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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이매창과 더불어 조선 3대 여류詩妓로 불리지만 사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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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참고하였음
부용당(芙蓉堂) 김운초(金雲楚, 1813? -1861?)는 성천 출신의 기녀로 호는 운초요, 이름은 부용(芙蓉), 또는 추수(秋水)이다. 양반인 선고(先考)는 당호가 추당(秋堂)인데 일찍 여의었으며 깊은 학식을 갖춘 중부(仲父)밑에서 자상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58년이나 연상인 연천(淵川) 김이양(金履陽,1755-1845, 한성부윤 4회 역임, 함경도 관찰사.호조,병조,이조판서 역임) 을 만나 소실이 되면서 당시 명사들과 자리를 함께 하며, 타고난 시적 재능을 발휘하게 되고 많은 한시를 남겼다.
김부용(金芙蓉)은 평안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고 한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다고 하니 아마도 여간한 문재가 아니였던 모양이다. 열 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으니,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시명(詩名)을 운초(雲楚)라고 하는 부용은 한번 배우면 둘을 깨우칠 만큼 영특하였고, 용모도 몹시 고와서 뭇 사내들의 가슴을 태웠다고 한다. 열두살에 기적에 오르고, 열다섯살엔 시문과 노래와 춤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 천하의 명기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풍류객이 찾아와 재기를 칭찬하고, 수령의 수청을 독차지해 동료 기생의 시샘을 받았다.
열아홉살(1831년)이 되었을때 운초에게 일생의 전환기가 왔으니 성천에 신임 사또 류관준劉寬俊이 부임해 온 것이다. 그는 정사에만 힘쓰는 명관(名官)으로 운초의 특출한 용모와 재색을 아껴 자기 스승인 평양감사 김이양(金履陽)에게 소개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요즈음의 성상납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터이다. 선천부사쯤이야 하루아침에 목을 뎅겅 날려버릴 만한 권세를 가진 것이 평양감사라는 요직이고 매관 매직이 판을 치던 시대이니만치 자기 출세를 위해서 기생을 바쳤다는 게 적당한 표현이다.
김부용의 인생의 전부에는 김이양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 몹시도 가난하여 굶기를 밥먹듯하였다. 하루는 저녘도 못 먹고 굶고 자는데, 도둑이 들어 쌀이 없자 부뚜막을 헐고 솥을 떼어가는 소리가 났다. 부인이 남편을 깨워 살림살이의 전부인 솥을 가져 간다고 하자 김이양은, `오죽 가난하면 남의 집솥을 떼어가겠소. 우리보다 못한 사람인 것 같으니 내버려 둡시다` 하였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들은 도둑은 크게 깨달아 솥을 그냥 두고 갔으며, 그 후로 열심히 일하여 부자가 되었다. 훗날 김이양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옥당 학사(玉堂學士)로 있을때 은혜를 갚고자 찾아와 둘은 그 후 백년지기처럼 친하게 지냈다하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남긴 사람이다.
그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은 호가 연천(淵泉)으로, 풍채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예조 판서를 거쳐 평안감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그 때 성천부사로 부임해온 사또가 있었는데 신임사또는 정무가 대략 파악되자 운초를 데리고 평양으로 김이양을 찾아갔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가 오자 김이양은 그를 위해 대동강가 `연광정`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 자리에서 신임 사또는 부용을 소개하였는데, 그때 김대감의 나이는 이미 77세였고, 부용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의 인품을 흠모해 온 부용은 평양에 머물면서 김이양의 신변을 돌보아 드리라는 사또의 명에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고 하는데 천거에 대해 김이양이 거절하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여 부용을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김이양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부용을 끔찍히 사랑하였고, 부용 역시 연만한 늙은 감사의 공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두사람은 비록 김대감이 나이가 들어 남자 구실은 못해도 서로 마음을 나누며 정답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김이양이 호조 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게 되자 김이양은 직분을 이용하여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정식 부실(室)로 삼고는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서 한양으로 떠나 갔다.
생이별을 한 운초는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외로움과 그리움의 나날을 보냈다. 몇 달이 가도 소식이 없자 원망도 많이 하였다. 멀리 있는 님을 생각하니 때로는 보고도 싶고, 때론 잊지나 않았나 의심도 하고, 때론 걷잡을 수 없는 이별의 슬픔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부용은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하게 쓴 그 시가 바로 부용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부용상사곡`이라는 보탑시(寶塔詩)입니다. 왜 보탑시라고 하는 지는 이 시의 형태를 보면 잘 아실 것입니다.
芙蓉相思曲 부용상사곡
別。이별하오니,
思。생각납니다.
路遠。길이 멀어지니
信遲。소식이 더딥니다.
念在彼。맘은 임께 가있는데,
身留玆。몸은 여기에 남았네요.
羅巾有淚。손수건 펼치니 눈물이 솟고,
紈扇無期。접은 부채 꺼낼 날 기약 없네요.
香閣鐘鳴夜。영명사의 종소리 울리는 밤과,
鍊亭月上時。연광정에 밝은 달 떠오를 적에,
依孤枕驚殘夢。베개 하나에 누웠다 남은 꿈에 놀라고,
望歸雲悵遠離。구름 흘러오면 멀리 떨어져 쓸쓸합니다.
日待佳氣愁屈指。낮엔 만날 날 기다리며 손 꼽아 근심하고,
晨開情札泣支頣。새벽엔 정다운 편지 보며 턱을 괴고 우옵니다.
容貌憔悴把鏡下淚。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들면 눈물이 흐르고,
歌聲嗚咽對人含悲。노래에 흐느끼고 사람을 봐도 슬픔이 어립니다.
提銀刀斷弱腸非難事。은장도로 약한 목숨을 끊는 일은 어렵지 않고,
攝珠履送遠眸更多疑。꽃신 끌고 멀리 바라보는 일도 의심이 생기네요.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아침 기다리고 저녁 기다려도 임 소식은 없사옵고,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어제 안 오시고 오늘 안 오시니 첩이 홀로 속는지요.
浿江成平陸後鞭馬騎來否。대동강이 평지되면 말 타고 채찍질하며 오시렵니까.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긴 수풀이 바다로 변하면 첫 배에 올라서 건너시렵니까.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만남은 적고 이별은 많으니 세상 인정은 헤아릴 수 없고,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좋은 인연은 짧고 악연은 기니 하늘 뜻을 누가 알겠습니까.
雲雨巫山行人絶仙女之夢在某。함께 잠들던 곳 행인발길 멈췄는데 눈길 마주친 이 누구며,
月下鳳臺蕭聲斷弄玉之情屬誰。같이 노닐던 곳 피리소리 끊겼는데 정을 나누는 이 누군지요.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잊자 해도 잊지 못하여 부벽루 올라 예쁜 얼굴 늙어가 안타깝고,
不思自思乍倚牧丹峯每傷綠鬢衰。생각 쉬어도 절로 생각나 모란봉 기대 귀밑 솜털 쇠해져 상심하네.
獨宿空房淚縱如雨三生佳約焉有變。혼자 빈방에 잠들며 눈물을 비처럼 쏟아도 삼생가약 어찌 변하며,
孤處深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홀로 규방에 살면서 머리털 파처럼 희어도 백년결심 절로 옮길까.
罷晝眠開紗窓迎花柳少年總時無情客。낮잠 깨어 창문 열고 화류소년 맞아도 모두 무정한 손님이고,
推玉枕攬香衣送歌舞同春莫非可憎兒。베개 밀고 향옷 입고 가무하다 보내도 싫지 않은 남자는 없네.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천리 밖 임 그리는 아픔이여 군자의 얇은 정은 어찌 이런지요.
三時出門望出門望哀哉賤妾苦懷果如何。세 번씩 문 내다보는 슬픔에 천첩의 쓰린 가슴 과연 어떨까요.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관인한 대장부 속히 돌아와 예전 밤처럼 기꺼이 상대하시고,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孤魂月中泣長隨。연약한 여인이 눈물로 죽어 혼자 밤새워 울지 않게 하소서.
그들이 깊은 인연을 맺은지 15년이 되는 1845년 5월3일, 김대감은 91세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임종시 김대감은 부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는데, 이때 부용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임종이 다가오자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주오.` 라며 다시 못 올 불귀의 객이 되었다. 김부용의 묘소는 천안 광덕사 경내를 지나서 광덕산(태화산)으로 오르다보면 우측 계곡 건너의 양지바른 곳에 있다. 시인 김부용의 묘. 그 신분이 후실이었기로 사랑하는 님과 합장의 예우는 받지 못하였지만 지아비로 모시던 그 사람의 바로 아래에 있다. 운초의 시집은 현재까지 5종이 소개되어 약 350여 수의 한시가 전한다.
김이양의 시
운초에 주노라 (贈雲楚)/
왕년에 오강 땅에서 인연 맺었고 珪世吳中始定緣
금년에 또 해서 물가에 함께 있노라 今年又在海西邊
나와의 만남 늦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니 我聞嗟晩逢謙益
번소도 끝끝내 백난천을 못 떠났소 樊素終難謝樂天
술 따르는 얌전함이 세속 상대보다 어질고 酌酒猶賢俗呂對
시에 대한 소견은 당나라 때 못지 않네 論詩不下開元前
고용한 밤 책상 기대 읊은 소리 맑고 밝아 閑宵隱几流淸聽
시경 빈풍 칠월편을 낭랑히 외고 있네 朗誦豳風七月篇
<희롱삼아 운초에 주다> <戱贈雲楚>
문 앞에 연리수가 있는데 門前連理樹
까치 한쌍 나무위에 둥지를 틀어 다정하네 樹上雙鵲巢
지게 창문 마주놓고 그윽히 비추이고 戶牖相隱映
가지와 줄기에 은밀하게 사귀네 枝幹密縡交
운초가 연천을 애도하는 시
15년 함께 지내오다 오늘 돌아가시니
백아가 이미 끊은 거문고 내 다시 끊노라
※ 다른 주장
김부용에 관한 오해를 유포시킨 것은 소설가 정비석이었다.
그러나 그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우리들의 관심과 기억 속에
머물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해들을 정리해보자.
1. 김부용은 연천당 김이양과 58년을 뛰어넘는 사랑을 했다. 김부용 19세, 김이양 77세.
김부용의 시를 보면 연도가 표기된 것들이 많다. 그 연도를 근거로 그녀의 생년을 추정해보면
1790년경으로 나온다. 김이양은 1755년생이므로,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35년이다.
2. 김이양은 평안감사 때 그의 제자이자 성천부사인 유관준으로부터 부용을 소개받았다.
그런데 김이양은 평안감사를 한 적이 없다. 함경감사를 했을 뿐이다. 함경감사 시절인
1812년에서 1815년이 김이양과 부용이 만난 시기일 가능성이 크다. 이때 부용은 22세였고
김이양은 57세였다. 평안도의 북쪽, 함경도 부근인 평북 구성에서 두 사람은 가끔 만난 듯 하다.
3. 김이양이 평안감사 이전에 판서를 한 적이 있어 그를 대감으로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김이양은 함경감사 이전에 판서를 한 적은 없다. 부용과 헤어져 서울로 갈 때 예조판서로
발령이 났고, 또 부용을 부르기 몇년 전, 은퇴를 할 무렵에도 예조판서 직책을 맡고 있었다.
4. 김부용이 서울로 갈 무렵에도 김이양이 현직 벼슬을 갖고 있었다.
김이양은 1827년에 은퇴하고 봉조하라는 명예직을 제수받았다. 김부용이 부실이 되는 1831년이나
서울로 가는 1832년엔 이미 프리한 신분이었다. 그가 '녹천당'을 짓기 시작한 것은 은퇴한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5. 김이양과 김부용은 나이를 넘어서서도 육체적인 사랑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이 육체관계에 대해 쉽게 말할 수는 없으나, 김부용이 김이양에 대해 호감을 쌓은 것은
그녀의 시적 재능을 인정해주는 점 때문이었던 듯 하다. 녹천당 시절 이후 김이양은
부용의 패트런에 가까운 존재였다. 당시 시단의 교류를 주선하고 장려한 것도 김이양이었다.
김이양은 아내 원산 이씨에게서도 자식이 없었고, 부용과의 사이에도 혈육은 보이지 않는다.
불임의 원인이 그에게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이 그에게 삶의 무상을 깨닫게 해줬을 수도 있다.
함경감사 시절 부용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세간의 오해가 있었을 수 있다. 권력을 이용해
기생을 탈취했다는 혐의가 그것이다. 고대소설 '부용상사곡'은 그런 시선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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