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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 령
제다 공항의 대합실은 출영나온 사람들로 혼잡했다. 대부분이 외국 사람들로 현지인은 별로 보이지가 않았는데 현지인들은 먼저 입국심사를 마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세관관리들은 자국인에 대해서는 까다롭지 않았다. 사우디 인들은 그들의 전용 입국심사대를 통해 검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빠져나간다. 그러나 한쪽 편에 길다랗게 늘어선 수백명의 외국인들은 부러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다. 현지인 스폰서의 초청장이 있어야 비자가 발급되는 외국인들은 세관관리의 눈에는 자국에 일하러 오는 노동자로 보이는 게 정상이다. 그런 괄시를 받기는 유럽이나 미주지역의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의 김영남은 그것이 부러웠고 화가 난 적도 있었다.
한국의 세관은 외국인에게는 너그럽고 동포인 내국인에게는 까다로운 것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항공사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동포에게 불친절한 한국의 항공사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유가 있기는 했다. 한국은 수출국이다. 외국인이 많이 와서 많이 사가야 하는 처지에 있다. 사우디나 중동의 산유국처럼 막대한 오일달러로 세계 각국의 물품을 사는 나라가 아닌 것이다.
비행기를 타는 한국인들은 대개가 건설인력들이었다. 이제는 많이 달라졌지만 세관과 한국 항공사를 이용하는 승객의 대부분이 건설인력들일 때가 있었다. 그들이 서구인처럼 기내에서의 매너에 익숙해 있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대합실로 나선 김영남은 곧장 현관을 향해 손수레를 밀었다. 오후 네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열다섯 시간이 넘는 지루한 비행이어서 호텔에 들어가 잠부터 자 두고 싶었다.
"사장님, 사장님."
옆쪽에서 큰 소리의 한국말이 들려 왔으므로 김영남은 몸을 돌렸다.
"아아, 조 차장."
조한수의 활짝 웃는 얼굴이 다가왔다.
홍성구 대신 사우디 지사장으로 나와 있는 조한수였다.
"사장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 "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난 조한수가 손수레의 손잡이를 잡았다.
"이봐, 나는 이제 사장 아니야, 연락도 못 받았어 ? "
"시장하시지요 ? 우선 식당에 가셔서 식사를 하시고 호텔로 들어가시지요. 김치찌개를 시켜 놓고 왔습니다."
앞장서 가면서 그가 소리치듯 말했다.
대합실을 나서자 곧장 후끈한 열기가 온몸에 덮여 왔다. 건너편 주차장에 세워진 차량들이 우선 눈에 띄었는데 차체들이 모두 태양열에 녹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섭씨 사십도 가까운 열기였고 습기가 없어서 금방 땀이 마르고 어지러웠다.
손수레를 맡긴 조한수가 차를 가질러 주차장으로 서둘러 가고 있었다. 장일수가 연락을 한 모양이었는데 회사가 어떻게 되어 간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가 없다. 서울에서 입고 온 여름양복도 걸치고 있기에는 더웠으므로 김영남은 저고리를 벗었다. 이제 세영의 제다 지사는 한성그룹의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한성의 제다 지사장인 조병학이 조한수의 상관이 되는 셈이다.
"사장님, 집으로 모시고 가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트렁크에 짐을 싣고 난 조한수가 운전석에 앉으면서 말했다.
"직원들한테서 말이 나갈 염려가 있어요."
"그래야지, 이렇게 나와 준 것만 해도 고마워. 이제는 나한테 신경을 안 써 줘도 돼."
길가의 모래언덕을 바라보면서 김영남이 말했다. 먼지에 오염된 연한 밤색의 모래더미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창문을 열자 맵고 더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앞으로는 나 혼자 돌아다닐 거야. 괜히 나와 같이 있는 걸 저쪽이 알게 되면 자네가 난처해져."
"난처할 것 없습니다. 지랄한다면 사표 내지요. 그리고 귀국할랍니다."
"바보 같은 놈."
이맛살을 찌푸린 김영남이 그를 쏘아보았다.
"쓸데없는 객기 부리지 마라. 장 이사가 사장이야, 똘똘 뭉쳐서 장사장과 함께 회사를 일으켜야지."
핸들을 움켜쥔 조한수가 잠자코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쪽의 아지크와 타밀, 아즈물라와 추진하고 있는 일을 모른다.
"내가 필요하면 전화를 할테니까 조 차장은 맡은 일이나 해, 그것이 날 도와주는 것이야."
"염려마십시오. 제가 아인 줄 아십니까 ? "
한성놈들한테는 철저하게 연막을 칠테니까요, 오신 것도 비밀로 하겠습니다.
"고마워."
"그런 말씀 듣기에 거북합니다. 사장님께서 다시 일어나신다면 저는 그때, 가차없이......"
"당분간은 쉬겠어."
"그러세요."
"내가 밤에 집으로 전화를 할테니까, 사무실로 연락하지는 않겠어."
"제가 연락을 드리지요, 낮에는."
고속도로는 넓었고 차량의 왕래도 적었으므로 조한수는 차에 속력을 내었다.
아지크가 호텔방에 찾아온 것은 밤 아홉시가 넘었을 때였다. 실크로 만든 로브에 발에는 가죽 샌들을 신은 전통의상 차림의 그는 가방을 손에 쥐고 있었다.
"김, 잘 왔소, 내 형제. 만나서 기쁩니다."
김영남의 양쪽 볼에 입술을 가져다 댄 아지크가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에게서 짙은 향수냄새가 풍겨 왔다.
"이렇게 와달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아지크."
"무슨 말씀을 김, 우리 사이에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소파에 앉은 아지크가 웃는 얼굴로 김영남을 바라보았다.
"김이 자세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서로 어색하기만 할테니까."
"아지크, 차를 드릴까요 ? 찬 음료밖에는 없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아지크가 머리를 저었다. 그와는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져 있었고 그것을 장일수가 책임지고 선적시킬 것이다. 세영과 한성과의 관계, 그리고 김영남의 입장을 잘 알고 있는 아지크였다.
"아지크, 변명할 생각은 없습니다. 난 돈이 필요했습니다."
의자에 등을 기댄 김영남이 아지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 그 돈을 한성 쪽에서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아지크가 머리를 끄덕이며 콧수염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나로서는 손해날 일이 아니니까요. 김, 아니 조금 이득이지, 내쪽에서도."
"따지고 보면 한성도 손해가 아닙니다. 그들은 매출실적이 필요한 입장이니까."
"장사꾼이 신의를 지킨다는 것은 거짓말이오. 김, 우리가 같이 트릭을 만들고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오."
아지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당신들은 우수한 장사꾼이요. 나는 수많은 인종들을 겪었소, 당신들 한국인은 이곳에 진출한지 2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능력이 뛰어납니다. 어느 인종들보다도."
"그런데 그것은 개인의 능력이오."
김영남이 입술 끝으로만 빙그레 웃었다.
아지크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한국인끼리 경쟁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 왔어요. 그들은 마치 서로 원수지간인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별로 보지 못했소."
"......"
"어쨌든 장사꾼은 이득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 생활신조요."
아지크가 이쪽을 응원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김영남으로서도 부끄러운 감정은 없다.
아지크가 옆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김, 돈을 가져왔소, 한몫에 가져왔는데 20만 불이오. 김이 쓸 곳이 있을 줄 몰라서 현찰로 가져왔지만 이곳에 있는 스위스은행에 입금시켜 두는 게 편리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아지크."
"시장바닥은 넓은 것 같지만 정보전달이 빠릅니다. 부디 조심하시오.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나도 곤란해집니다."
아지크가 검고 깊숙한 눈으로 김영남을 바라보았다. 이제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걱정마시오, 아지크. 나는 내일 리야드로 떠납니다. 이곳 시장에서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을 거요."
"제다 지사의 미스터 조도 이 일을 알고 있습니까 ? "
김영남이 머리를 저었다.
"내막을 알고 있는 것은 나와 미스터 장 그리고 미스터 하밖에 없습니다. 미스터 조를 아까 공항에서 만났지만 그는 모르고 있습니다."
새로운 계약서를 만들기 전에 아지크는 세영본사에 장문의 팩스를 보내왔다. 시장 사정이 나빠져서 최소한 10프로의 가격인하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조한수에게도 같은 내용의 팩스가 송부되었고 두어번의 가격절충이 있은 다음 7프로로 합의가 되었던 것인데 이러한 증거는 만일을 위해서 필요했다.
"그러시는 게 낫습니다. 미스터 김."
아지크가 머리를 끄덕였다.
"미스터 조한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오. 그가 당신을 이대로 존경하도록 내버려둡시다."
김영남이 물끄러미 탁자 위에 놓인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김, 내일 리야드를 거쳐서 어디로 갑니까 ? "
상체를 앞쪽으로 굽힌 아지크가 물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상담을 해보자는 몸짓이었다.
"당신은 장사꾼이오. 미스터 김, 당신이 한가하게 관광을 다니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당신이 원한다면 사업에 대한 제의를 하고 싶습니다."
아지크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이건 우리들 사이의 농담이지만 장사꾼이 어느 시기가 되면 돈이 날라 다니는 것이 보일 때가 있다고 해요. 그것이 30년만에 올 때도 있고 어느 때엔 놈은 20년만에 왔다고도 합디다."
담배 연기를 길게 뱉으면서 아지크가 웃었다.
"지금 내가 그때가 되었소. 나는 지금 돈이 도처에 쌓여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나는 이것을 거둬야 하겠소. 그래서 나는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요, 재능 있고 운이 좋은 사람이, 운이 나쁜 사람은 안 됩니다."
김영남이 머리를 들고는 웃었다.
"아지크, 내가 운이 좋은 사람으로 보입니까 ? "
"그렇소, 김. 이걸 보시오."
탁자 위의 가방을 턱으로 가리킨 아지크가 따라 웃었다.
"당신은 이렇게 돈을 걷습니다. 나도 물론 이득을 챙기고, 우리는 이제 운세를 탄 거요, 미스터 김."
"이런 방법은 이번뿐이오, 아지크."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고 일의 종류도 수천 가지요, 김."
아지크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검은 눈으로 김영남을 쏘아보았다.
"이제 우리는 비밀을 나누고 있는 사람이오. 나는 그런 친구가 필요해요."
아래쪽으로 도시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는데 불빛이 끊어진 어두운 부분은 바다였다. 검은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였고 아래쪽의 깜박이는 불빛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선박일 것이다.
바닷가의 한쪽에 휘황한 불빛 무리가 시선을 끌었다. 원형의 지붕과 높고 긴 담의 윗부분에도 촘촘히 등을 달아 놓아서 건물의 윤곽이 이쪽에서도 뚜렷이 보였다. 왕궁이었다. 리야드에도 왕궁이 있다고 하므로 이곳은 왕의 가족이 가끔씩 내려올 때 묵는 곳인 모양이었다. 김영남은 두 다리를 길게 뻗은 편한 자세로 창가에 앉아 있었다.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간이었으나 시차 때문인지 눈꺼풀만 무거울 뿐 머리는 맑았다. 서울은 아침 여섯시가 지난 시간이다. 가로등이 켜진 길을 붉은 미등을 보이며 차량들이 달려나갔고 흰 전조등을 번쩍이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서울을 떠난 지 만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몇 달이나 지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이제 먼 곳이라는 선입관이 있었으므로 서울에서 느꼈던 절박한 감정은 어느덧 사그라져 있는 대신, 새로운 생활과 일에 대한 의욕이 일어나고 있다. 김영남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담배를 집었다. 담배갑 옆에 놓인 전화기에 그의 시선이 잠깐 멈췄다가 이내 비켜났다.
서울의 아침 시간을 떠올릴 때부터 오희주 생각이 났다. 어쩌면 그녀 생각을 하면서 서울의 시간을 계산했는지도 모른다. 김영남은 길게 담배 연기를 뱉어 내었다. 물론 그녀가 기다려 주기를 이쪽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고 설령 그렇다고 했을지라도 그것을 믿을 수는 없다. 그럴 만큼 이쪽이 분별없는 사람은 아니다.
적어도 최진규와는 다른 것이 있어야 하는데 가장 쉽게 자기 자신이나 그녀에게 보일 수 있는 것은 물질이다. 그것이 김영남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자기표현이라고 여겨졌다. 물질과 지위 때문에 오희주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그녀를 사로잡은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그 뒷이야기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만날 수도, 그리고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오희주는 그것이 쓸데없는 자격지심이라고 짜증을 내었지만 그 짜증을 모두 믿지는 않았다. 물론 그녀의 그런 표현이 위선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자기 자신을 비하시키지 않으려는 의도도 조금은 있는 것이다.
김영남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제다의 일은 하루만에 끝났다. 수금원처럼 돈만 받으면 끝나는 일이었다.
번호판을 누르자 저쪽에서 금방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조한수의 생기 있는 목소리를 듣자 김영남은 숨을 들이마셨다.
"조 차장, 나야."
"아아, 사장님. 푹 쉬셨습니까 ? "
"그래, 푹 자고 지금 일어났어."
"저도 사무실에서 지금 마악 돌아온 참입니다.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 적적하실텐데."
"이 사람아, 적적하기는. 자넨 집에서 쉬어. 그런데 내가 제다에 온 것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는 않았겠지 ? "
"아무도 모릅니다. 저녁때 사장님과 헤어지고 나서 시장에서 아지크를 만났는데 그도 모르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그래 ? "
"내일쯤 바이어들을 만나시지 않겠습니까 ? 제가 주선해 드리겠습니다만."
"고맙네, 조 차장. 하지만 난 내일 리야드를 거쳐서 이곳을 떠날 거야. 그냥 지나치는 길이었으니까."
"사장님, 아무리 그러시더라도 바이어들을 한번 만나셔야."
"한성에서 알면 자네나 서울의 장 사장 입장이 난처해져. 나 혼자 시장 구경이나 하고 사우디를 떠나겠어."
"내가 장 사장한데는 따로 연락할테니까 걱정하지 말아."
"알겠습니다. 사장님."
마지못한 듯 조한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없는 게 서운합니다. 저한테 무슨 지시라도 해주시기를 바랐는데요."
눈을 치켜 뜬 김영남이 벽에 걸린 모스크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줄 것이 있을 때 전화하겠네. 그리고 자네의 마음은 가슴에 담아 넣고 있겠어. 언젠가 꼭 자네를 부를 거야."
"그때는 당장에 달려가겠습니다. 사장님, 그때를 기다리겠습니다."
"곧 오겠지."
"기운 내십시오, 사장님."
"내일은 내가 알아서 떠날테니까, 출발하기 전에 전화를 하겠네."
"사무실에 앉아 있겠습니다. 제 책상예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영남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에는 땀이 배어 나와 있었다.
리야드호텔의 아래층에는 필리핀 식당이 있었는데 주인이 한국사람이었다. 건설회사의 트럭 운전사로 사우디에 왔다가 계약기간이 끝나자 그대로 눌러앉은 그는 처음에는 보따리 장사를 했다고 했다. 서울의 남대문시장에서나 수출업체들의 재고로 남은 옷가지를 들여와 시장에서 팔았는데 2년쯤 고생을 하다가 시장 모퉁이에 조그만 가게 한곳을 얻었다고 했다. 사우디에서는 외국인 혼자서 영업행위를 할 수가 없다. 현지인 스폰서가 있어야 하는데 다른 중동의 산유국들도 대부분 그런 법규를 적용하고 있다. 강철규 사장이 만난 스폰서는 무하마드라는 노인이었다. 칠십이 다 된 무하마드는 강사장이 임대해 살고 있는 아파트 이웃에 살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노인이어서인지 신경통이 있었던 모양이었고 좋다는 약은 모조리 써 보았으나 기동이 불편해서 아파트밖에 나와 앉아만 있었는데 강사장은 매일 무하마드에게 안마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2년 동안 했다니까 강사장의 지성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지성스런 안마로 무하마드의 신경통이 나았는지 어쩐지는 강사장이 말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무하마드는 강사장의 스폰서가 되었고 알고 보니 엄청난 재산을 가진 알부자에다가 실력자들과 줄이 통하는 코란의 해설가였다.
강사장은 리야드호텔의 지하층 전체를 싼 값에 임대해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것이 무하마드의 영향력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금은 자신이 대었다는 것이다. 지하층은 연건평이 천 평이 넘었고 수퍼마켓 옆에다가 대형 의류 쇼핑센터, 그리고 식당이 두 곳이나 있었다. 금요일이 되면 수천 명의 외국인들이 리야드호텔 근처에 운집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그의 쇼핑센터와 식당이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노동자 출신인 강사장이 방글라데시 식당과 필리핀 식당 두 곳을 차려 놓았으므로 리야드에 있는 수만 명의 필리핀 인과 방글라데시 인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했다. 이제 강사장은 하루 매상이 백만 리알이 넘는 대형 체인의 사장이 되어 있었다. 사우디에 주저앉은 지 6년만의 일이었다.
김영남이 필리핀 식당으로 들어서자 안쪽에 앉아 있던 강철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그만 몸집에 검은 얼굴이었고 주름살이 많았으므로 얼핏 보면 필리핀 노동자 같은 인상이었다. 사십대 후반의 그는 처자식을 서울에 두고 이곳에서 독신자 생활을 하고 있다.
"어서 오십시오, 김 사장님."
흰 이를 드러내며 강철규가 웃었다.
"이거 올 때마다 폐가 많습니다."
아직 이른 저녁 시간이어서 식당 문을 열지도 않았다. 식당 주인과 둘이서 먼저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지난번에는 왜 들르지 않으셨습니까 ? 오셨다는 이야기를 가시고 나서야 들었습니다."
강철규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리야드에 올 때마다 그를 만나 식사를 했다. 아침과 저녁은 한국식당을 찾아가 먹을 수 있었지만 아침에는 식당문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운영하는 필리핀 식당에 가면 그와 함께 전복죽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빴습니다. 그래서 아침을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했지요. 며칠 있지도 않았구요."
"그렇더라도 연락이나 주시지."
종업원이 인삼차를 가져와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곱상한 필리핀 여자였다.
"여자 필요하시면 저애를 호텔로 보내 드리지요. 온 지 한 달밖에 안 됐습니다."
강철규가 그녀의 뒷모습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1백 불만 주세요. 곧 가격이 내리겠지만, 군침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생각 없습니다. 사흘밖에 되지 않아서요."
"나야 저애들, 그림의 떡이지요. 주인이 손을 대면 거느리기 힘이 들어요. 인심이나 쓰는 수밖에."
입맛을 다신 강철규가 김영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세영을 한성에 넘기셨다던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 시장에 소문이 짝 깔려있던데요."
김영남이 머리를 들었다.
"사실이에요. 난 세영에서 떠났습니다. 하지만 장일수 이사가 사장이 되었고 나머지 직원들은 모두 그대로 일하고 있지요. 사장만 그만둔 겁니다."
"김 사장이 세운 회사 아닙니까 ? 그럼 회사를 넘겼습니까 ? "
"그런 셈이지요."
"소문으로는 한성이 빚을 안고 그냥 인수했다던데."
"대충 맞는 말이군요."
찻잔을 든 김영남이 인삼차를 한모금 삼켰다. 소문은 아마 한성측에서 퍼뜨렸을 것이다. 한성은 그가 이쪽에서 영업활동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김영남은 그들에게 이쪽 지역에서 유사한 품목의 유사한 영업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 주었던 것이다.
"강사장께 말씀 드릴 것이 있는데요, 사업 이야깁니다."
찻잔을 내려놓은 김영남이 말하자 강철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다시 시작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지요. 듣자 하니 한성에게 회사를 뺏겼다는 소문도 떠돌고 해서요."
"시장에 도매상을 차리고 싶은데요, 섬유와 전자제품을 수입하는."
"도매상이라."
강철규가 턱을 들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김영남 뒤쪽에 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우선은 스폰서가 있어야겠고 다음은 자금입니다. 그 다음이 인력인데, 이것은 판매망이나 구매선이 확실하게 세워졌다는 전제 하에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판매망은 있습니다. 사우디 인인 제 친구가 장악해 줄 것이고, 그가 스폰서가 될 것이니 스폰서 자금도 준비가 됩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사람 문제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한테 도매상 일을 맡겨야겠는데 그것이."
"그것이 설마 저를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고."
"사장님이 하시는 것으로 해주십시오. 그 말씀을 드리려고 찾아온 것인데, 믿을 만한 분은 사장님밖에 없습니다.
"허어."
강철규가 입을 벌리면서 턱을 들었다.
"왜 하필 접니까 ? 나는 보시다시피 사업체가 여럿이어서요."
"첫째로, 사장님이 도매상을 차리신다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둘째로, 사장님은 이미 시장에서 가게를 해 보신 경험이 있지요. 저는 사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
"자본금은 제가 모두 내겠습니다."
"......"
"사장님은 관리만 해주시고 말입니다. 나도 도매상에 물품을 공급시키는 역활을 하겠습니다. 우선은 말이지요."
찻잔을 들어 마시려던 강철규가 입맛을 마시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검은 눈이 분주히 깜박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밀은 삼십대 초반으로 건장한 몸매의 사내이다. 신장이 1미터 90정도는 되었고 넓은 어깨엔 살집이 두툼하게 붙어 있어서 백두급 씨름 선수는 충분히 될 만한 체격이다. 무성하게 자란 콧수염을 김영남의 양쪽 볼에 비벼 대는 인사를 마친 타밀은 의자에 무거운 몸을 내려놓았다. 저녁 여덟시가 되어 있었다.
"타밀, 아버지 건강은 어때요 ? 차도가 있으신가 ? "
인사치레로 묻자 타밀이 머리를 저었다.
"지금 스위스에 계십니다. 맑은 공기가 건강에 좋다고 해서."
"스위스는 좋은 곳이지. 지금은 한창 스키철이겠군."
타밀의 아버지 핫산은 타밀과 비슷한 체격이었으나 혈압이 높았다. 재작년에 한번 쓰러진 이후로 타밀에게 사업을 인계하고 외국에 나가 있는 때가 많았다.
"김, 당신은 사업에 완전히 손을 뗀 겁니까 ? "
타밀이 조심스럽게 물었으므로 김영남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손을 떼었다면 내가 이렇게 올 리가 있겠소 ? 미스터 장이 이야기해 주지 않습디까 ? "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세영은 여전히 내가 장악하고 있어요. 미스터 장, 하, 모두가 나를 위해 일하고 있단 말이오."
낮에는 아즈물라와 자심을 만났으므로 이제 타밀만 만나면 일이 끝난다. 그러나 타밀은 다른 사람에 비교하여 가장 사업 경력이 짧다. 그런 만큼 자신감도 없고 의심도 많을 것이다.
"타밀, 내가 자금을 만드는 것은 제품의 품질을 떨어뜨린다는 뜻이 아니오. 만일 불안하다면 없던 일로 해도 좋습니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오. 다만 한성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해서."
"한성은 이런 일을 모릅니다. 생산을 하는 것은 세영이니까. 설명해 드렸을텐데."
타밀의 아버지 합산이라면 계약 금액을 더 내리고 서로 나눠 갖는 몫을 더 늘리자고 했을 것이다. 김영남은 소리죽여 숨을 내쉬었다.
"미스터 장이 사장으로 있으면서 계약조건을 지킬 것이오. 타밀, 그리고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나는 한성에게서 받을 것이 있어요."
"여기 8만 불 가져왔습니다. 나는 이런 일이 처음이어서."
타밀이 탁자 위에 두툼한 종이 봉투를 올려놓았다. 그의 검은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타밀, 당신은 나에게 8만 불을 주고 나서 얼마큼의 이득이 있는지 계산해 봤소 ? "
김영남이 묻자 그가 머리를 저었다.
"나는 당신이 12만 불을 깎아 주겠으니 8만 불을 현찰로 준비해 달라고 해서 그대로 했을 뿐입니다. 김."
"그러면 당신은 4만 불 이득을 본 것이 아니오."
"아니, 8만 불 손해 본 느낌이오. 당신에게 가져온 이 8만 불도 깎을 수 있었던 돈같이 생각되어서."
입맛을 다신 김영남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김영남이 입을 열었다.
"타밀, 우리는 지금 함께 한성의 돈을 빼내는 것이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낫습니다."
"......"
"한성은 우리 때문에 12만 불을 손해 보는 것이오. 그 12만 불을 당신이 4만, 내가 8만을 나눠 갖고."
"......"
"나는 한성에게 사기를 친 것입니다. 미스터 장과 하를 끌어들여서. 제품은 값을 깎아 주는 것과 상관없이 만들어집니다."
"......"
"당신은 나를, 그리고 미스터 장을 보호해 줘야 합니다. 만일 한성이 알게 되면 우리 양쪽 모두가 골치가 아파지니까."
타밀이 한성측에게 고자질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 선적이 되어야 할 제품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사내였다. 만일 그렇다면 장일수는 이번에 선적시킬 봄 제품에 걸레덩이를 넣든가 소매없는 셔츠를 넣어서 타밀의 도매상을 전쟁터로 만들어 놓고 회사를 그만둘 것이다.
"타밀,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오. 경험이 없어요, 당신처럼."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문 김영남이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죄책감은 없소. 그렇다고 자랑스럽다는 생각도 없고, 물론 당연한 일도 아니오."
타밀이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김영남은 말을 이었다.
"장사꾼은 친구가 없다고 들었소. 한쪽이 흥하면 다른 쪽엔 망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같은 업종이라면 더욱 그렇지. 이것은 전쟁이오. 회사 대 회사, 개인 대 개인의. 나는 죽지 않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오, 타밀."
"김. 나는 돈을 준비하기 전에 아버지와 상의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타밀의 검은 눈이 김영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돈을 마련해 가져온 겁니다. 나는 이 일에 익숙하지 못해요."
"고맙소, 타밀."
"천만에요, 김."
돈을 어쨌든 챙겨 넣어야 했으므로 김영남은 봉투에 담긴 지폐뭉치를 탁자 위에 쏟아 놓았다.
백불짜리 지폐뭉치였는데 헌 지폐가 많아서 부피가 두툼했다. 가운데에 고무줄을 감아 놓은 지폐뭉치를 들고 김영남은 한 장씩 세었다. 이제까지 아지크나 아즈물라, 자심한테서 돈을 받았을 때는 세어 보지도 않았었다.
"보스, 전화왔습니다."
하란이 수화기를 들고 조한수를 바라보았다.
"한성의 미스터 조인데요."
힐끗 그를 올려다본 조한수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조한수입니다."
"아, 조 차장, 나 조병학이요."
조병학과는 이제 이틀에 한 번꼴로 만나는 입장이 되었다. 싫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웬일이십니까 ? "
어제 오후에 한성의 지사에 찾아가 상반기 오더현황을 보고하고 돌아왔었다. 당분간은 귀찮은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조한수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조병학에게 잘 보이고 말 것도 없다. 못 보이면 귀국조차 당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의욕도 일어나지 않는 이 사우디 생활을 청산하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조 차장, 며칠 전에 공항 나간 적이 있소 ? "
대뜸 물어 오는 조병학의 말에 조한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며칠 전이라니요 ?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 공항에 나간 것이 어떻다고."
"아, 글쎄, 며칠 전에."
"공항에 샘플 찾으러 자주 가지 않습니까 ? 어제도 공항 근처에 다녀왔는데."
김영남을 마중하러 공항에 나간 것이 한성측의 눈에 띄었을지도 모른다. 도무지 놈들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를 알아내야 이쪽도 아귀가 맞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공항에서 당신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오. 누굴 영접하고 있었다던데, 한국인을 말이야."
"젠장, 한국사람이 어디 하나 둘인가 ?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 한국 놈인데."
조한수가 씹어 뱉듯이 말했다. 저쪽이 아직 확실한 것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와락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그 한국사람이 누구요 ? 조 차장."
기세를 떨어뜨리지 않고 조병학이 물었다.
"조 차장한테 귀한 손님이면 나한테도 VIP 아니요 ? "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 귀한 손님이 누구고 영접이 웬말이냔 말이오 ? 난 그런 일 없습니다."
조한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으므로 앞쪽에 앉은 하란과 알람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공항에 샘플 찾으러 갔다가 건설회사 이사라는 사람을 만나 차를 태워준 적이 있는데, 이름도 잊어 먹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일입니까 ? "
"아니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 "
느긋하게 말을 받는 조병학의 목소리를 듣자 조한수는 땀이 밴 수화기를 바꿔 쥐었다. 조병학이 말을 이었다.
"조 차장을 공항에서 본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냥 물어 본 거요. 혹시나 나도 아는 사람을 영접한 것이 아닌가 하고."
"우연히 만난 사람도 일일히 보고해야 한단 말입니까 ? 그리고 내가 누구를 만났다는 것이 그쪽의 신경을 건드린단 말이지요 ? "
"이것 봐요, 조 차장. 말을 가려서 해."
이제는 조병학의 말소리가 굵고 가라앉아 있었다.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제 우리는 같은 한성 식구이고 나는 당신의 상관이야. 나는 보고받을 권한이 있어."
조한수가 수화기를 쥔 채 앞쪽을 노려보았다. 어쩌면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이쪽에서 대뜸 흥분한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보고할 것이 없어요. 난 우연히 어떤 사람을 태워다 준 것뿐입니다. 그리고 조 부장님."
목청을 가라앉힌 조한수가 말을 이었다.
"한 식구라면 공항에서 누구를 영접했느냐 어쩌느냐 하고 묻지는 않을 겁니다. 중요한 일이면 어련히 보고했겠지 하고 믿었을 것이구요."
"서로 믿고 의지해야지, 안 그렇소 ? "
"그래야지요."
"본사에서도 훈령이 내려왔어요, 세영의 지사원들 사기 높여 주라고. 나는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는데 말이야."
"솔직히 어떻게 하루 아침에 달라집니까 ? 집에서 기르는 개도 주인이 바뀌면 금방 적응을 못하는 법입니다."
"하긴 그렇지, 우리 내일쯤 식사나 같이 합시다."
"그러지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조병학이 책상 앞에 서 있는 이병길 과장을 바라보며 뱉듯이 말했다.
"똥개 같은 놈."
"뭐라고 합니까 ? "
이병길이 궁금한 듯 상체를 구부렸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라는군. 건설회사의 이사라나."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병길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놈도 한통속입니다."
"김영남이 언제 서울을 출국했지 ? "
"서울을 출국한 날이 연말이더군요. 바시가 공항에서 본 날이 1월1일 입니다."
"망할 자식들."
"바시가 김영남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속아넘어갈 뻔했습니다."
조병학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고용원인 바시는 지난번에 김영남을 본 적이 있다. 그는 공항에서 조한수와 김영남을 보았고 그것을 조병학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놀란 조병학이 본사에 즉시 팩스를 보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본사는 본사대로 세관의 출국자 명단을 조회하는 소동을 부린 끝에 김영남의 출국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할 수 없다. 이제는 우리가 찾아야지."
조병학이 머리를 들었다.
"본사가 발칵 뒤집혀 있어. 김영남을 잡으라는 명령이야. 지금부터 호텔을 뒤져, 우선 1급호텔부터."
"잡아서 어떻게 합니까 ? "
"본사의 박 이사와 통화를 하게 하고, 그 다음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옆에 붙어 있어야지. 장난 치지 못하게 해야 돼."
이병길이 입맛을 다셨다.
"부장님, 조한수도 한통속 아닙니까 ? 그놈도 감시해야 할 것 같은 데요 ? "
"며칠 간이야. 이제 그쪽의 업무도 대충 파악이 끝나가니까 그놈을 귀국시켜 버려야겠어."
"결국 김영남이가 본색을 드러냈군요. 어쩐지 순순히 회사를 내어놓았다고 생각이 들더니."
"개자식, 이미 꽁지빠진 닭이고 이빨없는 개야. 바이어들에게도 김영남을 조심하도록 주의를 시켜줘."
"어쨌든 제다에 있다면 손바닥 안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곧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병길이 몸을 돌려 나갔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조병학은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반년쯤 전에는 김영남과 손발을 맞추어 박재호를 쫓아내는 작전을 벌렸었다. 그런데 지금은 김영남이 박재호와 똑같은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조병학은 이 일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경우가 흔했는데 엄밀히 말한다면 이 세계에서 친구란 없는 것이다. 오직 득과 실로 계산되어서 관계를 맺었다가도 서슴없이 등을 돌리는 세계이다. 인연이나 인정에 집착하는 사람은 머리깎고 절에 들어가야 마땅한 것이다.
보잉 707이나 747기종은 엔진이 양쪽 날개에 각각 두 개씩 달려 있어서 믿음직스러웠다. 엔진 한 개가 고장이 나도 나머지 세 개로 운항할 수 있을 것같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더글라스 회사 제품의 DC 기종에서 후익부분에 엔진이 달린 엔진 세 개짜리 기종이 있다. 그 기종을 보면 웬지 뒷부분이 무거워 보여서 김영남은 불안했다. 김영남은 창가에 앉아 아래쪽에 한없이 펼쳐진 대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로도 보이지 않고 마을도 없다. 탁한 모래색의 대륙이 태양열에 말라가고 있을 뿐이다. 비행기의 날개가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3만 피트의 고공에 떠 있는 것이므로 바깥은 영하 30도의 기온일 것이다. 비행기는 에어버스 300이어서 양쪽 날개에 거대한 엔진 하나씩을 달고 있었다.
내부가 넓은 신형기종이었으나 엔진이 두 개밖에 없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행기가 점점 고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느껴졌다. 꽤 거친 조종사인 모양으로 고도를 낮추는 각도가 높은 편이었다. 날개 끝에 붙은 보조익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기내방송이 울렸다. 먼저 아랍어의 방송이 있고 나서 영어가 나왔다. 십분 후에 쿠웨이트 공항에 착륙한다는 내용이었다. 김영남은 좌석벨트를 매었다. 옆좌석에 앉은 아랍 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그러나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이었다. 팔걸이를 움켜쥔 그의 손등에 힘줄이 솟아올라 있었다.
"상당히 거친 조종사요. 그렇지 않소 ? "
김영남의 물음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였는데 쿠웨이트 인이라고 했다.
"아마 조종사는 이집트 인일 겁니다. 틀림없어요."
그가 던지듯 말했다.
"놈들은 전투기를 몰듯이 여객기를 조종한단 말입니다."
아랍권의 항공사에 이집트 공군출신의 조종사가 상당히 취업해 있었다. 자주 중동지역을 여행했던 김영남은 유럽 출신같이 보이는 조종사들을 볼 수가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이 나이가 너무 들었거나 아니면 젊었다. 오히려 이집트인 조종사보다 덜 믿음직스러웠는데 옆에 앉은 쿠웨이트 인은 이집트 인을 불신하는 모양이었다.
비행기가 다시 고도를 뚝 떨어뜨렸으므로 쿠웨이트 인은 입을 다물고 온몸을 굳혔다. 불안하기는 김영남도 마찬가지였다. 착륙할 때와 이륙할 때가 제일 위험하고 실제로 비행기에 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그때인 것이다.
돌덩이가 섞인 모래 언덕이 쑥쑥 솟아오르듯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불모지대였다. 그러나 사막 군데군데에 세워진 철탑들과 그 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와 불꽃이 보였다. 석유다. 이곳은 버려진 땅이 아니라 선택받은 땅인 것이다. 이제는 양을 치는 베드윈 족도 도요타웨건에 양떼를 싣고 옮겨 다닌다. 정부에서 무상으로 지어 준 주택을 거들떠보지 않는 유목민도 많다고 들었다. 오직 쿠웨이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엄청난 혜택을 국가로부터 받는 것이다.
쿠웅하는 소리가 울려 왔는데 바퀴가 동체에서 빠져 나오는 소리였다. 곧 착륙할 모양이었다.
"미스터 장한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정보다 일찍 오셨군요."
시내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말라피가 그를 바라보았다.
"사우디 일은 잘 끝났습니까 ? "
"잘되었어, 말라피. 친구들이 도와주어서."
"쿠웨이트도 잘될 겁니다. 여긴 사우디하고는 다르니까."
핸들을 잡은 말라피가 앞쪽을 응시한 채 말했다. 본넷 중앙에 둥근원을 삼각 칼날로 나눈 것 같은 벤츠마크가 붙여져 있다. 그가 운전하고 있는 것은 벤츠 500이었다.
"김, 난 세영의 지사장을 그만두겠습니다. 다른 일을 해볼까 해서요."
운전에 열중한 척 그는 김영남의 시선을 받지 않았다.
"김이 세영에서 떠났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연입니다."
"미스터 장한테는 이야기했나 ? "
"아니, 아직. 당신이 오신다길래 당신한테 직접 말하려고 기다렸습니다."
이제는 이쪽에서 말리고 자시고 할 입장도 아니다. 하지만 새로 시작되는 장일수의 위상에 타격이 될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한성이 평가하는 장일수의 영향력이 낮아지게 된다.
"말라피,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 거야 ? "
"항공기 부품사업을 할 작정입니다. 당신도. 잘 아시다시피 나는 그쪽 일에 관심이......"
"그건 알고 있어, 말라피."
그는 미국에서 항공기 제작에 관한 공부를 하고 귀국해서는 항공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목재상 일을 돕다가 세영의 지사장으로 독립해 나왔던 것이다. 말라피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소개해 주더군요. 공군의 항공기 부품을 납품하려고 합니다."
"액수가 크겠군."
"처음은 작게 시작하겠지요. 하지만 액수는 꽤 클 겁니다."
"세영의 일은 마무리 잘되겠지 ? "
"압둘라와 카림이 사무실에 남아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실제 업무는 그들이 다 하지 않습니까 ? "
"......"
"쿠웨이트에 얼마나 머무실 작정입니까 ? "
"아직은 몰라, 말라피."
김영남이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1주일이 될지, 1년이 될지. 나는 당분간 이곳을 근거지로 활동할 생각이야."
"잘 생각하셨습니다."
말라피가 머리를 끄덕이며 그에게 웃는 얼굴을 보였다.
"여기서 푹 쉬시지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
"고맙군."
"한성에서 물어 보면 오신 걸 비밀로 하겠습니다."
"......."
"저야 상관없지만 그쪽이 오해할 것 같아서요."
말라피가 어디까지 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장일수한테서 대강의 사연은 들었을 것이다. 장일수의 설명이 없었더라도 말라피와는 형제간 같은 사이이다. 그가 독립하려고 할 때 그에게 세영의 지사일을 맡겨 일을 가르쳐 준 김영남이었다. 김영남이 머리를 들었다.
"고마워, 말라피. 당분간 그쪽에는 비밀로 해줘, 직원들한테도."
"염려 마십시오. 나만 알고 있습니다. 미스터 장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말라피가 머리를 돌려 김영남을 바라보았다.
"김, 다시 무슨 사업을 하실 작정입니까 ? "
"생각 중이야."
"미스터 장이나 하도 곧 세영을 나오겠군요 ? 당신과 합류하려고."
"아직 그런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 말라피, 난 그들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네."
차는 이제 쿠웨이트 시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여직원이 방을 나가자 박남표가 머리를 들었다.
굳어진 얼굴이었다.
"나는 김영남 씨가 쉬기 위해 사우디에 들어갔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장 사장. 그것을 믿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잠자코 바라보고 있는 장일수를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사우디에 갔다면 틀림없이 바이어들을 만났을 것이고 만났으면 사업 이야기를 할 겁니다. 그리고 그 사업은 한성과 세영을 깨뜨리는 일이지요, 왜냐하면 우리 오더를 찢어갈테니까."
"나아 참, 박 이사님도."
장일수가 입맛을 다셨다.
"딱한 말이지만 집도 절도 없는 김 사장님한테 어느 눈먼 바이어가 오더를 준단 말입니까 ? 더구나 바이어들은 김 사장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서로 친하니까. 모두 김 사장과 10년 가깝게 거래한 사람들 아니오 ? "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장일수가 머리를 저었다.
"그 사람들, 철저한 장사꾼입니다. 김 사장님이 안돼 보여서 몇백 불 여비는 주어 보낼지언정 오더는 안합니다. 지금 커미션에이전트 생각을 하시는 모양인데 어느 미친놈이 한다리 걸쳐서 수수료 떼고 오더를 한단 말입니까 ? "
"......"
"나는 김 사장님이 출국하신 것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으니까 금방 이해가 가더라구요."
"이해가 가다니 ? "
"그 양반 갈 데가 어디 있습니까 ? 십몇 년 간 그쪽만 돌아다녔는데, 그래도 당신 알아주는 그곳이 좋았을 겁니다."
"참으로 눈물겨운 말씀이구만."
박남표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입술 한쪽으로만 웃었다.
"김영남이 어떤 놈인데, 장 사장도 겪어 보았겠지만 내가 연륜이 더 깊어요. 그놈은 감상에 젖어서 할 일 없이 배회할 놈이 아니오.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을 겁니다."
장일수의 시선이 똑바로 그의 얼굴을 향해졌다.
"김 사장님은 한때 부하였던 사람의 등을 쳐서, 먹고 살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더 잘 알지요."
"......"
"그리고 믿고 있는 사람을 배신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요 ? "
박남표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글쎄, 그것은 다시 생각해 봐야 되지 않을까 ? "
"생각하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박 이사님. 김 사장님이 원사를 빼돌린 것이 아니니까."
"......"
"그것도 내가 잘 압니다."
"다행히 지금까지 김 사장이 바이어를 만나고 다닌다는 정보는 업어요. 하지만 말없이 출국했다는 것이."
박남표의 기세가 다소 누그러져 있는 것이 장일수의 강경한 태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장일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오더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연초에 보고한 실적은 달성해 낼테니까."
"그놈, 장 사장한테 그 동안 전화 한 통도 안했단 말이오 ? 무정한 자식이네."
커피잔을 들면서 박남표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사우디로 출국한 것이 연말이었어요. 오늘이 15일이니까 보름이 되었는데 꼼짝않고 사우디에 쑤셔 박혀 있는 모양이야. 우리 직원들의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
"아니면 다른 나라로 날아갔거나."
"그리스나 프랑스 쪽으로 가셨을지도 모르지요. 남쪽 바닷가로."
"흥"
박남표가 어깨를 한 차례 치켜올렸다가 내렸다.
"그랬으면 저도 좋고 우리도 좋을텐데 말이오. 하지만 어차피 우리가 알게 된 이상 저도 어쩔 수가 없겠지."
"......"
"장 사장님이 모르셨다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그렇지만 젯다의 조 차장하고는 연락을 한 모양인데, 공항까지 영접을 나간 걸 보면."
"글쎄 나도 그 말을 듣고 놀랐습니다. 하지만 자연스런 일 아닙니까 ? 오히려 안 만난다면 그것이 이상하지."
"문제는 조 차장이 그 일을 숨긴 것이오. 김영남이를 만난 사실을."
장일수가 와락 이맛살을 찌푸리며 박남표를 쏘아보았다.
"그 양반이 무슨 간첩이나 됩니까 ? 간첩신고를 해서 포상금을 타라고 해요 ? 내가 조 차장이었더라도 연락이 오면 차 가지고 나갔을 것이고 한성과 복잡한 관계를 생각하고는 그냥 덮어두었을 겁니다. 뭐,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세영지사는 다음 달 내로 한성지사와 같이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박남표가 상체를 세우고 말을 이었다.
"조 차장의 업무 인계인수가 끝나면 귀국시키도록 해요. 차장급이 그쪽에서는 필요없으니까."
장일수가 퍼뜩 눈을 치켜 떴다가 침을 삼키고는 머리를 돌렸다. 커피 잔을 내려놓은 박남표가 말을 이었다.
"오더에 이상이 있으면 안 됩니다. 장 사장님. 내 말을 심각하게 받아 들이세요."
소파의 한쪽으로 시선을 준 채 장일수는 머리를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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