 대한 부르주아적 견해가 민족해방의 과학적 전망을 저해하는 국가관념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파악하였고 씨족제의 실체와 가족의 기원-특히 군혼의 존재-을 밝히는 문제가 부르주아적 윤리관 국가관의 하구뿐만 아니라 단군론자들의 국수주의적 민족관 등을 폭로하는 실마리로 인식하였다. 셋째는 원시사회 발전과 해체의 원동력을 이론적 ,실증적으로 해명함으로써 원시사회 발전의 총과정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정리해보면 백남운의 원시사회론은 맑스주의 역사이론의 일반적 방법론에 근거하여 세계사적 보편성으로서의 한국사의 출발점을 해명하고 부르주아역사학의 관념을 타파한다는 실천적 역사의식을 강하게 반영하였다.
2)노예제사회론
-실천적 과제
백남운의 노예사회론은 맑스주의 역사이론 수립과 관련한 그의 실천적 문제의식이 집중 반영된 말하자면 전술한 그의 한국사인식 비판의 제관점이 실증적 형태로 구체화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노예제사회의 존재를 통해 한국사 역시 세계사의 일환으로서의 계급투쟁사임을 밝혀 한국사에서도 '세계사적 기본법칙'이 예외없이 관철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합법칙적 역사인식으로부터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이해할 때에만 민족적 현실을 실천적으로 전망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또한 그의 국가론은 민족문제 인식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즉 그것은 민족으로의 통합과정이 본질적으로 계급관계, 지배예속관계의 확립에 기초한다는 민족관념의 계급성을 해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는 고대 민족국가가 노예소유자계급의 국가라는 세계사적 보편성의 관철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조선민족 형성의 조숙성을 한국사의 한 특수성으로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독특한 민족관, 민족문제 인식을 내면하였다. 그가 노예제사회론을 통해 한국사의 합법칙성을 강조한 또 하나의 중요한 실천적 문제의식은 일제 관학자에 의해 철저히 분장되고 있던 '토지공유론'의 허구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즉 총독부 관리 화전일랑을 비롯하여 잔견론태랑등 "반하통의 관학자"들은 '토지조사사업'이전의 조선의 토지제도를 '사적 소유를 결여한 국유제'로 간주하고 그 연원을 삼국시대의 '공유제'에서 찾고 있었다. 백남운은 이것이 공유제의 해체를 기반으로 한 토지국유제의 역사적 성격과 아시아적 봉건제의 존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토지조사사업'은 제국주의에 의한 생산영역의 분할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이론구성과 한계
그러나 이러한 실천적 과제인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예제사회론은 이론구성에서 '공식주의'로 평가받게 되는 불가피한 논점을 내포하였다. 그의 노예제사회론으로부터 부각되어진 쟁점들은 ?眸? 조선에서 최초의 계급사회로 등장한 것은 노동노예제에 입각한 노예제국가라는 것, 둘째 노예제국가 성립의 원동력은 생산력 발달에 의한 소유의 분해와 이에 따른 계급분화에 기초하며 그것은 고전적 과정과 필적한다는 것, 셋째 이 과정은 또한 씨족-종족 부족-민족이라는 민족형성의 과정이 라는 것 넷째 김부식의 위작에도 불구하고 노예제 정복국가 민족국가의 발전사는 가장 선진국인 고구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 다섯째 노예제국가는 민족적 국민적 규모로 권력을 집중하여 토지국유제를 확립하고 이에 입각하여 조세수탈 및 중앙집권을 실현하였다는 것, 여섯째 토지국유제는 본질적으로 씨족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반영하는 공유제의 해체를 전제하며 당시 남아 있는 공유제는 이미 역사적 의의를 상실하였다는 것, 일곱째 농업생산력의 증대, 개별경영의 성장 등에 기초하여 토지국유제에서 파생된 토지사유제가 발전하여 중앙집권적 노예국가를 해체시켜 나가는 물적 토대가 된다는 것 등이었다.
위에서 그는 노예제를 해명하는데 오랫동안 고민한 무제는 사실상 노예제사회의 존재 여부 자체 그리고 그 고민의 배경에는 당시 세계 맑스주의 진영 내에 일반화되어 있었던 '아시아사회 노예제결여론'과 그 이론적 기반으로서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논쟁은 레닌그라드 대토론에서의 문제였다. 여기서 백남운은 '아시아적 특수성론=정체성론'을 부정하고 사회구성의 계기적 발전의 합법칙성을 강조하고 동시에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봉건제의 변종이라고하여 노예제 결여의 입장을 취한 고데스의 의견에 찬동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노예제결여론에 대한 백남운의 견해였다. 그는 각 민족사에서의 세계사적 기본법칙의 보편적 관철을 중시하여 일원론적,단계적 발전을 강조하고 특수성은 시대적 특수성만 존재한다는 입장을 견지한 그로서는 노예제결여론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고민 끝에 그는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한국사의 보편적 발전단계를 한국사의 '합법칙적=일원론적' 발전단계에 어떻게 통일적으로 위치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전개되었다.
3)아시아적 봉건제사회론
-백남운 비판과 그 인식기반
『조선사회경제사』의 출간은 특히 일제가 만주침략 이후 사상탄압과 식민지수탈을 한층 강화하고 일제 관학이 조선연구를 독점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저서는 민족적 자긍심과 조선연구 열기를 고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 일부에서 백남운의 한국사인식에 대한 비판과 이견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백남운에 대한 비판적 극복은 맑스주의 역사학의 발전에 있어 가장 긴급한 과제로서 간주되었다. 처음 1,2년간 일부 실증적 의문을 제기한 경우도 있지만, 비판은 주로 백남운의 이론적 사상적 관점에 맞추어졌다. 그 비판의 요점은 백남운의 관점이 보편성을 강조하는 '기계적 공식주의'이며 따라서 그것은 사적유물론이 아니라 소부르주아적 관념론이라는 데 있었다. 대부분의 비판론자들은 백남운이 사적 유물론을 전면에 표방하게 되었던 1930년대 초의 학계 및 사상상황과 이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보다는 맑스주의 문학의 확립과 관련하여 부각시킨 '일원론적 역사법칙'개념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일원론적 역사법칙을 한국사에 적용시키는데 급급하여 한국사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공식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강조하는 '조선의 특수성'은 대개 한국사의 정체적 타율적 성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당시 주목을 받은 한홍수의 한국고대문명 성립에 관한 견해는 다름 아닌 한국사의 중국사에서의 종속성을 반영하는 주제들이고 그것이 그가 말하는 '조선적 특수성'의 요체였다. 즉 한홍수가 제시한 '조선적 특수성'은 한국 고대문명 성립의 '외부적 모티브'였고 그 '외부적 모티브'의 실체는 '야만의 韓族에 문명의 문을 열어 준 '문명의 漢族'이었다. 또한 이들의 입장은 백남운의 입장을 사적유물론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추상화, 관념론적 견해로 규정하였다. 공식주의 외에 이들이 거론한 것은 실천적 위상의 문제였다. 특히 이청원은 백남운의 방법론이 불철저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소속, 역할로부터 오는 필연적인 당연한 귀결"이며 나아가 이는 조선경제의 현단계에 대한 백남운의 인식이 개량주의적인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하여 백남운의 현실인식까지 '개량주의'로 비난하였다.
그러나 백남운 비판자들은 공식주의라는 비판외에 백남운의 이론과 학문적 성과에서 무엇이 관념적이고 개량주의적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백남운의 인식방법과 활동반경의 제한성을 곧 관념론, 개량주의로 비판하였다.
-한국사인식의 분화
이상과 같이 『조선사회경제사』출간 직후의 비판들은 학적 내용을 토대로 한 구체적 이견의 제시는 아니었으며 그 돌파구를 마련한 것은 1933년 후반 이후 일본에서 재개된 아시아적 생산양식논쟁과 고대사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개념규정에 대한 재검토와 함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사회구성사적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역사발전의 계기성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아시아적 생산양식=아시아적 봉건제사회'라는 기왕의 일반적 견해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노예제의 아시아적 형태라는 견해가 지배적인 위치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아시아적 봉건제사회는 아시아적 노예제사회의 계기적인 사회구성으로 파악되었다. 이와 같이 내면적으로는 계급주의 민족관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역사이론과 관련해서는 아시아적 생산양식론과 일본학계의 동향에 일정한 영향을 받는 가운데 1936년 이후에는 한국사 발전단계론에 관한 새로운 견해들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이는 크게 두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이청원의 견해이다. 그는 한국사의 발전단계를 원시공동체사회-아시아적 노예제사회(삼국시대-고려시기)-아시아적 봉건제사회(조선시기)로 설정하였으며 한국에서의 노예제사회는 인정되지만 전형적인 노예제는 아니고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기초로 하는 토지국유를 물적 기반으로 하고 노동노예와 반공산주의적 공동체 성원을 직접 생산자로 하는 아시아적 노예제사회이며 그 시기도 고려시기까지 내려온다고 하였다. 다른 하나의 견해는 이북만이 처음 제기하고 김광진 등에 의해 주장된 기존의 노예제결여론이었다. 김광진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백남운의 노예제사회론을 비판하여 고구려는 3세기까지 씨족제도와 공동체 관계가 지배적이었고, 4세기에는 공납제 수취관계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경제제도로서의 노예제는 존재했지만 사회구성으로서의 노예제사회는 성립할 수 없었고, 5세기 접어들어 속민제도와 공납제를 기반으로 점차 국가를 형성하고 봉건제사회를 직접 이행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상의 제 견해의 입론은 서로 달라도 하나의 공통된 논지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원시사회 이래의 공동체적 요소의 강인한 잔존과 소유관계의 미발달 등 이른바 아시아적,조선적 특수성을 강조한 점이다. 이 특수성의 본질은 결국 모두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내면화되어 있는 특수적 아시아 인식, 즉 정체성론으로 모아지는 것이다. 백남운에 대한 비판과정을 통해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은 한국사의 정체성을 과학적으로 보증하는 이론적 지주가 되었다.
-반비판과 아시아적 특수성론
백남운이 『조선봉건사회경제사』上을 출간한 것은 한국봉건사회의 아시아적 특질을 해명함으로써 자신이 구축한 한국사의 합법칙적 발전과정, 사회구성의 계기적 발전단계를 이론적,실증적으로 논증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구라파 내지 일본형과 구별되는 아시아적 봉건제의 '조선형'을 구명하여 福田德三이래 일본 관학자들이 주장한 봉건제결여론의 허구를 분쇄하고자 하였다. 그는 서구형 봉건제의 척도만을 가지고 봉건제 결여를 주장하는 일본 관학자들의 견해를 형태와 본질 관계에 무지한 부르주아 관념사관의 전형적인 형태론이나 봉건적 사회구성의 세계사적 성격의 본질과 조선의 아시아적 봉건제의 특수성을 통일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절망적인 공식주의자"의 견해하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백남운은 이상의 반비판에 입각하여 그는 신라말기 이래의 한국사는 봉건전사이며 특히 고려사회는 신라의 노예소유자적 사회구성의 분해로부터 성립하여 조선왕조의 절대주의적 봉건제를 이행하기까지 "반도 봉건사상에 있어 가장 전형적인 정력적 봉건사회"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봉건제가 유럽 및 일본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아시아적 봉건제유형으로 나타나는 일반적 기초조건과 '조선의 특수성'이 관철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의 아시아적 봉건제사회론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는 것은 토지국유제론과 농노경제론 및 봉건지대론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비로소 노예제사회의 토지국유제와 봉건제사회의 토지국유제 간의 차별성을 논리화하는 동시에 후자가 아시아적인 논거를 제시하였다. 즉 최고지주인 국가가 명실상부하게 집적된 토지소유의 주체로 등장하는 집권적 공전제가 봉건적 토지국유제로 이것이 기구적으로 관철되는 모든 '아시아적'속성의 물질적 기초를 있다고 주장하였다. 농노경제와 봉건지대는 이러한 아시아적 봉건제의 특수성 속에 관철되고 있는 세계사적 성격이었다. 즉 맑스와 레닌의 농노경제론에 입각하여 그 생산주체인 농민은 토지에 긴박되어 집권적 봉건국가의 及盤으로서 봉건지대를 착취당하는 봉건적 농노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봉건적 계급관계의 일반적 성격은 지주군과 농민국과의 대립관계를 내포하면서 일차적으로 최고지주인 국가와 농민의 대립관계로 나타나며 그 대립관계는 조세와 일치되는 봉건지대로 표현되는 점에 세계사적 보편성이 관철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위의 백남운의 두 번째 저서를 살펴보면 그 일관성의 이면에 첫 저서와 구별되는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봉건제의 아시아적 특수성이 분석의 초점이 되는 가운데 백남운에게서도 그 특수성의 한 속성으로 아시아적 정체성 문제가 일정하게 고려되고 있는 점이다. 그는 그의 글 서문에서 현실인식과 이 점의 실천적 의의를 부각시켰고, 부분적이긴 하지만 정체성과 관련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그가 봉건적 농노경제의 기저로서 농촌공동체 촌락공동체의 존재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핀바 그는 노예제사회에서의 촌락공동체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그가 이와 같이 정력적으로 고려봉건제의 아시아적 특수성 햄여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그 방대한 저서 어디에서도 아시아적 봉건제사회를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관련시켜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 시점에서 이러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새로운 이해를 어떠한 관점에서 일원론적 역사법칙과 관련시키고 그것을 어떻게 한국사에 적용시킬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였지만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는 그가 기왕에 구축한 발전단계론의 재구성을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토지국유제론을 중심으로 설명한 아시아적 특수성 개념의 일반적인 재정리를 요구하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4)봉건제해체 자본주의맹아론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서문에서 "아시아적 봉건국가의 붕괴과정과 자본주의의 맹아형태"라는 항목을 자신의 "조선경제사 기도"의 네 번째 과제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그의 봉건제해체론 구상은 당시 과학적 '조선인식'의 확립이란 과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세 가지 실천적 의의를 내포하였다. 하나는 일제 강점이전에 조선은 이미 봉건제사회의 붕괴과정을 겪는 가운데 내재적 자본주의발전 가능성을 형성하였다는 것을 해명함으로써 조선후기 한말을 대상을 더욱 치밀하게 합리화되고 있는 일제 관학의 '조선정체론'을 타파하고자 한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내재적 발전이 어떻게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왜곡되어 가는가를 밝힘으로써 정체성론에 근거하여 식민지 침략을 은혜로 분장하고 있는 일제와 관학자들의 식민지-자본주의 미화론의 허구를 폭로하고자 한 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이와 같은 이식자본주의 체제 형성의 역사적인 기원을 해명함으로써 현단계 조선의 사회성격과 실천적 전망의 단서를 확보하고자 한 점이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전시체제하 일제의 사상탄압에 의해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에 여기에서는 그가 단편적으로 언급한 것들을 토대로 이 주제에 대한 그의 구도와 접근 방식을 개괄적으로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서의 내재적 자본주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백남운의 구상은 조선 봉건주의사회는 특히 1984년 갑오년을 분기로 하여 정치적,사회경제적 분화의 촉진,자유사상의 발달, 신분해방 등에 의해 점차 해체되었고, 이 과정에서 각종 특권계급과는 달리 권력과 무관하게 밑으로부터 성장한 제3계급으로서의 신흥계급이 등장하였다는 것이었다. 특히 신흥계급 창출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가 조선의 실정을 강조하면서 농촌 신흥계급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농업생산력 발전에 기초한 구래의 봉건적 생산관계 토지소유관계의 해체와 상품화폐경제의 전반적 발달을 전제하고 또한 이에 기초한 농민층의 분해와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초창기 그의 자본주의 이행론은 갑오년을 분기로 하는 개항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러나 그가 봉건국가 봉건제사회의 해체과정을 개항기에 국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상품화페경제의 성장에 기초한 봉건착취의 강화과정을 봉건제사회의 해체과정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18세기후반,19세기 전반기의 실학은 이러한 봉건기구의 붕괴에 대한 반성적 요구로서, 성리학 예학의 형이상학적 경향이나 중국에의 학문적 종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등장한 새로운 학문적 동향으로 간주되었다. 그가 실학파를 '實學派'로 규정한 근거는 요컨데 그 학풍이 경제정책이론, 즉 사회개혁론을 본질적 특질로 한 까닭인데 그것은 실천적으로 볼 때 일제하 극도로 심화되어 있는 농민문제 토지문제에 대한 변혁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실학 정다산 인식과 더불어 백남운의 봉건제해체론의 구상을 보여주는 다른 한 단서는 상품론이었다. 그는 조선경제사 연구에 있어서 맑스주의 경제학이론의 출발점인 상품론이 갖는 이론적 의미를 극히 중시하였다. 상품생산은 주지하듯이 상품유통, 즉 시장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그의 관심은 상품화폐경제,시장문제에 두어졌다. 그는 시장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사뿐만 아니라 봉건적 도시경제의 계급구성이나 상업자본과 고리대자본의 역사적 전개를 이해하는 주요한 단서로 파악하였다. 그가 고려봉건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미 봉건제 태내에서 형성된 상품생산의 특질, 화폐유통, 그리고 이를 매개하는 봉건적 유통기구의 일환으로서의 교환시장 문제에 주목하였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정리해 보면 그는 조선후기의 과도기를 거치면서 봉건제 해체가 진행되었고 특히 1894년 갑오기를 분기로 그것이 촉진되어 내재적 자본주의화 과정이 일정하게 진전되었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에 입각하여 조선의 내재적 자본주의화 과정, 부르주아 사상의 전개를 전연 간과하고 조선의 자본주의 형성을 일제 강점 이후 일제 정책에 의해 비로소 확립되었다고 파악하는 타율적 논리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