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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시 진상면 비촌마을에 건립된 ‘황병학의병백운산전투비’는 지난 4월 25일 후손들이 사비를 모아 건립됐지만 코로나19로 제막식도 치르지 못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선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백운산 의병의 공적 기리는 현창사업 추진 시급
일제의 한반도 침탈야욕이 노골화되던 지난 1908년 7월 26일, 광양 백운산에 광양과 구례, 순천, 하동 등지에서 활동하던 산포수 200여명이 모였다.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 끝에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는 격문에 호응한 산포수와 장정들이었다.
이때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일제의 앞잡이노릇을 하던 군수가 머리깎기를 강요하던 시기였다. ‘호남창의대장기’를 꼿고 결성된 백운산의병은 황병학 장군이 당숙인 황순모 선생, 구례출신 한규순 선생, 어치출신 백학선, 김응백 선생 등과 함께 결성한 것이다.
백운산 의병을 결성한 황병학 장군은 구한말 광양을 대표하는 의병장이다. 그리고, 의병활동이 전환 및 쇠퇴기로 돌입하던 1908~1909년 시기 의병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황병학 의병이 가장 먼저 전과를 올린 곳은 윤동주 유고보존가옥이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망덕포구 전투였다. 당시 망덕포구에는 일본에서 이주해 온 일본인들이 근대적인 어선과 어구들로 어장을 싹쓸이하면서 광양의 어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1908년 8월 5일 밤, 황병학장군이 이끄는 백운산 의병은 망덕포구를 급습해 일본인들의 선박 10여척과 그들의 집 6채를 불태우고, 일본인을 사살했다. 또, 이들이 보관하고 있던 총기 10정을 노획했다. 백운산 의병의 첫번째 출전이자, 승전보였다.
백운산 의병의 2차전투는 옥곡원 후산전투였다. 망덕만전투로 입은 일본인들의 피해와 살해된 육군 측량병 2명의 보복을 위해 일본군은 헌병경찰 합동부대를 편성하여 의병들을 공격했고, 이 전투에서 황병학 장군은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 13명의 의병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해 10월에는 황병학 의병의 선봉장을 맡고 있던 그의 당숙 황순모 선생과 한규순, 이찬주 선생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총살을 당한다.
함께 의병을 일으킨 동지들을 잃은 황병학 의병은 1909년 1월 23일에는 백운산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이 증강된 광양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총기 10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게 된다.
황병학 의병의 제4차 전투는 묘도해상전이다. 일본군의 공세로 백운산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황병학 의병은 본부를 묘도로 옮기기로 하고, 배를 이용해 묘도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묘도해상전에서는 황병학 의병부대의 특공대장을 맡았던 백학선 선생을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전사한다. 황병학 장군과 살아남은 의병들은 여수시 삼일면으로 탈출하게 된다.
이해 9월, 일제는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한다. 의병부대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감행된 것이다.
더이상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황병학 장군은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순천, 고성 등지에서 피신생활을 하다가 1919년 고흥출신인 기산도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국민대회 전라도의무금모집단’을 조직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황병학 의사는 1919년 11월, 상해임시정부 교통차장 김철의 도움으로 만주로 망명하여 용정, 영고탑, 흑룡강 등지에서 독립군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국내에서는 1920년, 그의 동지 기산도가 일경에 체포되면서 1920년 7월 1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황병학 의사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는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황병학 의사는 1923년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모금 지령을 받아 국내로 잠입하던 중 신의주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이해 10월 24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4년의 옥로를 치른다.
의병활동 당시의 부상과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황병학 의사는 고향 광양으로 돌아왔다가 고문의 여독으로 1931년 4월 23일 영면하게 되니, 당시 그의 나이 55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황병학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돼 교수형을 당한 김응백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의병부대 활동 당시 일경에게 목숨을 잃은 황순모, 한규순, 백학선, 이찬주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광양출신의 의병장 황병학 장군의 일대기는 한편의 대하소설과 같다. 그리고, 광양에는 황병학 의병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제대로 관리가 되고있지 않다.
선생의 후손들은 지난 2018년부터 광양시에 황병학 의병부대의 공적선양사업을 해줄 것을 지속적으로 건의했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결국 지난 4월 25일, 선생이 태어난 진상면 비촌마을에 선생의 후손들이 ‘황병학의병백운산전투비’를 건립했다.
선생의 손자인 황호부씨는 “황병학 의병부대에서 활동한 의병 250여명은 대부분 광양인으로 조국과 고향 광양을 위해 신명을 바치고 희생되신 분들”이라며, “황병학 의병부대의 공적선양위원회를 구성해 이들의 희생을 기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황씨는 백운산 의병부대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제1차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망덕만전투의 현장인 망덕포구에 공적선양홍보관을 설치하고, 의병들이 전투에사용할 무기를 제작했던 생쇠골 야철지를 복원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백운산 의병부대의 본진이 있었던 진상면 어치리 억불봉 아래 생쇠골에는 쇠를 녹이는 로와 쇳물이 흘러내린 자국, 슬러그 등 잔재물과 대장간의 흔적이 남아있다.
또, 내회계곡과 노점골 등지에도 야철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황병학 의병부대에 대한 유족들의 건의에도 광양시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유족들은 지난 2019년 4월 3일, 유림회관에 광양향교가 실시한 ‘의사 황병학선생 추모 한시백일장’ 장원 시비를 건립했다.
2019년 4월 25일애는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가 주관으로 ‘의병장 황병학의사의 백운산 항일운동 재조명’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이날 토론자들은 “황병학의병장의 제1차전투가 벌어진 망덕포구에 국가보훈처가 현충시설 안내판을 설치하면서 ‘황병학의병망덕포전적비’가 없어 백운산 의병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윤동주 시비 옆에 설치한 것은 의병독립운동가에 대한 모독”이라고 성토하기도 했다.
유족들은 광양시가 망덕포공원에 부지를 제공해 주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황병학의병망덕포전투비’를 건립하고, 국가보훈처의 현충시설 안내판을 옮기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 6월, 우리고장 의병장과 의병들의 희생에 걸맞는 후손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다.
광양출신이지만, 성인이 된 이후 대부분의 활동을 구례에서 한 매천 황현선생을 기리는 도로명을 정하고, 광양 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도로명을 정한 광양시가 조국을 위해 헌신한 의병장을 위한 작은 추모공간이나 현충시설 하나 만드는데도 인색한 현실이 아쉽다.
▲ 진상면 비촌마을에 있는 황병학∙황순모 의병장 기념비 모습.
백운산 의병부대, 누가 활동했나?
황순모∙한규순∙이찬주∙백학선∙김응백 선생에 건국훈장 추서
의병(義兵)은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이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자위군이다.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원 종군하는 민군(民軍)으로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으며, 고려·조선 시대를 거쳐 조선 말기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조선 말기의 의병은 항일 독립군의 모태가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백운산 의병 역시 평범한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것이다. 백운산 의병의 규모는 최대 250명까지 추산되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광양사람들이었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한 의병의 무기들은 조악했다.
그러기에 치열한 투쟁 과정에서 올린 전과 만큼이나 희생도 컸다.
백운산 의병의 대부분은 순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희생이 오늘 날 대한민국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등재된 백운산 의병들의 공적사항을 알아본다.
황순모 (이명 황사중)
황순모는 전남 광양(光陽)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됨에 격분하여 의병을 규합한 뒤 광양군 망덕만(望德灣)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던 중 의병들은 조련을 받지 않은 사졸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에게 패하여 흩어져 버렸으나 황순모는 산골짜기에 피신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살아 계셨기 때문에 멀리 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귀순하지 않으면 장차 부모와 종족(宗族)을 몰살하겠다는 위협에 "뜻도 이루지 못하면서 부모에게 화액만 미치면 무엇하겠느냐?"하고 관아에 가서 스스로 체포되어 그해 10월 11일 적의 총탄에 맞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규순
전남 구례(求禮) 사람이다.
1906년 12월 전남 창평(昌平)의 저산(楮山)에서 고광순(高光洵)이 거의(擧義)하자 그 휘하에 들어가 남원(南原)·화순(和順)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07년 9월 11일 구례 연곡사(燕谷寺) 전투에서 어깨에 부상을 입고 구례 간전(艮田)의 자택으로 돌아와 잠시 요양하였다.
그 뒤 1908년 7월 의형제를 맺은 황순모(黃珣模)와 그의 당질(堂姪) 황병학(黃炳學)이 광양(光陽)에서 거의하자 여기에 참가하여 광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 일군에게 패하여 민가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1909년 10월 11일 함께 은신 중이던 황순모가 일군에게 피살될 때 “내 그와 사생(死生)을 같이하자고 맹세했는데 나만 빠져나와 산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하고 은신처에서 뛰쳐나와 함께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찬주
전남 광양(光陽)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이다.1908년 8월경 황사중(黃士仲 - 황순모의 이명) 의병부대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광양군에서 3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전남 구례(求禮) 및 경남 하동(河東) 일대의 의병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광양지역 도처에서 일제침략세력 구축을 위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9월 1일에는 광양군 진하면(津下面) 망덕리(望德里)에 거주하던 일본인 3명을 처단하고 그 가옥을 소각시켰다. 같은 달 5일에는 광양군 옥곡면(玉谷面)에서 일제 참모본부 소속 측량반원의 숙사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08년 10월 17일 광양읍내에서 광양주재소 순사에게 체포되었다. 당일 순천경찰서로 이송되던 도중 탈출을 시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백학선
전라남도 광양(光陽) 출신이다.
일찍이 황병학(黃炳學) 의진에 속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운은 날로 쇠하여져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군대마저 일제의 책략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울분을 금치 못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의병이 해산되던 날 밤중에 읍에 들어가서 홀로 횡행하면서 관청을 공격하였다. 본래 용맹스런 사람이었으므로 아무도 그에게 대적치 못하였다.
다시 동지 두어 사람과 더불어 바닷가로 도망하여 묘도(猫島)로 들어가 활동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적이 나타나 그의 배를 향하여 총을 쏘았다.
그는 배 위에 올라서서 큰소리로 꾸짖다가 총탄을 맞아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응백
전남 광양(光陽) 사람이다. 황영문(黃永文 - 황병학의 이명) 의진에 가담하여 전남 광양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정미7조약(丁未7條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당시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김응백은 이같은 시기에 황영문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8년 8월 5일 황영문 의병장의 지휘 아래 의병 150여 명과 함께 총과 칼을 휴대하고 광양군 진하면(津下面) 망덕리(望德里)에 들어가 그 마을에 거주하는 일본인 석전경작(石田耕作)과 각야인평(角野仁平)의 집을 포위하고 발포하였다. 이들이 놀라는 가운데 각야인평 및 그의 가족 4명을 총격, 사살하였다. 그리고 그는 동지들과 함께 각야인평 소유의 양총 1정 등 무기류와 군수품을 노획하는 한편 그들의 가옥에 석유를 뿌리고 방화하여 소각시켰다.
같은 해 7, 8월 무렵 그는 의병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칼을 휴대하고 같은 면 진목정(眞木亭) 안윤석(安潤錫)의 집에 돌입하여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동지 강치선(姜致善)·고운서(高雲西) 외 2명과 함께 1908년 12월부터 1910년 1월까지 칼과 총을 휴대하고 같은 군 진상면(津上面) 비촌(飛村) 황병욱(黃炳郁)의 집에 들어가 그의 아들 송현(宋玹)으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10년 10월 26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이듬해 1월 16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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