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 3
소진의 오래된 스케치북
비는 어느새 그쳤다.
카페 처마 끝에서 마지막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고, 계곡에는 비를 머금은 물소리가 더욱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산 너머로 옅은 햇살이 비치자 숲은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창가에 마주 앉은 젊은 연인의 얼굴에는 아직도 먹구름이 걷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다투지 않았다.
대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랑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꿈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진은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기다려요."
안채로 들어간 그녀는 오래된 나무장을 열었다.
맨 아래 칸에는 세월의 먼지가 내려앉은 낡은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낸 소진은 손바닥으로 먼지를 털어냈다.
지영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
"응."
"오늘은 보여줘도 될 것 같아."
소진은 두 사람 앞에 오래된 스케치북 한 권을 내려놓았다.
짙은 갈색 가죽 표지는 세월에 닳아 있었고,
모서리는 여러 번 넘겨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의상 디자이너이신가요?"
소진는 부드럽게 웃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예요."
첫 장을 넘기자 연필로 그린 드레스가 나타났다.
두 번째 장에는 재킷과 코트,
세 번째 장에는 전통 한복의 곡선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디자인이 정성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색연필로 하나하나 채색한 흔적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남자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이 정도 실력이셨으면 계속 디자이너를 하셨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소진은 잠시 미소를 짓다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는..."
"꿈보다 현실이 먼저였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지나온 세월의 무게가 잔잔하게 스며 있었다.
"저도 여러분처럼 스물다섯 살 무렵에는 꿈이 참 많았어요."
소진은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한 장에는 화려한 무대의상이,
다른 장에는 일상복 디자인이 그려져 있었다.
그 밑에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언젠가는 내 이름으로 옷을 만들고 싶다.'
여자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꿈을 이루셨어요?"
소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신 다른 길을 걸었지."
"먹고사는 일이 먼저였고."
"가족을 지켜야 했고."
"그러다 보니..."
그녀는 웃으며 스케치북을 쓰다듬었다.
"이 아이만 남았네."
스케치북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그녀의 손길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몇 장을 더 넘기던 소진의 손이 문득 멈췄다.
한 장의 종이 사이에 오래된 마른 들꽃 한 송이가 끼워져 있었다.
꽃잎은 바스라질 만큼 말라 있었지만,
여전히 형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소진은 그 꽃을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 꽃을 끼워 넣어 준 사람이 있었어요."
"첫사랑이었나요?"
여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소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성우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이름을 말하는 순간에도 소진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없었다.
"참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그녀는 천천히 스케치북을 덮었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두 함께 살아가는 것은 아니더군요."
"양광현이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문학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지요."
"젊은 날엔 그 사람과 함께라면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소진은 웃으며 창밖의 숲을 바라보았다.
"그 시절에는 사랑이 전부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
"사랑도 삶의 한 부분이라는 걸 알게 되더군요."
젊은 연인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영은 조용히 국화차를 따라 두 사람 앞에 놓아주었다.
소진은 찻잔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참 신기하지."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는데."
"국화 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젊었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을 내 곁에 붙잡아 두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어요."
"떠나면 끝이라고 생각했고."
"헤어지면 실패한 사랑이라고 믿었지."
창밖으로 바람이 불어 숲이 잔잔히 흔들렸다.
"그런데..."
"살아보니 아니더라고."
소진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꿈을 포기하게 만드는 사랑은 오래가지 못해요."
"처음에는 행복한 것 같아도."
"언젠가는 서로를 원망하게 되지."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여자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이 자신들의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소진은 스케치북 맨 마지막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미완성 드레스 한 벌이 그려져 있었다.
색도 칠하지 못한 채 연필선만 남아 있었다.
"이건..."
여자가 물었다.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디자인이에요?"
소진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일부러 남겨 둔 거예요."
"왜요?"
"사람도 그렇고."
"꿈도 그렇고."
"인생에는 완성되지 않은 채 남겨 두어야 더 아름다운 것들이 있거든."
카페 안에 잔잔한 침묵이 흘렀다.
계곡물 소리가 그 침묵을 부드럽게 메워 주었다.
소진은 스케치북을 천천히 덮었다.
그리고 두 젊은이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지금 사랑 때문에 고민하고 있지요."
"하지만 나는..."
"두 사람이 사랑보다 꿈을 선택하라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꿈보다 사랑을 선택하라는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뒤 조용히 이어갔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해 줄 수 있어요."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진은 창밖을 나는 산새를 바라보며 잔잔하게 말했다.
"사랑은 상대의 날개를 꺾는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날아가도록 바람이 되어 주는 거예요."
그 말은 카페 안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남자는 처음으로 여자의 유학을 자신의 상실이 아닌 그녀의 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여자 역시 남자의 브랜드가 단순한 일이 아니라 그의 인생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설레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믿음이 그 눈빛 속에 담겨 있었다.
창밖에는 비가 그친 하늘 위로 무지개가 조용히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