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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트레일 8구간 제2부
옥계저수지-옥병계-석문담-보덕교-
내포문화숲길예산센터-상가리마을회관-
남연군묘&가야사지-옹달샘-대문동쉼터
20260716
1.대원군 욕망의 늪 남연군 묘지
지난 5월 7일 동서트레일 9구간 탐방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윤봉길 의사 유적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고암 이응노생가기념관에서 마쳤다. 그로부터 2개월이 넘어서 윤봉길 의사 유적 주차장에 다시 왔다. 이번에는 동서트레일 8구간 탐방을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8구간 역방향 탐방은 예산군 덕산면의 시량리, 대치리, 옥계리, 상가리 지역을 통과하여 충남 서산군으로 넘어가 운산면 원평리를 지나 용현리 마애삼존여래상 출입구에서 마치게 된다. 주요 경유지는 가야산 원효봉의 의상암터와 원효암터, 덕산천의 옥병계와 석문담, 예산 가야사지와 남연군의 묘, 서산 보원사지와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다. 동서트레일 8구간 역방향 탐방을 3부로 나누어 정리한다.
제2부(옥계저수지~대문동쉼터)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중개골마을에 배롱나무 붉은 꽃들이 팝콘이 터지듯 피어올라 한여름의 더위를 씻어준다. 은행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푸른 은행 열매들은 노란 색을 띄며 익어간다. 중개골마을 아래에는 옥계저수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옥계저수지는 예산군의 여러 저수지들 중 두 번째로 큰 저수지로, 덕산면 상가리의 서원산과 가야산 계곡의 남연군묘 근방에서 발원하는 덕산천을 막아 1957년 준공하였다고 한다. 옥계저수지 댐 아래에는 가야구곡(伽倻九曲) 중 제1곡인 관어대가 있다고 하며, 예산군에서는 가야산 계곡의 아름다운 비경 아홉 곳인 '가야구곡' 녹색길을 개통하여 탐방길을 안내하고 있다.
중개골마을에서 가야산로로 나갔다. 가야산로는 서북쪽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계곡과 동남쪽 덕산면 읍내리 덕산시장을 이어주는 도로이다. 동쪽 덕산시장 뱡향으로 가야산로를 따라가면 덕산천을 건너는 가야교 다리가 있다. 가야산로의 가야교는 덕산천이 옥계저수지로 유입되는 입구에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을 가야구곡 제2곡 옥병계라 이른다. 가야교 난간 기둥과 기둥 사이의 조형물에 적힌 '玉屛溪'와 '洗耳嵓' 글자가 이곳이 옥병계이고 병풍 바위에 세이암 글자가 새겨져 있음을 알려준다.
가야구곡(伽倻九曲)을 지정한 인물은 예산군 덕산 지역에 거주하였던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라고 한다. 그는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가야산 계곡의 아름다운 비경 아홉 곳을 가야구곡(伽倻九曲)이라 칭하고 문집에 기록해 놓음으로써 가야구곡이 비롯되었다. 가야구곡은 제1곡 관어대(觀魚臺), 제2곡 옥병계(玉屛溪), 제3곡 습운천(濕雲泉), 제4곡 석문담(石門潭), 제5곡 영화담(暎花潭), 제6곡 탁석천(卓錫川), 제7곡 와룡담(臥龍潭), 제8곡 고운벽(孤雲壁), 제9곡 옥량폭(玉梁瀑)을 이른다. 가야구곡은 여러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그 비경을 칭송하면서 가야구곡이 유명해졌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 후기 예산 지역에 유배되었던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라고 한다.
죽천 김진규가 덕산현으로 귀양을 와서 가야구곡을 탐방하며 와룡담(臥龍潭)과 석문담(石門潭), 옥병계(玉屏溪)에 글자를 새기고 옥병계(玉屏溪)에 고운 최치원의 글씨 '洗耳嵓'을 모사하여 새겼다. 또한 김진규는 회암서원 창립에도 관여하였는데, 덕산의 지명과 주자가 살던 지명이 같은 데 착안하여 호서 지역의 유림과 상의하여 회암서원을 창립하였다고 한다. 김진규는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으며, 그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신월리에 있다고 한다. 예산 가야산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 누가 모르며 칭송하지 않을 수 있으랴만, 파평 윤씨 병계 윤봉구가 가야구곡의 비경을 세상에 각인한 으뜸 인물이고, 그 다음으로 광산 김씨 죽천 김진규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가 칠언절구로 읊은 가야구곡 제1곡 관어대(觀魚臺)를 관어대 안내판을 통해 알아보았다. "一曲武夷上釣船(일곡무이상조선) 休言此曲只沙川(휴언차곡지사천) 漁臺己見西峯色(어대기견서봉색) 秀氣蒼然鎖暮烟(수기창연쇄모연) 한 굽이 돌아서니 무이곡처럼 낚싯배 떠있고/ 사천의 이 계곡도 더할 나위없네/ 어대 서쪽 봉우리 보노라니/ 푸른 봉우리에 걸친 저녁 연기 참으로 아름답구나)" 관어대는 '낚시하는 자리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1949년 옥계저수지 축조공사로 아름다운 절경지와 낚시터가 사라졌다. 옥계리의 원마을과 99칸의 대가를 자랑하던 병계 윤봉구의 고택도 사라졌다. 기록에 의하면 현 저수지 한복판을 굽이쳐 흐르는 옥계천은 길가 옆 넓은 천연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어 가야동 입구로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절경을 느끼게 해준 곳이다. 저수지 한가운데 옛길은 사라지고 아리랑 고개로 올라 헌종태실 후면으로 이어지는 저수지 갓길이 새로 생겼다.(안내판)
이제부터 덕산천 둑방을 따라 올라간다. 좀더 치밀했더라면 가야교를 건너 맞은편의 옥병계 암벽의 각자를 살폈어야 했다. 그리고 여유가 있다면 옥병계 위쪽 정자가 있었던 곳으로도 올라보아야 했다. 그 뒤쪽 솔숲에는 황새 서식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을 접어두고, 그냥 덕산천을 거슬러 올라간다. 양쪽으로 산줄기가 이어지고, 그 사이에 푸르른 들녘이 펼쳐지며 그 사이로 덕산천이 흘러간다. 아름답다고 하는 덕산천이 인간의 손길이 어수선하게 미쳐서 어지럽다. 덕산천을 자연적으로 내버려 두거나 제대로 정비를 해야 한다. 덕산천은 이도저도 아닌 모습으로 지난 시절의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며 가슴 아프게 흘러간다.
덕산천 둑방에서는 가야산의 주요 봉우리 가야봉, 석문봉, 옥양봉이 분명히 보이는데 석문봉은 정상이 운무에 가려 있고, 원효봉은 머리만 보여준다. 날씨 청명한 날 가야산 산줄기를 산행한다면 내포의 곳곳을 조망할 수 있을 것 같다. 둑방이 없이 숲과 맞닿아 있는 덕산천 옆 숲길을 따라 덕산천을 올라가면 가야구곡 제4곡 석문담(石門潭)에 이른다. 석문담은 두 바위 사이로 폭포수가 떨어져 못을 이룬다. 두 바위 사이를 석문, 석문 아래의 못을 석문담이라 이른다. 폭포수가 옥같이 부서지는 석문담 풍경이 아름다우며 석문담 위쪽 넓은 암반은 쉬기에 적합하다. 죽천 김진규는 석문 바위에 '石門潭'을, 우암 송시열은 암반에 '醉石'을 각자하였다. 암반에서 술을 마시며醉 바둑을 즐겨서石, '醉石'이라 각자했다고 한다. '醉石' 각자는 암반에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데, '石門潭' 각자는 석문 오른쪽 바위에 새겨져 있어 보기가 힘들다.
'醉石' 각자가 있는 암반에서 점심을 먹고 숲길에서 덕산천 둑방으로 올라가 둑방을 따라 올라간다. 덕산면 상가리 들녘의 벼들이 푸르게 싱싱하다. 추석 즈음에 수확할 수 있을까? 둑방에서 바라보면, 가야산 옥양봉 능선이 북쪽을 가로막고, 가야봉 능선이 서쪽으로, 서원산 능선이 동쪽으로 이어지며 삼면을 에워싸고 있어 상가리 지역은 막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흉한 것을 막고 길한 것을 지켜주기에 이곳이 명당 지역일까?
덕산천의 보덕교를 건너 덕산면 상가리 마을로 나간다. 보덕교는 보덕사와 상가리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대원군은 두 명의 왕이 나온다는 천하의 명당에 자리잡은 가야사를 불태우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1845년에 가야사 자리로 이장하였다. 1852년에 태어난 둘째 아들이 1864년에 보위에 오르자 부처님에게 보답한다는 의미로 1865년에 보덕사(報德寺)를 서원산 남쪽 자락에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보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걸어오는 동안 이정목 진행 방향 날개에 적혀있던 내포문화숲길 예산센터에 이르렀다. 예산센터는 덕산도립공원 사무소에 더부살이하는데, 앞으로 동서트레일 안내소 또한 내포문화숲길 예산센터와 같은 신세가 될 것 같다. 가야산로를 따라 조금 오르면 상가리마을회관과 쉼터정자가 있고, 그 옆 가야산 농산물 판매장에 '오페르트보다 더 나쁜 짓! 고압선 계획 즉각 중단하라'는 알림막이 펼쳐져 있다. 조선이 통상을 거부하자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1868년 5월 아산만을 거쳐 구만포에 상륙하여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 도굴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하여 대원군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을 더욱 강화하였다. 고압선 송전탑 건설인지 고압선 지하 매설인지, 그 구체적인 장소는 어디일까? 고압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를 저지하려 한다면 상가리 주민들이 대원군이 되겠다는 것인가?
남연군의 묘로 올라갔다. 두 번째로 이곳에 온다. 지난 시절의 기억이 가물가물 흐릿하다. 묘지의 석물을 대충대충 살피고, 가야산 산줄기를 둘러보고 상가리 지역을 내려보았다. 이곳에 올라서니, 삼면이 막혀 있다는 생각이 남쪽으로 열려있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덕산천 둑방을 따라오며 올려볼 때는 이 지역이 막혀 있다고 생각했는데 남연군의 묘에서 내려볼 때는 남쪽으로 열려서 시원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명당일까? 자기 가문의 영광을 위해 명당을 차지할 생각으로 가야사의 주지에게 막대한 자금을 주고 가야사를 불태워 아버지의 묘를 이장한다는 생각과 행위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그 결과 아들이 왕이 되고 자신이 섭정하여 과연 나라의 실제적인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하였을까? 나라의 번영이 아닌 가문의 영광에만 몰두한 것이 아닐까? 그 욕망의 늪에 빠진 결과 조선은 어떻게 되었는가?
남연군의 묘에서 가야봉은 가깝다. 그 아래 상가저수지가 있고, 상가저수지 옆에 가야구곡의 제7곡 와룡담(臥龍潭)이 있으며, 그 위쪽에 제8곡 고운벽(孤雲壁), 제9곡 옥량폭(玉梁瀑)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상가저수지가 생기기 전의 가야구곡 최고의 비경이 현재의 상가저수지 위쪽이라고 할 것이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8) 선생은 제7곡 와룡담(臥龍潭)을 칠언절구로 이렇게 읊었다.
"七曲循溪泝機灘(칠곡순계소기탄) 蛟龍窟宅駭心看(교룡굴택해심간) 淵潛何日施能普(연잠하일시능보) 蘿壁沈吟五月寒(나벽심음오월한) 계곡 곳곳 여울 거쳐 일곱 굽이 다다르니/ 이무기 산다는 교룡굴 앞에 마음이 심란하다/ 못에 잠긴 이무기는 언제 나와 보시할 건가/ 담쟁이 붙은 벼랑 아래서 오월 추위를 느끼노라" 석문봉의 남동쪽, 능인골절 수렴동에서 흐르는 물과 산속 깊은 임해 속에서 내려오는 물이 가사봉 아래에서 합치는 곳에 폭포가 있으니 폭포는 높고 담은 깊고 넓다. 좌우 석벽은 창고한데 예로부터 용연이라 불렀으며 가뭄이 심하면 덕산군수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숙종 때 판서 죽천 김진규가 이소의 절벽에 와룡담 석자를 새겨 놓았다. 상류 쪽도 암반이 넓고 깨끗하며 조망이 좋아 옛 선비들은 와룡담이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도 하고 풍류도 즐겼다. 웅장한 가사봉과 광활한 혜목과 비벌계곡을 배경으로 수렴동의 병풍바위에 둘러싸인 이곳 풍치는 가야산 중 제일 아름다운 곳이다."(안내판) 오월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의 와룡담이 지금도 그럴까?
도보여행팀이 제한한 지정 시각에 도달할 수 있을까? 마음이 급해진다. 남연군의 묘를 내려가 남은들상여를 보관한 상여각을 들르지 않고 곧바로 덕산천을 건넜다. 지난 해 폭우로 인한 산사태 지역이 발생해 정상 코스인 옥양봉 등산로 방향으로의 탐방로가 폐쇄되어 우회로인 덕산-운산 임도를 따라 올라간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와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를 잇는 덕산-운산 임도는 동쪽으로 서원산을 바라보며, 옥양봉 서쪽 능선 자락으로 이어진다. 굽이도는 임도의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를 건너고 잠시 목축이며 쉬어가는 옹달샘을 지나치면 벽 모양으로 조성한 조형물이 나온다.
벽 모형 조형물의 벽면은 두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면은 예산군 가야산(伽倻山)의 유적인 보덕사, 남연군 묘, 가야사지를 그림과 함께 안내글로 설명하는 장면이고, 다른 장면은 원효대사의 깨달음 장면이다. 깨달음 장면의 핵심은 가야산 자락의 원효토굴이 깨달음의 장소라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발원이며 대중불교의 비조였던 원효대사의 "세상의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다.(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은 가야산에서 태어났다고 벽 모형 조형물이 주장한다. 어느 곳이 맞을까? 평택시 포승읍의 수도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1,350년 전의 일을 어떻게 고증할 수 있을까? 원효 이후의 불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꾸민 것은 아닐까? 장소와 관계 없이, 꾸밈의 진위와 관계 없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벽 모형 조형물 위쪽 잣나무갈림길 쉼터정자 앞에서 우회로는 동서트레일&내포불교순례길 정코스와 재회한다. 정코스는 옥양봉 서쪽 능선을 가로질러 잣나무쉼터에서 우회로인 덕산-운산 임도로 내려온다. 잣나무쉼터 갈림길에 우회로 알림막이 펼쳐져 있고 이제부터 정상 코스인 덕산-운산 임도를 따라 대문동 쉼터로 올라간다. 안내판에 "대문동 쉼터는 충청남도 예산과 서산의 경계에 위치하며, 가야산과 서원산을 연결하는 관문으로서 지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는데, 예산과 서산의 경계는 조금 더 위쪽, 옥양봉 동쪽 능선이 이어지는 곳일 것이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0.4km
전체 탐방 시간 : 6시간 23분
옥계가야길을 따라 덕산면 옥계리 중개골 마을을 내려가며 옥계저수지(玉溪貯水池)를 내려보았다.
옥계가야길을 따라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 중개골마을을 지나간다.
왼쪽 뒤 원효봉 능선의 계너미에서 내려와 계너미골을 건너 중개골마을로 내려왔다. 오른쪽 텃밭을 가꾸는 농부는 청량리에 거주하며 고향에 주기적으로 내려와 텃밭에 농작물을 재배한다고 한다.
덕산면 옥계리 중개골마을 옥계가야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여름꽃의 대명사 배롱나무 붉은 꽃들이 팝콘이 터지듯 탐스럽게 피었다.
배롱나무 옆 은행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은행(銀杏) 푸른 열매들이 노란 빛을 띄기 시작한다.
바로 앞에 옥계저수지가 보이는 옥계가야길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나간다.
옥계가야길에서 옥계저수지를 내려보았다. 옥계저수지 건너편에 가야구곡의 제1곡 관어대(觀魚臺)가 있다고 한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에 있는 1종 저수지 옥계저수지(玉溪貯水池)는 덕산저수지(德山貯水池)라고도 부르는데, 관개면적, 유역면적 등의 제원상의 규모 순위로는 예산군의 여러 저수지들 중 두 번째에 해당된다. 옥계저수지는 지역 주민들의 농업용 저수지이자 상수원으로서 옥계리를 비롯하여 읍내리, 신평리, 송산리, 상하리, 북문리, 시량리, 역리 등 8개 마을에 농업용수와 식수를 공급하고 있다. 1957년 10월 4일 착공하여 1957년 6월 29일 준공하였다. 1987년에 증축하였고, 2008년 12월 18일 수리시설의 개보수를 시작하여 2015년 12월 20일 완료하였다. 옥계저수지의 제방 높이는 14.8m, 제방 연장은 160.0m이다. 옥계저수지는 덕산면 중심지에서 약 2㎞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저수지 전체가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덕산도립공원에 포함되어 있어서 경관이 수려하고, 덕산온천과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사적 제229호]이 인근에 있다. 덕산면 옥계리는 시냇물이 옥같이 맑으므로 옥계리라 하였다. 옥계리는 원효봉, 가야봉, 석문봉 등의 산지로 둘러싸인 산촌이어서 고개와 골짜기가 발달해 있고, 마을 앞으로 덕산천이 흐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덕산면 옥계리 옥계가야길을 따라 가야산로로 나간다.
가야산로의 동서트레일 이정목 앞에서 중앙 뒤 걸어온 원효봉 능선과 맨 왼쪽 뒤의 계너미와 그 아래 계너미골, 이정목 뒤의 중개골 마을과 옥계가야길을 살폈다. 중앙 맨 뒤에 원효봉이 살짝 보인다.
가야산로는 덕산천의 가야교를 건너 덕산시장 방향으로 달려간다. 동서트레일은 왼쪽 덕산천 둑방으로 이어간다.
원효암터 2.9km, 내포문화숲길 예산센터 2.2km 지점, 덕산천 둑방 출입구에 동서트레일 옥병계 이정목이 서 있다.
가야교 난간 기둥에 옥병계(玉屛溪) 표지판이 붙어 있고, 난간 기둥 사이의 공간 조형물에 세이암(洗耳嵒)이 적혀 있다.
이곳이 가야구곡의 제2곡 옥병계(玉屛溪)라고 한다. 덕산천 건너편 바위 벽면에 김진규의 글씨 옥병계(玉屛溪)와 세이암(洗耳嵒) 등 여러 글자들이 각자되어 있는데, 洗耳嵒 글씨는 최치원의 글씨를 김진규가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덕산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2㎞ 정도 가면 옥계리(玉溪里)가 있고, 옥계리의 입구를 이루고 있는 산모퉁이에 기암절경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토사가 깔려 있지만, 옛날에는 맑은 물이 암벽을 굽이쳐 지나갔고, 그 절벽 위에는 편편한 바위가 있어서 선비들이 글을 읽었다고 전해 온다. 신라시대 서산태수였던 최치원(崔致遠)은 편편한 바위에 세이암(洗耳嵒)이라는 세 글자를 남겼고, 숙종 때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판서도 덕산현에서 귀향살이를 할 때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암벽에 옥병계(玉屛溪)라고 새겨 놓았다고 한다. 아마도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 사이의 맑은 물이 새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고 먹이도 풍부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지금의 덕산저수지[옥계저수지] 북쪽 산에 큰 솔밭이 있었고, 수백 마리의 백로와 황새가 솔밭에 둥우리를 치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 솔밭의 남쪽 기슭에는 물이 가득 잠겨 있다고 하니 철새들의 먹이터로서 중요한 서식지였을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덕산천 옥병계 맞은편 둑방에서 가야산로 뒤쪽의 옥계리 중개골마을을 돌아보았다. 중앙 오른쪽 뒤에 원효봉이 봉긋하다.
옥계가야길을 따라서 옥계리 중개골마을을 지나 가야산로로 나와서 맨 왼쪽의 가야교 서단에서 덕산천 둑방으로 들어왔다.
옥병계를 다시 살핀다.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가 덕산현에서 귀양살이할 때 와룡담, 석문담에 글자를 새기고 세이암(洗耳嵓)이란 고운 최치원의 글씨도 김진규가 모사체로 써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18세기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었던 강문팔학사 병계 윤봉구(1683~1767) 선생이 이곳에 살며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 따 가야구곡(伽倻九曲)으로 했다. 가야산에서 흘러온 계곡의 아홉 굽이 경치를 말하는 것으로 옥병계는 '관어대'에 이어 제2곡이다. 조선시대 많은 문인, 관료들이 즐겨 찾던 유서 깊은 명소이다. 수직으로 병풍 모양 같아 '병풍바위'라 불렀다. 바위 아래로 티 없이 맑은 물이 흘러 '옥계'라 했으며 이 마을 유래도 이곳에서 유래되었다. 신라말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의 '洗耳嵓' 암각체가 '孤雲'이란 그의 호와 함께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죽천 김진규 선생이 새긴 '玉屏溪' 글씨, 청송 성수침의 '水哉臺' 등 여러 암각체가 남아있다. 개발로 옛 모습은 변했지만, 옛날에는 바위 위에 정자가 있었고 늘어선 낙락장송의 풍경과 가을 단풍은 한 폭의 동양화였다. 이곳에 아름다운 경치 없다고 말하지 말라. 자연의 소리를 벗 삼아 가야구곡길을 걸어보자. - 안내판
덕산천의 잠수교라고 불리는 세월교(洗越橋)를 건너 동쪽 제방으로 올라간다. 중앙 맨 뒤에 옥양봉이 안개에 가려 있다.
세월교(洗越橋)는 흄관(Hume pipe)과 시멘트를 이용하여 간이적으로 만든 소규모의 교량을 뜻한다. 하천에 흄관을 깔아 흄관 속으로 하천수가 지나갈 수 있도록 한 뒤, 시멘트를 위에 덮어 평평하게 만들어 사람이나 차량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한다. 하천 범람시 물 밑에 잠기기 때문에 하천수가 교량을 씻어 넘어 지나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지역에 따라서 빵빵교, 잠수교, 콧구멍다리 등의 바리에이션이 있다. 빵빵교나 콧구멍다리는 흄관의 구멍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어원은 일본어 洗い越し(아라이고시)다. 洗い越し는 길 위로 냇물이 흘러가도록 되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 용어를 한자만 한국 한자음으로 읽어 만들어진 용어다. - 나무위키
원효암터 3.1km, 내포문화숲길 예산센터 2.0km 지점, 세월교를 건너 제방으로 올라와 왼쪽 석문봉과 오른쪽 옥양봉을 확인한다.
덕산천 동쪽 둑방에서 가야산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왼쪽 뒤에 원효봉, 중앙에 가야봉, 맨 오른쪽 뒤에 석문봉이 운무에 가려 있다.
덕산천 둑방에서 가야산 산줄기를 다시 바라본다. 맨 왼쪽의 가야봉, 중앙 뒤의 석문봉, 오른쪽 뒤의 옥양봉을 확인한다.
덕산천은 삽교천의 제1지류로서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북서쪽에 있는 서원산과 가야산 계곡의 남연군묘 근방에서 발원하는 지방하천이다. 상류에서 하류로 이동하던 덕산천은 옥계저수지를 거쳐 삽교읍 수촌리에서 본류인 삽교천과 합류한다. 덕산천의 유로연장은 14㎞, 유역면적은 42.05㎢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덕산천 둑방의 농로를 따라 앞쪽의 골짜기를 건너 덕산천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오성농원 뒤쪽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오성농원 철조망 뒤쪽에서 걸어온 덕산천 둑방과 옥계리 지역을 돌아보았다. 중앙 뒤의 원효봉 능선의 계너미가 가늠된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속하는 법정리인 옥계리(玉溪里)는 이곳의 시냇물이 옥(玉)같이 맑아서 옥계리 지명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 덕산군(德山郡) 현내면(縣內面)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서문리(西門里), 중가리(中伽里)의 일부를 병합하고, 옥계리라 하여 예산군 덕산면에 편입되었다. 옥계리는 덕산면의 북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북문리·읍내리, 서쪽으로 상가리, 남쪽으로 시량리·사동리, 그리고 북쪽으로 상가리 및 봉산면 사석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윗개골, 사기점골, 아랫개골, 중개골 등이 있다. 도로는 규모가 가장 큰 가야산로가 옥계리의 서부, 중부, 및 동부 일대를 북서-남동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유적으로는 가야갑사지, 옥계리 사지, 석문담, 옥병계(玉屛溪), 흥녕군묘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길을 잘못 들어 오성농원 뒤쪽으로 들어오니 쉴바탕비(碑)가 서 있다. "이곳은 옛 분들이 나뭇짐을 이고 지고 가시다가 잠시 쉬어가시던 곳으로 지난날 가난했던 시절의 애환이 서린 곳입니다. - 남전 오완근"
쉴바탕비(碑) 앞면에서 운무에 덮인 가야산의 656.8m 석문봉을 바라본다. 동서트레일은 앞쪽 골짜기를 건너간다.
오성농원 철조망 앞 덕산천 둑방에서 덕산천으로 흘러드는 소하천의 좁은 골짜기를 건너 덕산천 숲으로 들어간다.
좁은 골짜기의 소하천을 건너 오성농원 철조망 앞 덕산천 둑방과 오른쪽 전신주 뒤 계너미를 가늠한다.
덕산천으로 흘러드는 소하천의 좁은 골짜기를 건너 붉은 리본을 표시로 삼아 덕산천 숲길을 따라간다.
지난해 폭우로 산골짜기가 무너져 내린 덕산천 숲의 피해지역을 통과한다.
가야구곡의 제4곡 석문담(石門潭)에 덕산천 물이 폭포수로 쏟아져 작은 못을 이룬다. 석문 오른쪽 바위에 石門潭이 새겨져 있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는 예산군 덕산 지역에 거주했던 인물로,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가야산(伽倻山) 계곡의 아름다운 비경 아홉 곳을 가야구곡(伽倻九曲)이라 칭하고 문집에 기록해 놓았다. 가야구곡은 제1곡 관어대(觀魚臺), 제2곡 옥병계(玉屛溪), 제3곡 습운천(濕雲泉), 제4곡 석문담(石門潭), 제5곡 영화담(暎花潭), 제6곡 탁석천(卓錫川), 제7곡 와룡담(臥龍潭), 제8곡 고운벽(孤雲壁), 제9곡 옥량폭(玉梁瀑)을 일컫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덕산천의 석문담 위쪽 숲길에 석문담(石門潭)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문을 읽고 암반의 '醉石' 각자는 쉽게 볼 수 있는데, '石門潭' 각자는 석문담 아래쪽에서 보아야 한다.
석문담(石門潭)은 가야구곡 중 제4곡이다. 넓고 깨끗한 백색 암반에 양쪽에 석문 모양의 돌기둥 사이로 폭포수가 떨어져 큰 못 웅덩이가 생겨 조화로운 경관을 자아내며 덕산 인근 사람들이 '천렵'으로 자주 찾던 곳이다. 우암 송시열이 시문을 읊으며 음각한 '취석(醉石)'이란 커다란 글씨를 볼 수 있는데, 취석은 술과 돌이란 뜻으로 바둑을 풍류로 인식한 조선의 선비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숙종의 부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인 죽천 김진규 선생이 석문 사이로 쏟아지는 폭포수에 감탄해 '石門潭'이란 암각체를 새겼다. 시원스러운 물줄기와 아름다운 경관에 귀양살이를 잊은 듯하다. 가야구곡을 설정한 병계 운봉구의 동생 石門 윤봉오 선생의 호 또한 이에 연유한다. - 안내판
덕산천이 폭포수로 떨어져 석문담을 이루고 흘러간다. 앞에 '醉石'이 새겨진 암반이 있다.
석문담(石門潭) 위쪽에 '醉石'이 각자된 암반이 있고, 그 뒤에 석문담(石門潭) 설명안내판이 서 있다.
우암 송시열의 글씨 '醉石'이 암반에 각자되어 있다. '醉石'이 각자된 암반 옆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한다.
'醉石'이 각자된 암반에서 중앙 뒤 가야산의 최고봉 678.2m 가야봉과 왼쪽 뒤의 604.7m 원효봉을 올려보았다.
영화담 0.62km, 관어대 2.71km 지점, 동서트레일은 현재 내포문화숲길과 가야구곡녹색길과 동행하고 있는 듯.
가야구곡녹색길은 덕산도립공원 가야산 자락의 아름다운 비경 아홉 곳에 대한 역사·문화·생태 자원을 활용한 스토리텔링 주제로 복원되었으며, 가야구곡의 유래는 조선 영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1~1767) 선생이 가야계곡의 아름다운 비경인 아홉 곳(관어대, 옥병계, 습운천, 석문담, 영화담, 탁석천, 와룡담, 고운벽, 옥량폭)을 ‘가야구곡’이라 칭하고 문집에 기록해 놓음으로써 비롯되었다. 또한 가야구곡을 따라 산재해 있는 관광자원인 덕산온천, 남연군묘, 덕산향교, 헌종태실, 광덕사, 보덕사, 옥계저수지, 상가저수지, 가야산 등 덕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 탐방할 수 있다. 덕산온천 관광안내소 ~2.6km~ 옥계저수지 ~1.8km~ 옥계리마을회관 ~0.4㎞~ 옥병계 ~1.2km~ 석문담 ~1.6km~ 남연군묘 ~0.6km~ 와룡담. 거리는 약16km, 4시간 15분 가량 걸린다. - 이데일리 강경록 2017. 1. 30.
덕산천 둑방을 따라 계속 올라간다. 왼쪽 뒤에 656.8m 석문봉, 중앙 오른쪽 뒤에 621.2m 옥양봉이 솟아 있다.
덕산천의 보덕교 동단 보덕사 출입구에 가야산愛 카페가 자리한다. 동서트레일은 보덕교를 건너 가야산로로 나간다.
동서트레일은 보덕교를 건너 맨 왼쪽 휴담가든 앞에서 가야산로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중앙 뒤에 옥양봉이 우뚝하다.
오른쪽은 보덕사로 올라가고, 동서트레일은 덕산천의 보덕교를 건너 가야산로 휴담가든 앞으로 이어간다.
덕산천의 보덕교를 건너서 보덕교 서단에서 보덕사(普德寺)로 가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보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 소속 사찰이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산에 있는 가야사 자리가 왕손을 낳게 한다는 풍수설에 따라 가야사를 태우고 가야사 뒤에 있는 5층 석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아버지인 남연군묘를 썼는데, 그 후 둘째 아들인 고종이 왕으로 즉위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은덕을 보답한다는 의미에서 사찰을 세우고 이름을 보덕사(報德寺)라 하였다. 보덕사를 세운 시기는 1865년(고종 2)이다. 보덕사는 가야산 정상과 마주한 서원산 남쪽 기슭에 있다. 근처에 옛 가야사 터와 남연군묘가 있다. 보덕사는 남향인 극락전(極樂殿)이 본전이고, 요사는 4채이다. 예산읍 삼층석탑은 근처 가야사 터에 있었다. 그런데 1914년에 일본인이 몰래 반출하려던 것을 당시 보덕사 주지의 항의로 돌려받아 보덕사에 남게 되었다. 원래는 5층이었던 것이 훼손되어 3층만 남게 되었다.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보덕사 석등은 원래 가야사에 있던 것으로, 조성 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보덕교를 건너 나오면 휴담가든 앞 가야산로이다. 건너편에 덕산도립공원사무소&내포문화숲길 예산센터가 자리한다.
덕산도립공원사무소&내포문화숲길 예산센터 출입구에 내포문화숲길 이정목이 서 있다.
원효암터 5.1km, 남연군묘 0.7km 지점, 시량초등학교부터 여기까지 내포내포불교순례길 1코스와 동행하였다.
공로비, 공덕비, 적선비 등 4기의 비석이 내포문화숲길 예산센터 출입구 맞은편에 서 있다. 덕산천 건너편에 보덕사 오르는 길이 보인다.
가야산로를 따라 남연군묘 방향으로 덕산면 상가리 지역을 통과한다.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속하는 법정리인 상가리(上伽里)는 조선시대에 덕산군(德山郡) 현내면(縣內面) 지역일 때 가야(伽倻)골 위쪽이 되므로 위가야골, 위개골, 상가야동(上伽倻洞) 또는 상가(上伽)라 부른 데서 상가리 지명이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덕산군 현내면 지역에 속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중가리(中伽里) 일부와 사점리(沙店里)를 병합하고, 상가리라고 하여 예산군 덕산면에 편입되었다. 전 지역에 해발고도 100~600여m의 구릉지가 발달되어 있는데, 남서부 경계의 가야산(伽倻山)[677.6m]이 일대에서 가장 높고, 서부 경계의 석문봉(石門峰)[656.8m], 북서부 경계의 옥양봉(玉洋峰)[621.4m], 남부 경계의 원효봉(元曉峰)[604.7m], 북동부의 서원산(書院山)[472.7m]이 순서대로 높다. 상가리는 덕산면의 북서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옥계리 및 봉산면 봉림리·사석리, 서쪽으로 서산시 운산면·해미면, 남쪽으로 대치리·시량리, 그리고 북쪽으로 봉산면 봉림리 및 서산시 운산면과 각각 접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동고말, 남전, 의얏골 등이 있다. 유적과 유물로는 상가리 녹청자 가마터, 상가리 백자 가마터, 옥계리 태실유지(玉溪里胎室遺址), 보덕사, 약사암지, 보덕사극락전, 남연군의 묘, 예산가야사지, 상가리 고분군, 예산읍 삼층석탑, 상가리미륵불, 보덕사석등, 남연군비, 남은들 상여[국가민속문화유산], 능골 귀부, 보덕사 석물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가야산로 동쪽에 덕산면 상가리 상가리마을회관과 쉼터정자가 자리한다.
상가리마을회관 옆 가야산 농산물 판매장에 '오페르트보다 더 나쁜 짓! 고압선 계획 즉각 중단하라' 알림막이 펼쳐져 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1868년 5월 아산만을 거쳐 구만포에 상륙하여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 도굴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독일인 오페르트(Ernest Jacob Oppert)[1832~1903]는 1866년(고종 3)에 두 차례 조선으로 항해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자, 1868년에 미국 상인 젠킨스(Frederick Henry Barry Jenkins), 프랑스 선교사 페롱(Stanislas Féron)[1827~?] 등과 함께 덕산의 가야산 자락에 있는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여 이를 빌미로 조선과 통상하고자 하였다. 오페르트 일행은 본선을 행담도에 정박시킨 후 작은 선박을 이용하여 구만포를 통해 남연군묘에 이르렀으나, 바닷물의 퇴조 시간과 묘지의 견고함 등으로 인해 도굴에 실패하고 물러갔다. 이로 인해 조선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은 더욱 강화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덕산면 상가리 남전마을을 지난다. 새로 생겨난 가야사가 남전마을에 있는 듯. 앞쪽에 덕산도립공원 가야산지구 안내도가 서 있다.
가야산지구 등산로는 남연군묘에서 출발하여 등산 거리를 조절할 수 있다. 동서트레일은 백제의 미소길과 동행하는 걸까?
덕산도립공원 가야산지구 안내도 옆의 가야사지(伽倻寺址) 안내판은 가야사지(伽倻寺址)에 있어야 할 듯.
가야사는 백제 불교문화의 중심지이자 선진문화 창구기능을 했던 대사찰이다. 고려시대 무신난을 일으켜 대권을 장악하고, 조정을 농락하며, 탐학과 불법을 자행하자 생계를 잃게 된 천민 망이·망소이 등이 신분질서 타파의 기치를 들고 1176년 1월 반란을 일으켜 예산 일대와 이곳 가야사를 점령했다. 허나 조정의 토벌군에 진압되어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민중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68년에는 오페르트 도굴사건의 현장인 남연군묘가 있는 곳으로 흥선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곳에 쓰기 위해 가야사 금탑을 허물고 천년고찰 가야사를 불태워 버렸다. 이때 보광명전에 주성봉안된 <철불삼존상>이 녹아내렸다. 당시 가야사에 있었던 석탑과 화사석이 현재 보덕사 극락전 앞에 보관되어 있다. 가야사는 병계 윤봉구의 사촌형으로 대제학을 지낸 포암 윤봉조(尹鳳朝)를 비롯하여 운평 송능상(宋能相) 등의 많은 사우들이 찾아와 머물면서 여러 시문을 남긴 사찰이기도 하다. - 안내판
이곳에서 백제의 미소길이 시작되어 오른쪽으로 이어지고, 동서트레일은 왼쪽 탁석천을 거슬러 남연군묘로 올라간다. 앞쪽 언덕에 신도비에 해당하는 남연군碑가 서 있고, 중앙 뒤에 옥양봉이 솟아 있다.
이정목 기둥에 백제의 미소길 분기점 표지가 붙어 있는데, 백제의 미소길은 동서트레일과 내포불교순례길5코스와 동일하다.
남연군碑 출입구 오른쪽에 설치된 가야산 노선 안내도에 백제의 미소길이 표시되어 있다.
언덕 중앙에 남연군비(南延君碑)가 서 있고, 왼쪽에 남연군비(南延君碑) 설명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남연군비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1788~1836]의 신도비로, 남연군의 가계와 생애, 행적을 기리기 위해 1865년(고종 2) 건립되었다. 남연군비는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남전마을에서 가야산 등산로로 진입하는 오른쪽에 세워져 있고, 700m 떨어진 곳에 남연군의 묘가 있다. 남연군비는 높이 320㎝, 가로 73㎝, 세로 185㎝, 두께 41㎝로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을 올렸으며, 비신은 오석이고, 방형 대석을 갖추고 있다. 남연군비에는 1864년(고종 1) 영의정 조두순의 건의에 의해 남연군의 시호를 영희에서 충정으로 개시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비명은 좌의정(左議政) 김병학이 짓고, 남연군의 셋째 아들 이최응(李最應)이 썼으며, 손자 이재원(李載元)이 새겼다. 남연군비는 현재 예산군과 전주이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남연군비는 인근에 있는 남연군의 묘와 함께 조선왕조 마지막 왕실의 명맥과 연관된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조선 후기 덕산 지역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연군 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1호. 남연군 묘에서 약700m 떨어진 낮은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된 후 이 비를 세웠으며, 영의정 조두순이 비문을 지었다. 화강암으로 된 두 개의 기단 위에 사각형의 대좌를 놓고 그 위에 오석으로 비신을 놓았다. 대좌의 높이 134cm와 비신의 길이 186cm를 합쳐서 전체 높이는 320cm가 된다. 비신 위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지붕 모양의 이수가 올려져 있다. 비신에는 큰 글씨로 남연군충정(南延君忠正)이라고 쓰여져 있고, 4면을 돌아가며 작은 글씨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 안내판
가야사지(伽倻寺址)를 발굴하고 있으며, 위쪽에 남연군묘가 있고, 뒤쪽에 옥양봉이 솟아 있다.
이 앞에 남연군 묘 제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제각이 철거되고 가야사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것 같다.
예산 가야사지는 가야산 석문봉의 동쪽 아래 넓게 형성된 골짜기에 위치하는 절터이다.『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수덕사보다 가야사가 앞에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수덕사보다 큰 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사는 폐사 이후 절터의 중심지라고 전해지는 곳에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충청남도에서는 이러한 유적의 가치를 인정하여 가야사지·남연군묘를 각각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예산군에서는 가야사지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2012년부터 2024년까지 10차에 걸쳐 사역 중심부의 발굴 조사를 추진하고 있다. 조사 결과, 가야사지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조성된 여러 채의 건물터와 함께 축대·담장·화장실 등이 확인되었다. 더불어 불상·소조나발 등의 불교용품, 청자·분청사기·백자·질그릇 등의 일상용품, 기와·난간석·석탑옥개석 등의 건축 자재가 출토되었다. 특히 발굴 조사를 함으로써 가야사지는 천여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이어지다가 조선 후기에 사라졌으며, 예전 이름이 '가량갑사'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고려시대 건물지 주변에서 출토된 여러 장식기와는 당시 궁궐이나 격이 높은 건물에만 사용된 것으로서, 당시 가야사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말해준다. 2026년에는 남연군 묘 서쪽 구릉에 대한 발굴조사자가 예정되어 있으며, 사역 중심부와 연관된 새로운 유적을 조사할 계획이다. 아울러 조사된 지역의 기초적인 복토 및 정비 공사를 마무리하고, 주변 대지의 초화류 식재, 쉼터 시설 등을 마련하여 역사문화유적공원으로 조성할 예정이다. - 안내판
남연군묘&가야사지 이정목에서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맨 오른쪽 길가에 남은들상여각이 있고, 맨 오른쪽 뒤에 석문봉이 솟아 있다.
동서트레일은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오른쪽에 묘비와 설명안내판이 있고, 뒤쪽에 옥양봉이 솟아 있다. 남연군묘로 올라간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남연군의 묘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의 무덤이다. 원래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던 것을 1846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이구(1788~1836)는 인조의 셋째 왕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후손으로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에게 입양되어 남연군에 봉해졌다. 아버지 은신군이 모함을 받아 제주도에서 죽자 왕족이면서도 불우한 삶을 보냈다. 아들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다. 이하응이 아버지의 묫자리를 찾던 중 가야산에는 '2대에 걸쳐 왕이 나오는 자리'가 있고, 오서산에는 '만대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가야산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가야사(伽倻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어 대원군은 절을 없애고 남연군의 묘를 옮겼다. 훗날 대원군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고종(高宗)이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파헤쳤지만 관은 건드리지 못한 채 돌아간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 안내판
양쪽에 망주석 한쌍, 중앙에 석등(장명등), 양쪽에 석양 한쌍, 묘 앞에 상석(혼유석), 그 옆에 묘비가 서 있다. 암반은 그대로 둔 듯.
양쪽의 망주석(望柱石) 한쌍과 석양(石羊) 한쌍 중 왼쪽 망주석과 석양, 묘 왼쪽에 묘비가 있다.
묘 앞의 석등(장명등)과 석양 한쌍, 상석(혼유석), 묘 왼쪽의 묘비를 다시 바라본다. 중앙 뒤에 옥양봉이 우뚝하다.
남연군의 묘에는 남연군과 부인 여흥 민씨가 합장되어 있다. 봉분 아래쪽에는 원형으로 호석을 둘렀으며, 봉분의 왼쪽에는 1865년[고종 2] 5월 세운 묘비가 있다. 묘비는 1864년[고종 1] 7월 영의정 조두순이 건의하여, 대왕대비(大王大妃)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가 충정(忠正)이라는 시호를 내린 다음에 세운 것이다.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을 올렸으며, 비신은 오석이고, 방형 대석을 갖추고 있다. 묘의 전방에는 2기의 석양 석조물이 세워져 있는데, 오른쪽 석양의 입 주변이 부러져 훼손되어 있다. 묘 앞에 있는 석등은 비교적 정교하고 세밀한 조식으로 특히 다각집 형식의 정교한 아름다움을 지닌 옥개형의 이수를 올리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남연군의 묘비는 방형의 상석과 이수를 갖추었으며 비문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필이다. 비신 앞면에는 ‘유명조선국현록대부남연군겸오위도총부도총관증시충정완산이공휘구지묘 군부인여흥민씨부좌(有明朝鮮國顯祿大夫南延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忠正完山李公諱球之墓 郡夫人驪興閔氏祔左)’라고 쓰여 있다. 비신은 높이 151㎝, 폭 55㎝, 두께 25㎝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남연군의 묘 중앙에서 오른쪽을 살핀다. 석등 뒤쪽의 암반과 암괴는 그대로 둔 듯하고, 망주석과 석양이 묘를 지킨다.
오른쪽 석양의 입 주변이 부러져 훼손되어 있다. 석양 다리 사이에 근심을 잊게 해 준다는 망우초(忘憂草)인 원추리를 새겼다.
뒤쪽에 가야산 가야봉, 오른쪽에 석문봉이 솟아 있고, 그 아래 상가저수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바로 아래에 재현한 남은들상여 보호각이 있다. 상가저수지 위쪽에 가야구곡의 7~9곡이 있으며, 가야구곡 최고의 비경이라고 한다.
남은들상여는 남연군(南延君) 이구(李球)[1788~1836]의 시신을 경기도 연천에서 덕산 장지까지 운반할 때 사용했던 궁중식 상여이다. 상여를 운반한 후 덕산면 광천리 남은들마을에 기증하였고, 마을의 이름을 따서 남은들 상여라고 부른다. 남은들 상여는 남연군 묘역 옆 상여집 안에 있다. 남은들 상여는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얻기 전에 제작되어 화려하거나 호화롭지는 않으나, 구조가 특이하고 조각 솜씨가 뛰어난 궁중 상여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또한 좋은 목재를 사용하여 제작되었고 실용적이고 견고하게 제작되었다. 남은들 상여는 1955년 보수하여 예산군 덕산면 광천리 보호각에 보관되어 마을회관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2005년 도난되었다가 문화재청에서 다시 회수하였다. 이후 문화재청이 예산군 및 마을 주민과 협의하여 국립고궁박물관에 2006년에 기증하였다. 2013년 예산군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74호 전흥수 대목장과 무형문화재 제32호 배순화 매듭장이 참여하여 상여를 재현하고 남연군의묘역 옆에 새롭게 상여각을 지어 재현된 상여를 전시하고 있다.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남연군의 묘 뒤쪽에 가야사 법당과 5층탑이 있었을 것라고 추정한다고 한다. 중앙 뒤에 옥양봉이 우뚝하다.
남연군의 묘 뒤에 오층석탑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곳을 살폈다.
남연군의 묘에서 덕산면 상가리 지역을 내려보았다. 바로 아래 가야사지에 부재들이 그 흔적을 보여준다.
남연군의 묘에서 473.2m 서원산(書院山)을 바라보았다.
서원산(書院山)[473.2m]은 가야산지의 옥양봉(玉洋峰)[621.4m]에서 덕산면 소재지 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에 있는 산으로, 덕산면 상가리와 봉산면 봉림리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산 지명은 산 밑에 사현서원이 있어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지형도』[해미]에는 ‘서원산(西院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서원산 서쪽의 덕산면 상가리 및 서산시 운산면 경계엔 옥양봉이 있고, 옥양봉의 남쪽의 상가리 일대엔 석문봉(石門峰)[656.8m]과 가야봉(伽倻峰)[677.6m]이 있다. 서원산 아래 상가리에는 보덕사(報德寺)가 있는데, 보덕사는 조선 말기 왕실의 운명이 전설처럼 서려 있는 역사적인 사찰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남연군의 묘에서 아래로 내려오니 사라진 가야사의 부재(部材)들이 가야사지(伽倻寺址)에 전시되어 있다.
남연군묘 0.1km, 보원사지 6.9km 지점, 오른쪽 뒤에 서원산이 우뚝하다. 동서트레일은 왼쪽으로 이어간다.
중앙 앞의 남연군의 묘에서 왼쪽으로 내려와 오른쪽으로 이어와서 덕산천을 건너왔다.
수해 복구로 인해 우회로인 덕산-운산을 잇는 임도로 들어와 왼쪽 앞의 남연군 묘와 중앙 뒤의 가야산 가야봉을 돌아보았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와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를 잇는 덕산-운산 임도를 따라 올라간다.
서산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예산 방향의 덕산-운산 임도를 돌아보았다.
덕산-운산 임도를 따라 올라가며 오른쪽 뒤의 서원산을 가늠한다.
덕산-운산 임도에서 다시 서원산을 올려본다. "서원산(書院山)[473.2m]은 가야산지의 옥양봉(玉洋峰)[621.4m]에서 덕산면 소재지 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에 있는 산으로, 덕산면 상가리와 봉산면 봉림리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산 지명은 산 밑에 사현서원이 있어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조선지형도』[해미]에는 ‘서원산(西院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덕산도립공원 토끼조형물 쉼터의자가 덕산-운산 임도에 예쁘게 조성되어 있다.
덕산도립공원(德山道立公園)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과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운산면에 걸쳐 있으며, 1973년 3월 6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덕산도립공원의 명칭은 주요 지구인 가야산 지구의 행정지명 덕산면(德山面)에서 유래한 것이다. 덕산도립공원은 덕숭산 지구와 가야산 지구로 구성되어 있는데, 덕숭산 지구에는 수덕사, 환희대, 견성암, 금강암, 정혜사(定惠寺), 소림초당(小林草堂), 예산 수덕사 만공탑, 일주문, 여승당 등이 있고, 가야산 지구에는 가야사지, 옥계저수지, 남연군 묘, 상황사지, 보덕사(報德寺), 쉬흔길바위, 옥양폭포, 거북바위, 고려자기 가마터 등이 있다. 덕산도립공원의 관광자원을 구체적으로 보면, 덕산도립공원에는 수덕사·덕산온천·보덕사·보원사지(普願寺址)·일락사(日樂寺) 등이 있고, 윤봉길 의사 유적[사적]이 있으며, 부근에는 개심사(開心寺)·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등이 있다. 수덕사는 덕숭산 남쪽 계곡에 있는데, 백제 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원효대사(元曉大師)가 개창하였다는 설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덕산-운산 임도는 구불구불 돌아가는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쉼터정자가 조성되어 있다.
덕산-운산 임도를 따라 굽이돌다가 골짜기를 가로질러 꼬부랑 임도를 잇는 구름다리를 건넌다.
덕산-운산 임도를 따라 '옹달샘'이라 명명한 샘터를 지난다.
잠시 쉬었다 가는 곳, 자연이 사람에게 주는 곳, 땀을 씻으며 길을 뒤돌아보는 곳, 옹달샘이 정겹다.
신비로운 문화와 풍요로운 자연이 함께하는 예산군 가야산(伽倻山)의 유적을 소개하는 벽 모형 조형물을 지난다.
●보덕사 :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한 뒤 대원군의 둘째 아들 황이 보위(고종)에 올랐다. 이에 대원군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절을 짓고 보덕사라 하였다. ●남연군 묘 :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로, 일대에서 가장 큰 절인 가야사가 있던 자리에 있다. 좌청룡 우백호의 웅장한 지맥을 지녀 2대 왕이 탄생할 명당이라 한다. 흥선대원군은 왕손 배출을 꿈꾸며 경기도 연천에 있는 부친 남연군 이구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가야사지 : 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 가야사지는 가야산 석문봉의 동쪽 골짜기에 있다. 99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었으나 1844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가야사의 중앙부엔 금탑이 서 있었는데, 그 자리엔 지금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다." 661년, 당나라의 불교는 현장법사에 의해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나라 불교의 융성은 해동에 전해져 신라의 수많은 승려들이 당나라로 향했다. 젊은 원효와 의상도 선진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유학길에 올랐다. 신라를 떠난 원효와 의상은 몇날 며칠을 걸어 이산군(지금의 덕산)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가야산을 넘다 어둠 속에서 빈 토글에 들어선다. 목이 탄 두 사람은 주위를 더듬어 바가지에 담긴 빗물을 마신다. 아침에 보니 바가지는 해골이었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젯밤이나 오늘이나 똑같은데, 어찌하여 어제는 달콤했던 물이 오늘은 구역질이 나는가?' 원효는 이 화두에서 변한 것은 바가지가 아니라 내 마음임을 깨닫는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한국불교의 발원이며 대중불교의 비조였던 원효대사의 깨달음이 있던 곳, 가야산자락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원효토굴이 있다.
홍수 피해 복구 때문에 우회로인 덕산-운산 임도를 지금까지 따라왔다. 이곳 잣나무쉼터 갈림길에서 정코스와 재회한다.
잣나무쉼터 갈림길에서 덕산-운산 임도를 따라 덕산도립공원 토끼조형물 의자쉼터와 대문동쉼터 안내판을 지나간다.
대문동 쉼터는 충청남도 예산과 서산의 경계에 위치하며, 가야산과 서원산을 연결하는 관문으로서 지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주변에 다양한 수목과 쉼터가 조성되어 있어 탐방객의 여유와 소통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남연군묘 2.0km, 보원사지 5.0km 지점, 대문동 쉼터에 쉼터정자와 돌탑, 내포문화숲길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오른쪽 길은 1.50km 거리의 서원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