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의 시편
壬寅年이다. 검은 호랑이 띠다.
호랑이처럼 용맹스럽게 살아야한다.
용맹 정진해야 한다.
코로나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를 열어야 한다.
서정성을 깔고 이해하기 쉬운 시세계를 꿈꾼다.
행 가름하는 시, 압축미가 있는 시를 쓰겠다.
미출간 시집들
그녀들의 루즈는 소음장치가 장착된 피스톨이다(시추의 날들)
북국의 늪
차령시편
겐지스강의 산다화
우리는 너무 쉽게 용서 했다(에이레네의 아침)
첫 시
오늘 비로소 첫 시
여러 권의 시집은
흔적일 뿐
온 누리에 퍼지는 붉은 해 기다리는
환희로운 첫날
내 첫 시는
망설임을 넘어 두려움을 넘어
설렘으로 피는 복수초 노란꽃
대지는 어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시의 숨결을
조용히 펼치는 시간의 뜨거운 고요
첫 시의 첫 행은 핏덩이
순수 영혼이 돌아오는 자리
어둠에 들었던
소리들이 기지개 켜는 시간
잠들었던 길들
어둠을 보내는 여명의
첫 시
2022. 1. 1 새벽에 쓰다.
몸의 기록
병명은 의사의 소견 아니다
자가 진단이다
봄은 저물고 큰 창으로 노을이 타오를 때
칼칼한 느낌은 청솔 타는 연기였거나
목에 노을이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목소리는 동굴처럼 울리고 음색이 달라졌다
그 후 이년 가까이 투병생활이 이어졌다
독단은 안으로 병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제 새해 첫날이어서 떡국을 먹게 되었다
후추를 떡국에 친 게 화근이었다
후추 미세한 분말이 식도에 달라붙은 듯
목이 칼칼하고 기침이 계속 났다
며칠 전에 먹은 멸치냄새가 올라왔다
멸치냄새는 아침까지 올라왔다
위속 어디에 숨어 있다 올라오는
멸치냄새는 집요하다
몸은 무엇을 먹는지 모두 기록 하나보다
마음은 얼마나 많은 오류를 기록하고 있을지
2022. 1. 2 새벽에 쓰다
백년독자
내게 오래 사용 중인 서진이 있다
원형의 서진은 한 쪽은 동으로 반대쪽은 무늬가 선명한 대추나무로 만들어졌다 나무에는 백년독자라고 음각되어 있다 모 출판사에서 백년독자에게 준 선물이다 백 년은 아니고 40년 가까운 독자이기는 하다 계절마다 받아 보는 책은 계간지라서 석 달을 두고 읽을 수 있다고 미루다 한 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폐휴지로 처분한 일도 있기는 하다
서진은 읽는 페이지를 눌러주는 일을 한다 내 백년독자 서진은 나보다 먼저 책을 읽는 것이 분명하다 서둘러 다음 페이지로 이동 한다 내 눈보다 항상 먼저다 나보다 먼저 메리 올리버를 읽고 에밀 아자르를 읽고 스티븐 네이페와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를 읽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읽었다.
서진 속에는 그가 읽은 것들이 모두 들어 있어 묵직한 무게가 더 묵직해졌을 것이다
나는 백년독자가 되지는 못 한다
꽃말
연모한다고 말하는 일이 좀처럼 어렵다
어느 날 내가 죽었다면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내가 죽었는데 그걸 모른다면* 나는 내 죽음을 후회 할 것이다
세상이 단순해져서 슬픔도 단순해진다
환청이 사라지고 말이 쏟아지는 환시가 심해졌다
새벽녘 불쑥불쑥 나타나는 비명이 목숨이었다
언젠가는 모든 숨들이 멈춘다는 걸 먼지 알갱이가 말해주었다
생은 들꽃 같아 눈에 띠지 않게 향기를 잃는다
옥살리스의 꽃말이 혼 밥의 가슴에 박힌다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광矌*
나무는 나무의 눈이 있다
구름은 구름의 눈이 있다
태풍은 태풍의 눈이 있다
나는 욥바**의 돌 속 십자가를 보지 못 한다
나는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 속의 시안詩眼을 보지 못 한다
나는 고흐의 구두 그림의 작의를 보지 못 한다
내 청맹과니의 생은 저물고 손등으로 오래 된 강물이 휘어져 나간다 강안의 내 뼈들은 무너져 강물에 잠겨 있다
내가 너의 눈동자를 보았다면 가슴으로 열리는 뷰 바인더 없는 카메라 셔터였을 것이다
눈동자 없는 내 세상은 휘황찬란한 어둠이다
*눈동자가 없을 광(矌)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56킬로미터 떨어진 지중해연안의 항구로 기독교의 성지
지하창고의 비밀
로맹 가리는 입에 권총의 총구를 물고 에밀 아자르를 생각했을 것이다
한물 간 로맹 가리는 신예작가 에밀 아자르에 환호하는 평론가들에게 수없이 미친 것들, 눈먼 것들, 귀 막은 것들이라고 경멸했을 것이다
젊은 날 엉덩이로 살았던 창녀 로자의 늙고 뚱뚱한 삶은 모모의 대책 없는 삶과 서로 삼투 한다* 그렇게 서로는 핏줄과 핏줄을 흘러 뜨거운 심장으로 간다
지하창고에서 죽음을 맞는 로자를 모모는 끝까지 지킨다 모모에게 로자는 엄마고 누나고 연인이다
차가워지는 로자의 얼굴에 수 없이 키스하고 검게 변하는 얼굴에 화장을 시키고 시취를 없애기 위해 주머니를 털어 여러 병의 향수를 사들이는 모모는 비로소 슬프다
로자가 이스라엘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는 모모의 말은 거짓말이다
로자는 아마도 지하창고에서 자신의 몸이 육탈되고 뼈만 고스란히 남은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모모는 어른이 되어서도 하루에 한번 씩 로자를 보러 올 것이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떠난 자만이 돌아올 수 있다
민들레 꽃대 끝 동그란 홀씨가 작은 바람에 흔들린다
잠간 사이, 민들레 홀씨들이 바람을 타고 떠난다
얼마나 설레는 떠남인지 알 것 같다 어느 곳에 씨앗을 내려 설레는 아침을 맞고 부드러운 저녁을 기다리게 될 정착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민들레 씨앗의 떠남이 있어 세상이 환해지고
마음이 연두 빛으로 물들어가는 환희로움을 맑은 하늘에 펼치게 될 민들레 홀씨가 떠난 것은 떠난 것이 아니다
내년 오월 어느 햇빛 찬란한 날, 홀씨로 날아와 다소곳이 내려앉을 때 바람도 멈추어 서서 미소 지을 것이다
떠난 자만이 돌아올 수 있다
획砉
뼈와 살이 분리되는 소리 듣는다
비 내리는 밤이면 선명하게 들린다
달 흐린 밤에는 애닲게 들린다
흐느낌인가 하면 통곡이고 바람소린가 하면 고양이 울음소리다
육탈의 시간을 보내며 뼈는 얼마나 아프게 꺾이겠는가
뼈마디로 바람 들고 별빛 쌓이고, 한탄의 애절한 시간은 누렇게 변해 죽은 자의 이름은 흐려지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뼈를 놓지 않던 힘줄에 핏물이 스며 검게 변했다 불끈불끈 일어서던 힘줄이었다 힘줄은 아아악 힘쓰던 생명의 밧줄이었다
며칠째 뼈와 살이 분리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육탈이 끝나면 무엇이 살과 뼈를 서로
*뼈와 살이 분리되는 소리 획(砉)
질문하는 돌
농소를 가겠습니다
가서 몽돌의 질문을 듣겠습니다
몽돌 하나하나 얼마나 많은 질문을 몸 안에 숨겼는지 보겠습니다
수억 년의 파도소릴 들으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찌 파도는 거친 돌들 서로 껴안게 했는가
돌의 몸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을 뜨겁게 안아도 죄는 아닌가
뜨거웠던 몸이 차갑게 식는 것을 변심이라고 읽어야 하는가
세월의 무늬가 몸 안에 새겨지는 동안 발자국 소리는 어디로 갔는가
빗소리가 좋아 몸 적실 때 오는 파도를 어찌해야 하는가
연인들의 속삭임을 몰래 듣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가
여자가 울며 던진 탯줄은 어디로 흘러가 아기가 되는가
몽돌은 질문 가득한 눈빛으로 해안을 환하게 비춥니다
농소는 아직 멀리 있습니다
당신은 내 피를 맛보았다
당신은 내 피를 맛보았으므로 나를 말 할 수 있다
내 피를 맛보지 않고 나를 말하는 자들은 사이비다. 나를 말하는 자들은 많다 입에 게거품을 문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지만 그자들은 내 피를 맛보지 못했다 내 피는 녹색이다 피멍은 적록색으로 든다 내 피를 맛보지 못한 자들이 나를 말하면 피멍이다
늙은 후의 나는 검은 피일 것이다 세상을 검게 보았다 내게 세상은 고통이었으며 분노였으며 죽음이었다
그 때는 내가 내 피를 맛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어둠으로 살아가며 어둠을 노래 할 것이다 어둠의 노래는 산 자들의 노래는 아닐 것이다
내 어둠의 노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눈물일 것이다
당신은 내 검은 피를 맛보게 될 것이다
내가 당신이니까
쓰러지는 숲
먼데서 간헐적으로 기계음이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렸다
전동 톱 소리였다
톱 소리가 커질 때마다 아름드리나무가 쓰러졌다
울창한 숲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은 살벌하다
벌목 노동자들은
오로지 경계 안의 나무들을 쓰러뜨리는 것이
생계의 시작이고 끝이다
무얼 물어도 대답이 없다
사유하는 산책로를 내주었던
여러 편의 시상을 내주었던
나무 이름을 몰라도 불러 세우지 않았던
숲은
더 많은 잎들과 가지들과 바람을
안고 싶었을 것이지만
그 모든 희망이 전동 톱날 아래
찢겨나가며 뿌리를 움켜쥐었다
새싹이 나온다 해도 숲까지 백년이다
숲은
더 큰 세상을 향해 나가고 싶었을 것이지만
이제는 갈 수 없는 잡목의 허탈한
미래
자작나무 가지를 흘러내리던 바람이과 햇살이 멈춘 곳에 커다란 옹이가 생긴다
옹이는 내 생각이다
곤줄박이 새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색깔은 변화무쌍이지만 어느 날 부턴가 채도가 흐려졌다 이제는 우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작나무는 곤줄박이에게 둥지를 주지 않는다 자작나무는 순백의 영혼을 가졌다 새들에게 영혼을 들키기 싫은 것이다 허리가 길고 흰 것은 그 때문이다
새들은 혀 안에 세상을 가둔다 세상은 상처투성이다 누가 세상을 향해 혀를 휘둘렀는지 아는 별빛들이 눈을 깜빡거린다 혀를 씹었다 별들이 씹혔다 세상은 쓴 맛이고 세상은 씹히지 않는다
미래라는 말이 내게 온 것은 순전히 흰 눈 때문이다 흰 눈을 보는 순간 미래라는 말이 떠오른 것이다
내 미래는 눈이 녹는 순간까지다
정한의 기록
나뭇잎들은 뿌리와 함께 숨어 산다 해가 지면 다른 뿌리로 옮겨 앉는다
뿌리들에게 나뭇잎들은 따뜻한 연인이다 나뭇잎들이 몸을 열면 솨솨 바람소리가 들린다 빗소리도 들리고 천둥소리도 들린다
나뭇잎들은 번개가 치고나간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
잎맥은 상처자국이고 기도의 흔적이다 잎맥은 연인의 핏줄이고 정한의 기록이다 그 기록은 가슴에 묻는다
핏줄에 그믐달이 뜬다
너무 오래 되었다 메일은 오늘도 오지 않았다 대륙을 건너야 하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 한다 눈으로 숨소리가 빠져 나간다 하루는 허망이고 하루는 희망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뿌리의 고통을 나뭇잎들이 알길 없다
상처 입지 않은 나무는 없다 나무는 상처의 힘으로 자란다 거목은 상처를 숨겨 백년이다 백년 넘은 나무는 초탈에 닿아 큰 바람에도 미동하지 않는다
그리움이 백년이면 광풍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정한이란 그렇게 뿌리에 닿아 몸살로, 미열로
그 숲에 다시 들 수 있을까
바람 부는 날, 그 숲에 들었다
나무와 대화하기 위해
파블로 네루다 시집 『질문의 책』을 읽었다
나무와의 대화는 질문으로 시작될 듯해서다
서산이 붉어진다
나무 그림자들이 등성이를 넘는다
잠간 사이 나무들은 키를 늘여 가보고 싶은 곳에 닿는다
나무들의 그림자에 가위눌려 질문을 접는다
숲을 나올 때 숲이 내게 물었다
“네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되지?”
“이 숲에서 깨달은 게 뭐지?”
대답하지 못하고 숲을 나섰다
뒤에서 이런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우리들은 짧아 몇 백 년, 길면 천년이야”
“다툼이 없고 질시가 없고 나이테를 드러내지 않아”
나무와 대화하기 위해 내가 바람에게서 무얼 배웠을까
그 숲에 다시 들기 어려워졌다
붉어지는 하늘에 무지개를 띠울 수 없는 날의 우울은 어둠을 묶을 수 있을까
자작나무숲이 타 오른다
불꽃은 무섭게 호수로 쏟아지는데 자작나무는 타지 않는다
먼 곳의 우레 소리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다 길 끝에 어떤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 채 길은 어두워진다
검붉은 어둠 속에 서 있는 사내
사내가 느릿느릿 검붉은 노을 속으로 사라진다 사내는 노을에서 노을로 들어가 조용히 누울 것이고 노을은 크고 무거워져 사내를 덮을 것이다
붉어지는 하늘에 무지개를 띠울 수 없는 날의 우울은 어둠을 묶을 수 있을까
검붉은 노을을 흔드는 바람 소리
펼쳐놓았던 페이지가 사라졌다
영혼이라는 새가 지하를 날게 되면 먼저 무엇을 보았을까
지하를 걷는 문장을 본 후
모든 문장들이 지하에 갇혀 있다는 걸 알았다 지하에는 보후밀 후라발도, 모니카 마론도, 페테르코 가르시아 로르카도, 루벤 다리오도 살고 있었다 그들은 문장들을 자르고 찢고 붙이는 작업에 열중했다 문장이 더 어두워지기도 하고 더 밝아지기도 했다 언제까지 그 지루한 작업을 하게 될지 그들도 모른다 지상의 문장은 미완인 채 지하로 드는 것이다
영혼은 새가 되어 지하를 날아다닌다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에 사원이 서기도 한다
사원의 문이 굳게 닫힌 후
누가 검은 눈물로 울고 있다
누가 검은 눈물로 울고 있다
울음은 잦아들었다 커지고 잦아들었다 커지기를 반복했다 서러움은 아닐 것이다 가슴 도려내는 비애도 아닐 것이고 상실도 아닐 것이다 저 간헐적이고 지속적인 울음은
자신의 몸 곳곳에 숨겨져 있던 허술한 생의 하염없는 분출일 것이다
눈물이 검은 이유는 타들어 간 가슴 때문일 것이다
저렇게 울 수 있는 것이 축복은 아닐까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항상 기다리는 나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사람보다 덜 슬플까
나는 연인의 옷깃을 기다린다
연인은 대륙을 건너오는 중이다 대륙에는 오래된 검은 목각 인형이 있고 검은 슬픔이 있고 하얀 미소가 있다 여인에게 빗소리는 중후한 교향곡이고 찬란한 햇빛은 여신의 스커트다 연인은 망고나무 아래에서 고국의 눈 온 새벽, 순백의 무지개를 그린다
나를 저격 한다
나를 저격 한다
나는 매일 죽고 매일 살아난다
영혼이 어떻게 메마른 사막을 통과 하는지 보았다
내 영혼은 사막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
방향을 잃은 것이다
밤이 오고 있다
밤과 밤이 겹쳐 오고 있다
지쳤다
항상 기다리는 나는 기다리지 않는 사람보다 덜 슬플까
겨울 숲
내가 매일 찾는 숲은 겨울이다
전나무 한그루 한그루에 눈을 맞추며 걷는 숲이다 전나무를 솟구치게 하는 뿌리의 힘을 생각하며 걷는 숲이다 전나무 붉은 바늘잎들이 덮고 있는 겨울 뿌리는 언제 깨어 일어나 물줄기를 가지의 끝까지 밀어 올려야하는지를 어떻게 알까 생각하며 걷는 숨이다
영혼의 뿌리가 얼어 있는 나는 전나무 숲에서 치유를 시작 한다 전나무둥치를 안고 얼굴을 부빈다 너 얼었구나 너 얼었구나 조용하고 따뜻한 말소리가 들린다 내 말인지 나무의 말인지 모르겠다 나무의 말로 듣는다
입술을 나무속으로 밀어 넣는 보이지 않는 힘은 어디서 오는지 모르겠다
겨울 숲은 불끈하는 뿌리의 저 힘으로
보이지 않는 힘
나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늘 선택의 기로에서 나를 움직인 것은 내가 아니다
선택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였다
고민은 나의 몫이었지만 선택은 보이지 않는 힘의 몫이었다
너의 붉은 입술을 죄의 호수 속으로 불러들인 보이지 않는 힘을 안다
너는 얼마나 많은 고뇌로 불면이었을 지를 안다
불면 너머의 선택은 너의 의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이었음을 안다
그걸 숙명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그걸 필연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보이지 않는 힘은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
두려운 것은 그것이다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오는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힘의 정체는 위협이다
그 위협으로 부터 벗어날 길은 다만
죽음, 혹은 죽음 같은 고요, 혹은 우주적 상상력
내 가슴에 무덤의 그림자가 자라는 한낮이다
아내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몇 페이지 읽다 포기하며 말했다
“너무 마음이 무거워지고 두려워서 읽지 못 하겠어요”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고 고백한 오스왈드 챔버스는 행복했을까
독자를 힘들게 하는 신앙고백서를 내가 읽는다
흥미롭다 가슴 떨린다 구원이다
착각이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은 자기 자신인 것을 아는 자가 몇이나 될까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까
어렵겠다 어려울 것이다 모든 악은 나 내부에 있다 악마는 나 자신이다
한낮에 절도가, 사기가, 살인이, 데이트 폭력이, 패륜이, 부패한 정치가, 보이스 피싱이 이루어진다 한낮은 무덤이다
내 가슴에 무덤의 그림자가 자라는 한낮이다
지하묘지마다 누워 있는 시편들의 미라를 어둠이 열고 있다
언제까지 쓸 수 있을까
꼭 넣어야 할 시어, 그런데 한 글자가 생각나지 않아 사전을 펼치는 일이 잦다
무한질료라고 생각했던 어휘들의 소진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내 시에 힘이 있느냐고 묻던 시인의 물음이 얼마나 절박한 것이었는가를 깨닫는다
시에 힘 빠지면 절필하겠다고 한 그의 말이 얼마나 심각한 비명이었는지 깨닫는다
그의 시에힘이 있다고 했던 말이 지금도 유효한가 생각 한다
내가 나에게 묻는다
얼마나 더 깊이 볼 수 있는가?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가?
절필의 용기가 있어야 쓸 수 있는 것이다 고뇌 없이 가 닿을 수 있는 곳은 없는 것이다
내가 나를 속이면 세상은 나를 더 아프게 속인다
지하묘지에 미라로 누워 있는 내 시편들, 사기다 망한다
드디어,
지하묘지마다 누워 있는 시편들의 미라를 어둠이 열고 있다
잃어버린 생각의 거미줄은 내 영혼을 풀어주지 않는다
멀리 갔다 돌아오지 않는 내 영혼은 아마도 텐산산맥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을 것이다 아니면 눈 덮인 시베리아의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의 바다에서 길을 잃었거나
지쳐 돌아온 내 영혼을 내 영혼이 내려다본다 측은한 눈빛이다 가여운 눈빛이다
경멸하는 눈빛이다
눈빛은 검이다 아랍인의 검처럼 치명적인 칼날이다
영혼이 남루해지고 헐벗고 초췌해지면 내가 영혼을 탈옥 한다 영혼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다
내 영혼은 춥고 배고프다
그럴 때 나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소름 돋는다 신라면이거나 사쓰오우동이거나 발효통밀식빵을 동물적으로 먹는다
짐승이다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생각은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생각의 거미줄이 저녁 하늘에 흘러다닌다
잃어버린 생각의 거미줄은 내 영혼을 풀어주지 않는다
투명한 밤으로 천을 짜는 여인이여
투명한 밤으로 천을 짜는 여인이여!
그 천으로 내 수의를 지어주면 안될까요?
당신 손끝으로 밤이 오고 연모가 오고 기다림이 오고 서러움이 오고 당신 손끝으로 두툼한 손바닥을 확인하고 목소리의 성문을 확인하고 당신 손끝으로 남은 시간의 시침을 만져보고 태양의 길이를 만져보고
투명한 밤이 니제르강물에 그리움처럼 내릴 때 언약은 손목과 손목을 묶은 붉은 끈이어서
이곳이 낮이면 그곳은 밤이고 이곳이 기다림의 땅이면 그곳은 설렘의 땅이어서 피가 마르고
피가 마르고
내 수의를 기다리는 동안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아도 니제르강물소리는 나를 흐르고 흘러
영원으로, 영원을 향해서 일어설
나의 여인이여!
한 순간을 날기 위해 종이학의 날개에 피가 돈다
가두었던 유리 상자를 깨고 날아오르는 종이학들
유리 상자는 정념의 성채, 혹은 기원의 궁전이었다
몸이 성채고 궁전이었으니
마음은 무덤이고 죽음이었다
살아서 마지막 노래가 될 비가悲歌를 달빛 가장자리에 필사 한다
학만큼 살아서, 학으로 살아서, 학이 되어서
묘비명에 새겨지는 날 기다리는 것으로 연모는 끝나겠다
숲을 건너가는 울음을 귀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귀는 세상이여 꿈이며 혼돈 너머의 빛이다
날 수 없는 날개는 끝내 날 수 없다
한 순간을 날기 위해 종이학의 날개에 피가 돈다
먼, 먼
너의 입술은 석류였다
죽을 수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은 아니다 살아서 너를 만나 어찌 그리 냉담 했는지 물어야겠다
광야에서 광야로 갔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갔다 절망에서 절망으로 갔다
광야의 밤은 별무리의 혼돈 하는 역사다 메시아는 멀리 있고 기도는 상달되지 않았다 목이 말랐다 광야에는 깊은 우물이 있지만 두레박이 없었다 불운이었다 불행이었다
기다림은 형벌이었다 유형지 광야에서 혼절하기를 여러 번, 형벌은 가혹했다
형벌하는 기다림
기다림 하는 형벌
나
너
그리고 우리라는 말의 비밀함
그렇게 나는 늙고 너는 힘들다 늙는 다는 것을 검버섯으로 확인하는 아침은 토스트의 맛이 떫다 쓰다
너는 무엇으로 석류의 세상을 열어 눈물일지
내가 너를 사랑하다고 고백했던 말은 자라는 몽돌이 되었다
네게 가는 길은 말의 몽돌 밭이다
몽돌들은 보이지 않게 자란다 내 고백은 돌에 갇혀 숨막힌다 목이 메고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 핏발 선 눈으로 하늘을 본다 하늘은 높고 무심하다 하늘은 외면 한다 그만 두라 한다 자라는 돌을 돌보라 한다 그게 너의 말을 책임지는 일이라 한다
비수 같은 말이다 비수다 비수는 심장을 겨눈다 비틀거리는 심장
홍도 몽돌해변에 널린 내 무수한 말들을 섬기러 간다 그곳에 네가 있다
너, 몽돌의 어미였나?
너, 몽돌마다 영혼 불어넣어 고통이게 하는 여자다 내게 불어넣은 영혼으로는 바다를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밤새 몽돌의 뺨을 후려치고도 몽돌이 용서되지 않는 바다는 나다 내 분노한 영혼이다
언젠가 네가 몽돌에 경배 할 것이다
내 영혼이 아플 때
내 영혼이 아프다
너는 대륙을 건너 대륙에 있고, 대륙은 너의 마음이고 생각이고 사유의 폭이었으니 내가 건널 수 없는 광활한 대지였다
내 영혼이 나를 떠나 돌아오지 못하고 있을 때 네가 그 영혼을 찾으러 갈까
숲의 정령이 벌목으로 숲을 떠났을 때 호수의 정령이 숲의 정령을 찾아 밤마다 불빛을 따라 떠도는 걸 너와 함께 보았다 그 때의 언약이다 언약은 두 손목에 채운 수갑이다 움직이는 감옥이다
내 영혼이 아플 때,
너는 대륙에 있었고 멀리 있었고 잊혀져 있었고 매일 퍼붓는 웅장한 빗소리에 취해 있었고 붉은 꽃에 반해 있었다 니제르강물에 넋을 놓았고 밀림에 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노래하고 있었고 고국을 잊고 있었다
모든 영혼이 아픈 계절이다
하루
시간을 연다 시간은 부드러운 문을 달고 있다 문을 열면 문이 있다 그 문을 열면 또 문이 있다 문이 수없이 계속되는 구조다 문 뒤의 문이 열리고 또 문 뒤의 문이 열린다 겹겹의 문은 문이 아니다 망설임이다 혼돈이다 급류의 비명이다 부서지는 포말이다 사라지는 것들의 뒷모습이다 시간의 쓸쓸함이다
모든 문장들이 펄럭이며 도망간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건물들이, 모든 광장들이, 모든 정치들이, 모든 경제들이, 모든 핵무기들이, 모든 이론들이, 모든 스마트농장들이, 모든 연애들이, 모든 죽음들이, 모든 지하묘지들이, 모든 영아들이, 모든 감옥들이 도망간다. 혁명의 전조다. 혁명이다. 재앙이다.
전화 한다 무사하냐고, 건강하냐고, 아무 일 없냐고, 무사하다고, 건강하다고, 아무 일 없다고 코로나 지나면 보자고 말하고 전화를 끓는다 할 말이 없다 할 일이 없다 이렇게 살아도 벌 받지 않을까 두렵다 이렇게 사는 것도 사는 것이어서 잠자고 일어나고 잠자고 일어난다 할 일이 없으니 매일 키보드 앞에서 자판을 두드린다. 시가 되기도 하고 산문이 되기도 한다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글이 된다 글이 아닌 글이 된다 넋두리다
옛날 애인을 소환 한다 그녀도 늙었다 그녀는 내가 한 말을 다 기억하고 있다 나는 그 녀의 말을 한 마디로 기억하지 못 한다 딱 하나, 겨울에도 내의를 입지 않는다는 말에 노팬티냐고 물어서 홍당무가 되었었다 그 녀는 고향에서 혼자 산다 혼자 TV 보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생각에 잠기다 잠든다
내가 나를 낳는다 무수한 나의 복제다 나를 낳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바람이 나를 낳는다 바람은 숲속에 나를 낳는다 레퀴엠이 나를 낳는다 묘지에 나를 낳는다 나는 현세고 과거고 미래다 내 안에 그 모든 것들이 있다 언제 어떻게 충돌하고 폭발할지 몰라 나는 전전긍긍이다
노을이 두렵다 타들어오는 도화선 같다 도화선이다 내가 폭발 한다 웃음소리가 늪지로 퍼진다 갈대숲이 불붙는다 불탄다 늪으로 붉은 재가 내린다 어둠이 온다
마침내, 어둠이다 검은 침묵이다 검은 말소리다 검은 웃음이다
검고 검은 하루
절멸
미선나무 흰 꽃이 무더기로 피었다
미선나무는 그림자를 희게 만들어 꽃받침으로 매달 모양이다
네가 꽃 그림자 위에 얹혀 웃고 있다
꽃 그림자와 꽃이 함께 사라지는 순간을 이번 봄에는 꼭 볼 것이다
봄볕이 눈부시게 환하다
미선나무 흰 꽃은 환한 순간을 노려
낙화의 길을 열 것이다
그 절멸의 찰나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미선 꽃이다
시경재는 게으른 집필실이어서 생각들이 느리게 온다
그 후는 사라진 목소리의 시간이다 목소리는 붉은 벽돌 사이에 혹은 빈티지 오디오 뒤에 혹은 서화 너머에 있다 목소리의 성문에 본심이 있다 선망과 시기와 동조와 비웃음이 있다 그걸 해독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돌아가는 뒷모습에 성문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본심을 들키고도 그들은 차에 오르며 손을 흔들고 웃었다 끝까지 절멸의 행위였다
너는 미선나무 흰 꽃이다 순결한 영혼이다
절멸을 모르는 순수의 환한
공간
그 공간은 아내의 기도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공간이다 그 공간을 아는 데는 오랜 기도의 시간이 누적되고도 회개의 눈물이 성서를 덮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묵상의 공간이 내겐 무겁다
아내는 묵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기도 하고 접기도 한다
그 공간에는 하나님의, 음성과 연민의 눈빛과 사랑의 손길이 있다는 걸 안다
아내는 거듭나는 체험을 한다
아내의 눈빛이 깊어지는 날이다
묵상은 무거움을 견디는 일이며 벌거벗는 일이며 눈물로 회개하는 일이라는 걸 안다
누구에게나 묵상의 공간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끝까지 죄인이 나는
벚꽃 세상
아파트를 출발 할 때부터 벚꽃 세상이었다
벚꽃 세상은 남사 꽃 집하장을 지나 어비리 저수지에 이르기까지 벚꽃대궐이었다 수 십 년 전에 이 많은 벚꽃을 상상하며 심어놓은 벚나무들이었다 그 길의 벚꽃은 겹 벚꽃이어서 흩날리지 않고 풍성하고 탐스럽게 벚꽃터널을 이룬다
금광호수를 수놓은 벚꽃들은 수면에 또 하나의 대궐을 짓고 있다
수면이 흔들릴 때마다 벚꽃이 흩어진다
내 작은 공간인 시경재의 왕벚꽃이 흐드러져 정원에 꽃 그림자를 펼쳐놓았다
벚꽃 세상을 보게 하신 그 분에게
미몽
남해 금산을 갔다 아무리 보아도 돌 속에 묻혔다는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돌 속을 떠나가는 여자를 볼 수는 있었다
내 여자였다 미몽이었다
그녀는 돌 속에서도 떠나고 파도 속에 서도 떠나고 불 속에서도 떠났다 심지어 내 가슴에서도 떠났다
내 가슴이 돌이었다
내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운 곳을 생각하게 될 것을 그녀는 알았다 산 그림자가 느리게 바다로 내려섰다 젊은 연인들이 남해를 내려다보다가 뜨겁게 안았다 갈매기가 높이 날아올랐다
갈매기에게도 돌 속의 여자는 미몽이었다
상처 난 밤 속으로 호수의 잠들지 못한 마음이 펄럭이는 시간이다
어둠은 계속 된다
여진은 패배한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황폐하게 만든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역사의 흐름이 그랬던 것이다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걸 알아 더 크게 무너진다
시간을 겹쳐 흘러가게 할 수 있을까
사초를 기록할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패배의 쓴 잔이 넘처 흐른다
패배가 승리라는 걸 언제 깨닫게 될까
여명의 빛이 겹겹의 산등성이를 드러낼 것이다
그 빛 속에 승자도 패자도 있는 것이다
호수가 거칠게 운다
밤은 아직 차령을 넘지 않았다
상처가 깊은 것이다
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운 곳을 생각하게 될 운명이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으로 계절이 흐른다
내 계절은 기다리는 것으로 청춘이다
어제 미선이 갔다
조용히, 다시 올 거라고 약속하고 갔지만
그 다시에 내가 서 있을는지 알 수 없다
미선은 희망이었을까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아침이다
봄 새벽바람은 부드럽고 신선하다
어떤 두려움이 꽃밭에 머무는지 알 수 없는 것을 염려할 필요 없다
꽃그늘이 사라진다면 꽃이 사라진 것이고 꽃잎의 작은 흔들림 멈춘다면 바람이 멈춘 것이다
멈추는 것들이 두려움이라면 바람을 기다리는 것도 두려움이다
두려움 없이 노년을 보내고 싶다
기다리는 두려움을 벗으면 내 사랑도 끝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운 곳, 그곳은 내게 꿈이었다 황홀한 미래였다 도취의 지점이었다
운명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겠다
운명 아닌 것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운 곳을 생각하게 될 운명이다
계절이 상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내가 쉽게 상하는 과일이기 때문이다
사월이 간다 상한 냄새를 풍기며 간다
계절이 상한 냄새를 풍기는 것은 내가 쉽게 상하는 과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상한 과일이어서 사월이 상한 냄새로 떠나는 것이다
나는 상하기 쉬운 나를 지키지 못했다
어느 곳이 먼저 상하기 시작했는지 알지 못했고 진해지는 과일 향을 즐거워했다
상하는 시간이 쾌락의 시간으로 온다는 걸 알지 못했던 것이다
어떤 노래도 상하기 시작하는 과일 향을 덮지 못했다
뼈가 상해서 나는 향내인지 모르고 도취의 시간은 오래고 잠은 깊었다
사월이간다 상한 냄새를 풍기며 간다
아름다웠던 꽃들을 땅에 묻고 간다
울어주는 사람이 없다
울어줄 사람이 없다
달님은 검게 변하는 자신의 뼈를 위해 울고 있을 것이다
사월의 새벽달이 창에 머물러 붉은 해를 기다린다
구름이 앓고 있는 병은 어쩌면 그리움일지 모른다
그 친구는 수 십 년만의 통화에서 피 빛 석양을 말했다
네 전화를 받으려고 그랬는지 서산이 붉게 타오른다고, 구름에도 불이 붙었다며
구름이 앓고 있는 병은 어쩌면 그리움일지 모른다고
그는 고교시절 가장 친한 친구였다 레슬링을 배우던 친구는 나를 눕혀 항복을 받아내는 걸 즐겼다 고교졸업 후 수 십 년 동안 소식을 알지 못했다 그가 원주 변두리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살아 있었구나 생각했다 그 때 찾아가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와의 관계는 늘 그랬다 불현듯 생각났다 사라지는, 그러고 한동안 생각나지 않는 친구였던 그다
시골에서 이장을 보고 있다고 들었다했더니 이장이 아니고 열여덟 가구가 사는 전원주단지의 대표이기는 하다며 웃었다
고교시절의 맑고 초롱했던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시작한 젊은 날의 교직생활은 어땠는지, 그도 나도 늙었으니 아름다운 날들의 초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역병이 지나가면 그의 초롱한 눈빛을 볼 것이다
가문비나무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산지대, 잡목 숲을 지나 고요한 숲이다
가문비나무 숲은 내게는 꿈이다 영지다 환상이다
가문비나무 숲은 죽음을 동경하는 숲이다 내 팔로 서너 번을 안아야 닿을 수 있는 우람한 둥치에 기대어 조용히 가문비나무의 뿌리로 돌아간다면 더 할 수 없는 축복이리라 가문지나무는 내게 그런 나무다
가문비나무와 며칠 밤을 새며 대화를 한다
가문비나무는 별들을 흔들어 쏟아지게 하고 바람을 부른다
기대고 싶은 나무, 안아보고 싶은 나무, 그의 뿌리로 돌아가고 싶은 가문비나무는 정갈하고 고아하다 음원을 소환하게 하는 나무다 그 음원은 여기에 없다 그 음원은 닿지 않는 곳에서 바오밥나무를 안고 먼 하늘을 생각할 것이지만 그 음원은 가문비나무를 잊었을 것이다
가문비나무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인 것을
가문비나무가 돌아갈 거처인 것을
가문비나무가 생의 기록인 것을
고국이 앓고 있는 역병을 어찌 말해야 좋을지 몰라 벚꽃 계절을 버렸다
역병이 번지듯 벚꽃 계절이 번지고 있다
검은 대륙에도 역병은 이곳과 다르지 않을 것이지만 검은 마스크는 밤마다 크기를 더할 것이다 그곳에는 벚꽃 계절이 없어 환한 대궐을 볼 수 없겠다 침실을 벚꽃으로 채워 잠들게 하고 싶다 벚꽃은 환하게 타오르는 마음이고 화르르 지는 정념이어서
번질 대로 번진 후에 고요해지는 육신의 화엄인 것을
고국이 앓고 있는 역병을 어찌 말해야 좋을지 몰라 벚꽃 계절을 벼렸다 버리고 나서 지옥인 것을 알았다 버리고 나서 연모인 것을 알았다 버리고 나서 기다림인 것을 알았다 버리고 나서 죽음인 것을 알았다
벚꽃 계절이었으니 잠시 환한 몽환의 어지러움에 심장이 멎는다
이 험난한 시절에 눈동자를 놓아야 할 것이다
수상하다고, 두렵다고 염원을 멈출 수 없다
염원은 사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고 우리를 향해 서 있다는 증험이다
구름이 헐벗은 채 준령을 넘는다
구름이 가는 곳을 알 수 없다
바람이 구름을 수행하면서 바람의 등이 휘었다
준령을 넘고 바다를 건너며 바람은 늙었다
고통을 견딜 수 없으면 회오리를 만들어 높이 오르기도 한다
바람을 건너오는 늙은 사내가 있다
늙은 사내는 헤어진 가슴을 바람에 내어준다
늙은 사내의 가슴이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바람은 험난한 시절을 건너는 다리다
눈동자는 이 세상으로 충혈된다
험난한 것은 준령과 바람만이 아니다
험난한 것은 시절이며 숫자다
험난한 길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의 용기로 세상은 더 험난해진다
사내는 늙어가는 중이고 바람에 펄럭일 거다
마운틴 킬리만자로의 우흐르피크 빙벽
그녀의 마운틴 킬리만자로의 우흐르피크 빙벽을 생각했다
그녀는 빙벽을 밟듯 조심조심 걸었다
세상을 행해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고 선언한 이후였다
대관령에서 마지막 행선지가 안반데기였다
그녀는 윙윙 낮은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풍차 앞에 나를 세웠다
그녀의 마운틴 킬리만자로의 우흐르피크 빙벽은 지금도 녹아내리고 있을 것이다
거대한 빙벽의 에너지가 풍차를 돌리고 그녀의 비밀한 염원을 하늘에 새기고 있다
빙벽은 수억 년을 홀로였다 홀로여서 아름다웠고 홀로여서 푸른 정신이었다
그녀의 조심스런 걸음걸이 속에 푸른 정신이 있다
그 정신이 안나푸르나를, 킬리만자로를, 사하라사막을 얻게 했다
그 정신이 대관령의 꽃들과 가문비나무숲을 가꾸게 했다
죽음에 이르는 대지의 통곡이 시작되는 시간은 엄숙하고 무겁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는 불타고 있다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대지의 화엄이다
나는 그의 전 생애를 안다 노동에 바친 세월과 가난으로 파헤쳐진 자존과 피폐해진 정신의 근원을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한 억울함과 분노가 한 사내를 테러하게 했을 것이다 다행히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사회적 분노가 아니라면 그를 설명할 수 없다
그가 구치소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
미수로 끝났으니 서사가 더 나가지는 않았다
그에게 대지는 늘 불타고 있는 욕망의 덩어리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침묵이다
입관
젊은 장례사 남녀 두 사람은 목관 속을 온갖 꽃잎들로 채웠다 마지막으로 넣은 꽃잎이 붉은 장미였다
붉은 장미 속으로 드시는 어머니의 표정이 평온했다
저 곳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는 먼 길을 오셨다 어머니는 재혼으로 화태에서 귀국하신 아버지를 만났다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는 한량이셨으며 근동에서 이름난 투전꾼이셨다 돈을 푸대자루 가득 담아 메고 오신 날도 있었다 그해 유월 볏잎이 찰랑찰랑하는 수십 마지기의 논을 사기도박으로 잃고 땅문서를 내주셨다
아버지는 한판이면 복구할 수 있다며 어머니를 달래셨지만 어머니는 며칠 식음을 전폐하셨다 어머니는 그 후 웃지 않으셨다 입매가 언제나 싸늘하셨다
어머니의 입매가 온화하게 풀리며 젊은 장례사가 수의로 얼굴을 감쌌다 가슴에 두 손을 모으시고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드셨다
관 뚜껑을 덮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뵈었다
울음이 나지 않았다
무엇이 그곳에 오래 서 있게 하는가
가문비나무숲은 끝없이 이어졌다
바람은 가문비나무 끝을 잠시 휘어 볼뿐, 소리로 숲을 지나가고 있다 바람이 가문비나무숲을 매일 연주하는 것이다 가문비나무숲은 바람으로 오케스트라며 바람으로 강물이다
가문비나무숲을 운명이라고 말했지만 정말 운명이 있는 것인지, 서로 뒤에 숨기고 있던 꽃다발을 가슴으로 밀어 넣었다 가슴이 아팠다 울음이 터졌으나 낙조가 더 붉었다 가슴 속에서 꽃다발의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가문비나무숲의 낙조는 파이프오르간의 장엄한 미사곡처럼 온몸의 전율이었다
전율에 걸려 그곳에 오래 서 있었다
가문비나무숲을 건너가는 여러 갈래의 바람의 길들이 보였다 오월의 가문비나무 잎들은 찰랑이며 서로 포옹하고 있다 잎마다 바람의 길이 새겨진다 숨어서 보니 바람을 슬몃 잡았다 놓아주는 가문비나무다
햇빛이 가문비나무 숲으로 들어 깊숙이 사선을 긋는다
가문비나무숲이 조용해진다
우리들의 언약이 벚꽃을 지우고 창문을 지웠다
언약이란 가혹한 형벌이어서 죽은 후에도 관속에 가시로 남는다고 그녀는 말했다
석남사는 유월이면 죽음의 색깔을 처마 밑에 깔아 시인의 눈동자를 키운다
그녀의 말이 죽음의 색깔인 것을 깨닫는다
검은 대륙에도 죽음의 색깔이 있어 검은 피부 위에 황홀한 연두 빛 색깔을 밀림의 길에 깔며 바람을 키울지 모르겠다 검은 어깨들이 들썩이며 황톳길을 덮는 운구행렬은 벚꽃 길을 지울 것이다 언약이었으므로, 우리들의 언약이 벚꽃 길을 지울 거라고 말했으므로 서러울 일은 아니다
그 날 창문을 지우리라고, 가슴의 창문을 지워 세상을 닫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나 창문을 지울 것을 예감했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실현되는 것이어서 서로의 창문을 닫는 것으로 정한을 남기지 않았다
그녀가 검은 대륙에서 벚꽃 길을 만났다면 기적에 가깝다
창문을 닫지 않았다면 기적이다
가슴
가슴의 숯불덩이를 쏟았다 주상절리로 섰다 바다는 주상절리에 머리를 처박았다
가슴의 불덩어리를 쏟았다 불덩어리는 절벽으로 섰다 절벽은 마음의 성채였다
가슴의 불덩어리를 쏟았다 불향은 오래 머물렀다 머무는 동안 별리를 말하지 않았다
가슴의 불덩어리를 쏟았다 희고 부드러운 대지가 붉게 물들고 밤이 왔다
가슴의 불덩어리를 쏟았다 눈동자에 불이 붙었다 불은 죽은 후에도 타올랐다
흰 손
기다리는 동안 검은 대륙은 낡아갔고 내 혈관도 낡아갔다
더는 뜨거워질 수 없는 피였다
피가 식으면 노래가 멈췄다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밤이었다
어디쯤서 풍향이 바뀌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가슴보다 더 흰 손을 찻잔 위에 놓았다
수종사 석탑이 조금 기울었다 눈빛 때문이었다
눈빛은 무엇이나 기울게 했다 강물은 눈빛에 약했다
눈빛이 윤슬을 세상에 드러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강이 흐름을 멈추고도 흐른다는 걸 알았다
강물은 한참씩 멈추었다 떠났다
흰 손은 강물에 닿지 않아 허공을 한번 휘젓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흰 손이 지금쯤 서해에 닿아 봄 햇살을 풀어놓을 것이다
눈빛이 닿으면 종소리가 들렸다
종소리는 죽은 자의 잠을 깨우는 의식이었다
종소리는 수시로 들렸다 수시로 누군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미선나무도 잠에서 깨어나고 가문비나무도 잠에서 깨어나고 수리부엉이도 잠에서 깨어나고 길고양이도 잠에서 깨어나는 봄이다
연인들의 잠도 깨어나 서로를 찾아 기대고 어제 깊은 잠에 든 여배우도 잠에서 깨어나 스크린으로 복귀 할 것이다 생명사상을 펼치다 깊은 잠에 든 시인도 잠에서 깨어나 원고지 앞에 앉을 것이다
봄이니까, 세상이 깨어나니까
나라를 망친 자들은 깊은 잠에 들었으면 좋겠다 깊은 잠에 들어 영영 깨어나지 못했으면 좋겠다 그들을 위해 양지바른 장지를 준비 하겠다
눈빛이 어디에 닿아 종소리가 들리게 될지 알 수 없다
눈빛은 어딘가에 닿을 것이고 종소리는 들릴 것이다
봄이니까, 세상이 깨어나니까
절망하는 가문비나무숲
수직으로 뻗어 올라간 욕망
까마득한 가지 끝에서 방황하는 바람
백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
먼 곳의 이름을 부르며 울던 밤들
서로의 몸뚱이에 기대 체온을 나두던 준령
스스로의 높이에 절망하는 가문비나무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