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ai veterans recount their Korean war experiences
북한과 남한의 갈등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1950년에 발생한 한국전에 참전하고 휴전 후 한국에 파견됐던 태국인 참전용사 두 사람으로부터 당시 한국 국민들이 겪은 고생과 자신들이 견뎌야만 했던 고통에 관해 회고담을 들어보았다.
찰럼차이 히룬앗(Chalermchai Hirunard, 79세) 예비역 중장은 1966년 한국에 도착했고, 당시는 한국전이 이미 오래 전에 끝난 후였다. 그는 유엔(UN) 신속대응군의 일원으로서 한국의 재건과 복구를 돕는 일을 담당했다. 그는 특히 한국의 휴전선 근처에 위치한 한 작은 마을 사람들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주민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었다. 찰럼차이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마을은 6개월 동안이나 눈 속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생활은 정말로 열악했다. 당시 유엔 군의 장비나 무장은 정말 좋은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는 정말 어려웠다. 그러니 주민들이야 겨우 볏짚을 이어만든 초가집에 사는 상태였으니, 주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었겠는가."
북한은 최근 핵무기 실험을 했고, 남한과 "전쟁상태"로 돌입한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은 찰럼차이 장군으로 하여금 한국전이 가져왔던 결과에 대한 기억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사진) 찰럼차이 히룬앗(좌측) 당시 육군 중위가 1966년 미 공군의 C-141 수송기를 타고 '김포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유엔군 관계자의 영접을 받고 있다.
찰럼차이 장군은 당시 기갑부대 중위였고, 1966년 자신의 부대와 함께 한국에 파견됐다. 그들의 임무는 휴전선 지역의 국경을 안정화시키는 일 말고도,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지원하고 돕는 민사작전도 맡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식량과 연료가 배급됐다. 연료는 대부분 주민들의 난방에 사용됐다."
당시 태국 군인들과 한국 사람들은 신속하게 신뢰관계를 구축한 것처럼 보였다. 한국전이 발발했을 때 가장 먼저 참전한 나라 중 하나가 태국이었기 때문이다.
찰럼차이 씨는 당시 판문점(Panmunjom) 마을 근처의 국경을 순찰하다, 북한 군 병력과도 몇 차례 조우했다. 판문점은 남한과 북한 사이의 국경선으로서,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DMZ)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북한 군인들)은 마치 마네킹 같았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전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쁘라문 후타싱(Pramool Hutasingh, 87세) 예비역 대령은 한국전에 참전하여 실제 전투를 목격했다. 그는 자신이 한국에서 보았던 일들이 평생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쁘라문 씨는 당시 육군 소위였다. 그는 자신의 부대 지휘소에 포탄이 낙하하여 제2소대 전체가 몰살당했던 일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부-지휘관이었던 쭈완 완나랏(Juan Wannarat) 대위와 나는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우리는 포탄이 떨어진 곳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사방에 널려있던 인간의 사지들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그날이 끝날 무렵, 우리는 그 지역을 순찰했고, 북한 군의 시체들이 눈 속에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그 북한 군인들은 더 이상 그의 적이 아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그들을 다시 돌아봤을 때, 그들은 단지 전쟁의 희생자들일 뿐이었다."
쁘라문 대령에 따르면, 당시의 무력 충돌로 인해 민간인과 군인 모두가 동일하게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민간인들, 특히 최전선의 너무 가까이에서 미아가 된 어린이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이들은 추위와 고통 속에서 도움을 바라면서 군인들에게 의존했다. 식량, 연료, 의류 등 모든 곳에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사진) 쁘라문 후타싱(좌측) 당시 소위가 1952년 11월 8일 태국인 동료 및 미국인 동료와 함께 전쟁 이전 남북한의 경계선이었던 '38선' 표지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찰럼차이 예비역 중장은 현재 한반도에서 발생하고 있는 긴장에 관해, 북한의 젊은 지도자인 김정은(Kim Jong-un)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군부에 대한 존중을 표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반도에서 통일이 이뤄진다면 좋을 것이다. 그들이 단일 국가가 되면 자원도 가질 수 있어서 강력한 국가가 될 것이다."
쁘라문 예비역 대령은 전쟁이란 오직 정치를 위해 봉사하는 목적 밖에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의 정치는 욕을 먹어도 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전쟁을 하지 않길 바란다. 전쟁이 다시 발생한다면, 고통을 받는 것은 국민들이다."
한국전(=6.25)은 1950년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면서 시작됐다. 이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발효될 때까지 3년 동안 지속됐다. 그러나 아직도 평화협정은 체결되지 않았고, 남한과 북한은 아직도 기술적으로는 전쟁 상태에 놓여있다.
태국은 한국전 기간과 전후 복구를 돕기 위해 23회의 병력 교체를 통해 총 1만1,776명의 군인들을 한국에 파병했다. 태국 군의 마지막 병력이 한국에 간 것은 1972년이었다.
찰럼차이 예비역 중장은 1966~1967년 사이 전후 재건기에 파견됐었고, 쁘라문 예비역 대령은 1952~1953년 사이에 파견됐었다.
자료 동영상 : 태국 영화 <아리당>
태국 영화 <아리당>(Aridang, อารีดัง)은 한국전에 파견됐던 태국 군인과 한국인 처녀의 사랑이야기를 주제로 했다. 아마도 '아리랑'의 발음이 태국인들에게는 '아리당'으로 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태국인들 중에 영화 <아리당>을 기억하는 이들이 제법 있으며, 시골 축제나 '룩퉁'(Luktung, ลูกทุ่ง) 가수들의 쇼에서도 '아리랑'이 공연되면서 한복을 입은 무용수들이 등장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하의 동영상들은 '유튜브' 사이트에서 태국 영화 <아리당>을 소개한 각종 동영상 단편들을 수집한 것이다. [크세]
첫댓글 동영상들을 보니
<아리당>이 2가지 버전이 있는 게 아닌가 싶네요..
하나는 영화인 것 같고
하나는 TV 드라마 아닌가 생각됩니다..
과거에 영화가 성공을 해서
1990년대에 TV 연속극으로 리바이벌 한 거 아닌가 추정되네요..
그런데 상세한 정보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