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좋은 시의 방향성
'좋은 디카시'를 향한 불멸의 불꽃
시집을 출간하는 것은 단순히 그동안 쓴 시를 모아 책을 내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시를 통해 추슬러 온 삶과 문학에, 하나의 매듭 또는 마디를 부가하는 의미가 있다. 하나의 매듭은 다음 매듭을 예비한다. 하나의 마디 또한 다음 마디까지의 진척을 추동한다. 마디가 없이 속이 빈 대나무가 그렇게 큰 키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문학을 하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자신의 책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 가운데 작은 성취라도 담겨 있고, 그것이 다음 창작 단계를 향한 일말의 청사진을 담보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시간과 물자의 낭비가 되고 말터이기에.
이 모든 생각은 지난날의 첫 디카시집 『어떤 실루엣』을 개정·증보하여 『징검다리』를 다시 묶으면서 내게 찾아왔다. 단행본으로는 세 번째 디카시집인 터인데, 이 시집을 내고서야 비로소 디카시에 대한 안목이 조금 안정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무슨 일이든 세 번을 하라고 했던 것일까. 나는 지금까지 순간 포착의 영상과 촌철살인의 시적 언어를 결합하는 디카시가 상품(上品)이 되기 위해서는, 그 양자에 대한 치열한 탐색이 필요하다고 여겨 온 터였다.
그런데 좋은 디카시를 향한 열망이 꼭 그렇게 간단(間斷)없는 천착으로만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닌 것 같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시, 그리고 동시대의 영상과 언어 문법에 부응한 디카시는 동일하게 모든 지적이며 감성적인 정보를 다 말하지 않고 여백의 공간을 남겨둔다. 이것이 시가 가진 산문과 다른 장르적 특성이기도 하다. 더 중요한 사실은 여백을 남겨두는 일차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여백에 과연 무엇을 담아두느냐에 있는 것이 아닐까. 왜 불가(佛家)에서는 무언설법(無言)이라는 경지가 있지 않던가 여백에 마음과 말을 담을 수 있는 차원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이는 수천 년에 걸친 시인들의 숙제였고, 지금 또한 그렇다.
그런데 이 여백의 황금률에 다가서 보기라도 하려면, 우선 좋은 시를 쓰겠다는 과도한 집착부터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래야만 세상의 삼라만상을 바라보는 눈길에 작은 깨달음이나 여유가 찾아오지 않을까. 내 경험으로는 좋은 경관이나 시상이 어느 순간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이지 애달복달의 뒤끝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작고 소박한 자리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안목이 필요할 것 같다.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힘은 크고 화려한 곳에 있지 않다. 그러기에 일찍이 윌리엄 블레이크가 이렇게 말했다.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안에 무한을 쥐고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디카시는 이제 한국의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일로에 있다. 여러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디카시 공모전을 개최하고 심지어 디카시와 유사한 변형의 형식들도 보인다. 예술적 다양성을 제어할 수는 없으나 그래도 디카시의 장르적 원론을 허물 수는 없다. 올해 한국디카시인협회는 여전히 여러 공모 및 시상 행사와 학술 세미나를 계획하고 있다. 많은 시인이 디카시집을 발간하고 다카시집 시리즈가 나오는가 하면, 디카시 전문 계간지도 둘이나 된다. 그런데 이 모든 좋은 상황에 앞서서 가장 절실한 하나는 우리 모두 ‘좋은 디카시’를 쓰기 위해 애쓰는, 그 창작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아닐 수 없다.
김종회교수의 디카시 강론 [디카시, 이렇게 읽고 쓴다] 중에서
2024. 10. 8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