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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八公山下] 팔공산을 天山으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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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의 동부능선 지형도
치산계곡을 보다 명확히 알려면 팔공산의 동부능선을 잘 봐둬야 할 터이다. 주봉을 출발해 1167m봉, 1085m봉, 1042m봉, 1036m봉, 1033m봉, 990m목(능선이 낮아진 곳), 1020m봉, 1003m봉, 986m봉, 991m봉, 986m봉, 도마재(950m), 신녕봉(997m), 930m봉을 거쳐 관봉으로 흐르는 능선 중 신녕봉까지가 치산계곡의 남쪽 담장 격이고, 930m봉까지는 동화사골의 북쪽 담장이라는 역할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봉을 지난 주능선은 '장군메기'(등산점 표시 <100>)라는 재로 낮아졌다가 1167m봉<98>으로 올라선다. 5만 분의 1 지도와 자연공원 고시(대구시-경북도), 현지 표석 등이 '동봉'이라 표기해 놓고 있는 그 봉우리. 이 봉우리에서는 남사면으로 큰 산줄기 하나가 출발해 동화사골과 용수천골을 가르고. 북사면으로도 중요한 산줄기가 흘러 내려 '새미난골'과 '염불골'을 구분 짓는다.
'동봉'이란 호칭이 등장한 것은 매우 오래 전인 듯, 1950년대 후반에 벌써 국가 지도가 그렇게 표시하고 있더라는 증언까지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으로 산악 활동을 시작했었다는 김종욱 전 대구교육과학연구원장의 기억. 공원고시 경우엔 높이를 1155m로 기록해 다소 혼란스럽긴 해도 이걸 동봉이라 지목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동봉·서봉이라는 것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위치 대비적인 지칭어일 뿐이니 폐기하고 본래 이름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이미 넓은 공감대를 형성해 놓고 있는 중이다.
'동봉'을 대체할 1167m봉의 본래 이름은 '미타봉'이라는 주장이 있어 왔다. 그렇게 부르던 옛 어른들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는 이상호 전 공산중학교 교장은 "봉우리 밑에 있는 여래 입상이 아미타불상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 석조상은 산 밑 사람들에 의해 '장군'이라 인식되기도 했고 지금은 약사불상이라는 사람도 있어, '미타봉'이라는 명칭에도 혼란이 생길 여지가 있는 듯 하다. 그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불교에서의 불상 배치 순서로 봐도 '미타봉'이 적절치 않다는 의견을 내 놓고 있다. 비로자나불이 복판에 앉을 경우 아미타불은 오히려 왼쪽에 배치되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 밑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뭐라 불러 왔을까? 남사면 사람들이 기억해 낸 이름은 '염불뒷덤'이었다. 염불암 위에 있어 그렇게 불렀다는 것. 요즘 말로 풀자면 '염불봉'에 해당될 터이다. 대구시 연구보고서인 '팔공산'(1987)도 등산로 설명 편에서 이걸 '염불봉'이라 지칭했다. 공원고시 역시 "1150m봉이 염불봉"이라고도 지목해 놓고 있는 바, 1167m봉을 그렇게 파악했을 개연성도 없잖아 보인다. 팔공산 동부 능선에 이것말고는 1100m를 넘는 봉우리가 없기 때문. 동일 대상을 놓고 '동봉'과 '염불뒷덤'이라는 이름이 뒤섞여 사용되자 이를 혼동했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이런 여러 정황들로 미뤄보면, '동봉'으로 지칭되는 봉우리의 1차 명칭은 '염불봉'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하지만 '염불봉'이란 명칭의 사용은 팔공산에서 이미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는 중이다. 1167m봉에 이어 나타나는 1085m봉에다 그 명칭을 붙여 놓은 등산객들이 적잖고, 5천분의 1 지도는 그 다음다음에 나타나는 1036m봉에다 염불봉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놓고 있기까지 한 것이다. 혼란은 옛날부터 발생해, 팔공산 밑에 사는 사람들끼리도 "염불봉에서 만나자"고 약속해 놓고는 서로 다른 봉우리들로 나뉘어져 기다리느라 결국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런 혼란을 없애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지명 조정 작업이 필요할 터이다.
1085m봉은 염불암에서 올려다 봐 정면으로 보이는 봉우리이다. <88>과 <87> 사이. 염불암이 정남향으로 앉았더라면 이 봉우리는 그보다 동북쪽으로 보이겠지만 암자의 좌향이 좀 틀어졌는지 실제로는 정 후면으로 보이는 것이다. 거기서는 남사면으로 산줄기가 하나 내려 가 염불암골과 양진암 골을 구분 짓는다. 능선 위로 난 등산로가 매우 뚜렷하고 역사 깊다.
1085m봉을 지나면 남사면으로 내려가는 등산길의 출발점이 잇따라 2개 나타난다. 먼저 것엔 <84>, 뒤의 것(1015m)엔 <82> 표지가 달렸다. <84>를 통해 내려가면 길은 산기슭을 가로질러 염불암골-양진암골 구분 능선에 도달한다.
그걸 지나 나타나는 봉우리는 1042m봉<81>. 하지만 그것은 1036m봉<80>과 매우 근접해 멀리서 보면 쌍봉의 형태를 하고 있다. 1036m봉에서 내려가는 산줄기를 타면 내원암에 도달하게 되니, 이 봉우리에는 '내원봉'이라는 명찰이 차라리 어울릴 듯 하다. 5천분의 1 지도가 붙인 '염불봉'이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1036m봉 이후부터 '바위병풍'이 시작된다고 보면 될 듯 하다. 바위병풍의 중간에 1033m봉을 지나게 되나 지형이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이 봉우리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줄곧 내리막. 그리고는 높이가 990m에 불과한 목<67>을 만나고, 또 이어 목<66>이 나타난다. 동화사의 암자들 공간(암자골)과 본절 공간(수시골)을 가르는 산줄기를 탈 등산로의 출발점이다.
그 산줄기는 1020m봉<65>에서 내려선다. 동화사 본절 뒷 계곡인 수시골 위에 얹혀 있어 동화사가 가장 잘 살펴지는 봉우리. 거기서 출발하는 산줄기 위로 난 오솔길은 팔공산 동부 능선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최고의 등산로라 평가해도 큰 잘못이 없으리라. 출발점 <66>을 지나자말자 급경사가 나타나 밧줄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 것이 유일한 흠. 하지만 그 어려움만 잘 넘기면 얼마 안 가 특이한 돌봉우리 2개를 만날 수 있다. 먼저 나타나는 돌봉우리 윗면엔 사람 하나가 들어 갈 크기의 홈이 패였다. 그래서 흔히 '의자 바위'라 불린다. 조금 더 내려가다 솟는 돌봉우리에서는 바위병풍이 가장 잘 조망된다. 많은 등산객들이 즐겨 점심을 먹는 자리. 그걸 지나 걸음을 재촉하면 동화사 본절 서편의 주차장에 도달한다.
1020m봉을 지나면 <64>라고 쓰인 등산점 표지판이 다가선다. 주능선상의 인접 구간과 높이가 비슷해 평지 같이 지나치기 십상인 곳. 하지만 주의 깊게 본다면 이 지점은 바위병풍이 끝나는 지점이고, 북사면으로 돌아 나 있던 등산로가 드디어 능선 위로 다시 올라서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점 못잖게 중요한 포인트는 그 <64>지점을 통해 북사면으로 매우 큰 산줄기 하나가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염불골과 동애골을 갈라붙인다.
그 산줄기는 <63>에서 접근해야 올라 설 수 있다. 그런 뒤에는 금방 1031m봉에 도달하니, 그 위에 펼쳐져 있는 널따란 바위 방석에서는 주봉 이후 낮아져 온 주능선의 흐름이 한 눈에 짚인다. 어떤 등산객은 휴일마다 이 돌방석에 앉아 점심 먹고 가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고 했다. 봉우리 아래 서편으로 조금 뻗어나간 짧은 덤에는 과분수형의 또다른 기암이 버티고 있다. 등산인들은 그걸 '버섯바위'라 부르고 있었다.
1031m봉을 지나 북사면으로 내려가는 산줄기는 970m, 940m 등의 봉우리를 거치며 공산폭포로 향한다. 그 중 970m봉에서는 팔공산 정상부의 동편 절벽과 그 밑의 진불암이 한눈에 조망됐다. 반대로 진불암에서도 이 봉우리는 오른편으로 우뚝 솟아 보였다. 그 정상에는 탑재들이 흩어져 있었다. 기단석과 옥개석도 보였다. 전문가들이 한번 살폈으면 싶다.
<63>을 통과하고 난 뒤 주능선은 대체로 900m대로 낮아져 달리다가 986m봉에 도달해 남북사면으로 동시에 산줄기를 출발시킨다. <57>지점을 출발해 북사면 치산계곡으로 곧게 내려서는 산줄기는 동애골과 민비골을 가르는 분수령. 반면 <55>지점에서 남사면으로 출발하는 줄기는 동화사골을 수시골과 폭포골로 가르는 분수령이다. 이걸 타고 내려가면 동창골 약천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 직전에 높이가 756m나 되는 봉우리를 하나 솟구쳐 올리니, 그걸 학부마을 어르신들은 '삿일봉'이라고 불렀다. 동화사 마당에서 봐 동북쪽으로 가장 우뚝이 솟은 그 봉우리이다.
주능선상의 986m봉을 지나면 950여m까지 낮아진 재가 기다리고 있다. 도마재<53>. 그 남사면으로는 동화사계곡의 폭포골이 흐르고, 북사면으로는 치산계곡의 민비골이 연결된다. 도마재를 건너면 957m쯤 되는 얕은 봉우리로 솟고 다음엔 도마재 보다 더 낮아 해발 940m 밖에 안되는 목<52>이 하나 나타난다.
그걸 지나 올라서는 봉우리가 신녕봉(997m)<48>이다. 팔공산의 주능선은 거기서 동남쪽으로 꺾은 뒤 930m봉을 거쳐 관봉을 향한다. 그러나 신녕봉에서는 주능선을 북동쪽으로 벗어 나가는 신녕지맥이 출발하기도 한다. 지맥의 초입에 있는 코끼리바위는 은해사 입구에서까지도 가장 인상 깊게 바라다 보이는 뛰어난 풍광. 주능선만 따라 다니는 등산객으로서는 만나기 힘든 비경이다.

팔공산의 계곡들은 요즘 엄청나게 많은 피서객들로 발 들여놓을 틈도 없다. 능선으로 오르려는 등산객들이 오히려 눈치를 보며 지나다녀야 할 정도. 얼마 전 끝난 장맛비로 불어난 계곡들이 수영장 역할까지 해 준다. 지난 20일 수태못 상류 모습.

염불암에서 올려다 본 1085m봉. 암자의 바로 윗봉우리 같이 보여 등산객들이 흔히 '염불봉'이라 부른다. 법당 오른쪽으로 마애불 2구가 새겨진 염불바위가 두드러지며, 그 뒤 암자 담장 바로 너머에는 '일인석'이라 새겨진 암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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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바위 삼성각 기도객들 모습. 기도객들은 약사불에 못잖은 정성으로 삼성각에도 오체투지의 기도를 올린다.초능력자의 도움을 비는 단순 신앙에서는 그 초능력자의 이름에 생길 수 있는 차이는 크게 중시되지 않는 듯 했다.산신을 모신 산신각, 수신(水神)을 모신 용왕각, 북두칠성의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모신 칠성각 등으로 삼성각이 구성돼 있다.
팔공산에 깃든 '산신'과 '장군'의 기운을 살피다가 정상부와 양사면 계곡 쪽으로 이야기가 길어졌었다. 하지만 팔공산이 김유신 장군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그와 관련된 석굴들에는 늘 또 하나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원효대사.
지역사에 대두하는 신라의 주요 인물들을 연대순으로 보자면, 가장 빠른 시기의 사람들이 자장 율사와 김유신(595∼673) 장군이었다. 서기 620년에서 660년 사이 주로 활동했다고 단순화시켜 둬도 될 듯한 인물들. 이들보다 20, 30년 늦은 세대가 원효(617∼686)와 의상대사였다. 원효가 29세로 출가를 결심할 즈음 김유신은 벌써 51세의 노장이었고, 자장은 57세쯤 된 나이로 통도사에 주석하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 유학을 함께 떠나려 준비할 정도로 뜻맞는 도반이었던 의상대사는 원효보다도 8세 연하였다. 원효가 팔공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34세 이후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산에서 가까운 경산 출신이기도 했던 설원효 스님은, 34세 때 당나라로 가다가 붙잡혀 귀환한 뒤 다시 유학하러 떠나던 44세 사이의 상당 기간을 팔공산에서 수행했다는 것이다. "불굴사 석굴에서 수도한 뒤 오도굴에서 득도했다는 것이 골간이다.
불굴사 석굴은 지금도 그 모습이 선명히 유지돼 있으니 더 살필 일이 없을 터이다. 무학산에 가까이 위치한 이 석굴은 마침 팔공산권 중에서도 원효의 고향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팔공산 정상부 산성봉의 서편 '청운대' 절벽에 있다는 '오도굴'이 어느 것인지는 확정하기 쉽잖아 보였다. 동산계곡 청악교 부근에서 접어들어 도달하는 오도암 뒤 절벽에 있다는 점에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일치되고 있었으나 그 이상의 세세한 부분에서는 이야기가 엇갈리기 때문이었다.
1988년 10월 당시 한 문화동우회는 오도굴이 절벽의 꼭대기 부분에 있더라고 답사 결과를 전했었다. "굴은 일부러 판 것으로 보이고, 입구 높이 80cm, 길이(깊이) 2.8m였으며 입구 절벽엔 서(誓) 무엇 무엇이라고 글자 석 자가 파여 있었다"는 것이 그때 설명된 모습.
그러나 인접 마을 출신으로 오도암 터에 10여 년 살았고 지금도 인근에 거주하며 '공부'를 해 '도사'로 불리는 한 어르신의 설명은 달랐다. 석굴이 절벽의 하단, 오도암 바로 뒤의 어느 부분에 있더라고 했다. "사각형에다 천장 부위가 아치형인 입구를 가진 큰 굴이었다" "그 복판 바닥 암반에 두 사람이 목욕할
만큼 큰 깊이 1m 가량의 절구형 홈이 파였으며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로 가득 찬 그 홈 밖의 빈자리도 5, 6명은 충분히 앉을만한 크기였다"는 것이 그의 기억이었다.
이런 설명들을 길잡이 삼아 취재팀이 청운대 절벽에 접근했더니, 접근로부터가 증언들과 달라져 있는 듯 했다.
옛날 사람들이 오도굴로 다니던 길은 오도암 뒤로 나 있었다고 했지만, 지금의 길은 암자 앞마당을 통해 절벽으로 접근토록 돼 있었다. 그걸 따라 청운대로 접근했더니, 나무 등등의 자재로 근래에 만든 인조 '토굴'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수행자들은 요즘도 그런 공간을 좋아하는 듯 했다. 그걸 지나자 길은 끝났고 그 나머지 구간은 수직 상승해 절벽을 올라가도록 돼 있었다. 그 출발점에는 암벽등반용 밧줄이 수십m 높이에서 내려 와 있었다. 하지만 그 밧줄은 절벽 위로 오르내리기 위한 수단일 뿐 오도굴로 가기 위해 설치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설명된 그 어느 굴도 취재팀은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어쨌건, 오도굴 같이 신령스런 분위기의 석굴들을 놓고 김유신과 원효의 이야기가 뒤섞여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가진 듯 보였다. 팔공산의 주인공이 김유신에서 원효로 대체되는 양상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이고, 김유신으로 구상화됐던 '산신'이 원효로 대리되는 '부처님'에 의해 치환됨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산신-장군 등의 토속신앙이 점차 불교신앙으로 대체돼 가는 큰 흐름이 그 속에서 짚이는 것이다.
신앙의 대상이 산신에서 장군으로, 또 장군에서 부처로 치환된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 큰 무리는 발생하지 않았으리라 싶었다. 깨달음, 해탈, 자유의 획득 같은 수행의 분야가 삭제되고 신앙만으로서의 종교로 선택될 경우, 기도의 대상은 산신이든 장군이든 부처이든 민중에게 큰 차이가 없을 듯도 한 것이다. 부처와 산신이 혼동되는 현장은 지금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원효대사가 팔공산에서 활동하던 때는, 불교계로서도 여건이 상당히 좋았던 시절일 듯 하다. 신라의 불교 공인(527년) 120여년 후여서 활동 기반이 탄탄했을 때였을 뿐 아니라, 마침 당시는 신라의 최부강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앞에서 살핀 4명 중 자장을 제외한 3명이 모두 신라의 삼국 통일을 지켜본 인물이었던 것이 한 증거. 통일 당시 김유신은 73세, 원효는 51세, 의상은 43세였을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자녀를 잃은 많은 가족들이 슬픔에 빠져 지내고 사회 전체로도 전쟁에 대한 공포감이 적잖았을 터였지만, 삼국통일이라는 성과를 눈앞에 뒀으니 만큼 에너지만은 넘쳐흘렀으리라 싶다.
원효와 의상이 활동하던 시기 팔공산에 지어진 절로 전문가들이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는 우선 △서기 640년 전후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부인사 △군위 삼존석굴 등을 들 수 있다. 또 원효 스님이 △삼성암(팔공산 삼성봉 남사면) △오도암(산성봉 서사면) △원효암(와촌 갓바위골 솔뫼기마을 위) △불굴사를 세웠고 △650년쯤엔 자장율사와 함께 수도사(치산계곡)를 창건했다고 했다. 의상스님은 △은해사골에 운부암을 세우고 △미리현(해안현)에는 미리사(美理寺)를 세운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절들이 팔공산에 세워졌던 초기 사암들이었다는 얘기.
하지만 모두가 워낙 옛날 일이다 보니 기록들이 그렇게 신빙성 높은 것만은 아닌 듯 했다. 운부암의 창건 연대는 서기 651년 혹은 711년이라 지목되고 있는 바 그때는 의상이 불과 26세 정도였거나 사망한 뒤인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불굴사 역시 690년에 창건됐다고 하나 창건자라는 원효는 그 4년 전에 이미 열반한 것으로계산된다.
기록들의 신뢰성 부실 상황은 다른 여러 곳에서도 발생해, 원효와 의상이 태어나기 전인 서기 491년에 선본사, 493년에 동화사가 '극달화상'이라는 분에 의해 창건됐다는 기록도 있다고 했다. 하나 신라에서는 불교가 서기 527년에야 공인되는 점으로 미뤄 신빙성이 떨어지는 서술로 평가되고 있다. 원효-의상의 시대에 여러 절들이 세워졌다고 해서, 지금 같이 짜임새 있게 지어졌다고 보는 것도 매우 부적절할 터이다. 움막 같이 창건되기도 했고, 석굴이 절로 이용되기도 했으리라. 팔공산에는 자연 석굴이 숱하게 많아 불상을 모시거나 수행을 하기에 좋은 곳이 하나 둘 아니기 때문이다. 군위 삼존석굴이 대표적 예가 아닐까 싶다.
원효-의상 시대에 적잖이 창건된 절들 중 상당수는 또 세월이 흐르는 사이 숱하게 무너져 없어지거나 다시 세워지거나 해 왔다. 특히 미리사는 사라져 위치조차 아는 사람이 없고 삼성암은 터만 남아 등산객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원효의 오도처라는 오도암마저 겨우 암자의 맥을 잇고 있을 정도. 전에 있던 건물이 1968년 1·21 사태 이후 독가촌 처리 방침에 의해 철거된 뒤 아직 복원의 기틀조차 제대로 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위 삼존석굴은 1927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다시 알려졌고, 보전 작업은 더 늦은 1962년, 수호 암자인 '석굴암' 신축공사는 1987년에야 본격화됐다고 했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 군위 삼존석굴. 경주 석굴암보다 200여년 앞서 원효 생시 연대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그러나 경주 것과 달리 아미타부처가 주불로 모셔져 있다.

☞ 오도굴을 찾아 다니던 중 취재팀이 만난 또하나의 석굴. 장군수 석굴 인근 계곡에 있고, 입구는 밑변 2m, 높이 1.8m 정도 되는 사각형이었으며 길이(깊이)는 2m 정도 됐다. 수행자 한 사람이 가부좌 틀기에 충분할 크기. 서북향이어서 햇빛이 들지 않고 절벽에 막혀 전망 좁은 것이 흠될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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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공산의 마애불들. ①은 동화사 일주문 앞, ②는 옛 삼성암(三省庵) 터, ③은 부인사 밑, ④는 원효암 뒤에 있는 마애불이다. ⑤는 드물게 미륵불상으로 믿어지고 있는 송정동 입상(대구시 유형문화재 22호). 유명한 정상부 방송탑봉 밑의 마애불과 장군메기 입상 등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원효--의상 시기 이후 팔공산에서의 절 창건사는 한동안 한적하다. 그 100여년 뒤인 8세기쯤 조성됐으리라 판단되는 갓바위불상과 거조암이 중요한 현존 유적의 전부라 해야 할 정도. 거조암은 서기 750년 경, 갓바위불상은 그 이후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정말 많은 절이 창건돼 팔공산이 불교의 성지로 변하는 때는 거기서 또 100여년이 더 흐른 9세기인 듯 하다. 이 시기 절 중 창건연대가 상대적으로 빠른 것은 은해사골의 '기기암'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늦은 것은 그 암자와 산 능선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백흥암' 및 팔공산 서남사면의 '송림사'(칠곡)라고 했다. 하지만 그 시기 팔공산 불교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은 '심지(心地)대사'이다. 그는 동화사를 포함한 많은 주요 사찰을 일으킨 '팔공산 불교'의 중흥주이자, 일대 불교의 성격을 바꿔놨던 전환 주체였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심지스님은 신라 헌덕왕(809∼825)의 왕자로, 15살에 출가해 팔공산에 머물기 시작했다. 어느 골에서 팔공산 생활을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은해사골에서 출발해 동화사골로 왔다는 설과 파계사골에서 출발해 동진하며 활동했으리라는 추측이 병립돼 있는 모양이다.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서기 830년 전후. 사찰 창건 기록으로 볼 때, 심지스님은 832년에 동화사, 같은 시기에 파계사, 834년에 묘봉암(은해사골), 같은 해에 중암암(〃), 다음해에 환성사(환성산군)를 창건한 것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9세기 들어 심지스님에 의해 이렇게 많은 사찰들이 창건된 데는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을 듯 했다.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그때가 신라의 쇠락기였다는 점. 혜공왕(765∼780) 이후 시작된 왕위 쟁탈전으로 흉사가 계속되고 국력이 소진돼 지방은 점차 통제가 불가능해지던 때였던 것이다. 무열왕 때 백제를 병합(660)하고 문무왕 때 고구려까지 합쳐 드디어 통일(668)을 이룩한 뒤 신문왕(681∼692) 성덕왕(702∼737)을 거치며 강력한 전제국가를 형성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더욱이 스님 당시 신라에는 온통 피냄새였다. 심지 스님도 그런 참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서기 836년에 심지의 작은 아버지인 흥덕왕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살륙이 시작됐다. 왕의 5촌 조카가 왕의 4촌 동생을 죽이고 희강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다음엔 희강왕을 밀었던 그 6촌이 왕을 자살케 하고는 민애왕이 됐다. 그리고 이 민애왕도 등극 며칠만에 23살의 나이로 살해됐다(839년). 일련의 살륙극 중 맨 먼저 희생됐던 사람의 아들이 장보고의 청해진 군사를 빌려 6촌이던 민애왕을 처치하고 스스로 신무왕이 됐던 것. 멀어 봐야 6촌 범위 안에서 벌어진 광란이었다.
그때 장보고의 군사들이 민애왕군을 초토화시킨 곳도 대구 들판이었다. 심지가 사는 바로 앞마당까지 피바람이 몰아친 것. 또 그렇게 해서 살해된 민애왕은 바로 심지스님의 4촌이었다. 심지스님은 그 민애왕 피살 24년 뒤인 서기 863년에 그의 극락왕생을 비는 탑을 세운다. 동화사 주차장 밑 비로암 뜰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왕자이던 심지는 스님으로 출가했을 뿐 아니라 특별히 미륵신앙까지 도입했다. 미륵신앙은 현세가 아니라 미래에 좋은 개혁이 일어날 것이라는 민심의 기대를 지지 바탕으로 하는 것. 변혁과 혁명의 사상으로까지 이해되고, 말기 시대에 흥하는 신앙이라는 얘기도 들렸다. 그 이전까지 팔공산을 지배했던 불교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인간성은 사라지고 오직 왕위와 권력에만 미쳐 설쳐대는 광란상이 심지스님을 출가케 했고, 그래서 평화와 사랑만 있는 미륵불의 내세를 그는 기원했는지 모를 일이다.
심지스님이 활동하기 전 팔공산의 불교는 대체로 화엄종 계열이 아니었을까 싶다. 전문가들의 설명을 들으면, 원효와 의상은 공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음의 출발점으로 삼는 수행을 한 듯 이해된다. '모든 것은 마음의 요술일 뿐'이라는 이야기. 특히 의상은 국내 화엄종의 개창주로서 중국에 가 관세음보살 신앙을 들여오고 영주 부석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전국에 화엄 십찰(十刹)을 세울 때 그 중 2개를 대구권에 뒀다고도 했다. 달성군 화원의 남평문씨 세거지 일대가 그 터일 것으로 추정되는 비슬산 옥천사(玉泉寺)와 팔공산 미리사(美理寺)가 그것이었다.
심지스님이 팔공산에 도입한 미륵신앙은 원효보다 100여년 늦은 시대의 스님인 진표가 미륵보살로부터 교법을 전해 받아 전라도 금산사를 중심으로 선양한 신앙이라고 했다. 심지스님은 진표의 계승자이던 영심(永深)으로부터 이어받아 법통을 동화사로 갖고 왔다. 그렇게 해서 동화사는 미륵신앙의 전국적 헤드쿼터로 부상했다. 법통의 상징은 '불골간자'라는 것. 그걸 인수해 모시기 위해 심지가 동화사를 지었다고 했다. 불골간자가 얼마나 대단하던 것인지, 고려 말 왜구가 대구까지 침입했을 때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는 서술이 보이고, 임진왜란 때 동화사가 소실되기 전 개성으로 옮겨 안치했다는 설도 보인다.
그러나 동화사는 물론, 팔공산 전체에서도 지금 미륵불의 흔적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대구 송정동에 있는 미륵불상 등이 몇 안 되는 미륵신앙의 남은 흔적일 듯 싶을 뿐. 대신 지금 팔공산을 차지하고 있는 마애불 등 옛 불상들은 가차없이 약사불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다. △동화사 일주문 마애 여래 좌상(보물 243호) △동화사 삼존불(석가모니-아미타불-약사여래) 중 약사여래 좌상 △주능선 장군메기 석조 여래 입상 △옛 삼성암(三省庵) 터 마애 여래 입상 △정상부 방송탑봉 남사면 마애 여래 좌상 △불굴사 여래 입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미륵불이 개혁과 내세 평화를 바라는 민중의 심리에 호응하는 부처라면, 약사불은 이 생에서의 복락 소원을 들어주는 부처라고 했다. 그렇다면 동화사와 팔공산의 이미지가 180°달라진 셈. 그리고 어느덧 팔공산은 약사불 신앙의 전국적 중심지로 굳어졌다. 지금 팔공산 약사신앙의 상징은 관봉 갓바위 여래 좌상. 밤낮으로 기도객이 끊이지 않고, 음력 매월 초에는 전국에서 하루에만도 5, 60대나 되는 관광버스가 몰린다고 했다. 부산과 울산에서는 평일에도 매일 각각 3대 및 1대씩의 관광버스가 왕복 요금 1만원씩에 정기 운행되고 있다고 그쪽 운전기사들이 전했다.

☞동화사 비로암 석탑. 신라 쇠망기 왕위 쟁탈 살륙전의 아픔을 쓰다듬기 위해 세워졌다. 1968년 이 탑에서 그때 기록이 생생히 발굴됨으로써 묻혀 있던 역사까지 밝히는 계기가 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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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해사골 산줄기
산스크리트어 '아란야'(aranya)가 줄어 형성된 '난야'(蘭若)라는 말의 본래 뜻은 '조용한 곳'이라고 했다. 선원(禪院)으로 대표될 수 있는 수행처를 이를 듯. 염불암에는 '염불난야', 은해사골 중암암과 파계사골 성전암 등에는 '천태(天台)난야', 운부암엔 '운부난야'라는 현액이 있거나 있었다고 했다. 원효가 수도했다는 '城山난야'(廣州) '직산( 山)난야' 등이 예부터 유명하다는 기록도 보였다.
팔공산의 대표적 큰 절인 동화사 골의 난야 중에서는 염불암이 상대적으로 빠른 시기인 서기 928년에 창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했다. 고려시대 것이라는 청석탑(靑石塔), 아미타불과 문수보살의 모습이 새겨졌다는 염불바위 등 문화재를 갖고 있는 곳. 왕건과 관련 있다는 '일인석'은 암자 뒷담에 인접해 있고, 지눌 스님의 이야기가 서린 '눌암'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동화사골에서 가장 상징적인 난야는 뭐니뭐니 해도 본절의 '금당선원'일 터. 수시골 물길을 사이에 두고 대웅전을 등지고 앉은 공간이다. 옛날부터 수많은 조사들이 이 금당선원을 거쳐갔다고 했다. 한때 문을 닫았다가 1995년 재개했다고 관계자가 알려줬다.
여기다 내원암, 부도암, 양진암 등이 더불어 스님들의 중요한 수행처 역할을 나눠 맡고 있다. 금당선원과 다른 점은 비구니 스님들의 선방이라는 것. 이들 암자는 조선조 중기 이후 창건됐다고 했다. 알려진 창건 연도는 내원암이 1626년, 부도암이 1658년, 양진암이 1743년.
이런 동화사골과 주능선을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는 은해사골은, 주는 맛이 못잖게 깊은 여러 난야들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골 자체가 대 외부 차단력 높도록 형성돼 있는 것도 그런 기운을 돋우는 요소일 터. 은해사골의 구조부터 한번 살펴보자.
은해사골은, 뒷담 부분(서쪽)과 입구 부분(동쪽)이 매우 좁은 반면 배는 불룩해 그 형상이 마름모꼴에 가깝다. 뒷담은 운부봉(876m)-느패재-은해봉(882m) 사이의 짧은 주능선 구간. 거기서 출발하는 남편 및 북편 담장 산줄기들은 골 입구 부분에서 급속히 오므라든다.
그 중 북편 산줄기는 운부봉에서 출발해 달리면서 거조암골로부터 은해사골을 구획 짓는다. 출발 후 한참만에 잔가지를 하나 흘려보내 그 속으로 운부암을 품어 들이며, 곧 이어서는 두 갈래로 갈라져 그 중 하나가 은해사 쪽으로 급격히 굽어 든다. 나머지 한 줄기는 은해사골과의 사이에 애련리라는 마을을 들어 앉히는 그것.
남쪽 울이 되는 산줄기는 은해봉에서 출발해 선본사골과의 분수령이 된다. 여러 봉우리들을 거치며 묘봉암(650m) 골을 낳고 더 달려서는 기기암(440m) 골을 만들어 둔 뒤 결국엔 은해사 입구로 굽어 든다. 주능선에서 빠져나와 이 산줄기 위를 걷는 기분은 늘 편안함 자체이다. 일대 산길은 한가함을 과장해 가며 느긋이 걷기에 더 없는 안성맞춤. '묘봉'이라 불릴 듯한 묘봉암 뒤 돌봉우리(753m)에 평평히 올라앉으면 온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다. 청통과 신녕의 들판과 마을들이 일망무제. 은해사골 여러 암자들은 물론, 선본사골도 훤하다.

☞ 동화사 부도암 비구니 스님들의 하안거 모습. 이번 여름에는 23명의 스님들이 화두를 들고 있다고 했다. 그 힘든 수행을 통해 스님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절대자유, 대자유, 그런 것들일까. 변덕 무쌍한 마음은 꿰뚫어 거머쥐었을까. 스님들은 앞으로 나흘 뒤면 해제하고 운수에 나설 것이다.
하지만 은해사골은 이런 정도로 완성되지 않는데 더 깊은 묘미가 있다. 골의 중앙으로 달리는 산줄기가 하나 또 나타나 다양성을 높이는 것. 이 줄기는 남쪽 담장 역할을 하는 줄기에서 빠져나간다. 그리고는 산줄기가 절벽 밑으로 떨어져 높은 고도를 잃을 찰나 그 몸체 속으로 중암암(650m)을 맞아들인다. 산줄기는 그 후 한참을 내려서다 새끼 줄기를 하나 쳐 백흥암 터를 내 주고는 태실봉으로 맺혀 올랐다가 신일지 못을 만나 생을 마친다.
골의 구조를 살폈으니 이제 골 안을 걸어 볼 차례. 입구를 통해 은해사골로 접근하자면, 먼저 본절이 나타나고 그 담벽을 거의 다 지났다 싶을 즈음 개울 건너 왼쪽으로 찻길 하나가 빠져나간다. 그 즈음에서 개울에 붙어 대나무밭 속의 작은 정자 같은 느낌을 주는 건물은 '서운암'. 출입금지 팻말까지 붙어 있는 것으로 봐 그 난야에서는 어떤 무거운 수행이 진행되고 있는 듯 싶었다.
그걸 지나 골을 따라 오르는 길을 꾸준히 걸으면 드디어 널찍한 공간이 펼쳐진다. 산 속 답잖게 여러 마지기의 밭까지 갖춘 그곳에 자리잡은 것은 기기암(寄寄庵). 지난 2월 중순 어느날 아침, 잔설이 적잖게 남은 산길로 차를 몰아 올랐다가 받은 느낌은 특별하고 특별했었다. "이 암자의 주인은 부처님도 스님도 아닌, 햇볕과 물 그리고 새들이 아닐까" 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지나치게 일찍은 시간에 찾아가 수상해 보이기 충분할 터인데도 나와 경계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먼저 마당에 나와 있던 공양주조차 기자를 잠깐 쳐다보는 듯 하다가 들어간 뒤론 온 절이 텅 비어진 듯 했다. 따사로와진 봄볕에 흥이 나 옥타브를 높인 여러 새들의 합창, 전날 내린 봄비로 청량해진 계곡물 소리만 평화로왔다. 건물들도 그 분위기에 참으로 잘 어울려, 대세지보살을 모셨다는 법당보다는 그 오른쪽 공간에 자리한 선방이 절의 중심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높은 흙벽을 둘러 쳐 사바세계와 담을 쌓은 듯한 건물. 기기암은 그렇게, 팔공산 곳곳을 다니는 기자에게 특별히 푸근했던 난야였다.
기기암이 은해사골의 가장 남쪽 공간을 차지했다면, 북쪽 공간엔 운부암이 자리잡았다. 역시 개울을 끼고 있는 운부암에서는 앞마당의 수백년 된 보리수가 그 깊숙한 역사를 증언하는 듯 하다. '보화루'라는 입구 공간을 지나면 정면으로 원통전이라는 법당이 자리하고, 그 앞에 운부선원과 요사체가 도열했다. 원통전에는 청동으로 만든 관음보살 좌상이 모셔져 있는 바 보물 514호라 했다.
이 운부선원은 "북의 마하연선원 남의 운부선원"이란 말이 있었을 정도로 전국에서 유명한 난야였다고 했다. 도리사 선방과 함께 남한의 2대 선방으로 꼽혔다는 설명도 있었다. 근세 선불교의 재건자라는 경허스님이 거쳐갔고, 만공 용산 운봉 경봉 향곡 한암 팔봉 청담 성철 등 조사들도 그랬다고 했다. 그러나 근래 48년간 명맥이 끊겼다가 1998년 일타스님이 조실로 앉으면서 선방 문이 다시 열렸다고 설명돼 있었다.
이렇게 기기암과 운부암이 자리 잡은 사이의 은해사골 중간으로는, 백흥암과 중암암이 포진했다. 백흥암은 조선 중기 건물인 극락전 안에 보물 486호 수미단을 받쳐 아미타불을 모시는 절. 추사 글씨 '산해숭심'(山海崇深)이 유명하다는 얘기도 있었다. 비구니 스님들의 선방이 이름 높은 백흥암을 지나 산길을 계속 오르면, 특이한 풍광으로 유명하고 본 시리즈에서도 모습을 살핀 적 있는 중암암에 도달한다.
은해사골의 지금 모습은 이렇지만,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일대를 대표하던 사찰은 '상용암'(上聳庵)이었던 듯 했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홍진(洪眞) 스님이 서기 810년대 즈음에 창건해 주석했다는 암자. 암자 밑의 현재 은해사 자리를 가리키며 "저 터에 절을 세우면 골 안의 본사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는 분이다.
1686년에 우담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 의하면 상용암은 중암암 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그 글에서 중암암은 그냥 중암(中菴)이라 불리고 스님 혼자 지키는 허술한 절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그 100여년 뒤인 1797년에는 계서 윤희요가 일대를 둘러보고 '공산동산록'을 써 뒀다. 그 글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는 상용암이 있고, 거기서 좀 내려간 곳에 '중용암'(中聳庵)이 있으며, 중용암 인접해서 지금의 중암암 전각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 일대에는 그 외에 미타암 니암 충효암 남암 사자암 등등도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런 은해사골 난야들은 하나 하나가 그림 같다. 그야말로 난야여서 속티라곤 없는 듯 싶을 정도. 이 골 안의 또 한 난야인 묘봉암에서 작년 가을 만났던 개 한 마리까지도 그런 느낌을 받게 했다. 노루가 배추밭을 망치는 걸 막기 위해 데려다 키운다는 그 개는, 과일을 바스락바스락 깨 먹고 속가 개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과자 떡 같은 절 음식을 잘도 먹고 있었다. 오랜 절 생활로 수행이 돼 사람을 닮아 가는가 싶었다.

☞ 동화사골 산 너머에 자리한 은해사 기기암 선방. 10여명의 비구 스님들이 가부좌 틀고 여름을 지내는 중이라는 선방 앞의 도라지 밭 꽃들이 암자의 청초함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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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충사 일대. 대구 지묘동의 아파트들이 높이 솟은 사이로 지묘천이 흐르고, 맨 뒤로는 팔공산 주봉을 중심으로 주능선이 펼쳐지고 있다. 왼쪽에 '왕산'(246m)이 솟았으며 그 밑으로 표충사가 보인다.
심지스님과 미륵신앙에 이어 팔공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고려 태조 왕건이다. 심지가 신라 쇠퇴의 상징이라면, 왕건은 신라 패망의 상징으로 읽힐 필요가 있을 인물.
전문가들에 따르면 당시 세력권은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동편 경상도는 신라, 서편 중 대전 이북은 왕건, 이남은 견훤의 영역이었다. 그럴 때만 해도 왕건과 견훤은 충돌하지 않았다. 918년 왕건이 즉위할 때는 견훤이 축하사절을 보냈을 정도.
그러다 경상도로의 영향력 확대 경쟁이 시작돼, 경북 북부가 먼저 왕건 세력권으로 편입됐다. '장군'을 자칭하던 지방별 할거세력들이 그에게 줄을 섰던 덕분. 견훤의 아버지로 '사불성 장군'을 자칭하던 상주의 지배자 '아자개'가 그 대열에 앞장섰다. 가은, 문경, 풍기, 예안, 풍산의 할거세력들이 잇따랐다.
그러자 견훤도 동진을 추진했다.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오는 관문은 합천. 견훤은 서기 920년 10월 신라 땅이던 합천을 뺏어 동진의 교두보를 확보한 뒤 고령을 거쳐 의성까지 세력권을 넓혔다. 팔공산권이 견훤 권역으로 편입됐다는 얘기. 그 뒤 왕건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서기 927년 발발한 둘 사이 목숨 건 첫 대전의 시작도 합천 통로 확보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을 듯 했다. 그 해 7월 왕건이 합천을 공략해 뺏어버렸던 것. 교두보를 잃었으니 견훤의 경상도 입지에 위기가 닥쳤다고 봐야 할 터였다. 상황을 알아챈 듯 팔공산 이북의 경북지역 '장군'들 대부분이 그 직후 왕건에게 스스로 귀속했다.
그러나 견훤은 같은 해 9월 들어 그런 상황을 일거에 역전시킨다. 그 전투가 벌어진 곳이 팔공산록. 그래서 '공산전투' 혹은 '동수대전'(桐藪大戰)이라 불린다. 이때 견훤은 왕건군을 철저히 파괴했다. 더불어 경북 북부 지배권까지 확보했다. 반면 왕건 측은 본인만 겨우 목숨을 부지해 도망칠 수 있었을 뿐 1만여 명에 이르렀을 그의 군대는 전멸되다시피 했다. 왕건은 이때의 손실을 그 3년 뒤 안동 병산에서 벌어진 '고창(古昌)전투'에서 이기고야 회복할 수 있었다. '고창'은 안동의 옛 이름이었다.
전투가 팔공산에서 벌어지게 된 발단은, 신라-고려의 연대를 붕괴시키기 위해 견훤이 신라의 수도 경주로 쳐들어 가 유린한 일이었다. 견훤의 접근에 놀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왕건은 먼저 1만명의 군대를 파견하고 자신도 5천 군사를 이끌고 출발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견훤이 경주를 처참하게 유린한 후 회군하던 시점. 팔공산은 양측 군대 노정의 중간에 있었던 것이다. 양측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생사를 걸고 맞붙기는 이 전투가 처음이었다. 왕건이 고려를 세운(918년) 후 후삼국을 통일(936년)하는데 걸린 18년의 딱 절반 되던 시점에서였다.

☞ 대구 미대동 마을 뒤 골 맨 끝에 있는 '성재(盛才)서당'. 한강 정구의 문인이었던 채선견(1574∼1644)이 1620년대에 '성재정'으로 세웠던 건물이라고 했다. 그는 송담 채응린의 다섯째 아들. 송담은 대구 검단동 배자못 부근 '배채'라는 곳에 살다가 임란 전 이 마을에 입향해 인천 채씨 세거지의 기틀을 닦았다고 했다.
동수대전의 대표적 유적은 대구 지묘동에 있는 '표충사'이다. 대전의 꽃과 같은 신숭겸 장군을 모시는 곳. 그는 포위 당해 위기를 맞았을 때 자신이 왕인 양 꾸며 행동함으로써 변장한 왕건에게 탈출할 시간을 벌어준 후 전사했다. 이때의 희생은 연희로 꾸며져 고려 초부터 공연됐다. 평양의 팔관회에서 공연을 본 예종은 "공산에는 자취조차 아득하건만 평양에서는 (그 일이) 잊혀지지 않고 있구나" 하는 감동을 한시로 남겼다.
고려는 대구 지묘동에 '지묘사'를 지어 순절 장수들의 명복을 빌도록 했다. 하지만 그 절은 고려 후기에 폐사돼 사라졌고, 거기 있던 영정은 평광동 '대비사'로 옮겨졌다가 소실됐다. 표충사는 1606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도임한 신씨네 외손 유영순이 뒤늦게 옛 절터에 세운 것이다. 표충사가 자리한 일대는 '거저산군'(擧底山群)이라 묶어 불러두면 좋을 듯한 지역. 그리고 표충사 덕분에 그 일대는 동수대전의 주 전장으로 상징돼 왔다.
그러나 동수대전의 핵심 전장이 어디였는지 그 진행과정이 어땠는지는 전문가들에게조차 제대로 분간되지 않는 듯 했다. 남겨진 기록이라고는 "공산 동수 해안현 미리사 앞에서" 벌어졌다는 정도뿐이기 때문. 미리사는 의상대사의 화엄 10찰 중 하나라 했던 바로 그 절이다.
주 전장의 위치를 찾아 나선 사람들 중 어떤 학자는, 여러 자료로 미뤄 '동수'는 바로 동화사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역사 기록은 "공산 동화사 미리사 앞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이상한 말이 될 상황. 그래서 동수를 '오동나무 숲'이라는 본래 뜻대로 읽자는 의견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덕분에 팔공산 남사면 거의 전부가 동수라 불렸을 가능성도 점쳐졌다.
1938년 일제가 발간한 '조선의 임수'라는 책도 동수를 일반 명사로 판단하면서, 지묘동 일대가 동수라고 점찍었다. 표충사에다 오동나무 숲까지 있었기 때문. 그러나 이 판단 역시 미심쩍다는 사람들이 적잖다. 그곳이 동수이고 그곳에 미리사가 있었다면, 고려가 또 뭐하러 그곳에 지묘사를 지었을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리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어떤 이는 그 위치가 해안현의 중심지 즉 현 소재지(治所)였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옛날 기록들은 소재지 밖의 지형지물 경우 '현 북 30리' '현 남 5리' 하는 식으로 자세히 표기하는 데 반해 미리사는 그냥 '해안현 미리사'로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 더욱이 해안현은 당시 '미리현'이라 불리기도 했다.
해안현의 치소 위치 비정은 그렇잖아도 중요한 일이지만, 지금까지는 불로동-도동 일대가 그곳이었으리라는 생각이 우세한 듯하다. 그러나 일부 현지인들은 옛 지형을 감안할 때 그건 받아들이기 곤란한 판단이라고 했다. 금호강 강둑이 만들어지기 전 불로동 일대는 늪지 형상을 해 큰 마을이 들어서기 힘들었으리라는 것이다.
해안현의 치소 위치와 관련해 정말 주목해봐야 할 곳은, 대구비행장 안 검사동에 있던 '유광리' 마을이라는 충고가 있었다. 현지인들에 따르면, 비행장이 들어서기 전 그곳은 직조공장이 돌아갈 정도로 번화한 일대의 중심지였다. 비행장 확장으로 1961년에 지금 자리로 옮기긴 했으나, 동촌에서 가장 오래 된 해안초등학교도 거기 세워졌었다. 인근 벌판에는 옛날의 조개무지가 발견됐을 만큼 온통 샛강들이었고 홍수가 지면 일대가 피할 길 없이 물에 잠겼으나, 유광리만은 그렇잖았다. 지금까지 '해안동'이라는 동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곳. 예부터 중심지가 될만한 자질을 갖춘 땅이었다는 얘기였다.
만약 미리현(해안현)의 치소가 유광리였고 거기에 미리사가 있었더라면, 동수대전의 주 전투는 비행장 일대 넓은 벌판에서 발생했고 패해 쫓기던 군사들은 옻골재 너머의 평광동이나 봉무동 지묘동 등으로 흩어져 갔다가 참살 당했을 수 있을 것이다.
▦ 거저산군

☞ 거저산군 항공사진
이 시리즈가 '거저산군'이라고 분류해 이름 붙인 지역은 거저산(520m)에서 출발해 내려가는 산줄기들에 의해 형성된 범주이다. 거저산은 주능선상의 <159>지점에서 출발해 파계사골의 동편 담장 및 신무동골의 서편 담장 역할을 겸하며 달려 내려오던 산줄기가 순환도로를 건너자 말자 올려 세우는 봉우리. 대구 중대동 용진마을과 신무동 학생야영장 입구 사이 구간에 있는 '들미재'의 남쪽에 솟았다.
하지만 거저산이라는 명칭이 적확한 것인지는 불분명해 보였다. 용진마을 한 어르신은 그냥 '들미(산)' '들미재'라 했다. 산줄기가 잠깐 들고 오르는 양상을 묘사한 '들'과 산의 우리말인 '뫼'가 붙어 만들어진 이름으로 보이는 것. 그런데도 '들뫼'의 현지 발음인 '들미'를 '들밑'(밑을 들어 올리다)으로 해석해 '거저산'이란 어려운 한자 이름이 만들어졌을 위험성이 우려됐다. 관계기관이 나서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그 거저산에서 출발하는 산줄기는 내동 골짜기를 복판에 두고 동서 양쪽으로 갈라져 흐른다. 동쪽 줄기는 468m봉을 거친 뒤 346m봉(삼마산)에서 갈라져 그 속으로 미대동 마을을 품어 들인다. 서쪽 줄기는 276m 높이의 '열재'를 거친 후 응해산(507m)으로 가 다시 둘로 갈라진다. 그 중 동남쪽으로 출발하는 것은 240m 높이의 재를 통해 응봉(450m)으로 연결되고 이어 공산터널 남쪽의 350m봉으로 맺힌다. 다른 한 산줄기는 남쪽으로 내리 달려 330m봉과 282m봉을 거친 뒤 왕산(246m)에 이르니, 그것이 왕건의 전투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 골들에도 많은 사연들이 쌓여 있었다. 현지 어르신들에 따르면 '열재'는 옛날 파계사골과 백안을 연결하는 소중한 통로였다. 그걸 넘으면 '속골'을 거쳐 미대동으로 갈 수 있기 때문. 1942년 서촌초등학교가 생기기 전 파계사 부근의 아동들은 열재를 넘어 공산초등학교에 다녔다. 현재의 70대 중반 이상 된 어르신들이 모두 그랬고 노태우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그 열재는 잊혀져 있었다. 현지인들의 관심이라고는, 멀잖아 거기로 찻길이 날 것이라는 기대 정도였다.
열재와 반대 흐름을 밟고 있는 지형은 응해산 밑의 '한실골'이었다. 왕산 가는 능선과 응봉에서 생겨 나오는 능선이 형성해 놓은 골. 지묘동에 아파트들이 들어선 후 가장 있기 있는 운동 코스로 부상해 있었다. 경사가 거의 없어 노인 운동에 더 할 나위 없을 적지 같은 그 골을 따라 오르니 응해산-응봉 사이의 240m 높이 재에 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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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백 나한상을 모신 거조암 영산전. 그 오른편에 있는 요사체 뒤에서는 유적 발굴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여러 건물 자리가 확인됐고 '거조사'라는 명문도 나왔다는 것. 서기 750년쯤 거조암이 창건되고 1400년쯤 영산전이 지어지기 이전까지의 시기에 쓰였던 건물 자리일 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역사에서 왕건은 '희망 주는 영웅의 등장'이 아니라 '지역 소외의 시작'을 의미한 측면이 없잖을 것이다. 통일 과정에서부터 대구-경북권은 견훤과 왕건의 전쟁터로 변함으로써 민초들의 희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터. 게다가 왕건의 통일 이후 영남은 변방 신세가 됐다고 역사가들은 정리해 두고 있다. 정권이 개성의 토호 귀족들에 의해 장악됨으로써 영남인들이 주변화됐다는 얘기. 영남 세력이 '사대부'로 성장하는 것은 고려 후기 이후였다고 했다.
상황이 그런데도 왕건은 지역민들에 의해 영웅으로만 떠받들려져, 많은 지명들이 무리하게 그와 연관 지워지기까지 했다. 흔히들 왕건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얼굴을 편 곳이어서 '해안'(解顔)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하나, 그것은 신라 경덕왕이 우리말 이름들을 한자식으로 바꿀 때 이미 만들어진 명칭이었다. 불로동이라는 명칭도 금호강물의 범람으로 그곳 샛강에 펄이 끼어 '펄내'로 불리다 변음됐을 뿐 왕건과는 무관하다는 설이 있다. 도망가던 왕건이 앉아 쉬다가 도인을 만났었다는 염불암의 '일인석' 에피소드 역시 사실감(事實感)이 떨어진다. 전쟁은 염불암 창건 일년 전에 벌어졌었다.
팔공산은 고려시대에 특히 어두운 이야기들이 많이 남겨진 곳이다. 불행의 그림자는 서기 1200년 전후에 이미 짙어졌다. 1170년에 무신정변이 일어난 후 수탈이 가혹해지자 전국적으로 소요가 악화되던 중, 1193년에 청도 운문산을 거점으로 김사미가 봉기했다. 김은 이듬해 처형됐으나 1202년에는 팔공산의 승군이 경주의 별초군 및 민란 세력과 함께 영천성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규보가 팔공산신에 제사를 올렸던 것도 그 토벌을 위한 것이었다.
동화사와 부인사의 승려들이 반란군에 가담한 것은, 무신정권의 불교계 개편 움직임 때문일지 모른다는 견해가 있다. 불교계의 새로운 기운을 자기편으로 삼느라 기존의 교단들을 소외시켜 반발을 샀다는 얘기. 그 새로운 기운의 한 복판에 팔공산이 있었고 거조암이 있었으며, 그 주인공은 지눌 스님이었다고 했다.
기록에 의하면 지눌(1158∼1210) 스님은 황해도 서흥 출신으로 53살의 길잖은 생애를 살았다. 28살부터 예천 보문사에서 수행하던 스님은, 30살 되던 해에 팔공산 거조암으로 옮겨왔다. 승과에 급제하던 25살 때 개성의 절에서 열린 담선(談禪)법회에 참석했다가 도반들과 나눴던 약속이 계기였다. "세속을 버리고 산중에 들어 가 계정해(戒定慧)의 제대로 된 수행을 하는 단체를 만들자"는 그 약속에 동참했던 10여명의 스님 중 한 명이 먼저 거조암에 머물면서 지눌을 부른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지눌은 거조암과 인연을 맺게 되고 그렇게 해서 모인 스님들은 '정혜사'(定慧社)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복을 비는 기도나 염불에 매달릴 게 아니라, 참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지향하는 선불교를 실천키로 했다. 동참 희망자들에게 돌리기 위해 지눌이 거조암에서 만든 취지문이 '권수문'(勸修文)이었던 듯 하다.
팔공산으로 옮긴 지눌은 염불암에 머물며 동화사의 중창을 돕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인연으로 동화사의 중창주 중 한 명으로 기록되고, 염불암에 그의 영정이 모셔지고 그가 수행했다는 '눌암'(訥庵)이라는 바위 유적이 인근에 남게 됐다고도 했다. 그 후 스님은 지리산을 거쳐 43살 때 조계산 송광사에 들어간 후 열반 때까지 머물며 조계종의 초석을 놓는다. 그런 인연으로 거조암은 조계종의 발원지라는 칭호를 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거조암을 특징 짓는 말은 '나한 신앙의 성지'라는 것. '아라한'의 준말인 '나한'은 깨달은 실존 성인들로, 기도객의 소원을 속성시켜 주는 복전(福田)이라 해서 예부터 신앙의 대상이 돼 왔다. 국보 14호 '영산전'에 부처님의 10대 제자와 16성 및 오백 나한 등 526명의 상이 모셔져, 거조암은 예부터 '오백나한절'이라 불려 왔을 정도이다.
지눌에 이어 팔공산권에 등장한 큰스님은 일연(1206-1289)이었다. 지눌이 열반할 즈음 원효의 고향 경산에서 출생한 일연은, 22살에 승과에 급제한 후 비슬산 보당암, 포항 오어사 등 전국의 사찰을 돌며 수행했다. 그리고 회갑 즈음해서부터는 비슬산 인흥사를 중창해 오래 주석했다. 남평문씨 세거지가 있는 화원읍 본리리가 그 옛터라고 했다. 청도 용천사를 중창한 것도 그 때. 72살 때부터 4년간는 왕명으로 운문사에 머물렀으며 78살에는 '국존'(국사의 당시 호칭)에 책봉되기도 했으나 노모 봉양을 위해 낙향했다가, 이듬해 상을 치른 뒤 국가의 지원 아래 군위 인각사로 옮겨 여생을 마쳤다. 이런 인연으로 그의 행적비는 운문사에, 탑은 인각사에 남겨졌다. '삼국유사'만 전하나 실제 그의 저술은 수십 권에 달했다고 한다.
일연은 뒷날 팔공산권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 스님들과도 여러 형태로 인연이 있는 듯 해 또한 이채롭다. 자신에 이어 1292년 국존이 됐던 홍진국사 혜영 스님은 동시에 동화사 주지로 임명돼 그 중창주로 기록됐다. 그 500여년 뒤 동화사에 주석하며 많은 저술을 남겼던 인악(仁岳, 1746∼96)스님은 일연이 중창했던 인흥사가 있던 마을 태생이었다.

☞ 지난 6일 찾았을 때 팔공산 정상부는 온통 꽃밭이었다. 일반인들의 접근이 차단된 것이 이런 풍경을 만들 수 있게 했을 터. ①참취 ②층층이꽃 ③산수국 ④뚝갈 ⑤씀바귀꽃 ⑥모시대 ⑦미역취 ⑧돌양지꽃 ⑨노루오줌꽃 ⑩고추나물꽃 ⑪동자꽃 ⑫노랑물봉선.
그러한 일연의 시대는 몽고군의 잔학상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참혹한 시기였다. 몽고의 침입은 민란의 상해가 계속되던 1231년에 시작돼 30여년간 계속됐으니, 일연은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참상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대구·안동·상주·경주 등은 1232년부터 몽고군의 피해를 입기 시작, 그 해에 팔공산 부인사에 있던 대장경판이 소실됐다. 그 2년 후인 1234년에도 몽고군의 일부 선발대가 안동·경주 등을 노략질했다. 이때 팔공산권인 해평에서는 이유정이라는 지휘관이 160명의 군사로 몽고군을 막다가 순국했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기도 하다. 1238년에는 몽고군이 경주를 짓밟아 황룡사 9층탑이 사라졌다.
하지만 이런 피해들은 몽고군의 소부대에 의해 저질러진 것일 뿐, 정말 큰 피해는 부인사 소실 22년 후인 1254년에 발생했다. 처음으로 몽고군의 주력부대가 영남지역을 짓밟은 것이다.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5천명 규모의 주력부대는 10월쯤 대구에 진입했고, 합천·산청·전라도까지 내려갔다가 다음해 1월에야 북으로 철수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 당하고 길목은 모두 잿더미가 됐다. "죽은 자는 해골을 묻지 못하고 산 자는 노예가 돼 부자가 서로 의지하지 못하며 처자가 서로 보존하지 못했다" "해골이 들을 덮고 포로 됐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조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죽어갔다"고 '고려사'는 기록했다. 전국에서 포로로 잡힌 사람은 무려 20만7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때 몽고군에 항전했던 것은 민초들이었고, 국가는 그저 산성에 들어가 대피하라고만 할 뿐 아무런 대책을 내 놓지 못했다. 이에 따라 팔공산권의 민초들은 공산성으로 들어가 살기를 도모했으나 결과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몽고군 철수 이후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보니, 산성에 들어갔던 많은 사람들이 죽어 없어졌고 살아 돌아가는 사람 중에는 우는 아이를 나무에 묶어두고 가 버리는 부모까지 있었다고 했다.
공산성은 몽고 난 때만 우리 민초들을 품어준 것도 아니었다. 그 120여년 뒤엔 대구까지 쳐들어 온 왜구를 피해 민초들이 또 팔공산 그 높은 곳까지 짐을 지고 올라야 했다. 정규군을 지휘하는 조민수라는 장군이 도적에 불과한 왜구와 김해에서 싸우다 져 대구까지 후퇴한 탓이었다. 그 사건 200여년 후에는 또 임진왜란이 나 공산성이 피난처가 돼 줬다.
이 한 많은 공산성은, 팔공산이 품고 있는 가장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임에 틀림없을 터였다. 정상부 '산성봉' 쪽 곳곳에는 지금도 성벽이 남아 있고 성문이 있었던 듯한 유적까지 제법 온전히 보전돼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관리하거나 기념하지 않는 채 버려진 유적. 선조의 피와 눈물이 배인 곳인데도 지금 우리가 그 참혹함을 잊고 있는가 싶은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있을 필요가 없는 존재일 터. 당시 고려는 참으로 한심스런 국가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건강해졌을까? 공산성을 복원해 교육의 장으로 삼으라고 외치고 싶었다.

☞ 공산성 유적. 팔공산 북사면 곳곳에 지금까지 그 흔적을 남겨 둔 모양새가, 가슴 아픈 역사를 잊지 말도록 후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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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수천골 산경도
몽고군은 약탈하기 좋은 대구 시가지를 놔두고 뭣하러 팔공산 깊은 산 속까지 찾아가 부인사에 불을 질렀던 것일까? 이를 두고는 "공산성으로 피난 가던 사람들을 추적하기 위해서"였으리라는 관측이 제시돼 있다. 그러나 당시 사찰들이 많은 부를 축적하고 민간을 통제하던 곳이어서 노략질의 대상이 됐으리라 보는 시각도 만만찮다. 고려의 사찰들 성격을 한번 살펴 두자.
'경상도 700년사'에 따르면 고려 태조 왕건은 '원당'(願堂)이 너무 많았던 것을 신라의 패망 원인 중 하나로 판단했다. 원당은 돈많은 개인들이 집안의 복을 빌기 위해 짓고 운영하던 개인 사찰. 부인사는 선덕여왕의 원당, 동화사는 하대 신라 왕실의 원당이었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조선조 들어서도 파계사는 영조대왕, 은해사 혹은 백흥암은 인종의 원당 역할을 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그런 판단에 따라 왕건은 훈요십조 두 번째 항목을 통해 "도선(道詵)이 정한 곳 외에는 절을 짓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나라의 운을 돕기 위해 명처 명산에 절을 지어야 한다"는 도참설이 골라 낸 3천여 곳. 그런 곳에 지어진 절을 '비보사찰'(裨補寺刹)이라 했다.
왕건의 이런 생각은 절의 건축과 주지 임명을 국가가 관장하겠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걸 제도화하기 위해 불교를 관리하는 '승록사'(僧錄司)라는 기관을 가동하고 승과제도도 운영했다. 대신 사찰들에는 전답을 배정해 주고 세금을 면제해 줬다. 그렇게 해서 정권의 입김 아래 놓이게 된 공립 사찰들은 자연스레 정권의 요구에 따른 활동을 하게 되고, 어떤 경우에는 그럴 필요 때문에 절이 세워지기도 했다. 스님을 관리로 활용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사찰이 사실상 지주와 지배자의 역할을 하는 결과를 초래해 혼란기 이후에는 농민들의 공격 대상이 될 소지를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개인 원당사찰들이 많이 생겨, 그 소유 가문의 이해에 따라 행동하기도 했다. 팔공산 승군들이 경주의 별초군 및 민란 세력과 함께 1202년 영천성을 공격했던 것은 불계교 재편 외에 이런 상황에도 기인했으리라는 해석이 있다.
몽고군의 공격을 받아 부인사에서 소실된 경판은 거란의 침입을 막아달라고 기도하며 1087년에 완성한 6천여 권 짜리였다. 그것이 소실되자 고려는 그 5년 후인 1237년에 이규보의 원문(願文)으로써 재조(再造)를 발원해 1251년 6천여 권(목판 8만1천여매)의 새 경판을 완성했다. 강화도에 보관되다가 조선이 건국한 후 1398년에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 그것.
팔공산권 몽고 잔학상의 상징이 돼 있는 부인사가 속한 일대는 '용수천골'이라고 몰아 불러두는 것이 좋을 듯한 지역이다. 이곳 여러 골의 물이 모두 용수천으로 합류하기 때문. 그리고 용수천골은 팔공산 남사면의 가장 중심되는 골이다. 서쪽의 지묘천골(파계사 일대)과 동쪽의 동화사골 사이 남사면의 한복판을 차지, 주능선상의 삼성봉(서봉)-주봉-미타봉(동봉) 트라이앵글까지 모두 이 골 뒷담에 해당하는 것이 그 증좌이다.
마을들의 풍성함에서도 용수천골은 팔공산 남사면의 대표격이다. 입구에서 보기엔 허전할 수 있으나 속으로 들어갈수록 골은 장대해진다. 용수천의 합류천인 동화천에서 올라가면서 미곡동-용수동-신무동 등 3개나 되는 마을이 있고, 각 마을은 또 여러 자연마을을 포괄하고 있다. 신무동은 무산(교원연수원 일대, 일명 지군이), 부인사, 국실, 새터, 동산마을 등으로 구성됐으며, 용수동에는 가루뱅이, 상중심, 비내미골 등의 마을이 있다. 중심, 장터마을 등은 미곡동을 형성한다.
용수천골의 뒷담이 되는 주능선은 동봉에서 출발해 주봉, 삼성봉(서봉), 톱날능선을 거쳐 등산점 표시 <156>에 이르는 구간이다. <156>에서는 크고 긴 산줄기가 하나 남쪽으로 흘러내려 용수천골의 서쪽 담장 역할을 맡는다. 더 서편의 파계사골로부터 용수천골을 갈라놓는 것. 그 가름 산줄기는 잠깐 사이에 740m까지 추락해 재를 형성했다가 786.5m봉, 754m봉으로 이어가며 잦아진다. 특히 754m봉에서 산줄기는 둘로 갈라져 흐르니, 서쪽으로 가는 것은 파계사골의 동편 울타리가 되는 산줄기이다. 반면 동쪽으로 가는 산줄기는 순환도로에 의해 맥이 끊겼다가 거저산으로 연결돼 삼마산을 거치며 미대동과 미곡동의 경계선을 형성하는 동시에 용수천골의 서편 담장 역할을 수행한다.

☞지난 4월23일 부인사에서 열렸던 '선덕대왕 숭모제' 모습. 부인사는 선덕여왕의 원당이었으리라 추정되고 있다. 개인사찰 성격의 '원당'은 신라와 고려시대, 나아가 억불정책을 썼던 조선조까지도 흔했다.
용수천골의 동쪽 담장 역할은, 이 시리즈 10회차에서 설명했던 동화사골의 서편 담장 산줄기가 겸해서 맡는다. 동봉에서 출발한 후 염불목을 거쳐 '낙타봉'이라 불리는 봉우리로 올라섰다가 케이블카 터미널 봉우리로 솟는 것이 그것. 케이블카 터미널이 있는 봉우리는 '신림봉'(815m)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듯 했다. 그 남쪽 골의 이름이 '신림골'이어서 동네 사람들이 '신림 말랭이'라 불러 왔다 하기 때문. 낙타봉과 신림봉 사이에는 760m 높이의 재가 하나 있어, 현지인들은 오랜 세월 '가래재'라 불러 왔다고 했다. 가래는 나무로 된 삽이라 생각하면 될 도구. 하지만 전래 명칭이 외지인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사이, 어떤 등산지도는 그 자리에다 '빵재'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있었다. 용수천골의 서편 담장격 산줄기는 신림봉을 거치고는 동화사 서문을 지나 결국엔 백안동 공산초등학교 뒷산에까지 이른다.
외곽선은 이렇게 해서 정해졌지만, 그 속의 용수천골은 너무도 넓어 그 상부 지역만도 또다시 최소 3개 정도의 공간으로 구분해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듯 했다. 동쪽에서부터 보자면 태정골 공간, 수태못 상류 공간, 신무동 공간 등이 그것이다. 태정골은 현재의 동화사 지구 상가촌을 중심으로 구획되는 공간. 거기에는 옛날 '태정'이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했다. 태정골에도 여러 개의 작은 골들이 있어, 탑골 신림골 등등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태정골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수태못으로 가려면, 골의 서쪽 끝 '인터불고 팔공 호텔' 앞에서 재를 하나 넘게 되니 그 이름은 '모래재'라고 했다. 하지만 수태못에 도달하려면 그 재를 넘고도 또 하나의 골을 지나야 한다. 그것이 '사가지미골'. 이 골 역시 크게 봐 태정골의 영역으로 구분해 두는 것이 편할 듯 했다. 그 골들의 물이 모두 한 골로 모여 미곡동 구간에서 용수천에 합류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도달하는 수태못 상류의 공간도 더 여러 개의 골로 세분된다. 주능선까지 뻗어 올라가는 골만도 '용무골' '삼성골' '국도림골' 등 최소 3개나 될 정도.
이러한 수태못 상류 공간을 구획하는 외곽 산줄기 중 동편 것은 동봉에서 출발해 신림봉까지 내려오는 용수천골의 동편 산줄기가 겸한다. 하지만 신림봉에서는 산줄기가 둘로 갈려, 그 중 서쪽으로 내려서는 가지 줄기가 수태못 상류 공간의 동편 산줄기가 된다. 수태못 휴게소 바로 뒤에서 출발해 올라가는 그 줄기 위의 등산로는 공원같이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 도정에서는 수태골의 속 모습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었다. 삼성봉(서봉)에서 내려 뻗는 두 개의 큰 산줄기, 암벽훈련 바위, 그 위의 903m봉, 주추바위골 안의 '느리청석' 암벽, 그 서편의 1000m봉 등이 훤했다.
수태못 상류 공간과 더 서편에 분포한 신무동 공간을 가르는 산줄기는 주능선상의 978m봉(마당재 서편 봉우리)에서 내려 뻗는 그것이다. 동편으로 휙 감아 흐르면서 수태못의 서쪽 둑 역할을 하고야 달리기를 멈추는 산줄기. 중간에 '이말재'(630m)가 있어 두 공간의 연결 통로가 돼 주는 바, 신무동 공간에 있는 부인사에서 출발하는 등산객들은 대부분 이 재를 넘어 수태골로 진입한 뒤 그 속의 용무골로 오르거나 삼성골을 거쳐 삼성봉(서봉)으로 향한다.
신무동 공간은 들미재∼수태못 구간 순환도로의 이북 지역. 서쪽부터 봐 크게 물불골, 정가골, 환산골, 성지골로 나뉜다고 현지인들이 가르쳐 줬다. 물불골은 학생야영장 앞과 서쪽을 흐르는 계곡. 정가골은 교원연수원 뒤 골로, 뒷담에 해당하는 주능선 구간이 길고 골 상부가 매우 넓은 계곡이다. 물불골과 정가골의 물은 무산마을 바로 윗 지점에서 합류한다. 환산골은 용수동 국실 마을에 와서야 합류하는 계곡이고, 성지골은 부인사 뒷 계곡이다.
이렇게 해서 형성되는 용수천골 상류지역에서의 사람살이는 농경시대에 상당히 힘들었을 성싶었다. 반면 용수천골 하류 구간에 있는 미곡동 등은 예부터 번창해, 30여년 전까지도 별도의 5일장이 섰을 정도라고 했다. 미곡이 골의 중심되는 터전이어서, 그곳 자연마을이 '중심'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들렸다. 인접한 백안 등 동화사골 마을들과 함께 옛날 '북촌'이라 불렸던 일대는, 파계사골 중심의 '서촌'과 대비되며 1923년에 벌써 공산초등학교가 개교했던 역사를 자랑하고 있기도 하다.

☞ 비가 많이 올 때 수태못 상류의 '느리청석'에 형성돼 잠깐 모습을 나타내는 폭포. 등산객들에 의해 '용바위'라고 불리기도 하는 1000m봉 동편에 펼쳐져 있는 느리청석 모습은 다음 회에서 살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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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태못 상류 공간을 크게 양분하는 주 가름능선(삼성봉-1000m봉-수태못) 상의 1000m봉이 드러내는 위용. 용의 머리를 닮았다는 이 봉우리에서는 동편 주추바위골 쪽으로 용 몸통 같은 형상의 벼랑바위 산줄기가 이어져 있다. 인접해서는 '느리청석'이라는 특이한 지형이 자리잡아 주추바위골을 끝막음 한다.
용수천골 중에서도 등산객이 가장 많은 곳은 수태못 상류 공간일 터. 그런데도 그 일대에 대한 지리정보와 시민 인식은 너무도 허술한 것으로 드러나 취재팀을 애달게 했다.
흔히 등산객들은 수태못에서 출발해 훈련암벽-국도림폭포 등을 거쳐 동봉이나 서봉으로 오르는 골이 '수태골'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골은 수태골이 아니었다. '진짜 수태골'은 수태못 상류가 아니라 그 하류 구간이라고 현지 어르신들은 말했다. 못 밑의 수태마을을 거쳐 용수천에 합류하는 지점까지를 예부터 수태골이라 불러왔다는 얘기. 폭포를 거쳐 올라가는 상류의 골은 대신 '국도림골'이라 부르는 게 더 적합할 것으로 판단됐다.
안타까운 일은 그것만도 아니었다. 수태못 상류에는 '국도림골' 외에도 '용무골' '삼성골' 등 그 못잖게 크고 중요한 골이 최소 2개는 더 있었다. 그 골들의 물이 수태못에서 합쳐진 뒤 '진짜 수태골'을 형성해 용수천으로 합류해 간다고 보면 정확할 일. 그런데도 많은 시민들은 수태못 상류에는 마치 '국도림골' 밖에 없는 듯 잘못 생각하면서, 그걸 '수태골'이라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지리정보조차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수태못 상류 공간을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못둑길에 서 보는 것이 좋을 듯 했다. 골을 정면으로 올려다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 하지만 순환도로가 나기 전 그 구간은 좁고 깊은 골이었다고 어르신들이 일깨웠다. 그게 바로 수태골이었던 것. 골 양측에는 높은 산줄기 둘이 버티고 서서 둑의 역할을 맡아줬다. 사람들은 골을 건너 다니기 위해 그 산줄기들을 오르내려야 했다. 그때 동쪽 산줄기에 났던 재가 '구름고개', 서쪽 산줄기에 난 것이 '밤지고개'였다. 그러다 순환도로가 나자 도로가 저절로 둑이 되면서 고개들이 없어지고 대신 못이 생겼을 뿐이라고 어르신들은 말했다.
그렇게 해서 등장한 못둑길에서 올려다 볼 때, 중앙으로 가장 높이 보이는 주능선상 봉우리는 삼성봉(서봉)이다. 거기서 중요하고 중요한 산줄기 하나가 내려 뻗어 수태못 상류 공간을 크게 둘로 나눠 놓는다. '주 가름능선'이라 불러 둘만한 산줄기. 그 서편에 용무골-삼성골 공간, 동편에 주추바위골-국도림골 공간이 분포한다. 하지만 법정동 구획으로는 용무골-삼성골-주추바위골이 모두 신무동이고 국도림골만 용수동에 속한다고 했다. 국도림골에 있는 훈련암벽 역시 신무동 소속.
그렇게 중요하지만 그 주 가름능선의 삼성봉 출발 때 행색은 참으로 묘해,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존재 사실조차 분간하기 쉽잖다. 우뚝하게 내려서지 않고 줄기가 없는 듯 하다가 한참 뒤에야 돌봉우리들을 올려 세우면서 뚜렷해지기 때문. 마치 콧대 중간이 납작한 사람의 콧날 같은 흐름을 보인다.
주 가름능선이 세를 드러내는 것은 1068m봉부터이다. 삼성봉 바로 밑 삼성암(三聖庵) 터에서 정남으로 보이는 그 웅장한 돌봉우리. 능선은 그런 뒤 암괴 덤으로 변했다가 마지막으로 1000m 돌봉우리를 올려 세운다. 팔공산 서부능선을 다닐 때 늘 두드러지는 그것. 봉에서는 동남쪽으로 길잖은 벼랑바위군이 하나 뻗어 나가 장관을 이루니, 그게 용의 몸통이고 1000m봉은 용머리라 해서 어떤 등산객들은 합쳐 '용능선'이라 부르고 있었다. 또다른 어떤 등산객들은 그 위의 등산로를 '환상의 코스'라 했다. 하지만 주 가름능선은 1000m봉을 지난 뒤엔 급속히 낮아지기 시작, 수태못 뒤끝에서 생명을 마친다.

☞수태못 상류 공간 지형도(※지도를 클릭하면 원본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수태못 상류 공간을 물길을 따라 올라가며 살피자면, 수태못 뒤끝을 출발한지 1, 2분 내에 곧바로 물길이 크게 둘로 나뉘는 분기점이 나타난다. 큰 산줄기가 하나 내려 와 있다는 얘기. 바로 '주 가름능선'이다. 물길 갈림점에서 그 능선을 따라 오르면 곧장 삼성봉에 도달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계곡 입구가 그렇듯 그쯤에서 두 물길이 갈라지는 모습도 거의 두드러지지 않는다. 때문에 국도림골 넓은 등산로만 따라 다니다간 물갈림조차 눈치채기 어렵다.
수태못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널찍한 등산로는 두 물길 중 오른쪽 것을 따라 나 있다. 그것이 국도림골이다. 골을 올라가노라면 수태못에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태동 최선생 묘지 입구'라는 표석이 나타난다. 최선생은 임란 때 대구 의병장이었던 분. 표석 일대는 평평해 옛날 나무꾼들이 지게를 받쳐 놓고 쉬던 곳이라 했다. 그때 불리던 이름이 '버들바탕'. 땅버들이 많은 평평한 곳이라는 말이라고 했다. 그 이름을 되살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묘지 표석을 지나자말자 또 하나의 골이 갈려 올라간다. 그것은 '주추바위골'. 골 입구는 무시되기 십상일 정도로 미미하다. 하지만 골 안은 갈수록 좋은 풍광을 선사하고 그 끝에 '느리청석'이라는 특이한 지형이 버티고 있기도 하다. 거대한 절벽형 암괴인 느리청석은 수태 못둑에서 주능선을 올려다 볼 경우 삼성봉 밑으로 팔공산 바위답잖게 누런빛을 띠고 드러나는 그 암벽. 비가 많이 올 때는 그곳에 일시적으로 폭포가 생겨 또 하나의 귀한 풍경을 선사하기도 한다. 느리청석의 서편으로 바짝 붙어 1000m봉이 솟아 있다. 이쯤에서 주추바위골이 형성돼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삼성봉에서는 주 가름능선 외에 그 동쪽으로도 또 하나의 산줄기가 출발하는 덕분. 두 산줄기 사이에 주추바위골이 생긴 것이다.
주추바위골 입구를 지나 국도림골 길을 재촉하면, 곧 이어 '수릉봉산계'라는 표석을 만나게 된다. 헌종의 아버지 익종의 능인 '수릉' 관리에 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100여년 전 이곳 출입을 금지(封山)시킨 뒤 거기서 난 참나무로 숯을 만들었다는 얘기. 표석은 "접근 말라"는 경고를 발하고 있는 셈이다. 수태못에서 여기까지 거리는 1km 정도이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그 표석 상류의 골 전체를 '국두림'이라 불러왔다고 했다. "나라의 용도에 쓰이는 숲"이라는 뜻을 가진 '국도림'(國度林)이라는 말이 와전된 것일 터. 현지인들의 그같은 호칭을 감안한다면, 이 골 전체도 앞으로는 '국도림골'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듯 싶었다. 골의 역사성은 물론 울창한 참나무 숲이 있었다는 이곳 고유 식생도 되생각케 해 줄 것이기 때문. '수태골'이란 명칭이 견강부회되거나 '바위골' 같은 이름이 임의로 붙여지거나 하는 상황도 방지할 수 있어 일석이조일 터이다.
국도림 표석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널따랗고 평평한 분지를 만나게 된다. 의자들과 화장실이 마련돼 있는 곳. 이곳은 주민들에 의해 '절터굼'이라 불리던 곳이라 했다. 절의 터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얘기. 절터굼에서는 오른편으로 작은 골이 하나 갈라져 오르는 바, 그게 도달하는 곳이 '가래재'이고 그걸 통해 국도림골이 염불암골과 연결된다.
절터굼을 지나 국도림골을 더 올라가면, 주추바위골의 느리청석과 닮은 거대한 절벽암괴가 왼편에 나타난다. 등산인들이 암벽등반 훈련을 하는 곳. 삼성봉에서 또하나 뻗어 나온다고 했던 산줄기의 일부이다. 그 능선은, 출발 때는 '주 가름능선'보다 훨씬 뚜렷하게 맥을 드러내지만 상대적으로 짧게 생명을 마친다. 그러면서 마지막 불꽃 같이 올려 세운 것이 903m봉이고, 그 남동사면에 훈련암벽이 있다.
훈련암벽을 지나면 연이어 '국도림폭포'가 다가서고 그 왼편으로 903m봉, 오른편으로는 낙타봉이 우뚝이 솟아 보인다. 국도림 표석에서 거기까지 거리는 600여m.
이 부분을 지나 줄곧 올라가면 다시 널찍한 사면이 펼쳐진다. 국도림골 막바지 부분이자 주봉 정남쪽 사면. 거기에서는 길이 서북쪽과 동북쪽으로 갈려 나아가도록 삼갈래를 형성하고 있다. 서북쪽 길을 잡으면 서봉과 주봉 사이의 '느지미재'에 도달한다. 반면 동북쪽으로 돌면 금방 '염불목'이라는 고개에 이른다. 국도림골과 염불암골을 잇는 또하나의 연결점이자, 두 골의 등산객이 한데 만나는 합류점. 그 후 등산로는 동봉에서 뻗어 나온 가지 줄기를 넘어서서 두 번째 삼갈래점에 도달하니, 그곳에 <101>이라는 등산점 번호판이 서 있다. 거기서 곧장 오르면 동봉이고 서쪽으로 길을 잡으면 주봉 밑을 돌아 삼성봉쪽으로 가게 된다.
이것으로써 수태못 위에서 갈라지는 두 개의 물길 중 오른쪽 것은 거의 살핀 셈. 지나칠 정도로 많이 몰리는 수태골 상류 공간 등산객들 대부분은 이 국도림골만 찾을 뿐 그 서쪽에는 골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이다. 하지만 그 서쪽에도 국도림골 못잖게 대단한 골들이 최소 2개나 펼쳐져 있다고 했었다. 이제 다시 수태못 위의 분기점으로 되돌아 가 왼쪽 물길을 따라 올라보자.
왼쪽 물길은 금방 경관이 좁고 깊으며 물이 많은 계곡으로 이어진다. 일대 주민들에 의해 '보라우골'이라 불려 온 골. 그 골을 7, 8분 따라 오르면 물길이 다시 두 개로 나뉜다. 왼쪽으로 가는 것은 용무골, 오른쪽으로 가는 것은 삼성골. 두 골의 분수령은 주능선상의 991m봉<130>에서 출발해 내려온다. '보라우능선'이라 이름 붙여 놔 보자. 그 능선 초입의 등산로는 다소 희미하나, 조금 타고 오르면 멀잖아 매우 뚜렷이 굵어진다.
또한번 갈린 두 물길 중 삼성골 등산로는, 주 가름능선의 아랫부분을 따라 오르다가 그 산줄기 속으로 빠져 오르는 또 하나의 골 입구를 거친 후 보라우능선 밑부분으로 옮겨 걷도록 돼 있다. 수태못 주차장에서 산줄기를 옮겨 타는 지점까지 걸리는 시간은 20여분. 그 즈음에서 등산로는 서쪽 부인사에서 오는 등산로와 합류한다. 합류점에서 서쪽으로 가자면 금방 용무골을 거치고 이어 부인사로 가는 '이말재'에 도달하게 된다는 얘기. 수태못을 출발해 삼성골로 오르다 용무골로 가려면 이 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가는 게 좋다.
그 합류점을 지나 삼성골 등산로를 따라 오르자면 7분 정도만에 천막형태의 집 한 채를 만나게 된다. '독불사'의 암자라고 했다. 그곳이 주목받는 것은 옛 삼성암(三省庵) 자리이기 때문. 그 집 뒤의 가지 능선을 오르면 선돌에 새겨진 마애불상이 서 있고, 그걸 거쳐 더 오르면 보라우능선 위로 올라서게 된다.
하지만 삼성골은 그 삼성암 터를 그냥 지나쳐 계속 올라야 한다. 그리고 다시 7분 정도면 드디어 골에서 솟구쳐 산줄기를 감아 오르기 시작한다. 그쯤에 옛날 절이 하나 있었고, 거기서 주능선 쪽으로도 '도장골'이라는 골이 갈려 올라가 등산코스가 되고 있다고 했다. 그 지점을 지나 산줄기를 감아 오르느라 한참 고생하다 보면 어느덧 도달하게 되는 곳이 또 다른 삼성암(三聖庵) 터. 삼성봉 덩어리의 서쪽 끝부분에 있는 절터이다. 그 바로 서편에 매우 뚜렷한 벼랑바위군이 버티고 있어, 멀리까지 암자의 위치를 가르쳐주는 지표가 돼 준다.
보라우능선에 의해 갈라진 두 골 중 삼성골 오르는 길은 이같이 뚜렷하지만, 용무골 진입점을 두 골의 갈림점에서 찾아내기는 쉽잖다. 용무골은 더 서편의 부인사 쪽에서 접근토록 예부터 정형화된 탓. 부인사를 출발해 '이말재'를 넘으면 수태못 상류의 용무골에 진입한 셈이 되는 바, 산기슭으로 난 그 길을 잠시 걷다보면 등산로가 둘로 나뉜다. 골로 내려가는 것은 용무골-보라우능선을 거쳐 삼성골로 합류해 삼성봉으로 오르는 길. 반면 산허리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길이 용무골 중상류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산허리를 통해 용무골로 들어선 등산로는 얼마 안 가 골 복판으로 내려서서 용무골의 주류를 건너며, 이어 보기 드문 낙락장송 숲을 지난다. 한참 갈 때까지 길도 가파르지 않아 삼림욕에는 그만일 것 같은 형상. 그리고 골 안에서 여러 갈래 져 주능선상의 마당재<147>나 1054m봉 밑 '병풍재'(1026m)<142>, 혹은 톱날능선의 동쪽 끝 1010m봉<134>, 혹은 '미정재'로 연결된다. 미정재 오르는 골은 용무골 중에서도 '미정골'이라 세분되고 있었다.
용무골은 국도림골로만 쏠려버린 관심들 때문에 다소 소외돼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팔공산의 어느 골 못잖게 넓고 풍성한 골이라 싶었다. 부인사에서 출발하는 등산객들은 이 용무골로 올라 가 주능선에 도달한 뒤 삼성봉(서봉)을 거쳐 삼성골로 하산, 이말재를 통해 부인사로 되돌아가거나, 그 반대의 코스를 주로 잡는다고 했다. 국도림골로 오르는 등산객이더라도, 팔공산의 서부능선을 거치며 톱날능선의 장관을 내재화한 뒤 용무골로 내려온다면 역시 수태못 주차장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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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 능선 상세 산경도(※그림을 클릭하면 원본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팔공산 사면 마을들의 어르신과 대화하다 보면, 이상한 지명이 드물잖게 등장한다. "삼성" "신림" "물불이" "도객이" "해일이" "삼칭이"… 그게 골 이름인지 봉우리 이름인지 도통 분간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누는 것이 기자가 가진 이해의 틀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기자를 오히려 답답해했다.
의사불통의 사유를 깨닫는데 일년이나 걸렸다. 그곳 어르신들은 기자와는 반대의 인식 방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골과 봉우리를 구분하지 않는 방식. 합쳐 하나의 산 덩어리로 파악했다. 삼성이니 신림이니 하는 것은 바로 산 덩어리 이름이었다. 산 덩어리 이름은 거기 속한 골과 봉우리 이름도 되리라는 이치가 뒤늦게 깨달아졌다.
용수천골을 이해하는 데도 산골 어르신들의 그 같은 산 감각을 먼저 알아채는 것이 필수였다. 특히 골의 뒷담 격인 주능선 이해가 그랬다. 동봉에서 파계재 사이를 살펴보자.
동봉에서 서쪽을 향해 출발한 주능선은 장군메기<100>로 낮아졌다가 주봉으로 솟은 뒤 다시 느지미재(세칭 오도재, 1080m)<107>로 추락하고 이어 '삼성봉'(서봉)<112>으로 높아진다. 이 구간 주능선이 그 남사면으로 펼치는 것이 국도림골 최상류 구간. 위의 세 봉우리에서 짧은 산줄기가 하나씩 쏟아져 내려 골의 지형을 결정한다. 주봉에서는 마애불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는 산줄기가 남쪽으로 출발하고, 동봉(미타봉)에서는 서쪽을 향해 산줄기가 내려서며, 삼성봉 덩어리의 1108m봉에서는 남동향 산줄기가 다소 길게 내뻗는 것이다.
삼성봉에서부터 서부능선은, 몇 개의 덩어리들로 연결돼 나간다고 판단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산줄기 상의 구획이 개별 봉우리나 덤이 아니라 여러 개의 봉우리나 덤이 모여 형성한 덩어리 단위로 이뤄진다는 얘기. 삼성덩어리, '물갈퀴 능선', 1080m대 덩어리, 990m대 덩어리, 1010m 이상 '톱날능선' 구간, '물불덩어리' 등이 그것이다.
삼성덩어리를 자세히 보면 3개의 봉우리가 뭉쳐져 있다. 느지미재에서 출발해 살핀다면, 먼저 완만한 오름세를 타고 1108m높이의 덤이 형성된다. 그 덤이 끝나는 지점<109>에서 급등해 1147m봉이 솟는다. 그러나 금방 목<111>으로 가라앉았다가 그제야 완만히 상승하며 헬기장 터를 하나 내 주고는 1150m 삼성봉<112>으로 올라서는 것이다.
삼성봉 역시 그냥 둥그래 보이기 십상이나, 자세히 보면 그 남사면만도 3개의 희미한 산줄기에 의해 골이 생겨 있는 양상을 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산줄기는 '삼성봉 최후의 산줄기'라 불러둘 만한 지형. 그 줄기 중턱에 커다란 벼랑바위군이 자리하고 그 동편 골 안에 옛 삼성암 터가 있다. 삼성봉(서봉) 삼성골 등의 명칭이 생긴 것은 그 삼성암이 갖는 표지성 때문이라고 했었다. 남사면의 용수동·신무동에는 근세까지도 삼성암 신자가 적잖았다고 하니 그들이 산 증인들이리라.
삼성덩어리는 '최후의 산줄기'를 내려보낸 후 낮아지기 시작한다. 그 이후 주능선은 '1080m대 덩어리'가 이어받는다. 하지만 이들 두 개의 덩어리 사이는 깊은 골로 패였다. '삼성봉 최후의 산줄기'와 '1080m대 최초의 산줄기' 사이에 생긴 골. 그 골로도 등산로가 나 있으니, 삼성골로 오르다 '1080m대 최초의 산줄기'를 감아 오른 후 '삼성봉 최후의 산줄기' 서사면을 타고 직상승해 주능선에 도달하는 것이 그것이다. 골의 막바지 부분에서 골을 잠깐 서쪽으로 건너지를 경우 오르기 수월한 <116>지점의 목에 이를 수도 있다. 이 코스를 오르는 도중 삼성암 터를 거치려면, 노정의 중간쯤에서 동쪽 오솔길로 우회전하면 된다. 하지만 등산객들 중 상당수는, 이 골로 난 등산로 대신 아예 '삼성봉 최후의 산줄기' 서사면 초입에서 동사면으로 옮겨 타고 삼성암 터로 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완전히 쪼갈라진 두 개의 산덩어리 사이는 통상 주위보다 훨씬 낮은 재의 형태를 띠기 일쑤이다. 하지만 삼성봉 덩어리와 1080m대 덩어리 사이는 그렇잖다. 둘 사이의 연결 능선이 주변과 별 차 없는 높이를 유지하는 것. 지형 답사자들이 혼란을 겪게 돼 있다.
그 특이한 형상의 연결 능선을 만들어낸 것은 그곳에 솟은 벼랑바위들이다. 차고 오르는 골에 의해 그 하부는 이미 매우 얇아졌지만, 능선부분만은 벼랑바위들로 인해 높이가 위축되지 않는 것. 그래서 그 형상이 오리의 물갈퀴를 연상시킨다. '물칼퀴 능선'.
물갈퀴 능선이 벼랑바위들에 의지해 높이를 유지하다 보니, <114> 번호판이 서 있기에 적당할 성싶은 지점에서부터 등산로는 그걸 피해 북사면으로 내려 가 나 있다. 그 북사면 등산로는 <119>에 이르러서야 다시 능선 위로 올라서고 이어 1080m대 덩어리로 연결해 간다. <114>와 <119> 사이가 깊은 계곡 위의 '물갈퀴 능선'이라 짐작해 두면 될 듯. 하지만 <114> <115> 표지판은 지금 그 하단의 삼성암 터 인접 등산로에 세워져 있다. 누군가가 떼어다 옮긴 듯 했다.
1080m대 덩어리의 출발점은 1087m봉<120>이다. '1080m대 최초의 산줄기'는 바로 거기서 남사면으로 내려간 것. <119>에서 올라서기 시작한 1080m대 덩어리는 <120>에서 처음 봉우리를 이룬 뒤 <121>에 이르도록 그 비슷한 높이의 대(臺)를 형성한다. 그곳은 남사면을 살필 좋은 전망대 중 하나. 1000m봉의 모습이 그렇게 뚜렷할 수가 없다. 1080m대 덩어리는 그 후 낮아지기 시작하나 완전히 끝나는 곳은 <125> 정도라고 보면 될 듯 하다.
하지만 <121>에서 <125>로 낮아지는 구간에는 주의해 볼만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하강 첫 지점인 <122>에서는 주능선이 다소 남쪽으로 굽는다. 그걸 모르고 생각 없이 능선 흐름만 따라 걷다가는 북쪽의 동산계곡 태장골로 빠지기 십상. 등산로까지 갖춘 가지줄기가 주능선상 등산로와 자연스레 연결돼 있는 탓이다. 북으로 가는 그 줄기는 동산계곡의 큰골과 심정골을 가르는 분수령. 한참 내려서다가 갈라져 속으로 태장골을 품는다.
<124>를 지나면서 능선은 겨우 2, 3m 솟구쳐 봉우리를 하나 만드니 그것이 1032m봉이다. 곧이어 <125> 종점에 도달하나, 정작 주의해 볼 것은 거기서 평평하게 연결돼 가는 <126> 지점이다. 그것은 995m 높이의 목. 거기서 남사면으로 등산로가 하나 내려간다. '1080m대 덩어리 최초의 산줄기'를 거치지 않고 바로 삼성골로 내려갈 수 있는 코스. 그 골의 이름이 '도장골'이고 삼성골 연결점 부근에 절이 하나 있었다고 신무동의 어느 분이 가르쳐 줬었다.
<126>을 지나서는 990m대 덩어리가 형성돼 있다고 보면 될 듯 하다. 그 초입에 1003m짜리 봉우리가 있기도 하지만 일대 대부분 구간은 990m대를 유지하기 때문. 그 중 992m봉<130>에서는 앞서 '보라우능선'이라 명명해 뒀던 그 산줄기가 출발해 삼성골과 용무골을 가른다. 990m대 덩어리가 종료되는 것은 963m높이의 '미정재'. <132>와 <133> 사이다.
<134>부터 <140> 사이에 펼쳐지는 것은 1010m 이상 높이의 '톱날능선' 구간. <134>는 1010m 높이의 덤으로, 남사면 전망대이기도 하다. <135>도 비슷한 형상. <138>은 1030m봉, <140>은 1033m봉이다. 하지만 능선이 톱날 같이 벼랑바위로 형성되다 보니, 등산로는 <135> 이후 북사면으로 나 있다. <138> <140> 표지판도 그 등산로에 세워져 있는 것.
이 톱날능선은 <142>에서 잠깐 잘려 1026m 높이의 재를 내 준다. '병풍재'. 톱날능선이 바위병풍을 연상케 해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인근 마을 어르신들은 전했다. 재에서는 남사면 용무골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출발한다.
톱날능선은 병풍재를 거친 뒤 1054m봉<143>으로 다시 치솟으면서 절정을 구가한다. 북사면 남산계곡과 동산계곡의 분기점이자, 한티재에서 동쪽으로 바라볼 때 가장 우뚝한 봉우리. 거기서 북사면으로 중요한 산줄기가 하나 내려가 두 계곡을 가르는 것이다. 이 봉우리를 북사면 동산리 황청마을에서는 '바린골 큰산', 남산리 둔덕마을에서는 '구무들 말랭이', 남산1리에서는 '가마바위 봉우리'라 했다. 삼성봉 이래 최고봉. 그 위상에 걸맞게 봉우리의 남쪽 부분에는 소나무를 양산 같이 받쳐 쓴 평평한 돌출 암반 전망대가 있어 남사면의 용무골이 한눈에 들어온다. 반면 북쪽 부분에도 편안한 돌방석이 형성돼 남산리 계곡이 훤하다.
1054m봉을 지난 뒤에 주능선은 991m짜리 재로 떨어졌다가 1018m봉<145>으로 솟아 팔공산 서부능선의 마지막 1000m대 봉우리를 맺는다. 그것을 동산리에서는 '두리봉', 남산리에서는 '상여바위 봉우리'라 불렀다. 여기까지를 일단은 넓은 의미의 '톱날능선'으로 구획해 두는 것이 편할 듯 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팔공산 서부능선에서 매우 중요한 두 봉우리의 이름을 어느 정도 확정해 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가마바위봉'과 '상여바위봉'으로 대비시키는 것이 구미 당기는 방안. 모양을 본 따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어르신들은 말했으나, 산 사람이 타는 가마와 죽은 사람이 타는 가마로 대비시킨 그 대칭이 신묘하다 싶다.
주능선은 '상여바위봉'을 지난 다음 다시 948m의 '마당재'<147>로 내려앉았다가 그 후 990m대 산덩어리로 이어진다. 이 산덩어리의 종점은 파계재. 마당재∼파계재 사이의 이 구간에도 여러 개의 봉우리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간에 큰 편차가 없어 별개의 봉우리들로서보다는 하나의 단위 덩어리로 엮는 것이 나을 듯 싶다.
이 산덩어리 중 먼저 나타나는 마당재를, 북사면 남산리에서는 '용무재'라 했다. 재의 남사면 골 이름이 '용무골'이어서 '용무재'라는 명칭이 붙었는가 싶었다. 그걸 거친 뒤 주능선은 되오르며 헬기장<148> 터를 내 주고는 978m봉<149>으로 솟는다. 톱날능선이 잘 살펴지는 곳. 거기서는 남사면으로 큰 산줄기가 하나 뻗어내려 용무골과 정가골을 구분 짓는다. 수태못 서편 둑이 될 때까지 길게 내려서는 그 능선은 나무들에 묻혀 전망이 나쁘고 걷는 재미도 적었다.
<149>에서 <151> 사이는 대체로 970m대 능선이고, 그 다음 <154>까지는 940m대 능선이 연결돼 나간다. 그러나 <155> 지점에 이르면 주능선은 990m대 높이를 회복한다. <155>는 994m봉. 남사면 마을 어르신은 그걸 '장꼬방 말랭이'라 불렀다 했고, 북사면 남산1리 마을에서는 '명들 말랭이'라고 했다. 거기서 남사면으로 산줄기가 하나 내려 가 동쪽의 정가골과 서쪽의 물불골을 가른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991m봉<156>에서는 그와 반대로, 북사면으로 산줄기가 하나 내려 가 부계면 남산리의 계곡들을 구분한다. 이 봉우리에 등산객들과 공원고시는 '파계봉'이라는 이름을 붙여 놨으나, 파계사와는 전혀 다른 공간에 속해 부적절함을 지적한 바 있다.
991m봉을 지나면 주능선은 파계재를 향해 낮아지기 시작하고, <159>에 도달하면 높이가 935m 정도로 추락한다. 산밑에서 파계사로 올라가는 등산객에게 흔히 '파계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파계사의 북쪽에 우뚝 솟아 보이는 곳. 하지만 현장에서 보면 그냥 경사면일 뿐이다. 그곳이 물불골과 파계사골을 가르는 중요한 가지줄기의 출발점이다.
주능선이 이어 도달하는 파계재<165>의 높이는, 5천분의 1 지형도 등고선으로 봐 805m이상 810m 미만. 파계사를 출발해 35분쯤이면 오를 수 있으니 팔공산 주능선 중 접근성이 가장 좋은 구간 중 하나로 꼽힌다. 재가 낮고 절이 높아 그럴 터. 파계재를 넘어 북사면으로 들어서면 '파계골'을 거쳐 부계면 남산리 둔덕 마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도중으로 난 임도에 길이 잘려, 재에서 내려서기 15분여만에 혼란을 겪게 돼 있었다.
마당재∼파계재 사이의 이 990m대 산 덩어리에는 '물불(勿佛)덩어리'라는 이름을 붙여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이 지금도 '물불이'라 부르고, 옛날부터 그렇게 불렸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기 때문. 이 시리즈 7회분은 "문보근이란 분의 저서가 이 일대를 물불산이라 지목했다"고 전한 바 있었다. 그때는 그 저서가 설명한 행정구역상 구분에 현장과 덜 맞는 부분이 있다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그게 봉우리가 아니라 산 덩어리를 지칭했다면,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명칭이라는 판단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물불사'라는 절이 거기 있어서 그런 명칭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라 싶었다.
마당재 서편 978m봉<149>에서 바라 본 팔공산 서부능선. 왼편으로 우뚝한 봉우리가 가마바위봉(1054m)이고, 톱날능선이 이어져 있다. 오른편으로 가장 멀리 보이는 것은 삼성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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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연경동 구간 동화천 변에 솟은 화암. 그 바로 북편에 이숙량이 학문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었고, 그 서당은 얼마 후 대구 최초의 서원이 됐다고 했다. 화암 북동편에는 '서원연경' 마을이 펼쳐져 있다.
앞서서도 살폈듯, 고려시대에 영남은 변방화 됐던 듯 했다. 왕건의 통일 이후에도 계속해 부귀영화를 누린 영남인은, 일찍부터 왕건의 편을 들어 군사를 이끌고 통일전쟁에 동참했던 소지역별 할거세력들, 신라라는 나라를 갖다 바쳤던 마지막 왕 김 부의 후손들, 새 정권에 동참한 신라 육두품 인사들 정도였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파악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은 바로 지역 인재의 유출을 의미하고, 경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권의 공백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신라의 지식인층이었던 육두품 인사들은 아예 개성으로 이주해 가 버렸다. 최언위는 왕건의 태자 사부가 됐고, 김 부를 따라 갔던 최은함의 아들 최승로는 시무 28조로써 고려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데 앞장섰다. 이에 현종은 최치원을 문창후(文昌侯), 설총을 홍유후(弘儒侯)로 추봉함으로써 우리 유학의 도통을 신라 중심으로 확립하기도 했다.
'경상도 700년사'(경상북도) '영남사림파의 형성'(이수건) 등에 따르면, 그 후 광종 대에 과거제가 도입되고 성종이 향교(향학)를 세우는 등 지방 진작책을 쓰긴 했으나, 그마저 최충으로 상징되는 '사학'(私學)의 득세로 약화됐다. 개성 중심이자 귀족 중심이던 사학은, 자연스레 관학과 지방교육을 쇠퇴케 했다. 그렇게 해 폐쇄성이 강화된 뒤 문종 이후에는 문벌귀족사회가 확립되는데 이르러, 지방 출신들의 과거 합격률조차 폭감했다. 더불어 유학도 경전을 중시하던 '존경풍'(尊經風)에서 문장력 중심의 '사장풍'(詞章風)으로 변질됐다.
경상도의 문풍 회복 및 명문거족 배출 기반 마련에 전환점이 된 것은, 1170년 발생한 무신정변이었다. 그 일로 문벌귀족과 문인들이 타도돼 지방으로 낙향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택한 지역 중에서는 경상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오세재는 경주로, 임춘은 예천으로, 이승장은 상주로 내려 왔다. 이제 공부를 하려면 개성이 아니라 경상도를 찾아와야 할 정도로 상황이 역전된 것.
이들이 경상도를 택한 것은 황무지가 많아 개간 정착의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땅 외에 노비가 매우 중요한 경제 수단이어서, 땅이 없어도 노비만 있으면 논밭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고 했다. 경북 북부 산간지에서 점차 명문거족이 많이 탄생하게 됐던 것이 이런 사정에 연유했다. 그리고 지식인층의 이동 정착과 비슷한 시기 경상도의 각 지방에도 중앙관리가 파견되기 시작함으로써, 이들 또한 지방 교육 활성화에 기여했다. 지방에 독서층이 두터워지게 됐고, 책 수요가 늘자 인쇄술이 덩달아 발달하기도 했다.
그러한 인사들에 의해 드디어 '경상도 제자'가 육성돼 점차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최우 등 무신정권이 새 계층의 발탁에 나선 덕분. 경상도의 호장(戶長)층이 사대부 집안으로 성장하고, 경상도를 본관으로 하는 명문거족이 탄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흔히들 좋잖게만 보는 무신정권이 지역민에겐 이익 준 측면을 가졌고, 그렇게들 경도하는 왕건은 그 반대인 면을 지녔다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셈이다. 이런 기회에 사대부로 성장하지 못한 호장 세력은 조선조 이후의 신분 고착화로 아전화 됐다니, 그 또한 주목해 둘 일이라 싶다.
새로 등장한 사대부 계층이 새롭게 채택한 학문은 '신유학'이었다. 경전의 해석에 매달리던 훈고학과 달리 철학적 사고를 진행시키던 성리학이 그것. 신유학은 당시 원나라가 새 통치이념으로 삼아 전담 기구까지 만들어 널리 퍼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경상도에서는 그 새 학문을 수용할 기반이 어디보다 먼저 개척되고 있었다. 안강 출신 재야지식인 안치환이 사장풍을 비판하고 고문운동을 전개해 '문이재도'(文以載道)를 주창하던 것이 친성리학적 성향의 대표적 증좌. 오세재와 임춘은 '죽림칠현'이라 불리던 인사이기도 했다.
중국에 머물던 우리 신진들이 자연스레 신유학을 접하게 됐고, 그 성과는 경상도로 전파됐다. 원의 관련 기구 소속원으로서 1290년 이를 가장 먼저 국내에 도입한 안향(安珦)은 영주 순흥 출신이었다. 그리고 상주·경주 등의 지방관을 역임함으로써 경상도가 성리학의 중심지 될 소지를 마련했다. 안향에 이어 더 실제적으로 성리학 지식을 도입한 백이정(白 正)은 비록 지역 인사가 아니었으나, 그의 학문을 경주의 이제현(李齊賢), 안동의 권부(權溥), 영해에서 활동했던 우탁(禹卓) 등이 전수해 영남에 뿌리깊게 했다. 나아가 이제현은, 원나라에 머물며 '만권당'을 운영하던 충선왕에게 불려 가 10여년간 현지 학자들과 교류함으로써 성리학을 제대로 소화 흡수한 최초의 국내 인사로 육성됐다.
이제현의 학문은 외가인 영해에 깊은 연고를 두고 있던 목은 이색(李穡)에게 이어졌다. 자신도 원나라에서 3년간 유학했던 학자. 성균대사성 등의 직책에 있으면서 10여살 아래의 포은 정몽주와 20여살 아래의 도은 이숭인 등을 교관으로 지휘하기도 했었다. 목은의 학맥은 권근 변계량 등으로 이어져 조선 개국에 동참했던 '관학파'를 형성한다.
관학파의 영향을 팔공산권에 유포한 중요한 인물은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이었던 듯 하다. 태재 신도비, 후손, 연구서 등에 따르면, 목은의 손녀를 어머니로 해서 개성에서 태어났던 그는 목은의 제자이던 변계량과 권근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하지만 관찰사를 지낸 그의 아버지가 옥사에 연루돼 주살된 뒤 22살 때 팔공산 자락인 영천시 청통면으로 귀양 와 '태재'라는 정사를 지어 제자를 양성했다. 원촌리에 자리 잡고 '북습(北習)서당'을 운영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니, '태재'라 불렀던 것이 곧 그 서당이었던 듯 했다.
☞ 팔공산권에 유배 와 많은 제자를 길러냈던 유방선을 주향으로 한 송곡서원. 사진 뒤로 보이는 것은 그의 신도비이다. 지금 서원이 옮겨져 있는 애련리는 3개 자연마을로 구성됐고, 전에는 사과 농사를 했으나 지금은 자두와 매실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 서당은 나중에 '송곡(松谷)서원'으로 승격됐으나 대원군 때 훼철됐다가 1961년 청통면 애련리로 옮겨져 재건됐다. 하양→신녕 도로의 은해사 분기점에서 바로 갈라져 들어가는 큰 골 안의 마을. 서원이 이곳으로 옮겨 재건된 것은, 일대에 '서산 유씨(瑞山柳氏) 영천파'라 불리는 태재의 후손들이 많이 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태재 본인은 나중에 강원도 원주로 옮겨 가 살다가 생을 마쳤다고 했다. 그는 두시학(杜詩學)에도 뛰어났으며, 대사간을 지낸 아들과 조카 등이 그 학식을 전수해 '찬주분류두시' '두시언해' 등의 국가 저술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애련리에 있는 송곡서원의 주향은 태재, 배향은 이보흠이라고 했다. 영천 출신의 이보흠(∼1457)은 서민을 위한 촌락 단위의 구휼조직 '사창'(社倉)의 창설 운영에 애정을 기울여 대구 군수로서 큰 기여를 한 사람. 배향으로 보면 이보흠이 태재의 맏제자일 가능성이 있으나,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한명회, 김수온 등도 태재의 대표적 문하생들로 꼽히고 있다.
태재의 제자 중 이보흠은 대구군수를 지낸 후 세조 즉위 후에는 순흥 군수로 옮겼다가 금성대군 단종 복위 모의 연루 혐의를 받아 처형됐다. 그러나 한명회(1415∼87)는 오히려 사육신 참살에 앞장서기까지 했고, 김수온(1409∼81)은 세조 때 승승장구했으며, 서거정(1420∼88) 역시 세조 밑에서 많이 활약했다. 서거정은 그 후까지 45년여 벼슬살이하면서 대사헌 대제학 6조판서 등 안 거친 벼슬이 없을 정도. 그러면서 문장으로 특히 유명하다. 세상을 냉시하던 생육신 김시습도, 15살 위이던 그와는 교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관학파에 의해 주도되던 학문적 흐름은, 팔공산권에서도 조선 중기에 이르면 대부분 사림파 주도의 것으로 치환돼 나갔던 듯 하다. 퇴계 이황의 문하생들 가르침이 이곳까지 확산된 것. 많은 영향을 남긴 이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였던 듯 했다. 지역의 적잖은 젊은이들이 멀리 성주의 한강 자택까지 왕래하며 공부했던 것.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들은 팔공산 창의의 주역들로 참가했다. 숫자상 퇴계의 문하생에 못잖다는 한강의 제자들은 '한강학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퇴계의 또 다른 문하생 이숙량(李叔樑, 1519∼1592)은 아예 팔공산 자락으로 옮겨 와 서당을 짓고 제자를 길렀던 경우였다. 농암 이현보의 다섯째 아들로 안동 예안 출신. 대구 무태동 들연경 마을에서 지묘동 서원연경 마을 가는 길목 동화천변에 우뚝 솟아 있는 '화암'(畵巖) 근처가 서당 터라고 했다. 서당은 1563년 대구 최초의 서원으로 승격됐다. 국내 최초의 서원보다 불과 20여년 뒤지는 시기. 대구 권역에 있던 5개 사액서원 중 하나이기도 했다. 대구부사가 후원해 건물을 새로 지어 퇴계 이황을 주향, 한강 정구 및 우복 정경세를 배향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서원을 남겨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이숙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4살의 나이로 몸소 창의해 임진년 10월 진주대첩에 참가했다가 순국했다고 '임진왜란기 영남의병 연구'(최효식)는 적어두고 있다. 그리고 연경서원도 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만 남길 때 함께 철폐됐다. '화암'(畵巖)만이 남아 세월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을 뿐.
하지만 그 화암도 이미 옛 모습을 많이 잃었다고 했다. 본래는 지금보다 훨씬 컸으나 동화천변에 길을 낼 때 폭파로 잘라 내 작아졌다는 것. 주변 모습도 변했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옛날엔 동화천 제방이 없어서 주위가 모두 하얀 모래로 뒤덮인 '갱빈'(강변)이었고 그래서 경관이 더 좋았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런 풍경은 불과 몇십년 전까지도 지속돼, 서변동의 성북초등학교로 통학하던 서원연경 아동들은 개울 바닥을 길 삼다가 비로 물이 불면 화암 뒤의 산을 넘어 다녔었다고 했다. 학교 사정이 좋잖던 시절, 서원연경 마을이 속한 지묘동 아동들이 백안동 공산초교, 서변동 성북초교, 파계사 밑 서촌초교 등 3개 학교로 나뉘어 취학하느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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