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忠義) [이서(李𥳕) 등]
선생은 국상(國喪)을 두 번 만났는데, 비록 질병과 노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소상(小祥) 이전에는 술과 고기 먹는 것을 폐하였다. - 이서(李𥳕) -
신묘년(1591, 선조24)에 선생은 통천 군수(通川郡守)로 제수되었다. 이때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켜 각 고을이 와해되고 삼경(三京 경주, 한양, 개성)이 적에게 함락되었으며, 대가(大駕)는 피난을 떠나고 감사와 수령들은 모두 산골짜기로 도망가 숨었다. 선생은 ‘감사나 수령 등 지방관은 마땅히 자기의 경내에서 죽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지니고서 마침내 적을 토벌하자는 대의를 앞장서서 부르짖고 각 고을에 격문을 보냈다. 정성을 다해 백성들을 효유하여 정예병을 불러 모아서는 적의 소굴을 드나들며 온갖 곤란과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관북(關北)의 토병(土兵)이 왜적에게 붙어 난동을 부림으로써 왕자와 재신(宰臣), 수령들이 그들에게 잡혀 포로가 된 자가 많았다. 선생은 고립된 군사로 적과 대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위험하게 여겼으나 관리와 백성들이 온 정성을 다해 감싸고 보호해 주어 끝까지 아무런 탈이 없었다. - 최항경 -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는 상소는 어찌 간단명료하고 과격한 것만 추구해서야 될 것인가. 정성스럽고 간곡하게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서 나라로 하여금 그 경사를 누리게 하고 백성에게는 그 은택을 입도록 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이런 까닭에 정사년(1617, 광해군9)에 올리려다가 그만둔 상소에서 자전(慈殿 인목대비(仁穆大妃))이 무함을 당한 사실을 직언하지 않고 완곡하면서도 자세하게 정성을 다해 아룀으로써 조금이나마 임금이 잘못을 깨우치기를 기대하였던 것인데, 유약(柳瀹)의 상소에 대해 내린 비답의 내용을 듣고 결국 그 초고를 태워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대인군자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의리를 무엇보다 선생의 이 상소를 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배상룡 -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선생은 대군(大君) 이의(李㼁)의 역변(逆變) 소식을 듣고 장차 대궐로 들어가기 위해 올라가다가 옥천(沃川)에 이르러 병세가 심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이리하여 소장을 올려 은의(恩義)를 보전하는 도리를 극론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자들이 모두 위험한 일이라고 여겼으나 선생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왕명이 내려오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 이서 -
계축년 소장을 봉해 올릴 당시에 사람들이 매우 위험하게 여기고 문인과 자제들이 번갈아 찾아와 울면서 말렸으나 듣지 않고 이르기를, “그대들은 나를 사랑하여 만류하지만 나는 나의 임금을 사랑하여 그만둘 수 없다. 이 또한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가 똑같은 도리이다.” 하였다. 마침내 점괘를 뽑아 볼 것을 청하여 두 번 점괘를 뽑았는데 다 둔괘(遯卦)를 얻었다. 자제들이 주자(朱子)가 둔괘를 뽑고서 상소 초고를 태워 버린 뜻으로 극력 만류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나는 이제부터 은둔한 노인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하였다. - 이천봉(李天封) -
무오년(1618, 광해군10) 대비(大妃)를 폐위하자는 논의가 한창 터져 나올 때 선생은 고질로 신음하고 있었는데, 천장을 우러러보고 한탄하면서 앉으나 누우나 편안해하지 않았다. 내가 평상 아래 엎드려 말하기를, “바깥사람들은 선생께서 이번에도 차자를 올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선생은 이때 안석에 기대 글을 보고 있었는데, 그 글을 다 본 뒤에 좌우의 사람을 불러 부축해 일으키게 하고 관을 바르게 쓰고서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에는 예법이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죄인으로 석고대죄할 처지이다. 어찌 감히 법을 무시하고 차자를 올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수의(收議)의 명이 내려오면 그 일의 부당함을 극구 말하려 하였지만 그 명은 끝내 내려오지 않았다. - 배상룡 -
선생은 비록 강호에 처해 있었으나 세상을 아예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일찍이 ‘임금을 사랑하여 세도 태평 바라고 나라를 걱정하여 풍년을 기원하네.〔愛君希道泰 憂國願年豐〕’라는 글귀를 써서 문과 벽에 붙여 놓았다. 가끔 국사로 인해 한탄하면서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다. - 이천봉 -
일찍이 노곡(蘆谷)으로 가서 선생을 뵈었더니 먼 여행을 다녀온 뒤인데도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밤이 되어 등불을 밝히고 상소문 초고를 꺼내 보여 주므로 읽어 보니, 말씀이 엄중하고 의리가 치밀하여 광명정대한 힘이 글 전체에 넘쳤다. 충성과 절의가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문장의 정종(正宗)이라 할 만도 하였다. - 손처눌(孫處訥) -
폐조(廢朝 광해조(光海朝)) 초년에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선생은 두 번에 걸쳐 은의(恩義)를 보전하라는 내용의 차자를 올림으로써 결국 시론(時論)과 크게 어긋나 벼슬을 버리고 초야로 돌아와 장차 그대로 일생을 마칠 듯이 하였다. 그러다가 계축년(1613)의 변이 일어나 적신(賊臣) 정조(鄭造)와 윤인(尹訒)이 대비를 별궁에 유폐하자는 논의를 앞장서서 주장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칠 의도로 억울한 누명을 씌워 얽어매는 등 온갖 짓을 다하였다. 선생은 몸은 비록 초야에 있으나 나라에 큰 변이 일어난 판국에 뒤로 물러나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연이어 두 통의 차자를 올렸다. 그 내용은 춘추 시대 때의 영부(佞夫)의 고사를 인용하여 반복해 가며 비유하면서 모자간의 지극한 정을 극구 말하고 순 임금처럼 간곡한 효성을 다할 것을 청하였는데, 말이 완곡하고 의리가 곧아서 한 글자 한 구절도 지성과 불쌍히 여기는 뜻이 배어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리하여 윤리가 이미 끊기고 사라진 뒤에 부지하고 소용돌이치는 물결 속에서 지주산(砥柱山)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온 나라 신료들 중에 어느 누구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던 때의 일이었다. 선생의 순수하고 바른 학문과 정밀하고 깊은 조예와 정당한 논의와 분명한 거취는 오현(五賢) 이후 첫째가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 이윤우(李潤雨) -
[주-D001] 영부(佞夫)의 고사 : 주 경왕(周景王) 30년에 담괄(儋括)이 모반하여 왕자 영부(佞夫)를 옹립하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도망가고, 영부는 자신이 옹립될 것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으나 혐의를 받고 윤언다(尹言多)와 유의(劉毅) 등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일을 말한다. 《춘추》에서는 경왕이 아우를 죽였다고 기록하여 천륜을 저버린 경왕을 책망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30年》
[주-D002] 오현(五賢) :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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