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문화 답사 자료(2023. 11. 21)
경상북도에서도 가장 오지인 영양지역을 몇 년 전에 우리 카페에서 한번 답사한 적이 있다. 아직도 영양에는 신호등이 없을 만큼 인적이 드문 곳이라 초등학교 사회시간에 교통신호를 공부할 때 많은 애로를 겪는다고 한다. 인구수는 1만 5천 여명 정도이고, 옛부터 영양 토호(土豪)가 영양 남씨, 함양 오씨, 재령 이씨, 한양 조씨 등 4개의 성씨가 주축으로 세거지를 형성하면서 명문가를 이루웠다. 그러나 작은 규모의 군이지만 다양한 역사적으로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한 지방이기도 하다. 구한말 항일의병장으로 활동한 벽산 김도현 선생이 만든 검산성과 영화 '암살'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지경마을의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선생 등 독립투사를 많이 배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지방은 독립운동가만큼이나 유명한 시인과 학자, 소설가 등을 배출하여 전국에서 문학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문향(文鄕)이기도 하다.
특히 현대시의 완성이요, 근대시의 시초로서 문향의 향취가 가득한 조지훈 시인의 주실마을과 오일도 시인의 감천마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으로 유명한 한국 문학사의 거목 이문열 작가의 고향인 두들마을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간직한 마을이기도 하다. 주실마을은 예로부터 재물과 사람, 글[문장]은 남에게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의 마을'로 전통이 있는가 하면, 두들마을에는 현존하는 최고 한글 조리서인 장계향 선생의 음식디미방이 존재하여 전통주부터 상차림까지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 그리고 특히 영양 고추는 국내 생산량의 5% 정도를 차지하지만 그 명성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흔히들의 얘기지만 다른 시 군의 고추도 차에 싣고 영양지방을 한바퀴 돌고 오고는 영양고추라고 우긴다니 이 또한 웃지 못할 헤프링이다.
1. 선바위•서석지 : 영양 입암면 영양로 863-16 선바위는 경상북도 영양군지에 자양산의 끝인 자금병과 석문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고 하였다. 이 바위는 옛부터 「입암(立巖), 신선바위, 선바우」라고도 하였고, 선바위와 남이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입암[일명 선바우]
이곳 운룡지(雲龍池)에 사는 용인 지룔은 아룡과 자룡이라는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이 두 아들이 무리를 모아 작당하여 반란을 일으켜 역모를 꾀하자 조정에서는 남이장군을 보내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남이장군이 이곳까지 내려와 야룡과 자룡을 물리쳤지만 도적의 무리가 다시 일어날 것 같아서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다고 하는데 그 마지막 흔적이 선바위라고 한다. 근처에는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이 남긴 16수의 시는 이곳 정취를 깊게 담았으며, 바위는 동쪽의 영등산과 북쪽의 일월산, 청기천의 맥이 서로 만나 세 갈래의 기가 응집되는 형상으로 연당마을의 입구는 서석지 외원의 중심이다. 이는 태극 형상의 꼭짓점으로 해와 달, 사람의 정기가 모여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여 신선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입석(立石)
六鰲骨未朽(육오골미후) : 매우 큰(여섯 길) 거북의 뼈가 썩지 아니하고 撐柱五雲層(탱주오운층) : 다섯 길 층계 위에 기둥 되어 버티어주니 杞婦獨癡絶(기부독치절) : 기(杞)나라 아녀자들이 미치듯이 절규하며 謾憂天或崩(만우천혹붕) : 하늘 혹시 무너질까 헛되이 근심하네.
집승정(集勝亭)은 선바위 뒤편 부용봉길 아래에 있던 정자로 광해군 5년 계축옥사 때 선조의 고명칠대신(顧命七大臣)의 한 사람으로 안동 일직 소호헌(蘇湖軒) 출신의 약봉(藥峯) 서성(徐渻)이 이곳으로 귀양 와서 7년간을 살면서 수시로 석문 정영방 선생과 더불어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고 시를 읊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훼손되어 없어졌다. 그러나 다시 사각 지붕의 '남이정(南怡亭)'이라는 이름의 한 채가 옛 모정(茅亭 : 띠로 덮은 지붕의 정자)의 사연을 전해주고 있다.
집승정(集勝亭)
集勝亭 在立石上(집승정 재입석상) : 집승정 입석 위에 있다
爲待漁舟子(위대어주자) : 고깃배 기다리다 巖扉夜不扃(암비야불경) : 밤에도 바위 사립 잠그지 않았네 淸宵林下見(청소림하견) : 맑은 밤 숲 내려다보니 月滿集勝亭(월만집승정) : 집승정에는 달이 가득 찼도다. 집승정 뒤편 강 건너의 자양산 남쪽 끝자락에 있는 깎아지른 절벽과 전면 좌측 부용봉 아래 위치한 절벽은 마치 커다란 병풍을 둘러친 형상으로 연당마을을 포근하게 품어줌으로써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고 복을 가져다주어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자금병(紫錦屛)
영양의 서석지(瑞石池)가 있는 연당마을로 가기 위해 국도를 달리다 보면, 일월산 동쪽 용화동에서 발원하는 반변천(옛 이름 가지천) 큰 물줄기와 또 일월산 서쪽에서 발원한 청계천이 자금병 앞에서 합류하는데, 이 두 물머리를 남이장군의 전설에 따라 '남이포(南怡浦)'라 부른다. 풍수지리학에서 명당은 배산임수(背山臨水 : 산을 등지고 앞으로 물을 내려다보는 지세를 갖춘 터), 전착후관(前窄後寬 : 출입구가 좁고 안은 넓은 터), 사신사(四神砂 : 전후좌우에 있는 네 개의 산으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전주작(前朱雀), 후현무(後玄武)를 고루 갖춘 터다. 영양 서석지는 석문(石門) 정영방이 1613년(광해군 5년)에 축조한 민간 연못과 정자로 이런 조건을 두루 갖춘 명당 중의 명당이다.
서쪽의 구릉 밑에 흰 돌이 서 있는 곳에 못을 파고 서석지라 이름을 짓고, 연못의 주위에 돌출된 석단을 만들어 사우단(四友壇)라 이름 지어 송죽매란(松竹梅菊)를 심었다. 연못의 물은 북동쪽 귀퉁이로 흘러들어와 남서쪽으로 흘러나가게 되어 있으며, 연못 안에는 60여 개의 돌이 있는 데, 이를 서석(瑞石 : 상스러운 돌)이라고 부른다.. 이 중 19개의 돌은 제각기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1979년 12월 31일 대한민국의 중요 민속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남해 보길도의 세연정과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민간 정원으로 꼽힌다. 정자인 경정(敬亭), 서재인 주일재(主一齋), 그리고 서하헌(棲霞軒), 수직사(守直舍) 등을 함께 축조하였다. 경정(敬亭)은 여러 차례 중수한 정자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을 넘었다. 마루 위에는 정기(亭記), 중수기(重修記) 경정운(敬亭韻) 등 당시의 대명절의(大明節義)로 이름난 명사들의 시가 걸려 있다.
영양 서석지
경정(敬亭) 有事無忘助(유사무망조) : 일이 있으면 돕기를 잊지 말며 臨深益戰兢(임심익전긍) : 깊은 물에 선 듯 더욱 전전긍긍하라(조심하라) 惺惺須照管(성성수조관) : 깨닫고 깨달아 반듯이 훤히 관장하고 毋若瑞巖僧(무약서암승) : 서암승(심성 수양을 하지 않고 참선만 하는 서암의 중) 같이 되면 아니 되느니라
석문 정영방 (鄭榮邦, 1577~1650) )은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이다. 홍문시독(弘文侍讀) 정환(鄭渙)의 현손으로 예천군 용궁면에서 태어났다. 1599년(선조 32년) 우복 정경세(鄭經世)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강학으로 소일할 때 그가 먼저 찾아가 수학했으며, 이후 학문정진하여 용학(庸學 : 중용과 대학)과 경전(經傳 : 시경, 서경, 역경= 주역)에 통달했다. 1605년(선조 38)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을 때 이조판서가 된 정경세가 그의 학문을 아깝게 여겨 벼슬을 천거하였으나, 광해군의 실정(失政)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길을 사양하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성리학과 시에 능통하였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이후 국사가 어지러워 정영방은 고향에서 넷째 아들인 임천 제(臨川 悌)를 데리고 영양군 입압면 연당리로 이주하여 산자수명한 자연을 벗 삼아 지냈다. 그는 이곳에 연못을 파고 서석지(瑞石池)라 이름 짓고, 그 위에 경정(敬亭)을 지었다. 영양현이 페지 되었을 때 1633년에 다시 영양현이 복현(復縣)될 수 있도록 상소를 올려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서석정 은행나무
영양군 입암면 신구리의 선바위관광지내에 있는 영양분재야생화테마파크는 2002년 5월에 준공한 분재수석야생화전시관을 영양분재야생화테마파크로 확장하여 2013년 11월에 준공하였다. 제1 전시관과 제2 전시관은 분재와 야생화를, 제3 전시관은 수석을 전국 최대 규모로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영양분재야생화테마파크
이곳을 찾는 이들은 가족 단위의 체험장으로도 손색이 없다. 수령 450여 년의 주목을 비롯해 200년 이상의 모과, 적송, 단풍나무 등의 분재와 폭포석, 금낭화, 매발톱꽃 등 야생화 5천여 본이 위용의 자태와 운치를 뽑내며 전시되어 있다.
제1전시관
그런 분재와 수석 및 야생화는 일원산에서 자생하는 것들로 대자연의 축소판이다. 일월산과 반변천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직하형, 계류형, 굴곡형, 바위형 등 다채로운 폭포석은 검은 돌에 우윳빛 석영이 세로로 박힌 희귀종으로 수석 애호가들의 관심 속에 연중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 영양 산촌생활박물관 : 영양 입암면 영양로 963 영양군 여행에서 만나는 입암면의 영양산촌생활박물관도 그 규모가 상당하여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상설전시실, 전통생활 체험장, 전통문화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전경
특히 이곳에서 우리 귀에 익숙한 전래 이야기를 조형물과 함께 만날 수 있다. 초등학교 교서서에 나오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로 어느 마을에 가난하지만, 서로를 아끼고, 보살펴 주는 사이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다. 가을이 되어 볏단을 수확한 뒤 집으로 간 형님은 아우를 생각하고 아우는 형을 생각해서 밤에 몰래 자신의 볏단을 서로 나락 가리에 옮겨 놓았던 이야기 등이다.
의좋은 형제
이외에도 별주부와 토끼, 견우와 직녀, 선녀와 나무꾼, 잉어가 감동한 효자, 강도가 감동한 효자, 호랑이가 감동한 효부, 효녀 심청,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까마귀가 감동한 효자, 호랑이와 곶감, 흥부와 놀부, 호랑이가 구해준 효자 이야기 등은 주로 이곳 영양지방과 관련이 있는 소재 중심으로 조형물과 함께 설치하였다. 또, 이곳은 전통생활 체험장 구역에 연자매를 돌리는 황소의 모습을 조형물로 설치하여 투방집을 만들어 놓았다.
투방집
투방집은 둥근 통나무로 우물틀처럼 쌓아 올려 짧은 시간에 만든 집으로 ‘투막집’,‘방틀집’,‘틀목집’,‘귀틀집’ 등 지역에 따라 다른 속칭이 있다. 시골에서 중산층이 지어 살던 홑집으로 지붕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짚이나 억새 등으로 덮었다.
굴피집
굴피집은 굴피나무 껍질로 지붕을 덮었다고 해서 '굴피집'이라고 부른다. 산골에서 투방집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비교적 잘 사는 부자들의 겹집으로 집안에서 대부분의 생활이 가능하도록 다양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3. 주사골 사무나무와 비술나무 : 영양 석보면 주남리 산 82-1 영양 석보면에 있는 시무나무와 비술나무 자생지는 2007년 2월 21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마을의 풍치 조성과 방풍 및 수해 방비 목적으로 17세기에 조성된 숲이다. 전체면적이 9필지에 18,594㎡ 정도다.
주사골 시무나무와 비술나무숲
주사(做士)골은 예전에 강씨 집성촌이었으나, 대홍수로 마을 사람들이 타지로 떠나버렸다. 이후 주곡공(做谷公) 이도(李櫂:1636~1712)와 주계공(做溪公) 이용(李榕:1640~1693) 형제가 들어와 주남리 마을을 개척하면서 풍치 조성과 방풍, 수해 방비를 위하여 이 숲을 조성했다고 주사골이라는 지명은 이들 형제의 호를 따른 것이라고 한다. 주사골의 숲에는 시무나무와 비술나무 외에도 팽나무·산팽나무·산뽕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120여 그루 자라고 있다.
영양 주사골 시무나무
이 숲은 자연재해로부터 마을을 보호해주는 방재의 숲이며, 마을 공원으로 이용되는 정자숲이고, 마을의 경관을 아름답게 해주는 풍치의 숲이며,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지내는 신앙의 공간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역사적·문화적으로 그 가치가 마을의 큰 숲이다. 느릅나뭇과에 속하는 시무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며, 비교적 재질이 단단하고 치밀하여 수레 차축의 재료로 많이 쓰였다. 우리나라와 중국·몽골에서 자라며, 세계적으로는 희귀종이라고 한다. 또한, 느릅나뭇과에 속하는 비술나무도 큰 키로 자라며, 이 나무도 우리나라의 중부 이북과 중국·몽골·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자라고 있으며, 목재는 건축재와 선박재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4. 졸참나무와 당숲 : 영양 수비면 송하리 274 영양군 수비면 송하리 매봉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당숲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는 당나무가 있는 숲을 일컫는다. 202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당숲은 졸참나무 3주, 말채나무 1주, 느티나무 36주, 소나무 27주로 총 67주의 나무들로 이루어져 있는 숲이다.
영양 수비 졸참나무와 당숲
졸참나무는 수령은 250년 정도로 추정되며, 생육 상태가 좋고 수형도 아름다워 당숲을 이루는 67주의 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과 음력 8월 15일에 마을의 안녕과 반영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올리고 있으며, 졸참나무 주변으로 말채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등이 한데 어우러져 당숲을 이루고 있다. 평소에 나무나 풀에 대해 상식이 문외한인 필자지만 본 카페 회원들과 함께 답사하면서 참나무 종류가 6 가지가 있다고 주워 들었으나 졸참나무는 물론 다른 참나무도 아직 구별하기 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이곳 졸참나무와 당숲은 경관적 가치가 클 뿐 아니라, 이 지역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당숲이라는 점과 당산제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향토사적 가치를 인증받아 2021년 11월 17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5. 감천 측백수림 : 영양읍 감천리 415-1 기묘한 바위와 수림이 어울려 신비로움이 가득한 영양읍 감천1리 마을 앞에 끼고 도는 반변천의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 도도히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보며 붙어있는 측벽수림은 흡사 병풍과 같아 선명한 날에 물 위에 비추는 그림자는 신선이 노니는 곳이 따로 없을 것 같다.
맑은 강에는 메기와 잉어ㆍ붕어ㆍ쏘가리가 한껏 힘을 자랑하며 감천보를 뛰어오르고, 절벽 건너편 마을에는 한가로운 마을숲이 한껏 오수에 잠들 때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소슬바람에 옷깃을 여민다. 측벽에 매달린 소나무ㆍ단풍나무ㆍ산벗나무가 유달리 빽빽한데 측백수가 들어선 석벽에는 기묘한 바위와 수림이 어울려 신비롭기만 하다.
영양읍 감천리 측백수림
옛부터 측백나무는 층계 사이사이에 자생하여 곳곳에 무성한데, 이 측백은 이곳에만 집단으로 자생하였다. 대구 동구 도동의 측백수림(천연기념물 제1호)과 이곳 감천리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식물학상 희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옛날 어려웠던 시절에는 이 신비로운 곳에 자생하는 측벽수가 만병통치약으로도 사용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병원이 없어 치료받을 수가 없고, 병원이 있어도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한 가난한 농촌에서는 이 측벽수 가지와 잎을 삶아 먹으면 부인병(대하증)에 좋다는 소문이 나돌아 멀리서도 이 측벽나무를 구하러 오는 이가 많았다. 그러면 마을에서 수영도 잘하고 절벽도 잘 타는 힘 있고 젊은 청년들이 손님들의 주문을 받아 허리에 새끼끈을 감는다. 또 한 손에 낫을 들고 반변천의 강물을 헤엄쳐 건너가 절벽 귀퉁이를 한 손으로 잡고 간신히 석벽을 올라가 보는 이의 마음이 조마조마하게 한다.
혹시나 부정이라도 탈까 ‘신이시여 굽어살펴 주소서.' 마음속으로 무사히 측백수를 잘라 오도록 비는 아픈 사람의 가족은 무사히 좋은 약재를 구하여 오기만을 고대한다. 다행히 측백가지를 몇 가지 자르면 가기고 갔던 새끼로 묶고 또다시 허리에 찬 후 낫은 잎에 물고 두 손으로 강물을 끌어당긴다고 한다.
6. 주실마을(조지훈 생가 호은종택) : 영양 일월면 주곡리(일명 주실리) 영양 주실마을은 400여 년이 된 한양 조씨의 집성촌이다. 원래는 주씨가 살았지만, 조선 중기 조광조 선생의 친족 후손인 호은 조전 선생이 사화를 피해 정착하게 되면서 주곡리의 입향시조가 되었고, 또, 주실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처음 정착한 조전 선생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 매를 날린 후, 매가 날아가다가 앉은 자리에 집터를 잡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국전쟁으로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1963년 중건되었다. 마을 중간에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 선생의 생가이기도 한 호은종택(경상북도기념물 제78호)이 자리 잡고 있다. 조지훈(趙芝薰, 1920~1968)의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며, 그리고 지훈은 그의 호이다. 그러나 호가 그의 이름보다 더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 이후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수필가, 한국학 연구가, 청록파 시인 중 한 사람으로 경상북도 영양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치고서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국어국문학과를 나온 그는 1939년《문장》지에 〈고풍의 상〉과 〈승무>를 추천받아 문단에 등장하였다. 광복 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와 동국대학교 강사,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듬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장에 취임하면서 민족문화개발에 주력하였다.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인 조지훈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건립한 ‘지훈문학관’의 현판은 부인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쓴 글씨라고 한다. 특히 조지훈 시인의 대표적인 시 <승무>와 다양한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지훈문학관
특히 주실마을의 문필봉은 그 봉곳한 생김새도 그렇지만 옆으로 물길까지 끼고 있어 붓에 물이 더해지는 최고의 지형으로 손꼽히며, 작은 시골 마을에서 14명의 박사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또 조지훈의 삼남인 조태열은 외교부 차관을 역임하고, 주 UN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로 재임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조지훈의 시 <승무>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유명세를 날렸다.
조지훈 시인
승무(僧舞)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 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은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범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명시를 많이 남긴 조지훈 선생은 주로 자연, 무속, 선을 소재로 한민족다운 색채가 짙고 불교 세계를 향한 관심은 종교의식을 일깨워 작품에 반영되었다. 박목월과 박두진을 비롯한 다른 청록파 시인이 후에 시의 세계를 근본으로 변혁했는데 조지훈은 초기 자연과 친화한 시를 많이 유지하였고, 1956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로도 활발히 문학 활동을 하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68년 5월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 고혈압과 기관지확장증 합병증으로 49세의 젊은 나이로 끝내 타계했다. 또한, 1937년 사망한 시인 조동진이 바로 그의 형이며, 시집으로 《청록집》과 《조지훈 시선》이 있고, 수필집 《창에 기대어》, 논문집 《한국 민족 운동사》가 있다. 또, 조지훈 시인의 부친인 조헌영(趙憲泳, 1901~1988)은 영양보통학교, 대구고등보통학교, 일본 와세다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와세다대학 재학 중 재일조선인학우회 대표, 신간회동경지회장 등을 지냈으며, 1931년 신간회가 해체된 뒤에는 한의학연구에 몰두하여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를 개설하였다. 이때의 연구로 근대한의학을 개척하여 현재 우리나라 한의학의 기초를 수립하였다. 또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한의학자, 정치인, 대한민국 제헌국회 및 2대 무소속 국회의원 등 한의학계에 남긴 업적 또한 엄청나다. 특히 1950년 보건의료 행정법안의 제1장 총칙의 의료인 규정에 서양 의사 제도만 두고 한의사 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앞장서서 폐지에 힘썼다.
그 후, 북한에 납북되어 북한의 최초로 동의학(남한의 한의학에 해당) 박사가 되었으며, 동의보감 국역을 주도하기도 하는 등 현재의 한의학이 있기까지 큰 공헌을 하였고, 북한 내에서도 여러 고위직을 맡으며 대학교수로 활동하는 등 88세까지 장수하였는데 둘째 아들인 조지훈 선생보다 20년을 더 살았다. 옥천종택은 옥천 조덕린(1658~1737)의 생가로 조선 후기에, 교리, 사간,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자는 택인(宅仁), 호는 옥천(玉川)이다. 바로 조지훈 선생의 선대이다. 그의 아버지는 충의위(忠義衛) 조군(趙頵)이며, 1678년(숙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6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소론의 당론이 거세지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 조의 상소를 올렸으나, 노론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어 당쟁을 격화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옥천종택
그는 70여 세의 나이로 3년간의 귀양 끝에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 응교(정 4품)에 제수되었으나, 서울에 들어와 고사한 다음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조선 영조4년(1728) 3월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내전(內戰)인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에 피임, 격문을 돌리고 일로(一路)의 의용병을 규합하여 대구로 내려갔으나, 난이 평정되자 파병(罷兵 : 병사를 헤쳐 보냄)하였으며, 이 공로로 동부승지(정 3품)에 임용되고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얼마 뒤 병으로 사직하고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린 채 다시 환향하여 학문에 몰두하자 원근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736년 서원의 남설(넘치도록 마구 세움)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1725년의 상소와 연관되어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로 유배 중 강진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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