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다. 지금의 돈화문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敦化는 『中庸』의 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층 문루에 종과 북이 있어 시각을 알려주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2. 궐내각사
궐내각사02
3.금천교 (錦川橋)
금천교는 1411년(태종11년)에 축조된 돌다리이다. 조선의 궁궐에는 공통적으로 초입부에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놓았다. 특히 창덕궁의 돌다리는 그 아래 비단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비단(錦)에
내 천(川)자를 사용하는 錦川橋이다. 다리 아래에는 남쪽의 해태상, 북쪽에 거북상을 배치하여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았다. 다리 중간에는 잡귀를쫓는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벽사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아름다운 난간석과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이 돋보인다.
3.인정문 (仁政門: 보물 813호)과 인정전 (仁政殿: 국보 225호 )
인정문에서 임금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데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 임금이 여기서 즉위했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 공간이다. 이러한 행사 때에는 인정전 앞의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했다. 조선의 궁궐 정전에는 공통적으로 정면에 임금의 용상(龍床)과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을 두고 뒤에는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을 둘렀는데
일월오악도에는 해와 달, 다섯 개의 산봉우리, 폭포, 파도,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천장에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다. 1908년 전기시설이 가설되면서 인정전에 전등이 설치되었다.
4.선정전 (宣政殿: 보물 814호)
임금이 평소에 국사를 논의하던 편전(便殿)이다. 임금은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잡으며 한쪽에서는 사관(史官)이 앉아
국사에 대한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다. 사관들의 기록을 사초(史草)라고도 하며 이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건물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5.희정당 (熙政堂: 보물 815호)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었는데, 나중에 어전회의실로 사용 되었다.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건물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옮겨 지은 것이다. 내부 응접실에는 서양식 가구가 놓여져 있다. 상방에는
해강 김규진이 그린 <금강산만물초승경도>,
<총석정절경도>가 걸려 있다. 남행각 정문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변형되었다.
6.대조전 (大造殿: 보물 816호)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진다. 이 건물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1917년 이 건물이 불에 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옮겨다 지었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경훈각은 대조전의 부속 건물로 원래는 이층 건물이었으나 1917년 화재 이후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 단층으로 옮겨 지었다. 수라간은 음식을 만들던 곳으로 내부는 조선 말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낙선재
낙선재(樂善齋)(보물:제1764호)07
창경궁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1418년에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보유 문화재현황
국보 1점
- 제226호 명정전
보물 1점
- 제384호 홍화문
- 제385호 명정문 및 행각
- 제386호 옥천교
- 제818호 통명전
- 제846호 풍기대
- 제851호 관천대
- 제1119호 팔각칠층석탑
등록문화재 1점
- 제83호 대온실
홍화문
창경궁의 정문으로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하였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의 건물로,
기둥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놓이고,
다포계 양식(樣式)의 외오포작 이출목,
내칠포작 삼출목의 공포를 짰는데, 견실한 구조와 공포의 짜임은
조선 초기 형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정면의 3칸에는 각각 판문을 달고
그 위로는 홍살을 하였으며, 북쪽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이층은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을 꾸몄다.
홍화문의 좌우로는 궁장(宮墻)이 남북십자각을 지나 궁역을 형성하였다.
옥천교
옥천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 위에 설치한 다리다.
조선 왕궁은 모두 명당수 위의 석교를 건너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옥천교는 길이가 9.9미터, 폭6.6미터와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되었는데,
홍예가 연결되는 중앙에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다리 좌우에는 돌난간이 조각되었는데, 난간 가장자리에 법수(法首)를 세우고
네 개의 연잎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5칸을 형성하고,
한 장의 돌로 만든 풍혈판이 설치되었으며 돌란대가 얹혀 있다.
교상(橋床)은 장마루 같은 청판돌로 짜고 중앙에는
어도(御道)를 한 단 높게 만들었다. 이 다리는 성종14년(1483)년 조성되었다
명전문
이 문은 명정전을 둘러싼 월랑 중 명정전과 마주보고 있는
동월랑의 중앙부에 있으며, 창경궁의 외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월랑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中庭)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인데,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주열(柱列)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다.
이 건물은 포작(包作)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명전전 일원
조선 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이 조성되고, 그 정전으로서 명정전이 세워졌다.
이곳은 임금님이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국가적인 행사가 거행되었던
곳으로 1544년 인종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명정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과는 달리 남향이 아닌 동향이다.
이는 창경궁의 지세에 따른 것이다.
그 후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1616)에 복원되어 오늘에 이른다.
다른 궁의 정전과 같이 이중의 월대를 두어 그 위에 건물 기단을 마련하고,
큰 사각 주초 위에 원형의 운두가 높은 주좌(柱座)를 조각하여
초석을 배열하였다. 월대의 형식은 다른 궁의 것과 달리 지형에
맞추어 전면 동쪽과 북쪽 일부만을 이중단으로 하고,
건물 좌우와 뒷편에서는 1단으로 하였다.
평면으로 보아 정면 5칸, 측면 3칸에 후퇴(後退)를
한 단층 팔작기와지붕으로 겹처마이다.
평주 위에는 모서리를 많이 굴린 창방이 놓이고 운두가
낮은 평방 위에 다포계 양식의 외삼출목, 내사출목의 공포를 짰다.
건물 사면은 모두 꽃살창으로 돌려져 있는데,
그 위로는 교살창이 있다. 내부 바닥에는 전(塼)을 깔았고,
뒤편 중앙부에는 왕좌인 용상이 있는데 그 뒤로 일월오봉도의 병풍이 놓였다.
그 위로는 닫집으로 짠 보개(寶蓋)가 있고 천정의 중앙부에는
한층을 접어올린 쌍봉문(雙鳳紋)이 있는 보개천정을 장식했으며,
그 주위는 우물반자를 하였다. 단청은 모로단청을 하고,
특히 천정판에는 화려한 연화문의 반자초 단청(丹靑)을 시문했다.
월대의 전면에는 명정전 어간에 맞추어 중앙에 삼도의 이중계단이 놓였다.
가운데 어계의 폭은 2.4미터이고, 양측 협계(挾階)의 폭은 각 1.3미터이다.
상하 계단은 모두 6단씩으로, 어간의 답도(踏道) 석판 중앙에
사분심엽형(四分心葉形) 윤곽을 양각(陽刻)한 후
그 안에 날개를 활짝 편 한쌍의 봉황을 조각해 장식했고,
챌판(계단의 수직면)에도 당초(唐草)와 보상화(寶相華),
운문(雲紋) 등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하층 계단 앞에는 명정문과 연결되는 어도가 있고
좌우에 24개의 품계석(品階石)이 있다.
문정전
문정전은 창경궁 창건 때 편전으로 건립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명정전과 함께 중건하였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朝鮮古蹟圖譜」에 실린 명정전 정면 사진에
동측면의 일부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 이 전각이 존속했던 것으로 알 수 있으나,
그 후의 자세한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1984년부터 시행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건물의 기단과 동쪽에 두 곳,
서쪽 한 곳의 계단이 확인되었는데, 기단의 규모는 남북 20미터, 동서 18미터였다.
1986년 창경궁 중창공사 때 중건되었는데, 발굴조사와 문헌 고증에 의하여 네모기둥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내삼출목, 외이출목, 단층 팔작집(38평)으로 겹처마이며 남향하여 세웠다.
이 건물의 서쪽에서, 숭문당 남쪽면으로는 경사진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남북 방향으로
아름다운 2단의 화계(花階)를 꾸몄고 동쪽행각사이에는 문정문이 있다
숭문당
이 건물은 조선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순조 30년(1830)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崇文堂'의 현판과 '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인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을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홑처마이며,
지형에 따라 앞면에만 방형의 장초석을 사용하여 누각처럼 세웠다.
기둥 위에는 간단한 초익공의 공포를 짰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 없이 굴도리 밑에 장여를 받고 있는
소로만을 끼워 장식하였다.평면으로 보아 전후와 남쪽에 퇴간을
두고 마루를 깔았으며, 가운데칸의 마루와 동선을 연결시켰고 그 좌우에 방을 놓았다
빈양문
숭문당 북쪽에 연접되어 있는 이 문은 치조공간(외전)과
연조공간(내전)을 연결하는 통로의 개폐 기능을 갖는
문으로 명정전의 뒷면 중앙 어칸 앞으로 설치된 복도를 따라가다
이 문을 나서면 바로 내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북쪽으로 함인정,
경춘전, 환경전이 눈에 들어온다.
이 문은「궁궐지」에 간단한 규모가 기록되어 있고
1986년 중건공사 때 발굴 조사를 토대로 재건하였다
함인정
이곳에는 원래 성종 15년(1484)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겹처마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