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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무리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grace
찰스 핫지의 칭의론
강웅산 교수 (총신신대원, 조직신학)
I. 들어가는 말
문헌상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의 칭의론은 몇 편의 대표적인 저서를 통해 정리할 수 있다. 1841년 미국 주일학교 연합회의 요청으로 『삶의 길』 (The Way of Life: A Handbook of Christian Belief and Practice)이라는 성경, 죄, 칭의, 믿음, 성례, 신앙생활, 등을 다루는 일종의 초보적인 조직신학 저서를 출간하였다. 젊은 지성인들이 흔히 갖는 신앙상의 질문들을 답하기 위한 목적과 거룩의 삶을 지도하기 위한 목적의 저서이다. 이 책에서 핫지는 제5장에서 칭의를 제6장에서 믿음을 다루었다. 불과 50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통해 핫지는 칭의에 대한 기초적이지만 핵심적인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미 방법론적인 특징이 나타나는데 핫지는 칭의개념을 언약신학적 또는 구속사적인 틀(framework) 안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칭의론에 대한 핫지의 사상은 아무래도 그의『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제3권에 최종적으로 집약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1872-73년에 집필한 그의 『조직신학』은 이미 1864년 로마서 주석 최종판을 출간한 이후의 작품이기 때문에 41년의 『삶의 길』 보다는 훨씬 성숙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구성상 쉽게 눈에 띄는 특징은, 칭의론에서 빠뜨릴 수 없는 주제들(법정적 칭의의 개념, 그리스도의 의의 개념과 전가의 의미, 믿음과 칭의의 관계, 등) 외에도, 개혁주의 신앙고백들이 어떻게 칭의를 정의하는지 열거할 뿐 아니라, 잘못된 칭의교리(로만 카톨릭, 알미니안, 등)에 대한 매우 예리한 반응과 반박을 하고 있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가 다시 핫지를 다루며 깊이 새겨야 할 매우 중요한 이유가 된다. 굳이 특징을 하나 더 지적한다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닌 것으로 추후 연구가 필요한 것인데) 핫지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칭의론을 비교적 비중있게 다루고 있으며 여러 곳에서 유사한 강조를 하고 있다.1) 그 외에도 핫지의 칭의론 사상은 그의 로마서 주석과 고린도전후서 주석을 참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찰스 핫지가 어떻게 칭의론을 설명하는지, 즉 방법론적 관점에서, 칭의의 개념을 언약신학 구도를 따라 설명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그 특징으로 핫지는 율법에 대하여 칭의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하는 것을 지적할 것이고, 그것은 곧 그가 어떻게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대립(antithetical)구도에서 “오직 믿음(sola fide)”을 방어하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핫지의 이러한 방법은 그리스도가 언약신학 구도에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어떻게 우리의 칭의가 되는지를 말하는 것으로 기독론에 근거하여 칭의를 이해하는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전제하에 개인의 칭의(ordo salutis)를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historia salutis)를 통해 이해하는 방법론이 되겠다.
II. 신학적 구조 및 특징
칭의론을 기술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핫지는 의도적으로 “가장 안전한 방법은 성경의 가르침을 꼼꼼하게 따르는 것이며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란 “성경의 언어를 가장 명백한 의미에서 해석하는 것”으로 어떤 해석학적 방법론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핫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이어지는 문맥을 통해 읽을 수 있는데, “이 주제에 있어서 성경의 영감된 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충실하게 대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2) 즉 핫지는 칭의론을 성경의 각 저자의 강조와 특성이 반영되는 방법론에 의해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방법론의 관점에서, 우리가 신학을 할 때, 성경이 취하고 있는 방법론을 따라야 할 것을 핫지는 이미 말한 것이다. 이 말은 오늘날 용어로 조직신학이 성경신학과 밀접한 관계에서 진행되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조직신학』 제3권에서 다루어지는 칭의론은 언약신학의 틀 속에서 설명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핫지의 칭의론은 그의 언약신학 구도를 이해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핫지의 칭의론을 살펴보면 그는 칭의의 의미를 율법을 기준하여 설명하고 있는 특징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핫지만의 고유 특성은 아니다. 단지 핫지가 율법에 대비(對比)하여 칭의 개념을 설명하였다는 것은 율법이 갖는 구속사적 기능/역할을 전제하였다는 말이며, 이 때 율법의 구속사적 기능은 언약신학 구도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핫지에게 있어서, 칭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지 순종(행위)에 의한 것이 아닌 이유가 언약신학 구도에 있다. 즉 오직 믿음으로 칭의된다는 것은 은혜언약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며, 역으로 율법의 행위로 칭의될 수 없는 것은 행위언약이 더 이상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언약신학적 측면에서, 핫지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명백하게 대립적(antithetical) 구도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이 대립 구도가 그의 칭의론/구원론에 있어서 해석학적(hermeneutical) 원리로 작용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 그의 칭의론을 이해하는 바른 접근이 된다.
언약신학이란 개혁주의 성경해석학의 기본 원리이다. 17세기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칼빈을 언약신학자로 봐야 되는지에 대한 기술적인 논쟁이 있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약사상은 그의 신학을 움직이는 핵심적인 원리라는 점이다.3) 개혁주의 신학 전통은 언약신학을 계승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핫지도 예외가 아니다. 유럽의 대표적인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 신학자 중의 하나인 프란시스 투레틴(Francis Turretin)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핫지는 자신의 전통인 언약신학에 매우 충실한 면을 보인다. 그것은 칭의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역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대립적(antithetical) 구도가 해석학적 원리로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언약신학의 “대립적” 구도가 무슨 뜻인지 들어보자.
비록 언약이라는 단어가 창세기에 사용되지도 않고, 어디에도 명백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러나 구원의 계획이 새 언약에 지속적으로 설명되어질 때, “새”라는 말이 단순히 시내산에서 만들어진 것과 대조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적 언약 체계에 대하여 새 것이라는 의미로써, 성경이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담과 맺은 관계는 진정으로 대표적 계약을 체결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 성경은 영생을 얻는 일에 관한한 오직 두 가지 방법만을 말한다. 하나는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방법이고 다른 것은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후자의 것을 언약이라고 부른다면, 전자도 같은 것으로 불려져야 할 것이다.4)
여기에서 핫지가 언약신학을 말하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는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대조를 말하면서, 아담과 체결된 행위언약과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언약을 말하고 있다. 물론 아담과의 언약을 언약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냐의 질문은 성경신학적으로 정당한 질문이다. 그러나 핫지는 전체 언약신학 구도에서 아담과 체결되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대체회복(recapitulate)되는5) 새 언약과 대립적(antithetical) 관계에 있기 때문에 언약이라고 부르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논리이다. 이때 특별히 대립각은 구원의 두 개의 다른 방법으로 압축된다. 핫지가 말하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일에 관한한 오직 두 가지 방법”은 상호 보완적인 성질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는 같이 섞일 수 없는 상호 배타적인 두 개의 다른 언약체제를 함축적으로 대표하는 것이 된다.
두 언약의 대립 구도는, 핫지에게 있어서, 언약의 대표적 머리를 통해서 확인된다. 첫 번째 언약 즉 행위언약의 구도를 따를 때, 아담을 온 인류의 “머리” 또는 “대표”로 보고 있으며, 그 언약적 대표성의 의미는 아담의 원죄의 전가로 나타났다. 또 다른 대표, 머리가 그리스도이다. 핫지에게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평행적 대조는 정확하게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신학적 구분을 집약하는 것이 된다. “아담이 그 후손에 대해 머리이며 대표인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의 백성들에 대해 머리이며 대표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더불어 언약에 들어가신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언약에 들어가셨다. 이것이 로마서 5:12-21에서 타락과 구원 둘 다에 있어서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나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사상이다.”6) 마치 행위언약에서 아담의 완벽한 순종이 종말론적(eschatological) 축복을 획득(merit)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은혜언약에서는 그리스도의 공로(merit)만이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신다.
그런 의미에서 완벽한 순종은 원래 아담과 맺었던 언약의 조건이었다. 그가 자신의 원래 모습을 유지했더라면, 약속된 축복을 벌었을(merit) 것이다. . . . 같은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의 조건이다. 공로적(meritorious) 근거만이 아버지가 성자에게 공의 가운데 했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7)
공로(merit) 개념에 기초해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를 이루는 것은 핫지가 개혁주의 언약신학에 기여하는 점이다. 핫지의 사고에는, 행위언약에서는 아담이 공로적(meritorious) 대표였던 반면에, 은혜언약에서는 그리스도가 공로적(meritorious) 대표인 것이다. 즉 두 아담에 대하여 공로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명백한 대립구도의 분석에 의한 기여라고 하겠다.
이때 아담과 그리스도로 집약되는 두 언약은 핫지에게 있어서 법적 개념으로 대비되는 특징을 보인다. 위에서 새 언약이 새 언약이 되는 이유로 “모든 법적 언약 체계에 대하여 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 것도 그리스도의 언약이야말로 아담과의 언약의 모든 요구(법)를 대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핫지에게 있어서, 행위언약(covenant of works)의 죽음과 저주라는 엄청난 법적 효력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가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의 조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이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은혜언약을 완성키 위해 “대표적 희생”이 되셨다. 이제 새 언약, 은혜언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조건으로 요구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옛 언약의 법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소유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가 이제 은혜언약에서 성취되었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 언약의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언약신학의 구도를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구속역사를 해석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된다. 타락 이후, 핫지가 볼 때, 구약의 역사는 은혜언약의 역사(heilsgeschichte)이다. “구원의 계획은 언제나 하나였고 같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즉 같은 약속, 같은 구주, 같은 조건, 같은 구원이었다.”8) 핫지가 주장하는 것은, 구약성도들도 우리가 새 언약에서 받을 약속된 종말론적 축복을 그들도 누렸으며, 이것은 타락이후 같은 하나의 언약(은혜언약)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언약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의 관점에서, 은혜언약 안에서 작용하는 것이다.9) 핫지는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 때문에 모세 율법을 행위언약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모세언약을 통해 더 강조되는 것은 순종으로는 더 이상 행위언약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핫지는 구속사의 진행을 아담과 그리스도로 대조되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명백한 대립적(antithetical) 해석학적 원리에 입각하여 이해하는 전형적인 개혁주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이 원리에 입각하여 칭의론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핫지가 로마서 3장과 4장에서 주석하듯이 칭의가 행위에 의한 것이 될 수 없는 것은 은혜언약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롬3:22,30). 이것은 더 이상 어느 누구도 행위언약으로는 칭의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실시 하는 것이다. 핫지는 성경은 창세기 3:15 이후 칭의의 방법으로 항상 믿음에 의한 칭의만을 말하고 있으며,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이 아브라함의 칭의가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칭의로 설명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바와 같이 율법을 구속사적 기능 안에서, 즉 언약신학의 구도 안에서 이해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10)
또한 율법의 행위를 배제하는 칭의(딛3:5, 딤후1:9, 엡2:9)는, 핫지가 볼 때, 인간이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칭의 되는 것은 로마서 4:5과 조화를 이룬다. 칭의되지 않은, 즉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자에게서 어떤 의도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더더욱 스스로의 행위(율법에 대한 순종)로 의롭게 여겨질 수 없다. “단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을 때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열매를 맺을 수 있다.”11) 즉 크리스찬이 보이는 모든 선한 것은 칭의의 결과이지 칭의를 위한 선재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핫지의 분명한 입장이다.
III. 칭의의 기독론적 근거
핫지의 칭의론이 율법에 대한 강한 대비를 보이며 설명되는 것은 율법에 대한 기독론적 이해를 전제하는 말이다. 핫지는 그의 칭의론에서 어떻게 율법의 기독론적(또는 구속사적) 이해가 칭의에 근거하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핫지는 죄인이 자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칭의 된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성부와 성자 사이의 구속언약(covenant of redemption)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12) 이것은, 앞서 지적한대로, 핫지의 신학이 언약신학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는 증거이며 결국 그의 칭의론이 기독론과 밀접한 관계에서 진행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가 어떤 조건에 의해 특정한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성경에서 볼 때 명백하다.” 그 조건이라는 것이 구속언약에 담겨있는 조건으로 소위 그리스도가 담당해야 하는 대속의 죽음이었고 우리의 칭의와 관계가 있다. “이 거래(transaction)는 대속(vicarious substitution)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 말은 그리스도가 하실 일이 그의 백성의 칭의와 성화와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뜻이다.”13)
구속언약의 조건으로 그리스도가 담당해야 했던 그 특정한 일은 인성을 입으시는 일이었음을 핫지는 지적하였다. 인성을 입으심으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 하에서 “한 일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된다.”14)
신자들이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율법을 조항이나 형벌에 있어서 폐지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다; 또는 그 요구를 낮추는 것도 아니요, 사람의 능력에 맞게 조정하는 것도 아니다.”15) 단지 언약 구도에 따라 그리스도는 대속적 순종과 고난을 통해서 율법을 충족시키셨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대속이 우리를 위한 의가 될 수 있는지 핫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첫째, 우리 모두는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율법 하에 있었으며; 둘째, 모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해 율법이 정한 죄책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셋째, 그리스도가 대신 그 율법 하에 놓여 대신 그 요구를 만족시킴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16)
그래서, 핫지가 볼 때, 율법 하에 정죄 된 인간의 의로는 율법을 충족시킬 수 없다. 핫지는 빌3:4-9에서 두 종류의 의를 지적하는데, 하나는 인간의 의, 그러나 칭의의 근거가 되기는 부적합한 것이고, 다른 하나가 하나님께로 난 의이다. 이것은 내가 아닌 타자(他者)의 의로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즉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의이다.17) “우리 자신 안에는 아무런 의가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의를 갖는다.”18) 타자, 즉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으로 내 것이 되기까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이 전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점은 아래서 다루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요한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과 일치한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 율법을 만족시켰다는 말은, 핫지에게, 우리를 위해 율법이 요구하는“저주”가 되셨고(갈3:13), “죄”가 되시었다(고후5:21)는 말이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속죄-예를 들어, 속죄의 제사-는 대리(vicarious)의 방법을 통한 화해이다 (레1:4, 8:14, 16:21,22, 사53:6,11,12, 벧전2:24, 히9:28, 요일3:5). “속죄의 제사(sin offering)”가 되었다고 할 때, 유대인들은 구약적 전통에서 대속적 희생의 의미를 잘 이해했다. 짐승의 제사를 통해 죄책(penalty)이 면해지고 다시 신정통치 안으로 회복되는, 즉 언약관계의 회복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속죄의 제사”가 되심으로 우리의 저주와 죄가 사하여졌다.19) “롬3:25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내어주심으로써 죄인을 칭의하심에 있어서 정당하게 하셨다.”20)
여기에서 핵심개념인 대리, 대속(substitution)이란 그리스도가 당한 모든 고난을 성도가 당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이다. 핫지는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들”로 보았다.21) 그렇다면 율법을 만족시킨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의 효과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 가능해 진다는 것이 핫지의 신학구도적 이해이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단단하게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한 것들은 성도들이 한 것으로 선포되는 것이다.”22) 핫지에게 이 연합은 그리스도와 아담의 언약적 대비를 전제하는 개념이다. “마치 아담과의 우리의 연합이 우리의 죽음을 낳았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하였다.”23) 이것은 전형적인 언약신학에서 나오는 말이다. 핫지가 볼 때, 그리스도가 대리자로 율법을 만족시킨 것은 신약 전체에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연합 사상으로 설명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IV. 그리스도와의 연합
핫지에게 있어서 칭의가 단순히 죄 용서로만 압축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칭의를 이해할 때 더욱 그러하다. 즉 연합을 통해서 율법이 갖고 있는 언약적 효과를 누리게 된다. 이것은, 핫지가 볼 때,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특성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핫지는 성경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부터 이미 그의 제사장적 임무를 말하고 있다고 이해하였다(시110:4, 슥6:13, 히5:1).24) 양성의 연합, 즉 그리스도가 참 인간과 참 하나님이 되심은 제사장적 임무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만이 참 제사장이 될 수 있었으며, 참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율법이 충족되고 하나님의 의가 세워짐으로써 신자들에게는 새 소망이 되었다고 핫지는 설명하고 있다.25)
핫지는 연합의 결과로,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며,” “우리가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 “그와 함께 부활하였고,” “그와 함께 지금 하늘보좌에 앉아 있다”고 설명한다. 연합으로 인해, “(인간의 표현을 따르자면) 그가 누구냐가 바로 우리가 된다(we are what he is).” “그가 한 것이 우리가 한 것이며,” “그의 의가 우리의 의이며,” “그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며,” “그의 높임이 우리의 높임”인 것이다.26) 칼빈의 칭의론이 철저하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이해되는 것처럼, 핫지도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칭의를 찾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27)
그러나 칼빈과 비교할 때,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와 비교해도 마찬가지 이지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를 핫지는 율법 충족의 관점에 더 많은 초점을 두며 연결짓는 모습을 보게 된다. 칼빈과 에드워즈의 경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 또는 배경(context)이었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그리스도가 완성한 구원을 누린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칭의를 설명하면서도 칼빈과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성화를 뗄 수 없는 관계에서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핫지에게 있어서 이 점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고 있다. 그는 연합을 율법을 충족시키는데 우선적인 관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충족시킬 때, 연합을 통해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을 충족시킨 것이 핫지의 연합 개념에서 부각되는 사상이다. 그런 점에서 연합 속에서 그리스도의 것(구원의 완성)을 우리의 것(구원의 적용)으로 누리는 것을 강조한 칼빈-에드워즈와 비교할 때 다소 차이점을 느낀다.
핫지의 연합의 개념은 로마서5:12-21을 통해서 아담과 그리스도가 어떻게 언약의 대표가 되는지를 통해 설명되고 있다. 먼저 이 연합을 통해서 오해 말아야 할 것은 아담이나 그리스도의 경우 모두 “신비적 동일(mysterious identity)”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못 박고 있다. 이 연합을 통해 한 사람의 도덕적 특성이 다른 사람/후손에게 전달될 수 없으며, “직접적으로(personally), 고유적으로(inherently)” 다른 사람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강조이다. 즉 “아담의 죄가 우리가 마음 아파해야할 이유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의가 그 의가 전가된 이들에게 스스로의 안위로 삼을 근거가 아니다.”28) 핫지가 강하게 강조하는 것은 아담과 그 후손,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 사이에, 연합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은 각기 정죄와 칭의의 법정적 근거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연합을 통해서 아담의 죄가 후손의 정죄의 근거가 되고,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백성들의 칭의의 근거가 된다. 이 때 아담의 죄가, 그리스도의 의가, 연합으로 인해 주입(infusion)되는 것이 아님을 핫지는 분명히 하고 있음 또한 중요하다.29)
핫지는 개혁주의 전통이 어떻게 연합의 개념 속에서 법정적 개념을 유지하고 있는지 여러 학자들을 인용하고 있다. 프란시스 투레틴(Francis Turretin, 1623-1687)에게서 전가(imputation)란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이 우리 것이 되는 것으로 연합이 전가의 근거가 됨을 지적하였다. 이 때 연합은 신비적 동일이 아니라 자연적(natural) 의미에서, 그리고 법정적(forensic) 의미에서 대표와 그에 속한 자들 사이에 연합을 의미한다. “전가란 법정적 용어로, 의가 물리적으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법정적으로 상대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로마 카톨릭이 말했던 주입(infusion)을 부정하며 법정적 전가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전가는 도덕적 성품을 바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 동시에 의롭게 여겨질 수도 있고, 불의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유적 속성을 기준으로하면 그는 죄인이며 불의한 자라고 불릴 것이고, 그리스도에 대해 외적 법정적 관계를 기준하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불려진다.”30)
존 오웬(John Owen, 1616-1683)도 마찬가지로, 핫지에 따르면, 이 연합은 언약적(federal) 연합이며, 자연적(natural) 연합이다. 즉 언약관계로 인해 법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이 전가(의의 전가)는 다른 사람의 의를 칭의될 사람에게 전도(transmission), 투여(transfusion)하여 그로인해 완벽하게 내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31) 오웬은 우리가 아담의 죄로 인해 정죄되는 것이 우리 고유의 죄가 아닌 전가된 죄로 인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가 칭의되는 것 역시 우리 고유의 의가 아닌 전가된 의에 의한 것이라는 평행구조로 설명하였다. 아울러 로마카톨릭의 교리인 의의 “전도” 또는 “투여” 개념은 부인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핫지가 개혁주의 전통 및 종교개혁의 칭의교리를 공유하는 신학자들을 빌어 강조하는 것은 전가는 법정적 개념이며, 이 법정적 전가는 언약구도에 의한 대표적 성격을 갖는 연합 개념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핫지가 거듭 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이 연합-아담과 후손, 그리스도와 성도-을 “신비적 동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도덕성이 다른 사람에게 전이(transfer)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며, 그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주장을 따르는 것이 된다는 경고이다. “전가란 절대 도덕성을 변화시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 그의 법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죄의 전가는 사람을 죄인으로 간주하고 그에 맞게 다루는 것이고, 의의 전가는 사람을 의인으로 간주하고 그에 맞게 다루는 것이다.”32) 핫지에게 전가의 개념은 어떤 철학적 사변을 통해 도출된 것이 아니라 성경적 용어이며 성경적 개념인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 여러 차례 “전가”의 의미가 사용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연합의 의미를 “신비적 동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은 슈랄이어마커(Schleiermacher, 1768-1834)가 말한 것처럼 인류의 총체적 생명(generic life)이 아담 안에 있었다거나 신자의 총체적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각자가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자기의 죄를 범하고 실제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되는 것으로 전혀 성경과 맞지 않는 것이 된다.33) 이것은 나아가 성경의 속죄(atonement)와 칭의(justification)를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핫지는 보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지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책(punishment)을 대신 지신 것이지 그 분이 우리의 죄성을 지신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다르다. 여기에서, 핫지가 볼 때, 법적 대속(legal substitution)의 의미가 유지될 때 칭의가 유지된다. 그리스도가 대신 지신 것은 법에 대하여 의를 만족시키신 것이다. 형벌의 모양이 똑같지 않은 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인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법의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써 당신에게 연합된 자들을 위해 의를 이루신 것이고 이 의가 연합 안에서 법정적으로 전가되는 것이다.
V. 칭의의 개념
1. 칭의의 법정적 개념
핫지는 칭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성경에 나타나는 “칭의”의 의미를 지적한다. “누군가에게 의를 돌리거나 누구를 의롭다고 부르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라는 단어의 뜻이다.” 즉 누구를 의롭다고 부르거나 의롭게 여기는 것이다. 그 예로 핫지는 출애굽기 23:7, 신명기 25:1, 이사야 5:23, 로마서 3:20, 8:33,34 등을 지적한다.34) 여기에서 핫지가 성경을 통해 부각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의 칭의 용법은 어떤 대상을 의롭다고 부르거나 여김으로써 그 대상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눅7:29),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딤전3:16) 마찬가지이며, 죄인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롭다고 부른다고 해서 의롭지 않던 하나님이 의로워 진다거나, 더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의 의를 선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핫지가 볼 때, “칭의한다는 것은 결코 누구를 거룩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악한 자를 의롭다고 칭하는 것은 죄다. 그러나 악한 자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즉 악한 자를 성화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단지 “어떤 사람에게 의를 전가하거나 돌리는 것이, 성경의 언어로, 칭의한다는 뜻”이라고 핫지는 설명 하였다.
핫지에 따르면, 신약에 나타나는 “의롭다(di,kaioj)”는 양면적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의롭다”가 도덕적 성품을 의미하는 경우이다. 즉 누가복음 7:29처럼 하나님을 가리켜 의롭다고 하는 경우이다. 다른 경우는 관계적 의미로, 즉 어떤 대상을 기준으로 의가 만족되는 경우이다. 마태복음 27:24에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를 들 수 있다. 우리와 관련이 있는 즉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칭하시는 경우는 전자의 경우가 될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성립하지 못한다. 고로 죄인에 대한 칭의는 후자의 경우이어야 한다는 것이 핫지의 설명이다. 그 결과로 “더 이상 그의 죄를 묻지 않으신다,” 또는 “정의가 요구하는 의가 만족되었다”는 뜻이다.35) 그래서 로마서 4:5에서 “죄인을 의로 여기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고 핫지는 말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핫지가 말하는 칭의의 개념은 법정적 개념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경에 나타나는 칭의의 개념은 모두 - 하나님을 의롭다고 부르는 것 포함 - 법정적 개념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우리의 관심인 죄인에 대한 칭의에 대해서 핫지는, 이미 앞서 지적한대로, 법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칭의란, 법의 관점에서 볼 때, 법을 어긴 죄에 대한 용서 뿐만 아니라 법을 만족시킴으로 얻을 수 있는 의인됨의 신분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핫지는 정의한다. 여기에서 핫지가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이 선포의 칭의가 법정적 칭의라는 것이다. 즉 칭의란 “법에 근거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동작”인 것이다.36) 그래서, 핫지가 강조하는 칭의는 단순히 용서한다거나 또는 내적으로 의롭게, 또는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선언할 뿐이다. 신명기 25:1, 욥기 32:2, 시편 51:4, 잠언 17:15, 마태복음 11:19, 누가복음 7:29, 10:29, 갈라디아서 2:16, 5:4에서 쓰이는 칭의의 용어들이 모두 법정적 개념, 즉 선언적 개념임을 핫지는 분명히 하고 있다.
법정적 칭의와 관련하여 핫지가 지적하는 특징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칭의는 동작/행동(action)이지 성화와 같은 지속되는 과정(process)이 아니다. 즉 “죄인을 향한 은혜의 동작”이다. 이 칭의는 그 자체가 중생이나 성화에서 처럼 내적인 변화나 효과를 유발하는 유효한 힘이 아니다. 즉 주권자의 유효한 선포가 아니라, 단지 신분적 회복을 말하는 재판장의 법적 선포일 뿐이다.37) 칭의의 법정적 개념은 다른 한 편, 정죄(condemnation)의 반대 개념으로 설명된다. 핫지는 정죄란 유죄로 선언하는 것임에 비해, 칭의란 죄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38) 로마서 8:1,33,34을 근거로, 핫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가 없는 것을 법정적 개념으로 밝히고 있다. 즉 정죄란 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인 것처럼, 대칭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더 이상 죄인이라고 부를 수 없고 이제 의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칭의의 법정적 의미인 것이다.
2. 칭의는 죄 용서만이 아님
종교개혁 이후 종종 칭의의 개념을 죄용서만으로 압축하려는 성향이 있어왔는데, 알미니안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이런 위험에 대해 핫지는 여러 차례 칭의를 죄용서만으로 정의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39)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을 죄 용서만으로 단순화 시키고 있는 성향을 감안할 때, 핫지의 경고는 지금도 분명히 유효하다.
칭의가 단순히 죄용서만이 아닌 것은 핫지가 어떻게 칭의의 긍정적 의미를 설명하는지를 봄으로써 알 수 있다. 즉 죄용서의 부정적 의미와 함께 의인의 신분이 누릴 긍정적 의미이다. 핫지에 따르면, 첫째, 칭의는 화평(평화)을 보장한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화평을 갖는 것은 복음의 핵심사상이다. 이것은 단순히 죄 용서를 받았다는데서 오는 화평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가 만족되었다는데서 오는 평화이다. 핫지가 이해하는 칭의 속에는 부정적 측면과 함께 긍정적 의미가 양립한다. 둘째, 칭의는 하나님과 화해를 보장한다. 화해가 없는 죄용서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화해 없는 죄용서는 관계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 죄인이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은 단순히 죄용서를 통한 것 이상의 것으로써 칭의가 가져다주는 긍정적 결과 때문이다. 셋째로, 칭의는 영생을 보장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죄용서는 칭의의 부정적 결과일 뿐이다. 죄가 사해졌다고 그것이 영생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개혁주의 칭의가 알미니안화 되고 있는 복음주의와 다른 점이다.40) 핫지는 “영생은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는 긍정적 조건에 달려있다”고 강조하였다.41) 영생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며, 핫지를 포함한 개혁주의에서는, 칭의는 이미 긍정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 때 칭의의 긍정적 의미는 개혁주의 안에서 종종 양자의 개념과 중첩되기도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며 . . . . 이 양자됨은 상속권을 포함하며, 이 상속권은 영생에 대한 권리를 포함한다.”42)
법정적 개념인 칭의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그 특권(죄 용서와 영생소유)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어떠한 거룩도 우리에게 평화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완벽한 거룩도 죄책을 제거하지는 못한다.”43) 회개가 범죄를 속하지 못하며, 정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논리이다. 거룩이 죄인의 양심에 화평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핫지는 칭의는 성화나 죄용서, 의의 주입(infusion)이 아닌 법정적 선언인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제 핫지가 칭의의 이중적 효과-죄 사함과 의인 됨-를 어떻게 그리스도의 의(righteousness)에서 찾는지 살펴보자.
3. 그리스도의 의의 개념과 칭의 개념
핫지가 칭의를 죄의 용서와 영생의 선물로 정의하는 것은 칼빈의 칭의 개념에서 진일보한 투레틴-에드워즈 전통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칼빈과 투레틴-에드워즈를 대립 구도로 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같은 전통 선상의 이해를 전제하나 아직 칼빈에게서는 충분히 강조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 투레틴-에드워즈가 보강하고 있으며, 핫지는 이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에드워즈가 그의 칭의론에서 하였던 것처럼, 핫지는 그리스도의 의의 개념을 일단 능동적-수동적 순종의 구도로 받아들였다. 여기에서 핫지가 능동적-수동적 순종으로 일단 보는 것은 율법충족의 의미에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로마서5:12-21을 근거로 핫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충족시키므로 의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핫지가 에드워즈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를 보게 된다. 핫지는, 에드워즈가 그랬듯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더 이상 “능동적-수동적”으로 구분하는 대신, 사실상 하나의 순종에 대한 다른 국면일 뿐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리스도가 고난에까지 순종하셨다.” 그러므로 “이런 구분은 성경에서 마치 그리스도의 순종이 갖는 목적이 하나 있고 그의 고난이 갖는 다른 구별되는 목적이 따로 있는 것 같이 그렇게 제시되고 있지 않다.”44) 핫지는 에드워즈처럼 그리스도의 순종과 고난은 우리를 대신하신 둘이 아닌 하나의 순종이며 하나의 의로써 우리의 칭의에 대한 하나의 근거로 보았다.45)
핫지가 그리스도의 순종을 능동적-수동적 이분법으로 보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며,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신 구속사적 사역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유익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수동적 순종으로 말함으로써 마치 그리스도가 마지못해 죽음을 당한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매우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순종이었으며, 순종의 절정에 해당되는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핫지는 에드워즈의 해석과 표현을 따르면서 능동적-수동적 구분이 갖고 있는 스콜라스틱(scholastic)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순종에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이해하였던 에드워즈의 방법이 핫지에게서도 발견된다.46) 에드워즈를 길게 인용하며, 핫지는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었다는 말은, 넓게 보면, 그리스도의 대속과 순종이 모두 전가되었다는 뜻이고, 좁게 보면, 그리스도의 순종이 전가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우리의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우리 자신이 마치 그것을[순종]을 행한 것처럼 그에 해당되는 혜택을 받을 것이다.”47)
그리스도의 대속(satisfaction)은 부정적/소극적 의(negative righteousness)로써 죄 용서(칭의의 부정적 효과)를 위한 근거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순종은 긍정적/적극적 의(positive righteousness)로써 의인의 신분(칭의의 긍정적 효과)을 보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대속과 함께 순종이 필요한 것은 핫지가 에드워즈만에게서만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핫지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이론은 안셈(Anselm), 칼빈, 투레틴, 에드워즈로 이어지는 오랜 개혁주의 전통위에 서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당시의 초기 고백문들은 이런 구분을 하고 있지 않았다.”48) “그의 부정적 의는 속죄의 고난을 뜻하는 것으로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가 정의 요구를 만족시킨 것이고, 능동적 의는 삶과 행위의 기준인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동을 의미한다.”49) 여기에서 핵심적인 사상은 그리스도는 죄인을 대신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킨 대리자(vicarious substitute)라는 점이다. 율법은 법을 어긴 것에 대해 형벌을 가하는 것만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긍정적 측면에서 법이 요구하는 조항들을 다 지켜야만 마침내 법이 충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을 핫지는 간과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한 형벌을 감당하셨을 뿐 아니라, 완벽하게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의(righteousness)가 되시는 것이다.
비록 핫지가 능동적-수동적 구도를 따르기는 하여도,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그 구도 자체를 스콜라스틱하게 따르지는 않았다. “성경은 그런 구분을 명확히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에드워즈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이룬 것은 의 또는 순종이다”라고 하면서 “의”와 “순종”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롬5:18-19). “구분이 필요해지는 것은 단지 신자가 칭의 되는데 필요한 그리스도의 의로써 순종이 일부가 된다는 점이 부인될 때이다.”50) 즉 오늘날처럼 그리스도의 죄사함-우리에게는 죄용서-만이 강조되고 그리스도의 순종-우리에게는 의로운 자로서 보여야 될 모습-이 간과되기 때문에 부득불 구분해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해 지는 것일 뿐이다.
VI. 칭의와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완성된 의가 전가되어 어떻게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의되느냐의 문제는 핫지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핵심인 것을 핫지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특별히 “믿음으로” 칭의된다는 의미를 희석시키려는 시도가 예나 지금이나 교회를 위협하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핫지는 다분히 변증적인 논조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의 의미를 방어해 주고 있다.
1. 믿음의 의미
핫지는 믿음을 정의함에 있어서 일체의 공로 개념을 배제하고 있다. 그에게서 믿음이란 그리스도와 연합(unite)하는 것, 그리스도를 받는(receive) 것,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rest upon) 동작 외에 아무런 행위 개념이 없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믿음 때문에 (dia. pi,stin)”라는 용법은 없고, 대신 믿음을 말미암아, 믿음으로, (dia. pi,stewj, evpi. pi,stei) 등 만의 표현이 가능함을 핫지는 지적하고 있다.51)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아니며, 성경을 믿는 믿음도 아니며, 어떤 특정한 신적 약속을 믿는 믿음도 아니라 . . . 오직 하나의 구체적인 약속 즉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다.”52) 여기에서 핫지가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믿음의 정확한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라는 점이다. 종교적 체험도 감성도 믿음의 대상이거나 믿음을 대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핫지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칭의된다고 할 때, 믿음 때문에 칭의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즉 그리스도의 의만이 칭의의 근거가 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알미니안처럼 믿음 속에 순종의 의미를 포함시킬 때, 그것은 “복음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며, 복음을 율법보다도 덜 거룩한 것이 되게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는데 비해 복음은 불완전한 순종으로 만족해야되기 때문이다.”53) 칭의가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인 것이 핫지가 이해하는 이신칭의의 의미이다.
핫지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를 말한 것은 알미니안들이 부추기는 복음적 순종(evangelical obedience) 또는 진지한 순종(sincere obedience)도54) 믿음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는 강조이다. 왕왕 신앙생활에서 순종을 강조한 나머지 믿음 속에 순종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종교개혁 원리를 벗어난 명백한 알미니안 내지는 로마카톨릭 구원관이 된다.
핫지는 알미니안들이 칭의의 진정한 근거를 “믿음과 그 열매, 또는 믿음과 복음적 순종”에 둠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만이 칭의의 궁극적 근거임을 부정한다고 지적하였다.55) 여기에서, 핫지가 볼 때, 알미니안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칭의의 복음은 은혜언약에 속한 것이지 행위언약의 것이 아니라는 구분을 유지하지 못한데 있었다. 그래서 핫지에 따르면 알미니안이 주장하는 칭의의 조건은 결국 복음을 희석시키게 된다.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에서는 완전 순종이 하나님이 받으실 그리고 영생의 조건이었다. 복음 하에서는 그리스도로 인해 불완전한 복음적 순종이 칭의의 근거, 즉 그것 때문에 (propter quam) 하나님이 우리에게 죄를 사하시며 영생의 상급을 주시는 것이 된다.56)
알미니안의 주장에 따르면 아담과 우리가 다른 것이 아담에게는 완벽한 순종이 요구되었던 반면, 우리로부터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때문에 불완전한 순종도 받으신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순종, 즉 복음적 순종(evangelical obedience)은 칭의가 믿음만이(sola fide) 아니라, 믿음과 함께 불충분하더라도 최선을 다한 순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알미니안은 행위와 믿음의 명백한 구분을 무너뜨리고 소위 “복음적 순종 ”을 칭의의 조건의 일부로 삼았다.
알미니안에 따르면 칭의에서 우리가 배제하는 행위는 복음의 행위와는 구별되는 율법의 행위라고 본다. 아담과 맺은 언약에서 하나님은 완벽한 순종을 생명의 조건으로 요구하셨다. 복음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때문에 인간과 새 언약에 들어가셨고, 복음적 순종을 조건으로 구원을 약속하셨다. 이것이 여러 모양으로 표현되고 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믿음 때문에 칭의된다고 한다. 믿음이 아담과의 법이 요구하였던 완벽한 의를 대신한다. 그러나 믿음이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영접하거나 머무는 동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지속적이며 통제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순종의 믿음(fides obsequiosa), 즉 순종을 내포하는 믿음으로 칭의된다고 하는 것이다. 다른 때는 우리가 복음적 순종(evangelical obedience)에 의해 칭의된다고도 한다; 즉 복음이 요구하는 종류와 분량의 순종이며, 타락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충족한 은혜(sufficient grace)의 적절한 사용을 통해 감당할 수 있는 순종에 의해서다.57)
알미니안의 문제는 믿음과 복음적 순종을 동일 선상에 놓고 모두 구원의 조건으로 인정하데 있다. 핫지가 볼 때, 이것은 언약신학 구도가 유지되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문제이다. 즉 “오직 믿음으로”는 은혜언약의 방편인데, 여기에 같이 섞일 수 없는 행위언약의 방편인 순종을 어떠한 이름으로라도 믿음과 섞으려고 하는 것은 이미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의 자리에 다른 것(순종)을 두려는 시도는 그만큼 “오직 그리스도로”의 원리가 삭감되는 것이다. 핫지는 언약신학적 구도에서 행위(순종)와 은혜(믿음)가 같이 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갈라디아서 3:10과 로마서 3:20을 근거로 핫지는, 알미니안을 논박하며, 칭의에서 행위를 배제시킬 때, 모든 종류의 행위를 다 포함하는 것으로 말했다.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는” 칭의될 수 없는 것은 유대인이건 이방이이건 차등이 없다. 그것은 위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율법의 요구는 행위언약이 요구하였던 “완벽한 순종”이었고, 완벽한 순종이 아닌 복음적 순종은 율법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핫지가 볼 때, 복음적 순종은 행위언약 은혜언약 어느 것에도 조건관계에 있지 못하다. 핫지가 믿기는 바울에게서 이신칭의의 핵심 사상은 행위와 믿음 사이의 절대적 대립(absolute antithesis)에 있다. 즉 믿음으로 칭의되는 새 언약의 관점에서 복음적 순종을 믿음과 같이 강조하는 것은 분명히 새 언약이 아니며 그렇다고 옛 언약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행위-복음적 순종을 포함하여-는 믿음과 대립적 구도에 있는 것으로 강조하는 것이 핫지가 이해하는 바울이다. “우리가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칭의 된다. 이것이 다른 행위를 배제하는 또 다른 행위가 아니다. 복음적 순종 대신 법적 순종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은혜에 의한 행위 대신 자연적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종교적인 것 대신 도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아닌 모든 종류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은혜와 행위는 적대(antithetical)관계이다.”58) 율법이 의의 근거로 요구하는 것은 어느 것도 아닌 순종뿐이다. “만약 성경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은 순종에 의한 근거가 아니라는 말이다.”59)
여기에서 우리는 핫지로부터 매우 중요한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핫지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잘못은 자신들의 구원과 관련하여 결국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관계를 바로 알지 못한데 있었다. 이제는 은혜언약이 행위언약을 대신하고 있음을 모른 채, 그들은 행위언약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그토록 배척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언약으로서의 율법 즉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율법이 아직 유효하며,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개별적 순종을 통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으나, 그리스도가 이미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가 언약으로서의 율법을 폐기하셔서 사람들이 믿음으로 칭의되게 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율법을 단순히 한쪽으로 제처 놓음으로써가 아니라, 그 모든 요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율법의 종료를 가져왔다. 그는 단순한 용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스스로 저주가 되심으로 (갈3:13),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그는 율법 밑에 스스로 놓이심으로 (갈4:4-5) 그리고 모든 의를 완성하심으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구원하셨다.60)
여기에서 핫지가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하였다고 하는 의미를 우리는 매우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그리스도의 지속적 중보의 역할 속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지금도 율법을 완성시키고 있으며 고로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야할 필요가 남아 있다고 말하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핫지는 그리스도가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율법의 종료를 가져왔다”고 하였으며, 이것만이 종교개혁의 교리이다. 핫지는 율법의 완성의 의미 속에 율법의 저주(율법의 부정적 요구)와 율법의 의의 완성(율법의 긍정적 요구)을 포함시켰다.61) 율법은 종료 되었고 율법을 완벽하게 만족시킴으로서 그리스도가 획득한 의가 전가되는 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 밖에는 없다는 것이 핫지의 분명한 입장이다.
3. 칭의와 성화의 관계
핫지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매우 정교하게 구분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30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dikaiosu,nh)와 성화(a`giasmo.j)와 구원이 되신다고 한 것을 지적하며, 성화와 의를 정확하게 구분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성화(a`giasmo.j)를 한글개역성경과 NIV 성경은 “거룩”으로 번역하였고, KJV과 NASB은 “성화”로 번역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성화가 말하는 중심개념은 “거룩”으로 거룩과 의는 구분되는 것이고 바울은 이 구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반면, “의”는 정의의 요구를 충족시켰다는 의미에서 거룩과 구별된다. 핫지에게 있어서, 칭의와 성화의 분명한 구분이 유지되면서, 동시에 우리의 구원(칭의와 성화)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강조가 유지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내적 영적 삶의 근원이신 동시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칭의를 견고히 하는 그 의를 주시는 분이시다.”62) 칼빈, 에드워즈, 등과 마찬가지로 핫지도 칭의와 성화 모두 그리스도 안(evn Cristw/|)에서 누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핫지는, 또한, 구원서정(ordo salutis)에 있어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칭의와 성화 사이의 오해를 명확하게 막고 있다. “칭의는 성화에 대해 직접적인 원인이나 근거가 될 수 없다.”63) 많은 경우에 인과론적으로 칭의가 성화의 원인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스콜라스틱(scholastic)하게 그 둘만의 인과관계를 따질 때, 칭의와 성화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의미가 약화된다. 그러나 이 말이 칭의와 성화의 구분을 흐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핫지는 초점을 우선 “의”에 둘 것을 강조한다. 논리적/신학적으로 구분할 때, “의의 선물이 성화의 선물에 선행한다.” 고린도전서 1:30에서 의와 성화의 구별이 바로 그 것이다. 핫지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짐으로써 우리가 의롭게 여겨지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유기적 관계에 있으면서도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64) “우리가 용납되고, 칭의되고, 구원되는 것은, 우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not for what we are),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대신 해 주신 것에 근거한다.”65) 핫지는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칭의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해 진다. 그러나 그것이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만이 칭의의 근거임을 강조함을 통해서 핫지는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고 있다. 이 점은 앞에서 지적하였던 복음적 순종이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어느 순간이라도 우리의 의나 행위가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핫지가 강조하는 칭의의 믿음의 교리로 볼 때,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에 대한 오직 믿음으로 칭의된 결과요 열매이지 그것이 먼저 칭의에 작용할 수 없는 것이다.66)
칭의와 성화의 명확한 구분은 대칭적으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죄가 되었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고후5:21). 그리스도 자신이 도덕적 의미에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죄가 율법이 요구에 따라 그가 당하시는 수난의 법정적 근거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칭의를 위한 법정적 근거가 되는 것과 같은 구도라고 핫지는 설명하고 있다. 의의 전가나 죄의 전가 모두 법정적 개념이다. “죄의 전가가 그리스도를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의의 전가도 우리를 거룩하게 또는 도덕적으로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67) 법정적 칭의의 개념을 확고히함으로써 핫지는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4. 칭의의 자유
핫지에게 있어서, 더 이상 율법을 지키는 것이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 번 율법을 어기면, 율법에 의한 칭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율법이 요구하는 조건을 준수하지 못했고, 율법은 오직 그를 정죄할 수밖에 없다. 그 상황에서 그를 의롭다고 하는 것은 그가 결코 법을 범하지 않았었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68) 그러나 현실은 인간은 이미 범법하였고, 고로 정죄하에 있기 때문에 율법이 칭의의 방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하였듯이, 핫지에게는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핫지는 이 점에 대해서 구약성경도 이미 말하고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행위가 없는 (행위에 근거하지 않은) 칭의의 방법이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되었다고 말했다. 즉 이것은 구약성경 전체에 의해 증거되고 있다.”69) 즉 핫지는 로마서 3:10-12을 근거로 구약은 모든 인간이 다 죄인임을 널리 증거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구약은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로 칭의될 수 없다는 증명으로 가득하다”고 주장하였다.70) 핫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언약신학의 구도에서 볼 때, 이미 구속사의 진행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핫지의 칭의론(ordo salutis) 이해가 구속사적(historia salutis) 이해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이는 증거로서, 오늘날 우리가 조직신학에서 구원론을 구속사와 밀접한 관계에서 다루려는 시도에 앞서는 것으로 좋은 모범이 된다고 하겠다.
핫지에게 있어서 율법이 더 이상 칭의의 방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가 율법을 완성하였기 때문임을 이미 확인하였다. 그 말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이제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는 뜻이다. 이 때 이 자유함은 칭의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삶 전체, 즉 성화의 삶에서도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고 말함으로써 핫지는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그[바울]는 칭의에 있어서만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만 아니라, 성화에 있어서도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주장했다.”71) 핫지에게 있어서, 성화를 이룸이 율법을 이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전제되는 가운데 성화의 삶 자체가 이해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새 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자유함이, 핫지는 경고하기를, 반율법주의(antinomianism)가 아니다. 즉 “새 영”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영적 나태함(느슨함)이 아님을 강조한다. “율법의 저주가 제거되고 하나님과 화해되어서야 그 가슴에 거룩한 감화가 일고 삶 속에 거룩의 열매가 나타난다.”72) 핫지가 이해하는 개혁주의 경건은 율법에서 자유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과의 화해에 대한 확신이 가슴에 가득찰 때, 거룩에 대한 추구는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고로 핫지가 말하는 자유는 칭의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이는데서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관계란 “진리와 조화하는 관계, 우리의 내적 체험과 조화하는 관계, 우리 마음의 소원과 조화하는 관계”이다.73) 칭의의 결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관계를 말한다. 자신의 잘못된 동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자비의 보좌만을 바라보며 오직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즉 이 때 칭의된 자가 누리는 평화는 “단순한 용서의 확신에서 오는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의에 근거한 용서이기 때문에 오는 평화이다.” 즉 핫지가 강조가 죄사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인됨을 간과하고 있지 않으며, 이 특징은 칼빈이나 에드워즈의 칭의론과 일치하는 강조이다.
그러므로, 핫지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더 이상 무서운 주인이 아니라, 친절한 아버지이다. 순종은 더 이상 상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夫子)간의 사랑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다.”74) 칭의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의미가 달라졌다. “더 이상 칭의되기 위해서 일할 의무는 없어도, 감사와 사랑의 표현으로 모든 것을 하게 되었다.” 이 때 부자간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순종(흔히 말하는 율법의 제3의 기능)을 도덕적 감화의 결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핫지는 경고한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모범이 되심으로써 도덕적 감화로 거룩의 삶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제 칭의받은 자들의 반응은 무서운 주인에 대한 감화가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와 더불어 후사가 되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다.75) 우리가 후사라 함은 칭의를 통해 그리스도가 사신(purchase) 것들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단순히 용서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성령을 받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에게 오고 그만을 신뢰하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이다.”76) 핫지는 성령을 구원론적 의미에서 최고의 선물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칭의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만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주신 성령이 동시에 우리의 것이 된다는 아버지의 사랑의 배려가 포함되어 있다. 성령을 구원의 최고의 선물로 이해하는 것은 개혁주의 구원론의 가장 특징적인 설명이다. 핫지의 이같은 이해는 구속사적 진행 또는 계획과 부합하는 것이라는 점에 독특한 기여가 있다. 그래서 핫지는 칭의를 “구원을 위한 복음적 방법”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5. 복음의 탁월성과 구원의 확장
핫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 가장 큰 목적이라고 말하면서, 칭의의 교리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았다.77) 죄인을 칭의함에 있어서, 핫지는 말하기를, “사도바울은 구원의 계획이 하나님의 과분한 선하심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써 우리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절대 우리의 가치에 근거를 둔 일이 아니다”며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당신의 이런 신적 특성을 높이 드러내도록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78) 즉 값없이 거져 주시는 믿음에 의한 칭의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는 복음의 핵심으로, 인간은 칭의를 위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극대화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원을 통해 극대화되는 것은 그 구원이 열방을 향해 확산되어 나아갈 때 더욱 그러한 것을 핫지는 보고 있었다. 이 점은 특히 칭의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점에서 이방을 위한 가능성이 더욱 열렸다고 하겠는데, 핫지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스라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롬3:29-30).79) “칭의는 옹색하거나, 한 민족만의 것이거나, 한 분파만의 교리가 아니라, 그 교리는 지구만큼이나 넓다.”80) 즉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 칭의하시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의 하나님이며 모든 자의 아버지이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예찬하고 있다.
VII. 나가는 말: 21세기 한국교회를 생각하며
한국장로교 전통에 중요한 초석이 되는 핫지를 통해 우리의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다시 듣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특별히 그 정체성의 중심부위를 차지하는 칭의의 교리를 그가 어떻게 방어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었다. 본 논문은 핫지의 칭의론 분석을 마치며, 21세기 한국교회가 깊이 새기며 간직해야 할 부분을 다시 정리해 본다.
먼저, 핫지는 칭의의 교리를 지키는 일을 종교개혁을 지키며 계승하는 일로 알았다. 칭의의 교리를 지킨다는 것은 복음을 지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핫지가 이점에 대해서 로마 카톨릭이나 알미니안들에 내리는 경고는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을 가능한 한 희석시키고 교파간의 공통분모를 넖이려는 복음주의 정서가 진한 이 때에 여전히 유효한 경고임에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핫지는 “오직 믿음으로”를 지키는 것은 복음을 지키는 일로 알았다.
믿음 안에 순종(복음적 순종 또는 진지한 순종)을 포함시켜려는 정서는 결코 우리를 쉽게 해주는 복음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의)을 버리고 인간이 자기 의(순종)를 붙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복음이 될 수 없음을 핫지는 강조하였다.
오늘날 종교개혁의 핵심교리인 이신칭의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핫지가 보여준 것처럼 행위와 믿음과의 대립(antithetical)관계를 언약신학에 입각하여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 유대인들이나, 로마카톨릭이나, 알미니안이나, 오늘날 일관성을 상실한 복음주의자들이나 - 핫지가 볼 때, 공통적인 문제는 행위가 칭의에 기여하는 바가 있을 수 없는 것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관계에서 보지 못하거나, 일관성 있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위를 부추기는 노력은 오늘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위장하고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언약백성의 증거임을 두둔하며 칭의됨이 아직도 율법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의 견인(perseverance)에 의존하고 있는 구도를 말한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견인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그들도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지금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가 대신 그 율법을 지켜주신다는, 즉 현재적 시점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지속적으로 필요하게 되며, 전가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말하는 자들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이같은 논리는 로마카톨릭의 미사(mass)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반복적으로 거행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이미 율법을 완성하여 더 이상 우리가 율법을 충족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구속사역의 단회성(once and for all)을 부인하는 것이다.
핫지가 칭의를 방어하며 “오직 믿음으로”의 원리를 철저히 지켰다는 말이 개혁주의 신앙생활에서 잘못 있을 수 있는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를 낳는 것이 아니다. 칼빈을 비롯 개혁주의 전통은 칭의와 성화를 명확히 구분한다. 그러나 칭의된 자에게 성화가 있어야 되는 것은 유기적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먼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 칭의와 성화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칼빈의 구원론의 핵심 사상이고, 핫지에게서도 명백히 유지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 칭의는 있는데 성화가 없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칭의는 있는데 성화가 없는 것은 개혁주의가 아닌 반율법주의이다. 아마도 그것은 칭의교리 자체를 잘 못 가르쳐졌기 때문이다. 한국장로교의 뿌리인 핫지와 칼빈을 바로만 읽더라도 그런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핫지의 칭의론을 통해 크게 고무되는 것 중의 하나는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를 바로 알 때 하나님의 영광을 극대화하게 되며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거나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거져 주시는 은혜(free grace)만이 강조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크게 드러난다. 또 구원이 율법을 지킴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기 때문에 이 소식은 모든 백성을 향하여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다. 믿음으로 칭의된다는 것만으로 전도자의 동기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21세기를 맞이한 한국교회가 할 일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그 많은 일 가운데 우선적으로 확실히 해야 할 것이 복음을 바로 지키는 일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청중이 변한다 하여도 믿음으로 칭의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핫지도 그렇게 느꼈듯이 종교개혁의 과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1세기를 맞은 한국교회는 한국 상황 속에서 복음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계속해서 찾아내야 되며, 왜 그런 것들이 복음이 아닌지를 밝혀내는 작업을 계속 해야 할 것이다. 이 작업은 상아탑 속에서만 진행되는 일이 돼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교회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며, 복음사역을 임명받은 모든 자들이 같이 책임을 나눠야 할 일이다.
교회를 사랑했고, 영적으로 깨어있었던 19세기 장로교신학을 대표하였던 찰스 핫지가 실천했던 개혁주의 신학을 잘 이어받아 21세기 한국교회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충성되게 다음 세대에게 타협되지 않은 복음을 잘 물려줄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한다.
Soli Deo Gloria!
1) 개혁주의 여러 신학자들 중에서 핫지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를 길게 인용하며 다루고 있다, 사실 핫지는 자신의 칭의론을 전개해 나가는 과정 여러 곳에서 표현과 내용에 있어서 에드워즈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큰 무리가 아닌 것이, 에드워즈도 핫지가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프란시스 투레틴(Francis Turretin)에 깊이 심취되었었다. 그런 점에서 핫지가 하고 있는 개혁신학은 칼빈(John Calvin)에서 투레틴과 에드워즈를 거쳐 핫지에게 이어지고 있으며, 그 전통은 핫지 이후에도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와 박형룡에게까지 연장된다고 말하겠다. 여담으로, 에드워즈가 프린스톤의 3대 총장이였기 때문에 핫지는 에드워즈를 총장이라는 직함을 붙여 부르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2) Charles Hodge, The Way of Life (Philadelphia: American Sunday-School Union, 1906), 136.
3) 언약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칼빈을 전형적인 언약신학자로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언약신학이 하나의 완성된 신학체계로 등장한 것은 17세기에 들어가서 이기 때문이다. 즉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 신학의 독특성이 바로 구속언약, 행위언약, 은혜언약의 구조를 말하는 언약신학이다. 그렇다고 해서 칼빈에게 언약 개념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17세기의 완성된 형태의 언약신학 구조는 아니지만, 칼빈의 신학은 이미 언약신학의 틀 속에서 개진되고 있다. 피터 릴백(Peter Lillback)은 바로 이점을 부각시키며, 비록 칼빈이 17세기 기준의 언약신학자는 아니지만, 이미 그의 신학 속에는 17세기 정통주의가 말하는 언약신학 구조가 들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Peter A. Lillback, The Binding of God: Calvin's Role in the Development of Covenant Theology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1).
4) Hodge, Systematic Theology, 2:117. 이탤릭 강조는 저자의 것임. 앞으로 ST로 책명을 표기할 것임.
5) recapitulatio 개념은 일찍이 이레네우스(Irenaeus)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데 아담과 그리스도의 언약의 머리됨을 대비하는 개념이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아담이 지녔던 모든 대표성의 의미를 대신하며,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아담이 저지른 모든 것을 되돌이킨다는 의미이다. cf. Irenaeus의 Against Heresies.
6) Hodge, ST, 2:360.
7) ibid., 2:364-65.
8) ibid., 2:367-68.
10) 핫지는 로마서 4장을 주석하며 행위에 의한 칭의와 믿음에 의한 칭의는 서로 합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우리가 깬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칭의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것이다. 정죄하는 것은 칭의할 수 없다.” 즉 언약신학의 구도에서 믿음과 행위는 같이 갈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행위의 칭의가 아님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믿음의 칭의를 강조하고 있다. Hodge,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Grand Rapids: Eerdmans, 1886; reprint, 1968), 125.
11) Hodge, Way of Life, 150.
12) Hodge, ST, 2:359-362. 핫지는 구속 언약에 근거해 그리스도가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그 결과로 무슨 약속이 보장되었는지 말하고 있다. 조건으로 (1) 인성을 입으시고, (2) 율법 하에 놓여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셔야 되며, (3)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가 되시고 죄를 짊어지시는 것이 그리스도가 감당해야 할 일(work)이 되며, 그 조건을 완수하는 것에 대한 약속으로 성부는 (1) 그리스도가 입을 죄 없는 완벽한 육체를 마련하실 것과, (2) 무한히 성령을 부으셔서 인성을 입으신 중에 은혜와 능력을 채우실 것, (3) 사탄을 싸워 물리치는 과정에서 늘 우편에서 지지하실 것, (4) 죽음에서 일으키고 하늘보좌 우편으로 들어 높이실 것, (5) 그가 원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새롭게 하실 것, (6) 성부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모든 자들이 성부에게로 올 것, (7) 온 열방에서 무수히 많은 자들이 구원을 누리게 될 것, (8) 그리스도와 구속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증거 될 것 등을 이루시는 것으로 핫지는 제시하고 있다.
13) Hodge, ST, 3:158.
14) ibid.
15) Way of Life, 155.
16) ibid., 174.
17) ibid., 176.
18) ibid., 177.
19) 핫지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을 설명하기는 하였지만, 핫지는 대체로 1841년까지만 해도 율법의 부정적 측면-율법의 정죄와 심판-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대리적, 제사장적 죽으심-즉 죄를 대신 지심-은 물론 우리가 율법을 범한데 대한 값의 지불이다. 그러나 율법의 충족을 위해서는 율법의 긍정적 요구 또한 만족시켜야 한다. 이 점은 30년 후의 『조직신학』에 가서야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진다.
20) Hodge, ST, 3:155.
21) Hodge, Way of Life, 166.
22) ibid.
23) ibid., 167.
24) ibid., 171.
25) ibid., 173.
26) 즉 칭의가 믿음으로 되는 것인 이유는, 핫지는 말하기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의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ibid., 176. cf. 칼빈은 『기독교강요』, 4.17.2에서 mirifica commutatio 즉 놀라운 교통을 말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통해 우리와 나눈 놀라운 교통 (mirifica commutatio) 이다; 즉 우리와 더불어 인자가 되심으로, 그는 우리를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이 땅에 내려 오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하늘로 올라갈 길을 예비하셨다; 우리의 멸함을 취하시고, 그는 우리에게 당신의 불멸을 주셨다; 우리의 연약함을 받으시고, 우리를 당신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셨다; 우리의 가난을 받으시고, 그는 우리에게 당신의 부를 주셨다; 우리 무거운 죄를 지시고, 그는 우리를 당신의 의로 덧입히셨다.”
27) Hodge, ST, 3:127.
28) Hodge, Romans, 178.
29) 핫지는 터레틴 외에도 터크니(Tuckney), 오웬(Owen), 냅(Knapp), 자카리(Zachariae), 브레크쉬나이더(Bretschneider) 등을 인용하며 연합을 통해서 전가가 가능한 법정적 근거가 됨을 설명하고 있다. ibid., 179-180.
30) 여기에서 핫지는 터레틴을 근거로 주장을 펴고 있다. cf. 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9.9.10. 재인용 Hodge, Romans, 179. cf.이것은 루터(Martin Luther)가 말한 simul iustus et peccator와 같은 선상에 있는 말이다.
31) Owen, Justification, 242, 재인용 Hodge, Romans, 179.
32) ibid., 181.
33) 핫지는 하나됨(identity)의 의미가 실재론(realism)이 말하는 것처럼 숫자나 본질에서 하나가 된다든지, 사고나 의지에서 동일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못 박으며 실재론적 이해가 원죄의 전가의 교리를 정당하게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고 반박하였다. ST, 2:216-227. 이것은 당시 19세기 후반 쉐드(W. G. T. Shedd), 베어드(Samuel J. Baird), 쏜웰(James H. Thornwell) 등을 통해 주장되었던 실재론적 이해를 배경하고 있다. 더 나아가 랜디스(Robert W. Landis), 데브니(Robert L. Dabney)의 다소 불가지론적 입장에 대한 반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원죄의 전가에 대한 입장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George P. Hutchinson, The Problem of Origina Sin in American Presbyterian Theology (Phillipsburg, NJ: P & R, 1972)를 참조할 것.
34) Hodge, Way of Life, 138.
35) ST, 119-120.
36) ibid., 119.
37) 주권자의 유효한 선포의 예로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들 수 있다. 창조는 하나님이 선포한대로 유효한 결과를 낳은 것이 창조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칭의하시는 것은 죄인을 의인으로 유효하게 바꾸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ibid., 117-118.
38) ibid., 121.
39) 칭의의 정의로 죄 용서만을 말하는 것은 알미니안 신학이 된다. 이 점에 대해서 터레틴이 이미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며 칭의의 효과는 죄 용서와 영생의 권리라고 말하였다. Elenctic Theology, 11.4.1-13.
40) 여기에서 핫지는 좀 더 구체적이며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에 비해, 핫지가 큰 비중을 두고 인용하였던 에드워즈의 칭의론을 보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죄용서 이상의 것으로 영생의 근거가 되는 의를 이루었는지를 잘 설명해 주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율법의 형벌로 감당하는 속죄는 죄용서의 근거가 되는 반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 됨으로써 영생의 근거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Jonathan Edwards,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in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Edinburgh: Banner of Truth, reprint 1992), 1:636.
41) Hodge, ST, 3:129.
42) ibid.
43) ibid.
44) ibid., 3:143.
45) 이점에 대해서 칼빈은 아직 에드워즈나 핫지처럼 충분한 설명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46)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의를 하나의 순종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순종의 의미 속에는 그리스도의 적극적이며 자발적인 행동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즉 성부와의 구속언약을 성취하는 의미가 있음과 연결지었다. 그러나 하나의 순종을 통해서 확보한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는 속죄의 근거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물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순종은 부정적 의미에서 율법이 명한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써 의가 되셨고, 동시에 율법이 요구하는 긍정적 사항을 다 충족하심으로써 또한 의를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속죄를 그리스도의 순종이 영생의 상급을 확보하신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 둘을 하나의 순종 속에서 이해할 것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의의 양면적 의미가 우리의 칭의의 죄 사함과 영생의 특권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47) Edwards, "Justification," 1:639.
48) 핫지는 종교개혁 당시 가장 먼저 그리스도의 의의 개념을 속죄(부정적/소극적 의)와 순종(긍정적/적극적 의)으로 구분한 전통이 루터란의 “Formula of Concord” (1576)이라고 본다. “God on account of the total obedience which Christ accomplished (præstitit) for our sake before his heavenly Father, both in acting and in suffering, in life and in death, many remit our sins to us, regard us as good and righteous, and give us eternal salvation.” Hase, Libri Symbolici, third edition, Leipzig, 1846, 685, 재인용, Hodge, ST, 3:149.
49) W. G. T. Shedd,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New York, 1863), 2:341. 재인용, Hodge, ST, 3:149.
51) ibid., 3:169.
52) ibid.
53) ibid.
54) 복음적 순종, 또는 진지한 순종이란 알미니안 신학에서 믿음에 혼재되어 있는 순종을 말하는데, 이것은 오늘날도 많은 설교자들에 의해서도 강조되고 있다. “믿음으로(by faith)”의 삶을 산다는 것을 알미니안들은 인간이 완벽하게 “믿음으로”의 삶을 지켜내지 못하기 때문에 단지 인간이 최선을 다할 때 진지한 순종을 하나님이 믿음으로 한 것으로 인정하신다고 본다. 이런 논리는 그리스도의 의가 이미 우리의 죄사함만 아니라 의의 순종이 되셨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즉 “믿음으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가 죄사함의 근거가 되는 것은 받아들이지나 그리스도가 이미 순종을 통해 의를 이루셨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나의 최선을 다한 의에 의존하는 구도가 된다. 마치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부각되어 그 자체가 은혜인 것처럼 들릴 수 있으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만이 나의 칭의에 근거가 된다는 복음의 핵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55) Hodge, ST, 3:192.
56) ibid., 3:193.
57) ibid., 3:136-37.
58) ibid., 3:138.
59) Hodge, Way of Life, 147.
60) Hodge, ST, 3:156. 참고. “유대인들은 언약으로서의 율법이, 즉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되었던 율법이, 아직도 유효한 것으로 전제하며, 아직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개별적 순종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리스도가 율법의 종료를 이루셨다. 그는 언약으로서의 율법을 폐기하심으로써 사람들이 믿음으로 칭의되게 하셨다.” ibid.,
61) 이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안셀무스 이후 칼빈, 투레틴, 에드워즈, 핫지 등으로 이어지는 개혁주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이다. 그리스도의 계속적 의의 전가(continuous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를 말하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리로 회귀하려는 에큐메니칼 신학을 하는 자들의 매우 의도성이 있는 시도로 우리는 이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62) Hodge, ST, 3:157. 이것은 칼빈의 칭의론에 가장 특징적인 강조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이중은혜(duplex gratia)로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서 설명되어야 할 것으로 말하고 있다. 참조, 『기독교강요』, 3.11.1.
63) Hodge, ST, 3:157.
64) 칼빈 이후 개혁주의 전통이 지나치게 스콜라스틱한 방법을 취함에 따라 칭의와 성화와의 관계를 시간적인 선후의 관계로 생각하는 병폐가 생기게 되었고 고정된 구원서정을 주장하게 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의 역동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핫지가, 칼빈도 마찬가지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흐리는 것은 절대 아니다.
65) Hodge, ST, 3:157.
66) ibid., 3:173.
67) ibid., 3:157.
68) Hodge, Way of Life, 143.
69) ibid., 146.
71) ibid., 151.
72) ibid., 154.
73) ibid., 183.
74) ibid., 185.
75) 이 점은 칼빈이 말하는 율법의 제3의 용법과 일치한다. 칼빈은 신자의 경우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해주고, 순종의 삶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cf. 『기독교강요』, 2.7.12.
76) Hodge, Way of Life, 186.
77) ibid., 178. 이 사상은 에드워즈의 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상과 일치한다. 그는 “창조의 목적(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에서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으며, 구원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최대의 사건이라고 밝히고 있다. 존 파이퍼(John Piper)가 주석한 『하나님의 열심』(God's Passion for His Glory)이라고 번역된 책이 에드워즈의 “창조의 목적”을 주석한 것이다.
78) Hodge, Way of Life, 180.
79) ibid., 181.
80)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