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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최승정 신부님의 성서백주간 평화방송 다시보기
최 승 정 신부님 성 서 백 주 간
제 27 회 요 셉 2 부
요셉이야기 두 번째 시간으로, 형제들에게 의해 이집트로 팔려가
이집트 경호대장 표티파르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 구절을 살펴 봅니다.
여기에는 성경 작가가 요셉 이야기에서 가장 강조한 '주님께서 함께
하셨다' 는 대목이 반복적으로 등장 합니다.
종으로 팔려가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항상 함께 있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요셉의 고난과 우리들의 삶의 고난을 비교해서 묵상해 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겪게 되는 "부정 ㅡ 분노 ㅡ 거래 ㅡ 절망 ㅡ 받아들임"의
다섯 단계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던져주신 삶의 화두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예, 르우벤이 다른 동생들에게 요셉을 해치지 말라고 하면서 재미있는
얘기를 합니다. 피를 흘리지 말아라.
※ 르우벤의 명령: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피만은 흘리지 마라'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손을 대지는 마라'
이거는 그런데 굉장히 율법적인 내용입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 야곱 내지는 성조들의 시기는 아직 하느님의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전달되기 이전인데도 피를 흘리면 안된다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창세기 9장에서 이미 등장 합니다.
장자의 역활
* 창세 9,6: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 레위 17,3-4: "누구든지 이스라엘 집안에 속한 사람으로서, 소나
어린 양이나 염소를 진영안에서 잡았든 진영 밖에서 잡았든, 그것을
만남의 천막 어귀로 가져와 주님의 성막 앞에서 주님에게 예물로 바치지
않는 자는 그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사람은 피를 흘렸으니,
자기 백성 에게서 잘려 나가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창세 9,6) 피를 흘린다는 것은 뭐에 대한 은유입니까?
생명에 관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이야기를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라는 이야기로 하는 겁니다.
레위기 17장 3-4절에서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 나가야 한다는 것은
파문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파문 당하는 겁니까?
짐승을 죽여서 피를 내겠지요? 고대 이스라엘은 어떤 의미에서건
짐승을 목졸라서 죽이면 안 됩니다. 목을 따서 모든 피를 다 땅에
쏟아 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요즘도 아주 정통적인 오소독소한 그런 유다인들은 일반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지 않습니다. 일반 정육점에서 파는 고기들은
피를 제거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고기를 조리할 때 피가 좀 남아 있잖아요.
그런데 유다인들이 운영하는 정육점에서는 그 고기를, 어떤 동물을
잡았다면 목을 따서 그 고기를 거꾸로 매달라서 며칠 동안이고
그 피를 뺍니다. 그리고 나서 고기를 준비를 합니다.
그래도 약간의 피는 남아 있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피를 빼는 그 근본에는
본래는 인간 생명에 관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 되었으니 그 피를
흘리지 마라. 그런데 나중에는 생명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피 자체를
거룩한 것으로 보는 피에 대한 경외감이 생긴 겁니다.
※ 피에 대한 율법: 사람을 해치지 말라는 의미로 시작돼 이후
피 자체에 대한 경외감이 생겨 납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드는데,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폭행을
당해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지요?
그런데 그 옆에 레위인과 사제들이 그 옆을 지나가면서 그를 보고
그냥 지나쳐 갑니다. 그 이유는 레위인과 사제들이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전례적인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 피가 내 몸에 닿게 되면은 오늘날 천주교
신부라면은 미사를 못 드리게 되는 거예요.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되겠다라는 생각에.
따라서 그 사람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의 정신은 알지 못하는 겁니다.
율법의 정신은 뭡니까? 피를 흘리지 말라는 율법의 정신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와 같은 상황 안에서 율법의 정신은 모르고
율법의 문장만 알고 있는 겁니다. 피에 몸이 닿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들은 그곳을 지나가는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율법을 지킨 겁니까? 아니면 어긴 겁니까?
율법의 문장은 지켰지만 율법의 정신은 어기는 겁니다.
예, 그렇게 피를 흘리는 것에 대해서 그들이 나눕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미 율법적인 관점이 조금은 역으로 투영되어 있는
요셉 이야기 입니다. 그러므로 요셉 이야기를 적은 내지는 이 르우벤의
말 안에 그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을 집어 넣은 그 사람은 율법을 알고
있는 겁니다.
※ 르우벤 명령,
피를 흘리지 마라에는 후대의 율법적 관점이 미리 반영되어 있다.
나중에 요셉이 포리파르의 아내와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 이유도
그 편집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요셉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요셉은 침묵하는 것처럼 등장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야기의 전체를 보면 조금은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 42장 21절을 보면 나중에 요셉에게
간 형제들이 서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요셉의 반응
* 42,21: 그들의 서로 말하였다. "그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죗 값을 받는 것이 틀림없어. 그 애가 우리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보면서도 들어 주지 않았지.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거야"
자신들의 잘못에 관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요셉은 애원을 한 겁니까? 안 한 겁니까? 한 겁니다.
예, 앞선 이야기에서는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는데
여기에서는 그 때는 미처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애원하는
요셉의 모습에 대하여 얘기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괴로움이 우리에게 닥친거야"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뭡니까?
그렇게 동생을 팔아 버리고는 그들이 무슨 일을 합니까?
앉아서 빵을 먹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내가 잘못 했다" 라는 그런 죄 의식이 없는 겁니다.
"이것이 잘못이다" 라는 죄의식이 없는 겁니다.
그것은 반대로 얘기하면 어떤 뜻 일까요?
그들이 요셉을 그렇게 미워하였다.
그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얘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요문장 한문장만 놓고 보면, 작가적 시점에서 본다면 그들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그와 같은 건 좀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 다음 장면에서 상승이 됩니다.
그들은 그리고 요셉의 저고리를 가져다가 숫염소 한 마리를 잡아서
그 피에 적시고 그것을 아버지에게 가서 보여 주고 얘기 합니다.
※ 그들은 그 긴 저고리를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서 말하였다.
"저희가 이것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아들의 저고리인지 아닌지
살펴 보십시오."(창세 37,32)
그들의 죄는 따라서 동생을 죽이려고 했다.
뭐 하지만 죽이지는 않고 팔아 버렸다. 동생에 관한 죄가 이제는 누구에
관한 죄로 다시 한번 상승하는 겁니까? 그 아버지를 속이는 겁니다.
※ 요셉을 팔아 버린 형제들의 죄는 아버지를 속이는 것으로 상승한다.
아버지를 기만하는 죄입니다.
자, 그러므로 형제들의 계획은 결국 항상 문제시 됐던 요셉의
옷을 뺏고, 두 번째는 요셉의 꿈이 실현되지 않기를 바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제 요셉은 옷을 빼앗기고, 꿈은 망가뜨려지는 겁니다.
노예로 팔려가게 생긴 겁니다. 그들에게 얼마나 팔지요?
은전 스무닢에 팝니다.
※ 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닢에 팔아 넘겼다.
(창세 37,28)
레위기 27장에 노예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은전 스무닢
* 레위 27,2 이하: 누구든지 사람을 봉헌하겠다고 주님에게 서원하고,
그 사람에 해당하는 값에 따라 서원을 채우려 할 경우, 스무 살에서
예순 살에 이르는 남자의 값은 성소 세켈로 쉰 세켈이다. 여자이면
그 값이 서른 세켈이다. 다섯 살에서 스무 살까지는 남자의 값이
스무 세켈이고 여자는 열 세켈이다.
한 살에서 다섯 살까지는, 남자의 값이 은 다섯 세켈이고 여자의 값은
은 세 세켈이다. 예순 살 이상인 남자의 값은 열다섯 세켈이고 여자는
열 세켈이다. 너무 가난하여 값을 낼수 없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사제 앞에 세우고 사제가 그 값을 메기는데, 서원한 사람의
능력에 따라 값을 매긴다.
누구든지 사람을 봉헌하겠다고 주님에게 서원하고,
여기서 봉헌은 성전에 주는 겁니다. 일종의 사람을 성전에 봉헌한다는
뜻은 그렇다고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뜻은 아니고, 성전의 노예로
봉헌하는 겁니다.
나에게 노예가 이렇게 있으니 성전에 하느님께 이 사람을 노예로 봉헌
합니다. 옛날에는 특히 자신의 종이라든지, 종에게서 난 자식들을 소유
개념으로 봤기 때문에 이렇게 봉헌하는 것이 가능 했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런데 봉헌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서원하고 하지만 주기가
싫은 거예요. 그럴때는 돈으로 대신 낼 수 있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사람 값이지요. 그러니까 사람 값인데 재미 있습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이 었으니까 스무 세켈 인거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스무 닢입니다.
여기서 닢이라는 거는 동전 하나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전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고대의 화폐 제도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싼 화폐가 렙톤 입니다. 과부의 헌금에 등장하는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1원짜리 입니다. 40센트 정도되는.
그 다음에 콰다란스, 아사리온, 에나리우스 그 다음에 쭉 나오다가
세켈, 제일 높은 단위가 탈렌트인데, 탈렌트는 15만불 정도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막펠라의 땅을 얼마나 비싼 값에 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명동 땅값 만큼 준 겁니다.
그런데 동전 한 닢이라는 것은 아마도 렙톤이나 아니면 데나리우스,
요 사이에 있는 이 정도의 단위일 겁니다.
왜냐하면 이 정도만 되도 한 닢으로 만들기에는 너무 무게가 커요.
그런데 요셉을 요 정도의 단위로 스무닢 아니예요.
나중에 레위기에 나오는 것이 훨씬 인간에 대한 가치를 높게
메기는 겁니다. 아무튼 사람에 대한 가치를 이 정도의 가치로
보았다라는 것들에 대한 어떤 기본적인 생각을 우리가 하고.
따라서 형들은 요셉을 굉장히 싼 값에 넘겼다라는 생각을
우리가 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꼭 그럴지는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유다도 예수님을 팔아 넘기지요?
예, 은돈 서른 닢 입니다. 요셉보다 조금 더 받은 거예요.
물론 예수님을 노예로 판 건 아니지만, 밀고한 거지만.
노예로 팔았다는 거와 비교할 건 아니지만.
하지만 요셉은 스무 닢 예수님은 서른 닢.
자, 여기서 우리가 유형론(typology), 또는 예형론에 관해서
얘기를 해야 됩니다. 요셉도 팔려가고 예수님도 팔려가는 거지요?
그리고 요셉도 팔려가서 어떤 인간의 불행한 사건인데 그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 하시지요?
예수님도 팔려가는 불행한 사건인데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 지지요? 따라서 요셉은 그리스도의 전형입니다.
※ 팔려 갔지만 고난을 극복하는 요셉 이야기는 예수님 십자가 사건의
전형이다.
앞선 그 전형이 누가 있었지요?
예, 이사악이 자신을 제물로 바칠 그런 나무 더미를 지고 모리야
산으로 올라 가듯이 예수님도 골고타 산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그와 같은 모습.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축복이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와 같은 체험들.
따라서 구약 안에 있는 많은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준비하는 하나의 전형으로, 구약의 저자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몰랐을 겁니다. 그렇게 있을꺼라는 것을 몰랐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사건으로 준비되는.
모세 때에 많은 아기들이 죽임을 당하듯이 예수님 때에도 그렇게
죽임을 당하는. 모세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헤메듯이
예수님도 40일간을 광야에서 그런 어떤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전형을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계속해서 만나게 됩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 그렇게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그 야곱이 다음과 같은 일을 합니다.
"옷을 찢고 허리에 자루옷을 두른 뒤 자기 아들의 죽음을 오랫동안
슬퍼하였다." 라는 겁니다.
※ "야곱은 옷을 찢고 자우옷을 두른뒤, 자기 아들의 죽음을
오랫동안 슬퍼 하였다."(창세 37,34)
여기서 옷을 찢는 것은 슬픔을 표현하지 마는 일반적인 장례의
예절입니다. 우리가 흔히 옛날 장례에서 곡을 하듯이 자루옷을
두른다라는 것도. 그야말로 자루 옷 입니다.
자루인데 목과 팔이 나올 수 있도록 자른 것.
그러니까 본래 사람의 의복을 하기 위한 기능이 아닌거니까
그 옷이 상당히 거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머리에 재를 뿌리고.
그 다음에 오랫동안 슬퍼하였다는 것은 일종의 곡을 하는 거라고
생각 하시면 됩니다. 그러자 그의 아들딸들이 모두 나서서 그를 위로
하였다라고 얘기 하는데 이것은 단지 "아버지 슬퍼하지 마십시오."
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초상의 기간을 이제 끝내라는 것입니다.
※ 그의 아들딸들이 모두 나서서 그를 위로 하였지만(창세 37,35)
이제 요셉을 잃은 상을 끝내 달라고 그러는데 야곱이 의외의 반응을
합니다.
※ "아니다, 나는 슬퍼하며 저승으로 내 아들에게 내려 가련다."
여기서 저승으로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셔올(sheol)이라고 말 합니다.
죽은 자들이 내려가는 지하 세계를 얘기 합니다.
※ "이렇게 요셉의 아버지는 그를 생각하며 울었다."(창세 37,53)
따라서 형제들이 이제 요셉에 대한 초상을 끝내십시오.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뭐 3년 상이 있을 것이고, 아니면 뭐 49제가
있을 것이고, 아니면 뭐 삼우 미사가 있는 것이고, 이런 게 있겠지만
이제 그와 같은 초상을 끝내 십시오. 이제 그를 잊으십시오라는
얘기에 아버지가 형제들의 말을 듣습니까?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건 뭘 의미 합니까? 형제들의 계획이 실패한 겁니다.
※ 요셉을 제거해 아버지의 사랑을 얻으려는 형제들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고, 긴 저고리를 그로부터 뺏으므로써
아버지의 사랑이 이제 우리를 향할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야곱의 사랑은 계속 요셉에게 머물러 있는 겁니다.
오히려 어떤 문제가 생깁니까?
그들이 살고 있었던 그 가정의 평화가 붕괴되는, 갈등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가 뭔가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그와 같은,
형제들이 예상 했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그 일들이 발전하게 됩니다.
※ 요셉이 팔리고 갈등이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정의 평화가 붕괴되고 만다.
자, 그리고 내용은 38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 유다와 타마르: 창세기 38장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이 38장은 빼고 읽습니다.
요셉과 무관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읽어 봐도 별로 즐겁지도 않은 내용이니까.
과거 유다인들의 시기에는 나중에 복음에서도 예수님이
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마는 좀 특별한 결혼의 관습이 있습니다.
모두가 어떻게 보면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관습입니다.
여성이 혼자 힘으로는 자리 잡을 수가 없으니까, 누가 형이 결혼을
해서 살다가 아들을 못 낳고 죽으면은 동생이 결혼을 한다기 보다
아들을 낳아 주어야 하는 그와 같은 내용 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그 약속을 지키니 않지요?
유다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까, 아들을 주지를 않으니까
나중에 그 며느리가 유다의 자손을 낳게 되었다라는
우리로서는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 입니다.
따라서 신학자들이 그와 같은 내용을 건너 뛰는데 꼭 건너 뛰어야
돼? 하고 보니까 다음과 같은 문학적 공통점이 있더라 이겁니다.
팔려가는 요셉(창세기 37,32-33) 유다와 타마르(창세기 38, 25-26)
그들은 긴 저고리를 아버지에게 타마르는 자기의 시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서 말하였다. 전갈을 보냈다.
(보내다 ㅡ 긴 저고리) (보내다 ㅡ 인장과 줄과 지팡이)
"이것이 아버지 아들의 저고리인지 "이 인장과 줄과 지파이가 누구의
아니지 살펴 보십시오" 것인지 살펴 보십시오"
그것을 살펴보다 말하였다 유다가 그것들을 살펴보다
말하였다
그 앞에 37장의 이야기에서 그들은 그 긴 저고리를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서 말하였다. 여기서 그 긴 저고리를 아버지에게 보냈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send 라는 뜻이 있습니다.
긴 저고리라는 표상 입니다.
반대로 타마르가 자기가 그런 매춘을 한 것이 아니라,
나는 따라서 불의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나는 내 권리에 따른 일을
한 것이다라는 것을 얘기를 하기 위해서 징표로 받은 인장과 줄과
지팡이를 그들에게 보내지요? 같은 동사가 등장 합니다.
그리고 뭐라고 얘기를 합니까?
"이것을 살펴 보십시오." 라고 얘기를 합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타마르도. 그리고 야곱이 그것을 살펴보다 말하였다.
"맞다! 이거는 요셉이 죽은 거구나." 여기서도 유다가 그거를 살펴보다
말하였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따라서 문학적으로 계속 평행합니다.
37장의 내용과 38장의 내용은 다른 내용이지만.
그리고 그것이 담고 있는 신학적 메세지도 동일하지 않겠지만
계속해서 같은 문학적인 구성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니다! 이거 요셉 이야기 안에서 함께 읽어야 한다.
함께 읽기 위해서는 여기다 이 이야기를 둔 이유가 있을 텐데
뭣 때문에 뒀을까요?"
※ 37장과 38장은 문학적으로 같은 구성 '유다와 타마르'
이야기가 배치된 이유가 있다.
여러분들 다음 대사를 보셔야 됩니다. 26절
※ 유다가 그것들을 살펴보다 말하였다."그 애가 나보다 더 옳다!
내가 그 애를 내 아들 셀라에게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세 38,26)
예, 여기서 유다는 두 가지 주장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유다는 당시에 어떤 집권자로서의 법을 해석하는 사람으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감출 수 있을까요?
자기가 자신의 며느리와 잤다는 조금은 창피한 그와 같은
사실을 덮어 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뭐라고 그럽니까? "그 얘가 옭다. 내가 틀렸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 함으로써 성경의 저자의
입장에서는 유다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겁니다.
※ 유다와 타마르 이야기는 유다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있다.
비슷한 이야기가 나중에 사무엘서에 가면 또 등장을 합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게 하지요? 그럴 때 나탄이라는 예언자가
다윗을 찿아 갑니다. 그래서 뭐 가난한 사람이 양 한마리를 갖고
있었는데, 그런 얘기를 쭉 하자 다윗이 "그 사람이 누구냐?"고 그러니까
나탄이 그게 "바로 너다." 그러니까 다윗이 즉시 뭐라고 그럽니까?
"나는 주님 앞에 죄인 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예, 비슷한 이야기 입니다. 그 유다와 다윗은 같은 가문입니다.
다윗은 유다 가문 입니다. 따라서 이 대목은 누구를 부각 시킵니까?
예, 유다가 그 첨가된 내용을 보자면은 25절 이후부터 첨가된
내용을 보면 그 유다가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따라서 37장과 38장에서 37장에서 유다의 역활을 첨가 하면서
38장에서 다시 한번 이 편집자는 어떤 얘기를 하는 겁니까?
유다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런 유다가 마지막에 야곱의 유언에 가서 유다가
이스라엘의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가장 강한 민족으로, 가장 용맹한
민족으로, 이스라엘을 이끄는 민족으로 야곱의 유언에서 등장하게
되는 그 이유가 논리적으로, 또 신학적으로 여기에서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이 38장을 읽을 수 있겠습니다.
예, 그리고 이제 39장으로 넘어 갑니다.
※ 포티파르의 종이 된 요셉, 요셉과 포티파르의 아내,
감옥에 갇힌 요셉: 창세기 39장
이집트로간 요셉은 포티파르의 종이 됩니다.
포티파르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서는 별로 어떤 의미를 찿기가
어렵습니다. 이집트 말을 찿아 보니까, 이집트 말로 좀 역으로
추정해 보니까 파디 파레 라는 말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뜻은 '레' 또는 '라' 라는 신의 선물.
'라'가 주었다라는 그와 같은 뜻일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나중에 요셉이 결혼을 하게 되는데 41장 45절, 50절,
그리고 46장 20절에 누구와 결혼 하느냐 하면 온의 사제 포티 페라의 딸.
포티 파르가 아니라 이번에는 포티 페라입니다.
포티 페라의 딸 아스낫 입니다.
따라서 이집트 사람의 이름은 좀 이상해요. 다 비슷한 것 같애요.
※ 요셉의 부인: 온의 사제 포티 페라의 딸 아스낫
포티 파르, 포티 페라, 피티 피라, 이런 식으로 이름이
다 비슷하게 등장 하는데 다른 사람이겠지요. 왜냐?
앞에 나오는 포티파르는 파라오 왕의 경호 대장이고,
여기서는 온의 사제라고 나옵니다.
또 하나 재미 있는 것은 여기서 포티파르를 설명 하면서
파라오의 '내신'이라고 나오는데 사실 히브리 말에 등장하는
그 히브리 말의 본래의 뜻은 '내시' 입니다.
※ 파라오의 내신으로 경호 대장인 이집트 사람 포티 파르가 …
이스마엘인 들에게서 그를 샀다.(창세 39,1)
예, 그러니까 거세를 한 거지요? 그러면 경호대장으로 일하긴
좀 힘들었을 것 같애요. 그러니까 싸우려면 힘이 있어야 되잖아요.
주석가들도 이부분을 내시인데 경호대장이다 라고 얘기하는
그 부분을 해석하기가 조금 어려워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말 번역에서도 '내신'으로 번역을 했고,
중요한 것은 포티파르가 왕궁에 속한 또는 왕궁 안에 거처하는
그와 같은 하나의 왕의 그런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는 없는 말인데 서양에서는
킹스코트(kingscoourt: 마당)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왕에 속한 그런 마당, 왕의 영역에서 거주하는 내지는 거하는
그와 같은 인물로서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것은 분명 합니다.
그가 이스마엘인 들에게서 그를 삽니다.
얼마에 샀는지는 등장하지 않지요? 그런데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으므로,(창세 39,2)
이게 우리가 그냥 읽어 버릴수도 있겠지마는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있었으므로"
앞선 야곱 이야기에서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가 뭐였지요?
"하느님의 함께 있음" 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제 등장하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어디까지 함께 있는 겁니까?
이집트에서 함께 계시는 겁니다.
본래 신학적인 구도에서는 이렇게 되면 안되는 건데.
모든 신들은 자신의 영역을 떠날 수 없는데 그런데 이집트에 함께 있는.
그러면서 계속해서 1절부터 6절까지 계속해서 주님, 주님, 주님,
이런 말들이 등장 합니다.
또 어디에서 등장하냐 하면 이 이야기가 끝나는 39장의 마무리 부분에서
계속해서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21절 입니다.
※ "그러나 주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시면서 그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전옥의 눈에 들게 해 주셨다."(창세 39,21)
그 다음에 23절 입니다.
※ "주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으며, 그가 하는 일마다
주님께서 잘 이루어 주셨기 때문이다."(창세 39, 23)
계속해서 뭐를 강조 합니까?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있었다.
함께 있었다. 함께 있었다.재미 있는 건 뭔지 아십니까?
요셉 이야기를 전체를 통해서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야훼', '주님'
이라는 말이 등장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셉 이야기 전체에서 적어도 야훼라는 이름을 중요시하는
신학적 저자가 제일 강조한 부분은 이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가 강조하는 것이 뭡니까?
"야훼가 함께 있었다." 라는 그와 같은 이야기 입니다.
※ 성경 저자가 39장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예, 그리고 그것은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멜키체덱이나 아비멜렉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 하지요?
야곱의 경우에는 라반이 "너희 신이 너와 함께 있구나." 하고.
이사악의 경우도 아비멜렉이 그와 같은 거를 인정 하지요?
요셉의 경우에는 이제 포티파르가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있다는
겻을 인정 합니다.
※ 주님을 인정하는 이방인들: 멜키체덱, 아비멜렉, 라반, 포티파르
정작 그 가족 안에서는 인정 받지를 못하는데 이방인들인 멜키체덱,
아비멜렉, 라반처럼 가족 밖에 있는. 여기 포티파르는 그가 그의 신과.
여기서는 하느님과 라고 번역하는 것보다는 저보고 번역하라고
그랬으면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신'이라고 번역했을 꺼예요.
"그의 신이 그와 함께 있다", "그의 신이 그를 돌본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 모든 것이 나중에 이 이후에 등장하는 이집트에서의 요셉의
성공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가 됩니다. 약속의 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야훼의 권능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9장은 약속의 땅이 아님에도 야훼의 권능이 유효하다는
것은 인정 하는데 가장 낮은 수준에서 인정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떤 겁니까? 그냥 그에게 좋은 일이 생겼고, 포티파르는 그를 신뢰 했고,
그를 그 집안의 이 정도로 삼았다 라는 어떤 낮은 수준의 높이 올라가기
전에 계단을 밟듯이 가장 낮은 수준의 확인이 여기에서 등장 합니다.
따라서 39장 1절에서 6정에 등장하는 주님에 관한 고백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님에 대한 고백은 작가의 전지적 시점 입니다.
포티파르의 입에서도 요셉의 입에서도 야훼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직 모르는 겁니다.
언제 가면 그 모든 사람이 야훼라는 이름을 알게 될까요?
탈출기 3장에 가서야 이제 하느님이 자신의 이름을 모세 앞에서
계시 하시면 "나는 있는자 그 로다" 라고 모세 앞에서 계시 하시면
그 다음 부터는 모든 사람이 야훼라는 이름을 알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누구만 알고 있는 겁니까? 작가만 알고 있는 겁니다.
※ 39장에 등장하는 주님(야훼)에 대한 고백은 성서 작가의 전지적
시점이다.탈출기 3장에 가서야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계시 하신다.
무대 위에 선 사람들은 아직 하느님의 정체 하느님의 이름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것처럼 그와 같은 서술이 이 안에 등장
하는 것 같습니다.
※ 그리하여 그는 자기 주인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서 살았다.
(창세 39,2)
누구에게 종으로 팔려 갔다가 거기에서 작게 작게 출발하는.
하지만 아직은 미약한 존재, 누구와 비슷 합니까?
구약에서 17살의 어린 소년 요셉. 하지만 나중에 이스라엘 전체를
구원하게 될. 이 정도 말씀 드리면 다윗이 떠올라야 합니다.
사울의 집안에서 어린 소년의 그 다윗이 하는 일이 뭐였습니까?
그 어렸을 때 원래는 양치기 였고 나중에는 왕궁 와서는?
예, 수금 타면서 뭐 가수예요 가수.
그러니까 싸움 잘 하는 존재가 아니라 왕궁 안에서의 다윗의 역활은
그냥 임금을 기쁘게 하는 기쁨조 내지는 무슨 전례를 하는 합창단의
그런 어떤 전례적인 역활을 하는 뭐 그정도의 역활인 겁니다.
요셉도 어떻게 보면 굉장히 연약한 그와 같은 역활을 하는데
그렇게 잘 지냈으면 요셉도 행복하고 다 행복 했을 텐테.
하지만 그렇게 잘 지냈으면 나중에 이집트가 흉년을 맞았을 때 요셉도
포티파르도 다 굶어 죽었을 텐테 그래서인지 불행한 일이 생깁니다.
포티파르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 합니다.
이 포티파르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이 이야기는 문학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독립적인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 여기 겁치는 그런 표현을
갖고 있는 그런 이집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목은 두 형제의 이야기 인데 여기서 두형제는 아누비스와
바타라는 두 형제 입니다.
※ 이집트의 두 형제 이야기: 아누비스와 바타
여기서 아누비스가 형이고 바타가 동생인데 아누비스의 부인이
바타를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아누비스가 바타를 죽이려고 하는데
여러가지 상황과 정황을 보자 아내가 불의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아내를 죽였다라는 뭐 그와 같은 이야기 입니다.
뭐 나중에 여려분들 에테르기 이 정도에 넘어가면 거기에서도 고발한
사람이 불의가 드러나서 죽게 되면 고대 법은 자주 이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식의 고대 법이냐 하면 다음과 같은 겁니다.
어떤 사람이 저를 고발을 해요. 그런데 어떻게 고발을 하느냐하면?
"이 사람이 저한테서 뭐를 훔쳐 갔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어떤 벌을
내려 주십시오." 뭐 예를들어 "다섯 대 곤장을 때려 주십시오."
이렇게 얘기해요.
그런데 제가 그것을 훔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이 되면은 저를
고발한 사람이 그 다섯 대를 맞아야 됩니다. 자기가 고발을 하고
구형까지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죄가 그 사람이, 피고가 좌가 없다는
것이 증명을 하면 원고가 자기가 얘기한 구형을 자기가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거는 고대법 뿐만이 아니라 로마 법에서도 비슷한 그런
형사법이 진행이 됩니다.
예, 재미있는 것은 이 대목에서도 요셉이 침묵을 합니다. 참 이상해요.
저 같으면 "주인님, 제가 어떻게 주인님께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뭐 이런 식의 여러가지 과정이 있었을 것 같은데 요셉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불의한 경우에 억울한 일을 당해 본 적이 있으시지요?
그 억울함을 다스리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화병나서 드러누워야 되는 거지요? 그런데 재미 있는 사실은 인간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모두가 억울한 일을 당한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가장 억울한 일은 뭘까요? 죽음 입니다. 죽음.
죽을 때는 모두가 억울하다고 그래요. 그래서 여러분들 왜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가지 단계 이런 것에 대해서 얘기 들으셨습니까?
요셉의 이야기를 하면서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해 봤는데 죽음을 받아
들이는 다섯 가지 단계를 보겠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5 단계
* Denial (부정)
* Anger (분노)
* Bargaining (거래)
* Depression (절망)
* Acceptance (받아들임 / 긍정)
예, 결국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우리는 그런
불의함과 맞딱뜨리게 되는 것 같애요. 뭐 비단 우리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인간의 운명은 그가 어디에서 어떤 부모 아래서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거의 많은 부분들이 결정이 되고 말지요?
우리 나라에서 꼭 무슨 뭐 강남에서 과외하고 이런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났을 때,
아니면 뭐 잘 사는 나라에서 부잣집에 뭐 아들딸로 태어 났을 때,
그 모든 것들이 다 결정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인생이 불공평한 것 같애요. 젊은 이들이
부르는 생활 성가 중에 공평하신 하느님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생각하면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애요.
그런데 인생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은 결국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는 단계까지 이르느냐? 이르지 못하느냐?
이게 하느님이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화두을 던지면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풀어야 될 하나의 숙제처럼 내 주시는 것 같애요.
각자의 인생 안에서 모두 다 억울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 대통령도 억울할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참 억울할 겁니다. 낮은 사람대로 억울할 겁니다.
내가 왜 해고를 당해야 하는지? 등. 물론 그 안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다루어야 될꺼는 분명히 어떤 세상이 좀더 정의로와져야 겠고,
좀더 올바로워야 되겠고, 뭐 그런 사회 정의에 대한 문제를 묵상해
볼 수 있겠지만 결국 인생은 어떤 불공평한 면을 갖고 있고,
우리들은 그 인생의 어떤 스테이지(stage:단계) 안에 머물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부정하는, 어떤 사람은 그 앞에서 분노하는,
어떤 사람은 그 앞에서 거래를 하고 싶어하는, 또 어떤 사람은
절망에 빠지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 얼마전에 한진중공업 사건에 대한 보도를 다 보셨지요?
김진숙 위원장이라는 분이 크레인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 다섯가지 중에 뭔가를 부정하는, 아니면 분노하는, 아니면 뭔가
절망하는 어떤 얼굴을 보게 될까? 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냥 저 혼자 느낌이지마는 모든 거를 받아들이는 그런 어떤 얼굴을
보면서 나중에 한번 기회가 된다면은 저분을 만나서 크레인 위에서
어떤 영적인 체험을 했지 않았을까? 그 안에서 어떤 체험이 그분에게
있었을까? 하는 얘기를 좀 청해서 듣고 싶다라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거의 뭐 300일이 넘는 그와 같은 엄청난 일이지요?
크레인 위에 올라가서 살아가는 것이.
아무튼 뭐 한진중공업이라든지 쌍용자동차 같은데서 굉장히 우리들을
어둡게 하는,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들리는데
김진숙 위원장이 무사히 내려 왔다는 것에 대해서 노력하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좀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예, 이 요셉의 침묵과 함께 저한테 떠오르는 영화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꼭 한 번은 보셨으면 좋겠어요.아프카니스탄의 영화이데요.
영화 제목이 The kite runner(2007) 연을 쫓는 아이라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거기 조그만 꼬마가 둘이 등장을 합니다.
아프카니스탄의 이야기인데 주인과 종 내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받드는 종의 아들과 주인의 아들의 이야기 입니다.
주인의 아들의 이름은 아미르라는 이름이고 종의 아들은
하산이라는 이름 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의 아들은 항상 좀 아버지의
사랑 받는 아들이었고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 이었지만 아버지에게
항상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가 아들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이 종의 아들인 하산은 굉장히 용감한 겁니다.
훨씬 조그맣고 힘도 없는데 때로는 아미르라는 자기 주인의 아들을
위해서 대신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굉장히 심한 폭행을 당해요.
그리고 아미르라는 주인의 아들은 숨어서 그 광경을 목격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아마 그것이 마음의 짐이 되었든지 아미르라는 친구가
하산이라는 그 종의 아들을 점점 멀리하기 시작 합니다.
그 광경을 보고 아마 그런 기억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겠지요?
점점 멀리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모함을 하느냐하면,
사실은 그런 일이 없었는데 그 하산이 자신의 시계를 훔쳤다고,
아니면 뭐 물건을 훔쳤다고. 저는 시계라고 기억을 하는데 시계를
훔쳤다고 아버지에게 고발을 합니다.
이때부터가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놀라운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미르 그 종과 하산이 모두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 아버지가 하산에게 물어 봅니다. "니가 아미르의 시계를 훔쳤느냐?"
여러분들 당연히 어떤 장면을 생각 하시겠습니다까?"
"아닙니다. 나는 내가 설마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설마 그런 일이
있으면 나를 죽이십시오." 이런식의 자신의 그거를 얘기하는 장면을
생각할 텐테 그 장면에서 그 하산이라는 친구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예, 제가 훔쳤습니다." 하는 겁니다.
저한테는 굉장히 쇼크였어요. 어떻게 저런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훔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종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주인의 종은.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종이 어떤 얘기를
하냐하면 자신의 아들의 손을 잡고 "주인님 저는 이제 떠납니다."
그리고 집을 나갑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그 아미르는 이제 미국에
오게 되고, 미국에서 작가로 성공하게 되는데 그에게 하산의 소식이
들립니다. 하산이 아프카니스탄에서 죽었는데 아이를 남기고 죽습니다.
근데 그 아이가 생사를 알 수 없어요.
그러자 그 아미르가 보속하는 마음으로 어떤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죽음을 무릎쓰고 아프카니스탄에 돌아가서 그 아이를 구출해
오는 이야기 입니다. 내용을 다 알고 보셔도 감동적인 이야기이니까
기회가 되면 꼭 보십시오 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은 이해가 정말 안 갔어요. 왜 내가 훔쳤다고 했는지?
그리고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그날 저녁에 한 잠도 못 잤어요.
그리고 며칠이 지나고 나서 제가 왜 한 잠도 못 잤는지 그 이유를
알아냈어요. 뭔지 아세요?
제가 그 하산이라는 "그 시계를 내가 훔쳤습니다." 라고
얘기하는 그 꼬마를 제가 마음속으로 질투하고 있더라구요.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 상황에서 저런 얘기를 못할텐테
쟤는 저런 이야기를 하는 구나."
뭔가 내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을 한 꼬마를 이제 50이 다 된
사제가 한 열살 정도된 꼬마의 대답 앞에서 그냥 작아지는 거예요.
예, 요셉의 침묵 안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그런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받아 들이는.
결국에 그 모든 것들을 받아 들이는 분들의 마지막 한 마디를
우리는 듣게 되지요?
"나는 행복 합니다. 여러분들도 행복 하십시오!"
요한 바오로 2세 입니다.
추기경님은 "나는 행복 합니다. 여러분들 서로 사랑 하십시오!"
모든 것들을 받아 들인 이야기들 입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쯤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게 아니예요? 마지막 대사 한마디 정도는 준비해 두셔야 합니다.
괜히 돌아가시는 자리에서 "내 이럴 줄 알았어" 하시면 안됩니다.
사실은 어떻게 말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풀어야 될 숙제는 어느 단계에 가야 된다는 겁니까?
예,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 어떤 행운의 순간들, 아니면
억울했던 일들, 그 모든 일들을 내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감싸 안을 수 있는 그와 같은 어떤 인생의 넉넉함 그것이 우리가
풀어야 될 어떤 숙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아멘.
이 작품을 청각장애를 가진 우리 형제들에게 바칩니다!
정말 좋은 강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행복하세요!
제 28 회 요셉 3 부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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