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회사 27
(평양 대부흥 1)
평양 대부흥은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 길선주 장로의 고백이
기폭제가 되어 일어난 대부흥으로
원산 대부흥과 함께 대한민국 개신교의
확산을 가져온 대 사건이다.
당시 1907년의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매우 불안했다.
1894년 청일전쟁의 참패를 계기로
중국을 중심으로 했던 모든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고 러시아 또한
연해주를 빼앗으며 서서히 남하하고 있었고
일본 역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서서히 조선을 합병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세도정치로
인한 폐단으로 백성들을 보호 할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조선인들은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기독교를 찾기 시작했다.
이 때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은
비록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모이지만
신앙이 아닌 정치적인 동기로
교회에 오는 것으로 보고
이들을 진정한 신자로 만드는 것을
급선무라 판단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1903년 여름,
여자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원산의 조그만 성경공부 모임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모임의 강사는 하디 선교사였다.
그는 당시 한국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해
걱정하며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가운데
하디 선교사는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한국인들의 각성에 앞서
선교사 자신들의 회개임을 깨닫고
한국인 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였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신자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였는데
이것이 원산 대부흥으로 이어졌다.
하디 선교사가 시작한 부흥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1905년 9월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기독교 연합기관인 한국 복음주의
선교연합 공의회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선교 단체들이 소속된
이 모임은 하디 선교사로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확대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마침 을사조약으로 민심이 흉융할 때
선교사들은 신앙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며
동시에 한국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실질적인 신앙으로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1906년 1월부터 전국적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 부흥회를 개최하였다.
전국적으로 부흥운동이 확대되는
1906년 9월 부흥사인 존스톤 목사가
조선을 방문한다.
그는 당시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성령운동을 설교하면서 이같은 운동이
조선 교회에도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으며
존스톤 목사의 이러한 말에
평양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지도자들은 감흥을 받게 된다.
카페 게시글
한국기독교회사
[한국기독교회사] 한국 기독교회사 27 (평양 대부흥 1)
김진환
추천 0
조회 59
23.03.14 23:57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