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7장55-60절 스데반 영화의 은혜를 입다 260530 원주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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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아멘.“
1. 성도의 죽음 앞에서 완성되는 영화
스데반이 이제 순교하지 않습니까? 순교할 때 5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스데반은 설교할 때도 성령이 충만했는데, 순교의 자리인 죽음 앞에 딱 서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 충만을 한 번 더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 참 성령 충만하십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은, 영성을 사모하는 이들에게는 대단한 칭찬의 말입니다. 늘 서로 "성령 충만하십니다"라고 인사는 하지만, 사실 그것이 진짜 충만의 극치는 아닙니다. 진짜 충만의 극치가 어디서 나오느냐?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의 충만입니다.
2. 영화와 비슷한 타종교의 영적극치
불교는 성불
불교에서는 수행을 거듭하여 정말 극치에 올랐을 때 '성불(成佛)', 즉 부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카토릭은 완덕
가톨릭교회에서는 자기 안에 또 다른 나를 내놓고, 내 앞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며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나 자신과 예수님이 대화하는 이것을 그들은 기도라고 합니다. 내 밖에 나를 내놓고 대화하면 그것은 '수양'이라 하고, 내 바깥에 예수님을 두고 내가 주님 앞에 있다고 고백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주님 앞에서 내가 죄인 된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또 회개하며,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불교의 수행과는 대상이 다르지만, 그 과정은 언뜻 비슷해 보입니다.주님과 딱 일치가 되는 지점이 오는 것을 '완덕이라 합니다.
2. 스데반의 영화의 은혜
하지만 스데반이 임종할 때 영화의 은혜를 덧입습니다. 죄 된 육체와 죄 된 인생을 다 벗어버리고 주님 품으로 가는 시간입니다.
우리 장로교 교리인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을 보면, 성도가 임종할 때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시는지 나와 있습니다. 성도가 임종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100% 완전한 거룩함을 주십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온전한 거룩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저 사람 좀 깨끗하네, 저 사람 좀 훌륭하게 사네" 하는 것들은 냉정히 말해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죄가 조금 더 있고 덜 있고의 차이일 뿐입니다.
3.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많아지는 오늘의 문제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 죄인이 주님 앞에 설 때 어떤 은혜를 얻게 되느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거룩함'을 선물로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천국의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천국을 바라보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도 이 은혜가 주어질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잘하시다가 임종하신 분들을 보면, 죽기 전에 천국에 미리 다녀오시기도 하고, 돌아가시기 하루 전쯤에 "내일은 내가 간다"라며 스스로 가실 날을 예언하기도 하십니다. 죽음 앞에서 성령 충만함이 임하니까 영안과 예언이 열려서 자녀들에게 "야, 너는 그렇게 살면 안 되고, 이 복을 받아서 이렇게 살아라" 하며 믿음의 유언과 권면을 하십니다. 그 임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우리 내남제일교회 성도님들, 특별히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이 이 죽음의 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집에서 아프지 않고 자는 듯이 편안하게 죽는 것이 죽음의 복이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죽는 것이 진짜 죽음의 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예배당 안에는 예수를 믿되, 단지 종교로서 기독교를 선택한 분들이 꽤 많습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이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거꾸로 하면 '안나가'가 되는 '가나안 성도'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 잘 믿는 장로님, 권사님, 목사님 가정에서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자녀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의 복음화율이 굉장히 약합니다. 현재 교회를 출석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종교로 기독교를 택했을 뿐,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꽤 많은 상황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 자에게 어떤 은혜가 있느냐 하면, 인생을 살면서 이런 죄도 짓고 저런 죄도 지으며 넘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임종 앞에 이르면 하나님이 그 영혼을 부르십니다. 부르시고는 완전한 거룩함을 그에게 입혀주십니다. 이것이 임종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죽기 직전에 너무 늦게 받으면 살아생전에 맺을 특별한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살아 있는 동안에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저 역시 젊은 날에 성령 충만해지고 죄가 완전히 씻겨 나가는 거룩한 경험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물론 그 뒤로 다시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 아내와 다투기도 하고, 아들을 혼내기도 하는 등 인간이 가진 죄성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는 명확한 기준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확고한 기준입니다. 온전한 거룩함을 직접 입어보니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음란하지 않은 것', '도둑질하지 않는 것' 같은 도덕적인 기준들은 거룩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런 도덕적인 삶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수준을 뛰어넘는 천국 갈 거룩함이 따로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번 따라 해 봅시다. "사랑입니다." 그 사랑과 영혼에 대한 한없는 긍휼함이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오늘 스데반은 영화를 덧 입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바라보며, 이 은혜 안에서 돌에 맞아 죽는 순교의 여정을 의연하게 걸어갑니다. 돌에 맞으면서도 마지막에 고백하기를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외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4. 사형수의 마지막 죽음에서 나타난 영화
청송교도소(청송보호감호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분들의 형이 집행될 때의 일입니다. 거기에는 사회에서 예수를 믿다가 들어온 사람도 있고, 감옥 안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도 있으며, 신부님을 만나 영세를 받은 사람도 있고, 불교에 귀의해서 "내가 죽인 사람들의 죄업을 대신 갚겠다"며 마음을 닦는 부처의 길을 걸어간 사람도 있습니다. 사형 집행 날이 되면 스님도 오고 신부님도 오고 목사님도 와서, 죽음 앞에 선 이들을 위해 마지막 장례 종교 의식을 집행합니다.
당시 교도관이었던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을 보면, 그 사형수들이 임종을 맞이하는 모습이 저마다 완전히 달랐다고 합니다. 불교에 귀의했던 한 사형수는 평소에 정말 부처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며 무척 인자하게 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영치금과 물품들을 주변에 다 나눠주며 진정한 비움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와, 저 사람은 정말 성불했다"라고 칭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사형 집행을 위해 끌려 나오는데, 평소의 성불한 모습은 간곳없고 온갖 악을 쓰며 발악을 하더랍니다. "이 새끼들아!" 하고 욕을 하며 죽음 앞에서 처절하게 무너지며 죽어갔습니다. 스님의 인도를 받던 이의 결말이 그랬습니다.
가톨릭 영세를 받은 사람 중에도 그렇게 죽는 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가톨릭 영세를 받았다고 해서 구원이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영세라는 의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혼이 거듭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사형수는 거듭남의 체험이 없었는지,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살려고 발버둥 치며 뒤로 물러서고 고함을 지르느라 난리가 났습니다. 신부님이 곁에서 예식을 집행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반면, 마지막으로 예수를 믿었던 한 사형수의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청송감호소 안에 큰 성령의 부흥이 일어나서 수많은 재소자가 거듭나고 변화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이 사형수는 평소에 행동이 좀 거칠고 반항적이어서, 주변에서 "저래 가지고 과연 천국에 갈 수 있겠나" 하고 걱정하던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사형대라는 죽음의 고비 앞에 서자, 놀랍게도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더랍니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찬송을 부르며 죽음의 길을 당당히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자신이 죽인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고, 지금까지 자신을 보살펴주고 신앙으로 인도해 준 교도관들에게 감사하다고 고백한 뒤, 형장의 이슬로 평안히 사라졌습니다. 현장에서 예배를 집행하던 목사님이 그 장례를 치르며 직접 눈으로 본 사실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죽는 것은 이처럼 다릅니다. 비록 과거에 엄청난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참된 성도라면 죽음의 순간에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성령의 충만함을 주십니다.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만큼 거룩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세우십니다. 이 축복을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합니다.
실제로는 오직 거듭난 사람만이 이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만약 내 종교란에는 기독교라고 적혀 있지만 여전히 마음에 구원의 확신이 없고 불안하다면, 오늘 당장 종이 한 장을 꺼내놓고 천국 갈 준비 작업을 하셔야 합니다. 종이를 펴놓고 내가 지은 죄, 그리고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을 다 적어보십시오. 그것들을 하나하나 고백하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목사님 말씀에 예수가 우리 죄를 다 사하셨다고 하던데, 이 죄도 좀 사해 주십시오. 잘 믿어지지는 않지만 주님이 사하셨다고 하니 그 말씀을 믿고 한번 고백해 봅니다" 하고 기도해 보십시오. 십자가의 은혜를 직접 시험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5. 거듭난 성도는 끝까지 견인하십니다
이 거듭남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삶 속에서 간혹 넘어질지라도, 성령을 훼방하는 심각한 죄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죄로 인해 쓰러져도 또 인도하시고, 은혜를 잠시 다 까먹은 것 같아도 속에서 다시 은혜가 솟아나게 하십니다. 계속해서 오뚝이처럼 일으키고 또 일으키시는데, 이것을 신학 용어로 성도의 '견인(堅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임종할 때, 넉넉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 은혜를 살아생전에 일찍 경험한 사람들은 "내 주변의 소중한 영혼들을 이대로 지옥 가게 둘 수 없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서, 영혼을 건져내는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 혼자만 천국 가려고 하면 아무런 열매가 없지 않습니까?
어쨌든 오늘 나눈 스데반의 순교 역사가 우리 교회 안의 연세 많으신 모든 어르신에게 임하여, 생명 다하는 날 영생의 구원 역사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 모두의 삶 가운데 이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며, 특별히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정결하게 되어 이 놀라운 은혜를 풍성히 덧입게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스데반의 순교의 자리에서 그 영혼을 깊은 은혜의 세계로 이끌어 인도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 여정도 친히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마지막 생명 다하는 날에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주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우리 내남제일교회 모든 성도님들 속에, 그리고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날마다 예수의 복음을 전하며 날마다 예수의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믿음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도록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늘 함께해 주시기를 원하옵고,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