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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故試軍器少監鄭公墓誌銘
公姓鄭字世貴草溪人左僕射叅知政事贈諡貞
簡公諱文之子弘文廣學推誠賛化功臣守大尉門下侍中
光儒侯諱倍傑之孫公始以祖蔭受軄及 睿宗殿試遂得決
耕出佐平州 仁考卽位除國學直學累遷以閤門祗侯出知昇
平入除禮賓注簿兼堂後官拜閤門祗侯以尙食奉御出按春
州道 今上御宇除試戶部員外郎以礼部郎中出守尙州入歷戶礼
部員外郎除試軍器少監賜紫金魚袋天德四年壬申十二月晦日
卒年六十六甲戌五月十四日丙寅葬于大法雲山東北麓
公文學淸儉有祖考風非公事不迹公卿閾不以産業介意家
無所儲唯書床天然木倚子耳甞授外守諫議大夫金子儀上
箚子曰復卿識明志高行德純淸白勤儉衆所不及俯念爲
人之不可多得不離文學淸近以備 顧問則其裨補
聖政不爲無益且子儀時之賢大夫其薦若此公之爲人可知己
娶金氏生子男四女二長曰永圖以祖蔭加良醞令時爲麗澤
齋諭試殿中内給事吉景安之壻次德丘依天台落髪次永
忠幼未受軄次曉胤亦依天台一女適海陽縣尉良醞令權安
國一未嫁其後賢子孫之相繼曷可涯耶銘曰
易稱積善 必有餘慶 ▨儒功德 與國無竟
其在後嗣 庸虛必盛 況公▨達 祖考遺行
宜當大位 裨補國政 時巧行直 夏畦不病
終末大容 圓鑿方柄 然置自然 樂天知命
所憂非貧 所寶唯淸 詩書自娯 不頽家聲
貞元二年甲戌五月 日 書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번역문
■고려(高麗)의 돌아가신 시군기소감(試軍器少監) 정공(鄭公)묘지명
공의 성은 정씨(鄭氏)이고, 이름은 복경(復卿)이며, 자는 세귀(世貴)로, 초계(草溪) 사람이다.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 叅知政事)로 추증된 시호가 정간공(貞簡公)인 문(文)의 아들이며,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이자 수태위 문하시중(守太尉 門下侍中)인 광유후(光儒侯) 배걸(倍傑)의 손자이다.
공은 처음 조음(祖蔭)으로 관직을 받았다. 예종(睿宗) 때 전시(殿試)에서 드디어 과거에 급제하고, (1)평주(平州)로 나가 다스리게 되었다.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2)국학직학(國學直學)에 임명되고 거듭 승진하여 (3)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4)승평군(昇平郡)의 지사가 되어 나갔다.
들어와서는 (5)예빈(6)주부 겸 (7)당후관(禮賓注簿 兼 堂後官)이 되었다가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제수받고, (8)상식봉어(尙食奉御)로서 (9)춘주도안찰사(春州道按察使)가 되어 나갔다.
지금의 임금<毅宗>이 즉위하자 (10)시호부원외랑(試戶部員外郞)이 되고 (11)예부낭중(禮部郞中)으로 (12)상주(尙州)의 수령이 되어 나갔으며 들어와서는 호부(戶部)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거쳐 (13)시군기소감(試軍器少監)이 되고 (14)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15)천덕(天德) 4년 임신년(의종 6, 1152) 12월 그믐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66세이다.
갑술년(의종 8, 1154) 5월 14일 병인일에 대법운산(大法雲山) 동북쪽 기슭에 장례지냈다.
공은 학문을 좋아하고 맑고 검소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풍채가 있었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공경(公卿)의 문지방을 넘지 않았다. 재산을 모으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아 집안에 재물을 쌓아 둔 것이 없었고, 오직 책상과 천연 그대로의 나무 의자뿐이었다.
일찍이 지방직을 제수받으니 (16)간의대부(諫議大夫) (17)김자의(金子儀)가 글[箚子]을 올려 말하였다. “복경은 식견이 밝고 뜻이 높습니다. 행동은 방정하고 덕은 순수하고 청렴하며 부지런하며 검소하니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보다 많이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18)문한직과 (19)청요직, (20)근시직과 같이 가까이 두시고 임금의 고문에 대비하게 하면 성스러운 정치를 도와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또 자의(子儀) 당시의 현명한 대부(大夫)들이 모두 이와 같이 천거하였으니, 공의 사람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은 김씨(金氏)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큰아들 영도(永圖)는 조음(祖蔭)으로 양온령(良醞令)에 임명되어 지금 (21)여택재유(麗澤齋諭)로 있고, (22)시전중내급사(試殿中內給事) 길경안(吉景安)의 사위이다. 2남 덕구(德丘)는 천태종(天台宗)에 의탁하여 승려가 되었다. 3남 영충(永忠)은 어려서 아직 관직을 받지 못했다. 4남 효윤(曉胤) 역시 천태종의 승려가 되었다. 큰딸은 해양현위 양온령(海陽縣尉 良醞令) 권안국(權安國)에게 시집갔고, 다른 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그 뒤를 어진 자손들이 서로 이으니 어찌 끝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명(銘)하여 이른다.
『주역』에서 말하기를 선(善)을 쌓으면 반드시 복이 있다고 하였으니
□선비(□儒)의 공덕은 나라와 더불어 끝이 없으리라.
그 후손은 재능과 지략이 없어도 반드시 성할 것인데
하물며 공과 같이 총명하여 통달하고 부조(父祖)의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에게 있어서랴.
당연히 큰 자리에 올라 나라 일을 돕고
적절한 계책으로 강하고 굳어서 힘들게 일하여도 병이 나지 않았다.
종말을 대범하게 맞는다는 것은 둥근 구멍에 모난 초꽂이처럼 서로 잘 맞지 않는 일이지만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니 천명을 분명히 알아 처지가 즐겁기만 하네.
근심한 것은 가난이 아니오, 보배로 삼은 것은 오직 맑음이라.
시(詩)와 서(書)로 스스로 즐거워하였으니 가문의 명성은 허물어지지 않으리라.
정원(貞元) 2년 갑술년(의종 8, 1154) 5월 일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1)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도 평산군 지역
(2)국학직학(國學直學) : 국자감, 국학, 성균관에 배속된 종9품 관직
(3)합문지후(閤門祗候) : 합문은 제례나 의식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지후는 정 7품 관직
(4)승평군(昇平郡) : 지금의 전라도 순천지방이며 고려의 관리들은 7품의 벼 슬에 이르면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5)예빈(예빈=禮賓寺) : 고려시대 빈객은 연향을 맡아보던 부서
(6)주부(注簿) : 예빈시에 배속된 6품~8품 사이의 관원
(7)당후관(堂後官) : 왕명출납과 군사기밀을 취급하는 중추원에 배속된 정7품 의 관직
(8)상식봉어(尙食奉御) : 관직의 이름
(9)춘주도안찰사(春州道按察使) : 강원 영서 북부 지방을 관할하는 춘주도의 지방장관
(10)시호부원외랑(試戶部員外郞) : 상서성중 호부에 배속된 정6품의 벼슬
(11)예부낭중(禮部郞中) : 상서성 예부에 배속된 정5품 벼슬로 정랑 직랑 등 으로 불림
(12)상주(尙州) : 지금의 경상도 상주
(13)시군기소감(試軍器少監) : 병부에 속하여 병장기 등을 제조하던 부서의 4 품~5품의 관원
(14)자금어대(紫金魚袋) : 벼슬이 5품에 이르렀을 때 덕망있는 신하에게 내리 던 복식
(15)해설 : 고려는 불교 국가로 매장 시 불교식 풍습을 많이 따랐는데 죽은 이의 유골을 화장해서 임시로 보관했다가 길지를 잡아 추후에 정식으로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16)간의대부(諫議大夫) : 좌우간의대부 또는 좌우사의대부 또는 사의대부 등 으로 불렸으며 품계는 종3품부터 종4품까지 변동이 있었고 주로 언관의 역할을 맡았다
(17)김자의(金子儀) : 1150년 우산기상시 예부상서등을 역임하였으며 성품이 강직하고, 직언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당시 김자의의 말은 곧 조정의 기준 이 되었다고 하며, 임금 조차도 매우 공경했으며 두주불사의 주량으로도 알려져 있다.
(18)문한직 : 임금 곁에서 문필(文筆)에 관한 일을 보좌하는 역할
(19)청요직 : 청환(淸宦)과 요직(要職)
(20)근시직 :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관원
(21)여택재유(麗澤齋諭) : 국자감에 설치한 7재 가운데 주역을 전문적으로 공 부하던 분과가 여택재이며 여택재유는 여택재를 관리하는 관원이다
(22)시전중내급사(試殿中內給事) : 종친들에게 공문이나 각종 통지를 관장하 던 전중성의 종 6품 관원
첫댓글 매우 올리시는글에...공부하는 학생으로 읽겠습니다.
연구를 좀 강연해 주세요.