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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착각은 자유!
오늘도 경서가 먼저 내려가 기다리고 있었다. 2층 대성전에서 내려가는 나선형 외부계단이 끝나고, 마당을 가로지른 대문 쪽 등나무 밑이었다. 왼손으론 햇볕가리개를 하고, 오른손으론 크게 어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영우도 손을 들어 답하고는, 교중미사를 마친 신자들 틈에 섞여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경서는 1층 사무실 입구, 이동식 음료봉사대 앞으로 영우를 이끌었다. 커피 마니아답게 공짜커피 한 잔을 기어코 얻어 마시자면서.
아직 오월 중순임에도, 쨍쨍한 햇볕 탓인지 무척 덥다. 한여름 뺨칠 기세다. 음료수 공급차례를 기다리는 교우들의 긴 줄 뒤꽁무니에 경서와 영우도 붙어 섰다.
영우는 터져 나오는 하품을 간신히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눈물이 찔끔 베어 나왔다. 실내에 있다 갑자기 바깥으로 나온 탓인지 간밤의 피로가 일시에 몰려오는 것 같다.
“어제 밤 고향길이 무척 좋았나 보지?”
못 본 줄 알았던 경서가 뒤돌아보며 입을 삐죽했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보냈다. 영우는 얼른 안경을 고쳐 쓰는 척, 손등으로 하품눈물을 닦아냈다.
“좋기는 뭐. 피곤해 교리공부시간에도 혼났구마.”
지난 밤, 아버지 제사 차 고향집에 갔다가 새벽녘에 도착했다. 자정 쯤 제사를 마치고, 한밤중에 동생내외는 서울로, 영우는 부산으로. 각각 출발했었다. 내일이 노는 날 아니냐? 며 붙잡는 엄마에겐 중요한 약속이 있다면서 거짓핑계를 댔다.
오늘 오전 교리공부도 생각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몇 시간 더 있어봤자, 얼른 장가 안 간다는 지청구만 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엊저녁 내내 엄마는 장가타령이 아니던가! 진작 연애 결혼하여 세 살짜리 조카까지 둔 동생내외가 곁에 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동생내외에 대한 영우의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경서는 영우를 성당으로 인도한 장본인이다. 그래선지 성당에서만은 영락없이 초등 1학년을 보살피는 3학년짜리 누나다. 성당에서의 언행부터 다른 교우들과의 친교방법까지 일일이 가르치려 든다.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전화로 체크해왔다. 혹시 교리공부나 미사에 불참할까? 싶은 우려 때문이었다.
“교리 공부 열심히 해줘서…, 고마워.”
경서가 다시 뒤돌아봤다. 장난기가 걷힌, 그리고 정말 고맙다는 진지한 표정이다.
“고맙긴…? 뭐…, 할 일도, 갈 데도 없으니까”
“어, 말버릇 좀 봐. 무슨 대답이 그 모양이야?”
경서가 눈을 흘기면서도 빙긋했다. 영우의 장난스러운 대답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대신 경서의 빙긋함에 오히려 영우가 머쓱해졌다. 좀 지나쳤나? 싶은 생각에서다.
“수녀님이 제일 모범생이라던데…?”
“수녀님이? 그럴 리가…? 무슨 근거로?”
“그야 사실이 그렇겠지 뭐. 테레사 수녀님이 설마 거짓말 하실까?”
영우는 경서의 말에 멈칫했다.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 동떨어진 평가여서다. 겉보기야 그렇겠지? 몇 번 농땡이 친 날 빼고는 꼬박꼬박 수업에 참석했으니까. 그렇지만 스스로의 생각엔 전혀 그렇지도 않았고, 스스로가 용납되지도 않았다. 시늉만 내고 있지, 공부하곤 담 쌓은 상태나 진배없으니까.
그래서 교리공부를 계속해? 때려 치워? 를 두고도 목하 고민 중이지 않은가! 조금 전, 교리시간에도 그랬고, 뒤 이은 미사시간에도, 집중은커녕, 머릿속은 온갖 잡생각으로 가득한 쓰레기더미였다. 심지어 미사시간에 신부님의 강론내용도 들어오지 않았다. 귀는 열렸으되, 생뚱맞게 이번 달 결제할 공과금이며 방세 계산에 몰두하지 않았던가!
“강의하시는 보조신부님도 그러시던데? 수업태도도 진지하고 질문도 제일 많다면서? 영우씨가 꼭 내 체면을 세워주는 것 같아 고마워죽겠어.”
경서는 ‘이게 웬 일이지?’ 싶을 정도로 여태껏 한 번도 보인 일 없는 호들갑을 떨었다. 영우가 놀란 나머지 웃어 넘겼지만, 이내 부끄러운 생각도 뒤따랐다. 경서가 질문이 많다는 걸 알았다면, 틀림없이 자신의 질문내용도 들어 알고 있을 것 같아서다.
질문 내용이 엉뚱한 것이었다는 자책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교리 강사인 보조신부는 영우와 비슷한 삼십대로 보였다. 그래서 영우는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던 것이다.
“어떤 소설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연인으로 나오던 데, 막달라 마리아와 성모마리아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러자 보조신부는 물론, 같이 공부하는 수강생이 모두 영우를 주시했다. 이윽고 강사가 재미있다는 듯 킥하며 웃었는데, 지레짐작인진 몰라도 마치 그것도 모르나? 하는 표정 같았다.
“두 분은 전혀 다른 사람이고 시대도 다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연인이란 말은 소설이니까 그렇겠죠?”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부연설명도 없었다. 때문에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스스로 참 무식한 질문이었구나! 싶었다. 교리교본을 한번만 읽어봤거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조금만 있었어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영우는 자신을 칭찬하셨다는 테레사 수녀님 얼굴도 떠올렸다. 연세가 일흔을 넘긴 할머닌데, 푸근한 몸집과 표정이 꼭 엄마를 닮은 분이다.
교리공부에 앞서 처음 경서에게 이끌려 인사를 드리러 갔던 반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날 영우는 난생처음 신성지역인 성당구내에 들어섰고, 또 수녀님을 만났기에, 그저 경서가 시키는 대로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날, 수녀님은 영우의 얼굴을 관상이라도 보듯 찬찬히 뜯어보시더니 경서에게 물었다.
“이분이 안젤라가 자랑했던 남친 이신가?”
“아이, 수녀님도 남친은 무슨? 그리고 언제 자랑을 했다고…?”
경서가 말끝을 흐리며 영우를 힐끗 쳐다봤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사무실에서는 한 번도 보인 일이 없는, 상당히 당황한 눈빛이었다. 영우는 자신이 뭘 잘못했나? 싶어 어리둥절했다.
“아이고 시치미는? 뻔할 뻔자구마. 케미도 좋아 보이구마, 뭐!‘
수녀님은 약을 올리듯이 농담을 던졌다. 경서는 쑥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수녀님 방을 나서며 혼자말로 구두덜거렸다.
“할마씨가 생뚱맞기는…!”
“어, 수녀님보고 그래도 되나요?”
경서의 말에 영우가 어깃장을 놓았다. 그러자 경서는 여고생 소녀처럼 입을 샐쭉했다.
“왜? 수녀님, 할마씨 맞잖아요?”
그러고는 머쓱함을 지우려는 듯 소리 내어 깔깔 웃었다. 영우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조금 전 수녀님 말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신성함과 점잖음이 몸에 밴 수녀님도 ‘남친’ 이니 ‘케미’ 같은 말을 쓰는 게 놀랍고 어리둥절했다. 자신과 같은 속인(俗人)들이나 쓰는 말을 사용하고, 또 아이들같이 농담까지 하시다니?
“수녀님도 유행어를 많이 쓰시네?”
영우가 의아한 기분에, 기어코 혼잣말처럼 꺼냈다.
“어, 뭐시라고요? 수녀님도 똑같은 사람인데, 농담도 못하나, 뭐?”
이번에는 경서가 뜻밖이란 듯 영우를 쳐다봤다. 영우는 더욱 더 놀랐다. 연속된 경서의 대답이 예상 밖이라 생각됐기 때문이었다.
영우는 스스로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나! 싶었다. 경서가 자신의 말이 미안했던지 어색한 웃음을 머금으며 앞장서 대문 쪽으로 향했다. 경서가 사는 동네의 D성당이다. 영우의 자취방은 지하철 네 정거장이나 되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교리수업은 매주 일요일 오전에 있었다. 수강생은 스무 명 남짓. 특이한 점은 영우의 예상과 달리 수녀님이 강사도 아니시면서 수시로 강의실에 들어오신다는 점이었다. 출석 체크 등 보조하시는 분들이 있었지만, 수강생들의 불편사항을 직접 살피시는 것 같았다.
이런 수녀님의 참관이 영우는 왠지 불편하고 조심스러웠다. 아무 근거도 없었지만, 영우는 수녀님이 유독 자신의 수업태도를 지켜보는 것 같아서였다. 더욱 조심스러운 것은 수녀님이 자신을 경서와 연관지어 생각하실 것 같은 추측에서 비롯됐다. 그러자 점점 수녀님 대하기가 주저주저해졌다. 한 술 더 떠, 자칫 실수라도 하게 되면 경서가 곤란해지겠다는 오지랖 넓은 생각까지 하곤 했다.
대신, 수녀님께서는 경서와 영우를 친구정도로 만만하게 대했다. 둘이 함께 있을 때면 어김없이 농담을 던지셨다. 언젠가 둘이서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서다, 마당에서 수녀님과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어찌 보면 오누이 같고, 또 어찌 보면 부부라 해도 되겠고…!”
그리곤 둘이 똑똑히 들었겠지? 하듯 경서의 어깨를 툭 건드리곤 지나가셨다. 경서와 영우는 황당해 했지만, 그럴수록 수녀님은 두 사람의 관계가 더욱 궁금해지는 모양이었다.
영우는 수녀님께서 경서에게 자신을 칭찬했다면, 겉으로 비친 나의 조심스런 태도 때문이겠지! 하며 막연히 짐작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영우는 교리공부가 진행될수록 머릿속은 정리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혼란스러워짐을 깨달았다. 처음 목표했던 성경공부도, 성당에서 바라는 예비신자로도 낙제생이었다. 함께 하는 문학 동호회원들의 시선에도, 경서의 말없는 기대치에도 어림없는 것 같았다.
이제 곧 수료와 동시에 세례성사가 있을 것이라 했다. 그럼에도 아직 기도문 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했고, 구입한 성경책도 겉표지마저 닫힌 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애초부터, 단지 몇 달 만에 실력이 늘거나 마음의 변화가 눈에 띄게 나타나리라 기대한 건 물론 아니지만, 적어도 무슨 기미(幾微)나 미세한 자세변화라도 느껴지겠지?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성당에 나올 생각은, 싫고 좋고를 떠나, 미처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근 여섯 달 가까이 교리수업에 참석했다는 건 스스로도 놀라운 변화라 자부했다.
다른 한편으론 은근히 부아까지 돋았다. 희한하게도 교리시간이나 미사에만 참석하면, 평소 잠잠했던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치켜드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천금 같은 일요일까지 반납해 가며, 그 좋아하는 등산이나 낚시도 접어 두었는데…, 마치 거름지고 장에 따라나선 격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들 정도다.
‘처음부터 이럴 줄 왜 몰랐지?’
영우는 흐리멍덩하고 어정쩡하기만 했던 자기 판단을 자책했다. 아무준비도 없이 경서의 제의를 따랐던 게 잘못이었던가? 글쓰기를 위해 교리공부를 한다? 얼토당토않은 착각이었다. 구질구질한 명분보다 경서에 대한 관심이 더 큰 이유였다고 당당하지 못했던 것도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자식이 좀 대범하지 못하고…?’
그러자 모든 혼란의 원인을 경서에게 미뤄버리고 싶었다. 비굴하지만 원인제공자가 경서였으니까.
입사한 지 두어 달쯤 됐었나? 퇴근길에 같은 방향의 전철승강장에서 우연히 경서를 만났다. 하루 종일 같은 사무실에서 머리를 맞대지만 퇴근길에 단 둘이 만나니까 어딘가 어색했다.
“성당에 다니신다면서요?”
영우가 밍밍한 분위기를 떨치려고, 들어 알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예, 그래요. 성당엔 어릴 때부터 다녔으니까요”
경서는 사무실에서와는 달리 깍듯한 존댓말이었다. 그리곤 더 이상 대꾸도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영우는 썰렁했다. 서두를 꺼내면 뭐라고 뒷말을 이어줄 걸로 생각했었는데…. 영우는 더욱 어색해져 무슨 말을 할까? 머리를 굴리는 순간에 경서가 되물었다.
“성당에 관심이 있나보네요?”
이번에는 사무실에서와 같은 말투였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럼…, 다른 종교를 갖고 계시나보죠?”
“아니, 없어요. 어머니께서 조그만 절에 다니시긴 하지만….”
영우의 엉거주춤한 대답에 경서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영우는 고향의 미타암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그곳의 단골 보살님이시니까. 요즘에야 좀 엷어졌지만, 동생 민우가 대학입시를 치를 때까지는 독실한 우바이(優婆夷)였다.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마다 새벽기도를 다닐 정도였다. 캄캄한 새벽에 랜턴을 이마에 매단 채, 한마장이나 되는 산길을 오르내린 사진이 지금도 시골집 마루 벽에 걸려있는 게 생각났다.
“성경은 많이 읽으셨겠네요?”
영우가 오래 동안 품어온 관심사항을 던지자, 경서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왜 성경엔 관심이 많으세요?”
“그래요. 거의 맹탕이지만…”
“신앙보다는 성경에 관심이 많다고요?”
경서는 뜻밖이다 싶은지 씩 웃는 표정이었다.
“관심이라기보다는…, 인류역사상 최고 최대의 베스트셀러라잖아요?”
영우는 초등학생 같은 대답을 하면서 까도녀라는 경서의 별명이 생각나 조심조심했다. 정작 경서 자신은 모르는지 모르지만, ‘까탈스럽고 도도한 여자’를 말하는 유행어가 아닌가.
“영우씨 글은 잘 씌어져요?”
경서의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지금까지 회사 내에서 이런 질문 던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같은 부서 직상급자가 자신의 글에 직접 관심을 표하다니?
“아니요. 실력이 있어야죠?”
“등단 작가님이 그러면 어쩌죠? 새 작품은 언제 나와요? 지난 작품도 재미있었는데…”
“아이구. 고맙습니다. 제 작품을 읽으셨어요?”
“읽다마다요. 여직원들이 다들 좋아하던데…!”
영우는 칭찬성 질문이 약간 낯 간지럽게 느껴졌다. 경서는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고, 대화내용도 예상보다는 평범했다. 평소에 업무얘기 밖에 모르는 줄 알았는데…?
“무슨 과찬의 말씀? 신통찮습니다. 맨날 글감조차 못 찾아 해매고 있는데요 뭐?”
영우의 답변이었다. 사실이 그랬다. 글 쓸 시간도 빠듯하지만, 무엇보다 글감조차 찾지 못해 헉헉대기 일쑤니까.
“성경 공부하시려면 우리 성당 예비신자 교리반에 한번 나와 보시는 건 어때요?”
잠시 후, 또 다시 경서가 생뚱한 말을 꺼냈다.
“성당? 교리공부? 에이, 성당엔 아무나 가나요?”
영우는 경서의 질문이 너무 예상 밖이라 농담을 하나 싶어 자신도 장난스럽게 되받았다. 그랬더니 경서는 대답은 않고 물끄러미 영우를 쳐다봤다.
“그럼 아무나 가죠? 누가 미리 정해놓고 오래요?”
마치 영우의 어투를 나무라듯 퉁명하게 답했다.
“아니, 제 말은…” 그런 게 아니고, 성당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어 곤란하단 얘기예요”
영우의 요령부득한 답변이었다.
“……? 그건 또 무슨 말이죠?”
“내 말은 그 방면에 너무 모르니까…? 허 참, 이럴 때 무신론자라고 해야 하나? ”
“그러니까 교리부터 공부해보시라는 거죠. 혹시 아세요? 훌륭한 글감이 생각날지도?”
“교리공부를 한다는 건 세례를 받고자 하는 것 아닌가요?”
“일단 성당에서 교리공부를 해보는 건 나쁘지 않을 거예요. 성경에도 관심이 많다면서요? 신자가 되고 말고는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영우는 괜히 긁어 부스럼 낸 것 같았다. 경서의 말엔 반박할 여지가 전혀 없어보였다.
‘교리 공부라?’
그날 이후 영우는 며칠 동안 곰곰 생각해봤다. 그리고 신앙 없이 살아가는 인생살이는 등대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바다에서 항구를 찾는 것과 같다는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가물가물해지고 말았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영우에게 종교는 원체 관심이 없었다. 집안에서도 어머니를 제외하면 신앙인은 아무도 없다. 어머니야 지금도 미타암(彌陀庵) 출입이 잦은 편이지만, 애초부터 교리에 심취했다기보다 동네사람들과 동무가 되어 다닌, 말하자면 단순한 기복(祈福)차원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별다른 근거도 없이 타종교인은 마뜩찮게 여겼다. 까딱했으면 제수가 될 뻔했던 동생의 첫 여자 친구도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퇴짜를 놓았을 정도였으니까.
주위 친구들 중에도 신앙인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교회나 사찰을 눈여겨보지도 않았고, 따라서 무슨 종교건 간에 교리공부를 위한 마음의 준비 같은 것도 돼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 퇴근 시 또 경서를 지하철에서 만났다. 경서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도 답변 준비가 안됐나요?”
“무슨…?”
“교리공부”
“아 참, 그랬었지요.”
영우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뭐라고 해야 할 지 망설여지는 순간, 대학시절 창작(創作)론을 강의했던 지도교수님이 또다시 생각났다. 늘 잠재되어 있던 생각이긴 하지만, 소설공부를 하겠다는 녀석들이 성경도 제대로 읽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고 질책하다시피 성경읽기를 강권했었다. 덕분에 친구들과 성경책 구입하러 서점으로 몰려갔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그렇지만 성경읽기가 소설책 읽듯 술술 넘어가는 게 아니었다. 복잡하고 이해조차 힘들었다. 그 방대한 양에도 기가 질렸다. 학과공부에다 유명작가들의 명작 읽어보기도 벅찼고, 무엇보다 졸업 후 취업고민까지 겹친 세월이었다. 자연히 성경읽기는 차일피일 미뤄졌다.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시작하니 자연히 마음에서도 멀어졌다.
그러면서도 성경읽기가 소설공부에 도움이 되리라는 막연한 믿음은 변치 않았다. 지도교수님의 말씀을 떠나, 종교문제를 빼고 인생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소설도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긴 데…!, 하는 생각이 늘 따라다녔다. 당시 지도교수님이 리포트로 제출하라던 「카인의 후예」 의 독후감도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부분을 읽고서야 쉽게 이해했던 것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었다.
학교 졸업 후 군복무며 취직하느라 몇 년이 날아가는 사이, 글공부는 뒷전이었다. 취직을 위해 전공과는 전혀 다른 공부를 다시 해야만 했다. 하지만 취직을 하고는 나름대로 열심히 글공부에 매달렸다. 다행히 원로 소설가의 추천으로 월간문예지를 통해 등단한지 4년째다. 시간여유가 좀 나은 곳을 찾고 또 찾아온 곳이 바로 지금의 이 곳, 낯선 타향의 자동차 부품 홍보부서다.
직장 일을 해가며 글쓰기가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그리 만만한 일도 아니었다. 거기다 등단이란 고비를 넘자, 글은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더 써지지 않았다. 스스로의 기대치가 높아진 탓이리라. 써야할 주제도 그랬고, 한껏 생각한 주제에 꼭 맞는 글감이 생각나지 않는 것도 고통이었다. 스스로 실력부족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참담함이 늘 영우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결국 자신에 대한 이런저런 변명꺼리에다 경서의 권유를 핑계 삼아 수강시기에 맞춰 교리공부를 시작했다. 오로지 성경공부를 위한 것이고, 교리공부가 성경공부의 도화선이 되리라 믿었다. 거기다가 무의식중에 외로움이란 게 촉매제가 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종목표야 물론 글공부와 연계시키는 것이었고.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다는 건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경서는 만난 지 거의 1년이 넘어가는 직장선배다. 영우의 첫 직장 맨토이기도 했다. 오뚝한 콧날에다 얇고 앙 다문 입술에서 풍기는 분위기처럼 자기주장이 확실했다. 별명답게 까탈스럽고 세심했다. 같이 일하기 쉽지 않은 상사이자 동료임은 회사 내의 정평이었다. 평소 업무외적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나이 많은 편부를 모시고 산다는 것 외에 사생활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시집 못 간 이유가 다 있는 거야”
사람들은 경서가 아직 미혼인 이유를 그녀의 빈틈없고 차돌처럼 야무진 성격에서 찾았다. 영우의 첫 느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교리공부와 미사에 참가하면서, 성당에서 만나는 경서는 전혀 딴 사람이었다. 같은 믿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동료의식에서일까? 자상하고 친절했다. 많은 시간 겪어보지 못한 영우로서는 매순간 헷갈리기 일쑤였다.
공적이고 업무적인 이야기 외에는 오불관언 무심했던 경서가 성당에서는 극히 자질구레하고 사적인 문제까지 곧잘 챙겨주었다. 학습교재나 보충자료를 사무실에서 찾아다 주기도하고, 수시로 차나 음료를 챙겨주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우가 사무실에서 경서 대하길, 마치 성당에서 경서 대하듯 착각함으로서, 머쓱한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경서가 영우를 이렇게 달리 대하는 데는 또 다른 연유가 있었다. 본인이야 펄쩍 뛸 일이지만, 새로 부임해 온 강 부장의 자발없는 농담 한마디 때문이었다.
영우가 교리공부를 시작할 때쯤에 부임해온 강부장의 환영회 석상이었다. 약간씩의 술이 돌자, 강 부장은 갑자기 정색을 하고는 우리부서에 두 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고 선언했다.
순간, 모두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강 부장을 주시했는데, 첫째는 부서별 업무실적이 현재 중위권이니 상위권으로 끌어올릴 것, 두 번째는 게으름뱅이 두 명은 정신 차리라고 했다. 그리고는 더욱 긴장한 표정들을 휘둘러보더니 허허 웃으면서 경서와 영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모두 의아하게 강 부장을 바라보자, 강 부장은 느긋하게 술잔을 비우고는 게으른 탓에 아직 시집장가도 안 갔으니 알조가 아니냐? 고. 나이 많은 사람에게 더 문제가 많다고. 굳이 먼 데서 찾지 말고 두 사람 서로서로 생각해보는 게 어떤가? 하며 농담을 던졌다. 긴장했던 모두가 폭소를 터뜨린 건 물론이다.
그러면서도 알게 모르게 경서의 반응을 지켜봤다. 듣기에 따라서는 자칫 성희롱이란 예민한 문제가 제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나이 많은 측이란, 비록 많은 차이는 아니지만, 바로 경서 쪽을 지칭한 것인데다, 경위에 어긋나면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치고나가는 경서인지라, 경서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경서도 그냥 웃어넘겼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얘기라 여겼거나, 대꾸할 가치도 없다 싶었을 거란 추측이 가는 대목이었다.
경서 못지않게 영우로서도 자다가 홍두깨 얻어맞은 격이었다. 그렇다고 뭐라 반응할 계제도 아니었다. 선임자인 경서도 가만있는데 새까만 신출내기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삽시간에 온 사내에 퍼졌다. 그리고 소문은 조금씩 부풀리고 왜곡되면서 경서와 영우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달라진 것도 잠깐사이였다. 급기야는 결혼을 전제로 사귄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그렇지만 경서는 의연했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표정과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이 소문이 두 사람의 관계에 어느 방향으로든 하나의 변곡점이 된 것은 확실했다. 우연의 일치이긴 했지만, 새로 시작한 영우의 교리공부와 맞물리면서 서로에게 데면데면했던 사이가 관심의 대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사무실에서도 경서와 영우의 관계가 알게 모르게 달라졌다. 처음부터 그리 나쁘진 않았지만, 까탈스러운 경서가 보기에 신참치고는 영우의 나이가 많았다. 자연히 대하기를 껄끄럽게 여겼지만, 예상 밖으로 영우가 성실했고, 모든 일에 협조적이었다. 거기다 영우가 업무에 숙달되면서 장기인 홍보문안작성에도 남다른 아이디어를 제공하곤 했기에 경서에겐 부하직원이기보다는 동료라는 생각을 많이 갖게 만든 탓이기도 했다.
교리공부를 시작한지 한 달 정도나 지났던가! 미사를 마치자 경서는 함께 식사하러 가자며 앞장섰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재래시장인 D시장입구 소문난 감자탕이란 간판을 단 허름한 가게였다. 영우의 선입견으로는 경서가 갈만한 집이 아니었다.
“어, 대리님 이런데도 다니시는가요?”
영우가 농담을 던졌다.
“왜 이집이 어때서요? 단골집인데…?”
경서는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주인아주머니께 친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영우는 오히려 맘이 편해졌다. 자신이 즐겨 찾는 음식점 스타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경서의 어느 구석에 이렇게 푸근한 데도 있었나 싶었다.
“대리님은 그 소문에 성질 안 났어요?”
“무슨 소문?”
“에이, 참 강부장이 퍼뜨린…?”
“아, 그거? 뭐 신경 안 써? 왜 영우씨는 맘에 걸려?”
“아뇨. 저야 뭐…”
“신경이 쓰이나보네. 강 부장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게을러서 시집 안 간 게 맞는 말이니까”
경서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런데 정작 강 부장의 농담으로 더 많은 주목을 받은 인물은 바로 영우였다. 이미 영우는 엊그제 입사한 신출내기 주제에 사보(社報)에 투고한 기업문화에 관한 콩트 한편으로 화제가 된 상태였다. 사원뿐만 아니라 간부회의에서 전무까지 읽었다며, 직접 거론하는 바람에 꽤나 관심의 대상이 된 데다, 등단작가라는 사실까지 덧붙여진 때문이었다.
결국, 아직 신입이나 별 다름없는 신출내기가 강 부장의 농담 한마디 때문에 까도녀로 불리는 경서의 연애파트너쯤으로 격상해버린 게 소문의 핵심이었다.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했다. 경서가 영우에게는 기가 꺾여 꼼짝 못하고 순종한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나이도 경서에 비해 어리고, 캐리어나 외모나 모든 면에서 영우를 경서의 상대로 생각하는 직원은 아예 없었는데…,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었다. 은근히 경서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엘리트 총각사원들이 머쓱해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 지경이었다.
어쨌든 이 일은 일회성 애피소드로 끝나나 했지만, 파장은 물밑에서 조금씩 퍼져나갔고, 시간이 흐를수록 적지 않은 직원들에게 기정사실처럼 전파되어갔다.
영우는 경서가 건네주는 커피 잔을 받았다. 둘은 담장 곁에 선 등나무 그늘 밑으로 자리를 옮겨 뜨거운 커피를 식혀가며 천천히 마셨다.
그런데 오늘따라 경서는 서두르질 않는다. 다른 날 같으면 대개 미사 후, 서둘러 차 한 잔 마시고는 바이바이 손을 흔들어 주곤, 저 갈 길 가버리기 일쑤였다. 성당에 나오면서 처음 안 일이지만, 일요일 오후마다 자원봉사 차 요양병원에 간다는 것이었다.
둘은 성당을 나섰다. 경서는 언제나처럼 앞장서 버스정류소 쪽으로 길을 잡았다.
“오늘 난 이쪽으로 돌아갈까 하는 데요…?”
영우가 경서의 뒤쪽에서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경서는 바이바이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앞장섰던 길을 되돌아오며 무슨? 좋은 일 있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영우가 가리키는 쪽으로 이유도 묻지 않고 성큼성큼 앞서기 시작했다.
“오늘 시간 많이 남는데, 잠시 데이트 하는 셈 치지 뭐!”
경서가 한 발짝 앞서며 던지는 농담에, 영우는 내심 미처 이야기하지 못한 게 좀 꺼림칙했으나, 이왕 이렇게 된 것 어떡해? 하며 줄레줄레 경서를 뒤따랐다.
영우는 음식점, 아니 횟집 하나를 예약해야했다. 며칠 후면 스승의 날이다. 이날을 기념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은사를 모시고 졸업 20주년 기념 오찬을 할 예정이다. 전국에서 동기생 열 두 명이 몰려올 예정이다. 오늘까지 장소를 예약하고 알려달라는 동기회장녀석의 독촉이 다시 생각났다.
시장 앞을 지나면서 영우는 간판들을 찾았다. 굳이 이 거리에서 장소를 찾는 이유는 선생님이 팔순에 가까운 고령인데다, 자택이 바로 지척인 시장 뒤편에 있어서다.
서울과 대구 등 먼 데 사는 친구들이 대개 기차로 몰려올 것이니 가급적 기차와 지하철이 연결되는 곳에, 그것도 선생님의 자택과 가까운 곳을 택하기로 친구들께 연락이 된 상태다. 그곳이 바로 시장 앞쪽 도로변이었다.
“왜? 어디 가려고?”
앞장섰던 경서가 뒤돌아봤다. 영우는 건판 찾느라 두리번거리며 뭉그적거리기만 했다..
“지금 뭘 찾고 있지?”
“식당 간판.”
영우가 건성으로 대답하자, 경서가 무슨 뚱딴지? 하는 표정이다. 영우는 아랑곳없이 계속 두리번거리며 나아갔다.
‘열 두 명이나 몰려올 텐데…!’
횟집을 찾았으나 보이질 않는다. 동기회장은 부산하면 회 아니냐? 며, 조용하고 쾌적한 횟집을 찾으라고 했다. 완전히 영감 티 나는 소리다. 삼십대 중반에다 거의가 시집가고 장가든 친구들이니 일단 수긍은 갔다. 고향마을 친구인 봉식이는 벌써 아들이 중 3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영우를 닦달하는 기준점이 되는 친구다. 말끝마다 봉식이 뽄 좀 보라고 했다.
그런 친구 녀석들이 모든 준비를 영우에게 떠맡긴 셈이다. 선생님과 같은 도시, 그것도 같은 자치구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니 원체 소홀하게 해서도 안 될 일이다. 소홀하게 했다간 친구 녀석들한테 무슨 욕을 먹으려고? 그러니 미리 그럴 듯한 장소부터 예약해 놓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 장소가 동기회장 말마따나 조용하고 쾌적한 데라야 한다. 음식 맛도 괜찮아야 함은 물론이고.
“무슨 간판?”
경서가 따라오며 되물었다. 경서의 얼굴에는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횟집 간판이 도무지 안 보이네? 이 근방에 원래 횟집이 없었던가?”
영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경서가 되물었다.
“뭐라고? 횟집 간판?”
“그렇다니까요. 식사할만한 횟집”
영우는 심드렁하게 답하며 계속 간판들을 살폈다. 수많은 음식점 간판들이 열병식이라도 벌이 듯 도열해 있었다. 중국집, 추어탕, 복국 집, 족발, 순대, 국수, 김밥, 어묵, 떡볶이, 오뎅, 라면, 등등. 하지만 그 흔하디흔할 것 같은 횟집은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거 참 이상하다. 바닷가가 아니라 그런가? 원래 이 골목에 횟집이 하나도 없었던가?”
영우가 별 의미 없이 혼잣말을 내뱉다가 무심코 뒤돌아봤다. 그리곤 깜짝 놀랐다. 경서가 오던 길을 대여섯 걸음 뒤처져 멈춰 선 채, 놀란 눈으로 영우를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서 뭘 하세요? 어서 오지 않고?”
그제야 경서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뭐야? 나한테 회를 사주려고? ”
“……?”
“그런데 오늘은 안 돼. 어제 밤에 배탈이 나 혼났단 말이야!”
순간, 영우는 멍해졌다. 할 말이 없어져버렸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이런 뜻밖의 오해가 다 생기다니? 그러자 경서가 보기 드문 회 마니아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정말이야, 나 배탈이 나서 회 먹을 수 없다니까. 미안해. 모처럼의 제의를 들어줄 수 없어서…!”
“…… 허, 참!”
영우는 이, 무슨? 싶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해봤자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아닌가!
“미안하다니까. 마음으로 먹은 걸로 할게. 근데 하필이면 오늘이야? 미리 애기도 없이”
경서는 기분이 좋아진 듯 활짝 웃었다. 영우는 입도 벙긋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가만있는 게 최선의 방법이리라. 대신 혼자 웃음을 참느라 혀를 깨 물어야 할 판이었다.
어정쩡한 기분을 감춘 채, 경서가 이끄는 추어탕 집으로 들어갔다. 제의를 못 받아주는 대신 자기가 추어탕을 사겠다는 것이었다. 오십대쯤으로 보이는 주인아주머니가 경서를 보고는 반갑게 맞았다.
“오랜만이네. 근데 이 시간에 어쩐 일? 선생님 간호하러 안 가고?”
“오늘 스승의 날 앞두고, 저녁 때 제자들이 몇 명 찾아온대요. 그때 시간 맞춰 가려고요.”
경서의 대답이 영우에겐 너무도 뜻밖이었다. 경서는 그저 별일 아니란 표정이었다.
“아빠가 치매증상으로 요양병원에 계시거든요. 저 여사장님 중학 은사님이고”
마치 남의 말 하듯 했다. 영우는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일요일마다 아빠한테 가거든. 그게 내가하는 봉사활동이야. 아빠가 건강했으면 정말 시집 안가고 못 배겼을 건데….”
영우는 농담 같은 경서의 말이 재미있기보다는 어리둥절했다.
“요즘도 정신이 조금 맑아지면 시집 안 간다고 닦달하신다니까”
경서는 밝은 표정으로 깔깔거렸다.
“정말, 강 부장 말마따나 영우씨한테 가 버릴까? 싶어도 예수쟁이라 안 되겠고…!”
또 다시 경서가 킥킥거렸다. 영우도 따라 웃었다. 웃다가 이내 정색하며 한마디 했다.
“방금 그 말씀 농담 아니죠?”
경서는 웃음을 멈추더니 영우를 빤히 쳐다봤다. 소주 두 잔의 힘인지 얼굴이 제법 발그레했다. 한차례 딸꾹질을 하는가 싶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이 순진하긴. 맹추같이. 농담도 구별 못해?”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졌다. 반주로 나눠 마신 소주 한 병이 낮술 값을 하는지 영우도 알딸딸하게 올라왔다. 경서가 먼저 온 병원 행 버스를 탔다. 영우는 차창 안으로 손을 흔들어주고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신호가 갔다.
“엄마, 저 어제 밤에 잘 왔어요. 그리고 거, 어, 며느리 감 예수쟁이도 괜찮아?”
“야가, 시방, 뭐라카노?”
“며느리 감 예수쟁이도 괜찮냐고요? 지난번엔 안 된다고 했잖아?”
“아이구, 이놈아! 니 주제를 그리도 모리나? 니 형편에 시방 떠신 밥 찬밥 가리기 생겼나? 으이?”
영우는 순간, 또다시 멍해졌다. 그러자 엄마의 속마음은 둘째 치고, 방금 일어난 일련의 일들로 풋~ 하고 목울대로 올라오는 헛웃음을 참아내기에 급급해, 후~~욱 길게 숨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 2016. 부산소설 제 13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