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에디트 에바 에거 지음. 안진희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4.
오늘 세상은 당신에게 친절한가?
- 인간은 공감하는 존재, 같은 일을 겪고도 별개의 고통을 느끼지만 서로 다른 삶을 영위하면서 같은 결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고통은 빼닮게 마련이고 모든 존재에게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다.
- 마음이 삶을 괴롭힌다면 차라리 함께 그 고통을 바라보자. 심연 속에서 고통이 말하는 진실에 눈을 뜨자.
- 나를 희생자로 만드는 것은 그 사건보다, 내가 지지해온 희생자라는 믿음이다. 가치 없는 존재라고 누군가가 나에게 내린 평가가 아니라 내가 그 평가를 온전히 믿고 있기에 상처를 받는다. 더 위대한 진실은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고, 이미 잃은 것에 관심을 기울일지, 아니면 지금 지닌 사랑에 힘을 보탤지 당장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오늘 세상은 당신에게 친절한가? 세상의 태도는 나에 관한 내 믿음에 달렸다. 정작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자신에게 친절한가? 매일 마음의 화분을 돌아보며 물을 주고 온정을 쏟아 붓고 있는가? 마음에 사랑을 쏟아 놓을지 분노와 냉소를 쏟아놓을지 오늘 당장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비밀을 가졌고, 비밀은 나를 가졌다.
- 누군가가 치유하겠다고 스스로 선택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수년 동안 얼어붙은 채 있을 수 있다.
- 우리가 우리의 진실과 이야기를 억지로 숨길 때, 비밀들은 그것 자체로 트라우마가 되고 그것 자체로 감옥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수용하기 거부하는 것들은 고통을 줄여주기는커녕 감옥의 벽돌 담장과 쇠창살처럼 우리를 감옥에 가두고 절대 탈출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자신에게 자신의 상실, 상처, 실망을 애도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것들을 계속 다시 체험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 우리는 인정, 관심, 애정에 굶주려 있다. 우리는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자유에 굶주려 있다.
- 희생되는 것과 희생자 의식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우리는 모두 삶의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희생될 수 있다(유감이지만 나쁜 일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난다). 이에 반해, 희생자 의식은 내면으로부터 발생한다.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우리를 희생자로 만들 수 없다.
- 한 사람의 슬픔을 다른 사람의 슬픔과 비교하여 상대적 중요도를 표시할 수 있는 그래프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생존자가 되는 것, 번성한 사람이 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절대적인 수용을 요구한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삶의 역경들에 대한 혼란이나 고립감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을 꾸짖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희생자가 되기로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있는 것이다.
- 우리 삶의 작은 속상함은 더 커다란 상실의 상징일 경우가 많다. 겉보기에 사소해 보이는 걱정거리들이 더 커다란 고통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 생존자들은 ‘왜 나야?’라고 물을 시간이 없다. 생존자들에게 유일하게 적절한 질문은 ‘왜 지금이야?’이다.
- 우리는 상처에서 자유로운 삶을 선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롭기로 선택할 수 있다.
1부 수용소
-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 조건적인 어떤 것-능력에 대한 보상, 자신이 만족하는 무엇-일 때가 많다.
- 아마도 모든 어린 시절은 우리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정확히 집어내려 애쓰는 공간일 것이다. 또한 우리가 자기 가치의 크기와 경계를 살펴보는 지도일 것이다. 아마도 모든 삶은 우리가 가지지 않았지만 가졌으면 하는 것들 그리고 우리가 가졌지만 가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연구하는 과정일 것이다.
-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이미 잃은 것에 관심을 기울일지 아니면 아직 가지고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일지
- 신은 죽음의 수용소를 운영하지 않는다.
2부 탈출
-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 대신에 결정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3부 자유
- 도망치는 방법으로는 고통을 치유할 수 없다. 도망은 고통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 어둠을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빛을 밝히기로 선택할 수 있다.
- 내가 내 마음에 새긴 것은 아무도 내게서 뺏을 수 없다.
-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네’라고 말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 문제는 언니들이 이 노래를 불렀던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이 노래를 믿었다는 것이다.
- 자기 자신이 온전히 존재하기 전까지는 우리도 존재할 수 없다.
- 어떠한 누구도 나의 자유에 책임이 있지 않다. 오직 나만이 책임이 있다.
- 무엇을 하든 어차피 50살은 된다.
- 완벽주의는 무언가가 망가졌다는 신념이다. 바로 ‘자기 자신’ 말이다.
- 나는 내담자들의 신체 언어를 읽는 법과 내 신체를 이용하여 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수용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팔짱을 끼거나 다리를 꼬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활짝 연다. 시선을 맞추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나와 내담자 사이에 다리를 만든다. 그들이 내가 그들과 100퍼센트인 채로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말이다. 나는 완전한 수용의 표식으로써 내담자들의 상태를 거울을 비추듯 그대로 따라 하기도 한다.
- 우리가 선택의 자유를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현재 뿐이다.
- 감정을 억압하는 것은 감정을 떠나보내는 것을 더 힘들게 만들 뿐이다. 표현은 우울의 반대말이다.
- 거식증, 이는 통제가 전부인 질환이다. 무엇을 ,언제 먹을지 혹은 먹을지 말지에 대한, 무엇을 드러낼지 혹은 감출지에 대한 끊임없는 규칙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통제하는 일에 전문가이기 때문에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그 사람의 통제 욕구를 누그러뜨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와 동시에 명확한 규칙과 의례적 절차가 있는 안전하고 구조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 거식증을 앓는 내담자에게는 이 처음 몇 순간들이 중요하다. 거식증에는 피할 수 없는 심리적 측면이 있다. 신체에 투입되는 영양소가 부족한데다. 조금밖에 없는 칼로리는 자율기능(호흡, 배설)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기 때문에, 두뇌는 혈류를 빼앗기게 되고, 이는 왜곡된 사고로 이어지고 심한 경우 편집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 거식증을 앓는 사람은 음식을 제외한 채 삶의 요소들을 보기 어렵다.
-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효과가 있는가? 그것은 나의 목표에 나를 더 가깝게 데려다주는가, 아니면 더 멀리 떨어뜨려 놓는가?
- 부모가 아이들에게 특정한 이름을 붙이면 아이들은 게임을 하기 시작한다.
- 우리가 슬퍼할 때 그것은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슬퍼한다.
- 그래요. 제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말해주세요.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조금 더 잘 이해하도록 당신이 도와줄 수 있을까요?
- 분노는 가치가 아니다. 분노는 감정이다. 분노는 당신이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노는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 느낄 수 없는 것을 치유할 수는 없다.
- 분노라는 가면에 의해 가려져 있는 진짜 감정은 대개 두려움이다, 그리고 인간은 사랑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두려움의 신호를 중단시킬 수 있다.
- 때때로 우리 삶의 가장 끔찍한 순간들, 즉 추악한 욕망으로 우리를 빙빙 돌게 만드는 순간들, 참기 힘든 고통으로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순간들이 사실은 우리에게 자신의 가치를 알게 해주는 순간들이다. 이는 우리 자신이 과거 전부와 미래 전부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삶의 바퀴를 가지고 무엇에 동력을 공급할 것인가?
- 대부분의 사람은 독재자를 원한다. 책임을 전가하고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당신이 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어, 내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우산 아래에 서 있으면서 자신의 몸이 젖고 있다고 불평하며 일생을 보내서는 안 된다. 희생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외부에 초점을 맞추고 내다보며, 현재 상황에 대해 책망할, 혹은 자신의 목적, 운명, 가치를 결정할 누군가를 찾는 일이다. 내가 반대편 자리에 (가해자)나 상실감을 놓는다면, 나는 어떻게든 정당화 할 수 있고, 핑계거리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거야. 그들의 책임을 지지 말아야 한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면 현재 선택하는 일들에 대해 반복해서 과거에 책임을 지울 수밖에 없다.
- 우리는 두려운 것, 고통스러운 것을 부정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회피한다. 그런 다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환영하고 수용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러고서 우리는 마침내 그것을 떠나보낼 수 있다. 이는 치유의 과정이다.
- 용서하는 것은 슬퍼하는 것이다. 일어난 일에 대해,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그런 다음 다른 과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삶을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 현재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망가짐에 대한 유일한 해독제는 온전한 자아다.
- 네 안의 광신자를 발견하라. 너의 내면에서 사람을 판정하고, 딱지를 붙이고,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폄하하고, 다른 사람을 과소평가하는 부분을 찾아라.
4부 치유
- 우리의 고통스러운 경험들은 부채가 아니다. 그것들은 선물이다. 우리에게 삶의 관점과 이미, 자신의 고유한 목적과 고유한 힘을 발견할 기회를 선사한다.
- 내가 생각하는 자유의 춤의 첫 단계는 자신의 감정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감정을 억압하고, 회피하고,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그만두고 자기 자신의 감정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감정을 수용하고 난 후 자신의 신체 반응을 확인해야 한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은 오직 감정일 뿐이다. 일단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그 감정에 책임을 지고 나면, 우리는 인간관계를 결정짓는 역학 관계 속에서 자신이 하는 역할을 인정하고 그 역할에 책임을 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 성질을 부리면 그 순간에는 자신이 강하다고 느껴질지 몰라도 실제로는 힘을 넘겨주는 셈이다. 힘은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힘은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 용서란 가해자가 한 짓에 대해 그를 용서하는 일이 아니다. 당신이 희생자가 된 자신의 내면을 용서하고 모든 책망을 떠나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 과거와의 반복적인 만남은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해소하는 대신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트라우마 에피소드를 다시 체험하는 일은 젛대적 안정성을 담보로 행해져야 한다.
- 분노 없이는 용서도 없다.
- 시간은 우리를 치유하지 않는다. 우리가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가 우리를 치유한다. 우리가 스스로 책임지기로 선택할 때,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기로 선택할 때,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상처를 드러내고 슬픔을 떠나보내기로 선택할 때, 치유는 가능하다.
- 우리는 진실을 이해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우리는 자신의 실수에 책임을 지고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이유와 설명을 원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이 타당하기를 원하낟. 하지만 왜라고 묻는 것은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고, 자신의 죄책감과 후회와 계속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통제할 수 없고 우리는 과거를 통제할 수 없다.
-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온다고 믿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에게 보내진다고 믿는다.
- 그들은 내게 치유가 회복의 문제가 아닌, 발견의 문제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내게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대답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대답을 발견하고,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라는 사실을 발견하도록 가르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