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27장1절-23절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 하기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편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Who is God?" 란 질문에 답할 수 있습니다.
이를 소위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들(Absolute Personalities)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속성 또는 특성(Chrarateristics)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이를 소위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Moral attributes)이라고 합니다.
이를 좀 더 신학적으로 표현해서 "하나님의 초월성 그리고 내재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시공간에서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이해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즉, 하나님을 명제들로만 이해하기보다, 삶속에서 경험한 고백들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욥의 세친구인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종교의 잣대로, 소발은 원칙의 잣대로, 그리고 빌닷은 현실의 잣대로 욥을 제단질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옳은 명제들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욥과 이 세 친구들의 차이점은 그들에게서 하나님이 어떤 속성들을 갖고 계시는 인격적인 분이신지에 대한 개인의 고백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경험한 하나님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운교회가 온다"란 책에서 저자, 마이클 프로스트 와 앨런 허쉬는 히브리 정신과 헬리니즘 정신을 구분하여 정의합니다.
"헬라 사고는 본질상 사변적인 반면 히브리 정신은 훨씬 구체적이다."
즉, 헬라적 사고는 존재의 본질, 형이상학(존재근원에 대한 사유와 직관)적 기초로 하나님을 사변적 신학안에 가두어 버렸고, 반면, 히브리적 사고는 역사적이고 실천적이며, 인격적라고 이야기합니다.
욥의 세친구들은 헬레니즘 정신을 추구하는 사람들 같습니다.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간증은 없고, 평가와 명제들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26장에서 욥은 1-4절을 통해 그러한 감동없는 명제들을 누가 듣겠는가? 라고 비꼬면서 반문합니다.
4절 "네가 누구를 항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이어서, 욥은 26장 5-14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인격적으로 표현합니다. 6절에 보면 "벗은 몸으로" 7절에 보면 "매다시며" 9절에 "펴시며" 10절에 경계를 그으시니" 11절에 "꾸짖으신즉" 12절에 "깨뜨리시며" 13절 "그의 입김으로" 14절에 "속삭이는 소리일 뿐"이라는 의인화된 표현된 고백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종교의 틀로 제한하고 명제화 시키면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유대철학자 마틴부버에 따르면
"쉐키나(하나님의 영광)는 인격을 얻으며 항상 여성의 형태를 취한다. 그녀는 은유적으로 하나님의 아내로 묘사된다. 다만 지금 유배중이다. 즉,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은 타락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광(쉐키나)이 다시금 유배로 부터 돌아오는 길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거룩한 행동들 행할 때 하나님과 그의 영광은 다시금 결합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갑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속성들을 공유하고 시간과 공간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때 바로 그 시간과 공간속에서 그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 쉐키나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쌓여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고백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속성들을 경험하며, 그 토대위에서 나의 이야기(History)를 만들어 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해 주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이 만나는 시간이요, 하나님을 제한된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순간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명제화 하며 친구 욥을 제단질 하는 욥의 친구들입니까?
아니면,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 쉐키나를 갈망하는 욥입니까?
오늘 본문 27장에서도 욥은 3절에 “하나님의 숨결이 아직도 내 코 안에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과 함께 들숨과 날숨을 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요한복음에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두려움 속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손수 찾아가시어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 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라고 하시며 “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들숨과 날숨을 하도록 성령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들숨과 날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이 '쉐키나',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과 다시금 만나는 시간이며, 하나님을 우리의 일상 속에서 만나는 기쁨이며,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하나님께 조율하는 시간입니다.
종교, 원칙, 그리고 현실의 잣대로 욥을 제단질 하는 그의 친구들에게 욥은 더 당당하게 반문합니다.
10절 “그가(복수)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부르짖겠느냐”
새번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들은(복수) 전능하신 분께서 주시는 기쁨을 사모했어야 했고 그분께 기도했어야 했다”
메시지 성경에서는 “기도로 알려져 본적이 있는가?” (Have they ever been known to pray before?“)
즉, 욥의 친구들은 종교, 원칙, 더 나은 현실을 갖고 있으면서도 기쁨을 사모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는 기도, 함께 호흡하는 대화도 하지 않았었다고 반문 합니다.
의로운 삶에 필수 조건들을 다 갖고 있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무익한 종처럼 어두운 데로 내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는 비유의 말들로 욥은 그의 친구들을 비웃습니다
27장 13-23절까지 그들의 모든 달란트들이 뺏앗기고, 도리어 남의 것이 되며 두려움과 비웃음만 남게 될 것이라고 욥은 반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 누구입니까? 욥입니까 아니면 그의 친구들입니까?
하나님과 호흡하며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려고 하지 말고, 책속에 누군의 설교속에 가두어 두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으로 만나야 합니다. 함께 호흡하며 대화하며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백과사전에 아니, 역사속에만 있는 하나님이 아닌, 오늘 나의 일기장에서 살아 움직이시며 나와 함께 호흡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잊지맙시다. 바로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는 시간이 기쁨의 시간이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 '쉐키나'가 만나는 시간일 것입니다.
*기도
주님...
하나님을 머리로만 알지 말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백과사전에 아니 책속에만 가두어 두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역사속에서 추억만 하지 않게 하시고, 삶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며,
오늘 나의 일기장에 생생히 살아 함께 하시는 나의 하나님을 만나며 오늘을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