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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성령의 객관적 사역
성 경: 요16:5-11
<서론>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마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면서 주님의 구속 사역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오실 것을 거듭거듭 밝히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가 신약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사역만큼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사역이 우리의 신앙에 어떤 부분을 차지하며 또한 어떤 관계가 있는 지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령의 사역은 복음서가 끝난 이후 사도행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의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열매들과 꽃들을 서신서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오심과 그 약속들에 관한 정의를 놓치면 성령님의 사역은 아주 크게 오해될 소지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여 그렇게 많이 오해하였듯이 우리들도 성령님을 바로 이해하고 그 분께 바로 항복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님의 객관적인 사역을 올바로 파악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성령님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먼저 요16:7절을 보십시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우선 설명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앞으로 무슨 일을 하셔야 하며 또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 하나하나 밝히면 밝힐수록 제자들은 근심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그 다음의 말을 유의해 보십시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합니다. 그리고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성령님께서는 우선 오셔서 죄를 깨우치게 하며, 심판을 깨닫게 하며, 의가 무엇인지를 알아 구원을 얻게 하는 사역을 하러 오시는 분이시구나 하면서 쉽게 생각해 버리면 안됩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성령님에 대해서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문제들과는 전혀 다른 약속들입니다.
이런 설교를 할 때마다 상당히 어려운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보통 설교가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회개케 하며, 어떤 결심을 촉구하는 것일 거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설교에는 그러한 기능도 있지만 동시에 설교에 있어서 제일 큰 내용이 되고 기능이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 관한 것과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에 대하여 정당하게 설명하고 깊고 정확하게 낱낱이 파헤치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 중에는 피부에 와 닿는 것이 있을 수도 있는가 하면 동시에 그 이야기가 너무 먼얘기처럼 들리는 것도 있음을 아셔야 됩니다.
갈릴레오가 이전의 학설을 뒤엎는 실험을 피사의 사탑에서 했습니다. `무거운 물건일수록 먼저 떨어진다'는 이 학설을 부정하기 위하여 피사의 사탑에 올라가서 가벼운 물건과 무거운 물건을 동시에 떨어뜨리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동시에 떨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중력은 무게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했습니다. 갈릴레오가 그런 실험을 한다고 하니까 장안에 있는 모든 호사가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래서 무건운 돼지와 가벼운 학을 동시에 떨어 뜨렸는데 동시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별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이 내용은 앞으로 과학을 전개 시키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근거가 되었으며, 그 다음에 쌓아야 하는 모든 판단과 분별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렇게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 생활에 있어서 성령님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만 하면 마음이 뜨겁고, 눈물이 나고, 방언을 하고 하는 식의 그런 기대 때문에 성령이 설명하고 약속하는 것들을 굉장히 많이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 16:5-11절에 언급한 성령님에 대한 설명은 성령님의 객관적인 묘사로서 아주 중요한 기초가 되는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 개인의 영혼에 와서 죄에 대하여 깨우치며, 심판을 경고하며, 구원을 얻는 의를 깨우치는 주관적인사역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하리라"하는 말을 근거로 해서 성령님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부재 증명을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이 땅에 계시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다는 증거로써 있습니다. 가시지 않으면 오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보혜사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시리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끊임없는 성령님에 대한 설명이며, 동시에 성령님의 객관적인 사역에 대한 내용입니다. 요14:16절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사도행전 2:33절을 보시면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 주십니다. 아버지께 받아서 보내십니다. 그때의 묘사를 잘보십시오.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시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높아진 것은 이 땅 위에서는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 역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못박아 죽인 것으로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기사는 끝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는 결코 높아지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높아지심은 천국에서입니다. 영계에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떠나가셔서 하나님 앞에서 들림을 즉 영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거기로부터 성령님을 보내셔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안에 계시지 안하다는 증명으로 성령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객관적 사역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객관적인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직접적으로 세상을 책망하거나 꾸중하기 위해서 오셨다기 보다 간접적이고도 부수적인 효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에 검을 주러오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10:34절을 보십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여기서 세상에 검을 주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과연 세상에 싸움을 붙이러 오셨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평화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복주러 오셨으며 사랑하러 오셨으며 회복시키러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검을 주러 왔다는 이야기를 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세상의 죄악된 관계 속에서 맺어졌던 모든 관계들이 부스뜨리게 됨으로 인하여 부수적인 효과로 그렇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10:35절 말씀처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하는 말씀과 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가까와 질 수 없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마저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어질 수 있는 일이 생기기 때문에 검을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영이 죽었던 사람이 중생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리와 생명 가운데 들어왔을 때마침내 죄악으로 말미암는 관계들을 외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것 때문에 불화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불화를 가리켜 검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불화를 획책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었던 연고로 우리가 원래 쌓고 있었던 잘못된 기초와 죄악된 사고방식들을 부수게 됨으로 인해 생기는 심판이요, 불화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의 일들이 성령님께서 이 땅에 계심으로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 성도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령님께서 이 땅에 계시다는 것을 여러가지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제일 큰 증명은 여러분이 바로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여러분들 중에는 이 말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분도 있을 줄 압니다. 예를들어 가정의 화평을 위해서 이자리에 나아오는 남편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부인에게 몹쓸 짖을 했다고 생각이 들면 주일날 한 번씩 나와줌으로 부인의 마음을 무마하고 가는 남편들도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맨정신으로 그렇게 올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본인은 분명히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본인이 그게 아니라고 하는데 굳이 맞다고 우기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나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죽은 영혼과 죄악 속에 파뭍혀 있는 죄인의 신분으로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으며,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를 수도, 사도신경을 같이 외울 수 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그같은 사건들이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셨으며, 우리 속에 역사하신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알게해 줍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교회에서 봅니다. 방언을 하며, 병고침을 보며,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죽은 자가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듯이 죽은 영혼이 하나님 앞에 다시 살아나는 것도 기적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며, 주일을 지키게 하십니다. 또한, 매주 나가보았자 말씀을 통하여 온갖 지적과 욕밖에 먹는 것이 없는데도 이 자리를 지키게 하시는 것이 어찌 여러분의 인격이며 인품이겠습니까? 바로 성령님의 사역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이 땅에 있음을 우리는 여러 모로 봅니다. 저런 사람이 예수를 믿다니...하는 데서 제일 많이 봅니다. 여러분 옆자리 앉은 사람을 보십시오. 멀정하게 생긴사람이 이 좋은 날에 무엇이 안타까와서 여기 앉아 있겠습니까? 또 옆사람이 나를 볼때에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는 여기 왜? 앉아 있을까요? 돈 받으면서 오라고 그래도 안 올 자리에 왜? 돈을 내면서도 와 있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움직이시며 주께서 하신 이 구속의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일들이 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대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효과가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으로부터내쫓았습니다. 고전2:8절에 의하면 이에 대하여 정확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성령님이 이 땅에 계시는 것은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는 증거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그 누구도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같은 행동들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서 추방시켰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라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했습니다. 다시말해 `나를 믿지 아니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령님이오시고 나서야 비로소 온전히 믿을 수 있게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이 땅에 계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재 증명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안 계시게 된 것은 우리의 불신으로 쫓아 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가시고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이 성령님이 오셔서 하는 객관적인 사역의 하나입니다. 분명히 사람들은 빌라도 앞에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고함치며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 총독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겠는데 왜 무고한 자를 죽이려고 하느냐?'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잘못 죽였거든 그 책임을 우리가 지겠습니다. 잘못 죽였다면 그 피 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리소서!'라고 하면서까지 철저히 주님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함부로 막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지독하게 게르만 민족에게 당한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그랬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근거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다고 했다는 참람죄, 즉 신성모독죄를 걸어서 그를 못박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적인 종교심과 성경이 이야기 하는 진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열심히하나님 편을 들어서 스데반을 죽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그래서 신앙 생활을 같이 하다보면 제일 재미있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처음에는 안 믿겠다고 우겨서 골치를 썩이더니 믿고나면 이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짓이라고 떠들어서 또 골치 아프게 만듭니다. 또 그 다음에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면서 뒤로 물러 앉아 버려서 골치를 썩여요. 신자가 쓸 만한 노릇을 하는 경우가 평생에 걸쳐서 열번이 잘 안되요. `나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내 옆사람 보고 그러겠지?'하면서 태연히 말씀을 감상만 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편을 든다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판단하고 심판해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쫓아보내 버렸습니다. 그렇게 쫓김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허락을 받아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시는 설명을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세히 해야 되는가?를 깊이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배척한 죄인이며 도무지 믿지 않았던 한심한 위인들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조금전 우리가 사도행전 2:33절에서 본 것같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자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오른 손으로 높이 드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못박은 예수를 하나님은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에 의하여 평가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께 구하여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늘 `보혜사'로 명칭되고 있습니다. 세상이 죄인이라고 못박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즉 피고의 변호인을 하나님께서는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아서 판결낸 이 문제가 한층 높은 법정에서의 심판자되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그 변호인으로 다시 보내셨다면 이 세상은 이미 죽었다고 복창해야 될 판국입니다. 그래서 `심판에 대하여'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요 주권자 되신 하나님께서 세상이 이미 판결하고 처형해 버린 예수님을 위한 변호인으로서 성령님을 보내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판단하여 쫓아낸 세상이 무서운 심판을 이미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변호인으로 오신 것이므로 이미 이 세상은 완전히 틀렸었다는 최종 상고 심판을 받은 것이며 이제 이 세상에게 남은 것은 최종 심판의 선고를 집행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 자명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하여 선고된 최종 심판이 집행될 때가지의 잠시의 기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인생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오심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의의 오심은 최종적인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직전에 허용된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성령님의 오심으로 이미 판결이 끝났습니다. 절대 하나님이 옳으신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믿음으로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쌓아가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 당신이 정말 의로우신 분이시고 세상을 심판 하시는 분이시라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새벽기도 할테니까 내 아들 비록 별 실력은 없더라도 이번 대학 시험에 꼭 붙여주십시오.', `이번 부장 진급에 제 남편이 될 가능성은 없지만 이제부터 열심히 기도하고 매주일을 안 빠지겠으니까 되게해 주십시오'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며 공의롭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는 등의 요구들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합니다.
신앙의 기초 위에 귀한 것을 쌓아가야 하는데, 아직도 밤낮 그 기초를 물으며 다니고 있단 말입니다. 무슨 기초를 묻고 있습니까? 하나님 정말 계십니까? 내 편입니까?
정말 이 세상을 심판하실 겁니까?
이런 것들을 늘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다가 자기 이해 관계가 걸릴 때마다 꺼내 놓고 하는 말이 `이번에 꼭 붙여 주시기만 한다면...
진짜 계신다면..'하는 식으로 하나님의 자존심을 자극시켜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식의 신앙으로 왔었더라는 것입니다. 이건 순 악질입니다. 아주 나쁜 신앙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항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늘 시험하고 충동질하여 자기의 이익을 구하려는 강대국 심보입니다. 북한과 남한을 나누어 놓고 서로 충돌질해서 고물딱지 된 비행기나 팔아 먹었던 미국이나 옛 소련을 방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성령님이 와 계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재 증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재 증명이 무엇을 지적하는가?를 보십시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라는 명명 백백한 객관적인 선언임을 우리는 확실하게 그 기초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세상은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당했습니다. 형집행이 아직 안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심판을 선고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셨기 때문에 지금 성령님이 와 계시는 것입니가. 예수님이 옳으십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참으로 진리시요, 생명이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 그 기초로 우리의 남은 인생을 쌓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남은 인생 동안에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쌓지 않고 이 문제를 가지고 당신이 나에게 잘 하면 당신 편을 들어 줄 것이거니와 아니면 난 이리로 가겠소! 하면서 밤낮 하나님 앞에 물고 늘어지는 것으로 써먹고 있다는이 지적에 대하여 여러분들은 뼈아프게 지적해 스스로를 지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힘을 잃어버린 가장 큰 대목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 위에 아름다운 신앙으로 쌓아야 할 것이 기초로 있지 않고 그 기초가 늘 흥정거리로만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십니까?'로 내가 그것을 확인하여 그 다음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늘 그것을 물음으로써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소유하고 싶은 욕심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 내는데 써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여러분이 더 잘 아실것입니다. 이미 성령님 이 땅에 와 계심을 우리 모두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기초를 확인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 언젠가 종말을 고할 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물었을 때 설명한 것입니다. `주님, 언제 이 땅이 끝나며 심판이 일어나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습니까?' 그러자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말세에 징조가 있을 것인데 처처에 지진이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싸우며, 민족과 민족이 싸우리라' 그것이 바로 말세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징조는 어느 역사에서나 예수님 승천 이래로 있어 왔습니다. 로마 시대에도 그랬고, 옛날에 우리나라에 수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도 그랬고, 당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도 그랬고, 임진 왜란 때에도 그랬고, 6.25 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언제나 지진이 있었고, 홍수가 있었고, 기근이 있었고, 나라와 나라가 늘 싸웠습니다. 이 말은 곧 어느 때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으며,기초하고 있는 이 땅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증거들입니다.
여러분이 사시는 아파트가 하루에 두번씩만 흔들리면 여러분 언제쯤 이사 가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사시는 아파트에 가스가 하루에 세번씩만 폭팔을 일으키면 얼마 쯤더 살다가 거기서 나오시겠습니까? 지진이 있으며, 나라가 싸우며, 민족이 싸웁니다 우리가 사는 여기는 영원히 살만한 곳이 못됩니다. 그럴만한 기초가 못된다는 사실을 지진과 기근. 홍수. 싸움. 난리..등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세상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우리가 잠시 후면 이 곳을 떠나갈 것이라는 반증하듯이 마찬가지로 성령님께서 오늘날 이 땅 위에 와 계신다는 것도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우리는 확인해야 됩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그리고내가 이제 무엇을 알며 무엇을 기초로 하여 무엇을 쌓아야 하는가? 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갑자기 내 욕심을 위하여 하나님을 흥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이 길을 살기 위한 기도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무지합니다. 저는 게으릅니다. 가르쳐 주옵소서! 은혜를 베푸소서! 힘을 주옵소서! 하나님의 편을 들기 위해서, 하나님께 충성을 하기 위해서, 순종하는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하면서날마다 부르짖어야 됩니다. 그러면 이 삶에 대하여 무궁무진한 은혜와 축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안 하니까 우린 밤낮 하나님 앞에서 시비 걸러 들어가고, 싸우러 들어가고,얕은 꾀를 부리러 들어가게 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허비하였던가?를 스스로 돌이켜야 합니다. 여기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로우심이 끝나기 전에 여러분이 그 은혜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축복과 감사와자랑으로 인생을 장식하리라고 결심하시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