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군정부.
개설
서간도의 무장 항일 운동 단체가 결성한 군정부(軍政府).
연원 및 변천
1910년을 전후하여 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김창환(金昌煥) 등이 교포들의 자치 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애국 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한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경학사는 1912년 부민단(扶民團)으로, 1919년 한족회(韓族會)로 발전하고 5월 산하에 군정부를 설치하였다. 즉, 유하(柳河)·통화(通化)·흥경(興京)·환인(桓仁)·집안(集安) 등 남만주 각 현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들이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항일 운동 단체의 통일 기구 결성을 결의, 남만주 일대 독립 운동 총본영으로서의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안정근(安定根)·왕삼덕(王三德, 본명 金炳憲)의 제의로 서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독판부(督辦府) 독판 이상룡, 부독판 여준(呂準), 정무청장 이탁(李沰), 군정청장 양재훈(梁在薰,일명 梁圭烈), 내무사장(內務司長) 곽문(郭文), 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 재무사장 남정섭(南庭燮),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참모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지청천(池靑天) 등으로 구성되었다.
기능과 역할
군정서의 첫번째 사업은 1919년 5월신흥중학교(1913.5, 신흥강습소의 후신)를 무관학교로 개편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고 소속 독립군을 편성하는 일이었다. 개편된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에는 이세영(李世永), 연성대장에 지청천, 교관에 오광선(吳光鮮)·신팔균(申八均)·이범석(李範奭)·김경천(金擎天) 등이 선임되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 2,000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써 독립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특히, 평안북도 한만 국경지대에 출동하여 일본군과 자주 교전하였으며, 백광운(白狂雲)의 제1중대는 가장 강력한 부대로 병력이 800∼9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군정서의 주요 활동은 1919년 5월 삼수군(三水郡)의 영성주재소(嶺城駐在所) 습격, 7월 강계군의 삼강주재소(三江駐在所)와 문옥면사무소 습격 등 일제 식민통치기관 파괴활동 및 친일파 후창군수 계응규(桂應奎)를 비롯한 민족반역자의 색출·처단 등이었다.
1920년 일제의 대병력이 침습하자 군사 기지를 안도현(安圖縣)으로 옮기고, 지청천이 이끄는 무관학교 학생 도수부대(徒手部隊) 300명은 안도현 삼인방(三因坊)에서 홍범도(洪範圖) 부대가 제공한 무기로 무장하였다.
1921년 만주에 설치된 친일 단체 보민회(保民會)를 토벌하여 해체시켰으며, 일본 거류민회를 습격하여 1922년까지 유하현·해룡현 등의 친일 기관들을 완전 소탕하였다. 1923에는 강계군 어뢰면의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파괴하고, 강계·후창 등지의 영림서(營林署)와 광산을 습격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와 같은 항일 투쟁에 희생된 독립군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1922년 8월 추도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군정서의 재정은 한족 회원의 의무적인 헌금으로 유지되었는데, 국내 경상도 지방에서는 재정 후원을 위한 비밀 결사가 조직되었다. 즉, 신태식(申泰植)·김찬규(金燦圭)·이응수(李應洙) 등이 조선독립운동 후원 의용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1922년 2월 보다 효과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각 단체 통합 운동이 일어나고, 그 결실로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보합단(普合團)·광한단(光韓團) 등 여러 군단을 통합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조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