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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景 1경 팔봉산
참! 아름답다. 팔봉산 봉봉마다 뽐내는 그 숨겨진 경치!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산을 휘돌아 흐르는 화양강의 절경은 가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자연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와 가슴 설레게 하고 긴 여운을 남긴 채 우리를 또 오라 한다. 팔봉산에 올라 본 사람은 모두 그렇게 왔다가 또 찾는다.
벌써 8봉이란 8의 숫자가 뜻하는 바도 심상치 않다. 중국 소상8경의 8경을 여기다 가져다 놓은들 어찌 팔봉산의 비경에 견줄 수 있을까? 팔봉산은 아름다운 경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복락을 주는 또 하나의 신비가 있다. 삼부인당, 산신당, 남근바위, 해산굴 등이 팔봉산의 신비를 더하고 있다. 게다가 이괄 장군과 용의 내기, 팔봉산 산신과 이괄의 전설, 삼부인당의 전설, 부래산 전설 등 전설의 보고이기도 하다.
매년 음력 3월 중순에 열리는 팔봉산당산굿은 홍천의 또 다른 전통의 멋이다. 이틀에 걸쳐 12거리 굿거리가 돌아가면서 진행된다. 정말 리얼 그 자체이다. 이 굿을 관람한 사람은 소름 끼치는 장면에 몸을 떨게 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흥겨워 함께 춤도 추고, 작두를 탈 때는 아찔한 순간에 몸서리치고, 용왕굿을 할 때는 그 리얼함에 감탄을 한다. 날카로운 작두 위를 맨발로 올라 칼을 휘두르며 춤을 추는 장면, 그 장면을 보지 않고는 팔봉산당산굿의 묘미를 모른다. 3월, 아직도 뼛속을 에이는 차가운 물에 들어가 물귀신이 된 망자의 넋을 건져 올리는 모습을 보면 정말 무서워서 소름이 돋는다. 어디 그 뿐이랴. 씻김굿을 하면서 춤을 추고 천을 가르는 행위에서는 해학이 넘쳐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 때문에 조선조 때 세시기에 팔봉산당굿을 보면 운수가 확 펴고, 인근의 사람들이 굿을 보기 위해 장사진을 친다고 했던 것일 게다. 이 굿은 강원도 민속경연대회에도 몇 번 출전했던 작품이다. 홍천의 전통풍습이 고스란히 담긴 보고(寶庫)이다.
팔봉산 아래로 굽이쳐 흐르는 화양강(홍천강)은 400리 굽이굽이를 휘돌아 마지막으로 그 자태를 맘껏 뽐내는 구간이다. 이곳 서면만 지나면 청평댐으로 합류하여 화양강의 생명을 다하기 때문이다. 정말 멋진 산이다.
洪景 2경 가리산
가리산은 정말 신비로운 산이다. 봉우리가 세 개인데 어디서 보더라도 한 봉우리는 가린다고 해서 가리산이라 한다. 춘천 방면에서 봐도 두 봉우리만 보이고, 홍천 쪽에서 봐도 두 봉우리만 보인다. 동서남북 어디서 봐도 세 개 중 한 봉우리는 가린다고 한다. 이렇게 멋진 자태를 가리는 데는 그만의 이유가 있다.
홍천의 산신은 여신(女神)이 많다. 팔봉산도 여신이고, 백우산도 여신이고, 가리산도 여신이다. 여신이기에 마음이 아름다워 많은 것을 감싸고 보살펴 준다. 사연은 이렇다.
옛날에 높은 벼슬을 하는 양반집에 외동딸이 있었는데 이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 그녀는 조상신을 찾아갔다.
“꿈을 펴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산신이 되어 꿈을 펴보고 싶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조상신이
천현리의 서낭당, 뒤편으로 눈발에 덮인 가리산이 가려있다
“아름다운 산은 가리산이니라. 가리산 산신으로 가거라.”
라고 했다.
처녀로 죽은 딸은 가리산 산신이 되어 골짜기의 물과 바위와 나무와 풀, 그리고 산에 사는 온갖 짐승들을 자상하게 보살펴 주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어느 날, 다른 양반집의 아들이 죽어서 가리산으로 왔다. 그런데 와보니 이미 산신이 좌정해 있지 않은가.
“저의 아버님께서 가리산으로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이제부터 이 가리산은 제가 다스리겠습니다.”
라고 총각신은 말했다. 그러자 처녀신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가리산은 제가 맡은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시지요.”
라고 했다.
두 신은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두 신의 다툼은 점점 거세어졌다. 그러자 가리산의 정기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물은 썩고, 나무는 마르고, 풀은 시들고, 짐승들은 포악해 졌다. 약한 짐승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숨어 지내야 했다. 그 아름답던 가리산이 점점 황량해져가는 것을 보면서 가리산 처녀신은 가슴이 아팠다.
처녀신이 총각신에게 말하였다.
“가리산의 초목과 짐승들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저들의 꼴을 차마 못 보겠습니다.”
라고 하니, 총각신은
“그러니 어찌 하자는 말씀이신지?”
라고 물었다. 그러니 처녀신은
“당신도 결혼하지 못한 몸, 저도 결혼하지 못한 몸. 이러지 말고 우리 결혼합시다. 우리 내외가 되어 이 가리산을 사이좋게 나누어 다스리면 저 초목과 짐승들이 생기가 돌 것 같습니다.”
라고 하자, 총각신은
“그거 좋은 생각이오. 그렇게 합시다.”
라 하였다.
그렇게 해서 날씨 좋은 날을 가리어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을 마치고 신부가 신랑에게 말하였다.
“말을 타고 앞장서시지요. 저는 가마 타고 뒤따르겠습니다.”
신랑은 말을 타고 행복에 겨워 건들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골짜기의 물과 바위와 나무와 풀과 짐승들이 모두 신랑 신부를 축하해주었다. 신랑이 축하를 받으며 흥에 취하여 한참을 가다보니 뒤따라와야 할 신부가 보이지 않았다. 신랑은 뒤로 돌아서서 멀리 바라보았다. 멀리서 신부가 큰 소리로 말하였다.
“이왕 나서신 길, 당신은 그대로 구멍동으로 넘어가십시오. 저는 이쪽 가리산 골짜기로 내려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랑은 구멍동의 신이 되었고, 신부는 가리산을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지금 가리산 산신은 여신이고, 구멍동의 신은 남신이다. 가리산 산신은 여신이라 부끄러워서 세 봉우리를 다 보이지 못하고 두 봉우리만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여신과 남신은 일 년에 한 번씩만 만난다고 한다.
지금 가리산에는 그때 여신과 남신이 결혼하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우선 각시바위와 신랑바위가 있다. 각시바위는 각시가 머리를 숙여 절하는 모습이고, 신랑바위는 사모관대한 모습이다. 대례상은 장 씨 또는 박 씨 묘라고 하는 것이고(아기장수설화가 있음), 말 바위는 신랑을 태운 듯한 모습이고, 가마바위는 엎드려 있어 신부가 타기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또 여기에 있는 무쇠말잿등은 신랑이 말 타고 넘어간 고개이고, 가마봉은 신부가 가마타고 넘어간 봉우리이다. (강원의 전설2)
가리산의 오작교 전설이라 할 수도 있겠다. 가리산의 여신은 산에 들어오면 뭐든 보호를 해준단다. 그 때문에 아직까지 어떤 포수도 가리산에서는 산짐승을 잡지 못했단다.
홍천에서는 이렇게 포근한 산에 자연휴양림을 지었다. 삶에 찌든 군상들에게 여신의 보호를 받으며 푹 쉬었다 가라는 뜻이 아닐까. 이밖에도 중국의 천자가 되어 간 한천자전설 등이 있어 가리산은 그 비경을 더하고 있다.
洪景 3경 미약골
아 놀랍다. 미약골. 이 골짜기에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정말 누구나 신선이 된다. 400리 홍천강의 발원지답게, 그 자태 참 예쁘다. 울창한 숲속 비경을 간직한 계곡을 따라 걸어보라.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내가 된다.
미약골은 한자로는 미암동(美岩洞)이라 한다. 미암동이 된 사연은 이렇다.
옛날 유명한 풍수가가 있었다. 그는 명당을 찾아 발길 닿는 데로 떠돌다가 미약골에 들어오게 되었다. 풍수가는 미약골의 경치에 푹 빠져 이곳저곳 산세를 둘러보았다. 용혈이 휘감아 돌며 계곡을 감싸고 있는 폼이 신선의 경지 그 자체였다. 삼정승 육판서가 나올 명당자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명재상을 맞이하기 위해서 학(鶴)이 나와 울며 홍대를 장식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재상을 보호하고 그 명성을 드날리기 위해서 촛대바위가 하늘로 치솟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어찌 아름다운 잔치에 풍악이 빠질까. 하늘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목욕재계했다는 폭포는 가히 눈부셨다. 이 모든 것을 각기 독특한 형상을 한 아름다운 바위들이 휘감고 있었다. 풍수가는 그만 발길을 멈추고 넋을 모두 빼앗겼다. 그러면서 탄식을 했다.
“아, 미암동(美岩洞). 그래 아름다운 바위가 천상의 낙원을 장식 했구먼.”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미암동이라 했고, 또 미약골이라 했다.
이 미약골은 생곡리(笙谷里)에 있다. 생곡리는 피릿골이 한자로 변한 것이다. 두 개의 유래가 있다. 하나는 골의 형상이 피리모양이라 하여 피릿골이라 불렀고, 또 하나는 진한(辰韓)의 마지막 왕 태기왕(泰岐王)이 신라에 쫓겨 이곳에 당도했는데, 그때 태기왕이 퉁소를 즐겨 불던 곳이라 하여 생곡(笙谷)이 되었다 한다.
이곳은 단군(檀君)의 역사와 함께한 불바래기의 땅, 천신께 제사하던 서석단(瑞石壇)이 있던 신령한 땅, 그곳에서 피리를 부는 임금님, 천상의 낙원인 최고의 미약골이 조화를 이룬 곳이다.(이상은 홍천군지 참고)
洪景 4경 금학산
태초의 근원을 일러 태극(太極)이라 했던가. 하늘과 땅이 아직 나눠지지 않은 카오스, 곧 혼돈의 상태를 말한다. 우주만물을 낳을 근원. 홍천 금학산에 오르면 물로 이뤄진 태극이라 하여 물 수(水)자를 써서 이름 하여 수태극(水太極)을 볼 수 있다. 벌써 이름만 들어도 그 빼어난 경관을 느낄 수 있다. 고두래미를 휘돌아 흐르는 강의 모양이다. 강이 휘돌아 태극기에 있는 적청색의 무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고두래미는 사금(砂金)이 무척 많았다. 물길 따라 모래를 파내면 금이 나왔다. 밭을 파서 밑으로 굴을 뚫어도 금이 나왔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이곳에 사금광을 만들어서 금을 훔쳐갔다.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금을 파갔다. 그들이 금을 파 가던 곳을 모래나드리라 했다. 백사장이 길게 뻗어 장관을 이룬 곳이다. 양덕원천과 화양강이 만나 합수를 하며 모래나드리를 만들었고, 수태극을 이룬 것이다.
고두래미, 모래나드리, 응아지, 수태극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이 금학산이다. 한자로는 쇠 금(金)자에 학 학(鶴)자를 써서 금빛 학이 머문 산으로 풀이 된다.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학이다. 원래 금학산의 이름은 버럽산이다. 산을 오르면 산 꼭대기에 물돌이 많다. 물돌은 금학산이 버럽산이었음을 증명하는 근거이다.
옛날 천지개벽을 할 때 대홍수가 나서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그때 이 산도 물속에 묻혔는데 쟁기를 끌 때 쓰는 버섭[보습]만큼만 산꼭대기가 물에 묻히지 않았다. 버섭이 변해서 버럽이 되어 버럽산이 된 것이다.
또 다른 얘기는 산 아래에 벼락바위가 있는데, 그곳에 멧돼지들이 물을 먹으러 내려왔다. 사람들은 벼락바위의 음차로 버럽바위라 했고, 이것이 변해서 버럽산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금학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고두래미에 살고 있는 노인들의 생생한 증언에 따른 것이다.
고두래미는 지금 남노일리로 바뀌었다. 노일이라는 말은 예전에 노일에 고려시대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하던 최충(崔沖)을 모시던 노동서원(魯東書院)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노동서원은 노일리에 있다가 1920년대에 서면의 어유포리(魚游浦里)로 옮겨 갔다. 지금은 표석만 남아 있다. 학문(學問)을 중히 여겼던 고두래미 사람들의 정신을 볼 수 있다. 금학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정말 가슴이 뻥 뚫린다.
洪景 5경 가령폭포
가히 신선이 오르내리는 모습이라. 옷깃을 날리며 물길을 박차고 산으로 오르다. 신은 폭포를 타고 올라 백암산 신바위[神岩]에 앉았다. 산에 있는 아주 크고, 색깔이 흰 바위는 신들이 기거한다고 이곳 사람들은 믿었다. 신바위의 색깔이 희다고 하여 흰 백(白)자에 바위 암(岩)자를 써서 산의 이름이 백암산으로 명명되었다.
백암산에 오르면 신선이 되는 걸까. 가히 신선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가령폭포(可靈瀑布, 加靈瀑布)의 이름만 봐도 그렇다. 여기를 오르는 모든 이는 하루 신선, 곧 일일신선(一日神仙)이 되고도 남는다. 그래서 개령폭포(開靈瀑布)라 일컫는 이도 있다. 인간의 영혼에서 신선의 영혼으로 태초의 모습이 될 수 있으니까.
신선이 날개 짓을 하여 신바위에 오르는 마을 어귀라 하여 비선동(飛仙洞)이라 한다. 기와골을 어느 노스님이 다녀가며 지은 이름이다. 마을에 비가 내리면 비선동 어귀에서 시작한다고 하여 비선조우(飛仙早雨)라는 글을 지어 주었단다. 신선은 비를 타고도 나는 가 본다. 스님은 신수(神樹)도 보호하라고 했다. 마을에 있는 고목수양버들이었다. 이 나무를 타고 신선이 마을에 내린다고 했으니, 신수이다. 실제로 비가 내릴 때는 이 나무를 타고 신선이 하강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비선동은 워낙 경관이 좋다. 유유히 흐르는 냇물과 백암산의 그림자가 조화를 이루어 더욱 경관이 빼어나다. 그 때문에 마을 아낙들은 냇가에 모여 빨래를 하며 물 위에 비친 산 그림자를 감상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백암산에 기거하는 신선 동자가 육구만달 산삼을 들고 노는 그림자가 냇물에 비치는 것이 아닌가. 아낙들은 그 산삼을 얻고자 산으로 올랐다. 그러나 신선 동자가 들고 있던 크나 큰 산삼은 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낙들은 물에 비친 산의 진면(眞面)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미 아낙들은 신선이 사는 곳에 올랐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매년 신령께 제사를 지내 주민들의 건강과 풍요를 빌고 있다. 그러면 백암산 신바위에 좌정했던 신들이 50여 미터의 아름다운 폭포를 감상하며 마을로 와서 신수를 타고 내려 마을사람들에게 복락을 주고 갈 것이다.
洪景 6경 공작산 수타사
공작이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날개를 뽐내는 산, 공작산(孔雀山).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 언제든 아름답지 않은 때가 있으랴. 봄이면 형형색색 산꽃들이 저만치 피어있고, 여름이면 설악산 계곡보다 아름답다는 물굽이길을 따라 시원하게 걸을 수 있으며, 가을이면 이월의 꽃보다 붉은 서리 맞은 잎들이 우리를 반긴다. 겨울이면 눈꽃 핀 길을 따라 그 옛날 마의태자가 걷던 길을 따라갈 수 있다.
공작산은 한(恨) 많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꿈 많은 사람들의 소원도 들어주는 곳이다. 공작포란형(孔雀抱卵形)이라 했다.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최고의 명당이다. 일찍이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는 이곳에 머물러 잠시 궁궐을 짓고 신라구국(救國)을 도모했으며, 조선조 인조반정의 공신 이괄은 죽어 덕치리의 마을신이 되고 팔봉산의 산신이 되었다. 나라를 잃은 마의태자의 한과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괄의 한은 그들을 신(神)으로 승화시켜 한 많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조선조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의 태(胎)도 이곳에 묻혔다. 조선조 최초의 수렴청정을 한 여인으로 대왕대비라는 칭호를 얻은 여인이다. 이처럼 한을 풀고 소원을 얻는 곳이 공작산이다. 공작의 화려한 날개와 날개짓을 보면 우리는 익히 알 수 있다.
바로 그 공작산에 수타사(壽陀寺)가 자리했다. 강원도 최고의 고찰이라 한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니 오래 되기는 했다. 이름도 많이 변했다. 처음 일월사(日月寺)라 했다가, 절 옆에 큰 냇물이 흐른다 하여 수타사(水墮寺)라 했는데 호랑이와 장마의 피해가 있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878년 수타(水墮)란 이름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수타(壽陀)라 고쳤다.
수타사 지붕에는 청기와 두 장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집을 뜻하는 청와대(靑瓦臺)는 푸른 기와를 얹은 집이다. 이는 파랑새가 희망과 행운과 행복과 평화와 이상세계를 뜻하듯이 청기와를 얹은 뜻이 있으리라. 많은 절집의 지붕에 청기와를 얹은 것은 어쩌면 우리나라 사찰의 전통일지도 모른다. 화재에 취약한 목조건물의 절집에서 물을 관장하는 청룡의 기운을 얻어 화재예방을 하려한 것일 수도 있다.
수타사는 보물이 많은 곳이다. 1983년에 지정된 보물 745-5호인 월인석보,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호인 삼층석탑, 강원도 문화재자료 15호인 홍우당부도, 1457년 수타사를 중건할 때 잡귀를 쫓기 위해 심었다는 주목 등이 있다.
주변의 생태숲 조성과 관련하여 그야말로 수타사와 공작산은 보고임에 틀림없다.
洪景 7경 용소계곡
백우산 용소계곡. 천혜의 계곡이다. 사람의 때가 아직 많이 타지 않아 그 깊은 맛을 더한다. 계곡을 한 번 들어가면 태초의 광경을 더할 수 있다. 물길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웅덩이와 물길을 이루고 있다.
용소계곡은 황병재에서 뻗어 내린 열두골짜구니와 백우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이뤄진 계곡이다. 백우산은 백학(白鶴)의 날개 형상을 했다고 해서 백우산(白羽山)이라 한다는 설과 옛날 대홍수 때 물길이 산꼭대기에까지 이르렀을 때 산에 배를 정박 시키고자 말뚝을 매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백우산에는 여신(女神)이 좌정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의 꿈에 자주 나타났는데, 작은 몸집을 한 여신이 목탁을 치고 있는 모습이라 한다. 누구냐고 물으니 백우산의 신령이라고 했단다. 여신이라서 자주 토라져 소홀히 하면 마을에 재앙을 내리기를 잘 한다. 그러나 어머니처럼 산에 있는 모든 것은 품에 품어 보살핀다고 한다. 그 때문에 백우산에 있는 산짐승은 잡지 못한단다. 백우산 여신이 짐승을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백우산 여신과 관련한 이변은 산 주변에 가면 많이 들을 수 있다. 그 중에 이런 얘기도 있다. 산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살아있는 돼지를 몰고 올라가서 잡아 썼는데, 돼지가 알아서 산으로 올라가고 자신이 죽을 곳을 알아 멈추었다고 한다.
<백우산의 장수>라는 아기장수전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민중들의 삶은 권력에 의해 그렇게 채 피지도 못한 채 어린죽음으로 짓밟힌 것이다.
용소계곡이 있는 광암리 2반은 자연마을 명이 군유동(君輶洞)이다. 이 군유동은 인제군의 갑둔리, 김부리와 연계되는 지명이다. 군유동은 두 가지로 불린다. 하나는 ‘군넘이’이고, 하나는 ‘군놈이’이다. 군넘이는 ‘임금님이 넘은 곳’이라는 뜻이고, 하나는 ‘임금 놈이 넘은 곳’이라고 한다. 이는 뜻을 보면 알겠지만, 너무나 둘이 상반되어 있다. 앞의 군넘이는 신라의 입장에서 마의태자를 존경하는 뜻이고, 뒤의 것은 고려의 입장에서 붙인 것이다. 앞의 것은 마의태자가 고개를 넘을 때 국권회복을 위해서 넘어갈 때 이 지역 사람들이 그를 존경해서 불렀다고 하고, 뒤의 것은 나라를 잃은 놈이라는 뜻에서 멸시를 했다고 한다. 한자의 군유동은 임금이 수레를 타고 넘은 동네라는 뜻이다. 유(輶)자가 임금의 수레이기는 하나 아주 가볍고 제대로 격식을 갖추지 않은 것을 의미한단다. 그러니 마의태자가 이곳을 넘을 때 겨우 수레 뚜껑만 달린 것을 타고 건넜다고 해서 그렇게 붙였다나. 그 증거로 마을사람들은 용소계곡에 있는 탑과 열두골짜구니의 탑거리를 들고 있다. 나라의 흥망이 인간의 흥망과 다르지 않다. 나라를 잃고 초라한 모습으로 계곡과 고개를 넘던 신라의 태자를 바라보는 상반된 두 시각이다. 용소계곡의 또 다른 모습이다.
洪景 8경 살둔계곡
사람이 둔덕에 기대어 살만한 땅이라 한다. 사철 맑은 물이 흐르고, 온갖 먹거리를 제공해 주는 방태산이 높다랗게 있으니, 어찌 사람이 살만한 땅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살만한 둔덕’이라 하여 살둔이라 했다. 한자로는 생둔(生屯)이라 쓴다. 청구야담에 <무릉도원을 찾은 권진사(訪桃源權生尋眞)>라는 설화가 있는데, 인제 기린에서 100여 리 떨어진 곳이라 하였다.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이 마을을 이루고 산다고 했다. 밤이면 글 읽는 소리가 들리고 낮이면 일을 하여 생계를 이어나가는 무릉도원이라 했다. 물에는 고기가 버글버글하여 나무막대로 내리쳐서 잡을 정도라 했다. 고기의 이름은 ‘목멱어’이다. 권 진사는 그 마을을 나온 후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이곳이 바로 살둔계곡이 아니겠는가.
홍천군 내면에는 단종대왕과 관련이 있는 권전(權專)이란 대감이 마을의 신으로 좌정해 있다. 마을마다 권 대감을 모시는 산신당과 서낭당이 자리하고 있다. 살둔계곡도 예외가 아니다. 권 대감 설화도 많고 제사도 지내며 본부산천을 관장하는 신은 권 대감이라 했다. 햇곡식이 나면 먼저 권 대감신께 올리고 나서 사람들이 먹고, 새 옷을 사와도 권 대감신께 옷을 사왔음을 알렸다. 권 대감은 단종대왕의 외조부라 하는데, 정확히 누군지는 모른다. 그러나 권 대감은 내면 일대에 선진문명의 충격을 전해 준 인물이다. 산간벽지 풀만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임금의 외조부인 대감이 말을 타고 왔다. 그는 이곳에 와서 글을 가르쳐 주고, 농사법을 알려주고, 삼봉약수를 찾아 치료를 해주기까지 했다. 그 당시 내면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문명의 충격이었다. 권 대감이 돌아가시자 내면 사람들은 그가 신이 되어 마을을 수호해 주신다고 믿었다.
살둔계곡을 따라 오르면 개인약수(開仁藥水)도 만나게 된다. 개인산에 있는 약수라 하여 개인약수라 한다. 이름도 참 좋다. 어짊을 여는 약수, 곧 사랑을 베푸는 약수이다. 물론 그 위치는 인제에 속하지만 살둔계곡의 지류이다. 같은 내린천을 끼고 형성된 마을이며 계곡이니 함께하였다.
살둔계곡은 걷고 싶은 길로 유명하다. 계곡을 따라 걷노라면 옛 생둔초교도 만날 수 있고, 오래된 민가도 만날 수 있다. 산마을 특유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산은 원래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처음 머문 곳이다. 그 때문에 죽으면 다시 산으로 간다. 그 때문일까. 누구나 산에 가면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언제 와 본 듯한 느낌, 그것은 우리 잠재의식 속에 자리한 태초의 고향이다. 살둔계곡을 걸으면 아련하게 우리 몸속 깊이 잠자고 있는 고향을 만난다. 낯설기보다는 낯익음이 전해온다.
洪景 9경 가칠봉 삼봉약수
날개 다친 학이 약수를 마시고 바로 날다. 삼봉약수의 효험 키워드다. 권 대감이 실질적인 학문을 가르쳤다. 세 개의 봉우리가 내뿜는 기를 담고 있는 약수다. 이 이야기는 삼봉약수에 가면 만날 수 있다.
가칠봉, 응복산, 사삼봉의 세 봉우리가 연결된 중심에서 약물이 솟아난다. 삼봉약수의 명칭은 그렇게 이름 하였다. 한국의 명수 100선에 선정되고, 천연기념물 제530호이기도 하다. 삼봉이란 이름은 그저 평범하다. 그러나 해발 천 미터가 넘는 깊은 산의 세 봉우리 기(氣)가 이곳에 뭉쳤다 하니, 효험을 나타내기에는 정말 안성맞춤이다.
원래 삼봉약수의 명칭은 실론약수(實論藥水)였다. 실론은 실질적인 학문을 논하였다는 말에서 왔다. 그것은 바로 내면사람들의 삶을 책임지고 있는 권 대감으로부터 비롯했다. 단종의 외조부로 알려진 권전(權專) 대감이 내면에 와서 문명을 전해주었다. 권 대감은 단종이 승하하자 세상을 피해 오대산으로 들어가다가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원인은 그가 타고 오던 말이 갑자기 튀어나온 사슴에 놀라 뛰다가 칡덩굴에 걸려 넘어져 죽었기 때문이다. 권 대감은 말을 위로하는 제를 올렸다. 그 후부터 광원리를 비롯한 내면 일대에는 칡이 나지 않는다. 마을사람들은 권 대감의 뜻이 하늘과 통했다고 믿어 그를 숭앙하여 초당을 짓고 액운을 쫓고 발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낸다.
권 대감의 업적은 그 뿐이 아니다. 권 대감은 내면에서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실질적으로 써 먹을 수 있는 글을 가르쳤다. 이 때문에 실론(實論)이란 지명이 나왔고, 약수의 명칭도 그가 발견했다고 해서 실론약수라 하였다. 권 대감이 어느 날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밖으로 나와 거니는데, 어디 선가 날개 부러진 학 한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땅에 떨어졌다. 학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계곡에 떨어져 울었다. 동시에 물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마 후 학은 건강한 모습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권 대감이 이곳에 와 보니 샘이 솟고 있었다. 이 샘을 학이 먹고 날개를 고쳤음을 직감하고, 동네사람들에게 널리 알려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삼봉약수가 명수(名水)가 된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삼봉약수는 몸도 마음도 모두 고칠 수 있는 한국 최고의 필링(feeling)약수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홍천을 돌아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