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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0장은 종교의식과 내면적인 신앙의 관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1절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형제들아... 알기를 원한다’
언제나 바울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은 무엇인가 핵심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자셉니다.
9장의 마지막 부분이 10장의 문입니다(9장26-27절)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미워하는 건 주안에서 자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고전9장1-4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당시 체험한 역사적인 사건들입니다.
이 부분은 바울의 특이한 성경관입니다. 세례, 신령한 식물 곧 영의 양식입니다.
육적인 것이 아닌 식물, 신령한 반석 이런 것들 자체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기본적인 신앙의 상태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다 알다시피 애굽에서 광야로
나오는 것입니다. 홍해의 물에서 이스라엘은 구원받고 애굽 군대는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세례는 죽을 것은 죽고 살 것은 사는 것입니다. 율법의 종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다시 사심으로 해방이 되어 아들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바로 세례의 의미입니다.
고전10장은 히6:4절 이하와 연관성이 있습니다.
고전10:11절 ‘이스라엘은 말세를 만난 우리의 본보기 곧 거울입니다.
(튀포스- 본, 거울, type)
5절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은 많은 수를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중에서 기쁨을 얻으실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하심은 가치 없는 것은 뽑아 버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맛없는 소금을 내다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6절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곧 이스라엘이 거울이 되었습니다. 바로 모델입니다.
교훈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모델입니다. 교훈은 반사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악을 즐겨하다’는 갈망한다는 뜻인데 갈망은 욕심을 부리는 행위의 표현입니다.
1-4절 과정을 거쳐도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신령한 양식을
먹고 반석을 통해 신령한 물을 마셨지만 신앙의 의식과 실제내용에 다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광야로 나온 것은 형식만 거친 것일 뿐 아직 애굽의
노예근성이 출애굽되지 않았습니다. 몸만 광야로 뛰어 나온 것입니다.
7-8절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간음,
9-10절 이스라엘의 시험과 원망이 나옵니다.
이 두 사건의 연관성과 공통점이 무엇인가?
1) 하나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것입니다.
2) 다른 하나의 공통점은 자만입니다. 된 줄로 아는 것입니다(12절)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하십니다
성경에서 간음과 우상숭배는 언제나 같이 나오는 한 세트입니다.
7절은 출32장의 사건으로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8절은 민25장의 사건으로 모압 여인의 종교적인 축제에 참여한 사건입니다.
종교적인 참석은 바알브올을 숭배하는 의식입니다.
이방 종교적인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영육의 간음이 됩니다.
민25:1절 우상숭배와 간음은 그 당시 종교적인 축제의 프로그램입니다.
인간은 먹을 것이 있으면 축제를 벌여 말썽이고 없으면 시험하고 원망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육신적이요 자만입니다. 예컨대 못된 자식에게 돈 안주면
징징거리고 돈을 주면 가는 곳이 뻔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거울입니다. 있으면 놀고 없으면 울고 붑니다.
9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민21:5절 이하
에돔 땅을 우회하여 돌아가게 되니 그만 원망합니다.
10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민14:2절 이하 10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다음의 이스라엘의 반응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가히 폭동입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다른 것은 이스라엘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 관계를
끊지 않은데 비해 이방인은 금방 하나님과 관계를 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도망가면서도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요나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 중에는 무슨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까마귀처럼 돌아오지 않습니다.
신앙은 항상 비둘기처럼 귀소성이 강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하리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비둘기(요나의 이름의 뜻)는 돌아오지만 까마귀는 멀리 날아 가버립니다.
인간의 도적적인 문제와 신앙적인 근거를 결부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덕은 도덕이고 신앙은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출발할 때는 일단 분리시킨 다음 출발을 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믿음이 결국 능동적인 행함의 열매로 나타날 때까지 피차 기다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당시는 번식이 최대의 축복이므로 축제 때는 반드시 간음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울과 아세라는 바로 다산과 다수확의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신의 축제에
참여하는 것과 간음 사건을 같이 봅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그 대표적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도 보통 파티는 거기까지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적인 축제를 즐기려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문제는
종교적인 축제 곧 도덕적 향락이 무섭습니다. 이건 영적인 문제입니다.
14절은 ‘우상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이것이 시험거리가 되고 하나님을 노여워하는 영적인 간음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숭배하는 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원칙 곧 원리만 서면 방법은 저절로 나옵니다.
우상 숭배를 고전10장20-21절에서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능적으로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결코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16절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축복의 잔이냐 축사의 잔이냐? 축복의 잔은 복을 비는 것이며 축사의
잔은 축하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부라보하고 마시는 건배입니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서양의 건배문화가 발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도 떡과 잔을 주시면서 축사를 하셨습니다. 그 분의 몸과 피에 참예하는
것에 대한 축하파티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그 분과 한 몸이 된 이후에는 그리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러한 교회가 있지만 초대교회는 예배마다 성찬예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신 이후부터는 언제 어디서나 그 분과 한 영으로
살아가므로 눈에 보이는 시청각 보조 재료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찬예식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한 것에 대한 기념과
축하에 대한 메시지는 여전히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말씀만 가지고도 성찬이 성립된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의 코이노니아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피에
밀착된 상태에서 씻음이냐 그 피와 하나가 되었느냐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용해가 되는 섞임이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이 피를 한 잔으로
주심으로 그 피 곧 그 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용해가 된 것입니다.
이게 그 분의 피와 하나된 것을 기념하는 성찬의 본래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에 흘린 선지피를 생각하지 말고
한 잔으로 주신 그 분의 언약의 피로 봐야 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선지피는
우리가 본 적이 없지만 한 잔으로 주신 약속의 피는 말씀을 통해서 항상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위치를, 성령은 이를 실재가 되게 하십니다.
17절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한 떡에 참예함이라’ 이 참예는 상속자의 개념으로서
‘함께 받음’이라는 의미입니다. 한 떡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같이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합쳐서 한 덩어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주적인 교회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에게 나누어주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주님께서 그 몸을 생명의 떡으로 나누어 주고 계십니다.
바울은 성찬의 의식에 참여하기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예(하나, 용해)하기를 강조합니다.
말씀과 육신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두고 요한일서는 하나님과 사귐(코이노니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말하는 성례전과 고린도교회가 갖는 성례전은 서로 달랐습니다.
한 떡은 어떤 존재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말씀입니다.
천주교의 화체설은 신부의 축사 곧 강복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몸과 그 떡이
동질이 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 떡은 어떤 상태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기념설도 신앙의 건망증 환자에게는 요긴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의 제사를 통해 부모를 기억하는 불효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성례전도 적잖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교리나 의식을
다 배격하고 생명의 참예는 실재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 기도, 봉사, 그리고 생활이 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예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 한 떡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분깃을 받았습니다.
교회와 천국은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적인 결합입니다.
이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삶이 현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끼리의 진정한 코이노니아 즉 형제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의 증거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의식을 가지는 겁니다.
예컨대 미국에 가보면 중국 사람하고 우리는 금방 친하게 됩니다.
문화와 언어가 서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같은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과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금방 사귐이 이루어집니다.
13절을 분석해 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외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시험은 지극히 인간적인 외에는 없다는 말입니다(원문참조)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미래시제)’
하나님의 미쁘심은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계를 넘는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시험과 함께 그가 일하십니다. 내주 역사하십니다.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시험은 오직 인간적인 것 밖에 아닌데 이 인간적인 요소를 능히 이기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신8:2절 이하)
11절을 다시 봅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거울 곧 본이고 모델이며 우리에게 경계 곧 이해하고 터득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의 시험의 내용과 의미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12절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우리는 선민이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다 하나님이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방자히 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부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들이 방자해 진다고 성경은 경고를 합니다(잠29:18)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반응은 없이 하나님이 다 해 주실 것으로 믿는 것은 아주 위험한
신앙이며 금물입니다. 자신에게 아무 반응 없이 되기만을 바라는 것이 신비주의입니다.
14절 “그런즉 내 사항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를 피하라”는
10절과의 연속으로 보면 됩니다. 그리고 11-13절은 삽입구로 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만한 사람들아’ 라는 뜻입니다. 바로 15절의 ‘지혜 있는 자들
곧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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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