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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력발전단지·태기분교 터·태기산성터·낙수대·태기전망대 등 볼거리 많아
양구두미재에서 40분 거리인 6번 풍력발전기 옆 공터에서 북동으로 올려다 보이는 태기산 정상. 가운데로 보이는 7번 풍력발전기 기둥 아래는 바람개비동산. 7번 풍력발전기 왼쪽으로 멀리보이는 8번 풍력발전기 옆에 정상을 대신하는 태기산 전망대가 있다.
한강기맥 청량봉(홍천군 서석면·내면-평창 봉평면 경계)에서 한강기맥은 남서쪽으로 향한다. 이 한강기맥은 약 7km 거리 구목령에서 약 3.5km 더 나아가 삼계봉三界峰(1,105m)을 빚어 놓는다. 삼계봉은 횡성군, 홍천군, 평창군 3개 군郡 경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삼계봉에서 한강기맥을 벗어나 남쪽으로 가지 치는 능선이 영월지맥이다. 이 영월지맥을 따라 약 5.5km 거리에서 들어 올려진 산이 태기산泰岐山(1,261m)이다.
태기산은 삼한시대 말 진한辰韓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이 이 산에 성(태기산성)을 쌓고 신라군과 싸웠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큰 성골 상류인 주전골에는 천년 고찰 봉복사 말사였다는 낙수암 터와 낙수대 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태기산은 6.25 전후 지리산에서와 같이 이 산에서도 남과 북이 동족 간 안타까운 살상행위가 벌어졌던 곳이다. 1948년 10월 북한 강동정치학원 소속 무장공비 180명이 강원 영서지역으로 침투했을 때 이 산에서 횡성경찰서 경찰과 무장공비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바람개비동산을 지난 7번 풍력발전기에서 20분 거리인 태기분교 터 입구 삼거리. 삼거리는 태기왕 전설길(왼쪽) 시점(4.5km)이다. 이곳에서 정상 방면은 오른쪽 길이다.
태기산 볼거리 중에는 풍력발전단지를 빼놓을 수 없다. 2008년에 건설된 풍력발전단지에는 풍차 형태인 발전기 20기가 세워져 있다. 무한한 청정에너지인 바람을 받아 푸른 하늘을 가르는 40m 길이 날개가 80m 높이 발전시설 기둥 꼭대기에 매달려 세차게 돌고 있다. 태기산에는 추억어린 볼거리도 있다. 1960년대 화전민 자녀들의 유일한 교육 장소였던 태기분교 터가 그것이다. 태기분교 터는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동반 탐방장소라고 한다.
태기산은 정상에 오를 수 없는 것이 흠이다. 정상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군부대 들머리로 볼 수 있는 11번 풍력발전기 앞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수 년 전 11번 풍력발전기에서 정상 방향(남쪽)으로 약 0.5km 거리인 8번 풍력발전기 옆에 정상비석과 태기산전망대가 세워져 이제는 전망대에서 정상에 오른 기분을 조금이나마 느껴 볼 수 있게 되었다.
해발 1,100 높이 태기산전망대 옆에 세워져 있는 태기산 정상비석.
태기산전망대에서 펼쳐지는 파노라마도 일품이다. 이곳에서 서남으로는 둔내면소재지가 멀리의 치악산 비로봉과 함께 조망된다. 치악산 비로봉에서 오른쪽으로는 횡성읍과 청일면 고시리, 고시리 오른쪽으로는 갑천면 구릿봉과 어답산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쾌청한 경우에는 어답산 뒤 멀리로 경기도 양평 용문산도 눈에 와 닿는다.
태기산은 수도권에서 대중교통편으로 찾아가기가 수월해졌다. 횡성역이나 둔내역까지 강릉행 KTX 고속철도를 이용하면 여유 있게 당일산행을 즐길 수 있다.
등산코스
태기산 등산코스는 정상 남쪽 둔내면 화동리 양구두미재~바람개비동산(청정체험길 시점)~태기분교 터~정상길 입구(낙수대 갈림길)~11번 풍력발전기, 정상 서쪽 신대리 종점 주차장(봉복사 입구)~송덕사(큰 성골과 작은 성골 합수점)~작은 성골 하단부~태기산성 터~태기분교 터~정상길 입구(낙수대 갈림길)~11번 풍력발전기, 송덕사~큰 성골~주전골~낙수대~정상길 입구(낙수대 갈림길)~11번 풍력발전기 경유 태기산전망대에 이르는 코스가 대표적이다.
상기 코스들을 양구두미재에서 오르는 코스를 기점으로 시계 반대방향으로 소개한다.
양구두미재~바람개비동산~태기분교 터~정상길 입구(낙수대 갈림길)~11번 풍력발전기~태기산 전망대〈약 4km·2시간 30분 안팎 소요〉
해발 980m인 양구두미재는 횡성군 둔내면 화동리에서 평창군 봉평면 무이리로 넘나드는 고개이다. 이 고개로 이어지는 6번국도는 주행走行하는 차량들이 예전처럼 많지 않다. 차량 대신 도로에는 자전거 주행을 즐기는 행렬들이 줄을 잇고 있다.
양구두미재를 넘는 6번국도가 한가해진 이유는 지난 동계올림픽 직전 양구두미재 밑으로 태기산 터널이 뚫렸기 때문이다. 6번국도를 끌고 들어가는 태기산 터널은 분지를 이룬 둔내 화동리에서 동쪽 봉평 무이리로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양구두미재를 넘어가는 6번국도는 ‘구舊 6번도로’로 변했다.
양구두미재 정상에 세워진 경찰전적비는 6.25 전 태기산에서 북한 무장공비들과 싸우다 전사한 경찰들 넋을 기리는 조형물이다. 양구두미재를 뒤로하고 6번 풍력발전기를 지나면 바람개비동산에 닿는다. 바람개비동산에서 서쪽 능선 길은 청정체험길이다. 서쪽 능선 청정체험길 아래 임도 삼거리에서 북서쪽 임도를 따르는 길은 태기산성 터로 이어진다.
태기분교 터에 남아 있는 50여 년 전 펌프 (식수)터.
태기약수에서 8분 올라가면 나오는 태기산성 터 석축 일부. 석축보호를 위해 횡성군에서 석축을 넘어가는 데크 계단을 설치해 놓았다.
바람개비 동산에서 20분 거리인 태기분교 터 일원은 1960년대에는 모두 화전민 집단 부락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에 화전민들이 처음으로 들어선 것은 1965년 9월이다. 당시 강원도의 화전민 정착사업에 따라 횡선군내에 흩어져 있던 74가구(399명·1968년 7월 통계)가 태기산으로 올라와 화전민 부락을 이루었다. 화전민들이 모여 살던 지역은 태기리泰岐里로 불리던 곳이다. 태기리는 1973년 7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갑천면에서 둔내면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1976년 4월 화전민 철수와 함께 행정공부行政公簿에서 사라졌다.
태기리가 둔내면으로 편입되기 전 태기분교는 1968년 갑천면 갑천리에 있던 봉덕초등학교 태기분교로 개교했다. 태기분교에는 이명순李明順(26세) 선생의 눈물겨운 노력과 아픔이 담겨 있다. 당시 이곳 화전민들의 어린이들 교육을 위해 헌신했던 이명순 선생님은 원주 육민관育民館고등학교를 나왔다. 이후 1976년 둔내면 덕성초등학교 태기분교로 폐교를 맞았다. 태기분교 터에는 1968년 분교 개교부터 폐교까지의 자료사진들과 당시 이명순 선생이 쓴 근무일지와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은 비품일지, 그리고 당시 교과서로 공부하는 학생과 화전민들 생활상 등을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화전집 터 헛간에서 공부하던 1965년도 이후 1970년도에 들어와 당시 박경원朴敬遠 강원도지사 지원으로 지어졌다는 100평 크기 분교 건물. 당시에는 산에 나무가 없어 신대리 성골 건너 봉복산(왼쪽)과 덕고산(오른쪽)이 보인다. 분교 터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 중 한 장이다.
헌신적인 희생정신으로 화전민 어린이들을 교육한 태기분교 이명순 선생님께 당시 수여된 횡성군 교육장(지금의 교육감)의 표창장.
신대리 종점~송덕사~작은 성골~태기산성 터~태기분교 터~정상 갈림길~11번 풍력발전기~태기산전망대〈약 7.5 km·3시간 30분 안팎 소요〉
신대리 주차장(무료) 겸 버스종점에서 동쪽 계곡방향길(들머리에 태기산 국가생태탐방로 안내판) 이 태기산으로 가는 길이다. 송덕사 합수점에서 왼쪽(북쪽)은 큰성골~주전골~낙수대 방면이다. 송덕사 합수점에서 동쪽 다리 건너가 태기산성으로 가는 길이다.
태기산성泰岐山城에 관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 권 153〉 횡성현조에는 ‘덕고산 둘레가 565보步, 높이 5척, 그 안에 시내가 한 줄기 흘러 마르지 아니한다. 또 군창이 2칸에 관청이 2칸 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또한〈동국여지승람 권 46〉횡성군조에 나오는 ‘덕고산성 석축으로 둘레가 3,563척, 안에 우물이 1, 군창軍倉이 있었으나 그 대부분이 무너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태기산성의 본래 이름은 ‘덕고산성德高山城’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태기산성 기념비에서 7~8분 올라가면 임도 사거리가 나온다. 임도 사거리에서 태기분교 터는 직진하는 능선으로 간다. 임도 사거리에서 오른쪽(남동쪽) 임도는 ‘청정체험길’이다. 이 길은 정상 남릉 바람개비동산으로 연결된다.
신대리에서 동으로 본 신대리 방면 태기산 전경과 정상(가운데 안부 왼쪽). 정상에서 왼쪽 8번 풍력발전기 밑에 태기산 전망대, 정상에서 7번 풍력발전기 오른쪽 살짝 돋아난 곳은 바람개비 동산이다.
신대리 종점~큰 성골~주전골~낙수대~정상길 입구~풍력발전기 11번~태기산전망대〈약 8.5km·4시간 안팎 소요〉
큰 성골 안으로 2시간 정도 가면 낙수대에 닿는다. 낙수대 폭포는 높이 약 15m 수직폭포이다. 이 폭포 오른쪽 상단부 공터에 옛날 봉복사 말사였던 낙수암落水庵이 있었다 전해진다. 낙수대 폭포에서는 옛날 태기왕 시절 왕궁 귀족들이 낚시를 즐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폭포 상단부 절터에는 묘 1기가 있다. 이 묘는 벌초를 제일 먼저 하는 사람이 산삼을 캘 수 있는 현몽現夢을 한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지금도 음력 8월이면 심마니들이 서로 먼저 벌초하려 경쟁한다고 한다.
낙수대 전망대(데크)에서 본 낙수대폭포 하단부. 사진에서 실제 폭포는 급경사 잡석지대 최상단부이다.
교통
동서울→횡성(버스편) 동서울터미널(전철 2호선 강변역)에서 1일 9회(06:50~19:10) 운행. 요금 1만1,300원. 1시간 30분 소요(무정차).
횡성→동서울 1일 9회(07:00~19:50) 운행. 직행=갈운리~풍수원~용두리 정차, 단월~양평 정차하지 않음.
열차편
서울역~청량리역→횡성역~둔내역 서울역에서 1일 16회(05:11~21:01) 출발. 이 열차는 21분 후 청량리역 정차(청량리역에서 1일 1회 출발하는 08:45발 열차도 있음) 강릉행 KTX 열차 이용, 횡성역 및 둔내역 하차. 유의점 : 이 열차편에서 횡성역만 정차 후 둔내역은 무정차, 또는 횡성역에서 무정차하고 둔내역에만 정차하는 열차들로 구분되어 있다. 열차요금 둔내 일반실 1만5,200원(경로 1만600원), 특실 2만1,300원(경로 1만6,700원, 입석 1만2,900원.
둔내→양구두미재 둔내 버스터미널에서 71번 군내버스가 화동리 종점까지 1일 2회(07:00, 19:15), 화동리 종점에서 둔내터미널로 2회(07:15, 19:30) 운행된다. 하지만 이 버스편은 종점에서 양구두미재까지 구 6번국도로 약 4km 거리 오르막으로 2시간 가까이 걸어야 된다. 외지인들에게는 거의 무용지물이다. 양구두미재를 넘나드는 대중교통편은 택시뿐이다.
둔내~양구두미재 택시요금 편도 2만3,000원 안팎. 20분 안팎 소요.
둔내 콜택시 (033-345-4000), 둔내 친절 콜택시(대리운전 겸함 010-9159-5000), 둔내 개인 택시부(033-342-2000), 둔내 유공 콜택시(010-5375-1723), 둔내 콜택시부(김용원 010-7123-5318), 둔내역 KTX 택시(심종삼 010-3779-0604) 등 이용.
횡성→신대리 〔군내버스〕청일 경유 1일 4회(06:25, 13:30, 14:05, 16:45) 운행. 55분 소요.
청일→신대리 〔마을버스〕1일 3회(08:45, 13:00, 15:50) 운행. 15분 소요.
신대리→횡성 〔군내버스〕1일 4회(07:20, 14:30, 15:00, 17:45) 운행.
신대리→청일 〔마을버스〕1일 3회(09:00, 13:45, 16:30) 운행.
태기산에서 양구두미재로 하산 한 경우 둔내역까지 택시 이용, 청량리역~서울역행 KTX 상행선 이용하면 편하다.
식사 및 숙박(지역번호 033)
둔내(자포곡리) 일원
둔내역 앞 둔내역 한우 신관(345-6677), 둔내역 정육식당 한우(343-7766), 황제 손짜장(342-2727), 횡성 한우피아(342-9940). 역에서 북서쪽 다리 건너 둔내면행정복지센터(둔내면사무소) 방면 부근 태기산 막국수(342-1072), 손칼국수 전문 대흥식당(343-9890), 이후 둔내터미널로 이어지는 식당 골목 안에 20여 곳에 달하는 식당들이 있다.
양구두미재 일원
양구두미재 고개마루 경찰전적비 옆 태기산 무이쉼터(010-5362-9993) 한 곳이 있다. 20여 년 전부터 조필기, 김영희씨 부부가 운영하는 무이쉼터는 드라이브, 자전거 여행 마니아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커피, 당귀차(각 1,000원), 칡즙(2,000원), 라면(4,000원), 감자전(6,000원), 감자옹심이(7,000원), 도토리묵(8,000원), 더덕구이, 버섯볶음(각 2만 원 ) 등을 판다. 무이쉼터는 트럭으로 만든 ‘밥차’형이다. 저녁에는 집으로 퇴근했다가 아침이면 고갯마루 현 위치로 출근한다.
신대리 일원
큰성골 안쪽 하늘 아래 첫집(010-9040-9458), 영구네 식당(344-3668), 맑은물 펜션(345-2320), 숲속의 집010-9078-7652), 둥그리펜션(010-9940-0105), 로뎀나무펜션(010-6293-1314), 신대리 종점 주차장에서 봉복사 방면 우리마을 쉼터(343-7165), 혜원네 민박(010-7240-5832) 등 이용.
신대리 토박이 주민인 김완수씨 왼쪽 뒤 사유지에 갇혀 있는 삼층석탑.
천대받는 신대리 삼층석탑
봉복사 소유도 아닌 사유지 울타리에 갇혀 접근 안 돼
태기산성 들머리인 신대리 주차장에서 북쪽 다리를 건너면 봉복사鳳腹寺로 가는 길이다. 북쪽 다리를 건너가면 곧이어 ‘우리마을 쉼터’라는 식당이 나온다. 식당 마당 왼쪽으로 20여 m 거리 농가 뒤란으로 돌아서면 널찍한 밭 가운데 약 40m 전방으로 삼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60호)이 보인다. 삼층석탑이 자리한 밭은 탑둔지塔屯地라는 곳이다. 탑둔지는 본래 봉복사 건물들이 자리했었다고 한다. 현재 봉복사 대웅전 등 주요 건물들은 탑에서 북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있다. 그런데 이 탑둔지 절터가 사유지라는 이유로 사방이 울타리가 쳐져 삼층석탑을 가까이 가서 볼 수 없다.
석탑 옆 농가 주인 김완수(55)씨는 “탑둔지가 봉복사 땅도 아니고, 사유지 땅주인이 울타리로 막아 탑에 가까이 접근이 안 되어 안타깝다”고 말한다.
삼층석탑과 인연이 있는 봉복사는 횡성군 현존 사찰들 중 가장 역사가 오래 된 사찰이다. 신라 선덕여왕 말기인 16년(647년)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이후 문무왕 9년(669년)화재로 소실된 것을 문무왕 11년(671년) 원효조사가 중건했다. 이후 360여 년이 지난 고려 덕종 3년(1,034년) 말사들인 낙수암, 천진암, 반야암, 해운암 등이 소실되었다. 조선 영조 23년(1747년) 서곡선사가 중건했다. 구한말에는 의병들이 머물면서 일본군과 싸운 곳이다. 이후 광무 10년(1906년)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지고, 1907년 취운翠雲이 중건했다. 그후 1950년 6.25 전쟁 때 불 탄 것을 중창해 오늘에 이른다. 삼층석탑은 이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전통사찰 제 14호인 봉복사는 조계종 제 4교구인 월정사 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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