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교난이 일어나자, 앵베르 주교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순교자의 전기를 만든 신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1801년 순교한 청국어 통역관 현계흠의 아들로서 기해일기를 지은 현석문 가롤로 이다.
배교자 김 여상 요한은 가난한 살림살이에 쪼들려 일찌기 교회의 많을 도움을 받고 있었으나 끝없는 물욕의 유혹에 빠져 포졸들에게 뇌물을 받고 신자들은 물론 앵베르 주교가 있는 곳까지 밀고 하여 마침내 기해년이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1839년 봄부터 많은 신자들이 잡혔으며,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굳게 신앙을 고백하면서 순교의 길을 나아가니,
이를 탄복한 앵베르 주교는 그들의 훌륭한 행적을 될 수 있는 데로 자세히 조사하여 이를 길이 보존해야겠다는 것을 느꼈고, 처음에는 주교 자신이 스스로 일을 시작하여 그해 1월 16일부터 5월 27일까지의 교회 박해와 순교자의 간단한 전기를 만들게 되었으나
날로 심해 가는 험악한 정세를 보고 자기도 오래지 않아 잡히게 될 것을 생각하여 이 뜻 깊을 일을 서울 지방 회장이던 현 석문에게 맡기였다.
43세이던 현석문은 그 맡은 일을 이루기 위해 가족에 대한 인정도 다 던져 버리고 몸을 이곳 저곳으로 숨겨가면서 순교자의 전기를 모으는 데 온갖 힘을 기울였다.
9월 21일에 앵베르 주교 이하 3명의 성직자가 순교하게 되자, 신자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고 북경에 연락을 취하여(물론 자신도 다녀 오기도 하면서) 이 토마와 최 필립보 같은신자들을 내세워 순교자들의 전기를 모으고 정리하여 3년에 걸처 자료 모음을 완성하였다.
그 해 10월 12일에 조선에 들어 온 페레올 고 주교는 이 귀중한 기해일기를 손에 넣었다.
1890년에 뮈텔 민 신부가 조선 교구의 8대 주교로 임명되어 다시 조선으로 나오게 되니, 주교는 여러 방면으로 순교자의 자료를 모으다가 오랫 동안 땅 속에 파묻혀 있던 한글로 된 기해일기를 발견하여 264쪽의 큰 책으로 출판하였다.
기해일기에 기록된 순교자 78명 중 성인품에 오른 수는 69명을 헤아리고 있으니, 그 행적을 기록한 현석문의 덕분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 많은 순교자들에 대한 상세한 전기를 얻지 못하여 그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모범을 세상에 알리지도, 따르지도 못하니 안타깝기 한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