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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확실한 끝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기!
본문 : 사도행전 28장 30절
바울은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꼭 두 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새번역>
모든 시작된 일에는 '끝'이 있습니다. '끝'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마무리하여 매듭을 짓는 것을 의미합니다. '끝'은 정말 말 그대로 ‘끝’입니다. 더 이상 할 것도, 갈 곳도 없습니다. 오늘 사도행전도 28장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도행전은 끝이, 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는 사도행전을 여기서 끝내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로만 사도행전이 채워지지 않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이제 더 많은 사도들의 행진을 보고 싶어 합니다. 다른 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제자들의, 한 곳에 머물러 있음이 아닌 두루 다니며 행함을, 더 많이 목도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우리의 신앙 여정과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시간이 사실은 ‘시작점’입니다. 나는 죽어 끝이 나고,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시작하는 ‘부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죽음이라는 끝이, 동시에 부활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신앙의 놀라운 신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요한복음 12장 24절, 새번역>
밀알 하나가 죽어서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죽은 그 밀알에서 줄기가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죽었는데 살아나서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밀알 역시 끝이 오히려 시작이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강해는 오늘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익숙하게 들어오신 것처럼 이제 당시를 살았던 사도들의 행전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의 행전이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어떻게 끝을 맺는지가 중요합니다. 바로 그 끝맺음이 어떻게 되었는지 사도행전 28장 강해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라굴로’에 의해 떠밀려 다니던 배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말씀하신 대로 난파되지 않았고, 놀랍게도 서서히 육지에 다가서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바울에게 해 주신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선포하고, 그 말씀대로 행했던 바울을 통해 배에 탔던 276명은 모두 무사하게 됩니다. 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276명이 모두 뭍으로 올라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마 선장과 선원은 계속해서 이건 ‘기적’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몇몇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마음을 다해 감사를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이런 ‘기적’은 늘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올라온 뭍은 바로 ‘몰타섬’이었습니다.
우리가 안전하게 목숨을 구한 뒤에야, 비로소 그 곳이 몰타 섬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도행전 28장 1절, 새번역>
다행히 섬사람들은 갑자기 찾아온 손님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추운 날씨였는데 불을 피워주어서 몸을 녹일 수 있게도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삼삼오오 불 앞에 모여 들었을 때였습니다. 바울 역시 나뭇가지를 한 아름 모아다가 불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기운 때문에 독사가 한 마리 튀어나와서, 바울의 손에 달라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모습을 본 섬사람들은 서로 이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섬 사람들이 그 뱀이 바울의 손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틀림없이 살인자이다. 바다에서는 살아 나왔지만, 정의의 여신이 그를 그대로 살려 두지 않는다" 하고 서로 말하였다. <사도행전 28장 4절, 새번역>
하지만 뱀이 바울의 손에 매달려 있기만 했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뱀을 불 속에 떨어버리고,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섬사람들은 바울의 살이 부어오르거나 당장 쓰러져 죽으려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기다려도 바울에게 아무런 이상이 생기지 않자, 그들은 생각을 바꾸어서, 바울을 ‘신’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 소문은 곧 그 섬의 추장인 ‘보블리오’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블리오는 바울 일행을 자신의 농장에 초대하였습니다.
그 근처에 그 섬의 추장인 보블리오가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우리를 그리로 초대해서, 사흘 동안 친절하게 대접해 주었다. <사도행전 28장 7절, 새번역>
그런데 그렇게 방문하게 된 보블리오의 농장에서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서 병석에 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바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시작으로 그 섬에서 병을 앓고 있는 다른 사람도 찾아와서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더더욱 섬 사람들은 바울을 정말 극진한 예로 대하여 주었습니다. 정말 신처럼 대접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떠날 때에는, 필요한 물건들을 배에다가 실어다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몰타섬에서의 3달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석 달 뒤에 우리는 그 섬에서 겨울을 난 디오스구로라는 이름이 붙은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났다. <사도행전 28장 11절, 새번역>
그 때 바울이 발견하여 도망치지 못하게 했던 선원들은 마음을 다잡고 3달 동안 배를 잘 정비하였습니다. 역시 그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출항한 알렉산드리아호는 수라구사에 입항하여 사흘 동안 머물게 되었고, 그 곳을 떠나 빙 돌아서 레기온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자 남풍이 불어왔으므로,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보디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곳에서 바울 일행은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동역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초청을 받고, 7일 동안 거하게 되었습니다.
기록된대로 이제 로마가 가는 일정은 선장과 선원, 율리오 백부장이 아닌 바울에게 모두 맞춰져 있습니다. 바울이 타면 출발하고, 바울이 내리면 기다리게 됩니다. 그렇게 일주일 후에 다시 출항한 배는 드디어 종착지인 ‘로마’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도 도착하자마자 바울 일행을 반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울 일행은 상당히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거기 신도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서, 아피온 광장과 트레스 마을까지 우리를 맞으러 나왔다. 바울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용기를 얻었다. <사도행전 28장 15절, 새번역>
그저 막막하고 황폐한 땅일거라 예상했던 로마에도 이미 ‘동역자’된 그리스도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 누군가를 통하여 로마 땅까지도 복음이 전해진 것이고, 바울이 온다는 소식도 이미 전해진 것이었습니다. 매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공동체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동역자를 만났기에 바울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용기도 얻게 되었습니다. 로마가 황무지가 아니라 이미 은혜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자 바울을 감금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지키는 병사 한 사람과 함께 따로 지내도 된다는 허락을 받게 됩니다. 참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운 혜택입니다. 지키는 병사가 있기는 했지만 자유인의 몸이나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누구라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3일 동안의 적응을 마치자마자 바울은 유대인 지도자들을 불러 모으게 됩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로마행에 대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흘 뒤에 바울은 그 곳 유대인 지도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동포 여러분, 나는 우리 겨레와 조상들이 전하여 준 풍속을 거스르는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죄수가 되어서, 예루살렘에서 로마 사람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로마 사람은 나를 신문하여 보았으나,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놓아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이 반대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내가 황제에게 상소한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여러분을 뵙고 말씀드리려고, 여러분을 오시라고 청한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8장 17~20절, 새번역>
하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어떠한 연락도 받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이란 인물에 대해서 좋은 소식만 들려왔기에 직접 바울의 말을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로마에 있던 유대인지도자들은 지역의 특성답게 상당히 마음이 열려있던 종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아직 유대로부터 당신에 관한 편지를 받은 일도 없고, 동포들 가운데서 아무도, 여기에 와서 당신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거나 소문을 낸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에게서 당신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종파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어디서나 이 종파를 반대하는 소리가 높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 21~22절, 새번역>
바로 그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명확하게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혼란스러움을 끝내기 위해서는 바울에게 직접 듣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만날 날짜를 정하게 되었고, 드디어 그 만남의 날이 밝아 왔습니다. 바울에 대한 아무런 편견 없이 ‘복음’만을 들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펼쳐진 것입니다. 찾아온 사람들은 처음에 모인 이들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습니다. 바울의 숙소는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엄숙히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면서 그의 속내를 털어놓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 실로 바울은 그 어떤 군더더기도 없이 이 두 가지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왜 로마까지 왔는지 간증하지 않았습니다. 영웅심리를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척 하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었던 지난날의 모습을 더 이상은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바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다른 군더더기는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렇게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이러했습니다.
더러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으나, 더러는 믿지 않았다. <사도행전 28장 24절, 새번역>
정말 답답한 노릇입니다. 긴 토론이 이어졌지만 모인 이들은 이렇게 서로 견해가 엇갈린 채로 결국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흩어지는 그들을 보며 마지막으로 구약 이사야서 6장 9~10절을 인용하여 현재 모인 이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가지고 너무도 중요한 선포를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여러분의 조상에게 하신 말씀은 적절합니다. 곧 이런 말씀입니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구원의 소식이 이방 사람에게 전파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야말로 그것을 듣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 26B~28절, 새번역>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모인 이들 중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며, 이제 그 구원의 소식이 이방 사람에게 전파되었으며 그들이야말로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건 유대 사람들에게 저주와도 같은 말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유대인에게는 이제 끝, 이방인들에게는 이제 시작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말씀을 외면하는 유대인에게서 말씀은 끝이 나지만, 그 말씀을 받아들인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어 꽃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 꽃의 열매가 오늘 지금 우리에게까지 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같은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끝이라는 절망이었겠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새로운 시작으로 희망이 된 것입니다.
그 비밀의 내용인즉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 6절, 새번역>
그렇게 바울을 찾아왔던 이들은 모두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었던 사람은 다시 바울을 찾아왔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유대인답게 바울을 배척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저런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계속해서 감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가 얻은 셋집에서 꼭 두 해 동안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그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28장 30~31절, 새번역>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유대인은 별 볼 일 없으니 이방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해야지 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제 자기를 찾아오는 이들을 유대인이나 이방인으로 구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맞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이 행동이 사도행전 28장이 끝이면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결국 사도행전을 통하여 바울이라는 유대인 중 유대인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이방인과의 만남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틀이 허물어졌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에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인줄 알았던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자신들이 원한대로 오지 않자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절대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선민사상’에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유대인 외에 모든 인류가 차별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자기네 공동체 내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데 익숙했던 것이 초기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벽이 이제는 다 허물어진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이름도, 이방인이라는 이름도 다 사라지고, 이제 그리스도인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는 이들도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새번역>
‘누구든지’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특정 누군가도 아닙니다. 그런 구별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사도행전 28장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는 방법은 끝이 났습니다. 이제 ‘누구든지’로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주요 논쟁거리였던 ‘부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부활에 대한 고민을 끝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을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배운 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새롭게 써 내려갈 사도행전에는 편견이 없습니다. 구별이 없습니다. 차별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에서 항상 외치고 다녔으리라 생각되는 바로 이 말씀을 실천해 나가야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로마서 3장 22절, 새번역>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차별을 거부해야 합니다. 이제 차별에 대한 모든 생각에 마침표를 찍고, 끝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사도행전을 시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차별 때문에 좌충우돌했던 사도행전 28장동안의 이야기는 이제 끝을 내야 합니다. 차별 없는 사도행전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 사도행전 28장을 끝내면서 하나님이 새롭게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행전보다 더 강력하게 선포하면서 그의 새로운 사도행전을 남은 인생을 통해 써 내려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8~39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사도행전 28장 강해를 마무리하면서, 이제 사도행전 강해를 마무리하면서 저와 함께 이런 소망을 함께 가져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제 정말 새롭게 시작해보자!’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로운 사도행전을 써 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사도행전 28장을 끝내셔야 합니다. 잘 마무리하고 매듭지어야 합니다. 모든 차별로 가득했던 좌충우돌의 마음 밭을 정돈하셔서 새로운 씨앗을 뿌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등장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닮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 나타난 어떠한 이야기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닮아가려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추구하려면 하나님이 오늘도 역사하셔서 펼쳐나갈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오늘 바울의 행동을 통하여 확실히 끝을 내시며, 우리에게 다시 시작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강해를 마무리하면서 저는 ‘사도행전 29장’이란 말보다 ‘신사도행전’이란 말보다 우리가 더 기억해야 할 단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을 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반드시 28장으로 끝을 내셔야 합니다. 새로운 사도행전을 쓰기 위하여 반드시 끝을 내야 합니다. 반드시 끝내야 할 것들을 끝내고,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짜 ‘신사도행전’을 쓰고 싶다면,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물쩡 넘어가서 여전히 어제와 동일한 모습으로는 새로운 사도행전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사도행전 안에 자신을 묶어 둔 것입니다.
바울을 포함한 모든 사도들은 사도행전 28장 그 이후에 더 많은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사도행전 28장 내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끝이 있었기에 새로운 시작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다시 찾아온 예수님은 지난날 베드로의 허물에 대한 죄책감을 완전히 끝내시고, 다시 베드로를 새로운 사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로 그 끝이 있었기에 베드로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확실한 마무리가 없었다면 베드로는 새롭게 시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그러니 먼저 확실히 끝내십시오. 그러면 새로운 시작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작을 친히 이루어가실 줄로 확신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장 6절, 개역개정>
그동안 사도행전 강해를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새롭게 걸어가실 믿음의 여정을 마음 다해 응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확실한 끝을 이야기하시면서 동시에 시작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확실한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이 일이 여러분의 삶에서 동시에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떼어내서, 낡은 옷에다가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그 새 옷은 찢어져서 못 쓰게 되고, 또 새 옷에서 떼어낸 조각은 낡은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다가 넣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가죽 부대를 터뜨릴 것이며, 그래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가죽 부대는 못 쓰게 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누가복음 5장 36~38절,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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