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시인 (右)
힘/김숙
오래 전의 일이다 두부를 한 모 샀다
백석의 시가 인쇄된 파지에 싸여 받았다
누렇게 바래져 있는 ‘흰바람벽이 있어’였다
시가 스민 두부 맛은 외롭고 높았었다*
한 시인의 노래를 내 힘줄이 복사했고
은밀턴 가난의 지령 밀서로 봉인됐다
세상은 유달리 내 발목을 걷어찼고
언제나 넘치는 슬픔 속에 살았지만
살과 뼈 보살펴 주던 시 한 모의 힘은 컸다
* 외롭고 높고 :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인용
노래하는 김숙시인(좌)
간병 일지/김숙
무심한 꽃구름이 병실 창에 떠 다닌다
참는 덴 이골이 난 순한 눈매의 할머니
넝마로 뭉개진 삶을 철사가 꿰고 있다
한 때는 알토란 줄줄이 캐던 秘苑 (숨길비 동산원)
빗장 열린 채로 낮가림 잊은 지 오래
제 힘껏 돕던 다발 꽃 마른 눈 먼저 감는다
귀 푸른 딸 눈에 고인 권태 또한 안스럽고
엉거주춤한 목숨 줄 몰락한 살갗을
물수건 가슴으로 행궈 갈피갈피 문지른다
아침의 詩/김숙
나팔꽃 보라빛 수다 창을 넘고 기어오면
지난 밤 시든 이마 파릇이 일구시고
이 아침 빈 그릇으로 님 앞에 세우시니
해 동안 주리잖게 따슨 말씀 먹이시고
바람에게 배운 노래 풀들과 불러보며
물처럼 낮은 곳으로 뒹굴며 살라소서
정든 땀 눈에 들고 가는(細)꿈 야윌지라도
억지로 얻으려다 붉어질 손 말리시며
살도록 맡겨진 땅에 볼 부비게 하소서
어떤 마감/김숙
요즈음의 소는 달구지를 끌지 않는다
할 일 모두 트랙터가 실어 가버리고
한심한 비율이 섞인 무서움을 먹을 뿐이다
쟁기질 흐릿한 추억 박물관에 보관되고
살찌우기 바빠서 게으른 울음 울 새 없다
몸무게 하나로 말하는 서러운 소의 눈빛
그것도 모자라서 살아 있는 마지막 날
실핏줄 끝까지 고무호스 디밀고는
터지게 인간의 잔혹 마시는 일로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