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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7강 -1(2009.11.02)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큰스님 법문 14-22 主客相見(주객상견) 道流(도류)야 如禪宗見解(여선종견해)는 死活循然(사활순연)하나 參學之人(참학지인)이 大須子細(대수자세)어다 如主客相見(여주객상견)할새 便有言論往來(변유언론왕래)호대 或應物現形(혹응물현형)하며 或全體作用(혹전체작용)하며 或把機權喜怒(혹파기권희노)하며 或現半身(혹현반신)하며 或乘師子(혹승사자)하며 或乘象王(혹승상왕)이니라 如有眞正學人(여유진정학인)이 便喝(변할)하야 先拈出一箇膠盆子(선염출일개교분자)하면 善知識(선지식)이 不辨是境(불변시경)하고 便上他境上(변상타경상)하야 作模作樣(작모작양)하면 學人便喝(학인변할)에 前人不肯放(전인불긍방)하나니 此是膏肓之病(차시고맹지병)이라 不堪醫(불감의)니 喚作客看主(환작객간주)니라 或是善知識(혹시선지식)이 不拈出物(불염출몰)하고 隨學人問處(수학인문처)하야 即奪(즉탈)이라 學人被奪(학인피탈)에 抵死不放(저사불방)하나니 此是主看客(차시주간객)이니라. 임제록 오늘 공부는 61쪽 시중 14-22부터 할 차례입니다. 임제록은 그 종지가 모든 사람 사람들의 주체성을 잘 인식해서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하는 그런 메세지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그런 뜻입니다. 주체성을 확립한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많은 것에 눈을 돌리면서 삽니다. 수많은 것에 눈을 돌린다는 것은 다른 어떤 환경이나 사물 이런 것들도 그 속에 포함되겠지마는 그것보다는 여기서는 어떤 사상과 가르침, 주의, 주장, 이런 것들을 뜻하는 거죠. 그래서 일반적인 그런 가르침에서부터 그야말로 불보살 내지 조사스님들, 불조에 이르기까지 아주 고차원적인 이 지상에서의 최고 경지를 가르치는 그런 분들에게까지 우리가 눈을 돌리게 되고 그러다보면 거기에 빠지게 되고 물론 성인들의 가르침은 참 위대한 것이고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마는 그러나 나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하는 것이 임제록의 종지입니다. 임제록의 가르침도 임제록의 가르침이 대단하지마는 그 사이사이에 그런 것을 많이 봤죠. 내 말에도 속지 말라, 끄달리지 말라, 이런 뜻입니다. 참 중요한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일단은 성인의 가르침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궁극에 가서는 결국은 내가 우선이고 내가 주인이다, 부처님보다도 조사스님보다도 내가 우선이다 하는 그런 내용이 임제록의 특징이 됩니다.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은 우리가 아무리 부처님을 모시고 살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 그리고 숱한 성인들, 보살님들, 이런 이들을 우리가 우리 정신 속에 많이 모시고 사는 것은 사실이지마는 좀 더 다른 차원에서 보면은 그런 것으로부터도 벗어나야 한다 거기에 집착하거나 끄달리거나 매달려서 자기 주체성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하는 그런 내용이죠. 그래서 뭐 살불살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그건 이제 죽인다는 말은 부정한다 하는 뜻입니다. 거기 끄달리지 않고 거기에 빠지지 아니하고 나는 어디까지나 나로서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서 당당하게 주체성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죠. 오늘은 主客相見이라고 했는데 여기는 선지식과 학인 간의 만났을 때 법을 거량하고 그 법을 통해서 제대로 눈이 밝고 어두운 것, 선지식이 밝은가 학인이 밝은가 아니면 선지식하고 학인하고 둘 다 밝은가 아니면 둘 다 어두운가. 이런 것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 다음 단락까지도 그런 내용으로 이어져 있어요. 우리가 뭐 평교간에도 아무리 수준이 없는 우리들 사이라 하더라도 각자 수행이 있고 공부가 있고 그 나름의 불교관이 있고 신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해보면은 그 사람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고 불교에 대한 신심이 어느 정도다 하는 것을 그냥 알 수가 있어요. 서로 이렇게 알 뿐이지 달리 어떻게 침범하지도 못합니다. 또 바로 잡지도 못해요, 사실은. 각자 자기의 관점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지. 그런 과정에서 어느 날 스스로 눈을 뜨게 되고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가능하지마는 누가 이렇게 특별히 뭐 네가 틀렸으니까 이렇게 해야 된다, 어떤 신심의 문제라든지 불교에 대한 이해라든지 이런 것들도 사실은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꾸 종합하다 보면은 자기의 견해가 차츰차츰 교정이 되는 거죠,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교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사실 순조로운 거에요. 누가 뭐 일대일로 만나가지고 네가 그 소견이 틀렸으니까 그거 고쳐라 라고 이런 식으로 윽박질러 가지고는 그게 고쳐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와 객이 서로 보다 서로 만나다 이런 뜻이죠. 道流(도류)여 如禪宗見解(여선종견해)는 死活循然(사활순연)이다, 그랬어요, 사활순연이다. 선종의 견해는 죽음과 삶이 또는 삶과 죽음이 서로 쫓아간다, 서로 돈다, 서로 의지한다, 이런 뜻입니다. 죽고 살고 또 살고 죽고 이것이 끊임없이 바뀌는 그런 뜻을 循然(순연)이라 그렇게 해요. 그러니까 參學之人(참학지인)은, 공부하는 사람은 그런 말이죠. 大須子細(대수자세)어다, 크게 모름지기 그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살필지어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살았다 하더라도 금방 죽고 또 물론 죽어서 또 태어나고요 그건 이제 일생으로 보아도 그렇지마는 현재 하루를 사는 동안도 사실은 우리 의식 속에서 여러번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우리 육신을 보더라도 우리들의 세포는 끊임없이 죽고 살고 죽고 살고 새로운 것은 태어나고 또 오래된 것은 죽고, 끊임없이 사실은 선종견해가 아니더라도 어떤 물질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역시 사활이 순연하는 거요. 계속 뒤바뀌고 돌고 돈다 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그 문제에 대해서 좀 면밀히 또 자세하게 관심을 가지고 살필 필요가 있다. 그래놓고 예컨데 主客(주객)이 相見(상견)할새 주인과 객이, 선지식과 나그네 아니면 학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서로 볼 때. 便有言論往來(변유언론왕래)호대, 곧 언론이 있어서 왕래한다 이 말이여. 예를 들어서 어디서 오셨습니까. 북방에서 왔습니다. 북방의 불교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흔히 객으로 만나면은 뭐 어느 산중에 살았느냐, 대중은 어땠느냐, 생활은 어땠느냐, 거기는 다른 어떤 조실 스님의 법은 어떻냐, 이런 것을 물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들이 있다 하는 것이 或(혹)입니다. 或應物現形(혹응물현형)하며 或全體作用(혹전체작용)하며 或把機權喜怒(혹파기권희로)하며 或現半身(혹현반신)하며 或乘師子(혹승사자)하며 或乘象王(혹승상왕)이니라 그랬어요. 이것이 주객이 만났을 때, 뭐 객과 객이 만나든, 주인과 주인이 만나든, 저 밑에 초심자인 학인과 학인이 만나더라도 이런 사례들은 있을 수 있다 하면서 그걸 이제 몇 가지를 소개를 했네요. 應物現形(응물현형) 그랬어요. 어떤 사물에 맞추어 가지고서 형상을 나타낸다. 이건 그 사람의 모습이라든지 아니면은 다른 어떤 제삼의 사물을 통해 가지고 자기를 표현할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뭐 걸망을 가지고 표현할 수도 있고 주장자로서 무슨 뭐 염주로서 아니면 휴대하고 다니는 무엇으로서 또 이제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거죠. 혹은 全體作用(전체작용)한다, 예를 들어 사물로 표현해도 역시 그 사람의 한 부분이고 한 내용이라는 사실이죠. 또 전체작용이라고 하는 건 이건 선가에서 아주 독특하게 쓰는 건데 자기의 모든 것을 통틀어서 드러내 놓는 거, 이걸 ‘전체작용’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을 가서 뵙고 어떤 것이 불법적적대의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황벽스님은 다짜고짜 몽둥이를 후려 쳤습니다. 몽둥이를 가지고 이십 방망이나 그냥 사정없이 후려쳤거든요. 그것은 그 사람이 나빠서 때린 것도 아니요 뭐 아프라고 때린 것도 아니고 그저 황벽스님이 가지고 있는 불법이라고 할까, 황벽스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보인 거. 이것이 이제 전체작용이라는 것입니다. 그건 뭐 내면의 체가 됐든지 아니면 바깥으로 드러나는 작용이 됐든지 간에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 이걸, 이제 소위 전체작용 이렇게 이야기하고 그걸 대기대용(大機大用), 다른 표현으로 하면 그런 표현도 쓰고 그렇습니다. 혹은 把機權喜怒(파기권희로)한다 그랬어요. 기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계기, 하나의 방편, 아니면 어떤 말을 던진다든지 아니면은 예들 들어서 욕을 한 번 한다든지 농담을 한 번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다 기권에 해당됩니다. 그것을 잡아서 기뻐하는 모습도 보이기도 하고 또 성내는 모습도 보이기도 한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화도 내고 하는 그런 예도 있고, 서로가 만나서. 또 或現半身(혹현반신)이야. 혹 어떤 사람은 전체작용이 아니라 조금, 자기를 조금만, 공부가 됐든지 뭐가 됐든지 간에 조금만 나타내 보이는 그런 예들도 있고. 或乘師子(혹승사자)한다, 혹은 사자를 탄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랬어요. 이건 어떤 지혜를 상징하죠. 상왕은 보현이고 사자는 문수니까 으레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지혜를 보이기도 한다. 탔다고 하는 말은 바로 지혜의 내용을 보이기도 하고 或乘象王(혹승상왕)이라, 코끼리를 탄 것을 보이기도 한다 하는 것은 보현의 실천면을 보이기도 하는… 여긴 아주 상징적으로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마는 그 당시, 임제스님 당시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들을 이렇게 응물현형하고 전체작용하고 파기권희로하고 혹현반신하고 혹승사자하고 혹승상왕 하는지 그건 뭐 정확하게는 알 수는 없습니다. 대강 주인과 객이 만났을 때 이러이러한 사례들이 있을 수가 있다. 그래 놓고 예컨대, 眞正學人(진정학인)이 있어, 참다운 학인이 있어 가지고서 ‘진정학인’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눈밝은 학인’ 이런 뜻입니다. 뭐 객으로 간다고 해서 다 눈이 어두우란 뜻도 없고 조실로 앉아 있다고 해서 다 눈이 밝아란 의미도 아닙니다. 여기는 이제 그래요. 진정학인이 있어서 便喝(변할)이라, 곧 할을 해서, 할을 해 가지고 拈出一箇膠盆子(염출일개교분자), 일개 아교 항아리를 내놓는다 이거요. 아교 항아리. 아교 항아리가 아교 항아리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서 눈 밝은 학인이 할을 탁 하면은 눈 어두운 선지식은 예를 들어서 그걸 이제 물고 늘어지는 거야. 그걸 소화시키지 못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거지. 그러니까 그게 아교 항아리가 되는 거요. 아교는 거기 손을 댔거나 무슨 나무를 꽂거나 하면 거기 붙어서 안 떨어진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사람이 하나의 문제를 던졌을 때 그 문제에 그냥 거기 뭐가 있는가 싶어가지고 매달려 가지고 꼼짝 달싹 못하는 것을 선가에서 이런 표현 합니다. 그렇게 아교 항아리를 내놓을 거 같으면은 할을 하든지 방을 하든지 善知識(선지식)이 不辨是境(불변시경)이라, 이 경계를 분별하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학인은 눈이 밝고 선지식은 오히려 눈이 어두운 경우거든요. 알지를 못하고서 便上他境上(변상타경상)하야, 바로 저 경계 위에, 할을 했다면 할이 또 경계가 되니까, 그 경계 위에 올라가 가지고서 作模作樣(작모작양), 모양을 짓는다, 이리 헤아려보고 저리 헤아려 보고. 이게 무슨 나를 떠보자는 할인가 아니면 대기대용의 할인가, 아니면 이 속에, 할 속에 무슨 큰 깊은 뜻이 있는가, 이런 식으로 헤아려 보는 거요, 작모작양 그래요, 모양을 짓는다 이 말이죠.. 그렇게 할 거 같으면 궁리를 하는 이런 얘기죠, 별별 사량 분별로서 궁리를 하면은. 學人(학인)이 便喝(변할)이야, 학인이 이제 되도 않았다고 생각을 하고 거기서 한번 꾸짖는 할을 곧 하게 되겠죠. 그래도 그 사람은 선지식은 前人(전인)은 不肯放(불긍방)이야, 앞에 있는 사람은 기꺼이 그 할을 놓을려고 안한다 이 말이야. 앞에 한 그 할을 놓을려고 하지 아니해. 그런 예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건 평입니다. 此是膏肓之病(차시고맹지병)이다, 이것은 이제 저기 깊숙이 사량 분별하는 그 습관, 그것이 그만 습관화 돼 가지고 뭐든지 사량분별할려고 하는.. 선에서는 특징이 직관 아닙니까. 뭐든지 바로 그 순간 딱 이해되고 바로 거기에 눈이 떠지고 그것이 그저 바로 말이 떨어지기 이전에 와 닿는 것, 와 닿으면서 바로 이해가 되고 거기서 회답이 나가는 것, 그렇게 돼야 되는데 이건 사량분별하니까 작모작양, 온갖 사량분별로 궁리를 다 하니까 그런 것은 하나의 병이야, 그것을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해서 고맹지병이라고 한다 말여. 이것은 고칠 수 없는 아주 중한 병이다, 속병이다. 不堪醫(불감의)니, 능히 치료할 수 없나니, 치료할 수 없나니. 이것을 뭐라고 부르는고 하니 喚作客看主(환작객간주), 이렇게 부릅니다, 객간주. 객이 주인을 본다, 간파한다, 이런 뜻이니까. 객이 눈이 밝고 선지식이 눈이 어두운 경우죠, 이건. 그래 客看主(객간주) 그래요. 객간주라고 불러진다. 그게 한가지이고. 그 다음 두 번째 예는 或是善知識(혹시선지식)이 不拈出物(불염출몰)하고, 선지식이 어떤 사물도 내놓지 아니해. 질문도 없고 아무 것도 안해. 그러고 있다가 학인이 와서 묻는 것을 따라 가지고서( 隨學人問處(수학인문처)) 即奪(즉탈)이야, 바로 빼앗아 버려, 부정해버린다, 학인이 뭐라고 물으면은. 그러니까 학인이 찾아 오면은 가만히 있는 거야 선지식은. 그냥 요지부동으로 가만히 있는 거야. 그러면 학인이 답답하니까 물을 거 아녀. 물으면은 곧바로 그 학인의 질문을 부정해 버리는 것, 즉탈. 그럼 학인이 그 부정함을 입어서, 빼앗음을 입으매.(學人被奪(학인피탈)) 抵死不放(저사불방)이야 죽자고 놓지 않는 거야, 자기 질문한 거. 내가 예를 들어서 불법이 뭐냐고 물었으니까 불법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십시요 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물고 늘어지는 것을 抵死不放(저사불방)이라고 그래. 하나니, 此是主看客(차시주간객)이니라. 이것은 주간객, 주인이 객을 간파한, 다시 말해서 선지식이 눈이 밝고 학인은 눈이 어두운 경우. 이런 뜻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삿되고 바른 견해를 알라’ 라고 제목을 그렇게 달았는데 14-23 삿되고 바른 것을 알라 或有學人(혹유학인)이 應一箇清淨境(응일개청정경)하야 出善知識前(출선지식전)이어든 善知識(선지식)이 辨得是境(변득시경)하고 把得抛向坑裏(파득포향갱리)하면 學人言(학인언) 大好善知識(대호선지식)이로다 即云(즉운), 咄哉(돌재)라 不識好惡(불식호오)로다 學人便禮拜(학인변예배)하나니 此喚作主看主(차환작주간주)니라 或有學人(혹유학인)이 披枷帶鎖(피가대쇄)하야 出善知識前(출선지식전)하면 善知識(선지식)이 更與安一重枷鎖(갱여안일중가쇄)라 學人歡喜(학인환희)하야 彼此不辨(피자불변)하나니 呼爲客看客(호위객간객)이니라 大徳(대덕)아 山僧如是所擧(산승여시소거)는 皆是辨魔揀異(개시변마간이)하야 知其邪正(지기사정)이니라 세번째, 或有學人(혹유학인)이, 혹 어떤 학인이 應一箇清淨境(응일개청정경)하야, 하나의 청정한 경계에 응해서. 出善知識前(출선지식전)이어든, 선지식 앞에다가 떠억 내 놓는다 이거야. 청정경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고차원적인 모습. 뭐 손가락을 들어보인다든지 아니면은 법거량이 아주 우수한 법거량일 경우, 그걸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善知識(선지식)이 辨得是境(변득시경)하고, 이 경계를, 무슨 거량을 하든지 그 경계를 그냥 알아봐. 이해해버린다 이거여. 그리고는 그것을 把得抛向坑裏(파득포향갱리)라, 구덩이 속에다 그것을 잡아서 던져버려. 뭐라고 한마디 질문을 하면은 거기에 대해서 벌써 이해를 하고는 그것을 폐기해 버린다 이겁니다. 물고 늘어지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 學人(학인)이 말하대 大好善知識(대호선지식)이로다, 야, 훌륭한 선지식입니다. 그렇게 이제 말한다 이거요. 그러면 곧 또 말하기를(即云(즉운)), 咄哉(돌재)라 不識好惡(불식호오)로다, 안됐다, 호오를,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함이로다, 이렇게 또 한마디 선지식이 던지는 거죠. 그러면 學人(학인)이 便禮拜(변예배)라, 요건 대화가 순조롭게 잘 진행된 거요. 그러면 이것을 此喚作主看主(차환작주간주), 주인이 주인을 보는 경우다, 이런 말인데 이것은 이제 학인도 눈이 밝고 객도 눈이 밝다, 이런 뜻이 됩니다, 이것은. 그 다음에 或有學人(혹유학인)이, 또 어떤 학인이 披枷帶鎖(피가대쇄), 가쇄를 짊어지고 이런 말이죠, 쇠고랑을 딱 차고, 바로 자기 스스로 어떤 한 경계에 묶여 가지고 우정 이제 나타나는 거지. 그럴 때 선지식 앞에 나올 거 같으면(出善知識前(출선지식전)) 善知識(선지식)이 更與安一重枷鎖(갱여안일중가쇄)라, 다시 일중가쇄를 더한다 이 말이여. 아 이 벌써 오는 사람이 학인이 벌써 뭔가 석고대죄라고 예를 들어서 몽둥이를 짊어지고 나타나면은 거기다 몽둥이를 하나 더 해주는 형식으로. 차원이 상당히 높죠 이거는 벌써. 일중가쇄여. 한번 더 거기다가 가쇄를, 쇠고랑을 더 채우는 거죠. 그러면 學人(학인)이 歡喜(환희)해서, 彼此不辨(피차불변)하니, 학인이 환희해갖고 피차가 나누어지지 않느니 呼爲客看客(호위객간객)이니라 이건 객이 객을 보는 경우다. 이게 그렇게 했어요. 그럼 이것도 이제 객이 객을 간파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둘 다 눈이 밝은 경우를 이제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그래요. 여기서 不辨(불변)이라고 하는 걸 보면은 둘 다 눈이 어두운 형식으로 돼 있지마는 사실은 가쇄를 짊어지고 가는데 일중가쇄, 가쇄를 더하는 것으로 보면은 이것은 둘다 눈이 역시 앞에서처럼 밝다, 밝은 것으로 봐야 옳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大徳(대덕)이여 山僧如是所擧(산승여시소거)는, 산승의 이와 같은 것을 들어서 소개하는 것은 皆是辨魔揀異(개시변마간이)하야, 말을 가리고, 異, 다른 것, 정법과 다른 것을 가려서 知其邪正(지기사정)이니라, 邪와 正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 동안 법문이 대개 순조롭다가 간혹 이렇게 늘 선지식은 학인을 만나고 또 학인은 늘 선지식을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 가고 하니까 그래서 이런 법문이 사이에 끼여져 있습니다. 이제 그 동안 해 왔던 법문식으로 임제스님의 아주 뭐라고 할까, 특색있는 당신의 본심에 의한 그런 내용이 나오죠. 14-24 신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道流(도류)야 寔情大難(식정대난)이요 佛法幽玄(불법유현)이나 解得可可地(해득가가지)니라 山僧竟日(산승경일)에 與他説破(여타설파)나 學者總不在意(학자총부재의)하고 千徧萬徧(천변만변)을 脚底踏過(각저답과)하야 黒沒焌地(흑몰준지)로다 無一箇形段(무일개형단)하야 歴歴孤明(역력고명)이언만 學人信不及(학인신불급)하고 便向名句上生解(변향명구상생해)하야 年登半百(연등반백)토록 秖管傍家負死屍行(지관방가부사시행)하며 檐却檐子天下走(담각담자천하주)하나니 索草鞋錢有日在(색초혜전유일재)로다 신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그랬습니다. 道流(도류)야 寔情(식정)은 大難(대난)이요 이건 식정이라고 하는 것, 情, 뜻이라고 하는 인간의 의식은, 이런 말이여. 알음알이, 情 자는 그런 뜻이에요. 그것은 큰 문제다 하는 것이죠 대난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불법은 아까도 말했듯이 특히 선종견해는 직관을 우선으로 해서 바로 보고 바로 판단하고 바로 깨닫는 것을 선종의 특징으로 보는데 사량분별을 하고 알음알이를 굴리면은 이건 문제가 복잡해지는 거죠. 그래서 大難(대난)이라 그랬습니다. 佛法(불법)은 幽玄(유현)이나, 반대로 불법은 아주 깊고 깊은 것이다. 解得(해득)하면 可可地(가가지)니라, 불법은 유현하기 때문에 그 불법을 제대로 이해할 거 같으면은 아주 훌륭하고 참 좋은 일이다 그런 말이죠. 山僧(산승)이 竟日(경일)에, 산승이 하루가 다 가도록 與他説破(여타설파)나 저 사람들하고 설파하기는 하나 學者總不在意(학자총부재의)하고, 학자들이 그것을, 내가 말하는 것을 문제삼지 않고. 무슨 이야기를 주로 했는고 하니 사량분별, 알음알이, 인간의 의식으로 끌려가면은 이건 큰 문제다 하는 그런 걸 가지고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부재의야, 總不在意(총부재의)야, 도대체가 마음에다 그것을 문제삼아 두지 않고 천편만편, 천번 이야기하고 만번 이야기 해도(千徧萬徧(천변만변)) 脚底踏過(각저답과)해서, 다리 밑으로 흘려보낸다 라고 하는 말은 예를 들어서 지나쳐버리고. 黒沒焌地(흑몰준지)로다, 아주 캄캄해서 불빛하나 없다, 焌(준) 자는 불땔 때 불이 한번씩 반짝반짝하고 크게 불빛이 튀거나 그래서 불빛을 환하게 밝히고 하는 그런 준 자거든요. 전혀 낌새도 안보인다 하는 것입니다. 불이 타다가 한번씩 바짝바짝 이렇게 튀어가지고 환하게 밝을 그런 때도 있어야 되는데. 내가 그렇게 의식의 문제, 알음알이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도 천편만편을 다 지나쳐버리고는 한번도 눈을 바짝 뜨는 그런 예를 못보겠다. 그래서 뒤에 이제 그렇게 공부해 가지고는 신 값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하는 말이 나오기 전이죠. 無一箇形段(무일개형단)하야 歴歴孤明(역력고명)이언마는, 우리의 참 주인공은, 무위진인은, 뭐 그런 표현이죠. 무일개형단이라, 하나의 조그마한 모양도 없는 거, 무위진인, 우리의 참사람은 조그마한 형상도 없는데 그러면서 역력고명하건마는 아주 분명하고 이렇게 대명천지 밝은 날 처럼 우리의 마음 작용은 이렇게 환해. 그런데 그 사실에 대해서 도대체 이해가 없고 믿을려고 하지 않는다, 이게 이제 참 임제스님이 제일 이야기 많이 하는 거에요. 무일개형단, 그러면서 역력고명해서 내가 이런 말 하면 이 말 이해하고 저 말 하면 저 말 이해하고 추우면 추운 거 이해하고 더우면 더운 것 이해하고 역력고명해, 너무도 이 마음자리 하나 (그렇게 표현합시다, 쉽게.) 무위진인자리 그거 하나는 이렇게 확실한데 학인들이 그것을 믿지를 아니해(學人信不及(학인신불급)) 그 사실에 대해서 믿지 않고 엉뚱한 데 자꾸 찾아가는 거여. 便向名句上生解(변향명구상생해)해서, 곧 명구를 향해서 알음알이를 낸다. 명구상을 향해서, 그러니까 경전에 아주 뭐 고준한 말들 많죠. 어록에도 아주 좋은 말 많고 얼마나 기가 막힌 말들 많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명구, 그 좋은 말들, 성인의 말들을 쫓아다니면서 알음알이를 내는 거야. 그 알음알이가 문제인데 年登半百(연등반백)토록,나이가 반백이 되도록 그러니까 오십 년이, 출가해서 불법 공부한지 오십 년이 되도록, 秖管(지관), 다만. 傍家(방가)로, 옆집으로. 정말 자기 자신, 참 주인공은 그 자리에 가만히 둔 채 옆집으로 옆집으로 그냥 負死屍行(부사시행)이라, 송장을 짊어지고 돌아다니기만 한다. 그래서 檐却檐子天下走(담각담자천하주)하나니, 그 죽은 몸뚱이라고 하는 그 자기 주인공을 놓쳐버리면은 이게 숨만 쉬는 죽은 사람이다, 우리 선가에서 그런 말 잘 하잖아요. 숨만 쉬는 죽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죽은 시체야, 담자라고 하는 것은. 한 짐 짐 덩어리거든요. 죽은 시체를 짊어지고 천하로 돌아다니나니 索草鞋錢有日在(색초혜전유일재)로다, 초혜전을 찾을 날이, 짚신 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제 표현한 것입니다. 아주 이 法本 한 단락은 아주 중요한 뜻이 포함돼 있어요. 말하자면 식정대난이다 그랬어요 처음에. 알음알이가 아닌. 지금 우리는 알음알이나 의식으로 이해를 하지마는 언젠가는 의식과 알음알이를 초월한 바로 직관으로, 예를 들어서 우리가 사과를 보면은 거기 뭐 이게 사과인가 뭔가 무슨 생각이 있습니까, 바로 딱 사과라고 생각하고 밥이 들어오면 딱 밥이라고 그냥 거기 아무 뭐 다른 사량분별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알듯이, 그런 말이에요. 그렇게 모든 존재의 실상을 알아야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내가 수없이 말했건마는 그걸 그냥 흘려보내기만 하고 불빛 한 번 반짝하지도 않는다 말여. 그러면서 이제 정말 진정한 그대의 주인공은 무일개형단이며 고명하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이 믿지 못하고 바깥의 그 좋은 성인들의 말씀, 그것만 쫓아다닌다, 오십 년토록 이 시체, 시체 짊어지고. 정신이 없다는 말이죠, 시체 짊어지고 다닌다는 말은 제정신 없다, 그야말로 차별없는 참사람, 무위진인을 망각한 채 수처작주하지 못하고 망각한 채 그렇게 세월만 보내니 짚신이 얼마나 닳겠느냐, 짚신 값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이런 표현입니다.
첫댓글 無一箇形段(무일개형단)하야 歷歷孤明(역력고명)이언만 擔却擔子天下走(담각담자천하주)하나니 索草鞋錢有日在(색초혜전유일재)로다.ㅡ 우리의 참 주인공(無位眞人)은 하나의 형상도 없지만 너무나도 분명하고 마음작용이 밝고 환한데 믿지 못하나니 수처작주하지 못하고 돌아 다니며 짚신 값을 갚을 날이 있을것이다. 禪慧珠보살님 고맙습니다. _()()()_
_()()()_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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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진인을 망각한 채 수처작주하지 못하고 그렇게 세월만 보내니 짚신이 얼마나 닳겠느냐, 짚신 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禪慧珠 님!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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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주객상견,
임제록의 종지 --- 모든 사람 사람들의 주체성을 잘 인식해서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라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無一箇形段하야 歴歴孤明이라. 이 것뿐이고 나머지는 다 이 것의 그림자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궁극에 가서는 결국은 내가 우선이고 내가 주인이다, 부처님보다도 조사스님보다도 내가 우선이다 하는 그런 내용이 임제록의 특징이 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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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一箇形段 歴歴孤明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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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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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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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_()__()_
감사합니다()
索草鞋錢有日在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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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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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