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周時經, 1876~1914)은 개항과 식민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보급함으로써 국민을 계몽하고 나라의 자강과 독립을 도모하려 한 한글학자이다. 그의 국어관과 연구성과는 이후 제자들을 통해 계승되어 현재까지도 남북 한글 체제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주시경은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1876년, 상주 주씨 주세붕(周世鵬)의 후예로 황해도 평산군에서 훈장을 하던 아버지 학원(鶴苑)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상호(相鎬)이고, 호는 순우리말인 ‘한힌샘’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13세 되던 1889년에 큰아버지 학만(鶴萬)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나왔다. 주시경이 한글 연구에 뜻을 세운 것은 1892~93년경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울 때 먼저 한자 음대로 읽고 다시 그 뜻을 우리말로 해석하는 것을 보고, 처음부터 우리말로 적으면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 그 계기였다. 이후 주시경은 1894년 9월에 배재학당 특별과에 입학했으나, 남대문시장에서 해륙물산상회를 운영하던 양아버지를 돕다가 탁지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제물포 이운학교(利運學校)에 입학, 속성과를 졸업했다(1895.8~1896.3). 졸업 후 마산 지사장으로 내려갈 예정이었지만, 학교와 지사가 폐지되자 1896년 4월 배재학당에 재입학, 1898년에 역사지지 특별과를, 1900년에 보통과를 졸업했다.
신학문의 중심지였던 배재학당에서의 경험은 주시경의 이후 활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영문법을 공부하며 언어학의 이론을 정립했을 뿐 아니라, 세계지리와 역사를 가르치던 서재필이 주도한 협성회와 독립협회에 참여하며 애국계몽사상을 고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협성회는 배재학당의 학생단체로 매주 시국 토론회와 연설회를 개최했는데, 주시경은 한글로 간행된 『협성회회보』의 편집을 맡았다. 또한 독립협회가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신문 『독립신문』의 회계 및 교정을 맡아, 1896년에는 신문의 한글 표기를 합리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독립신문사 안에서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결성해 한글을 연구하면서, 한글을 전용하고 맞춤법을 제정할 것을 주장하는 등 실제적 측면에서 국어 연구를 본격화했다.
배재학당 졸업 후에는 여러 신식 학교들에서 국어 및 역사, 지리, 수리 등을 가르치면서, 1900년에는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토지 측량을, 1906년부터 3년간은 유일선(柳一宣)이 세운 정리사(精理舍)에서 수학과 물리를 배우는 등 이과 계통의 학문을 수학하였다. 이러한 자연과학적 학문 방법을 익힌 것이 주시경이 분석적으로 국어를 연구한 배경이 되었다.
1907년에는 지석영(池錫永)이 만든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4개월간 활동했고, 같은 해 7월부터는 지금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학부에 설치된 국문연구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국문연구소는 국문의 원리와 연혁, 현재의 상태와 장래의 발전 방법 등 한글 전반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 단체로, 1909년까지 총 23회의 회의를 거듭하고 일반의 견해도 모아서 의견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재정난과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한글 철자법을 공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일제 치하에서는 조선어 교육을 계속하는 동시에, 최남선(崔南善)이 조선의 고서를 간행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국어와 관련된 고서를 교정하고 국어사전의 편찬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주시경이 한글 교육의 본거지로 삼았던 상동교회는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었다. 실제로 주시경과 그 제자들 중에는 대종교 신도가 되거나 상동교회와 신민회를 매개로 이후 상해파 고려공산당 등 초기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등, 문화운동을 넘어 정치 혁명을 지향한 사람도 있었다. 결국 주시경은 이때 국외 망명을 결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급격한 복통을 호소하며 앓다가 1914년 7월,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가족으로는 21세인 1897년에 결혼한 부인 김명훈과 그 사이에서 낳은 2녀 3남이 있다.
주시경이 처음 한글 전용을 주장한 것은 우리말과 일치하는 한글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신학문을 보급하고 나라의 자강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실용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배재학당에 재학 중이던 1897년 4월 22~23일자 『독립신문』에 기고한 국문론(國文論)에서는 한자와 같은 표의문자보다 한글과 같은 표음문자가 훨씬 배우기 쉽고 유용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한글은 “어리석은 어린 아이라도 하루 동안만 공부하면 넉넉히 다 알 만”한데, 이러한 글자를 두고 한자와 같은 “어렵고 어려운 그 몹쓸 그림을 배우려고 다른 일은 아무 것도 못 하고 다른 재주는 하나도 못 배우고 십여 년을 허비하여 공부하고서도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이 반을 넘는다. 그 때문에 백성은 무식하고 가난해지며 나라는 어둡고 약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종대왕이 “남녀노소 상하 빈부 귀천 없이”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모든 일을 기록하고, 사람들은 이로써 의회, 내무 외무, 재정, 법률, 육해군, 경제학 등 실상에 유익한 학문을 익혀 “우리나라 독립에 기둥과 주초”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처럼 한문을 폐지하고 한글을 사용하자는 주장은 문자를 대중화하여 실력을 양성한다는 계몽적인 측면 외에,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조선의 독자성을 추구하려는 흐름과도 궤를 같이 했다. 조선 정부도 1894년 갑오개혁 때 이미 언문으로 업신여겨 왔던 한글을 ‘국문(國文)’이라 칭하고, 공문서나 관보에 국문 또는 국한문을 사용하게 하는 등 정책적으로 국어와 국문을 보급하려 했다. 주시경의 경우, 대한제국이 망국의 길을 걷게 되는 러일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 국문을 자주독립의 상징이자 고유의 민족문화로 인식하는 국수주의적 인식을 본격화하였다.
주시경은 이 시기 『대한국어문법(大韓國語文法)』(1906),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1908), 『국어문법(國語文法)』(1910) 등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책으로 출판했는데, 그 서문에서 국수주의적 국어관을 표출한 것이다. 먼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구역과 인종으로부터 각각의 언어가 자연 발생했음을 전제로 하여, 민족에 따른 언어의 특수성과 고유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시각은 『대한국어문법』에서 시작해 1907년 4월 『황성신문』의 기사 등 이후 거의 모든 저술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나아가 『국어문전음학』에서는 “그 영토[域]는 독립의 기초[基]요, 그 종족[種]은 독립의 형체[體]요, 그 말은 독립의 본성[性]”이라고 하여, 언어를 국가 혹은 민족의 생성과 존립의 핵심으로 설정하였다.
즉, 나라가 강해도 백성의 자국성(自國性)이 약하면 나라도 약함을 면치 못하고, 나라가 약해 맘대로 숨 쉬지 못하더라도 백성의 자국성이 강하면 결국 강해질 것이기 때문에, “자국을 보존하며 자국을 흥성케 하는 길은 국성(國性)을 장려함에 있고, 국성을 장려하는 길은 국어와 국문을 숭상하며 사용함”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반대로 “남의 나라를 빼앗으려 하는 자는 그 말과 글을 없애고 제 말과 제 글을 가르치려” 하는 등, 국가의 존립과 흥망성쇠는 말 그대로 언어의 존재와 성쇠에 달렸다는 것이 주시경의 생각이었다. 그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 베트남의 사정을 다룬 『월남망국사』(1907)를 한글로 번역하거나 국어 교육에 열심이었던 것도, 국어와 국문을 통해 단군 이래 고유하게 지녀 온 민족과 국가를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1910년에 대한제국은 일제에 병합되었고, 한국어도 일본어에게 ‘국어’의 지위를 빼앗겼다. 이 때문에 『국어문법』도 주시경의 국수주의적 국어관을 담은 서문을 삭제한 채 『조선어문법』(1911)으로 재간행되어야 했다.
조선 정부는 한글을 보급한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철자법이나 외래어 표기법 등 우리말을 한글로 표기하기 위한 규칙을 제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마다 표기법이 제각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시경은 『독립신문』 1897년 9월 25~26일자에서 문법 통일과 사전 편찬을 제안했는데, 이때의 견해는 국문연구소 등 이후에도 유지되어 그의 한글 연구와 교육 활동의 기초가 되었다. 먼저 외국어에 대해, 한자어 중에서도 ‘문(門)’, ‘음식(飮食)’, ‘강(江)’과 같이 우리말로 정착된 것은 우리말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한자어나 다른 외국어는 알기 쉽도록 번역해야 한다고 하여 외국어와 외래어를 구별하였다. 그리고 우리말을 표기할 때는 소리 나는 그대로 쓰지 말고 문법에 따라 단어의 형태를 살리기를 주장했다. 즉, ‘머그로’가 아니라 ‘먹[墨]으로’, ‘소네’가 아니라 ‘손[手]에’와 같이 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글씨를 쓸 때는 왼쪽에서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쓰는 것이 편리하고 앞부분의 뜻을 생각하기에도 좋다고 주장했다.
주시경은 자신의 국어 연구 결과를 지면으로 발표하는 한편, 직접 가르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1900년부터 휘문, 명신, 보성, 중앙, 진명, 경신, 숙명, 이화 등 인근의 신식 학교들을 동분서주하며 주야로 학생들을 가르쳐 ‘주 보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국어 보급을 통한 애국심 고취에 더욱 매진하였다. 1907년에는 상동청년학원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하계국어강습소를 개설했는데, 매년 여름방학 때 서울과 지방에서 1914년까지 총 6회에 걸쳐 강습을 개최했다. 이곳에서 주시경은 직접 작성한 교재로 우리말의 원리와 문법을 가르쳤다. 또한 1908년에는 제자들과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하고, 그 부설 기구로 국어강습소(1909년 11월)를 설치하여 국어 연구를 위한 후속 세대들을 양성했다. 일제의 강점 이후 학회와 강습소의 명칭도 조선언문회(朝鮮言文會=배달말글몯음), 조선어강습소(=한글배곧)로 개칭되어야 했지만, 주시경은 1911년에 강습소를 조선어강습원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강습원에는 초등과, 중등과, 고등과, 연구과를 두는 등 상당한 내용을 갖춘 국어학교로 발전시켜서, 이곳에서 우리 국어를 효율적으로 보급하고 연구하고자 하였다.
주시경이 1914년 39세로 사망한 후에는 강습원 출신 제자 이규영, 권덕규, 김두봉 등이 강사로 나서 수업을 했지만, 결국 조선어강습원은 전체 초등과 1회, 중등과 6회, 고등과 5회 졸업생을 배출한 것을 끝으로 1917년에 중단되었다. 하지만 하계국어강습소, 국어강습소, 조선어강습원 등을 수료한 강습생은 500여명에 달했고, 그 중 이병기, 권덕규, 최현배, 정열모 등이 조선어학회에서도 활동하였다. 또한 조선어강습소를 함께 수료한 주시경의 애제자 최현배와 김두봉이 해방 후 남북의 초기 언어정책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남과 북의 한글 표기는 거의 동일한 원칙에 입각해있다. 즉, 한글 전용, 문법적 형태를 살린 표기, 가로쓰기 등은 주시경이 현대에 남긴 유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