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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째 이야기, 비가 새는 판잣집에 새우잠 잔대도 (1)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64)
58년 개띠 노동자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합니다. 잠시 쉰다는 것이 1년을 넘겨 버렸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어찌 보면 완강하게 버티며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그보다도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소소한 일상을 통해 그려 보고자 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필자
[삽화-백소(白笑)]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어제는 겨울비가 꽤 많이 내렸다. 그 때문에 신돌석씨는 오늘 춥지 않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안개만 잔뜩 끼었지 아침부터 영상의 기온이 계속되었다. 신돌석씨가 오늘 날씨를 걱정한 것은 오늘이 집 공사를 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추워도 비가 와도 안 되었다. 바닥이 가라앉은 곳이 있어서 거기를 평평하게 하면서 동시에 화장실을 고치기로 했다. 화장실에 세탁기가 들어가 있는데, 안방에 있는 작은 화장실의 화장실 기능을 없애고 세탁기를 그리로 옮겨서 쓰는 것이 오래전부터 아내의 숙원사업이었다. 그러면서 화장실을 좀 더 넓게 쓰고 샤워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보자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신돌석씨는 딴청을 피웠다. 전세를 살고 있으니 고친다면 그건 전적으로 주인의 권한이다. 그러므로 주인이 돈을 대야 할 일이지만 그만큼 전세금을 올리자고 할 게 뻔했다.
신돌석씨네 주인집은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임대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다주택자들에게 임대업 신고를 하면 세금 감면을 해주어서 집값 폭등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돌석씨는 강남에 비싼 집을 여러 채 소유하는 임대업자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이 동네 임대업자들을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듯하였다. 이 사람도 이 동네에 집을 여러 채 갖고 있는데 그러면서 정작 자신은 방 하나짜리 원룸에서 살았다. 그리고 항상 돈이 없어서 쩔쩔맸다. 왜 그러는지는 말을 안 하니 알 수 없었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이 동네가 개발될 거라는 말을 믿고 빚을 내서 이 집 저 집 사두었다가 개발이 취소되는 바람에 빚만 잔뜩 지게 되었다고 한다. 진짜 그런지 안 그런지 신돌석씨로서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집을 여러 채 갖고 있는 것에 비하면 돈이 없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작년 국회의원 선거 때까지 동네의 재개발은 거의 기정사실인 듯하였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할 것 없이 나오는 사람마다 동네 재개발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심지어 진보정당 후보마저 그랬다. 아니 젊은 그 후보는 도시 재생이란 개념을 썼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게 그것인 걸로 알아들었다. 그 후보도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지, 아니면 동네 사람들이 모르는 것 같으니까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지 몰라도 결국 재개발과 다를 바 없이 이야기되었다. 동네 사람들 특히 집주인들의 기대는 대단히 컸다. 재개발되면 집을 팔 거라는 둥, 전세를 내놓을 거라는 둥 자기들 나름대로 신나게 꿈을 펼쳤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신돌석씨는 계란 팔러 장에 가던 처녀 이야기가 떠오르곤 하였다. 하지만 집주인들의 서너 배 이상 되는 세 든 사람들은 신날 일이 없었다. 오히려 또 이사 가야 하는 생각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렇다고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그저 속으로만 간직하다가 세입자들끼리 만나면 소곤대곤 하였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뒤 재개발 이야기는 쑥 들어갔다. 새로 당선된 국회의원이나 시청 쪽에 연줄이 닿는 사람들이 재개발은 결국 물 건너갔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왜 그런지는 정확히 이야기되지 않았다. 환경 문제로 보면 재개발 취소가 정말 잘 된 일이라고 시민단체 사람들은 말하였다. 원래부터 그런 계획은 없었는데 괜히 선거 때문에 후보들이 떠들고 다니고, 순진한 주민들이 믿은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데 그에 대해 항의를 하는 사람 하나 보지 못했다. 그냥 희망하다가 안 되면 그런가 보다 했다. 그리고는 여름을 넘긴 뒤 가을부터 골목에는 공사하는 차량들이 매일 드나들었다. 다들 나이가 많고 수입이 적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공사를 하면서 작은 방으로 주인들이 옮겨 갔다. 옥상에 있는 다락을 수리해서 옥탑방을 만들고 주인 내외가 그리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돌석씨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또 어디로 이사 가야 하는지 걱정을 했는데 안 그래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너도 나도 공사를 하니 우리 집도 좀 고쳐 달라고 이야기하자고 아내와 이야기했다. 주인집에 이야기하니 당장 해줄 것처럼 하다가 차일피일 미루더니 결국 가을을 다 보내고 말았다. 말은 안 해도 아마도 돈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기한도 안 됐는데 전세금을 올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실 이번 여름에 비가 새서 지붕 공사하면서 이미 전세금은 2천만 원을 올려 주었었다. 겨울이 오고 유달리 날씨가 추워서 이제 포기하나 했는데 주인집에서 연락이 왔다. 날이 조금 따뜻해지면 공사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로 날짜를 잡고 공사를 하게 되었다.
아침을 채 다 먹기도 전에 공사할 사람이 왔다. 신돌석씨 집을 단골로 고치는 사람이었다. 장씨 혹은 장사장이라고 불렀다. 주인집은 돈이 부족하다 보니 한 사람에게 맡겨서 다 고치게 하였다. 신돌석씨가 보기에 손재주는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손재주가 있어도 이런 저런 일을 혼자 다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니까 자연히 문제가 발생하곤 하였다. 예전에 동네에 미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중 일이지만 사람들이 맥가이버 혹은 순돌이 아빠라고 부르곤 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팀으로 하는 사람들이 없고, 인테리어 업체가 없어서 그렇기는 했는데,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하였다. 장씨가 신돌석씨네 집 공사를 한 것이 네 번째이다. 첫 번째는 바닥 보일러 공사, 두 번째는 천장 비 새는 곳 수리, 세 번째는 하수도 공사이었다.
[삽화-백소(白笑)]
이사 온 해 겨울이었던가. 영하 10도 이하로 기온이 내려가는 몹시 추운 날이었다. 보일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주인집에 전화를 하니 보일러 회사에 문의하란다. 그래서 보일러 회사 서비스 센터에 전화를 하니 보일러가 얼어서 그러니까 드라이기로 녹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녹이는 방법을 담은 동영상을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그것에 따라 드라이기로 녹이니 두 시간이 다 돼서 결국 보일러가 작동되었다. 일단 그렇게 한숨을 돌렸는데 며칠 뒤에 보일러는 돌아가는데 방이 계속 차다. 이때는 주인집에서 왔다. 결국 장씨를 불러서 살펴보니 방바닥에 설치한 보일러 관이 새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닥 일부를 뜯고 공사를 하였다. 이런 공사야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러려니 했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 경험 때문에 엔간히 추워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올겨울에 영하 18도 이하로 내려갈 때 온수가 안 나오자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드라이기였다. 그것으로 녹이니 30분 정도 후에 온수가 나왔다. 물론 그 전에 날씨가 추워질 때를 대비해 보일러 관을 꽁꽁 싸매두고 물을 조금씩 틀어 놓는 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두 번째 공사는 천장에서 비가 새는 것을 고치는 일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 자고 있는데 천장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똑똑 떨어진 적은 있었지만 쏟아진 것은 처음이었다. 다락으로 올라가서 문을 열고 또 하나 있는 방으로 가 보니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신돌석씨 집 다락에는 방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다락으로 쓸 수 있었고, 또 하나는 컴컴한 곳으로 무엇 때문에 그런 곳이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 기생충을 볼 때 그 방이 생각났다. 기생충처럼 크고 복잡한 지하 공간은 아니지만 불필요하게 다락을 분리해 놓았다. 사람을 죽여서 놓아도 모를 그런 곳이었다. 신돌석씨는 이 집에 이사 온 지 몇 년 만에 처음 들어와 보았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고, 공사하다 버린 듯한 잡동사니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 벽에 파이프 관이 튀어 나와 있고, 무엇인가로 막아 놓았는데 그게 튕겨져 나가면서 물이 쏟아진 것이었다. 너무 놀라서 일단 1층으로 내려가 계량기를 잠갔다. 주인집에 연락을 해서 한참 뒤에 장씨가 왔다. 그의 말로는 파이프 안이 얼었다 녹으면서 수압에 못 이겨서 터져 나온 거란다. 누가 공사를 했는지 한심하게 해서 이렇게 됐다면서 어쩌구 저쩌구 설명을 했다. 그의 말로는 수도관을 잘못해서 벽으로 연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일거리를 찾았다. 비가 똑똑 떨어졌다던데 어디냐고 묻는다. 출근을 해야 해서 더 대거리를 못하고 대충 말했다. 그런데 결국 다락 옆의 옥상에 방수제를 바르는 등 비를 새지 않게 하는 공사를 그가 맡아서 했다.
그런데 그의 공사는 이번 여름의 비에는 완전히 속수무책인 날림공사였다. 비가 연일 쏟아지니 천장이 젖기 시작했다. 안방, 작은방, 그리고 현관문 바로 앞 신발장 위가 흥건히 젖어서 지도를 그렸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물의 무게를 못 이긴 천장이 물을 쏟아냈다. 안방은 문에서 대각선으로 구석진 곳에서 비가 샜는데 바로 그 위가 장씨가 방수제를 발랐던 곳이었다. 주인집에 항의를 하자 비가 그치면 옥상을 완전히 덮어 버리는 공사를 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비가 뜸해진 다음에도 별 이야기가 없어서 채근을 하니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었다. 결국 11월에 인상할 것을 미리 석 달 앞당겨 올려주고 공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 공사는 이 사람을 시키지 않고 대부대가 와서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은 비가 새는 기미가 없다. 지난 가을에 비가 많이 왔을 때도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
한참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천장이 젖으면서 불안 불안할 때 신돌석씨는 ‘사노라면’을 불렀다. 이 노래 2절에 ‘비가 새는 작은방에 새우잠을 잔대도’라는 가사가 있다. 요즘은 그렇게 부르는데 신돌석씨가 처음 이 노래를 배웠을 때는 ‘비가 새는 판잣집에 새우잠을 잔대도’라고 불렀었다. 판잣집이라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무언지 모를 것이다. 그야말로 판자로 만든 집이다. 판자는 간단한 목재이다. 요즘은 목재건축이 고급 건축으로 인식되는데, 판잣집은 목재 건축이라고 해도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것이었다. 이런 집들이 60년대 서울에는 수도 없이 많았다. 산동네에는 판잣집이 즐비하고 그렇게 모여 있는 곳을 판자촌이라고 했다. 신돌석씨가 어렸을 때 살던 망태산은 그야말로 판자촌이었다. 산등성이 따라 판자촌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가 끊긴 곳이 있었다. 철조망으로 울타리가 처져 있는 곳인데 고아원이 있었다.
고아원 애들은 등하교를 함께 하였다. 나이가 많은 애들도 적지 않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있기 때문에 다들 무서워하였다. 3학년 때인데 반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애가 고아원 애를 때렸다가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5학년, 6학년들 여럿이 몰려 왔는데 척 보기에도 아저씨처럼 보이는 애들이었다. 때린 애가 도망갔다가 잡혀 왔는데 애들 다 보는 앞에서 무릎 꿇고 빌어야 했다. 나이 많은 애들은 아마 전쟁 고아였을 것 같다. 전쟁 때 고아가 된 애면 신돌석씨보다 많게는 열 살에서 적게는 다섯 살 정도 위이다. 학교를 몇 해 늦게 다니면 그 나이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편견을 갖듯 고아원 애들이 다른 애들을 때리고 물건을 빼앗고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른 데 고아원은 몰라도 신돌석씨 동네의 고아원은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는 날에는 고아원으로 돌아가서 엄청나게 혼이 났다고 한다. 그 고아원에서는 너희들이 고아이기 때문에 더욱 행실을 잘해야 한다고 항상 가르쳤다고 들었다. 하지만 자기들 중 누군가가 맞을 때에는 여지없이 떼거리로 몰려서 보복을 하였다. 그리고 간혹 고아원 내 규율과는 상관없이 몰래 다른 애들한테 물품을 갈취하는 애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망태산 애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만큼 신돌석씨 동네인 망태산 판자촌 애들도 거센 편이었다.
고아원은 신돌석씨가 초등학교 3학년인가까지 있다가 이사를 갔다. 동네 어른들 말로는 현대그룹에서 샀다고 한다. 그 뒤 거기가 무엇으로 변했는지는 신경을 안 써서 그런지 알지 못한다. 그 옆으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별장 같은 커다란 집이 있었다. 사람들은 거기를 이승만 별장이라고 불렀다. 이전 같으면 거기가 꽤 경치가 좋았을 것 같다. 대통령이 별장으로 삼을 만한 곳이었다. 거기를 지나서 다시 산등성이에 판자촌이 줄이어 있는데 남산까지 이어져 있다고 하였다. 원래 판자촌은 남산부터 시 외곽으로 벋어져 내려왔다고 한다. 판잣집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다. 거의 다 무허가 건축물이었다. 당시 정부의 무리한 경제개발이 농촌을 황폐화시키고 서울로 서울로 올라오게 하였는데 집은 부족하니 판자촌을 짓고 살게들 된 것이다. 판잣집은 그 이전에는 일본말과 합성어인 하꼬방이라고 하였다. 신돌석씨 어렸을 때 어른들이 하꼬방이라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하꼬는 일본말로 상자라는 뜻이다. 상자같이 작은 방이라는 뜻이리라. 그것이 판잣집으로 변하고, 다시 그것도 이제는 작은방이라고 바뀌었다.
[삽화-백소(白笑)]
이번에 ‘사노라면’이 길옥윤이 60년대 작곡한 노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최근에 인기 드라마에 나오면서 많이들 불렀는데 술좌석에서 어느 선배가 이게 언제 노래인지 아냐고 물었다. 누군가 70년대부터 구전되어 온 민중가요라고 하자, 그 선배는 아니라고 하면서 60년대 가요였다고 한다. 그때 제목은 ‘내일은 해가 뜬다’였단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가사가 암울하다고 금지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민중운동하는 사람들이 부르면서 구전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길옥윤이라면 신돌석씨도 꽤 익숙한 사람이다. 패티 김의 남편이었고, 혜은이에게 많은 곡을 주었던 사람이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에서 손에 꼽는 작곡가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사노라면’의 원작곡자이고, 그것이 독재정권에 의해 금지되었다는 것을 들으면서 정말 웃픈 이야기가 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신돌석씨 가족이 망태산에 온 것은 신돌석씨가 일곱 살 때였다. 신돌석씨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산에서 결혼하고 그 동네 판자촌에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쟁이 막 끝나가던 때였다. 당시 부산은 피난 온 사람들로 북적이던 곳이라서 주택이 부족하고, 판잣집을 무허가로 마구 지어놓은 판자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공동 화장실밖에 없는 곳인데 수십 가구에 화장실 하나이니 매번 엄청나게 줄 서 있고, 소변은커녕 대변도 해결하지 못하고 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집 옆에 빈 공간만 있으면 화장실을 만들었다. 아버지도 역시 집 옆 빈 공간에 화장실을 만들었더니 법규 위반이라고 하면서 구청 직원이 와서 벌금을 내라고 했단다. 다른 집들도 많이 지었는데 왜 우리 집만 그러냐고 항의하니까 그 구청 직원의 말이 ‘그건 난 모르겠고’였단다. 아마도 다른 집들한테는 돈을 받아먹고 묵인해 주면서 신돌석씨 아버지더러도 돈을 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하도 닦아세우니 아버지가 화가 나서 그를 두들겨 팬 모양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경찰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군에 있던 외삼촌이 경찰서에 가서 빼내주지 않았으면 아버지는 신혼 시절부터 감옥살이를 할 뻔했다. 당시는 전쟁 중이라서 군인, 특히 장교의 힘이 안 통하는 곳이 없었다. 사실 아버지의 죄야 공무집행방해와 단순 폭행인데, 공무집행방해죄라는 것은 공무원들 생각으로는 심한 죄이지만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많았다. 판자촌에서 화장실 짓는 데도 돈 받아먹고 눈감아 주던 시절이었으므로 그 일이 확대돼서 좋을 것 없다고 관청 측에서는 생각했을 것이다. 더욱이 상대가 현역 장교이니 자기들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게 해서 외삼촌은 아버지를 빼줄 수 있었다고 한다. 아직도 신돌석씨는 외삼촌과 아버지는 해방정국에서 함께 일했다는데 왜 외삼촌은 장교가 되고, 아버지는 길거리에서 구둣방을 하는 사람이 됐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화장실을 만들어 놓고 살 만하니까 그만 판자촌에 불이 났다. 판자촌의 불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모든 걸 다 날려 버렸다. 부산은 대화재가 유난히 많이 났다고 한다. 이때의 판자촌 화재는 정말 대단한 뉴스거리였단다. 언젠가 혁신계 출신 어른들이 부산에 있던 시절 불렀다는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바람이 분다’라는 노래였다. 그 노래가 부산 판자촌 대화재 때 누군가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바람이 불어서 민초들의 원성의 대상인 ‘쪽바리 대사관’ ‘양키놈 대사관’에 불이 붙었다는 것으로 연결하는 기지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이 노래 때문에 70년대 말에는 중앙정보부에 연행돼서 조사받은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땅의 독재는 외세의 이익을 지켜주기 위해서 존재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신돌석씨 부모님은 할 수 없이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서울 와서 처음 정착한 곳이 남산 밑의 해방촌이었고, 신돌석씨는 거기 어디서 태어나서 유아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신돌석씨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 집이라고 기억하는 곳은 망태산 밑 동네의 2층집이다.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2층집에 살게 된 것도 외삼촌 때문이었다. 원래 그 집은 외삼촌 집이었는데 외삼촌이 전방에 연대장으로 가게 되면서 신돌석씨네가 외할머니와 함께 있는 조건으로 살게 된 것이었다. 거기서 2년 정도 살고, 외삼촌이 월남에 가게 되어 외삼촌네가 다시 와서 살게 되면서 망태산에 있는 판잣집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일곱 살 때였을 것이다. 그 이듬해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니까. 코딱지만 한 집에 들어가 살게 된 걸 알면서 얼마나 실망이 컸는지 모른다. 이사 간다고 해서 들뜬 마음으로 올라갔다가 집을 보고는 부엌 정리를 하는 어머니를 향해 우리 집이 왜 이렇게 작냐고 하자 어머니가 당황해 하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판잣집에 살게 되었는데 그때만 해도 여름에 큰비가 오면 비가 새는 일이 흔했다. 그런데 이건 뭐 21세기가 되어서 비가 새는 집에 산다고 하니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그래도 기운을 내보자고 ‘고운 님 함께 라면 즐거웁지 않더냐’를 부르면서 아내를 쳐다보니 당신이 무슨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 줄 아냐고 쏘아붙였다. 하긴 그렇다. 새파랗다면 언젠가 해 뜰 날을 기다리겠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괜히 열 적어서 ‘사노라면’을 더 크게 불렀다. 우리 동네 왕언니가 부르듯이 이번에는 ‘우리 동지 함께 라면 즐거웁지 않더냐’라고 불렀다. 아내가 씩 웃으며 못 말리는 신돌석이라고 했다. 그렇게 공사를 하고는 일단 비는 안 새게 되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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