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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여자
그럭저럭 두 주일정도가 지나간 어느 날 배달을 갔다가 돌아오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어떤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었다면서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전해 주었다. 전화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박인숙의 친구인 최 연희였다. 동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살며시 인근 공중전화로 가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거기 최 연희 씨...“
“제가 최 연희인데요. 아! 동수 씨!”
“아예! 전화가 하셨다 해서요.“
“예! 저..마치고 시간이 있으세요.”
“그렇긴 한데 무슨...“
“그냥 커피 한잔하려고요.”
“어디로?“
“남포동 지하도 건너 편 평화다방에서 한 일곱 시쯤 어때요?”
“알겠습니다.“
동수는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대체 무슨 일일까? 인석과의 관계된 일이 아직 정리가 안 된 걸까? 그 후로 인석을 만난 적이 없어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혹시나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을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사실 동수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어쩐지 마음이 끌렸었지만 막상 그녀는 그날 저녁 동수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지 않는가.
어째든 만나자고 하니 안 만날 이유는 없고 인석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 이상 나서고 싶지 않은 심정이므로 단호하게 이야기를 끝내리라 마음먹었다.
동수는 일을 하면서도 하루 종일 일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주인아주머니는 동수더러 아무래도 여자가 생긴 것 같다면서 놀리신다.
사월이 접어들면서 날씨는 이젠 완전하게 풀려 봄바람이 제법 시원하게 불어온다. 같은 바람이라도 계절의 변화에 따라 추운바람에서 점차 서늘하고 따스한 바람으로 느낌이 달라진다. 연희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날 밤 전등불 아래에서 본 모습이지만 윤곽은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큰 키에 가름한 얼굴 어쩌면 우수에 젖은 얼굴이랄지 모르지만 그래도 영리해 보였었다.
그리고 동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일곱 살이라고 하지만 말수는 적으나 그래도 또래들 보다 세련되었었다.
“동수오빠야 자전거 똑바로 타고 다녀라. 오늘은 왜 그리 중심을 못 잡는 거야. 무슨 좋은 일 있나?”
“정희구나 아 아니!“
“그럼 왜 그래? 정신 빠진 사람처럼.”
“아니다. 아니야...“
평소 크면 동수에게 시집오겠다고 농담을 하는 열네 살짜리 포목점에서 일하는 정희와 하마터면 부딪칠 뻔하였다.
동수는 다방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직 그녀와 약속한 시간이 삼십 분정도나 남았지만 딱히 시간을 메울 일도 없고 그 것보다는 자신이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다방은 번화가 주변에 위치하고 있어 출입하는 사람들의 연령층이 다양하였다. 안쪽으로 구석진 곳엔 젊은 남녀들이 많이 자리를 잡고, 카운터 근처엔 단골손님이나 나이 든 사람들이 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동수는 창가 쪽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다방엔 인기가수들의 노래가 구성지게 흘러나오고 있고 다방아가씨들은 짧은 치마를 입고 오가는 것이 동수는 바로 처다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일곱 시가 가까워서야 그녀가 나타났다. 단정한 투피스에 갸름한 얼굴이 매우 아름답다.
“벌써 와 있었네요?“
“예! 시간도 많고 해서요.”
“차 주문했어요?“
“아니 같이 시키려고요. 뭐 하실래요? 커피?”
“예! 좋아요.“
“아가씨! 여기 커피 두잔요.”
“잘 지내셨어요?“
“예! 저번 일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 건 동수 씨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잖아요.“
“그래도 친구들인데...”
“우리 다들 그렇게 생각 안했어요.“
“그럼 오늘은 무슨 일로?”
“그냥 만나고 싶어져서요.“
“난 또 전번일 때문인가 해서...”
두 사람은 다방을 나와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갔다. 동수는 시원함 밤공기도 좋았지만 그녀와 같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난 것 같이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후련하게 다 하고 말았다. 그녀 또한 자신이 처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어릴 적 서울에서 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국민학교 사학년 때 어머니의 친척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와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마쳤고, 지금은 어머니와 여동생과 같이 세 명이 살고 있단다. 자신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지금은 부산진시장 근처의 의상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열심히 해서 의상실을 내는 것이 꿈이란다. 그리고 창수를 처음 보는 순간 매우 성실해 보여서 마음이 끌리더라고 했고, 자기도 친척이 없으니 오빠처럼 여기며 지냈으면 좋겠단다.
단아한 외모, 조용한 성격은 창수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창수는 감격에 넘치며 자신의 처지도 비슷하니 서로를 위로하며 열심히 살아보자고 하면서 가로등 희미한 벤치에서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앞바다의 뱃고동소리가 그치고 공원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꽉 움켜진 채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수의 마음속이 이처럼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따뜻이 품어주던 어머니의 가슴 이외에는 이처럼 마음이 흡족한 순간이 없었다.
“시간이 많이 되었네요. 이젠 일어설래요? 참 집은 어디에...”
“대연동이에요.“
“그럼 제법 집이 머네. 빨리 일어서야겠다. 버스 타려면...”
“가는 버스는 많아요. 지금 가면 충분해요.“
공원 정면의 수많은 계단을 거쳐 내려온다. 창수는 날씨가 더 추워져 다면 자신의 웃옷을 그녀에게 벗어주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가계에 출근을 하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주인아저씨는 보이지 않고 아줌마는 넉 잃은 사람처럼 앉아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기에도 부담스럽다. 건너편 가계엔 세 명의 사람들이 서서 수군거리고 있다. 옆집 아줌마가 동수를 향해 손짓을 한다.
“동수총각! 아저씨가 아무 말 안 해?”
“아니요. 뭐라고요?“
“안 했나. 동수총각은 몰라?”
“아주머니! 무슨 일인데요?“
“응 저기...어차피 알게 될 거. 저 가게 주인이 바뀐대..”
“뭐라 구요? 정말요?“
“응 보증을 잘 못섰다나 뭐라나...참 좋은 사람들인데...”
순간 창수는 눈앞이 캄캄했다. 당장 자신의 일자리가 문제라기보다는 자신에게 지금껏 가족처럼 대해준 주인아저씨 가족에 대한 고마움이 더욱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침울한 마음에서 모른척하며 오전 일을 끝내고 오후가 되자 주인아저씨가 사십대 중반의 아저씨를 데리고 가게로 왔다. 두 사람은 한참동안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드디어 동수를 불렀다.
“동수야! 미안하다. 사실은...
“사장님! 이야기는...”
“들었니? 어쩌다 그렇게 됐다. 너도 네 집일처럼 잘해 주었는데...“
“괜찮습니다. 제게 잘 해주셔서.“
동수는 가슴에서 울컥하고 무엇인가 솟구치는 듯 했다.
“이 분 강 사장님께 인사해라.”
“안녕하세요. 김동수 입니다.“
“그래 이야기 들었어요. 앞으로 같이 일해 봅시다.”
“네가 원하면 여기서 계속 일하기로 강 사장과 이야기 됐고, 참 네 퇴직금 문제는 이 가계를 인계․인수 하면서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럼 계속해서 승계되도록 약정을 했는데 네가 원하지 않으면 다시 결정하마.”
“전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있는 한에는...“
“그래? 그럼 이 약정서 한부는 네가 가지고 있다가 나갈 때 강 사장에게 이야기 하 거라.”
“예! 감사합니다. 사장님 모시고 오랫동안 일하고 싶었었는데...“
“네 마음 잘 안다. 너도 빨리 돈 많이 벌어라. 그동안 고맙다.”
“예!....“
그날 오후 주인아저씨 부부는 정들었던 가계를 넘겨주고 어디론가 떠나고 말았다. 아마도 고향으로 돌아가 남의 농사라도 지어야겠다는 이야기만 남겼다.
동수는 그날 저녁 연희를 만나 술을 많이 마셨다. 자신이 이 낯선 땅에 와서 정말로 가족처럼 따스하게 대해준 사람은 친구들을 제외하면 주인아저씨 내외뿐 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수는 자신은 결혼을 한 후에도 아저씨의 가계에 남아 계속해서 일을 할 것이라고 마음먹었었다.
연희는 동수를 위로했다. 어차피 만났다 헤어지는 게 사람들의 운명인 것이다. 동수는 몇 년 더 돈을 모아서 연희와 같이 작은 가계라도 열고 싶었다. 아니면 연희에게 의상실이라도 차려주고 싶은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동수는 어제 밤에 술을 많이 먹어 속이 매우 불편한 것을 참고 가계로 출근을 했다. 가계에는 새로 바뀐 주인 내외가 일찍부터 나와 있었다. 주인 여자가 동수에게 말을 건넸다.
“총각 이제 나오네. 내가 이집 주인인데 열심히 일 해줘요. 알았어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청소부터 먼저하고.”
처음 얼굴을 대하는 사람치고는 정이 가지 않는 여인이었다. 조금 있으니 주인 남자가 나타났다. 주인 남자는 그나마 동수를 대하는 게 조금은 나아 보였다.
동수가 하는 일이야 벌써 몇 년 째 이어져 왔기 때문에 별로 달라질 것이 없었다. 문제는 주인 여자의 성화가 문제였다. 동수가 나이가 어리다고 다짜고짜 하인 취급을 하려고 하였다.
그런 것에 마음이 상하여 몇 번이가 가계를 그만 둘까 마음도 먹었었지만 그때마다 연희가 참으라고 동수를 위로했다. 그런 것을 못 참으면 다음에 동수 자신이 장사를 하더라도 참아내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주인도 주인이지만 손님들도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 많아 그들을 상대하려면 속이 상할 때가 많을 텐데 그때마다 장사를 그만 둘 수는 없는 릴 아니냐는 것이었다. 동수는 자신보다 어린 연희가 하는 말을 듣고서는 자신이 연희의 생각보다 못 미친다는 데 대하여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연희가 매우 사랑스럽고 기특했다.
일요일이다. 경수는 창수더러 어디에 가느냐고 말했지만 동수는 아는 사람을 좀 만나려간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경수는 동수가 연희를 사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을 하긴 하지만 동수는 그 사실을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식이 사건으로 그들은 사이가 나빠져 헤어졌는데 따로 자신들이 만나는 것을 인식이가 알게 된다면 감정이 좋을 턱이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아홉시 경 연희는 충무동 버스정류소에서 내렸다. 마중은 나갔던 동수와 만났다.
“동수 씨! 어디로 갈 거야?”
“응! 그냥 가까운 산에. 괜찮지?“
“어디든 동수 씨가 알아서 가. 난 따라서 갈 테니까.”
“멀리 가서 떼어 놓고 온다.“
“그랬단 봐라! 그냥 놔두나.”
“아이 구 겁나라! 참 그건 그렇고 이 근처에서 김밥하고 먹을 것 좀 사가자. 음료수도.”
“알았다. 뭐 맛있을까?“
“난 뭐든 다 맛있다.”
‘칫 자기가 돼지가.“
그들은 충무동 시장근처에서 김밥과 음료수와 과일을 조금씩 샀다. 그리고 감천 행 버스에 올랐다.
동수는 먹을 것을 한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연희의 손목을 잡아 이끌며 천마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마산은 남부민동 뒷산으로 아래로는 송도 앞바다와 영도가 눈앞에 보이는 곳이다.
산비탈에는 드문드문 집들이 있고 천막집들도 눈에 자주 보인다. 그리고 제법 큰 시설이 나타나는데 부산 어린이 집이란다. 불우한 청소년들을 수용하여 공부도 가르치는 곳으로 부산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다. 길가엔 여기저기에서 새싹이 피어오르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강아지 두 마리가 동수 네를 따라오다 흙 밭에 몸을 딩굴어 댄다.
아무 말 없이 따라 올라오는 연희가 숨이 찰까봐 동수는 쉬엄쉬엄 발 걸음을 옮기고 있다.
“안 힘들어?“
“이정도야 뭐. 아직은 숨 안가뿐데.‘
“이젠 오빠한테 말 놓는다. 나 보다 어리면서.“
“어리긴 한 살 차이 밖에 안 나는데.”
“좋아! 막 먹기로 했다 이거지?”
“응! 싫어? 높여줄까요? 오라버니!“
“됐다. 그까짓 것 뭐! 막 먹자.”
“억울하면 높여줄게.“
“됐네요. 아가씨!”
산을 오르면서 두 사람은 자신들도 어렵게 살지만 이 산자락에 판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기도 했다. 산 중턱을 오르니 이젠 집들은 없고 다소 가파른 지형이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저기엔 예쁜 진달래가 피어있다. 연희는 진달래 꽃나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기도 하고 나무사이에 앉아 포즈를 취하기도 하였다.
천천히 오르다 보니 열한시가 가까울 무렵 천마산 정상에 올랐다. 이곳에 오르니 부산의 서부지역이 눈앞에 다 들어온다. 멀리 문현동에서부터 중앙동 남포동, 그리고 대신동도 보이고 다리 건너 영도는 통째로 다 보인다. 아름다운 송도의 해안선이며, 송도공원과 해수욕장, 혈청소와 감천항도 내려다보인다.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그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던 연희도 이젠 모든 것이 감개무량하고 숙연한 듯 동수의 팔을 붙들고 아무소리 없이 마냥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오길 잘 했지?“
“응! 동수 씨! 난 이런 산에는 처음 와 봤어. 오는 덴 조금 힘들었지만 이런 기분으로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가 보네.”
“응! 난 어릴 때부터 산에 나무도 하려 다니고 해서 산을 많이 올랐었는데 그럴 때하곤 또 감정이 틀리네. 또 연희씨도 옆에 있고.”
“우리 온 김에 한참 있다가 내려가자 응?“
“그래 나도 그럴 참이야. 어디 좋은데 자리를 잡자.”
“어 저기가 좋겠네. 바위가 넓적해서.“
두 사람은 널 다란 바위위에 가져온 먹을거리를 놓고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동수가 살며시 왼팔로 연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순간 연희의 머리가 동수에게로 쏠린다.
“연희 씨!”
“응! 이야기 해봐.”
“나는 연희 씨를 좋아 하는데 연희 씨는 어떻게 생각해?“
“동수 씨! 그런 질문이 어디 있어? 내가 여기까지 왜 따라 오는데.”
“그래도 내가 너무 모자라니까. 자신이 없어서.“
“나도 갖춘 것 없는 것 마찬가지고. 그리고 내가 동수 씨 마음씨보고 그러지 다른 거 보고 이래? 그런 마음약한 소리,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내 앞에서는 괜찮은 데 남 앞에선 절대 그러지 안 그랬으면 좋겠어. 속상할 것 같아”
“안 그럴 께. 미안 해.“
동수는 연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져간 김밥과 과일을 맛있게 먹고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날씨는 화창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봄이었다.
“이 길로 쭉 내려가서 저기 보이는 병원 뒤로해서 좀 더 가다 바닷가로 내려갈래?”
“응! 동수 씨 마음대로 해.“
“다리 안 아파?”
“얼마 걸었다고. 난 걷는 것은 잘해.“
“알았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던 길과는 어마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길이 멀지는 않았다. 얼마 후 그들은 남부민동에서 감천으로 넘어가는 도로에 도착했다. 왼쪽 편엔 복음병원의 웅장한 건물이 가로막고 있었다. 병원의 뒤쪽 산허리를 돌아 좁게 난 산길을 걸어가고 있다.
“동수 씨! 이길 가봤어?”
“아니 처음이야.“
“그래 난 또 가본 줄 알고.”
“내가 언제 가봤겠어.“
한참을 걸어 내려오니 멀리 산 아래 바닷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산길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서 조심스레 내리 가고 있었다. 뒤따라오던 연희가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괜찮아?”
“응!“
“안 아파?”
“안 아프다. 걱정 하지 마!“
“조심해서 천천히 내려와라.”
“알았어.“
송도바닷가는 푸른 물결이 넘쳐나고 파도가 바위 모서리에 부딪쳐 하얀 물보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직 개발되지 아니한 바닷가 바위틈새에선 낚시질을 하는 강태공들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동수는 연희의 손을 잡고 바닷가로 내려갔다. 그리고 얉은 물가에 앉아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 근처 바위에는 조그만 조개들이 수없이 붙어 있고 미역들이 물속에서 자라고 있다. 연희도 바지를 걷어 올리고 물에다 발을 담그고는 좋아서 깔깔거린다. 그녀의 하얀 피부가 매우 탐스럽다. 동수는 행복한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고 싶었다. 멀리서 어선 한척이 다가오자 물 파장이 일어나 황급히 바깥으로 이동을 하였다.
다시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널따란 길을 걸어서 송도해수욕장을 향했다. 낮 시간의 해수욕장은 한적하였다. 해수욕장 주변엔 각종 횟집과 숙박업소들이 몰려있다. 파도에 밀려오는 바다 속을 보니 생각과는 달리 많은 오물이 쌓여있었다.
송도공원에서 한동안 바다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걸어서 충무동으로 와서 저녁을 사먹고 연희가 버스를 타는 것을 보고 동수는 집으로 돌아왔다. 동수는 정말 즐거운 하루를 보낸 것 같아 기분이 상쾌했다.
그로부터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동수는 가계에서 일하는 것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주인아주머니의 간섭이 심하였고, 또한 때론 동수를 의심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래서 언젠가 동수가 그만 두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이 있었고 가까스로 주인 아저씨의 만류로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동수는 전보다 마음이 편할 수도 있었다. 예전엔 정말 자신의 집처럼 열심히 일을 찾아서 했었는데 지금은 적당히 시키는 일만 하면 끝나니까 따로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되었다.
연희와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만나서 테이트를 즐기고 있다. 이젠 두 사람이 장래를 향하여 같은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모두의 가슴에 새겨져있다.
동수의 나이 스믈 한 살. 결혼을 할 나이로서는 아직 이르지만 연희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는 연희 집에서는 동수의 다짐이라도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언제쯤 결혼 하겠다느니 하는 그러한 다짐을 할 수는 없지만 장래를 바라보고 가족들과 안면이라도 터 두는 게 좋지 않으냐는 것이다. 언젠가 한번 연희가 말을 조금 끄집어내다 만 일이지만 동수는 그 의미를 느끼고 있었다.
생각다만 동수는 어느 날 연희에게 말하였다.
“연희 씨! 언제 어머님께 내가 인사를 드려도 할런지 모르겠어.”
“음...안 그래도 어머니가 내가 누굴 사귀는지 궁금해 하는데 부담 가지지 말고 우리 집에 놀러 한번 와.”
“알았다. 다음 주에 한번 찾아뵐게.“
토요일 저녁 7시경. 대연동에 위치한 횟집이었다. 동수는 일찌감치 식당으로 와서 연희의 가족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들과는 처음으로 대면하는 자리이니까 선을 본다는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하다. 동수는 화장실 입구에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시장에서 양복을 한 벌 사 입은 것이 아무래도 다소 어색해 보인다. 그러나 형편이 그런 걸 어쩌랴!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연희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이 같이 식당 문을 들어선다. 동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많이 굽히며 인사를 하였다.
“김동수 입니다.”
“우리 애로부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자리에 앉아요.“
“예!.”
“여긴 우리 둘째 애예요. 고등학교 일학년이고.”
“어머님 말씀 낮추십시오.”
“그거야 차차 그러면 되고, 인물이 훤칠하네요.”
“언니! 이 분이 우리 형부 될 사람이야?“
“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그냥 사귀는 사람이야.”
“그게 그거지 뭐. 안 그래요. 형부 될 아저씨!“
“그.. 글쎄요.”
“다른 이야기들은 따로 할 필요가 없어요. 연희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고, 그저 우리 애가 알고 지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보았으면 해서 나와 봤으니까.”
“어머님 감사합니다.“
“형부 될 아저씨! 나한테도 잘 보여야 돼요.”
“애가 시키지 않은 말을 자꾸만...“
“언니가 부끄러운 가 봐요.”
“알겠습니다. 애기 씨! 열심히 하겠습니다요.“
연희 동생의 넉살에 다들 한바탕 웃음을 웃고 말았다. 동수는 정말 오랜만에 정겨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동수는 연희의 가족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비록 서로가 내세울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순수한 감정으로 결합되어 살아가는 것이 좋았다. 연희의 어머니는 사십대 중반의 나이로 얼굴생김새가 고왔다. 그동안 연희가 동수 이야기를 많이 하였는지 서로가 궁금한 점은 없어 보였다.
밖에서 저녁을 먹은 후 연희네 집으로 가서 간단하게 다과를 함께 먹었다.
동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충무동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시내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무엇이 저렇게도 바쁘게 활보를 하고 있는지?
남부민동 바닷가에는 밤인데도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주변을 옮겨 다니고 있다. 아직껏 자식들에게 줄 먹잇감을 준비하지 못 했을까? 아니면 먹잇감을 구하려 나간 아빠 갈매기가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가족들이 걱정리라도 하는 것일까? 연희의 집을 보면서 그녀의 아버지가 안 계신 것이 조금은 허전하게 보였었다. 무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비어있는 것을 느낀 것이다. 동수는 그래도 그들이 부러웠었다. 그래도 그녀에겐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면 이 세상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울타리는 없는 것이다. 부모도, 형제도, 그리고 가까운 친척마저도...
방파제 끝에 섰다. 달빛에 밀려온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소리를 낸다. 도대체 이 파도는 어디에서부터 밀려오는 것일까? 그 끝은 어디일까? 연희 어머니가 권해서 먹은 서너 잔 술이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일요일 아침 경수 녀석이 낚시라도 가자고 졸랐지만 동수는 왠지 몸이 무거워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연희 네는 오늘 진해에 있는 이모 집에 놀려간다고 하여 동수는 집에 있겠다고 연희에게 이야기를 하였었다. 오전 내내 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않다가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뒷동산으로 올랐다. 이젠 드믄 드문 핀 진달래도 이젠 꽃으로서의 생명을 다한 듯 축 늘어진 자태가 왠지 서글퍼 보인다. 저녁 무렵에 경수가 그의 직장근처 친구와 잡아 온 고기를 회를 만들고 매운탕을 끓여 먹느라고 한바탕 부산을 떨었다.
동수가 주인이 바뀐 가게에서 일을 한지 사년이 되었다. 동수의 나이 이젠 스믈 네 살이다. 그동안 주인아주머니와의 갈등이 여러 번 있었지만 아저씨의 중재로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항상 불신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 온 건 사실이었다.
토요일에 출근을 하여 일을 하던 중 드디어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주인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아 물건 배달을 한 것이 있었는데 돈을 제때 받지 못하고 있다가 이사를 가버린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아주머니는 동수가 돈을 받지 않고 물건을 건네주었다는 것이고, 동수는 이전부터 그 사람과의 거래에서는 외상거래를 해 왔고, 물건의 대금은 아주머니가 받아 왔던 것이 관행이어서 동수로서는 수금에 관한 사항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였다.
그래서 결국은 싸움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동수는 가게를 그만 두기로 마음먹고 남은 임금과 퇴직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인아저씨는 아무 말이 없고 아주머니가 나서서 동수에게 소리쳤다.
“우린 돈 줄 수 없어. 너 때문에 그 많은 물건 값도 못 받았고, 그리고 퇴직금이 어디 있어? 매달 월급 제때 주었으면 되었지. 이게 무슨 큰 회사라고 퇴직금이래?”
“아주머니! 그 집하고 돈 거래는 아주머니가 이제까지 해 오셨잖아요?
이제 와서 갑자기 저더러 돈 못 받았다고 하면 어떡해요? 그리고 제 퇴직금 문제는 예전 아저씨끼리 가계 인계․인수하실 때 분명히 문서로서 약속하신 부분이고요.“
“우린 그런 약속 못 지켜. 월급은 물건 값 제하고 나면 우리가 오히려 더 받아내야겠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억지라니 그 동안 내가 몇 번이나 내보내려다 아저씨가 말려서 참아 왔는데.”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이젠 그런 말 필요 없이 돈이나 계산해 주세요.”
“우린 못 주니 네가 알아서 해라.”
동수는 어이가 없었다. 아저씨에게 이야기를 하였으나 자신이 혼자 결정할 수 없고 결국은 아주머니의 하락이 있어야 한다니 더 이상 말로서 하는 것은 의미기 없을 것 같았다.
화가 치민 동수는 절대로 돈 안 받고 넘어 갈 수가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말을 하고서 가게를 나왔다. 주변의 사람들이 평소의 거래관계를 알고 있고 또한 퇴직금 문제는 약정서류가 있으니 일방적으로 주인집에서 돈을 못주겠다고 버티는 것은 문제가 될 것 같았다. 우선은 싸워보았자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 시간을 갖고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당장 어디로 가서 누구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지만 갈 데가 마땅치 않다.
걸어서 용두산 공원을 올랐다. 낮 시간이라 젊은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노인들과 공원에 놀려온 몇몇의 관광객들만이 있다.
공원가게에서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사서 멀찌감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어쨌든 소주 맛은 쓰다. 오징어 다리를 입에 물고 뜯으며 생각에 잠겨본다.
열다섯 살에 그 가게에 들어가서 이젠 동수의 나이 스물 넷. 무려 9년을 지낸 것이다. 있을 만큼 있은 것이다. 미련은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을 기분 좋게 마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이젠 좀 더 넓은 곳으로 옮길 때도 되지 않았던가? 동수는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연희가 무어라고 말할까 그것이 신경이 쓰였다.
하긴 연희도 언젠가 이젠 그 곳에서 나와 다른 곳에 취직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이야기 한 적이 있긴 하였다.
동수는 근처에서 박보장기를 구경하다 자신이 생겨 돈을 걸고 내기에 나섰다가 돈을 잃고 말았다. 자신이 잘 두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교묘하게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 수법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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