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군자론 혹은 참모론]
명제 24 — 권력의 기(起)에 서려면 통찰이 있어야 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옐로스톤에 '21번 늑대'라 불린 전설적인 우두머리가 있었다. 이 늑대는 평생 일대일 대결에서 진 적이 없었지만, 이긴 상대를 죽이지 않았다. 싸움에서 이긴 뒤 상대를 놓아주었다. 무리를 이끌 때도 앞에서 힘으로 몰지 않았다. 언제 나서고 언제 물러설지를 아는 통찰, 그것이 21번 늑대를 오래도록 우두머리 자리에 있게 했다.
늙은 우두머리가 이끄는 버팔로 무리를 관찰한 기록이 있다. 젊고 힘센 수컷이 아니라 나이 든 암컷이 무리를 이끄는 경우가 많다. 물이 어디 있는지, 포식자가 어느 길목에 숨어 있는지, 언제 이동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힘이 아니라 축적된 통찰이기 때문이다. 무리는 가장 힘센 자가 아니라 가장 많이 아는 자를 따른다.
권력의 기(起)에 서는 것은 힘이 아니라 통찰이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자리에서 새로운 국면을 처음으로 일으켜 세우는 눈, 그것이 통찰이다.
1. 뜻풀이
기(起)란 새로운 국면을 처음으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기승전결(起承轉結)의 첫 글자가 起인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을 여는 것이 기다. 같은 힘을 가지고도 어떤 이는 기를 일으켜 역사를 만들고, 어떤 이는 시작을 열지 못해 사라진다. 그 차이가 통찰이다.
통찰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첫째, 때를 읽는 통찰이다. 지금이 일으킬 때인지 기다릴 때인지를 아는 것. 둘째, 때를 만드는 통찰이다. 오지 않는 국면을 스스로 일으켜내는 것. 셋째, 가장 깊은 통찰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미리 설계하는 것이다. 없는 것을 먼저 그리고, 그것이 도래하도록 준비하는 것.
주역 건괘(乾卦)는 이 통찰의 단계를 용의 여정으로 그렸다. 잠룡물용(潛龍勿用), 물에 잠긴 용은 아직 쓰지 마라. 견룡재전(見龍在田), 들판에 나타난 용은 때가 무르익는다. 비룡재천(飛龍在天), 하늘을 나는 용은 때를 만난 것이다. 통찰이란 자신이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알고, 일으켜 세울 순간을 아는 것이다.
2. 관중과 마키아벨리의 생각, 그리고 다른 주요 인사들
관중은 때를 읽는 통찰의 대가였다. 환공이 성급하게 패권을 쥐려 할 때 관중은 15년을 기다리게 했다. 내정을 다지고 경제를 살리고 위임을 쌓는 동안, 관중은 제후들의 형세를 읽고 있었다. 규구의 회맹이라는 국면이 무르익었을 때 관중은 주저 없이 그 기를 일으켰다. 잠룡의 시기를 알았기에 비룡의 순간을 잡을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통찰을 비르투(virtù)의 핵심으로 봤다. 포르투나(운명)가 기회의 문을 열 때, 그 문이 열렸다는 것을 알아보는 눈이 비르투다.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오면 위대해지지만, 기회가 와도 알아보지 못하는 자에게 그 기회는 재앙이 된다. 통찰이 없으면 기회조차 독이 된다.
플레처는 통찰을 뇌과학으로 설명했다. 인간의 뇌에는 공황·분노·혼란이라는 세 가지 함정이 있다. 이 함정에 빠지면 통찰이 마비된다. 위기의 순간에 냉정을 유지하고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 그것이 고유지능이다. 직관과 상상력과 상식이 결합할 때 인간은 AI가 갖지 못한 통찰에 이른다.
3. 역사적 사례
테미스토클레스 — 오지 않은 국면을 미리 일으킨 자
기원전 5세기 아테네. 라우리온 은광에서 대규모 은맥이 발견됐다. 시민들은 그 은을 나눠 갖자고 했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다른 것을 봤다.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위협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는 은을 나누는 대신 함선 200척을 건조하자고 설득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몇 년 뒤 페르시아가 쳐들어왔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 200척이 그리스를 구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국면을 미리 읽고 일으켜 세운 것이다.
사마천 — 굴욕에서 새 길을 일으킨 자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을 당했다. 남자로서 가장 치욕적인 형벌이었다. 죽음을 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마천은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길을 읽었다. 아버지가 남긴 역사 저술의 사명. 그는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그는 2000년을 관통하는 통찰을 남겼다. 통찰은 화려한 자리가 아니라 가장 깊은 굴욕 속에서도 자신에게 남은 길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세종 — 없던 국면을 만든 자
세종은 주어진 때를 기다리지 않았다. 만들었다. 훈민정음이 그것이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문자를, 세종은 스스로 구상하고 창제했다. 백성이 글을 몰라 억울한 일을 당하는 현실을 통찰하고, 그 현실을 바꿀 새로운 국면을 스스로 일으켜낸 것이다. 최만리를 비롯한 신하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세종은 자신이 읽은 기를 밀고 나갔다. 통찰은 때로 시대를 앞질러 홀로 걸어가는 용기다.
해밀턴 — 제도를 먼저 설계한 자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아직 형태를 갖추기 전에 그 나라의 재정 제도를 설계했다. 중앙은행, 국채, 연방 재정. 당시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였다. 해밀턴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국면을 미리 그리고, 그 국면이 도래하도록 제도를 설계했다. 그가 설계한 재정 시스템 위에서 미국은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가장 깊은 통찰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먼저 설계하는 것이다.
제갈량 — 시작 이전에 전략을 완성한 자
명제23에서 본 것처럼 제갈량은 군자불기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명제24의 관점에서 그는 더 특별하다. 융중대(隆中對)를 보라. 유비가 아직 근거지도 없이 떠돌던 시절, 제갈량은 천하삼분의 전략을 이미 완성해두고 있었다. 형주를 취하고 익주를 얻어 조조·손권과 삼각 균형을 이룬다는 구상.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때에 그는 이미 20년의 국면을 그리고 있었다. 삼고초려로 유비가 찾아왔을 때, 제갈량은 준비된 통찰을 펼쳤을 뿐이다.
정도전 —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설계한 자
정도전은 34세에 나주 거평부곡으로 유배됐다. 권문세족의 친원정책에 맞서다 쫓겨난 3년이었다. 그러나 그 유배지에서 그는 백성의 아픔을 배우고 민본(民本)의 씨앗을 얻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그는 함주로 이성계를 찾아가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양부사로 나아갔다. 남양은 장보고 시절부터 산동반도와 계절풍 무역선이 오가던 서해 교역의 길목이었다. 이미 새 나라를 마음에 품은 그는, 그 뱃길로 들어오는 소식을 통해 원나라가 지고 명나라가 흥하는 천하의 대세를 읽으며 때를 기다렸다.
정도전이 그린 것은 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었다. 재상이 중심이 되어 왕권을 견제하는 시스템,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그는 이미 설계하고 있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이 세워지기 전에 구상된 조선의 설계도였다. 통찰의 가장 높은 경지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미리 설계하고, 그 미래가 도래하도록 자신의 전 생애를 거는 것이다.
4. 종합정리
권력의 기(起)에 서는 것은 힘이 아니라 통찰이다.
통찰에는 단계가 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다가오는 국면을 미리 읽어 일으켰다. 사마천은 가장 깊은 굴욕 속에서 자신에게 남은 길을 일으켰다. 세종은 없던 국면을 스스로 만들었다. 그리고 해밀턴과 제갈량과 정도전은 가장 높은 통찰에 이르렀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먼저 설계한 것이다.
관중은 15년을 기다려 규구의 회맹이라는 기를 일으켰고, 마키아벨리는 포르투나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알아보는 것이 비르투라 했다. 통찰이 없으면 기회조차 독이 된다.
이것이 이 책 전체가 향하는 지점과 만난다. 가장 높은 통찰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민치(民治)의 설계도, 아직 오지 않은 그 미래를 먼저 그리고 처음으로 일으켜 세우는 통찰에서 시작된다.
명제 24 — 권력의 기(起)에 서려면 통찰이 있어야 한다. 정도전은 나주 유배지에서 백성의 아픔을 배워 민본(民本)의 씨앗을 얻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그는 함주로 이성계를 찾아가 뜻을 함께하기로 하고, 이윽고 남양부사로 나아갔다. 남양은 장보고 시절부터 산동반도와 계절풍 무역선이 오가던 서해 교역의 길목이었다. 이미 새 나라를 마음에 품은 그는, 그 뱃길로 들어오는 소식을 통해 원나라가 지고 명나라가 흥하는 천하의 대세를 읽으며 때를 기다렸다. 아직 왕도 나라도 정해지지 않은 때에 그는 이미 새 나라를 설계하고 있었다.
잠룡물용 — 아직 때가 아니면 준비하라.
비룡재천 — 때가 오면 하늘로 오르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설계가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