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너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지”
박정상 바둑 9단의 아버지 박병희 서울 중앙중 교장은
“정상이가 삼국지를 5번 이상 완독하는 등
다양한 책을 섭렵하고 있어 대견하다”며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줄 것을 주문했다.
박병희 씨가 아들 박정상 바둑 9단에게
정상아, 네가 엄마와 어릴 적부터 주고받은 교환편지는 수없이 많지만,
내가 너에게 쓰는 편지는 오랜만인 것 같다.
아빠가 인생의 선배로서 너에게 지난날의 이야기와
소망스러운 삶에 대해 몇 마디 해 주고 싶다.
일곱 살인 너를 처음 동네 바둑교실에 데려갔을 때
우리는 네가 프로기사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TV를 물구나무서서 보는 등 산만하기 그지없는
네 성격이 바둑을 두면 차분해지지 않을까 기대했을 뿐이다.
그러나 넌 5개월 만에 1급 실력을 쌓아
KBS 바둑대회에서 3등에 오르는 기재를 보였지.
바둑교실 원장도 프로기사의 길을 권했다.
하지만 넌 학교 성적도 정상권이어서 아빠는 공부의 길을 가길 원했다.
내가 “바둑이 조금이라도 싫은 기색이 보이면 당장 그만두게 하라”고
엄마한테 얘기했던 적이 있지. 그 얘길 들었는지
네가 하루는 “바둑을 포기하고 공부를 하겠다.”고 말해 순간 반가웠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네 말에 아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부해서 대학 간 뒤 다시 바둑을 시작하겠다.”
그 얘길 듣고 더는 바둑의 길을 가는 걸 반대할 수 없었다.
다만 너의 굳은 의지를 끝까지 이어 가길 바랄 뿐이었다.
어린 나이에 시작된 본격적인 바둑 수업은 힘들고 외로운 길이었다.
너는 그 길을 성실하고 꿋꿋하게 걸었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안쓰럽고 애처로웠다.
하루는 네가 바둑이 끝나고 집에 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오지 않기에 밖으로 나가 봤다.
네가 아파트 벤치에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더구나.
30분 넘게 지켜봤는데도 너는 일어날 생각을 안 했다.
그날 바둑에 진 아픔을 곱씹고 있었겠지.
어떤 날은 땀에 흠뻑 젖어서 돌아오기에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한국기원이 있는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서
노원구 상계동 집까지 걸어왔다고 했지.
그때 부모로서 그렇게 가슴이 아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진정한 패배의 의미를 체득하지 못한 자는
승리의 값진 열매를 획득하지 못하는 법이기에,
수많은 패배와 외로움을 견디면서
너는 하나하나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을 거다.
네가 프로기사가 되던 날 아빠는 오히려 숙연해졌다.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으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기쁨보다
고난과 외로움을 모두 이겨낸 대견함과 고마움 때문에
할 말을 잊었는지 모른다.
지난해 후지쓰배에서 우승했을 때
너는 “천재란 없다. 남보다 10배 노력하면 일류가 되고,
그보다 10배 더 노력하면 최고가 된다.”고 말했지.
아빠는 네가 우승한 것도 기뻤지만
어느덧 네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속 깊은 사람이 됐다는 것이 더 기뻤다.
정상아, 이제 너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정상을 정복하는 길이다.
네가 좋아서 택한 바둑의 길, 바둑으로 고민하지 말고
마음 상하지 말며 최선을 다하되 즐기도록 해라.
이기고 교만하지 말고 지고 비굴해서도 안 된다.
뒤를 너무 돌아보면 앞으로 나아가는 데 지장이 된다.
또 프로기사의 길이 아무리 냉혹하다 해도
인간적 따스함을 지닌 사람으로 모든 이가 기억하길 바란다.
한 떨기 야생화를 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알고
지하철역에 걸린 시 한 편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말이다.
최고의 승부사이면서도 평범함의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기를 바란다.
올해 중환배 결승을 앞두고 대만으로 가기 전
네가 네 홈페이지에 남긴 글을 보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엄마.
그 존재만으로도 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10번이고 100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아들이고 싶습니다.’
2007. 10. 25.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