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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36:21~26(903)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2024. 8. 4
‘위라클(WeRACLE)’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투브 채널이 있습니다. 위라클이라는 유투브의 주인장은 박위라는 청년인데, 박위는 불의의 사로로 전신마비 진단을 받은 후 유투브 영상을 통해서 수많은 장애인들과 84만 명의 시청자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정상인으로 대학을 졸업합니다. 졸업 후 외국계 패션 회사에 다니면서 클럽과 술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토요일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주일 아침이면, 어쩔 수 없이 부모님에게 이끌려 교회에 나가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술에 잔뜩 취해서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 보니 침상에 누워있는 자신을 본 것입니다. 정신은 들었지만 손과 다리와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경험을 합니다. 사고 원인은 술에 취해서 계단일 줄 알고 발을 헛디뎌 건물에서 추락하여 발생한 낙상사고였습니다.
의사가 내린 판정은‘경추 골절(목뼈가 부러짐)로 인한 척수신경 손상으로 목 아래 전부가 다 사용하지 못하는 전신마비’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합니다. 목 아래로 이어지는 모든 신경이 끊어져 버렸기에, 두 발을 사용하지 못하니 앞으로 두 번 다시 제 발로 걷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손으로 이어지는 신경이 끊어졌기에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아들이 전신마비 판정을 받자 어머니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들 박위가 제자리로 돌아 올 수 있다면 제 목숨을 내 놓겠습니다’중추신경이 손상을 당해서 목 아래는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는 의사판단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손가락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뼈를 깍아 내는 고통을 통해서 양손을 모두 사용하게 됩니다. 목 아래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는데, 허리 윗부분 상체를 움직이면서 휠체어도 스스로 타고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전신마지 판정을 받기 이전에 박위를 술 좋아하고 세상 좋아하던 잘생긴 청년이었으나, 사고가 난 뒤로 박위를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며 사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사고 이전에는 내 마음대로 사는 인생이었으나, 사고 이후에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찾아가는 인생이 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진실하게 만난 박위입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전할 방법을 찾다가 유투브에 <위라클>이라는 채널을 만들어 장애인이 가지는 소소한 일상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이름 ‘위’와 기적(영, 미라클)이라는 두 단어를 <위라클>이라 채널 이름을 만들어 선한영향력을 그러내고 있습니다.
박위는 자신이 저술하여 발간된‘우리 모두에게 기적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다치기 전에 걷고 뛰고 내 손으로 밥 먹고 스스로 대소변을 보는 것에 대해 한 번도 감사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신마비 진단을 받자 비로소 과거에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기적과도 같은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하면 보통 초현실적인 현상을 떠올립니다. 아니에요. ‘기적’은 지금 제가 휠체어를 타고 살아가는 삶, 여러분의 삶 그 자체 하나하나가 기적입니다.
저는 휠체어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신마비가 된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기만 해도, 이런 제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고 용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다치기 전보다 오히려 지금이 일상 속에서 작은 감사와 소소한 행복을 더 많이 느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반신 마비를 가진 장애인으로 평생 휠체어를 타야하는 박위라는 청년이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이런 모습이 성도가 가져야 하는 감사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건강과 물질과 명예와 모든 것을 다 가졌기에 감사하는 감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남아 있는 일평생 동안 휠체어를 타야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전신마비였다가 휠체어를 타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모습입니다.
건강을 잃어 보았을 때 건강의 소중함을 느낍니다. 수중에 돈이 떨어져 보아야 천 원짜리 한 장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항상 말썽을 부리고 부모 애간장을 태우는 못난 자식이라고 해도, 그 자식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부모는 감사할 수 있는 이치와 같은 모습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영원히 찬양과 감사를 받으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시는 분으로 거명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외쳐야 합니다. 단지 머릿속에 담긴 지식 정도가 아니라 생각과 언어, 행동, 삶 자체에 스며들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여전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감사가 최우선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1. 비천한 가운데서 기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23절,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비천(卑賤)하다’라는 말이 상반절에 등장합니다. 비천하다는 말은 일상생활 중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을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용해야 되는 때를 만나는 것이 불행일 정도로 비천하다는 말은 현실과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는 단어입니다.
왜 비천하다는 말이 마주치지 아니하고 멀리했으면 좋은 말로 여겨질까요? 그것은 바로 비천하다는 말이 가진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비천하다(형용사): 지위나 신분이 낮고 천하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수 만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섞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시간에 수 천만원을 버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한 시간에 몇 천원도 벌지 못해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백성들이 다 아는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그룹의 총수들처럼 부와 명예를 다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면 이 좋은 세상에서 아직도 1평짜리 쪽방에서 선풍기조차 장만하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너무나 연약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대한민국이 다양화되고 계층이 수없이 나뉘어진 사회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돈이 없는 사람보고 비천하다 말하지 않습니다. 내세울 수 없는 직장에 다닌다고 비천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고 비천하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고로 비천하다는 말은 자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인종차별적인 언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너는 비천한 신분’이라는 말조차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비천하다는 말을 우리 모두에게 당당하게 적용합니다. 23절 다시 보십시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무슨 말을 하고자 는 내용일까요? 쉽게 풀어 법시다.‘내가 비천한 가운데 있어도 나를 기억해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라’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비천한 적이 있었던가요? 우리의 신분이 낮아지고 천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과 조롱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요?
제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제가 비천하다고 조롱을 받거나 손가락질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비록 돈이 없어서 궁핍한 적은 있었고, 살아가는 인생이 힘든 적은 있었지만, 비천한 신분이 되어 조롱을 받은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비천한 가운데 있었을 때에 하나님이 나를 기억했으니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비천한 신분이거나 비천한 상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신분이 변화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던 나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섭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었다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 모두는 죄의 종이 되어 영원한 지옥 형벌을 기다려야 하는 비천한 신분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지옥 형별이 예비되어 있던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나를 기억해 주시는 사랑 때문에, 내가 천국백성이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시편기자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비천한 가운데 있을 때에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기억해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라’고 찬양한 것입니다.
특히 여기의 ‘기억해 주셨으니(헬, 자카르)’인데 ‘자비와 은혜를 베푸심으로 권념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시편 시인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자비와 은혜를 잊어 버리지 말고 항상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내가 아무리 비천하고 비참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인 것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며 결국 능하신 손으로 끌어올리시며 회복시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이지만, 믿고 감사하다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나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걷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캐나다 큰 빛 교회를 시무하던 임현수 목사님이 북한선교를 하던 중 간첩혐의와 북한당국을 무너뜨린다는 죄목으로 ‘무기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수형생활을 합니다. 일 년 365일 중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8시간씩 강제 노동을 합니다. 추위와 배고픔, 고된 노동으로 인해 몸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손은 다 터지고 동상에 걸린 발가락은 새카맣게 변했지만 북한당국은 끔찍할 정도로 잔인하게 임목사를 대합니다. 행여 자살할까 싶어서 자살하지 못하도록 독방에 가두고 온갖 감시를 24시간하면서 관리를 합니다.
너무나 힘든 나머지 임목사님은 ‘하나님 북한동포를 사랑해서 사랑을 실천한 내가 왜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해야 합니까?’라고 원망 아닌 원망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묵묵부답입니다. 그렇게 수형생활이 2년을 훌쩍 넘긴 900일이 지나갑니다.
임목사님을 향한 하나님이 세우신 놀라운 섭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생합니다.
2017년 6월 전 세계를 떠들석하게 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사망 사건이 발생합니다. 평양에 관광 갔다가 호기심으로 호텔 복도에 있는 김일성 초상화를 건드렸다가 존엄하신 김일성을 훼손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되었던 대학생이 감옥에서 사망한 사건이 발행한 것입니다.
이 일로 미국을 위시한 유엔에서 북한의 인권에 대해 성토를 하자, 이것을 계기로 그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임목사님은 이때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오토 웜비어가 사망하면서 북한 당국이 나에 대해 부담을 느꼈던 것 같아요. 저도 석방 15분 전에 알았어요’
본인이 석방되는 것을 15분전에 알 정도로 아무것도 몰랐지만, 하나님은 하나하나 다 퍼즐을 맞추시면서 기적을 만들어 나가셨던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나타나는 사랑인 것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24절,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기자는 대적에게서 건지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내가 잘되는 것을 시샘하여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자들이 아무리 발광해도, 하나님은 그 대적에게서 나를 건지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위기의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신다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모든 육체에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25절,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한글성경에서는 ‘먹을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로 표현되었지만, 간단명료한 말은 ‘음식(food)’입니다. 즉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는 말은 ‘음식을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다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어야 하고 짐승들은 사료를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먹는 음식을 두고 살아가는 힘이 되는 양식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체의 양식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듯이 성도는 영의 사람을 강건하게 하기 위하여 영의 양식인 성경을 늘 가까이하고 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밥을 굶는 서글프고 아픈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불과 한 세기전만 하여도 보릿고개라는 생소한 단어가 있었고, 따뜻한 봄이 되면 도리어 굶어야 되는 ‘춘궁기(春窮期)’라는 가슴 아픈 단어도 있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하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먹거리를 주시고, 양식을 주시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미리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은혜를 믿지 못하여 항상 무엇을 먹을까 고민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마치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하게 산소를 마시고 살았기에 산소의 귀중함을 알지 못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에 빠져서 물을 먹어 본 경험을 한 사람들은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실히 느낍니다.
여러분들은 아무런 댓가 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뇌성마비 장애우 송명희 시인이 코로나 확진 투병 중에 쓴 시입니다. “아픈 것도 감사합니다. 아파서 돈에 대한 욕심이 더 없어져 주변을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병이 길고 깊으면 살고 싶은 생각보다 죽음이 두렵지 않아 감사합니다. 삶에 애착이 없어서 비굴하지 않아 감사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없으니 세상보다 천국을 보고 땅에 연연하기보다 하늘을 볼 수 있어 감사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의사들이 죽는다고 하는 말을 수십 번 들어 별로 생각 안 하고 있습니다. 내가 병원 믿고 살았으면 벌써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살면 기회이고 죽으면 천국이라 감사합니다.”
평생 뇌성마비를 앓으면서 살아온 그녀가 쓴 감사의 내용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나이가 들고 몸이 점점 불편해지는 것을 느낄 텐데 코로나까지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픈 것도 감사’라는 시를 적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깊은 감사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역시 나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이 불평의 조건이 아니라 감사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고 생각을 바꾸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불평은 또 더 큰 불평을 만들지만, 감사는 내가 겪는 큰 불평을 작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지난 주간에 김장로님께서 기계에 오른쪽 중지 손가락을 다치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사고였지만 사고는 발생했습니다. 특히 김장로님은 조각을 하는 분이기에 손가락의 예민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고가 발생한 것입니다.
장로님이 급하게 병원에 입원하고 손가락 부위 치료가 들어갔고, 그리고 저는 기도때마다 저는 수많은 생각을 하였고, 그리고 하나님에게 엎드렸습니다. '하시는 일들이 너무나 많은 장로님인데, 왜 장로님께서 손가락을 다치셨나?'라는 의문점과 기도제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도 후에 받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더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음에 감사하라’라고 말씀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고3 때 동네 친구일이 떠 올랐습니다. 그친구는 소꿉동무 친구였는데, 고등학교때 공고로 진학하면서 고3 여름방학이 끝나고 바로 실습을 나갔습니다.(당시에는 고3학년 2학기에 현장 실습을 나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실습나간지 두달만에 한순간의 사고로 오른쪽 팔 전체를 잃어버린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장갑을 끼고 기계를 만지다가 장갑이 빨려 뜰어가면서 오른쪽 팔꿈치 윗부분까지 말려 들어가면서 절단된 아주 대형사고였습니다.
그해겨울로 기억합니다. 그 친구를 동네에서 만났는데 팔의 의족을 하고 있었기에 아주 부자연스러운 오른손을 보았습니다. 제가 걱정을 하니 그때 그 친구가 웃으면서 제게 한 말이 기억났던 것입니다.
‘기계에 몸 전체가 안 빨려 들어가고, 팔 하나 날리며 그나마 살아서 다행이잖냐?’ 기계에 빨려 들어가 죽을뻔 했는데 팔 하나로 정리가 되어서 다행이라는 친구 말이었습니다.
장로님에 대해 기도하는 도중에 과거의 이 일이 떠 올랐던 이유를 곰씹어 보았습니다. 더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음에 감사하라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완벽한 감사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작은 것에서 감사를, 부족한 가운데서 감사를 원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원한 모습이 이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보았습니다.
금주일은 늦게 드리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2024년 전반기를 보내고 드리는 감사주일입니다. 지나간 전반기 시간을 돌아보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힘들어도 잘 지낸 것에 감사하고, 어려워도 뒤로 쳐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힘들었지만 다가오는 2024년의 남아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024년 남아 있는 모든 시간 속에 역사하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리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