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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라혼은 모석의 우군이 주둔한 심성(審城)으로 와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아직까지 창백한 안색의 모석에게 모든 경과 보고를 들었다.
“수고했다.”
“면목 없습니다. 좀더 신중을 기해야 했습니다.”
“그보다 붙잡은 마적들은 어디 있나?”
“지하 창고에 가두어놓았습니다.”
라혼은 자책하는 모석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하고 마적들을 가두어놓은, 그전에 창고로 사용하던 지하로 내려갔다. 라혼은 사람의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지하 창고에서 비록 사로잡힌 신세지만 눈빛이 죽지 않은 사내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이들의 수장인가?”
“그는 너무 위험해 옥(獄)에 따로 가두어놓았습니다.”
“모 정령, 이들도 의원에게 보여 치료를 받게 해라!”
“예? 예, 알겠습니다.”
라혼은 마적들의 치료를 명하고는 잔폭광마라는 마적 수괴가 갇혀 있는 옥으로 갔다.
“야! 이 개놈들아! 배고프다. 밥 가져와라!”
굵은 나무 창살의 감방 안에는 사지가 묶인 채 벽에 매달린 거한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마치 천하의 주인인 양 고함을 질러댔다. 그 기세로 보아서는 가두어놓은 것이 아니라 모셔놓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잔폭광마는 비록 모석의 금강결 오의에 공력이 흩어져 기절이란 것을 했지만 몸은 멀쩡했다. 게다가 공력까지 원래대로 회복해 갓 잡은 생선처럼 팔팔했다. 비록 공력을 끌어올리지 못하게 금제되기는 했지만 힘이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라혼은 기세 좋게 내지르는 고함을 들으며 그 고함 소리의 주인 앞에 섰다.
“네놈은 누구냐?”
“천원군 참장 라혼이다. 강호의 친구들은 날 백호나한이라 부르지….”
“과연 듣던 대로 기생오라비같이 생겼구나. 네놈 가운데 다리가 그렇게 실하다며?”
“크흠~!”
잔폭광마의 걸쭉한 욕지거리에 당사자인 라혼보다 옆에 서 있던 모석이 더 불편해했다. 그러나 라혼은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서늘한 시선이 기분 나쁜지 잔폭광마는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뭘 봐? 발정 난 수캉아지야!”
“별거 없다. 널 어찌 처리할지 생각 중이었을 뿐이다.”
“그래? 그거야 간단하지. 날 풀어주고 누가 더 센지 겨뤄보면 되지.”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결과가 뻔하니, 괜한 힘 낭비라 그냥 이대로 다져서 산 채로 강시를 만들고 싶은데 그것이 더 좋지 않겠나?”
“….”
잔폭광마는 문득 천하의 강시지존이 조정의 누군가에게 패했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반반하게 생긴 개놈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기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미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강시가 되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꾸웩! 개놈아, 어딜 만져?”
“과연 좋은 재료다. 근골이 튼튼하고 그만한 공력을 수련했으니 혈맥도 굵을 것이고….”
잔폭광마는 어느새 감방 안으로 들어와 목공이 ‘좋은 나무다’ 하는 투로 자신의 몸을 쓰다듬자 소름이 쫙! 돋았다.
“이런 천인공노할 짓거리를 하고도 네가 무사할 줄 아느냐?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다 좋은데 그것이 문제란 말이야. 하늘이 무서워서 감히 내가 만들지는 못하겠고, 흑사에게 보내 알아서 하라고 할까?”
인간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종종 놀라운 능력을 보이기도 했다. 라혼이 ‘흑사’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잔폭광마의 머리에서는 ‘흑산자’라고 번역되어 이해되었다.
“차라리 여기서 날 쳐 죽여라!”
“강시를 만들려면 어차피 쳐야 한다. 하지만 지금 죽이는 것은 생각해보아야 하지!”
라혼은 솔직히 잔폭광마가 탐이 났다. 백호대의 피해는 순전히 잔폭광마의 무도하고 저돌적인 용기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다. 마적들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야말로 기병에게는 가장 필요한 무기였다. 그것은 훈련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번에 노원 태수를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앙신은 이미 후선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미 적진에 들어와놓고도 이곳이 적진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지휘관이 이끄는 군대가 이기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라혼은 노원 태수의 무고함을 적은 장계를 조정과 천원대원수에게 보냈지만 그것을 보고 얼마나 깨달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잔폭광마의 폭마방 같은 용기가 반드시 필요했다. 라혼이 진짜로 고민하는 것은 과연 이들을 제어할 수 있느냐였다. 은섬충을 사용하면 간단하지만 최근 흑사의 반응을 보건대, 어느 순간 깨어져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비록 은섬충을 사용했지만 흑사, 토귀 그리고 토사귀는 이미 너무나 맛있는 먹이를 물고 있기에 은섬충이 깨지더라도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 난폭한 마적 두목은 또 달랐다.
“한 가지 제안을 하지.”
“뭐, 뭐냐?”
잔폭광마는 간담이 오그라드는 표정으로 뭔가 궁리하던 그가 입을 열자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내 휘하로 오게….”
“말….”
일언지하에 거절하려던 잔폭광마는 뭔가 궁리를 하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거절하면 어쩔 거냐?”
“강시로 만들어서 써먹어야지!”
***
천원대원수 마동치가 이끄는 9만 평안천원군(平安天元軍)은 정장(正將) 양석호(羊石澔)에게 2만의 군사를 주어 전군(前軍)으로 삼고, 2만을 소장(小將) 오산(吳珊)에게 맡겨 후군(後軍)으로 삼았다. 그리고 대원수 마동치는 군사 5만의 중군(中軍)을 직접 이끌었다. 포란산에서 출발해 20일 간 행군하며 안전한 보급로 확보를 위해 진군로(進軍路) 주변을 정비해가며 천천히 앙신성의 주도인 원평부를 향해 다가갔다.
“대원수, 원평에서 급한 전갈입니다. 그동안 잠잠했던 반도들이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또한 일부의 무리가 우리 천원군을 노리고 우회하는 모습도 포착되었답니다.”
“뭐라?”
“대원수, 이는 적의 계략이 분명합니다. 원평엔 아직 5만의 병력이 남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급하게 움직일 것이 아니라 이대로 천천히 움직여 반도들을 위압하고 사정을 좀더 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불 같은 성정을 지닌 천원대원수 마동치는 부원수(副元帥) 상장(上將) 사법린(蛇法鱗)의 차분한 설명에 갑자기 끓어오르던 화기를 진정시키고 장군 회의를 소집했다. 후방 보급로의 안전을 책임진 별동군 대장(大將) 금영월(禽英越)을 제외한 장군 반열의 모든 지휘관이 모여 향후 전략을 논의했다.
“정장 양석호가 대원수께 아룁니다. 어차피 후선군의 목적은 뻔합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대응하든 여기 일망평(一望平)에서의 일전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건 너무 억측이 아니오? 일망평이라면 원평부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인데, 잘못하면 앞뒤가 막히는 그곳에서 과연 후선군이 싸움을 걸어올지 의문이오?”
양석호의 의견에 반론이 제기되자 이번엔 부원수 상장 사법린이 나서며 말했다.
“양 정장의 말도 일리는 있소.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척후대를 충분히 운영하면 알 수 있는 일이니 여기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소.”
작전 회의는 척후대를 충분히 운영하며 조심스럽게 길을 가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좋소!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고. 별동금군으로 하여금 본군의 후방을 더욱 단단히 하라는 전언을 내리시오. 제장들은 적의 산발적인 습격을 주의하도록 하시오.”
“대원수의 명 받드오이다.”
***
라혼은 잔폭광마를 협박해 자신의 휘하로 받아들인 뒤 그의 이름으로 노원 지역 전역에 펼쳐져 있는 화적 떼들을 토벌했다. 역시 라혼의 생각대로 노원에서 잔폭광마의 위명은 대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 노원에 흩어져 웅거하던 중소 화적들은 모두 수천에 이르던 때의 잔폭광마의 부하들이었다. 그러니 라혼이 잔폭광마를 거둠으로써 사실상 노원의 화적을 모두 토벌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녹림총표파자의 압력으로 스스로 규모를 줄였단 말이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주군! 사실 노원은 넓습니다. 잔폭광마가 빠른 기동력을 가지고도 좁은 지역에서 맴돌았던 이유가 그 지역을 벗어나면 다시 옛 부하들이 모여들어 녹림의 투야를 자극할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라혼은 양엽구 구만혁의 설명을 듣고서야 잔폭광마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름만으로 화적들을 토벌할 수 있었던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아니, 토벌이 아니라 그들을 흡수했다는 것이 맞는 말이지만….
잔폭광마와 더불어 거둔 일명 폭마방(暴馬幇)이라는 마적패들은 지금 그 수가 3500에 이르렀다. 그들 대부분이 ‘거정의 난’ 때 병졸로서 경험을 쌓은 고참병들이었다. 거기다 그들이 차마 화적질은 할 수 없었던 옛 전우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몽성에 지원하는 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 짧은 기간에 2000여 명이 몰리는 바람에 모병된 총원이 6000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은 심히 우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화적 출신의 폭마방 무리들은 라혼의 백호대에 속한 무리라고 말하기 곤란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잔폭광마를 따르는 무리들이다. 그러나 라혼은 그런 그들을 태연히 백호대의 중군으로 삼았다. 말하자면 가장 충성스러워야 할 친위대를 언제 배신할지 모를 화적들에게 맡긴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모석이 이끄는 백호 우군은 그들로 인해 동지를 잃었기에 그들을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주군, 그들을 너무 지근거리에 두는 것은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그렇습니다.”
“….”
라혼은 모석을 위시한 백호십일걸의 한결같은 주청에 약간 곤혹스러웠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라혼이 잔폭광마의 폭마방 무리들에게 하는 대우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법대로 처리하면 모두 목이 달아나도 한참 전에 달아났어야 할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조정의 군사로 거둔 것부터 문제가 많았다. 즉, 백호십일걸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들은 백호대와 백호대가 아닌 자들로 구분이 생겨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라혼에게 전혀 도움되는 현상이 아니었다.
“광마의 일은 내게 맡기고 더 이상 언급하지 마라! 그리고 제장들을 모이게 한 것은 이제 곧 노원을 벗어나 우리가 속해 있는 별동금군을 이끄는 금영월 대장군을 따라 일망평이란 곳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모이라 한 것이다. 사흘 안에 이곳으로 모두 집결하라!”
“….”
라혼은 그렇게 백호십일걸의 입을 막고 가타부타 말이 없는 고학에게 물었다.
“고학, 폭마대의 재편성은 어찌되었는가?”
“폭마방과 지원병들을 섞어 보군 5000, 마군 1000의 중군을 편성했습니다.”
“좋아!”
그것으로 회의를 끝낸 라혼은 잔폭광마를 불렀다.
“부르셨소?”
“사흘 후 이동한다.”
“그게 다요?”
“일단 그것이 전부다. 이름이 뭔가?”
“내 이름은 알아 뭐 하시려고?”
“….”
잔폭광마는 지금 눈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아름답기까지 한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따르지 않으면 강시를 만든다기에 따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몸을 묶은 굵은 사슬을 풀어주고 무공을 쓰지 못하게 한 금제마저 풀어주었다. 그리고 대뜸 마적 수하들까지 풀어주더니 노원의 다른 화적들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즉, 그는 자신의 협박에 못 이긴 나머지 내뱉은, 따르겠다는 한마디를 믿고 곧바로 일을 시킨 것이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도망칠 수 있는 상태에서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된 잔폭광마는 그 기생오라비 같은 장수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이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풀어주었지만 그것은 풀어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끄는 6000명의 마군(馬軍)이 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잔폭광마는 자신도 모르게 항복을 권하는 사자(使者) 노릇을 한 것이다. 그렇게 노원 전역을 몇십 개의 구획으로 나누어 힘을 집중해 화적패들의 저항 의지를 꺾게 하고 피를 보지 않은 채 화적들을 토벌한 것이다. 그 화적패들 중에는 예전에 잔폭광마가 이끌던 자들도 있었으나 태생부터 화적이었던 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남이 했으니 나도 한다는 심리에 별 거리낌 없이 알아서 항복을 청한 경우도 많았다.
“육삼(肉參)이오.”
“고깃집 셋째 아들?”
라혼은 잔폭광마가 부정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대체로 양민들의 성(姓)은 그 가계의 직업과 연관된 경우가 많았기에 라혼은 슬쩍 넘겨짚어본 것이다. 그리고 잔폭광마가 왜 이름 밝히는 것을 꺼려하는지 나름대로 추측하기도 했다. 백정이란 직업은 그리 고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앞으로 잘 부탁하네, 육 정위!”
“에? 지금 제게 직급을 주신 거요?”
“임시이긴 하지만 그래도 필요할 거다. 가봐라!”
잔폭광마 육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육삼에게도 귀는 있어 오늘 모인 회의에서 그의 부하 장수들이 뭐라 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되는 거요?”
“된다!”
잔폭광마는 뭔가에 홀린 기분이 되어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에라! 될 대로 되라지. 살아서 번듯한 벼슬까지 얻었으니 그럼 된 거지 뭐!’
라혼의 이러한 조치에 기존의 백호대 군병들의 불만이 높았다. 그러나 라혼은 그런 그들을 무시하고 1만 2000이 된 군사들을 이끌고 금영월의 본대에 합류했다.
“자네는 재주도 좋군. 겨우 한 달 사이에 병력을 두 배로 늘리다니? 게다가 척 보기에도 정병들인데?”
“거정의 난 때 보의 군사들입니다.”
“그런가? 그럼 위험하지 않겠나?”
“괜찮을 겁니다.”
금군대장 금영월은 우려 섞인 말을 하면서도 왠지 믿음이 가는 백호참장 라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모병을 더 할 생각인가?”
“예, 될 수 있는 한 병력을 최대한 늘릴 생각입니다.”
“어느 선까지 말인가?”
“현재 우리 별동금군은 마군이 1만 3000, 보군 1만 3000이 되었습니다. 저는 마군과 보군의 비율을 1대 4에서 1대 2로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앞으로 1만 5000명 정도 보군을 더 늘릴 생각입니다.”
“자금은?”
“제가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군께 먼저 허락을 구하고 싶습니다.”
금영월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렇게 하세.”
라혼은 금영월의 허락이 떨어지자 백호대, 주작대, 현무대, 청룡대로 나누어 운영되던 별동금군을 해체하여 각자 계급에 맞도록 군을 재편성했다. 다만 태생이 특수한 백호영의 1200 무사들만 손대지 않고, 나머지는 그 출신에 상관없이 섞어 묶어버린 것이다. 라혼의 이러한 조치는 사실상 백호대의 해체를 의미했다.
“괜찮은 건가?”
“뭘 말씀이십니까?”
“백호대를 해체한 것 말일세?”
그것은 이미 라혼이 생각한 바가 있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스스로 자부심 높은 것은 좋으나 우월 의식이 생기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백호대의 군사들이 자부심에서 우월감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고 라혼은 사실상 백호대를 포기한 것이다. 천호의 물이 천호(天湖)의 물이 아니려면 장강(長江)으로 흘러들면 되고, 장강의 강물이 장강 물이 아니려면 동해(東海)로 흘러들면 되는 이치로 백호대를 별동금군에 섞어버린 것이다. 금영월의 물음에 라혼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군벌화된 백호대는 제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별동금군도 군벌이 아닌가?”
“그래서 백호대를 해체한 겁니다. 백호대로 별동금군과 대립하기보다 금 대장님에게 잘 보여 2인자 자리를 꿰찼고, 대장님은 나이가 있으시니 별동금군은 앞으로 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뭐라?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냉국부터 들이켜는 것인가?”
“걱정 마십시오. 제 몫은 제가 챙길 것이니.”
“그렇게 되는 건가? 허허허허허….”
“….”
천원대원수 마동치가 금군을 곤란하게 여긴 것과 같은 이치로 금영월에게 라혼의 백호대는 상당히 곤란한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독립적인 행보를 하도록 방치한 면이 없지 않았다. 보군으로 구별되는 백호대 전원을 말에 태워 마군으로 만들고, 이번엔 모병을 개시하여 그 병력을 배로 늘리자 백호대는 본군이 별동금군보다 오히려 그 규모가 커져버렸다. 그것은 심히 우려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알아서 백호대를 해체하는 모습을 보이자 적이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병력을 재구성하는 모습을 보건대, 특별히 백호대 군사들을 우대하지 않고 편성해 더욱 안심이 되었다. 비록 그 일로 참장 라혼이 별동금군의 장령들에게 부장(部將)으로서의 입지를 굳혔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
대원수 마동치가 이끄는 9만 본군은 일망평에서 후선의 10만 대군과 마주하며 산발적인 충돌을 계속했다. 대장 금영월이 이끄는 2만 6000의 별동금군은 천원군과 다른 경로로 이동하여 일망평으로 들어왔다. 이로써 조정의 천원군은 미리 들어와 있던 갑주의 서병을 합하여 총 11만, 양측 모두 21만 대군이 일망평에 집결했다.
“대장군, 대원수께서 별동금군이 좌군의 역할을 해주길 원합니다.”
“알았네. 대원수에게 그리 전해주게.”
“예!”
대원수 마동치의 전령이 대장군 금영월에게 읍(揖)하고 물러가자 라혼이 나서며 말했다.
“대장군, 후선군은 여기서 끝장을 볼 속셈인가 봅니다.”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러나 그들에게 무슨 필승의 비책이라도 있는 것일까?”
“일망평은 황무지이지만 마군의 비율이 높은 천원군에게 더없이 유리한 곳입니다. 제가 알기로, 후선의 대군은 마군이 아닌 보군 위주로 편성되어 있는 것으로 들었는데 어찌 이곳을 택한 것일까요?”
후선군이 앙신성에 들어올 때 보군 8만, 마군 3만을 가지고 들어왔었다. 후에 조정의 천원군에 대항하기 위해 후려와 동인에서 보내온 원군과 앙신에서 군병을 모아 지원함으로써 20만에 육박하는 군세가 되었지만 기병(騎兵)의 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군마의 산지가 대륙 천호(天湖)의 북쪽 천북(天北)이라 고금을 통털어 천남(天南)에 들어섰던 나라들은 마군의 비율이 높지 않았다. 하지만 후려나 남례성 지방은 예로부터 상병(象兵)을 운용하고 있었기에 기병의 부족함을 메우고도 남았다. 하나 일망평에서 코끼리를 보았다는 정보는 아직 없었다.
“일단 본군과 적당한 거리를 둔 곳에 진을 치고 척후를 철저히 하는 도리밖에….”
***
백호대가 해체되자 이제껏 백호나한을 주군이라 부르며 섬기던 백호대의 군사들은 묘한 상실감과 배신감에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사실상 백호영의 1200 무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버림받은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이런 경우를 당하다니….”
평진대(平珍對)와 명가직(明可直)은 생판 모르는 현무문 출신의 소위(少尉)에게 한 소리 듣고 울화가 치미는 듯 투덜거렸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난들 아나.”
“금군들과 같이하는 건 좋은데, 동지들을 뿔뿔이 흩어놓을 것까지는 없는 거잖아!”
“누가 아니래. 진대, 그것들 봤어!”
“뭐? 그 청룡문 친구들 말인가?”
“주작문은 어떻고. 완전히 오합지졸이 따로 없더군.”
“그래. 차라리 거칠긴 하지만 오히려 폭마방 놈들이 훨씬 믿을 만하더군.”
평진대와 명가직은 힘든 훈련을 같이하며 한솥밥 먹던 믿을 만한 동지들과 떨어져 정말 같잖아 보이는 현무문 출신의 마군들을 보자 전장에서 그들에게 생명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그래서 자신들을 이런 상태로 몰아넣은 주군이 원망스러웠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부장(部長) 이상의 지위를 가진 백호영 무사들이 모두 백호영에 남는 바람에 대부분의 백호대 군사들은 새로운 상관을 모셔야 했다. 보군으로 분류되었던 백호수문금군이 라혼에 의해 마군으로 바뀌었고, 상경의 금군들 중에서 천원군을 차출할 때 마군은 전원 현무문 출신들이었다. 그래서 마군이 된 백호수문금군은 현무문 출신 상관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힘든 훈련을 견뎌낸 백호대 군사들 눈에는 현무문 출신 상관들의 역량이 눈에 차질 않았다. 상경 청인성에서 그나마 가장 정예로 취급되던 현무문 금군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그저 그냥 끌려온 청룡, 주작의 금군은 정말 그 꼴이 가관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화적패 출신의 군사들이 더욱 믿을 만하게 보일 정도였다.
***
일망평에서의 대치는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후선군은 진지를 굳게 지키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척후대들끼리만 산발적인 소규모 충돌이 있을 뿐 대규모 접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뭐야? 남례성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뿐만 아니라 동영, 남상에서도 조정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당했군.”
후선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천원대원수 마동치는 허탈해하면서도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모두 후선에게 가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조정에서는 어찌하길 원하는가?”
마동치는 전령이 내민, 내용을 알 수 없도록 밀봉한 봉서(封書)를 받아들고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평안천원군은 조정의 뜻에 따르겠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충(忠)!”
마동치는 전령이 떠나자 깊이 한숨을 내쉬며 전략 회의를 소집했다. 다음날 천원군의 모든 장수(將帥)들이 한자리에 모여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조정에서는 앙신성의 일보다 남례성과 남상의 일을 먼저 해결하길 바라고 있네.”
“불가(不可)합니다. 원평부에 아직 5만 대군이 있고 반란의 주력은 앙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대로 병을 물리면 필패(必敗)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원수!”
“조용히들 하시오!”
천원군 부원수 상장 사법린이 나서며 ‘절대불가야(絶代不可也)!’를 연발하는 제장들을 진정시키고 한 가지 타협안을 내놓았다.
“여기서 병을 물리는 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하나 병을 나누는 방법도 있습니다.”
“….”
사법린은 잠깐 동안의 침묵으로 중인들의 주목도를 높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정확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남례성과 남상의 반란은 후선의 경우처럼 반란과 같이 일시에 대군이 움직인 반란이 아닙니다. 그렇다는 것은 약 2만 대군이면 능히 토벌이 가능하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
사법린의 입에서 2만이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장수들의 눈이 일제히 별동금군에게 쏠렸다.
“험! 부원수의 의견대로 그 일을 금 대장이 맡아주셔야겠소.”
“대원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음!”
조정에서 앙신성의 일보다 남상(濫觴)과 남례성(南禮省)의 일을 중하게 여긴 이유는 그곳이 인시드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남상은 거대한 섬으로 서역(西域)이라 불리는 인시드 대륙과 남부 무역 항로를 잇는 중요한 곳이었다. 인시드 대륙의 남주(南州)에서 중간중간 작은 섬들을 거쳐 남상을 따라 남례성의 서쪽 연안, 계주(癸州) 연안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무주(戊州) 서경(西京) 황미성(黃未城)에 다다르는 무역 항로였다. 즉 조정의 입장에서 남상과 남례성을 잃는다는 것은 막대한 이익이 보장된 남부 항로를 잃는다는 것을 뜻했다. 동영(東營)은 어차피 후려(後慮)를 거쳐가야 하고 사실상 조정의 관심이 먼 그야말로 이역(異域)이므로 후선의 일을 마무리하고 금수령 등으로 압박해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수인 조정의 입장에서는 후선군의 일보다 막대한 부(富)가 걸려 있는 남상과 남례성의 일이 더욱 중했던 것이다.
“제장들도 일다시피, 금 대장군의 2만 별동금군이 빠지면 전력의 공백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 갑주의 응원군을 파견하기로 했다고 한다.”
“….”
“금 대장군!”
“말씀하십시오, 대원수.”
“아시다시피 남례성은 그 땅은 넓으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많은 곳이오. 또한 조정에서 원하는 것은 남례성 내륙이 아니라 남서해를 따라 연이어진 항로를 중하게 여기오. 남례 바로 북쪽에 면한 계주(癸州)의 돈제가(豚帝家)에서 군사를 내고, 무주(戊州) 양제가(羊帝家)에서 군선을 내기로 했소. 그러니 경주(慶州)를 거쳐 계주 흑해성(黑亥城)으로 가시오.”
“알겠습니다, 대원수.”
일은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별개로 움직이던 별동금군이었기에 사흘 만에 좌군 역할 중군에서 차출된 구사들에게 맡기고 계주의 주도 흑해성을 목표로 행군을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전력의 공백이 생겼지만 평야 지대에서 마군의 수가 절대 부족한 후선군에 밀릴 이유가 없었다.
라혼은 금영월의 재가를 얻어 휘하의 백호영 무사들을 대략 100기(騎)씩 쪼개 모병관으로 삼아 경주와 계주로 미리 보냈다. 그들의 임무는 군사를 모집하는 것과 동시에 남례성에서 일어난 반란의 정확한 사정과 기본적인 정보를 모으는 것이었다.
***
“뭐야! 백호나한이 온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천상의 미공자가 자의를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섭선을 부치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천하제일 미인 천상천화의 남편이라는 그 백호나한 말인가?”
“그렇습니다.”
“백호나한을 꺾으면 천상천화는 물론 빙기옥골의 미녀들이 득실댄다는 여인천궁의 모든 미인들을 얻게 된다고 했겠다!”
“그것은 그저 헛소문일 뿐입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숭무공(崇武公) 원공반(猿孔磻)을 꺾은 고수 중의 고수입니다.”
그러나 돈제가의 늙은 가신의 말은 젊은 돈제(豚帝)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주를 다스리는 돈제가의 돈제 돈화린(豚華燐)은 천하의 호색한이라는 백호나한을 둘도 없는 호적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무공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여인을 다루는 것에서였지만….
“내 꿈은 천하제일 미녀를 아내로 삼는 것이다. 하나 천상천화는 세상에 알려지기 이전부터 다른 남자의 아내였다. 그러나 내 기필코 백호나한을 꺾어 천상천화를 얻으리라!”
“전하, 체통 좀 지키십시오! 글쎄 그 소문은 그저 하는 말이고, 설혹 사실이라 할지라도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그를 어찌하기는 어렵습니다.”
“태사, 날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오? 세상에 적수가 없다며 술이나 퍼먹는 원숭이 한 놈 정도 꺾었다고 무슨 천하제일 고수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
돈제가의 태사이자 돈제 돈화린의 후견인인 저초(猪艸)는 자신의 생각이 망상이란 것을 인정하지 않는 돈화린에게 조정의 부탁대로 1만 명의 군사들 모집하는 일에 대해 물었다.
“이번에 조정에서 남례성과 남상에서 발생한 반란을 토벌키 위해 앙신성에 있는 천원군 중 일부를 이곳으로 보내며 1만의 병력을 지원해줄 것을 부탁해왔습니다. 그러니….”
“10만을 징병하시오.”
“예?”
돈화린 이제까지 얼빠진 듯한 모습을 접고 제왕의 위엄을 드러내며 다시 말했다.
“조정은 이미 힘이 없소. 앙신성으로 보낸 천원군은 엄밀히 말해서 조정의 군사라기보다 서제가의 서병이나 진배없소. 이곳으로 보낸 천원군은 아마도 상경의 금군 출신 군사들일 것이오.”
“….”
“남례성과 남상의 반란이 일어난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에게 명분이 생겼으니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해주어야겠지.”
모르는 사람들은 돈화린이 기라성 같은 숙부들을 제치고 돈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까지 세 돈제를 모신 태사 저초가 후견인이라서 그런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초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돈화린에게 있어 가장 뜻이 잘 맞는 양신(良臣)일 뿐이었다. 그러나 돈화린에게 저초는 든든한 지지자였다. 아직 젊은 나이 때문에 무슨 일을 시작할 때 경륜이 어떻고 경험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때마다 늙은 신하 저초가 나서서 해결해주었다. 사실상 돈제가의 양대 기둥인 셈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돈제의 10만 양병을 이야기하자 저초는 일을 반대할 명분을 찾기보다 거기에 소요될 자금과 방법을 생각했다.
“그리고 이 참에 낭자군(娘子軍)을 모집해서 그녀들에게 호위를 맡기는 것도 같이….”
“그건 안 됩니다.”
“아니, 10만 대군을 훈련시키고 운용할 인재는 계주에서 날 호위하는 병들이 유일한데 돈제 체면에 맨몸으로 있을 수는 없잖소.”
“그것도 일리 있는 말씀이지만 낭자군은 안 됩니다.”
“그런!”
“정 고집 피우신다면 초례를 그 낭자군 대장으로 삼겠습니다.”
“없었던 걸로 합시다.”
돈제가 태사 저초의 손녀인 저초례(猪超禮)가 언급되자 돈화린은 금세 꼬리를 내렸다. 저초례는 천하의 여장부로 무예가 출중했지만 기골이 너무(?) 장대한 여인이었다. 세상 무서운 것 없는 돈화린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을 한 가지 꼽으라면 주저 없이 꼽을 그런 존재였다. 저초도 그것을 잘 알고 있어 손녀의 이름을 끼워 넣자 바로 꼬리 내리는 자의 청년에게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비록 기골이 장대한(?) 귀여운 손녀가 저렇게까지 싫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째 말이 이상하십니다.”
“뭐가요? 가만 생각해보니 무예가 출중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여인들은 천상천화가 소궁주로 있다는 여인천궁뿐인데 역시 백호나한을 꺾어야….”
다시금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는, 계주를 다스리는 돈제가의 주인 돈제 돈화린이었다.
***
수인들이 십이표기(十二標旗)를 앞세우고 세상을 휩쓸 때 수병(獸兵)들의 수는 35만, 그 수병들에 맞섰던 대선제국(大鮮帝國)의 병력은 80만, 남상(濫賞), 대원(大元), 후려(後慮), 동초(動哨), 피사(詖辭), 도남(圖南) 등의 병력은 전부 200만에 육박했다. 대륙의 패권을 차지한 대선제국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던 후려에만 정예 강병이 50만이었다. 그런 천하를 십이표기의 주인들인 십이진가(十二眞家)는 50년 만에 자신들의 발 아래 무릎 꿇게 했다.
“수인들이 세상에 나선 지 근 반천 년이 지났구려.”
“전하, 어인 말씀이십니까?”
경주를 지배하는 원제가(猿帝家)의 원제(猿帝) 원오부(猿吳負)는 이제 기력이 쇠한 노구를 이끌고 우거진 밀림처럼 꾸며놓은 경주의 주도 백신성(白申城) 원궁(猿宮) 정원을 거닐었다. 붉은 곤룡포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늙은 원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친구였고, 지금껏 함께 늙어온 신하라기보다는 벗이 되다시피 한 지문공(至文公) 성성대(猩猩大)와 하늘을 가리는 밀림 안을 거닐며 두서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문공, 고서나 옛이야기책을 보면 400년 간 천하의 주인 노릇을 하던 수인가들은 인간들에게 한낱 요괴 취급을 받았었소.”
“그거야 다 옛이야기 아닙니까?”
“후우~! 그것은 앞으로의 일이 될지 모르오.”
“….”
성성대는 원오부가 원제가 되기 전부터 알아온 오랜 벗. 친구(親舊)였다. 그렇기 때문에 원제가 무엇을 말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수인들은 원래 인간들에게 있어 신(神)이었다. 인간들에게 원숭이의 영활함, 호랑이의 위엄, 하늘을 나는 새의 능력, 뱀이 허물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모습, 그 모든 것이 경이요. 숭배의 대상이고 또한 가장 무서운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이자, 경쟁자 그리고 식량이었다. 그렇게 같이 부대끼며 거대한 자연의 도리에 따라 살아가던 어느 날 인간은 변해갔다. 식량을 찾아 떠돌던 것을 그만두고 한곳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야생 과일이나 사냥한 고기 외에 새로운 식량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곡식(穀食)이었다. 딱딱한 들풀의 씨앗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동물은 먹지 않는 그것을 먹이로 하는 것이라고는 고작 작은 새 같은 것뿐인 경쟁자 없는 식량을 인간은 찾아내고 만 것이다. 그것으로 인간은 인간과 금수(禽獸)는 별개의 것처럼 분리되어 금수의 모습을 한 그림이나 나무토막에 제사를 지내면서부터 살아 있는 금수를 적대시했다. 이제 늑대나 곰은 경쟁자가 아니라 약탈자였고, 곧 자신들이 사는 곳에 그들이 피할 정도로 인간은 강해졌다. 그러나 인간은 새로운 경쟁자를 만났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었다.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을 이기기 위해 강력한 무언가와 닮으려 노력했고, 스스로 그것이 되고자 노력했다. 거기서 지금의 인간의 모습과 짐승의 모습을 넘나드는 수인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수인들은 인간 자체를 신으로 섬기는 인간들과의 오랜 싸움을 시작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어떻게 싸웠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경쟁에서 짐승이 아닌 하늘, 땅, 그리고 인간을 섬기는 족속들이 이겼다는 것 외엔…. 그렇게 신격의 위치에 있던 수인들은 한낱 요괴로 불리면서 인간들에게 쫓기고 쫓겨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오지에 자리잡고 종(種)을 이어갔다. 그렇게 수천 년이 흐르고 나서 다시금 수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천하를 차지한 수인들은 인간을 노예로 삼지 않았다. 수인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인간들이 수인들을 사람으로 인정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지문공, 우리들이 사람으로 인정받기에 400년은 너무 짧았소. 예로부터 천자의 상징이었던 황룡이 뒤로 물러난 순간부터 천하는 흔들리기 시작했소. 황룡의 다스림은 참을 수 있는 인간이지만 호랑이나 쥐새끼의 다스림은 참을 수 없는 모양이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롭니다. 하나 원주 용황가(龍皇家)는 황룡(黃龍)이 아닙니다.”
“황룡이 아니라니?”
조용히 원제의 말을 듣기만 하던 지문공 성성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은 청룡(靑龍)입니다.”
“청룡?”
“400, 아니 500년 전 수인들을 규합해 100여 년 간 힘을 기르고 그 토대를 마련한 것은 분명 황룡입니다. 그러나 400년 전 원주 황진성에 터를 잡고 천하를 다스리던 용황은 바로 청룡입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그리고 황룡은 동서남북중의 다섯 방향을 가리키는 방신(方神)이면서 탄생, 생장, 결실, 휴식,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밑바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것대로 지금의 정세를 설명하자면, 황룡이 수인 천하의 토대를 만들었고 청룡이 수인들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청룡의 운이 끝나고 주작이 청공을 비상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대로라면 수인 천하는 깨지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바로 황룡이 만든 토대 위에서 천자의 운이 바꾸어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는 과정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수인 천하는 계속된다는 말인가?”
“후후후, 전하. 이것은 그저 호사가들이 하는 말일 뿐입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후려는 주작의 땅입니다. 그리고 강무세가의 선조는 주작의 피를 받아 태어났다고 하니 그저 흘려버릴 이야기는 아니지요.”
후선을 일으킨 주역인 강무세가가 주작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하나 지금은 강무씨(姜武氏)들도, 그들이 일으킨 후선군을 토벌하는 조정에서도 그 사실을 주장하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조정의 입장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면 조정이 천명에 반하는 일을 하는 셈이 되고, 강무세가에서 그것을 떠들면 자신들의 지지 기반 중 하나인 정립천하(正立天下)를 외치는 무리들이 대거 이반(離反)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즉 지문공의 말처럼 그들에게 있어 단순한 호사가들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또 우습게 된 것이 흑막에서 현무(玄武)의 맥을 이은 존재들이 있는데, 그들이 세상에 나오려 하는 징조를 보이고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24년 전 호제가의 주도로 이루어진 ‘묘묵(猫墨)의 옥’ 또한 석연찮은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그것이 백호 탄생에 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지요.”
“공의 말을 들어보면 순서상으론 다음 천하의 주인은 주작이지만 그것은 의미 없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겠소?”
“그렇습니다. 천지(天地)는 곧 우주(宇宙), 사람은 언제나 우주의 대질서를 무너뜨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천지인(天地人)이라 하지요.”
원제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산책을 마치고 대전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내관이 다가와 지문공에게 목례를 하고 원제에게 아뢰었다.
“전하, 숭무공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 공반이가?”
원제 원오부는 숭무공(崇武公) 원공반(猿孔磻)이 왔다는 말에 반색하며 기뻐했다.
“그래 공반이는 지금 어디 있느냐?”
“숭무공께서는 지금 세자저하와 같이 계십니다.”
“그런가?”
지문공은 세자저하의 이야기가 내관의 입에서 나오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원제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원제 나이 60에 얻은 세자는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 몸이 약해서인지는 몰라도 원제가에서 태어난 자손의 재능이 뛰어나질 못했다. 때문에 비록 세자에 책봉되어 있지만 원제는 병약하고 우둔한 세자보다 재능이 넘치다 못해 주체를 못하는 숭무공 원공반에게 더 정을 주었다. 원공반은 원래 후씨(猴氏)로 후반(猴磻)이었다. 원제가의 방계 가문인 후가(猴家)의 손이었던 후반이 15세 때 그 뛰어난 재능으로 원제가가 매년 개최하는 무술 대회에서 우승하자 그 뛰어남에 반한 원제가 후반에게 원씨 성을 내리고 20세가 되자 숭무공의 작위까지 하사하기에 이른다. 후반이 원공반이 되어 원제가의 후원으로 200년 전 한때 천하제일검이었던 일검자 원숭의 무공을 얻고, 원숭이 유운검선을 설복시키기 위해 연구한 절세 비공까지 얻었다. 그리고 그 무공으로 당시 수인 제일 고수 무골후(武骨侯) 호장(虎壯)을 꺾음으로써 명실상부하게 새로운 관부 제일 고수의 명예와 숭무공의 작위를 받은 것이다. 그러니 재능 있는 자를 좋아하는 원제가의 가풍 때문에 누구나 그를 좋아했고, 그 때문에 세자의 지위가 위태로운 세자조차도 그를 사랑했다.
‘허허, 이거야. 원제가의 가풍이 그러하지만 본래 후씨인 숭무공의 존재는 원제가의 짐이 될 것이 분명한데, 이를 어찌해야 하나….’
숭무공은 정치적 야심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그러나 그 개인이 정치적 야심이 없다고 하여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없지 않았다. 재능 없는 군주 밑에 뛰어난 신하는 그저 짐일 뿐이었다.
“허허허허허… 그동안 찾아오질 않아 얼굴을 잊어버릴 뻔했도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대를 책할 뜻은 없었네. 그래 듣기로는, 누군가에게 패했다 들었는데 그것이 진정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그와 겨루어 하늘 밖에 있는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자네에게 하늘의 높음을 가르쳐준 그는 누구인가? 명호가 백호나한이라지?”
재능 있는 자를 좋아하는 원제가 백호나한 라혼의 이름을 모를 리 없었다. 원제가 듣고 싶은 것은 직접 손을 섞어본 숭무공의 평가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는 감히 장담하건대 천하제일 고수입니다. 이번에 전하를 찾아뵌 것도 사실은 그 일 때문입니다.”
“말해보라!”
원제는 목표를 발견한 젊은 무인의 반짝이는 눈으로 주저 없이 그를 평가하는 모습에 백호나한이란 존재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이번에 남례성과 남상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키 위해 앙신성에서 후선군과 대치 중인 천원군 중 일부를 남례성으로 돌리기 위해 경주를 거쳐 계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좌도 잘 알고 있는 일이지.”
“지금 이곳으로 오는 천원군에 백호나한이 부장으로 있습니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그를 따라가고 싶은 게로군.”
원공반이 일개 야인이라면 그대로 백호나한을 따라나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공반은 경주의 지배자 원제가의 숭무공 작위를 가진 존재였다. 숭무공 같은 중량감 있는 인사가 조정의 군대에 참여하는 것은 원제 입장에서도 간단히 생각하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원제는 즉답을 피했다.
“전하, 원군사령 입시이옵니다.”
“들라 이르라!”
원군사령(猿軍司令) 원산(猿山)은 원제가가 거느린 원군(猿軍)의 최고 수장이었다. 물론 경주 군사력의 모든 권한은 원제에게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원군사령이 원군의 지휘권을 행사했다.
“원군사령 원산, 원제 전하를 뵈옵니다.”
중년의 중후한 관록이 엿보이는 갑주를 착용한 무장이 원제에게 군례(軍禮)를 올렸다. 원제는 갑주를 입고 자신을 배알하러 온 원군사령을 이채 어린 눈으로 보며 물었다.
“어서 오시오, 원군사령. 한데 경(卿)은 왜 군장을 한 것이오?”
“전하, 갑주를 입고 전하를 배알하는 신을 용서하십시오. 다름이 아니오라, 자신들을 천원군이라 밝힌 무리들이 저희의 허가도 받지 않고 군사를 모으고 있습니다.”
“뭐라? 감히 경주에서 내 허락도 없이 병을 모아?”
“명을 내려주신다면 제가 그 불측한 놈들을 잡아들이겠습니다.”
원제는 진노하면서도 원군사령 원산의 청대로 그런 명(命)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조정의 천원군이었다. 가뜩이나 여기저기 부침이 많은 조정이었다. 여기서 십이진가 중 하나인 원제가가 조정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 좋을 것이 없었다.
“전하, 제가 천원군을 이끄는 수장을 만나보겠습니다. 이 일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참에 우리도 자위할 만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으음~ 경은 어찌 생각하시오?”
“숭무공이 나서준다면 저는 그저 만반의 대비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원군의 수를 늘리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가?”
무인인 숭무공과 무장인 원산은 그렇게 말한 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원제의 결정을 기다렸다. 원제 원오부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 지 이미 오래였다. 안 그래도 바로 동쪽에 면한 갑주 서제가의 서병(鼠兵)에게 적지 않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조정의 천원군이 한 괘씸한 행위는 어쩌면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이제 원제도 그것으로 당당하게 대군을 모을 수 있는 명분을 찾은 셈이었다. 그래서 짐짓 겉으로는 진노한 모습을 보이면서 지문공을 불러 이 상황을 이용하려 했는데 숭무공이 그 가려운 구석을 긁어준 것이었다.
“내일, 내일 이 일을 다시 의논하겠다. 숭무공과 원군사령은 물러갔다가 내일 다시 오라!”
“명, 받드오이다.”
원제는 두 사람이 물러가자 곧 지문공 성성대를 찾았다. 퇴궐한 지문공은 집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다 궁에서 급한 연락을 받고, 해가 질 무렵에서야 다시 입궁해 원제를 배알했다. 원제는 낮에 있었던 숭무공의 부탁과 원군사령이 보고한 내용, 그리고 나름대로 취합한 사정들을 이야기하고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지문공의 의견도 원제의 생각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전하, 원군 일부와 모병된 군사들을 숭무공에게 주어 천원군에 종군케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
“우리는 천원군의 요청에 군사를 내주었으니 모자란 군사를 보충하는 명분으로 병을 모으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수인 제일 고수인 숭무공이 종군까지 하는 마당이니 조정은 우리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원제는 막연하게 잡힐 듯 말 듯하던 기회를 구체적인 계획으로 만드는 지문공의 역량에 내심 감탄하며 세부 사항을 의논했다. 그러나 그 계책이 원제가에서 숭무공을 떼어놓으려는 안배가 있음을 원제는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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