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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요한(1762∼1836)
이 글에서 정약용 요한의 삶과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네 단계로 나누고 그 연도별로 살펴보았다.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 결혼까지이다. 두 번째 단계는, 1779년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시작으로 천주교 교리에 심취하고 입문하여 세례를 받은 것과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으로 체포되던 때까지이다. 세 번째 단계는, 1818년 유배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그의 신앙과 학문에 대한 평가이다. 이 글은 인터넷에 올라있는 정민 교수의 ‘다산독본’을 주로 요약하였다. 그 외 다른 전문가들의 글을 참조 편집하였다. (아주 약간의 개인적 생각을 덧붙였다) 정약용 요한에 대해 자세한 독서와 연구를 원하는 분은 정민 교수의 ‘다산독본’을 직접 읽으시길 소개드린다.
가. 첫째 단계(1762~1776)
정약용의 생애는 첫째 단계는, 출생 이후부터 결혼까지이다.
1. 출생
정약용 요한은 1762년 6월 16일(음력)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현리(現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이며 저술가이다. 호는 사암(俟菴) 열수(洌水)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천주교에 입문하였고 세례명은 요한(한자식 표기:약망若望)이다.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은 네 명의 부인 사이에서 모두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 부인 의령 남씨는 큰아들 약현을 낳고 사별하였다. 정재원은 재혼한 둘째 부인 윤소온과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의 3남 1녀를 두었다. 윤 씨의 별세 후 정재원은 다시 황 씨를 첩으로 들였으나 사망하였고, 1773년에 김 씨와 결혼하여 3녀 1남(정약황/횡)을 두었다. 다산이 태어나던 해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뒤주 안에 갇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은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였는데 6월에 정약용이 태어나 아호를 귀농(歸農)이라 지었다. 벼슬을 탐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말고 농촌에 귀의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하는데, 그는 종교와 당쟁의 파란만장한 격랑에 휘말려야 했다.
2. 가문
사회적으로 정약용의 가문은 11대 조상부터 8대에 걸쳐 홍문관에 이름을 올리는 벼슬을 하였으나, 당시엔 권세와 별로 가까운 처지가 아니었다. 교회사적으로 본인은 물론이고 피를 나눈 형제들과 가까운 친인척들이 조선 천주교회 창설과 발전에 관련된 중요한 인물들이다. 조선 천주교회 창립자인 이벽 세례자 요한은 큰 형 약현의 부인으로 사돈이 된다. 조선천주교 공동 창립자인 이승훈 베드로는 친누이의 남편으로 매형이 된다. 1801년 박해시 참수된 정약종과 흑산도에 유배된 정약전은 친형제들이다.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은 맏형 정약현의 딸 정난주의 남편으로 조카사위가 된다. 1791년 진산사건의 윤지충은 외사촌이다.
3. 결혼
정약용은 1776년 홍화보의 딸 풍산 홍씨와 결혼하여, 장남 학연 차남 학유등 6남 3녀를 낳았으나 4남 2녀가 천연두로 요절하였다. 이 외에 유배지에 얻은 부인과의 사이에 서녀 정홍임이 가 있다.
4. 학문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영특했고 학문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학문습득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부친에게 배우거나 독학하였다. 정약용이 태어나고 자란 경기도 양주부 양근(楊根) 일대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새로운 학풍을 형성해 가던 곳이었으며, 그의 친인척들도 이곳의 학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1776년 결혼하면서 처가가 있는 한양을 자주 드나들었고, 같은 해 아버지 정재원이 호조 좌랑에 임명되면서 한양으로 이사하면서 가까운 친인척인 이 벽, 이승훈, 이가환과 전격 교류하였다. 이가환은 종조부 성호 이익의 학맥을 계승한 대학자로 이승훈의 외삼촌이다. 정약용은 이들과 연결된 학문적 영향을 받으며 실학적 사상의 토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나. 두 번째 단계(1779~1801)
정약용의 생애에서 두 번째 단계는 1779년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시작으로 천주교 교리에 심취하고 입교하여 세례 받은 시기와를 포함하여, 1783년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으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1. 1779년
1) 강학회
성호 이익의 제자이며 남인 대학자인 권철신이 1779년에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문하생들과 강학회를 개최하였다. (강학 연대는 1777년(달레)과, 1779년(조선왕조사료) 두 주장이 있는데 후자의 신빙성이 더 인정되어 1779년으로 보고 있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이 강학에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형제, 이승훈, 김원성, 이총억(이기양의 아들), 권상학(권일신의 아들)등 20대 학자들과 그 10대의 자제들이 참여하였다. 조금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이 벽이 자발적 적극적으로 찾아가 합류하였다. 원래 강학의 취지는 유학을 연구하는 것이었는데, 이 벽의 의도적인 가담과 주도적인 토론으로 유학과 더불어 천주학 교리서의 탐독과 토론이 이어졌고 그 내용의 일부를 행동으로 실천하였다. 이 벽은 이미 상당 기간 천주학서들을 탐독 연구하면서, 서학이 학문의 경지를 넘어선 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10여 일간 계속된 천진암 강학회는 천주교 신앙의 발상지가 되었다.
2. 1784년
1784년은 정약용의 생애에 큰 전환점이 있었던 해이다. 이 벽으로부터 교리를 듣고 천주교에 매혹되었으며, 과거시험에서 진사(進士)가 되었다.
1) 선상 교리
정약용은 1784년 4월 15일(음력) 큰 형수의 제사에 참여하고 귀경하던 중, 배 안에서 사돈 이 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들었다. 정약용은 훗날 중형 정약전을 위해 쓴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서 이때 일을 이렇게 적었다. “우리 형제는 이 벽과 함께 한배를 타고 내려오다가 배 안에서 천지조화의 시작과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의 이치에 대해 들었다. 멍하니 놀라고 의심스럽기가 마치 은하수가 끝없는 것만 같았다.” 이 벽의 첫 선교 대상은 정약용 형제들이었고 그들은 즉시 매혹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약용은 한양으로 돌아온 뒤에 또 이덕조를 찾아가 《천주실의(天主實義) 와 《칠극대전(七克大全)》 등 몇 권의 책을 탐독하며 서교(西敎)에 심취되었고, 같은 해 매형 이승훈으로부터 정약용은 ‘약망(若望)=요한’으로, 정약전은 안드레아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이 벽, 이승훈, 권 일신 등과 교류하며 천주교 가르침을 연구하고 조선 천주교회가 창립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2) 진사(進士) 합격
정약용은 1783년에 증광시(세자책봉 경축시험)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1784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진사’는 초급 문관으로, 중급 과거 응시와 성균관 입학 자격이 주어진다.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3) 벗이며 스승인 이 벽
1784년 4월 15일(음력) 이벽으로부터 선상 교리를 들은 11일 뒤인 1784년 4월 26일, 정조 임금은 성균관 학생들에게 ‘중용’에 대한 70가지 조목의 질문을 내리고 답변을 명령했다. 정약용은 이벽에게 도움을 청해 1등을 하였다. 답안 내용이 특별하여 정조 임금이 놀랐고 극찬하였다. 정약용의 ‘중용’ 답변은 이 벽이 천주실의를 인용한 서학적(西學的) 이해가 깊이 깔려 있었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 시기인 1814년 ‘중용강의보’를 마무리 짓고 나서 서문 끝에 이렇게 썼다. “위로 광암 이벽과 토론하던 해를 헤아려 보니 또한 이미 30년이 흘렀다. 광암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더라면, 덕에 나아가고 박학한 것을 어찌 나와 견주겠는가.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정약용은 그때 자신의 중요 해석이 이벽에게 빚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벽은 정약용에게 진리와 학문의 벗이며 스승이었다.
3. 1785년
1) 명례방 집회 사건
1784년 1월 이승훈 베드로는 북경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3월에 귀국하였다. 1784 초겨울부터 이 벽과 이승훈은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권일신과 그의 아들 권상학, 정약용과 정약전등 양반들을 대상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이로써 조선 천주교회가 태동된 것이다. 이어서 중인 신분인 김범우, 최인길, 지황, 최창현, 이존창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수표교 이벽의 집에서 멀지 않은 장악원(掌樂院)앞 역관 김범우의 집으로 옮겨 집회를 하였다. 이것을 '명례방 집회'라고 한다. 집주인 김범우 토마스는 정약용 형제들과 먼 인척으로, 그는 이벽에게서 가톨릭 교리를 배웠고, 1784년 겨울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1785년 3월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을 위시하여, 이승훈 권일신 부자(父子), 정씨 형제들,이윤하, 이총억, 이정섭등이 집회를 하던 중 형조의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형조판서 조화진은 이들이 대부분 양반들과 그 자제들임을 알고 훈계 방면하였고, 중인 김범우만 투옥하여 모진 형벌을 가하며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김범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서학에는 좋은 것이 많고 그른 것은 모르겠다.”라고 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김범우는 유배지에서 ‘도배형’(徒配刑=노동의 형벌)의 유배에 처해졌고, 고문의 형벌로 생긴 상처로 몸이 약해져 1786/7년에 선종했다.
명례방 집회 적발 사건이 알려지자 천주교를 배척하는 유생들이 상소하며 사교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촉구하였고, 반천주학 저서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저서와 통문들이 나돌자 이벽과 이승훈, 정약용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들의 부친과 문중은 즉각 강력한 제지에 돌입했다. 이벽은 문중과 부친의 박해와 갈등 끝에 의문사 되었고, 이승훈도 벽이문을 짓고 배교하였다. 정약용은 정씨 집안을 일으킬 희망이었다. 부친 정재원도 정약용을 압박하여 정약용은 천주교를 배격한다는 시를 지었다. 그 시가 ‘여유당전서’에 실려 전한다.
이벽은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처남으로 정약용 보다 여덟 살 위였다. 정약용은 이벽을 부를 때면 늘 앞에 ‘우인(友人)’ 또는 ‘망우(亡友)’란 말을 붙이곤 했다. 마음이 통하는 벗으로 여긴 것이다. 이벽은 정약용에게 벗이며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이벽이 명례방 집회 사건 이후인 1785년 갑작스레 의문사하자, 정약용은 「벗 이덕조 만사(友人李德操輓詞)」로 이렇게 추모하였다.
- 벗 이덕조 만사(友人李德操輓詞) -
선학(仙鶴)이 인간 세상 내려왔던가 훤칠한 풍모가 드러났었네.
깃 촉은 눈처럼 깨끗하여서 닭과 오리 시기해 성을 냈었지.
울음소리 하늘 높이 울려 퍼지면 소리 맑아 풍진 위로 넘놀았다네.
가을 바람에 홀연 문득 날아가 버려 구슬피 사람 마음 애닯게 하네.
4. 1786년
1) 교회재건 활동과 과거 준비
1786년 정약용은 과거시험 준비에 힘쓰는 한편, 매형 이승훈과 권일신등이 주축이 된 천주교 재건에 드러나지 않게 힘을 보태고 있었다. 과거 공부에만 온전히 몰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번번이 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시는 결과로 이어졌다. 1786년 2월 3일 별시 초시에 합격하고, 사흘 뒤인 2월 6일의 복시, 즉 2차 시험에서는 불합격했다. 1786년 4월 중순 이후 정약용은 성균관 유생의 본분으로 돌아와 과거시험 준비에 다시 매진했다. 그 결과 1786년 8월 6일, 창덕궁 춘당대에서 열린 제술 전강에서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대과(大科) 전시(殿試)에 곧장 응시하려면 수석을 해야 했다. 등수 하나 차이로 대과 응시기회가 물 건너갔다. 과거에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렇게 되자 정약용은 크게 갈등했고, 그로 하여금 천주교로 다시 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2) 자치교회와 신부(神父) 활동
1785년 명례방 집회 사건과 이벽의 급서로 잠시 교회는 와해 위축되었다. 이런 교회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1786년 봄의 일이다. 1년이 지나는 사이, 가문과 부친들의 감시망이 느슨해졌고, 조정의 천주교에 대한 반대 분위기도 한결 가라앉았다. 1786년 가을 이승훈과 지도자급 인사들이 다시 교회로 복귀했다. 교회는 이벽이 이끌던 빈자리에 이승훈을 책임자로 세웠다. 이들은 교세의 확장과 더욱 조직적으로 운영할 필요를 느껴 가성직 제도를 결성하였다.
이승훈은 중국교회 방문 시 목격한 성직자를 중심으로 한 교회를 관리 운영할 10명의 신부(神父)를 임명했다. 이를 교회사 용어로는 ‘가성직(假聖職) 제도’라고 한다. 1789년 말에 이승훈이 북경 천주당의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참조하면, 1786년 가을 가성직 제도를 만들어 10명의 신부를 임명하여 활동했다고 한다. 정약용도 그중 한 명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승훈이 임명한 신부 10인의 명단은 달레의 ‘조선천주 교회사’에 나온다. “권일신 프란치스꼬 사베리오가 주교로 지명되고, 이승훈 베드로, 이존창 루도비꼬 곤자가, 유항검 아우구스띠노, 최창현 요한, 그 밖의 여러 사람이 신부로 선출되었다.” 임명한 신부가 10명이라 했는데, 확인된 명단은 권일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 5명뿐이다. 별도의 기록에 홍낙민과 최 야고보가 더 보인다. 나머지 확인되지 않은 3명은 누구일까? 적어도 이 중 두 사람은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이다. 두 사람은 조선 교회의 출범 당시부터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두 사람의 이름이 어째서 빠졌을까? 달레가 애초에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에서 이 기록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정약용이 천주교 활동에 한참 열을 올렸던 1785년과 1786년, 그리고 26세가 되던 1787년 3년간 ‘사암연보’의 기사를 보면 성균관 유생으로 각종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내용밖에 없다. 천주교 관련 사실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정약용은 이 부분을 기술하면서 자기 형제의 실명을 빼고 ‘그 밖의 여러 사람’ 속에 숨어버렸다.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은 이승훈이 임명한 10명의 신부 속에 포함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정약용이 신부로서 활동하였다는 또 다른 신빙성은 정미년 반촌 사건의 장소 제공자 김석태에 대한 정약용의 제문이다.
3) 김석태에 대한 정약용의 제문
1786년경 천주교의 본부는 한양의 난동과 반교 두 곳에 있었다. (난동은 지금의 회현동으로 정약용의 집이 있었다:고난의 밀사, 차기진 신부) 이중 반교는 정미 반회사건이 일어난 김석태(金石太ㆍ정약용은 ‘錫泰’로 썼다)의 집이었다. 정약용은 김석태가 세상을 떴을 때 그를 위해 제문을 지었는데, '여유당전서'에 '제숙보문(祭菽甫文)’에 실려 있다.
지극 정성 하늘 뚫고 지극한 정 땅과 통해.
나를 위해 잠을 깨고 날 위해서 잠들었지.
가정에는 소홀해도 날 위해선 꼼꼼했고,
세상일엔 느렸어도 내 일에는 재빨랐지.
내 잘못을 지적하면 크게 성내 칼 뽑았고
나 좋다는 사람에겐 그를 위해 몸 바쳤네.
혼마저도 배회하며 내 곁에 여태 있네.
저승 비록 멀다 하나 가서도 날 생각하리.
정약용은 천주교 관련 기록을 극히 제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석태와 깊은 친분을 대놓고 드러낸 이 기록은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친분과 천주교에 대한 두 사람 특히 정약용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반촌 김석태의 집은 천주교 교리 공부를 위해 어쩌다가 임시로 잠깐 빌려 쓴 공간이 아니었다. 이곳은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재건을 위한 중요한 연구와 모임이 이뤄지던 중심 공간이었다. 김석태는 중인 신분으로 그 장소를 제공하고 지키면서 정약용의 보좌 역할을 맡았던 충직한 집사였다. 이 자료는 정약용이 10인의 신부 중 한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또 다른 증거다.
5. 1787년
1) 구리개 교리
1787년이 되었다. 정약용은 1월 26일과 3월 14일의 반제(泮製)에 합격했고, 3월 15일에는 전(箋)부문에서 수석을, 교훈을 담는 잠(箴) 방면에서는 차석을 차지했다.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이 사도시(司導寺) 주부(主簿)로 임명되더니, 바로 한성부 서윤(庶尹)으로 옮겼다. 정재원은 5월에 소룡동(小龍洞)에 새 거처를 마련해 정약용 내외를 불렀다. 정재원으로서는 아들 정약용에게 곁에 두고 대과(大科)준비에 매진하게 하는 동시에, 여전히 천주교에 관여된 아들을 감시하려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소룡동은 오늘날 종각에서 명동 쪽으로 가는 중간 을지로 입구 어귀에 있던 동네였다. 이곳의 나지막한 고개는 황토라 땅이 질었다. 멀리서 보면 구릿빛이 나서 동현(銅峴) 즉 구리개라 불렀다. 이 시절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적 정황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이기경이 ‘벽위편’에 남긴 증언이다.
“정약용이 동현(銅峴)=구리개에 살 때 일이다. 이웃에 한 중인이 살고 있었는데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은 아들을 가르쳐달라고 청했다. 성품이 자못 총기가 있고 지혜로워서 정약용이 몹시 아꼈다. 근처에 산 지 한 달 만에 마침내 책 한 권을 가르쳤다. 하지만 아침과 저녁에 밥 먹으러 제 집에 갈 때는 그 책을 가지고 가지 못하게 했다. 그 사람은 대궐 안의 여러 잡무를 맡아보는 액정서(掖庭署)의 아전이었다. 마침내 그 아들에게 틈을 타서 배우는 책을 가져오게 했더니, 바로 사서(邪書) 즉 천주교 책이었다. 그 책이 위로 임금의 귀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정약용이 또한 오래도록 벼슬길에 들지 못하였다.” 정약용은 대과(大科)과거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그 와중에 이웃 중인의 자식에게 천주교 교리서를 가르치고 있었다.
2) 이승훈과 정약용의 백지 답안
정약용은 1787년 8월 21일 반제(泮製)에 합격했다. 8월 24일에는 중희당에 입시해 정조를 뵙고 ‘병학통(兵學通)’을 상으로 받았다. 이때 정조가 자신을 무장(武將)으로 키울 뜻을 비치자 정약용은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할 결심을 굳혔다. 11월 17일의 황감제(黃柑製) 특별 시험에는 답안조차 제출하지 않았고, 12월의 반제(泮製)에서는 형편없이 낮은 등수를 받아 한 번 더 임금을 실망시켰다. 이 일이 있고 며칠 뒤인 1787년 11월 17일에 제주에서 진상한 귤을 나눠주며 특별히 시험을 보는 황감제(黃柑製) 과거가 열렸다. 제목은 ‘한나라 분유사(枌楡社)’에 관한 것이었다. 한고조(漢髙祖)가 분유(枌楡), 즉 느릅나무를 한나라 사직단의 신주목(神主木)으로 정하고 이곳에 봄 2월과 납월(음력 섣달)에 양과 돼지로 제사 지내게 한 고사를 가지고, 국가의 제사와 관련해서 써야 하는 글이었다. 이승훈은 문제를 받아 들더니 굳은 표정으로 입을 꽉 다물고 팔짱을 낀 채 답안지에 한 구절도 쓸 생각이 없었다. 이기경이 어째 그러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 자못 놀라웠다. “천주학에서는 천주 외에 다른 신에게는 제사를 지내지 않네. 다른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을 뿐 아니라, 이 같은 글을 짓는 것조차 큰 죄가 된다네.” 이승훈은 끝내 한 글자도 안 쓴 채 과거장을 나왔다. 과거시험 때마다 자신이 받은 등수와 채점관의 이름까지 꼼꼼하게 기록해둔 정약용의 연보에도 이날 황감제(黃柑製)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다. 왜일까? 정약용 또한 이날 이승훈과 마찬가지로 백지 답안지를 제출했다
3) 반촌 사건
1787년 10월경, 이승훈과 정약용이 천주학을 다시 숭상한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당시 이승훈은 처남인 정약용 형제와 더불어 난동과 반교 두 곳에서, 본격적인 천주교 재건을 위한 교리 연구와 토론에 돌입했다. 그들이 가장 시급하게 생각한 일은 천주교 교리에 정통한 지도자 양성이었다. 한 달여 계속된 모임은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이승훈과 정약용이 반촌 사는 중인 김석태의 집에 틀어박혀 성균관에는 출입하지 않고 천주학 책만 보고 있다는 풍문이 파다했다. 정약용의 절친이자 맞수인 이기경이 예고 없이 김석태의 집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이승훈과 정약용, 진사 강이원이 의관을 정제하고 마주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예고 없이 방에 들어서는 이기경을 보더니 황급히 책상 위의 책과 물건을 치웠다. 이기경이 서학책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다그치자, 그들은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변명하였다. 이기경은 이들이 시치미를 떼고 딴청을 부리자 마침내 화를 벌컥 내고 나갔다. 반촌 모임에 동참했던 진사 강이원이 주변 사람들에게 같이 읽은 천주학책 이름과 공부하는 절차에 대해 이야기기하고 다녔다. 말이 퍼지자 일이 커졌다. 진사였던 홍낙안(洪樂安ㆍ1752∼1812)이 강이원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고, 이기경에게 확인하였다. 이승훈과 정약용은 이기경을 공격하여 과거시험에서 맞수인 자신들을 모함해 이름을 다투려 한다고 선제공격을 했다. 그 결과 이기경은 12월 초에 있었던 응제시험(應製試驗)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기경의 입장은 이러했다. 그 자신도 한때 이들과 어울렸던 전력이 켕겼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이기경 또한 서교(西敎) 이야기를 즐겨 들었고, 손수 책 한 권을 베껴 썼다”고 쓴 바 있다. 이기경에게 정약용과 이승훈은 오랜 벗이었다. 벗의 등에 칼을 꽂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막상 이들이 내놓고 문제 행동을 한 것도 없었다. 이기경은 모호한 태도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
정미반회 사건 이후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은 자식들에게 천주학을 멀리하라고 엄명했다. 정약용은 정약전과 함께 천주교에 거리를 두었으나, 정약종은 오히려 더 적극적인 믿음의 길로 나아갔다.
6.1788년
이기경이 미온적 태도를 표명하자 홍낙안이 전면에 나섰다. 정미반회 사건이 있고 난 뒤 해가 바뀌어 1788년 1월 7일에 인일제(人日製) 과거가 열렸다. 홍낙안은 답안으로 제출한 ‘대책문(對策文)’에서 실명만 거론하지 않았을 뿐, 정약용과 이승훈이 이단을 행하는 무리라고 직격탄을 날리며 처벌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하였다. 이 시험에 홍낙안과 함께 정약용도 응시했는데 정약용은 2등으로 합격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788년 1월 7일 자 기사에 그 성적이 나온다. 정조 임금은 홍낙안의 ‘대책문(對策文)’ 글을 읽은 상태에서도 정약용의 답안지를 높은 등수로 올렸다. 개의치 않는다는 확실한 의사 표시였다. 홍낙안의 대책문이 불발되고, 정약용이 높은 등수를 얻은 데다, 그의 우군인 채제공이 1788년 2월 우의정에 오르자, 형세가 크게 불리함을 깨달은 홍낙안과 이기경 측이 슬쩍 꼬리를 내림으로써 정미반회의 일은 그럭저럭 무마되어 큰 소동 없이 가라앉고 말았다.
정약용은 1788년 8월의 도기(到記)에서 한 번 더 불합격했다. 정약용은 과거시험 준비와 교회 일을 병행하며 1788년 겨울을 났다. 1788년에 8월에 이경명이 서학에 연루된 자들에게 엄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려, 천주교 관련 서적을 색출, 소각하는 조처를 내렸다.
7.1789년
1) 첫 벼슬과 배다리(舟橋) 준공
정약용은 1789년 1월 7일에 시행된 인일제(人日製) 시험에 응시해 지난해와 같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같은 달 1월 26일의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해, 3월 10일의 식년시(式年試)로 직행했고, 마침내 대과(大科)인 문과에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을 받고 벼슬길에 들 수 있었다. 정약용의 첫 벼슬은 희릉 직장(禧陵 直長)이었다. 1789년 3월 20일에는 바로 초계문신(抄啟文臣)에 발탁되었다. 정약용은 6월에 승정원 가주서에서 물러나, 이후 8월까지 발령 대기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정조가 8월 17일, 급히 상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789년 7월 11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墓)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격상하여 수원 화성(華城)으로 옮기는 결정을 내렸다. 수원화성 건설 진행 상황을 보기 위한 왕래 방법으로,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이용해야 했는데 정조는 정약용에게 배다리의 설계를 지시한 것이다. 정약용은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드는 큰 공을 세웠다.
8. 1790년
1) 해미 유배
1790년 2월 말 정약용은 희정당에서 치러진 한림소시(翰林召試)에 뽑혀, 예문관 검열(檢閱)에 단독으로 추천되었다. 예문관 검열은 정 9품이긴 하나, 승지와 함께 왕의 측근을 지키면서 왕명을 대필하고 사실(史實)을 기록하는 사신으로, 이른바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만 앉을 수 있는 청요직(淸要職)에 해당했다. 정약용을 측근에 두려는 정조임금의 의중이 담긴 인선이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왕명을 받고 하룻밤 숙직하고는 이튿날 곧바로 사직 상소를 올린 후 대궐을 나와 버렸다. 노론 계 대신들이 왕의 측근에 남인인 정약용을 내정하는 것은 격식에 안 맞는다며 임명 취소를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3월1일에 올린 ‘한림원을 사직하는 상소(辭翰林疏)’에 이어, 이튿날인 3월 2일에 ‘한림원을 사직하는 두 번째 상소(辭翰林再疏)’를 연이어 올렸다. 정약용은 이 글에서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는 예문관 직분이 지극한 영광이지만, 사헌부가 탄핵하고, 공론의 꾸짖음이 있는 이상, 나라의 전례를 어길 수 없고, 임금에게 누를 끼칠 수 없다고 썼다. ‘정약용 시문집’에 실린 두 번째 상소문의 끝에 정약용은 작은 글씨로 이런 주를 달았다. “갑과(甲科)는 본래 한림권점(翰林圈點)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때 대간이 내가 갑과 출신으로 권점에 뽑혔다고 하여 격식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사헌부의 주장이 자신의 입사(入仕)를 막으려는 생트집임을 정약용이 익히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정조는 정약용을 곁에 두고 싶었다. 1789년의 배다리 설치 때뿐 아니라, 자신이 구상 중이던 화성 건설에서도 그는 활용할 구석이 많은 인재였다. 그러나 정약용이 거듭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이제 막 새로 벼슬길에 오른 소관(小官)이 임금의 교지를 두고 어찌 이처럼 방자하게 행동하느냐며 화를 벌컥 냈다. 임금은 1790년 3월7일에 정약용의 죄를 물어 충청도 해미로 유배를 보내라는 명이 떨어졌다. 정약용은 3월10일에 도성문을 나서, 3월13일에 해미에 도착했다. 하지만 싱겁게도 열흘만인 3월 22일에 바로 해배 명령이 도착했다. 1790년 3월 22일에 해배되어 3월 25일경 한양에 상경한 정약용은 초계문신(抄啓文臣:과거급제한 37세 이하의 문신들을 40세까지 재교육)의 시험에 참여하는 한편, 5월 3일에 김이교와 함께 예문관 검열에 다시 추천되었다. 정약용은 세 번째로 사직 상소를 올렸고, 한 번 더 명분을 쌓은 정조는 이틀 뒤 5월 5일에 품계가 세 단계 뛰어넘는 종 6품의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로 파격적인 승진 임명을 단행하였다. 이후 정약용의 정치적 행보는 그런대로 순탄하게 이어졌다. 7월에 사간원 정언에 오르고, 이후 정약용은 각종 시험의 시관(試官)이 되어 눈부신 활약을 했다. 1970년 같은 해 9월 증광 별시에 둘째 형 정약전이 합격하는 경사가 있었다. 11월에 아버지 정재원은 울산부사에서 진주목사로 승차했다.
2) 의례문화(儀禮文化)와 교황청의 결정
1786년 가을 이승훈은 교회로 다시 돌아와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평신도 ‘자치교회(가성직자단徦聖職者團)’를 조직하여 10명이 사제를 선발 교회를 운영하였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신부로 구성된 사제단이 교회를 운영하는 것을 본 기억을 되살린 것으로, 복음전파를 쉽게 하고, 신자들의 신앙생활 관리를 조직적으로 운영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런데 이들 중 한 사람이 교회 서적을 연구 하던 중, 평신도의 성무가 교회 관례에 위배될 수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이 문제를 북경교회에 문의하기 위해 밀사 윤유일 바오로를 파견하였다. 윤 바오로는 1789년 10월 동지사 일행에 잠입하여, 당시 북경 교구를 맡고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나 밀서를 전했다. 밀서의 내용은 가성직자단 외에 조선에 전파된 천주교 교세 상황과 조선에서 행해지고 있는 미신 행위에 대한 질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구베아 주교는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 칙서 「그날들 Ex illa die」과, 1742년 7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4세 칙서 「경우에 따라서 Ex quo singulari」 선언을 근거로 하여, 신주와 위패는 미신이며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와 공•맹 숭배 사상도 금지하라는 단호한 지침을 담은 서한을 윤유일에 주었다. 윤유일은 1790년 10월 11일(음력) 귀국하였고, 주교의 답변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는 가성직 제도를 중단하였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펴나가게 되었다.
중국에 진출한 교회는 1634~1742까지 백여 년에 걸쳐 조상제사와 공•맹 숭배 사상 의례문화에 대한 진통을 겪어야 했다. 윤 바오로가 밀사로 파견될 당시 중국교회 선교 수도회는, 효경의 표현으로 제사를 이해하고 적응주의 선교를 펼치던 예수회가 축출되고, 미신으로 해석하던 프란치스코회로 대체되었다.
선교지 사회문화 상황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가 없는 선교사목적 판단과 상부에 대한 보고, 또한 교황청의 왜곡된 제사 금지 결정과 전달은 이제 막 태동한 어린 조선 교회에 엄청난 타격으로 가해졌다. 구베아 주교와 해당 수도회, 교황들도 이로 인한 파장이 얼마만큼 큰 것이었을지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교회 지도자인 이승훈은 제사 불허라는 가르침에 고민하다가 교회를 떠났다. 권철신, 정약용, 정약전도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권일신과 정약종은 오히려 더욱 분발하였다.
3) 진산사건
전통의례에 대한 교황청의 금지조치 명령은 조선천주교 박해의 원인으로 1791 전라도 진산 윤지충 사건이 일어났다. 윤지충 바오로는 전라도 진산에서 아버지 윤경과 어머니 권조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천주교 창설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윤지충과 가까운 친인척이었다. 정약용과는 내외 중간이었고 이벽 이승훈과는 가까운 사돈이었다. 권상연 야고보는 이종사촌이다. 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도 이종사촌이다. 윤지충은 1783년 봄 증광시 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이 무렵에 한양에 상경하여 지내며 고종사촌 정약용(요한) 형제들을 통해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천주실의와 칠극 등의 책을 빌려 탐독하였다. 1787년 정약전을 대부로 이승훈(베드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후 낙향하여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 외종사촌 권상연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게 하였다.
1791년 5월에 윤지충의 어머니 권씨가 사망하면서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장례는 전통대로 진행하였으나 신주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 또한 지내지 않았다. 이것은 1790년 10월 말에 두 번째 북경행에서 돌아온 윤유일이 제사와 신주 봉안을 금지한 구베아 주교의 사목 교서를 받은 직후의 일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유교사회의 전통에 대한 도전과 인륜을 부정하는 행위로 단죄되었다. 이 사건에 가까운 친지들과 지인들 이웃들의 충격과 비난이 쏟아졌고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당파싸움의 빌미로 증폭되었다. 진상 조사의 임금 명령이 떨어져, 윤지충은 그해 10월에 자수하였고 이어서 권상연도 체포되었다. 진산 군수 신사원이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이 단호하게 거부하여, 상급기관인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다. 전라 감영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사교를 신봉하고 사회 도덕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죄명으로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진산사건의 결과 진산군은 5년 동안 현으로 강등되었고 유연하게 대응했던 진산 군수 신사원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승훈은 배교했다는 변론이 수용되어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평택 현감 관직은 박탈당했다. 권일신은 80세 고령의 노모를 앞세워 회유되어 배교하여, 귀양지가 제주에서 예산으로 변경되었으나 유배 중에 고문의 후유증인 장독(杖毒)으로 죽었다. 내포 사도로 존경받던 이존창도 배교하고 풀려났다. 이렇게 초기 조선 천주교회를 이끌던 지도층이 거의 와해되는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진산사건이 법적으로 마무리된 뒤에도 여진은 다 가라앉지 않았다. 노론과 남인 공서파는 천주교를 들이대며 정약용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1791년 6월 24일에 평택 현감으로 부임하여 재임중이었다. 1792년 2월 홍낙안이 척사소(斥邪疏)로, 평택 유생 이수, 권위, 용인 유생 정상훈이 이승훈을 물고 상소와 통문을 돌렸으나 이승훈은 가까스로 위기를 넘어갔다. 정약용은 윤지충의 외사촌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1787년 정미년 반촌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진산사건 직후 홍낙안과 이기경이 전면에 나서서 진산사건과 연루된 신서파의 사람들과 정약용을 공격하였다. 홍낙안과 이기경의 상소와 고변으로 1787년의 정미반회 사건까지 낱낱이 드러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정약용의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정조 임금은 오히려 상중(喪中)에 ‘초토신(草土臣)’ 이라는 이름으로 상소를 올린 이기경을 함경도로 유배보냈다. 홍낙안도 벼슬에서 쫓아냈다. 반대로 이승훈은 다시 벼슬을 회복했다. 정조 임금은 1791년 9월 3일 정약용을 사간원 정언에 임명하였다. 이가환과 정약용은 오히려 승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련된 1785년 명례방 추조적발 사건, 1787년 정미반회 사건, 1791년 진산 사건 등 세 차례의 풍파를 간신히 넘겼다. 하지만 정약용이 천주교 문제와 관련해 넘어야 할 산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진산사건 이후 정약용과 정약전은 천주교로 인해 자신과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 공개적으로 배교 의사를 표현하였다. 이 당시 정약용은 천주교를 완전히 배교했을까? 당시 정약용 형제는 벼슬에 몸을 두고 있었고, 아버지 정재원의 엄명도 있었던 데다, 자칫 경솔한 행보가 자신을 두텁게 신임하고 두둔하는 임금 정조와 채제공에게 큰 누가 될 수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정약용은 자신이 천주교를 배교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정약용의 신앙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긴 휴지기로 들어갔다.
9. 1792년
1) 수원화성(水原華城) 설계
1792년 3월 29일에 정약용은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번에도 임금의 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정조는 화성 건설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몰두 중이었다. 1792년 4월 9일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 진주에서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은 마재에서 시묘살이를 하는 도중 6월에 수원 화성(水原華城) 설계를 명령받았다. 정약용연보’ 중 1792년 4월 기사에 다음 내용이 나온다. “5월에 충주에서 장례를 지내고, 마재로 돌아와 곡했다. 6월에 명례방으로 집을 옮겨 쉴 새 없이 왕래했다. 또 ‘사암 연보’는 1792년 겨울 기사에 “겨울에 명을 받들어 수원의 성제(城制)를 올렸다”고 썼다. 1792년 6월부터 논의되어 이듬해인 1793년 4월에 올라간 정약용의 화성설계)보고서는 정조가 어째서 그토록 정약용을 감싸고 돌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웅변해준다.
10. 1793년
1792년 겨울, 정약용이 작성한 화성 건설의 청사진이 올라오자, 이듬해인 1793년 1월 12일에 정조는 채제공을 수원부 유수(留守)로 임명했다. 정조는 화성 건설에 앞서 수원부를 수원 유수부(留守部)로 승격시켰고, 초대 유수에 채제공을 임명한 것이다. 유수(留守)란 임금이 제 2의 수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그곳에 머물며 지키게 하는 제도에서 나온 명칭이다. 요즘 식으로 말해 수원부는 이때 특별시로 승격된 셈이다. 밑그림이 나왔으니,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반 시설과 시스템을 정비하라는 뜻이었다. 1793년 4월에 정약용이 다시 기중가와 유형거등 기계와 각종 세부 내용을 적은 20조에 걸친 보고를 올리자, 5월 25일 정조는 수원에 내려가 있던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5월 28일에 햔양으로 올라온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죽음 관련자 처벌을 정면으로 제기한 상소문을 올렸다. 1792년 윤 4월과 5월, 2차에 걸친 영남 ‘만인소’가 사도세자 문제의 금기를 허물었고, 1793년 5월 채제공이 올린 상소를 기폭제 삼아, 그 해 8월 정조가 영조의 금등지서(金縢之書)를 공개하면서 사도세자 복권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1793년 겨울 사도세자의 이 문제가 재점화되었다. 이재기의 ‘눌암기략’은 노론계 정약용의 처삼촌인 판서) 홍수보를 성토하는 통문 작성을 정약용이 주도했다고 적고 있다. ‘사암 연보’는 이때 홍수보의 아들인 홍인호가, 자신의 사촌 처남인 정약용이 자신을 비난하는데 주동이 되었다고 의심해서 두 사람이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고 썼다. 정약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였다. ‘눌암기략’이 남인들의 논의가 정약용의 집 ‘명례방 모임[明禮之會]’에서 이뤄졌다고 못 박은 것을 보면, 다소의 오해와 과장은 있었겠지만. 정약용이 이 일에 직접 관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정약용은 정조 임금의 명령으로 화성 설계를 명령받은 1792년 6월부터 이후 1794년까지 격랑의 2년간을 정계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11. 1794년
정약용은 1794년 10월 27일에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정조 임금은 바로 다음 날인 1794년 10월 28일에 정약용을 다시 경기 북부지역 암행어사로 임명하였다. 정약용은 경기도 암행어사 역임 시,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연천 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서용보는 노론 벽파의 거두였는데, 정약용의 암행 보고 이 일로 정순왕후 수렴청정 이후 권력의 요직에 있으면서 정약용이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 1795년은 정조 임금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는 해였다. 1794년 12월 7일 정조 임금은 사도세자의 존호를 새로 올리려고 존호도감(尊號都監)을 설치했다. 사도세자의 공식적인 복권을 선언한 셈이었다. 채제공을 도제조(都提調)로 삼고, 정약용을 실무 책임자인 도청랑(都廳郞)에 앉혔다. 정약용은 사도세자 추존 소임으로 정조의 큰 신임을 받았다.
12. 1795년
1) 수원화성 정리통고(水源華城 整理通攷)
1795년 3월에 정약용은 정조 임금으로부터 ‘수원화성정리통고(水源華城整理通攷)’ 편찬을 명령받았다.
*벼슬: 동부승지(이가환의 묘지명)
2) 조선 천주교회 첫 사제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1793년 조선 천주교회의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되었다. 이미 두 차례나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 사바와 박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북경교회로부터 성직자 영입 확답을 받았다.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파견하였다. 1794년 음력 12월 3일(양력 12월 24일) 조선 땅에 밀입국하였고, 1795년 1월 초에 한양에 잠입한 후 북촌(현 계동)에 있는 역관 최인길의 집에 은신하며 사목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배교자 진사 한영익의 밀고로 5월 11일(음력) 체포령이 떨어졌다. 한영익은 잘못을 회개하고 세례받기는 원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속여 신부를 만나 교리와 입국 경로를 자세히 캐물은 뒤, 곧바로 이벽의 동생 이석(李皙)을 찾아가 주문모의 입국 경로, 거처하는 곳, 생김새 등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이석은 천주교 성조 이 벽의 동생이나 서학을 열렬히 미워하던 사람으로 국왕의 친위조직인 별군직에 있었다. 깜짝 놀란 이석이 즉각 채제공에게 이 사실을 다급하게 보고했고, 채제공의 명령으로 포졸들이 최인길의 집을 덮쳤으나, 주문모 신부는 누군가의 기민한 도움으로 탈출하여 강완숙 골룸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밀입국을 성사시키고 은신처를 제공하고 체포를 방해한 윤유일, 지황, 최인길은 체포되어 그 밤으로 장살(杖殺)되었다. 그 시체는 한강에 던져졌다. 6월 28일(음력 5월 12일)이었다. 당시 윤유일 바오로는 35세, 지황 사바의 나이는 28세, 최 인길 마티아의 나이는 30세였다.
3)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킨 정약용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4월에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가 변복하고 몰래 들어와 북산 아래에 숨어서 서교(西敎)를 널리 폈다. 진사 한영익이 이를 알고 이석에게 고하였는데, 나 또한 이를 들었다. 이석이 채제공에게 고하니, 공은 비밀리에 임금께 보고하고,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명하여 이들을 잡아 오게 했다.”
포졸들이 급습하였을 때 주문모는 이미 다른 곳에 피신한 뒤였다. 그들은 포도청의 급습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한영익의 밀고와 이석에 이은 채제공의 보고는 거의 동시에 긴박하게 이루어졌다. 한영익은 밀고자이고, 이석은 보고자이니 이 사실은 천주교 쪽에서 미리 알아 대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윗글에서 정약용은 ‘용역문지(鏞亦聞之)’라고 썼다. 한영익이 이석에게 고발하는 내용을 자신도 같은 자리에서 함께 들었다는 말이다. 이석은 정약용의 큰 형님 정약현의 처남으로 정약용과는 가까운 사돈 사이였다. 이 화급한 상황에서 교회 측에 주 신부를 빨리 피신시키라고 알려준 것은 정황상 정약용일 수밖에 없다.
1797년 8월 15일에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사천의 대리 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다시 이때의 정황이 나온다. “이 일이 터진 것은 6월 27일(음력 5월 11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조선 대신들에게 밀고하는 자리에 어떤 무관(武官) 한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한때 천주교 신자였다가 배교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관은 배교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는 신부님께 고해성사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천주교 신자들은 이 무관에게 신부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전혀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혹시라도 그 사람이 그런 사실을 누설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관은 앞에서 이야기한 또 다른 배교자가 고발하는 모든 사실을 듣고는, 곧장 신부님이 머물고 계시다고 일러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신부님이 고발당하였기 때문에 신부님과 천주교회에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신부님한테 한시라도 빨리 그 집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신부님을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천주교 배교 신자로 고발 현장에 있었던 무관(武官)은 다름 아닌 정약용이었다. 1795년 당시 정약용은 우부승지로 있다가 부사직(副司直)의 신분으로 바뀌어, 규장각에서 ‘화성정리통고’를 교서하던 중이었다. 부사직은 오위(五衛)의 무직(武職)이었다. 정약용은 주문모 신부가 위험에 처한 것을 알자, 그 길로 한영익이 알려준 장소로 달려가 신부의 피신을 권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팔을 걷고 나서서 주문모 신부를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다는 것이다.
‘벽위편’ 권 4의 ‘경신년에 사학이 더욱 극성을 부리다(庚申邪學愈熾)’ 조에는 “중국인을 놓친 뒤에 임금께서 정약용이 틀림없이 그의 종적을 알고 있을 테니, 그로 하여금 잡아들이게 하라고 했지만, 중국 사람을 구해낸 것이 본시 그들이 한 짓이었으므로 끝내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렇듯 정약용의 ‘자찬묘지명’과 구베아 주교의 편지 기록을 겹쳐 읽으면 당시 정약용의 역할과 행동이 드러난다. 이것은 정약용이 지속적으로 외배내신(外背內信), 겉으로는 배교했지만 속으로는 믿었다는 논의 속에 있는 이유였다.
‘자찬묘지명’의 기록처럼 주문모 신부님의 피신을 도운 이가 정말 정약용이었을까?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킨 정황은 그렇다 치고,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유배에 처한 정약용은 각종 기록에서 천주교 관련 일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주문모 사제의 도피를 도운 이 위험하고 중차대한 일은 왜 기록하고 있을까? 정민 교수의 주장처럼 외배내신(外背內信)의 고백일까? 당시 정약용이 사제의 피신을 도운 이유는, 외배내신보다 자신을 비롯하여 천주교와 연관된 남인 신서파에게 닥칠 위험을 예단한 조처가 아니었을까? 다른 또 한 가지는 1795년 5월 한영익에게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소재를 알려 주었던 천주교 신자 그의 누이는 1799년경 정약용의 서제인 정약횡과 혼인하였다고 한다. 정약용은 배다른 아우 정약횡을 무척 사랑하였다고 한다. 만일 정약용이 외배내신外背內信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면, 사제와 교회를 위험과 파국으로 몰고 간 배교자의 누이를 자신이 사랑하는 동생과 혼인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 과연 외배내신의 정약용다운 처사인가? 이 부분 편집자는 참으로 의문이다.
세 사람이 순교하고 53일이 지난 7월 4일 대사헌 권유가 주문모 사제 체포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포도대장을 치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조정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가장 신랄한 상소는 7월 7일, 박장설이 올린 상소였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감쪽같은 도피 내막을 모르는 공서파는 정약용 대신 이가환ㆍ정약전을 공격하였다. 박장설은 이가환과 정약전이 천주교의 배후 인물이라고 상소를 올렸다. 하필이면 그 무렵 과거시험에서 정약전이 1등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의 주장은, 이가환의 도제(徒弟)인 정약전이 서양인의 학설을 주장했는데도 장원으로 뽑았고, 그 자신도 임금께 올리는 책문에서 서양인이 주장한 청몽기설(淸濛氣說)에 관한 주장을 거리낌 없이 썼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가환과 정약전이 모두 천주교도임이 틀림없고, 주문모 신부의 도주와 관련하여 갑작스레 죽은 세 사람의 배후임이 분명하니 이가환 과 정약전을 엄벌에 처해야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박장설의 입장에 동조하는 무리들이 지속적으로 이가환과 정약전, 정약용 형제의 처벌을 요구했다. 정조 임금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도피 내막을 전혀 모른 채, 엉뚱한 사람을 표적으로 삼은 박장설의 상소문에 격노하였다. 상소문에서 박장설은 스스로를 ‘기려지신(羈旅之臣)’으로 일컬었다. 기려지신이란 타향을 전전하며 떠도는 신하란 말이다. 정조 임금은 박장설을 두만강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도착 즉시 동래로 옮기게 한 뒤, 다시 제주로 보내고, 바로 압록강까지 다시 끌어 올리는 최악의 유배형을 내렸다.
4) 금정 유배
진산사건에 대해 노론 벽파와 남인 공서파의 상소가 빗발치자 정조는 한발 물러서게 되었다. 1795년 7월 25일에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 보내고, 공조판서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충청남도 홍주 금정 찰방으로 좌천시켰다. 당시 충청지역에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성장하고 있던 터라 정조는 이 지역으로 이들을 보내어 교세 확산을 막음으로 천주교에 심취했었던 과오를 속죄하고 지방좌천을 통해 노론 공격의 예봉도 차단하려 내린 초치였다. 금정 찰방직 좌천은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의 꽃보직에서 11마리 말을 관리하는 7품직의 시골 역장에 좌천된 것이다. 게다가 이제 천주교도 검거에 드러나는 공을 세워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여졌다.
5) 내포 지역 신도들 체포
정약용은 1795년 7월 29일에 금정에 도착하여 업무를 시작한 뒤 일들을 일기 ‘금정일록(金井日錄)’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약용은 부임한 지 17일 만에 천주교 지도자 김복성(金福成)을 붙잡아다가 자백을 받았다. 8월 30일에는 김복성이 다시 네 사람을 더 이끌고 와서 배교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김복성 문초 이후 한 달이 지난 9월 19일 일기에 “성주산(聖住山)의 일로 순영(巡營)에 보고하였다”라는 내용이 한 줄 나온다. 정약용의 보고에, 닷새 뒤인 9월 24일, 관찰사 유강이 답장을 보내왔다. “죄인을 붙잡아 오는 일을 날마다 몹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날짜를 헤아려 보니 오늘이면 너무 늦는군요. 이제껏 자취가 없는 것으로 보아 혹 낌새를 알아 미리 피한 듯합니다. 깊은 산골 궁벽한 골짜기는 몸을 감추기가 몹시 쉬워 이처럼 늦어지는 것인가요? 몹시 의아하고 답답합니다. 잡아 온 뒤의 일은 마땅히 그대에게 들어보고 서로 상의해 처리할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성주산의 일은 이미 비밀 공문을 발송하였습니다.”
성주산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성주산은 충청도 내포 지역인 홍산과 성주산, 청양의 언저리 깊은 산 속에 천주교도들이 몰래 모여 숨어 사는 곳 중의 하나다. 금정역 인근의 천주교도들을 붙잡아 취조해서 자백을 받은 뒤, 이를 통해 얻은 정보로 정약용은 바로 성주산 쪽의 천주교도 검거에 나섰고, 9월 19일에 중간보고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닷새 뒤 관찰사는 정약용이 죄인을 붙잡아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태 소식이 없어 답답하다는 뜻을 적었다. 정약용은 앞의 보고에서 자신이 성주산의 천주교도들을 붙잡아 올 경우 이들의 신병 처리에 대해 모종의 부탁을 했던 듯하다. 알았으니 염려 말라는 말이 그것이다.
6) 내포 사도 이존창 루도비꼬 체포
정약용이 보고한 ‘성주산의 일’이란 바로 충청도 내포 지역의 천주교 지도자였던 이존창(李存昌, 1759~1801)의 검거와 관련된 일이었다. 이존창은 누구인가? 그는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이기양 등과 사제 관계로 입교하여 가성직 제도 당시 10인의 신부로 활동했던 천주교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내포 지역에서 활약 중, 1791년 진산사건의 여파로 11월에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존창은 1791년 12월 30일에 홍산으로 이주하여, 전날의 배교를 뉘우치고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과 전교에 힘써, 내포와 그 인근 지방은 다른 어느 고장보다도 천주교가 가장 성하였다. 1795년 5월 12일(음) 주문모 신부 체포 실패 후 그의 은신과 이존창의 동선에 대한 추적을 살펴볼 일이다. 신부는 극적으로 창동 강 완숙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충청도 연산 땅 이보현의 집에 숨어 두 달 남짓 머물렀다. 주문모 신부는 근 1년 뒤인 1796년 5월에야 다시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2년간은 창동과 정동의 몇몇 지도급 천주교인의 집을 며칠씩 돌아가며 묵었다. 이는 1801년 3월 15일 주문모 신부가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려고 자수하여 의금부에 끌려가 심문받았을 당시의 꽁초 기록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 나온다.
정약용은 금정 찰방직에 부임한 한 달 뒤 이존창의 검거를 직접 진두지휘하였다. 그 내막은 1795년 겨울에 햔양으로 복귀한 뒤, 새로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가게 된 이정운(에게 보낸 정약용의 편지 ‘오사께 답함(答五沙)’에 보인다.
“저 이존창이란 자는 목숨을 구해 달아난 한낱 백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설령 이 자가 바람과 비를 부르고 둔갑술에 은신술을 써서 오위영(五衛營)의 병졸을 풀어도 능히 잡을 수 없는 자인데, 제가 꾀를 내고 계책을 편 덕택에 하루아침에 체포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스스로 공으로 삼기에는 부족합니다. 하물며 그는 이름을 바꾸고 자취를 숨겨 이웃 고을에 거처를 피한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그가 있는 곳을 알아서 장교 한 사람과 병졸 하나를 데리고 가서 묶어 온 것이니, 이는 마치 동이 속에서 자라를 잡은 격입니다.”
정약용은 성주산에서 변성명하고 은신해있던 이존창을 달랑 장교 한 사람과 병졸 하나를 대동해가서 마치 물)동이 속에 자라를 잡듯 쉽게 포승줄로 묶어서 왔다. 그의 은신처를 정확히 알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검거였다.
7) 정약용과 이존창의 묵계
필자는 이 대목에서 당시 내포 지역의 천주교회 조직과 지도자 이존창과 정약용 사이에 모종의 묵계가 있었을 가능성을 의심한다. 김복성에 이은 이존창의 체포는 주문모 신부를 놓친 이후 불어 닥친 검거 선풍에서, 천주교회의 조직을 살리고 인근에 피신 중이던 주문모 신부를 보호하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복성의 문초와 이존창의 검거 사이에는 한 달 이상의 간극이 있었다. 중재와 설득에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다는 뜻이다. 정약용과 이존창은 1785년 명례방 추조적발 이전부터 익히 알던 사이였다. 두 사람은 초기 교단의 가성직 신부 10인으로 함께 활동하던 처지였다.
1791년 진산사건의 여파로 교회 지도자들인 권일신의 사망과 이승훈의 배교 이후 교회 안에서 이존창의 활약과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런 그가 정약용의 손에 순순히 잡혀 감영에 갇혔다. 1791년 박종악이 그랬던 것처럼 배교한다는 서약만 하면 석방해 주겠다는 이면의 약속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본다.
정약용은 포교와 포졸 단 두 사람만 데리고 성주산의 은신처로 이존창을 찾아가 아무 저항 없이 그를 묶어 감영으로 호송시켰다. 수행 인원이 단둘뿐이었다는 것은 저편에서도 정약용이 올 것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미 모든 조율이 끝난 상태에서 정약용은 이존창과 만났던 셈이다. 이존창은 체포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겉으로 공개적인 배교 상태에 있었고, 천주교도 검거의 특명을 띠고 금정 찰방으로 내려온 정약용을 만났던 것은, 정약용이 주문모 신부의 피신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존창의 검거는 말이 체포이지 실제로는 자수에 가까웠다. 하지만 정약용에게 천주교회 거물급 책임자를 검거하게 하여 힘을 실어줌으로써, 관심을 주문모 신부에서 딴 데로 돌리려는 천주교회 내부의 필요성이 맞아떨어진 일종의 거래가 아니었을까 한다. 천주교도 검거에 공을 세워 천주교 관련 혐의를 벗으라는 정조의 당부를 정약용은 이렇게 실천에 옮겼다.
정조 임금은 1795년 12월 25일 5개월 만에 정약용을 용양위 부사직(副司直)의 임시직으로 한양으로 불러올렸다. 정조는 정약용이 금정 찰방으로 있으면서 천주교 지도자 이존창과 신도들을 체포하여 배교를 얻어낸 공로를 내세워 정계 복귀의 명분으로 삼을 작정이었으나 정약용은 단호하게 벼슬을 거부했다.
정약용은 이때 왜 벼슬을 마다했을까. 필자 개인의 생각으로 정약용은 자신의 생애에서 금정 시절을 가장 부끄러워했을 것 같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닌 처지로 이존창을 검거했다. 이러한 정약용은 스스로 떳떳하지 못했다. 이존창의 검거는 검거라기보다 자수에 가까웠다. 당시 정약용은 천주교 내부의 비선과 닿을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에게 쏠린 관심을 이쪽으로 돌려놓기 위해서라도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이존창을 설득했을 것이다. 이존창과 정약용은 1784년 명례방 집회 이후로 오랫동안 교계의 핵심으로 함께 활동했던 사이였다. 둘은 너무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 그를 정약용이 제 손으로 검거해 감옥에 넣었다. 정약용은 이 일로 자기 이름이 자꾸 오르내리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을 법하다. 한편 이존창의 경우 1791년에 체포 시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 앞에서 배교를 다짐했던 전력이 있었다. 어떻게든 교회를 지키고 주문모 신부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 앞에서 자신의 체포는 그다지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정약용은 이존창 체포의 공로자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무엇보다 한때 누구보다 열심한 천주교 신자였던 자신이 천주교를 와해시키는 데 앞장 선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싫었고, 더욱이 이를 이용해서 일신의 영달을 꾀했다는 비난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한 마디로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의 마음속에 일말의 신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미 금정 시절부터 한양에서 들려오는 정적 이기경 등의 동향 또한 심상치가 않았다. 자신이 주문모의 피신을 도와준 사실도 언제 터질지 모를 뇌관이었다. 어렵사리 온양 봉곡사에서 성호의 ‘가례 질서’ 편집을 주도한 일을 두고도 비난과 비방의 강도가 흉흉했다. 이런 와중에 5개월 만에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요직에 진출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도 있었다. 또 정약용과 한편인 이정운이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가자마자 잠시 금정 찰방직을 역임한 정약용의 공로를 올리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미리 짜고 치는 노름판의 모양이어서 구설이 없을 수가 없었다.
13. 1796년
정약용은 1796년 11월 16일에야 마침내 규장각 교서관(校書館)에 임명되었다. 이때의 상황은 ‘규영일기(奎瀛日記)’에 보인다. 당시 ‘사기’와 ‘한서’ 중에 정수를 가려 뽑아 ‘사기영선(史記英選)’ 간행 작업이 막바지였다. 정약용의 맵짠 솜씨가 필요했다. 정약용은 어명을 받고 채제공의 자문을 받아 유득공, 박제가 등과 함께 교정 작업에 참여했다. 며칠 뒤 정조는 정약용을 정3품의 병조참지(兵曹參知)에 낙점했다. 이번에도 정약용은 병조 참지에 임명된 지 보름만인 11월 30일에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다. 정조가 한 번 더 임명했고, 정약용은 또 사직을 청했다. 정조 임금은 정약용을 12월 2일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올렸다가, 12월 11일에 다시 병조참지에 임명했다.
14. 1797년
1797년 6월 20일에 정약용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다시 임명되었다. 그러나 처사촌인 홍인호가 당시 좌승지로 승정원에 있었으므로, 인척이 한 기관에 함께 근무한다는 혐의 때문에 정약용은 이 부름에 응할 수가 없었다. 6월 21일 정약용은 그간 자신을 향해 쏟아졌던 비방과 상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세세하게 밝힌 장문의 동부승지 사직 상소를 올렸다. ‘자명소(自明疏)’ 또는 ‘변방소(辨謗疏)’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비방을 해명하며 동부승지를 사직하는 상소가 그것이다. 이 글 중 핵심만 간추려 읽는다.
“신은 이른바 서양의 사설(邪說)에 관한 책을 일찍이 보았습니다. 그저 보기만 했다면 무슨 죄가 되리이까? 마음으로 기뻐하며 사모하였고, 이것으로 남에게 뽐내기까지 했습니다. 신이 이 책을 본 것은 20대 초반입니다. 본시 능히 세심하게 살필 수 없어 그 지게미와 그림자조차 얻지 못하고, 도리어 사생(死生)의 주장에 휘둘리고, ‘칠극(七克)’의 가르침에 귀가 쏠리며, 기이하고 떠벌린 글에 현혹되었습니다. 유문(儒門)의 별파(別派)로 알고, 문단의 기이한 감상거리로만 보아, 남과 얘기할 때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누가 비난하기라도 하면 과문하고 못나서 그러려니 여기기까지 했으니, 본래 뜻은, 기이한 견문을 넓히려 한 것일 뿐입니다. 하물며 벼슬길에 나간 뒤로 또 어찌 능히 방외에 마음을 쏟을 수 있었겠습니까? 불행히도 1791년 진산사건의 변이 일어나, 신은 이후로 분개하고 가슴 아파하며 마음으로 맹세하여 이를 원수처럼 미워하고 역적같이 성토하였습니다. 신의 경우 당초에 서학에 물든 것은 아이들의 장난과 같았는데, 지식이 조금 자라자 문득 원수로 여겼고, 분명하게 알게 된 뒤로는 더욱 엄하게 이를 배척하였습니다. 깨달음이 늦다 보니 미워함도 더욱 심해, 심장을 갈라 보여도 실로 아무 남은 것이 없고, 구곡 간장을 뒤져본들 남은 찌꺼기가 없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신을 어여삐 여겨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이렇게 거두어 쓰셨지만, 매번 사단이 날 때마다 문득 지난 잘못을 허물하신다면 꿈에도 생각이 미치지 않았는데도 더러운 오물을 먼저 뒤집어써서, 지쳐 기운이 빠진 채로 그저 앉아 조롱만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어찌 다르겠습니까? 이럴진대 신은 차라리 계속해서 내쳐진 채로 있으면서, 때로 굽혀지고 때로 부름을 받아 한갓 임금의 은혜를 크게 욕되게 하고, 나아가 죄를 더욱 무겁게 지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옵소서.”
‘변방소’는 번번이 자신을 천주교의 틀에 가둬 옥죄는 이 사슬을 원천적으로 끊어달라는 탄원에 가까웠다. 사직의 명분은 홍인호와 인척간이어서 승정원에서 동시에 근무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상소문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줄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주교와 관련된 자신의 입장 해명뿐이다. 정약용으로서는 천주교 문제를 공개적이고 과감하게 정면 돌파 함으로써 더 이상 이 꼬리표를 달고 벼슬길에 오르지는 않겠다는 승부수를 던진 것이었다.
이를 읽은 정조는 “상소문은 자세히 살펴보았다. 착한 마음의 단서가 마치 봄기운에 만물이 싹터 나오는 듯 성대하다. 종이에 가득 자신에 대해 열거한 내용은 그 말을 듣고 감동하기에 충분하다. 너는 사양치 말고 직책을 맡으라”는 비답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조정 대신들 앞에서 “이후로 정 아무개는 허물이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면죄부를 주겠다는 뜻이었다.
1797년 6월 27일에 정조 임금은 정약용을 동부승지에 다시 임명했다. 우의정 이병모가, 정약용의 상소문에서 사학을 이단에 견준 것이 적절치 않다고 나무라며 정약용을 파직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정조의 대답은 이랬다. “이제 막 자라나는 싹은 꺾지 않는 법이니, 어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겠소?”
정조 임금은 정약용을 1797년 윤 6월 3일의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하였다. 잠시 지방관으로 보내 반대파의 공격을 누그러뜨리려는 조처였다. 정약용은 1799년 4월 24일까지 2년 가까이 곡산의 목민관으로서 눈부신 치적을 세웠다.
정약용은 자명소(自明疏)’ 또는 ‘변방소(辨謗疏)’를 통해 자신의 배교 사실을 전적으로 공개 했다. 정약용의 배교는 진심일까?(여러 문헌에서 정약용은 1971년 진산사건 이후 천주교에서 완전히 돌아섰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신, 가족, 가문을 지키기 위한 생존 수단이었으며 신하인 자신을 극진히 아끼는 임금 정조에 대한 상대적인 충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배교 선언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와 맺었던 인연은 너무 깊었다. 그의 가문과 형제들 친척들이 줄줄이 천주교와 맺은 인연이 너무 많고 깊고 질기기 때문이었다.
18. 1799년
1799년 1월, 채제공이 80세로 세상을 떴다. 남인의 든든한 대들보가 쓰러진 것이다. 정약용의 형 정약전은 1799년 2월 4일 감군(監軍) 수점(受點)을 받아 내사(內司-왕실재정)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4월 29일 대사간 신헌조가 권철신과 함께 정약전을 사학(邪學)의 괴수로 지목하여 왕실재정을 소임을 맡기는 것은 부당하다는 탄핵을 하였다. 정약전은 신병을 핑계로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받아들여졌다.
1799년 5월 초 정약용은 외직 곡산 부사직을 떠나 근 2년 만에 내직 형조참의에 임명되어 한양으로 복귀하였다. 1799년 6월 12일에 민명혁이 사학의 괴수 정약전의 사직과 연좌시켜 정약용을 탄핵하는 상소가 다시 올려졌다. 정약용의 복귀 후 고작 한 달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이때 정약용은 ‘형조참의를 사직하는 상소문(謝刑曹參議疏)’를 올려 자신의 소회를 길게 밝혔다. 글 속에 “조정에 선 지 11년간 여러 직책을 거치는 동안 단 하루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쓴 대목이 짠하다. 사직청원이 받아들여져 7월 26일에 체직되었다. 1799년 10월경에 정조 임금이 직접 천주교 내부에 심었던 밀정 조화진(趙和鎭)이, 이가환과 정약용을 천주교 관련자로 상소하였다. 조화진은 1798년경부터 12월경부터 천주교 신자로 위장하여 충청지역에 잠입하여 밀정 활동을 하여, 1799년 겨울 충청도 지역에 박해가 있었고 열심한 교우들이 거의 다 죽었다. 정조 임금은 자신이 심은 밀정 조화진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무고라면서 한 번 더 정약용을 지켜주었다. 정약용은 벼슬 없이 자택에서 칩거 중이었다.
19.1800년
1) 정조 임금의 급사
1800년 6월 28일 정조 임금이 갑작스레 급사하였다. 임금은 급사 보름 전 6월 12일 밤에 정약용의 집으로 서리를 보냈다. 내각에서 간행한 ‘한서선(漢書選)’ 10질을 보내며, 그중 5질에 책 제목을 쓰라는 분부였다. 당시 정조가 전한 말은 이랬다. “오래 서로 못 보았구나. 너를 불러 책을 편찬하려 하는데, 주자소(鑄字所)에 새로 벽을 발랐으니, 그믐께라야 비로소 등연(登筵)할 수 있겠다.” 서리는 이 말을 전하며, “책에 제목을 쓰라는 것은 핑계고 그저 안부를 물으시려는 마음인 것 같았다.”라고 얘기했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 이때 일을 이렇게 썼다. “서리가 떠난 뒤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마음이 흔들려 불안하였다. 그 이튿날부터 임금의 옥후(玉候)가 편치 못하시더니, 28일에 이르러 마침내 돌아가셨다. 이날 밤 서리를 보내 책을 내리시고 안부를 물으신 것이 마침내 영원한 작별이 되고 말았다. 군신의 정의는 이 날 저녁에 영원히 끝이 났다. 나는 매번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눈물이 철철 흐르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
5개월 간 임금의 국상(國喪) 기간에는 일체의 사건 처결이 중지되었다. 이런 기회가 오히려 교회 활동에는 도움이 되어 활발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교회는 엄청난 박해의 광풍이 몰려오기 직전, 태풍의 눈 속에 든 절망적 시련을 짐작하지도 준비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2) 정순왕후와 노론•남인 공서파의 득세
1800년 11월 하순, 정조 임금의 국상이 끝나자마자, 정순왕후는 정계의 진용을 노론 벽파와 그에 동조하는 남인 공서파로 즉각 교체해 버렸다. 정순왕후, 노론 벽파 남인 공서파의 권력들이 야합한 것이다. 그들은 정조가 사라지자 남인 시파에 속하는 정적들과 정약용을 그냥 둘 리 없었다. 목만중과 홍낙안, 이기경이 즉각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날마다 이가환과 이승훈, 정약용등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선동하였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 1800년 12월 19일 장흥동 어귀에서 ‘성모취결례(聖母取潔禮) 예배 모임’이 발각되어, 최필제 베드로와 오현달 스테파노가 붙잡혀 갔다. 이것을 시작으로 천주교도 검거 바람이 불었다. 이어서 조선 천주교회의 총회장을 맡고 있던 최창현 요한을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이 잇달아 체포되어 끌려왔다. 1801년의 참혹한 신유년 대박해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20, 1801년
1) 신유 대박해 시작
정순황후는 1801년 1월 11일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발표하고 오가작통법을 적용하여 역모죄로 다스리라는 엄명이 전국에 내려졌다.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친정은 노론 벽파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했으며 친정 오라비 김귀주는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였다. 정조 즉위 후 김귀주는 귀양에 처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정순왕후와 노론 남인 공서파의 야합과 명분은 사학(邪學) 천주학의 궤멸이었지만, 종교를 빙자해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정치보복으로 정조 때 성장한 남인 신서파를 몰아내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박멸하려는 것이었다. 정조는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남인을 중용하였고, 남인들 중 중요한 인물들이 서학에 관심을 두고 천주교에 가까운 자가 많았으니 좋은 명분이 되었다. 그들의 최우선 목표는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3인의 제거에 있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남인을 이끌고 있었고, 정약용은 남인을 이끌 차세대 젊은 주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가환을 반드시 죽여야 했는데, 이는 이가환 가문은 조상 때부터 노론 벽파의 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가환은 1791년 진산사건 직후 배교하며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노론 벽파도 알고 있었으나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론 벽파가 원했던 것은 이가환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의 목숨이었다.
2) 책궤 사건
이런 와중에 1801년 1월 19일, 끓는 물에 기름을 끼얹는 정약종의 ‘책궤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약용의 친형 정약종은 박해의 광풍이 불어오자. 자택에 보관 중이던 교회 성물과 서적, 주문모 신부와 천주교도 사이에 오간 편지를 궤짝에 담아 안전한 곳으로 옮기던 중 발각되었다. 정약종은 1801년 2월 11일 체포되었고, 2월 12일 심문을 받았다. 정약종은 “모진 형벌을 받아 죽더라도 천주 믿은 일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시종일관 당당하게 말했다.
3) 정약용의 거짓말과 배교
정약용은 책궤 주인 친형 정약종의 검거보다 빠른 2월 8일에 전격 체포되어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 2월 10일에 영의정 심환지, 좌의정 이시수, 우의정 서용보, 영중추부사 이병모가 참석한 가운데, 붙들려온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등에 대한 취조가 시작되었다. 이때 정약용을 취조하던 중 정약종의 책궤에서 조카사위 황사영과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 중에 ‘정약망丁若望’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심문관이 “정약망이 누구냐?”는 말에 정약용은 “저희 일가에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약망若望은 정약용의 세례명인 요한의 한자식 표기인데, 정약용이 거짓을 고한 것이다. 당시 ‘추안급국안’의 심문 기록 속에 나오는 내용이다. 정약용의 친형 정약종은 1801년 2월 11일 체포되었다.
2월 13일에는 정약용이 다시 끌려 나와 취조를 받았다. 이때 정약용은 천주교 지도자 최창현을 고발했으며, 조카사위 황사영은 신앙과 믿음에 죽어도 변치 않을 인물로 자신의 원수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김백순과 홍교만을 더 지목했고, 묻기도 전에 천주교도를 체포해 신문하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었다. 상황이 워낙 다급했다. 죽음과 멸문의 구렁텅이가 저만치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자기가 말한 천주교 지도자들의 이름은 어차피 나올 수밖에 없는 이름이기도 했다. 같은 날, 이승훈도 끌려 나왔다. 추국청 심문관들이 이승훈에게 전하길 “정약용이 자기 집안이 너 때문에 천주학에 빠지게 되었으니 너를 원수로 여긴다.”라고 전하자 이승훈이 대답했다. “정약용이 저를 원수로 여긴다면, 저 또한 그를 원수로 여길 것입니다.” 죽음과 멸문지화의 구렁텅이 앞에서 처남·매부 두 사람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같은 날인 2월 13일 추국장에 끌려 나온 총회장 최창현은, 정약용이 너를 사학의 괴수로 지목했다는 진술을 들이대자, 지난날 자신이 천주를 배반했던 일을 깊이 뉘우친다며 천주를 위해 기쁘게 죽겠다고 말했다.
정약용은 2월 15일, 17일에도 연이어 끌려 나와 추국을 당했다. 심문장에서 정약용은 천주교의 고급 정보를 다 털어놓았다. 권철신과 황사영등 핵심 인물들을 지목했고,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려면, 믿음이 약한 노비나 학동을 신문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며 체포 방법까지 일러주었다. 심지어 주문모 신부의 거처까지도 알려주었다. 이 일로 정약용은 심문관들에게 일말의 동정을 샀다.
4) 정약용을 살린 책궤 안 편지들
그런데 잡혀 온 여러 신자들의 심문이 거듭될수록 정약용의 배교에 대한 증거들이 나왔다. 그 가운데 정약용을 죽음에서 결정적으로 건져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친형 정약종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약종의 책궤 안에서 나온 편지였다. 문서 속에 있던 정약용이 황사영에게 보낸 친필 편지에는 “재앙의 기색이 박두했는데도, 이를 하라고 종용한다면 내가 장차 손수 베겠다.(禍色迫頭, 慫慂爲此, 吾將手刃)”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또한 다른 편지 중에 “정령(丁令)의 말은 모두 공갈이니 겁먹을 것 없네(丁令之言, 都是恐喝, 不足動心)”라거나, “정령(丁令)이 안다면 반드시 큰일이 일어날 걸세(丁令知之, 則必生大事)” 같은 말이 나왔다. 정령(丁令)은 정약용이 당상관(堂上官-정삼품 이상 벼슬)을 지냈으므로 ‘정 丁 영감’을 줄여서 쓴 표현이었다. 이는 모두 정약용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문서 조사 중에 새롭게 밝혀진 사실로 가장 핵심 증거품에서 정약용이 천주교에 대해 일관되게 배척의 태도를 견지했다는 점이 입증된 것이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옥 안에 갇혀, 혈육과 친인척 지인들이 죽어 나가는 소식을 들어야 하는 심신의 고문을 당했다. 2월 21일에 권철신이 고문 끝의 옥사(獄死)를, 2월 26일에는 이가 환이 고문 끝에 옥사(獄死)를, 같은 날 서소문 형장에서 자형 이승훈과 자신의 친형제인 정약종의 참수를 그리고 최필공, 최창현, 홍교만과 사돈인 홍낙민이 참수 소식을 들어야 했다. 같은 날 뒤이어 자산과 형 약전 두 사람은 극적으로 죽음을 면하고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월 27일 새벽에 두 사람은 옥에서 풀려났다. 정약용은 배교와 검거 협조의 대가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경상도 장기현으로,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매질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겨우 추슬러, 2월 29일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지로 떠났다.
천주교 신자들의 참혹한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던 한양은 돌아가는 상황이 한층 긴박했다. 1801년 3월 12일 주문모 신부가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3월 15일 1차 문초가 의금부에서 열렸다. 4월 1일에 2차 문초를, 4월 17일에 3차 국문이 열렸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는 4월 19일 오후 4시경, 한강 변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 효수로 처형되었다.
5) 황사영 백서사건
1801년 2월 8일 정약용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던 중에 황사영을 고발하여 2월 13일에 체포령이 떨어졌다. 황사영은 홍필주의 집을 거쳐 정동에 있는 송재기 집에서 숨어있다가 상복을 입고 변장을 한 후, 이상인이라는 가명을 쓰며 평구 역에서 김한빈과 만나 여주, 원주를 거쳐서 충북 배론에 있는 김귀동의 가마 토굴에 숨어지내고 있었다.
황심 토마스(黃沁ㆍ1756~1801)가 1801년 8월 23일 배론으로 황사영을 찾아왔다. 그는 황사영의 잠적 이후 이루어진 한양에서 이루어진 주문모 신부와 교회 지도자들 신자들의 참혹한 죽음과 박해의 모든 소식을 전달했다. 절망이었다. 황사영은 캄캄한 토굴 속에 불을 켜, ‘음읍탄성(飮泣呑聲)’ 즉 울음을 마시고 소리를 삼키며 북경 주교에게 조선 천주교회에 불어 닥친 광풍을 보고하는 길고 긴 편지를 썼다. 13,384자의 깨알 글씨, 황사영 백서로, 1791년 진산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박해에서 1801년 박해까지 조선 천주교회의 자취와 주요 순교자들의 행적을 낱낱이 적고, 교회를 구해 낼 방안과 건의를 담은 내용이었다. 황사영은 이 백서를 황심을 통해 북경교회의 주교에게 전달할 작정이었다. 황심은 이미 4, 5년 전부터 북경을 왕래하며 조선 천주교회와 북경 교회의 연락책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북경교회 연락책인 옥천희가 의주 국경에서 체포되어 9월 11일 포도청에 압송되었다. 옥천희가 황심과의 관계를 토설하여 황심이 9월 15일에 체포되었다. 황심은 혹독한 고문에 못 견디고 황사영의 은거지를 실토하였다. 9월 26일 황사영이 전격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황심은 죽음과 멸문지화로 이어지는 가혹한 박해 사태를 조속히 수습하고 교우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황사영의 배론 은신처를 실토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교회와 남은 신도들의 목숨을 구명하려던 황사영의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
햔양으로 압송된 황사영은 황심,옥천희, 김한빈 등과 더불어 가혹한 심문과 형벌을 받았다. 김한빈, 옥천희와 현계흠은 11월 5일(양력 12월 1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황심은 1801년 11월 28일 한양 서소문 밖 형장에서 ‘능지처참 형’으로 순교했다. 황사영은 국문장에서 자신이 도망치는 바람에 신부님을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 원통해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11월 5일(양력 12월 10일) 새남터에서 능지처참 형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했다. 가산이 적몰되었고 그의 어머니 이소사는 거제도, 아내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에 관노비로 유배되었다. 두 살 외아들 황경헌은 어머니 정난주가 기지와 패물로 포졸과 배꾼을 회유하고 추자도에 버려 기구한 인생과 목숨을 이어갔다. 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으로 귀양갔으며, 심지어 집안의 머슴과 종들도 귀양과 유배에 처해졌다. 황사영이 극형을 당한 다음 날 그의 집은 헐리고 웅덩이를 파서 물이 고이게 했다.
6) 강진 유배
황사영 백서사건의 불똥은 장기와 신지도로 귀양 가 있던 정약용과 약전 형제에게도 다시 튀었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정약용에 대해, “전부터 천주를 믿었으나 목숨을 훔쳐 배교한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비록 천주교를 해쳤으나 속마음에는 아직도 죽은 신앙(死信)이 있습니다”라고 썼다. 배교의 상태이지만 정약용의 내면에 아직 신앙의 불길이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10월 15일에 정약용 형제와 이승훈의 동생 이치훈을 잡아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0월 20일에 정약용은 다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27일 투옥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혐의없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11월 5일에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재유배가 결정되었다. 정약용의 유배지가 강진으로 정해진 것은 다음의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강진 현감은 공서파의 인물로 진작부터 천주학을 몰아내야 한다고 잇달아 상소를 올렸던 이안묵(李安默, 1756~1804)이었다. 그는 넉 달 전인 1801년 7월 22일 강진 현감으로 부임해와서 범의 아가리를 딱 벌린 채 정약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9일 무렵 정약용 형제는 유배지로 향했다. 11월 23일, 정약용은 강진 읍내로 들어섰다. 정약용은 강진현 현감 이안묵 앞으로 끌려갔다. 유배객의 거처는 현감이 정해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안묵은 끝내 아무 말이 없었다. 정약용은 관아를 벗어나자 그 밤을 묵을 숙소부터 정해야 했다.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초기에 완성한 ‘상례사전(喪禮四箋)’의 서문에서 당시 일을 이렇게 적었다. “백성이 유배 죄인 보기를 마치 큰 독이라도 되는 듯이 여겨, 가는 데마다 모두 문을 부수고 담장을 헐며 달아났다.” 워낙 타지인에게 배타적인 성향에다, 현감의 노골적인 압력이 더해져 생긴 결과였다. 매서운 추위 속에 한 집 한 집 더듬어 나가던 정약용의 발길이 어느새 읍내를 가로질러 동문까지 이르렀다. 그 너머로 텅 빈 검은 들판이 땅거미를 삼켰다. 더 갈 데가 없었다. 동문 어귀 마을 우물 곁에 과객이 묵어가는 주막을 겸한 허름한 밥집 하나가 있었다. 새벽부터 먼 길을 걸어 추위에 떤 정약용이 밥 한술을 청했다. 노파가 나와 초췌한 그의 행색을 보고는 혀를 찼다. 더운밥을 내왔다. 손을 떨며 허겁지겁 요기를 하자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허망하고 적막했다. “예서 하루 묵을 수 있겠는가?” “누추해서…….” “고맙네.” 하루 이틀 묵어 나가려던 것이, 어찌어찌해서 정약용은 주막집 뒤란의 봉놋방을 숙소로 정해 눌러앉고 말았다. 앞의 서문이 이렇게 이어진다. “노파 한 사람이 불쌍히 여겨 살게 해주었다. 이윽고 들창을 가려 막고, 밤낮없이 틀어박혀 혼자 지냈다. 더불어 얘기할 사람도 없었다.” 웃풍이 몰려드는 들창은 아예 종이를 발라서 막고, 정약용은 밤이고 낮이고 죽은 사람처럼 골방에 틀어박혀만 있었다. 보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함께 허물어졌다. 그때마다 술을 청해 취하게 마시고 나서야 겨우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 섣달이 오지도 않았는데 동백이 그 이들이들한 푸른 잎 사이로 붉은 꽃을 피워냈다. 정약용은 대나무의 푸른 잎과 동백의 붉은 꽃을 보며 삶의 의지와 각오를 다잡았다. 이에 내가 흔연히 혼자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휴가를 얻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사상례(士喪禮)’ 3편과 ‘상복(喪服)’ 1편의 주석을 병행하여 정밀하게 연구하면서 침식을 잊었다.” 유배지에서 공부와 저술 활동이 이렇게 시작되어, 정약용은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이로 알려져 있다.
다. 세 번째 단계(1818~1836)
1) 저술
정약용의 생애에서 세 번째 단계는, 1818년 유배에서 돌아와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이다. 그는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음력 8월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이후에도 저술 활동으로 여생을 보내다 1836년 74세로, 60주년 회혼일 아침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정약용은 고향으로 돌아올 때, 유배 기간에 저술한 책 500여 권을 들고 왔다. 그의 주요한 저작은 거의 이 시기의 산물이다. 경집(經集:사서 육경 주석서) 232권과 문집 260여 권이다. 유배 다음 해인 1819년 정약용은 「흠흠신서」 30권을 끝내며 일가(一家)의 서(書)를 이루었다. 그가 저술 중에 '일표이서'라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는 정약용의 주요 저서로 꼽힌다. <경세유표(經世遺表)>는 국가 제도를 바로잡는 방법에 대해, <목민심서(牧民心書)> 수령이 고을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흠흠신서(欽欽新書)> 형벌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쓴 것이다.
2) 저술 활동 이유
정약용이 수많은 책을 쓴 이유는 그의 말 속에 담겨있다. “나는 일생동안 육경과 사서로 나의 몸을 닦아왔다. 그리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이렇게 일표와 이서를 지어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 사서육경과 일표이서로 보면 나는 내 나름대로 내 학문에 대한 이론과 실천의 본말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아주는 이는 적고 나무라는 이는 많다. 나의 이런 견해를 하늘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저 훨훨 타고 있는 하나의 횃불로 육경과 사서의 주석들, 그리고 일표이서를 모조리 태워버려도 좋다.” (‘자찬묘지명’) 정약용은 학문체계를 통합· 발전시키고 싶었던 학자로서의 꿈과,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일조하고자 했던 신하로서의 꿈 등, 유배로 못다 이룬 꿈을 그는 유배지에서도 끊임없이 가꾸고 돌봤다. 정약용의 학문과 저술 그리고 관직의 저변에 깔린 정신은 오로지 위국애민(爲國愛民)이었다.
3) 묘지명(墓誌銘)
정약용은 1822년 6월 16일 유배에서 돌아온 지 4년 후 맞는 회갑에 스스로의 묘지명을 썼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다. 이름은 묘지명이지만 내용을 보면 삶을 회고한 자서전에 가깝다. 내용은 정조대왕과의 인연, 천주교에 대한 입장, 자신을 시기하여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역적으로 몬 인물들, 유배 생활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저술하고 엮은 500여 권의 책 그리고 평생의 뜻을 새긴 명(銘)을 담았다. 정약용이 묘지명은 직접 쓴 까닭은 무엇일까?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 귀향하였지만 천주교와 연루된 자신은 18년간 유배살이를 하였고 가문을 폐족(廢族)으로 몰락하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누구 하나 번듯하게 제문을 써 줄 사람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남들이 쓰는 묘지명의 한계 때문이다.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의 인생을 모욕하거나 왜곡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정약용 스스로는 ‘자찬묘지명’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내 일생의 기록은 내가 챙겨야지. 내 평생의 언행을 대략 기록해서 내 무덤의 묘지문(墓誌文)으로 삼는다. 정말 나 같은 죄인의 글을 누가 새겨줄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묘지(墓誌)에 새길 글자는 이렇게 남기고 싶다……. 내 나이 예순이다. 나의 인생, 한 갑자 60년은 모두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거두려고 한다. 거두어 정리하고 생을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진정으로 올해부터 빈틈없이 촘촘하게 내 몸을 닦고 실천하며, 저 하늘이 나에게 던지는 지상의 명령, 나의 본분이 무엇인지 돌아보면서 여생을 마치리라.”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네가 기록한 너의 선행, 여러 편 글로 묶였구나.
그 숨겨진 잘못된 일까지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으리라.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나는 사서와 육경을 안다고.
허나, 그 행실을 살펴보라. 너무나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너는 칭찬을 바라겠지.
허나, 누구도 이끌어줄 수는 없으리라.
어찌 온몸으로 증명하여 드러내 빛내고 싶지 아니하랴만,
이제 너의 어지러움을 거둬들여 미쳐 날뛰던 일들은 그만두도록 하자.
머리 숙여 훤히 드러나도록 전념하니, 마침내 축하의 말이 있으리라.
‘자찬묘지명’ 마지막 부분이다.
라. 신앙과 학문에 대해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고 배교자였다. 다만 만년에 다시 참회해 신자의 본분으로 돌아왔는지 아닌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천주교 쪽의 가장 신뢰할만한 문서인 다블뤼(1818-1866) 주교의 비망기에는, 정약용이 만년에 참회 생활을 계속하면서 ‘조선복음 전래사’를 저술했고, 세상을 뜨기 직전 종부성사까지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정작 정약용 자신의 글 속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안 나타난다.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이나 내용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거나 외면하는 자기검열을 거쳤다.
그간 이 문제에 관한 한 국학 연구자와 천주교계의 논의는 얼음과 숯처럼 갈라져서 중간 지대가 전혀 없다. 자기 쪽에 유리한 내용만 보려는 통에 감정의 골만 깊어졌다. 정약용의 신앙과 배교도 사실이고, 만년의 참회도 거짓이 아니다. 만년에 정약용이 신자로서 참회했다면, 정약용의 경학 연구는 이로 인해 허물어지고 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이것은 결코 도 아니면 모, 전부냐 전무냐로 갈라 말해서는 안 될 문제다. 천주학과 유학의 공존, 이 가운데 정약용을 배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정약용이 만년에 천주교인으로 다시 돌아온 것과 그의 경학 연구 사이에 특별한 모순 관계가 없다는 가설이 대전제다. 이렇게 보면 정약용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율배반의 인간이 아니라 그 시대를 전신으로 받아들여 치열하게 진실을 살다간 영혼이 된다. 실상은 뭔가? 정약용은 어떻게 천주교에 발을 들여놓았고, 중간의 과정은 어떠했나? 아니 그보다 18세기 후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천주학이란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인터넷에 올라있는 <정민,다산독본>을 꼼꼼하게 보았다. 자세하고 방대하고 자료를 토대로 한 귀중한 글을 깊은 감사로 읽었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그 가르침이 전파될 수 있도록 땀과 눈물 목숨은 기본이요, 멸문지화를 감당해야했던 신앙에 어떤 형용이 마땅할지 그저 고개만 숙여질 뿐이다. 240여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교회와 특히 사회로부터 가차없이 ‘대역적’이라는 냉소를 받고 있는 기구한 몇 분에 대해서는 더우구 그러하다. 이제라도 그분들을 붙잡고 “후회하시느냐?”고 여쭙는다면 과연 어떤 대답을 주실까? 내 생각에 “아니”라고 대답하실 것이다. 그것은 240여 년 전 성경도 아닌 그저 천주교 관련 서적 몇 권만으로도 천주의 존재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깊고 확고했던 그들의 공부가 말해준다. 또한, 순교한 신앙 선조들의 분별, 선택, 투신이 옳았다는 것을 240여 년간 끊임없이 이어 저온 역사와 하느님과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 그분들이 대답이 ‘아니’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 ‘앎’이 분명하면 ‘삶’은 저절로 확고하지 않을 수 없다. 대표적으로 이 벽, 정약종, 황사영 같은 분들이 바로 그렇다. 그러나 하느님과 진리에 관한 한 정약용의 공부와 연구는 그들보다 깊지 못했다. 대신 그는 다른 방향인 자신과 벼슬과 학문, 군신지정이라는 길과 공부에 더 깊이 매료되고 침잠했다. 그의 삶과 신앙에 대한 두 가지 수식어가 있었다. 하나는 한자가 생긴 이래 최고 최다 저술가이며 대학자이다. 다른 하나는 배교자라는 수식어이다. 그러나 다산독본 이 책을 자세히 읽으며, 배교자라는 말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겠다는 이해가 다가왔다. 그러기에는 조선 천주교회 시작과 발전에 정씨 가문과 연관된 지인들과 친인척들, 형제들 무엇보다 그 자신이 감당했던 역할이 절대 작지 않기 때문이며, 동시에 인연으로 그분과 가족이 감당했어야 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어떤 분들은 죽음, 멸문, 역적으로 굽혀짐 없는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정약용 요한은 안위와 목숨이 위태로운 절체절명의 순간 앞에서, 한때, 진리의 이상세계에 대한 사유와 실천을 함께 했던 이들을 고발하고 수색 체포하는 방법까지 제공하면서까지 구차하게 살아남는 길을, 그리고 유배라는 유예의 시간에 수많은 기록을 남기는 ‘다른 신앙의 길’을 갔다. ‘살아남음과 다른 신앙의 길’, 그것도 분명 보람과 의미가 있는 길이었다. 그의 삶 그리고 저술들과 기록들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보속(補贖)이지 않았을까? 정약용이 중형 정약전을 위해 쓴 묘지명중에 이런 기록이 있다. “아! 골육(骨肉)을 서로 해쳐 가면서까지 자신의 몸과 명예를 보존하는 것이, 어찌, 그 화를 순순히 받아들여, 천륜(天倫)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만 같겠는가.” 또한, 스스로를 위한 묘지명 마지막에 ‘그 숨겨진 잘못된 일까지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으리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숨겨지고 잘못된 일 중에, 진리와 신앙에 관계된 자기 생각과 언행이 전혀 포함되지 않았을지 의문이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천주교와 관련한 기록은 일체의 자기검열과 은폐를 할 수 있었으나, 구중심처의 사상과 정신은 기록의 한계를 너머 있으며 누군들 쉽게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기울임체:편집자)
입력(최 마리 에스텔 2021년 12월 17일 PM 21:52)
덧붙임:
제 신앙과 공부를 위해 몇 주 공부하며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약간의 도움이 된다면 하는 마음으로 올려 공유합니다.
더 자세하고 깊은 공부를 원하시는 분들은 더 훌륭한 자료를 직접 찾아하세요~
참고 :
정민,다산독본; 김성태, 한국교회사 강의록; 차기진, 고난의 밀사;정약용,정약전묘지명
위키백과, 굿뉴스 한국민족문학 대백과 사전; 전북의 소리외 다수의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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